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사 -
☆ 2014년 가해 2월9일 (녹) 연중 제5일
[청주] 세상의 소금과 빛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이사 58, 7 - 10
† 제2독서 : 1코린 2, 1 - 5
† 복음 : 마태 5, 13 - 16
오늘 전례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다. 이 진리를 예수님께서는
오늘 미사의 복음에서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각자는 이러한 진리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는지 진지하게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 안에 살면서도 세상의 논리에 현혹되지
않고 복음 정신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간절하게 청합시다.
★ 참된 단식은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오갈 데 없는 떠돌이를
받아 주고, 헐벗은 이를 덮어 주며 보호하는 것이다. 그리하면 이스라엘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며 상처가 아물리라(제1독서).
★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의 신자들에게 자신의 지혜와 언변으로 그들을
설득하려 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그의 복음 선포는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고,
신자들의 믿음이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다(제2독서).
★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이며 빛이라고
말씀하신다. 소금은 제맛을 잃으면 버려질 것이며, 빛은 모든 사람을
비추어야 한다. 이처럼 우리의 착한 행실이 사람들을 비추어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해야 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아주 오래전에 일본의 작가 미쓰하라 유리의 『길』이라는 시집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짧고 쉬운 시들이 아름답고 뜻이 깊어 무척 인상적
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권 사 두고 보좌 신부로서 사목지에서 만나는
청소년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간 절판되어 더 구할 수
없어서 아쉬웠는데, 최근 한 신자에게서 이 책을 선물받고 참으로
반가웠습니다. 이 시집에는 ‘길을 만든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맨 처음 길을 걸은 사람 훌륭해/ 험한 길 처음으로 걸은 사람/
이름을 외울 가치가 있을 만큼 훌륭해/ 그 오롯한 자세/ 정말 아름다워/
허나 그 뒤이어/ 이름 따위 안 남을 줄 알면서도/
꾸준히 길을 밟아 다지며 걸어간 이들의/ 소박한 걸음/
뒤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니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복음의 요구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자신과 가정을 돌보기에도 벅찬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가르침이
가슴 깊이 와 닿을 수 없는 이상일 것으로 여기곤 합니다.
그러나 위의 짧은 시가 노래하듯, 주님의 뜻을 실행하는 삶은 누구에게나
자기 나름의 처지에서 가능합니다. 어떤 이가 먼저 길을 내는 몫을 맡았다면
다른 이는 그 길을 걸어가고 따라가 줌으로써 그 길을 넓히고 다지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실 일들, 우리를 통해 하실
일들에 미리 제한을 두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우리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도록 이끄시는 주님의 손길에 신뢰하고 감사하며
응답하는 것이 참행복의 길일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세상의 소금과 빛 |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2월9일 연중5주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 마태 5,13-16
세상의 소금과 빛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죄도 없으신 분이 죄 많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어떤이가 “빛으로 오시는 당신은 제가 어둠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하였듯이 주님께서는 우리의 어둠을 비추려 빛(“나는 세상의 빛이다.”
(요한8,12))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시간 빛과 소금에 대해 묵상하는
가운데 은총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마태5,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5,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이미 빛이요, 소금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1테살 5,4-5).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에페5,8).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로마13,12).
이미 소금이요, 빛이거늘 짠 맛을 내지 못하고 밝게 비추지 못한 삶을
살았다면 그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소금이 짠 맛을 내고, 빛이 빛을
내는 것은 자연의 이치인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이미 존재의 이유를
잃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모시지 못하면
짠맛을 잃은 소금과 다를 바 없어 결국은 버림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금이 되고, 빛을 비추어 주는 역할은 무엇입니까? 오늘
복음을 통해 비추어진 모습은 “착한 행실”입니다. 의도적인 착한 행실이
아니라 삶에 젖어있는 나의 모습이 다른 이의 모범과 표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구체적 실현이시기 때문입니다.
착한 행실을 두 가지 축면에서 볼 수 있겠습니다. 첫째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대로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58,8).입니다.
우리본당이 첫째주일을 ‘이웃을 생각하는 날’로 지내는 것이 바로 빛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작은 정성들이 어려운 이웃들에게는 큰 힘과
위로가 되고 있습니다. 지난 명절에도 여러분이 정성을 모아주셔서
42가정에 금일봉과 고기를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빛의 역할은
앞으로도 지속되어야 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이사야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너에게 영원한 빛이 되어 주시고, 너의
하느님께서 너의 영광이 되어 주시리라”(이사60,19). 우리는 주님의
비추임을 받아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명절에 세뱃돈을
많이 받으셨나요? 어디에 쓰셨나요? 부디 좋은 일에 쓰셨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이사5,10).하고 기록한 대로입니다.
