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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는 차고 마음은 따뜻하신 분
- 형님이 내게 끼친 그림자
형님 김호길 박사와 나는 여섯 살 차이이다.
우리는 모두 팔남매로 부모님께서는 슬하에 아들 넷, 딸 넷을 두신 것이다.
맏형님 아래 차례대로 정확하게 세 살 터울이라,
다른 남매들의 나이는 자연히 서로 쉽게 알 수 있다.
위로 맏형님과 둘째형님, 그리고 호길형님은 세째,
나는 아들로서 막내이며, 형제순위로 다섯째이다.
형님과 나 사이에 누님이 한 분 계시고 내 아래로 누이가 셋이다.
우리 고향은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삼십 리를 걸어
나가야 신작로가 나오는 심심산골이다.
나는 국민학교 4학년 때까지만 해도 자동차를 보지 못했고
오히려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보면서 자라났다.
지금은 그곳이 임하댐으로 수몰되고, 어렸을 적 뛰놀던 옛고향이
자취없이 없어져 추억 속의 고향으로 묻히고 말았다.
우리 집은 뿌리깊은 유교 가문의 전통을 자랑하는 집안으로 아버님은 한학을 하셨지만,
동네마을의 자라나는 아이들의 신학문을 위해 유산으로 내려오는 농토를 학교부지로
헌납하여 일제말경 우리 동네에 국민학교를 처음 세우셨다.
그러나 세째 호길형님까지는 아직 국민학교가 세워지기 이전이므로
외지로 유학을 가셔야만 했다.
따라서 우리 형제들은 방학 때에라야 모두 모일 수 있었다.
종종 주말이면 안동중학교에 다니시는 형님이 집에 와서 하루 머물고는
양식을 들고 험한 마당재를 넘어 가시던 기억이 난다.
우리 집안의 가훈이요 가르침은 공부도 중요하지만, 효도와 우애를 강조하였다.
특히 어리석어도 어질어야 함을, 똑똑한 것보다 착한 것을 가정교육에서 강조하셨다.
바보스러울 정도로 착한 사람을 가정에서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내세우셨다.
형님께서는 이러한 가정의 가르침을 누구보다 철저히 마음에 새기시고 실천하신 분이셨다.
대대로 내려오는 어리석지만 착한 행동을 했던 선조 어른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많이 알고 기억하셨다가 동생들뿐 아니라 조카들에게 들려 주시곤 하셨다.
식구들이 모이면 서로 서로 실수한 이야기, 좀 모자란 행동들을 했던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는 한바탕 웃고 그 식구를 용납하고 격려한다.
예를 들면 조카 중에 미국에서 잠시 귀국했다가 돌아갈 때 공항에 와서 지갑을 열어보니
여권과 비행기표를 집에 두고 온 것을 그제사 알아, 전송나온 온집안 식구들과 함께
다시 발길을 돌려야 했던 좀 어벙한 이야기나, 학교다닐 때 한 학기 동안에
도시락을 몇개씩이나 버스에 그냥 두고 내린 건망증 심한 이야기를 하면
너도 우리식구의 엉성한 피가 흐른다고 하시면서 빈틈없이 실수 않고, 못된 것보다는
좀 낭패하더라도 어진 것이 더 중요하다며 실수를 핀잔하지 않고 격려하셨다.
내가 안동사범 병설중학교에 다닐 당시 6·25 직후라,
형님은 부산에서 국립중앙관상대에 근무하시며
서울대 문리과대학에 다니셨다. 내가 지금 과학자의 길을 가게 된 것도
그때부터 형님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형님은 그때 매년 여름방학 한달동안 수학 특히 대수와 기하를 가르쳐 주셨다.
그때부터 나는 수학 중에서도 대수보다는 기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중학교 때부터 수학에 대한 기초를 쌓게 된 것이, 후에 공과대학에 진학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형님은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유도하며,
하루에 한두 문제를 내주고 종일 생각해 보도록 했다.
지금같이 가르치는 선생도, 배우는 학생도 바쁜 시대에는
이것이 가능할까 생각하며 그 시절의 여유가 아쉽기만 하다.
형님이 대학을 다니시던 그때에는 우리나라 전체가 모두 못 살던 시대이기도 했지만,
형님은 고학으로 유독 고생을 많이 하셨다.
그러나 한번도 고생스럽다거나 힘들다는 말씀 한번 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집안에 대한 긍지와 앞으로 조국의 미래에 대한 남다른 포부와 애정,
자신에 대한 긍적적인 사고와 낙천적인 성품을 가지셨기 때문인 듯하다.
형님은 비록 한 켤레의 군화와 한 벌의 학생복밖에 없는
가난한 대학생 이셨지만 한번도 자신이 가난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하셨다.
요즘 젊은이들이 고생이나 어려움을 견디어 내지 못하고 물질에 의존하여
풍족하지 못한 환경으로 인해 기가 죽고 심약한 것을 보면 한탄스럽다고 늘 말씀하셨다.
그 당시 형님 친구들 중에는 친척 아저씨이며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이용태 박사(삼보컴퓨터 회장)와 서울대학교 김용직 교수와의 우정도 남다른 것이었다.
모두들 어려운 시절에 학교를 다녔을지라도 현실의 불편한 환경에 위축되거나 구애를 받지 않고,
장차의 조국에 대한 책임의식과 주인의식을 가지고 꿈과 기백과 이상을 불태웠다.
내가 안동에서 서울로 진학하여 서울사대 부속고등학교를 다닐 때, 잠시 이박사 형제들과 함께 있었다.
