장로부부 영성수련회 롬 16:3~4 기억에 남는 사람
장로님들 편히 주무셨습니까? 저는 1995년 10월에 울진지방회 금천교회에서 처음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목회를 시작한 지 만으로 28년이 지났습니다. 삼남에서만 목회했으니 메이드 인 삼남입니다. 제가 1.5톤 트럭에 짐을 싣고 금천교회에 부임하니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권사님들이 나와 있었습니다. 무거운 책 박스도 있는데 어떻게 짐을 옮기나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게 웬걸요?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권사님들은 헬스로 이두박근을 키운 트레이너 못지않고 무거운 짐을 가볍게 옮겼습니다. 제가 부임한 가을부터 교인들의 환갑잔치가 열렸습니다. 제가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우면 권사님들이 너무 흐뭇해하셨습니다. 저는 교인들의 칠순 잔치를 마치고 만 10년 2개월이 된 2005년에 12월 31일에 경북동지방회 창대교회로 부임했습니다.
경북동지방회도 훌륭한 장로님들 가정이 많이 있지만, 첫 목회지에서 만난 장로님과 권사님 가정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생신날 장로님 댁에 가면 권사님이 버선발로 뛰어나와서, ‘우리 목자님 오셨네!’ 손뼉 치며 환영해 주었습니다. 안방에 들어가면 상다리가 휘어지게 산해진미를 차려놨습니다. 장로님은 저를 상석으로 앉히고 자녀들도 한 상에 빙 둘러앉아 예배드렸습니다. 장로님 가정은 아들 넷과 딸 넷을 둔 다복한 가정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일찍 결혼하던 시절이라 저는 장로님의 맏손자와 나이가 같았지만, 주의 종으로 깍듯하게 예우해 주었습니다. 가을에는 향이 그윽한 자연산 송이를 가져다주셨습니다. 송이를 둘둘 만 신문지도 향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봄에는 노지에서 비바람을 버틴 시금치를 가져오셨습니다. 그렇게 고소한 시금치는 생전 처음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신대원을 졸업하지 않고도 담임으로 파송되던 시절이었습니다. 제가 부임 할 때 이삿짐 비용도 장로님이 부담하셨는데, 대학원 등록금도 자녀들에게 모금해 주셨습니다. 저는 장로님으로부터 한량없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는 안수받고 도시로 떠나는 시절이었지만, 이분들과 목회하다 장례를 치러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큰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니 자녀 교육을 위해 포항에 있는 개척교회로 이임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포항에 있는 상가교회에서 힘들게 목회하고 있을 때 장로님 따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아버지가 보자고 하십니다.’ 저는 후포 오차드 요양병원에 찾아갔습니다. 장로님은 침상에 누워계셨습니다. 장로님은 저를 보자마자 ‘목사님, 오셨니껴?’라고 반갑게 인사하셨습니다. 저는 10여 년이 흘렀는데도 장로님의 사랑이 물씬 느껴졌습니다. 장로님은 ‘목사님, 내가 뭐 잘못한 것 있니껴?’라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아닙니다. 장로님, 저를 얼마나 아껴주셨는데요. 그래서 금천교회 역사상 가장 오래 있었잖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장로님은 안도의 한숨을 쉬셨습니다. 또 몇 년이 흘렀습니다. 장로님 따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아버지가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라며 울먹였습니다. 오차도 장례식장에 가니 자녀들이 저를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기도를 드리고 식사하는데 울진 대게가 식탁에 올라왔습니다. 예수님도 마구간에서 나셨지만, 부자의 무덤에 안장되셨잖아요. 장로님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셨지만, 자녀들이 하늘나라 가시는 길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문상을 마치니 여비까지 쥐여주었습니다. 저는 장로회 부부 영성수련회를 준비하면서 장로님이 몇 살에 돌아가셨는지 물었습니다. 따님 권사님은 ‘어머니는 89세에 가셨고, 아버지는 99세에 하늘나라에 가셨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울진지방회 금천교회를 개척하면서 수십 년간 섬긴 장로님 가정은 장수의 복을 받으셨습니다. 저를 끔찍이 아껴준 권사님은 엄명순 권사님이고, 속이 깊은 장로님은 임권식 장로님이십니다. 저는 그때부터 임 씨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회기 장로회장은 임병집 장로님이시고 총무는 임용해 장로님이시더 라고요. 거기다 여장로회 회장인 임율라 장로님도 계시네요.