“네 가운데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하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위로와 희망이 되는 말을
얼마나 하고 있는가? 명절에 서로의 만남을 위해 모였지만 얼마나 많은
다툼이 많았는지....상처를 키웠던 사람도 있습니다. 시기, 질투와 미움으로
흉보고, 비난하고 모함하는 말을 내려놔야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의 말은 언제나 정답고 또 소금으로 맛을 낸 것 같아야 합니다”
(콜로4,6). 올해가 무슨 해라고 합니까? ‘청마의 해’라고 합니다. 말은 말
많은 것을 싫어하고, 말꼬리 잡는 것도 싫어하며 말을 뒤집는 것도
싫어한답니다. 헛된 말을 하지 않고 진실한 말만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 어머니, 성모님을 보세요! 우리가 모신 매괴성모님은 수난 받으신
어머니이십니다. 인민군에게 7방의 총탄을 맞으셨습니다. 그러나 깨지지
않고 미소를 담은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상대에게 총을
겨눈다는 것은 시기, 질투, 미움, 증오, 분노, 적개심, 두려움의 표현입니다.
원수에게 총을 겨눕니다. 그러나 그것을 다 품으신 어머님이십니다. 그
모든 것을 품고 천상을 바라보시며 자비와 용서, 화해와 평화, 더 큰 사랑을
호소하시고 계십니다. 우리 어머니를 보면서 우리의 마음도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속 깊은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을
가지고 마음 흔들리고 속상해 하지 말고 차원 높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소금이 쉴까”라는 속담을 아세요? 어떤 일에도 절대로 굽히거나 변하지
아니하고 틀림없어 매우 미더움을 강조하여 이르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미더운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너의 빛이 새벽처럼 터져 나오고”,,,“암흑이 대낮처럼 되리라”(이사58,10)
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에 관심을 두면 사랑의 나눔과 말조심에 마음을
써야 합니다. 나보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에게 희생의 봉헌을 하고 위로와
희망이 되는 말을 한다면 그 자체가 소금이요, 빛입니다.
소금의 역할이 뭡니까? 자신을 녹여 맛갈지게 하고 부패를 막는
것입니다.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보존하고
지키는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부패하지도 않고 세상의 부패를
막습니다. 또한 소금은 절이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영향력을
말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사람도 절이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불평, 불만이 많고 교만한 사람을 감사의 사람, 온유한 사람,
겸손한 사람으로 게으른 사람은 부지런한 사람이 되도록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소금의 절정은 맛을 내는데 있습니다. 소금은 일단 사용이 되면
그 형체를 찾아볼 수 없지만 그 기능은 여전히 발휘합니다. 자신을
희생하지 않으면 음식의 맛을 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제 맛은, 드러나지 않게 이웃 안에서 사랑으로 녹아나야
합니다. 희생과 봉사를 통해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삶의
의미를 주고, 생명의 가치를 알게 해 주며 가치 있는 삶,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믿지 않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복음을 전해야 하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소금의 삶입니다. 인생의 맛을 잃었던 이들이 우리들의 희생으로 맛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기 촛불을 보십시오.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녹이지 않고서는
결코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희생이 없이는 세상을 비출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사회가 밝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둡다고
생각하십니까? 예, 이렇게 어둡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훨씬 많습니다.
그래서 빛이 더욱 절실히 필요합니다.
오늘의 세상을 어둡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돈이 부족하고, 식량이
부족해서입니까? 과학이 미발달해서입니까? 학문이 부족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오늘의 삶의 현실은 과거에 비해 소비는 늘어났지만 더
가난해졌고, 기쁨도 줄어들었고, 집은 커졌지만 가족 수는 줄었습니다.
물질은 풍요로워졌는지 모르지만 소중한 가치는 줄어들었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고민은 줄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나 개신교,
불교등 제도 종교의 의례와 가르침 그리고 계율은 따르지 않으면서
개인적 신앙생활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무늬만 신자인
사람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가 어두운 것은 의롭고 밝은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알면서도 필요한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됨이
적어서입니다. 진리가 부족해서입니다. 정의가 바로 서 있지 않고
사랑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빛이 빛을 비추지 않고, 소금이
소금의 역할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빛이 더 필요합니다.
소금의 역할이 간절합니다.
어떤 분을 만났는데 교통사고를 당해서 열흘을 입원했대요. 특별히
아프지도 않은데 일행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동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실제로 다른 사람들도 아프지 않았답니다. 이쪽, 저쪽 보험금을
받게 되었는데 치료비를 제외하고 1백 여 만원씩 받았다고 했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것이지요. 우리 신자가 이정도인데.....사도 바오로는
선언합니다.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
(필리2,15).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진실을 가리는 어두움, 정신의 어두움, 마음의 어두움을
비춰야합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우리의 착한 행실이 나를 빛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세상현실은 진실을 진실로 드러내지 못하는 세상입니다. 정치가
어떻고, 경제가 어떻고....구제역, 조류인플루엔자등 여러 문제에 대하여
진실은 고사하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처지입니다.
사실을 사실로, 진실을 진실로 보도하거나 방송을 하지 못하게 하는
어둠이 있습니다. 국정원의 선거개입사건도 카드회사들의 개인정보
유출사건도 가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정부도 여당도 야당도 자기기득권
유지와 잇속에만 관심이 크지 물가 안정, 서민의 복지와 생계안정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이 소금의 역할을 하고 어둠을 비추는 빛의 역할을
하고 있다면, 우리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있다면 오늘
이렇듯이 빛을 비추라고 얘기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세상의 흐름에 대해 말을 못하고 침묵하며 숨기는 것만이 최선일까요?
성직자나 수도자가 왜 정치에 관해서 얘기하느냐? 왜 교회가 제주
해군기지건설을 반대하고 밀양 송전탑, 원전문제에 간섭하느냐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한때는 4대강 사업을 왜 반대하느냐? 두물머리에서는
왜 교회가 환경문제에 개입하느냐?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교회가
왜 대기업들의 문제와 경제문제, 상용자동차 문제, 용산 철거민 문제에
대해 간섭하느냐? 이밖에도 생명공학문제, 낙태반대, 이라크
파병문제등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못마땅해 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가르침과 어긋나게 정의롭지 못한
경우에는 교회는 예언자적인 선포와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소금의
역할이고 빛의 역할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월간 '경향잡지' 1월호 기고문에서 강우일 주교님께서는 "사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말씀의 선포자로서 시대의 징표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오늘의 사제가 펼치는 복음 선포도 이 세상과 동떨어져선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 "그러므로 사제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에 무관심할 수 없고,
특별히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 힘없는 이들, 짓밟히는 이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지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상이 정의롭게 발전해
가도록 지켜보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갈 때는 이를 고발하고 비판과
저항도 불사하는 것이 예언자의 직무"라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강우일 주교님은 "성직자는 현실사회로부터 유리되어서도 안 되고
예속되어서도 안 된다. 사제는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지키면서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유로이 사회를 평가하고 비판하면서 바로
이끌어갈 수 있어야 한다"며 성직자의 예언자적 직무를 상기시켰습니다.
하늘의 별은 어두운 밤에 더 빛나게 보입니다. 사회가 어둡다고
생각될수록 우리의 빛이 비추어져야 하겠습니다. 세상이 부패했다고
생각될수록 우리에게 소금의 역할에 대한 소명을 일깨웠으면 좋겠습니다.
까만 밤에 우리의 삶이 더욱 빛나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순간의 기쁨이 아닌 진정한 기쁨을
얼마 전, ‘소금과의 전쟁선포’라는 뉴스를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몸에
꼭 필요한 영양분인 나트륨이지만 과다섭취로 인해 고혈압, 뇌졸중,
심장병 등의 중증질환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소금이 맛을 내는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하지만, 적당해야지 너무 지나치면 이렇게 오히려
몸에 좋지 않습니다. 지나침이 나쁘다는 것은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글쎄 사람들에게나 있어야 할 것 같은 성인병이 애완견들에게도 보인다고
하지요. 규칙적인 식사를 주지 않고, 예쁘고 귀엽다고 영양가 높은 사료를
먹이고 주인이 안고 다니면서 운동을 시키지 않다보니 ‘뚱보 개’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인이 이 애완견을 사랑하지 않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애완견을 한 식구로 받아들이면서 큰 사랑을 주고 있지만,
지나친 그 사랑의 방법이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 삶 안에서 필요한 것은 이와 같은 적당함입니다. 물론 많을수록 좋다는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내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많음은 오히려 그 가치를 떨어트릴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제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책상 서랍을 열었다가 오래전에
구입했지만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그냥 서랍 구석에 놓여 있는 물건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자리에 있지 않고 서랍 구석에 있다 보니,
이 물건의 용도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쓸모없는 물건으로 만든 것이지요.
적당함과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빛과 소금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빛과 소금. 우리의 삶
안에서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이지요. 그러나 소금의 양이 적당하지 않으면
몸에 해로울 수 있으며, 또 등불이 있어야 할 등경 위가 아닌 그 밑에 있으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환히 비출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 삶 안에서
꼭 필요한 것들을 나의 욕심과 어리석음으로 인해 가장 필요 없는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 스스로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는 세상 안에서 꼭 필요한 존재, 그리고 있어야 할 곳에서 주님의 뜻을
잘 실천하는 당신의 소중한 일꾼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꾼이 되지 못하게 하는 부질없는 각종 욕심과 이기심들을 이제는
조용히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대신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길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때 세상
안에 소중한 빛과 소금이 되어, 순간의 기쁨이 아닌 진정한 기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생각은 멈추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시간을 갖는 것. 그것이
진정 행복인 것을(프랑수아 를로르).