저는 임 장로님과 엄 권사님이 초기 목회하면서 기억에 남는 사람이었는데, 사도 바울에게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기억에 남는 사람이었습니다. 남편인 아굴라와 아내인 브리스길라는 신약성경에 6번 나옵니다. 바늘 가는 데 실 간다고 6번 모두 부부가 함께 이름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18장 2~3절. 남편의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 18장 18절. 아내의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 18장 26절. 아내의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 로마서 16장 3절. 아내의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 고린도전서 16장 19절. 남편의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9절. 아내의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 바울서신에는 브리스가로 사도행전에는 브리스길라라고 나옵니다(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346쪽).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6번 나오는 중에 남편의 이름이 2번, 아내의 이름이 4번 먼저 나옵니다. 고대 세계에서 남편은 사람이고 아내는 재산이었잖아요. 성경학자들은 아내의 이름을 먼저 언급한 걸로 보면 아내가 사회적 지위가 높았던지 먼저 예수님을 만나 회심했든지 아니면 문체의 변화를 주기 위해서 이름 순서를 바꾸었다고 추정하였습니다(ESV 스터디, 2,229쪽).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염소 털이나 가죽을 자르고 꿰매서 천막을 만들었습니다. 천막은 로마 군인들의 막사로 사용되었는데, 로마 시대에는 유망한 사업이었습니다. 사업가인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사도 바울을 만나면서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세계적인 도시인 로마에서 사업을 하다가 로마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유대인을 로마에서 추방하자 무역의 중심지인 고린도로 이주하였습니다(행18:2).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고린도에서 자리를 잡을 즈음에 사도 바울이 아테네에서 전도하다 음란의 중심지인 고린도를 전도하러 왔습니다. 고린도는 항구도시라서 무역의 중심지이자 음란의 중심지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미국으로 이민가면 코리아타운을 찾아가듯이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도착하여 유대인 공동체를 찾아갔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 공동체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났습니다. 대화하다 보니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사도 바울과 직업도 같았고, 신앙도 같았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사도 바울을 집으로 초청하여 평일에는 천막을 만들었고 안식일에는 전도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속담 중에 “명장 밑에 약졸 없다.”라고 하잖아요. 용감한 장군 밑에 용감한 부하가 있다는 말이지요. 사도 바울에게는 바나바와 실라와 디모데와 누가와 디도가 있었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있었습니다. 로마서 16장은 사도 바울이 복음의 동역자들에게 인사와 감사를 전하는 본문입니다. 이 중 16장 3~4절에서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문안’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아스파조마이(ἀσπάζομαι)’인데, ‘안부를 전하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경의를 표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명령형 동사를 사용해 로마 교회에 목숨을 구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에게 경의를 표하라고 당부했습니다(무디주석, 2,020쪽). 바울은 2차 선교여행 때 고린도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처음 만났고, 3차 선교여행 때 에베소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동역하였습니다(행18:18). 바울은 에베소에서 가장 오랫동안 2년에서 3년 동안이나 목회했습니다(행19:10, 20:31, 신약개론, 363쪽).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선교하면서부터 아데미 여신상이 팔리지 않자, 데메드리오라는 은세공업자가 영업을 방해했다며 원형극장에서 소동을 일으켰습니다(행19:23~41). 정확히 어떤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목숨을 걸고 사도 바울을 지킨 모양이었습니다(IVP 성경주석, 1,592쪽). 사도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으면서 사도 바울을 지켰다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죽고 유대인들에 대한 추방령이 해제되자 다시 로마로 돌아가 로마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LABC, 458쪽). 스포츠도 팀워크가 중요하듯이 교회도 팀워크가 중요합니다. 스타플레이어 혼자서 팀을 우승시킬 수 없듯이 목사 혼자서 교회를 부흥시킬 수 없습니다. 장로님들이 힘을 합해주셔야 부흥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목사님은 장로님들이 지키시길 바랍니다.
저에게는 임 장로님 엄 권사님이 기억에 남는 사람이고, 사도 바울에게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기억에 남는 사람이었는데, 여러분은 예수님에게 기억에 남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어로 유명한은 ‘famous’라고 하고 반대로 악명 높은 은 ‘infamous’라고 합니다. 장로교 목사님들은 ‘내가 그 장로님 때문에 못살겠어!’라고 말하더라고요. 장로교 목사님들은 장로님을 악명 높은 사람으로 기억하더라고요. 우리 감리교 목사님들은 ‘나는 그 장로님이 계셔서 너무 든든해!’라고 말하더라고요. 감리교 목사님들은 장로님을 유명한 사람으로 기억하더라고요. 장로님들은 담임 목사님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 좋은 쪽으로 기억에 남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선지자 노릇 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한 사람들에게 ‘내가 너를 도무지 모른다. 이 불법을 진행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거절하셨습니다(마7:23). 장로님들은 교회 일도 지방회 일도 연회 일도 본부 일도 하시잖아요. 아무리 주님의 일이라도 불법을 하면 주님이 모른다고 부인하십니다.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불법으로 일하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가 첫사랑을 간직하고 있을 때는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고 또 네가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않은 것을 안다’라고 칭찬하셨습니다(계2:2~3). 장로님들은 그냥 되지 않잖아요? 일당백의 용사잖아요. 장로님이 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리셨겠습니까? 장로님들이 참고 인내한다면 교회가 평안할 겁니다. 일 안 하는 사람과는 갈등이 없지만, 일하기 때문에 반목이 생기잖아요. 장로님들의 연세는 대부분 인생의 가을이나 겨울이 되셨습니다. 사실 날보다 하늘나라에 가실 날이 가깝잖아요. 좋은 쪽으로 기억에 남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잘 마무리한다를 영어로 ‘피니쉬 웰(Finish Well)’이라고 합니다. 끝이 좋으면 다 좋듯이 좋은 쪽으로 기억에 남으시는 장로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