성인병 걸린 애완견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난 제가 키웠던 강아지들입니다.
진정한 기쁨을 향해...
로또 복권에 당첨될 확률은 814만 5,060분의 1이라고 합니다. 숫자로
보니까 잘 이해가 되지 않지요? 이는 매주 만원씩 1,500년을 넘게 복권을
사야 한 번 돌아올 확률이라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확률이 아주 높지요?
이 희박한 확률의 주인공이 되겠다고 복권을 구입하는 것은 결코 지혜롭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거액의 복권 당첨금은 어떻게 생긴 것입니까? 바로
기대를 갖고 복권을 구입했다가 ‘꽝’된 사람들의 한숨이 모아진 것입니다.
따라서 그 많은 사람들의 한숨을 모아 자신의 욕심을 채운다는 것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거액 복권의 당첨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불행하게 되나 봅니다.
뜻밖의 행운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내게 이미 다가온 행복 그리고 내게
다가올 행복을 찾는데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로또
복권보다는 꽃 한 송이를 사랑하는 이에게 건네줄 수 있는 마음, 받기보다
주는 것에서 행복할 수 있음을 깨닫는 것, 내게 없는 것보다는 이미 많은
것을 받았음에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갖는 것이 바로 행복을 찾는 우리의
기쁨의 여정이 될 것입니다.
쓸데없는 욕심으로 순간의 기쁨만을 찾지 말고, 우리에게 계속해서 기쁨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참된 길을 걸어가길 소원해봅니다.
- 인천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무디어져서는 안 됩니다.'
2014년2월9일 연중 제 5주일 복음묵상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마태오5,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마태오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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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에는 너무 잘 알려지고 익숙해짐으로 인해, 원래의 색을 잃어버리는
것들이 적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는 말씀을
처음 접한 이들이라면, 충분히 감동하고 나름대로 마음을 다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들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말씀이기에,
별 감응 없이 무덤덤하게 듣고 흘려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말이라는 것은, 말을 하는 이의 영향력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받아들이는
이의 태도에 의해 그 힘의 발휘 여부가 결정됩니다. 받아들이는 우리가
너무도 익숙해 무디어져 있다면, 그 어떤 아름다운 말씀도 그 힘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모를 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의식하면서 하루를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전체를
놓고 볼 때 과연 얼마나 될까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 중의 가장 무서운 것 중 하나는 ‘무디어진다는
것’입니다. 늘 깨어 있으라는 그분의 말씀을 상기해 볼 일입니다.
복음 묵상으로 들어가보지요.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 세상은 아름다움과 추함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던 그렇지 않던 간에 우리는 이 세상 안에 살아야
합니다. 복음의 시작도 복음의 끝도 이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빛과 소금이 되라 하십니다.
당신께서 붙여주신 등불을 꺼뜨리지 않게 자신을 늘 둘러보며,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되라 하십니다. 그렇다면, 등불을 꺼뜨리지 않고 밝히기
위해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각자 안에,
밝음과 어둠, 아름다움과 추함을 식별하는 지혜일 것입니다.
사실, 이 복음 구절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아파 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좀 더 충실하게 이러한 하느님의 간절한 마음을 따랐다면,
이처럼 세상이 엉망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안타까움 때문입니다.
좀 더 의식적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려는 우리의 노력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세상입니다. 각자 서 있는 자리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인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고자 노력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육개장과 설렁탕, 그리고 찐 계란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2월9일 연중 제5주일
마태 5,13-16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육개장과 설렁탕, 그리고 찐 계란>
언젠가 제가 지독한 위장병에 걸려서 고생하던 때였습니다.
담당의사께서는 제게 음식을 짜고 맵게 먹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당장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저는 어쩔 수 없이 의사의 지시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동안 소금이나 고춧가루가 거의
들어있지 않은 음식만 먹게 되었습니다.
거의 매 끼니를 멀건 흰죽에다 시금치, 백김치, 콩나물무침 등등.
정말이지 그것보다 더 큰 고역은 다시 또 없었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저는 소금의 소중함이랄까 위력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때 저는
육개장의 그 얼큰하고 개운한 맛, 설렁탕의 그 은은한 맛, 그 기본은
다름이 아니라 소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금을 치지 않고 찐 계란을 드셔보셨습니까. 소금 없는 찐 계란은
그야말로 앙꼬 없는 찐빵이나 다름없습니다. 얼마나 먹기가 팍팍하고
또 무의미한지? 소금은 음식 가운데 녹아 스며들어 절대 보이지는
않지만 조미료 중의 조미료입니다. 모든 음식에는 일단 소금이 들어가야
제 맛이 나기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의 소금"은
바로 그리스도인 한 명 한 명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소금인
그리스도인은 세상 안에 녹아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로 인해 기뻐하고 신명나는 삶을 살아가도록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한 몸 바쳐"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과
이웃을 위한 희생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기본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의 신장 하나를 만성신부전증 환자에게 떼어준
40대 여자 분에 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2개의 신장을
가진 것은 힘들 때 서로 나눠주라는 의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를
실천에 옮기고 싶었습니다."라며 그분은 "사랑의 신장 기증 릴레이"의 첫
주자가 되었습니다.
그분의 신장을 이식 받은 손모씨의 아내는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자신의
신장 하나를 다른 환자에게 기증하였고, 그 환자의 남편 역시 감사의
표시로 자신의 신장 하나를 다른 환자에게 내놓았습니다. 이렇게 한
천사의 선행은 세 가정에 새 생명을 주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하늘이
기뻐할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을 실천한 그 부인은
온전히 세상 한가운데로 녹아 스며든 소금이었습니다. 세상에 희망을
던져준 의인이었습니다.
소금이 일상의 기쁨이자 세상의 희망이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의
기쁨이자 희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연중 제5주일
2014년 가해 2월9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3-16
어릴 때 선생님들께서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 보시곤 했습니다.
그러면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 유관순 누나 등등 말을 하곤 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 별로 없다고 이야길 하기도 합니다.
오늘 저는 존경받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았으면 합니다.
존경받는 사람의 조건은 여러 가지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첫째로는 그 사람의 직책에 있습니다. 많은 공부가 필요하고, 그 직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며, 그러한 직책이 일정한 부와 명예를 보장해
주기도합니다.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 판사, 의사…….등등이 있겠습니다.
둘째는 한 분야에서 오랜 정진 끝에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운동 분야에 이런 사람들이 있고, 학문을 연마하는 사람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으며, 요즘에는 예술과 컴퓨터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각 분야에서 최선을 다한 사람, 그러면서 일정한 경지에 이른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명예의 전당’에 추대되기도 합니다.
셋째로는 특정한 직책에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한 분야에서 입신의
경지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게 이런 사람들은 청렴하며, 희생과 봉사정신이 뛰어나고, 남에 대한
배려가 크며, 자신의 이익보다는 공공의 이익을 먼저 생각합니다. 이런
분들은 겉으로 눈에 뛰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 향기가 은은하면서도
멀리 퍼지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분들 때문에 때로 슬픔
속에서도 웃음을 지을 수 있으며,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어떤 조건에서 존경을 받아야 하는지 생각해 봅니다.
신앙인들이 자신의 직분과 직책 때문에 존경을 받을 수도 있겠습니다.
신앙인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경지에 이르러 존경을 받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세 번째 이유로 존경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2000년
역사를 지닌 교회는 오늘도 주님의 사랑 안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자
합니다. 그 빛과 소금은 엄청나게 많은 돈이 들어간 교회의 건물 때문에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신문에 자주 오르내리는 몇몇 사람들 때문에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의 향기를
이웃에게 전하는 그런 분들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 교회가 그 이름값을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너희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참으로 아름다운 말입니다.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덕담이라 생각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을 해주고 있습니다. ‘초는 자신의 것을
다 태워서 빛을 비추어 줍니다. 소금은 모든 것을 주고 녹아야 맛을 냅니다.’
빛과 소금처럼 모든 것을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의 삶이 바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길이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올해에는 지방 자치 단체장을 뽑는 선거가 있습니다. 여당과 야당은 선거를
준비하면서 국민들에게 새로운 공약을 준비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발전과
성장의 그늘에 가려서 소외된 이웃을 돌아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정부는
‘의료, 교육, 육아, 주택’과 같은 부분에서 국민들을 위한 복지를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선택적인 복지이든 보편적인 복지이든 우리 사회가 발전과
성장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은 선진 국가를 향한 발걸음을
시작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교회는 더더욱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각 지역에 있는 본당과
교회 시설들은 세상의 등대가 되어야 합니다. 지치고 힘든 이들에게 사랑의
빛을 희망의 빛을 믿음의 빛을 밝혀 주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등대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 삶이 비록 외롭고 고단할지라도 우리는
기꺼이 소금이 되어 모든 것을 내어 주었던 제2의 이태석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제2의 마더 데레사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복지, 희생이
없는 복지, 십자가 없는 복지는 포장은 예쁠지라도 알맹이가 없기
마련입니다. 구호는 멋질지라도 공허한 메아리가 되기 마련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참 삶은 무엇인가?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2월9일 연중 제5주일,
이사58,7-10 1코린2,1-5 마태5,13-16
참 삶은 무엇인가? -소금과 빛-
오늘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우리의 신원을 새롭게 확인시키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바로 이게 우리의 신원입니다.
주님 친히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사셨습니다.
주님을 닮아갈 때 우리 역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 수 있습니다.
과연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살고 있습니까?
저절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의 삶이 아닙니다.
불퇴전의 부단한 노력을 요하는 삶입니다.
하느님 은총에다 영원한 현역의 ‘하느님의 평생 전사’로, ‘하느님의
평생 학인’으로 깨어 사는 노력 있어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의 삶입니다.
바로 이게 참 삶입니다. 오늘은 ‘참 삶은 무엇인가?’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세상의 소금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주님 친히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제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너무 자명한 말씀이라 군더더기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 친히 이렇게 세상의 소금으로 사셨습니다.
소금은 그 자체로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음식 안에서 그 진가가 들어나는
소금처럼 우리 역시 세상 안에서 우리의 진가가, 신원이 들어납니다.
소금의 역할은 제 맛을 내는 것이요 부패를 방지하는 것입니다. 적절한
양의 소금이 들어가야 음식이 제 맛을 내듯 우리의 존재 역시 그러합니다.
너무 많은 소금이 음식을 망치듯 우리의 처신 역시 중요합니다.
분별의 지혜에 따라 소금의 역할을 해야 삶도 맛있고 부패도 막아줍니다.
세상의 소금이 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우선 이에 앞서 내 자신의
고유의 제 맛을 잃지 않아야 하며 내 삶이 썩지 않아야 비로소 세상의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세상을 성화하는 소금이 되기는커녕 세상에 속화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수행생활도 제 맛을 잃지 않기 위한, 또 썩지
않기 위한 부단한 평생 수행에 모아집니다. 살다보면 삶도 변질되어
제 맛을 잃을 수 있고 부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음식은 맛이 가면 버릴 수도 있지만 자식은 버리지도 못하고…’
예전에 인용했던 말도 생각이 납니다.
살다보면 부패되어 제 맛을 잃는, 맛이 간 인생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몸은 노쇠해가도 마음은 늘 제 맛을 유지하는 것이, 썩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래야 세상의 소금이요 매력적 인생입니다.
우리의 수행도 바로 여기에 모아집니다.
부패인생이냐 발효인생이냐 역시 제가 자주 드는 예입니다.
맛을 잃고 썩어가는 부패인생이라면 세상의 소금이 되기는 불가능합니다.
갈수록 고유의 제 맛과 향취를 내는 발효인생일 때 비로소 세상의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제 맛을 잃지 않은 소금 인생으로, 깊은 맛의 발효인생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주님과의 일치뿐입니다. 끊임없는 말씀공부와 실천,
기도의 수행뿐입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한 주님과의 일치로 제 맛을 잃지 않아야 비로소
세상의 소금으로, 부패인생이 아닌 발효인생으로 살 수 있습니다.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제 맛을 내며 살 수 있습니다.
둘째, 세상의 빛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역시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세상의 소금이 되어 제 맛을 내며 발효인생을 살아갈 때 저절로 세상의
빛으로 살 수 있습니다. 어둠을 몰아내는 것은 빛뿐이듯 우리를 통한
주님의 빛만이 세상 악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과연 세상의 빛이 되어 살고 있는지요.
주님과의 일치가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주님의 빛으로 살게 합니다.
우리를 통해 빛나는 성령의 빛, 생명의 빛, 믿음의 빛, 사랑의 빛, 희망의
빛, 기쁨의 빛, 평화의 빛 모두가 주님의 빛을 반영합니다.
빛을 찾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빛이시고 어둠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발광체가 아닌 다만 주님의 빛을 반사하는 반사체일 뿐입니다.
주님과 함께 할 때는 빛이지만 주님을 떠날 때는 어둠입니다.
주님과 일치되지 않고는 세상의 빛으로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이렇게 바오로 사도의 권고대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 갈 때
비로소 주님의 빛, 세상의 빛이 되어 살 수 있습니다.
'제 맛'을 내고 '제 빛'을 발산하며 살 수 있습니다.
셋째, 착한 행실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의
삶은 낭만이 아닌 현실입니다. 말이나 생각만이 아닌 착한 행실이
받쳐줘야 비로소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의 삶입니다. 우리의 착한
행실의 빛이 사람들을 비추어 이들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는 것입니다.
새삼 착한 행실의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의 삶만이 가장 확실한 복음
선포임을 깨닫습니다. 진정 세상을,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착한 행실의
진정성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위치도 이를 입증합니다. 산상설교(마태5-7장) 한
복판에 자리 잡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는 오늘 복음 주제입니다.
산상설교의 ‘참 행복’을 비롯한 모든 주님의 권고를 착실히 실행할 때
비로소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의 삶입니다.
1독서의 이사야를 통한 주님의 말씀 또한 착한 행실을 구체적으로
환히 보여줍니다. 바로 이게 하느님이 좋아하시는 진정한 단식입니다.
이렇게 살아야 비로소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의 삶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참 고무적인 말씀입니다. 이런 착한 행실이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갈
수 있는 구체적 처방이요, 하느님이 바라시는 참 단식입니다.
2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겸손한 고백 또한 감동적입니다.
“나는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려고 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분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나를 비우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만
생각하고 사랑할 때 저절로 겸손의 열매, 착한 행실들임을 깨닫습니다.
참 삶은 무엇입니까? 누가 위대한 사람입니까?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참 삶을 살 수 있고,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방법은 아주 단순하고 평범합니다. 제 삶의 자리에서 욕심을 비우고
주님을 닮아 착한 행실의 삶으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제 맛을 내고 제 빛을 발산하며 사는 것입니다.
참 삶은 이것 하나뿐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2014년 가해 2월9일 연중 제5주일
<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
복음: 마태오 5,13-16
<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
노역장에서 돌을 깨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니 노예들입니다. 발에는
쇠사슬이 묶여있고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돌 깨는 데 쏟지 않으면 매질이
쏟아지거나 음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생명을 돌
깨는데 바칩니다.
돌을 조각해서 예술작품을 만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는 그 돌 안에
자신이 만들어놓을 작품을 빨리 보고 싶어서 식음을 전폐하고 돌을
깹니다. 그도 역시 돌을 깨는 일에 자신의 모든 에너지와 생명을
바칩니다.
과연 같은 삶일까요? 빛과 소금처럼 자신을 태우고 녹인다고 다 같은
삶일까요? 둘이 같이 밭을 갈아도, 둘이 같이 방아질을 하여도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남겨둘 것입니다. 같이 목숨을 바쳐도 어떤 이들에겐
무언가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이 무엇일까요? 바로 예술가의 마음
안엔 자신이 하는 일의 목적이 뚜렷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자신 안에 있는
형상을 그 돌을 쪼아내는 노력을 통해 세상에 드러내려는 의도입니다.
어제 교구 신부님 어머니의 장례미사가 있었습니다. 장례미사 때는 교구
모든 신부님들이 함께 고인의 명복을 위해 주교님 주례로 미사를 함께
하게 됩니다. 그러나 저는 오전에 회의가 있었기 때문에 그 전 날 빈소에서
미사를 하고 어제는 장례미사에 함께 할 수가 없었습니다. 교구청에서
회의실 온도를 맞추어 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도 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날짜를 다시 확인해보았더니 회의는 다음 주였던
것입니다. 무언가를 위해 노력하였지만 다 헛수고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다가 이렇게 헛수고 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 안에 온전한 정보를 지니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같은 노력을 하고 같은 일을 한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다 좋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예수님을 죽인 이들은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십일조를 꼭 내고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는 이들이었습니다. 우리가 그 때에 산다고 하여도
그들만큼 율법을 철저히 지키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 안에
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해야 하는지 정보가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십니다. 세상을 비추고 꼭 필요한 소금과 같은 존재가 되라고
하시는 말씀은 맞습니다. 그러나 만약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려고
한다면 슈바이처나 간디, 달라이 라마, 법정 스님 등이 우리보다 훨씬
세상에 필요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였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분들처럼만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 되려고 한다면 세상은 꼭
하느님에게만 영광을 드릴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가 되려고 하는 것은 어쩌면 그 껍데기만 닮고 그분이 우리 안에
넣어주시려고 했던 가장 소중한 것을 잊고 살아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열심히 살았다고 느끼지만 결국 헛수고를 했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소금은 이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 되라는 것보다 더 깊은 상징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소금 계약’(민수 19,19; 2역대 13,5)을
맺으셨습니다. 도대체 소금계약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마르 9,50)
우리가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지 않으면 형제들과 평화롭게 지낼 수
없습니다. 소금은 그저 자신을 녹여서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가 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탈출기 30,35절에는 소금은 제물을 깨끗하고 거룩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말합니다. 또 레위기 2,13절에는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 바치는 곡식
제물에는 반드시 소금을 치고 그 계약의 소금을 예물과 함께 바치라고
말합니다. 또 모세와 엘리사는 우물이 마시지 못할 물이 되자 그 안에
소금을 넣었더니 단 물이 되었고 생명수가 되었습니다.
즉 우리가 소금이 되라는 말은 죽어서 이 세상을 깨끗하고 거룩하게
만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먼저 누가 죽으셨습니까?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분이 죽으면서 우리를 위해 흘린 피와
그분이 내어주시는 살, 그것이 바로 ‘계약의 소금’인 것입니다. 죽어야만
내어줄 수 있는 것, 우리는 이것을 ‘성령’이라고도 부릅니다. 성령의 계약,
즉 내가 사랑으로 죽어서 변화되는 것, 그 사랑의 표현이 성령인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 우리가 그 맛을 잃겠습니까? 바로 내가 소금을 받지 못했을
때입니다.
소금과 빛이 되라는 말씀은 이 세상에서 죽으라는 말씀뿐만이 아니라
내가 맛을 잃지 않도록 소금을 먼저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나에게
참 사랑의 성령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들어오지 않으면 맛을 잃은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서 이 세상에 도움이 되려고 해도 절대 될 수 없다는 뜻인
것입니다.
옛날 원시 부족 때 어떤 한 발명가가 불을 만드는 기술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그 기술을 자신만 쓰는 것이 아까워서 부족들을 찾아다니며 그
기술을 전수했습니다. 첫 번째 부족은 그 불을 만드는 기술에 빠져있어서
그 발명가가 자신들을 떠난 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했습니다.
그 발명가는 다음 부족에게로 갔습니다. 그 부족에겐 사제들이 있었는데
그 뛰어난 기술을 들고 온 발명가를 그냥 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발명가를 죽여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질책이 자신들에게 올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 발명가와 불을 만드는 기술을 모두 묻어버리고 그
위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그 발명가의 삶을 칭송하며 그에 대한
책도 쓰고 그의 가르침에서 어긋나게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추방시켰습니다.
사람들은 그 발명가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게 되었지만 그 발명가가 알려주려
했던 불을 만드는 기술은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참조: 안소니 드 멜로, 개구리의 기도 1, 28]
예수님은 우리에게 불을 만드는 기술을 전해주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쩌면 그 기술을 자신 안에 품기보다는 겉모습만 그분을
닮으려고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에제키엘서 16,4절에서 하느님께서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임을 말씀하시면서 “아무도 네가 태어날 때, 네 탯줄을 잘라주지
않았고, 물로 네 몸을 씻어주지 않았으며, 아무도 네 몸을 소금으로
문질러 주지 않고 포대기로 싸 주지 않았다.”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녹여 우리를 깨끗한 제물로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소금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분으로부터 참 소금을
받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 맛을 잃은 쓸모없는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를 도와주어도 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무조건 목숨을
바친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먼저 우리가 맛을 잃지 않은 소금이
되도록 우리 마음 안에 참 소금을 간직하도록 해야겠습니다. 그 소금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이십니다.
마더 데레사가 젊으셨을 때의 일입니다. 그녀는 어느
방문했습니다. 한 청년을 만났는데 씻지도 않고 방도 청소하지 않아
돼지우리 저리가라 할 만한 방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 방엔 램프가
있었지만 그 청년은 그 램프를 켜지 않았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램프가 있는데 왜 켜지 않느냐며 그 램프를 켰습니다. 그
청년은 왜 남의 물건에 손을 대냐며 화를 내고 다시 램프를 껐습니다.
데레사 수녀님은 지지 않고 다시 램프를 켰습니다. 그렇게 옥신각신
하다가 마침내 화가 난 청년은 램프를 밖으로 내던져 깨 버렸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집으로 돌아가 새 램프를 사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방에
불을 밝혀주고 돌아갔습니다.
10년 정도가 지나 우연찮게 그 청년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같은 빈민굴에
살고 있지만 깨끗하게 정돈된 집에서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알려주는 수녀에게 데레사 수녀를 보면
이렇게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그 키 작은 수녀님께 전해 주시오. 당신의 등불이 지금도 내 생활 속에
불타고 있다고 (Your light is still burning in my life)”
그렇습니다. 빛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고
원한다는 뜻은 그분 때문에 내가 변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셨습니다. 그 빛은 당신이 자신을 태우셔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이었고,
소금이었고, 성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어둠을
더 좋아했습니다. 우리는 위의 청년이 마더 데레사가 놓고 간 빛을 받아들여
변화되었듯이, 우리도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변화되면 저절로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게 됩니다.
오늘 빛과 소금이 되라는 말씀은 죽으라는 뜻입니다. 죽어서 내 안의
성령을 세상에 뿌려서 세상을 거룩하게 하는 계약을 맺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나를 태울 수 있는 불을 그리스도로부터
받으라는 뜻입니다. 죽어야 하지만 먼저 죽으려고만 하지 말고 그분이
주신 소금과 빛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노력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연구 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주님, 신앙인들의 정신에 깃드시어
2014년 가해 2월9일 연중 제5주일
주님, 신앙인들의 정신에 깃드시어
자신의 인생 주장을 이젠 너무 제멋대로들 규준 없이 말해서 걱정입니다.
그중에 첫째가 돈, 부자, 재벌 이것들이 삶의 규준이라 외치고 있습니다.
새해인사가 돈 돈 그러더니 이젠 건강까지 곁들여 난무를 하네요.
정의 진리 선 평화 마음으로 이룰 행복이 돈 행복에게 밀렸네요.
그 돈이 화 또한 부른다는 걸 왜들 모르는지 도통 이해가 안 갑니다.
참 빛의 주님, 신앙인들의 정신에 깃드시어 참 빛을 발하소서. 아멘.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마태오 5,14~15)”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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