모두들 고향을 떠난 가난한 유학생 신세라, 고계고등학교(현 장충고등학교)에 아버님의 친구이신
오성교장 선생님의 주선으로 학교 온실 사무실 방에 세 학생들이 함께 기거했다.
가정집 살림살이하는 방도 아니라, 숙식이 결코 편한 생활이 아니었어도 마음은 늘 부자였다.
형님 일행은 그 온실이 흰 색깔의 구조물이었기 때문에 그곳을 화이트 하우스라고
명명하여 늘 패기만만하고,의기 충천하셨다.
형님의 효성이나 우애는 소문난 대로 지극하셨다. 미국에 계시던 23년여 동안에도 부모님께
말할 수 없는 효도를 하셨지만, 귀국하셔서 포 항에 계실 땐 학교일로 아무리 바빠도
한달에 두어 번은 주말에 안동에 가셔서 종일 어른들과 함께 지내시곤 했다.
아버님을 모시고 집안 대소가 어른분들께 인사도 다니시며 안동의 서원들을 돌아보시기도 하셨고,
때로는 어머니와 바둑이나 화투도 치시며 어머님을 즐겁게 해드리셨다.
원래 어머님은 친정인 경주의 양동에서 바둑을 배우셔서 두 이모님들도 여성으로 드물게 바둑을 잘 두셨다.
외조부님을 위시하여 외가는 모두 바둑 애호가들이셨다.
외종조부(이석홍씨)께서는 조선바둑으로 수년간 국수였을 정도로 외가 어른들은 바둑을 좋아하셨다.
그래서 위로 세 형님들과 함께 조카들까지 우리 집안은 모두 바둑 취미가 대단하다.
형님은 당신집에는 무엇이 있는지 없는지 전연 모르셨어도, 안동의 냉장고 안을
형님이 때로는 열어보시고 고기며 생선을 직접 사다넣어 놓으시기도 하셨다.
몇년 전 박태준 회장과 함께 박회장께서 영국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으시기 위해 함께 출국하셨을 때다.
갑자기 어머님께서 입원하시게 되었다는 전갈을 외국에서 받고 형님은 그길로 도중에서 황급히 귀국하셨다.
부모님을 극진히 모심으로 그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었던 것이다.
형님은 어렸을 때 고집이 세고 좀 망나니 기질이 있으셨다 한다.
국민학교 입학무렵 쯤인가, 한번은 집에서 점심 때 형님이 싫어하시는 국수를 또 했다고 한다.
우리 집에는 늘 손님이 사랑채에 그치지 않기 때문에 주로 점심식사는 칼국수로 대접을 하곤 했던 것이다.
형님은 국수가 지겨우셨던 것이다. 그래서 점심은 물론 거부하고 방 문짝 하나를 뚝 떼어 내어,
문종이에 구멍을 뻥뻥 뚫어놓고 비가 오는 마당에서 그 문짝을 머리에 이고 데모를 했다고 한다.
하루종일 비오는 밖에서 아무리 서 있어도 배는 고파오고, 누구 하나 말리는 사람도 달래는 사람도 없어서
속으로 후회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저녁나절 집안 아주머니가 안으로 들어오시다가
이를 보고 달래는 바람에 얼른 들어오셨다고 한다.
아버님은 평소에 별 말이 없으신 편이다.
따라서 꾸중이나 잔소리도 별로 하시지 않는다.
문짝을 떼어내었다고 매를 드신다거나, 호통을 치지도 않으신다.
말씀이 없으신 가운데 잘못한 일을 스스로 깨닫도록 교육을 하시는 것이다.
물론 형님은 그 이후로 다시는 음식투정을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우리 형제들은 이런 아버님을 어려워하였으나, 자잘한 일에 대범하시고 화를 좀체 내지 않으시는
너그러우신 아버님의 깊은 뜻을 자라면서 더욱 이해하며 존경했다.
형님은 윗형님들께는 철저히 동생으로서의 순종하는 자세를 갖추었고,
아랫사람들인 동생들이나 조카 등에게는 위의 두 분 형님들이 그러하셨듯이,
부모처럼 따뜻하고 자상하게 보살펴 주셨다.
특히 좀 형편이 어렵다거나 도움이 필요한 약한 친척에게는 어떻게든 관심을 가지고 도와 주려고 애쓰셨다.
반대로 경우와 이치에 틀리거나 부당한 권위를 내세우는 사람 앞에서는 한바탕 거침없이
싸움을 불사하는 논쟁을 벌리기도 했다. 형님은 정녕 머리는 차고, 마음은 따뜻하신 분이셨다.
내가 서울공대를 졸업하고 유학을 결심하게 된 데는 형님의 도움이 컸다.
그때 형님은 영국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버클리대학의 로렌스연구소에 계실 때였다.
형님이 먼저 그곳에 가 계시지 않았더라면, 당시 나로서는 도미유학은 엄두를 내지 못할 형편이었다.
나는 동생으로서 형님께서 개척해 놓으신 길을 따라가면 되었다. 대학전공을 택할 때도 형님의 조언은 컸다.
그때 당시에는 공과대학 중에서 금속공학은 크게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분야가 아니었다.
형님께서는 앞으로 우리나라도 중공업이 발달해야 다른 산업도 발전할 수 있으므로,
이제부터는 금속재료분야가 우리나라에 꼭 필요한 분야라고 조언해 주셨다.
어렸을 적부터 하늘 위로 날아다니는 비행기를 보면서 비행기 소재에 대한 호기심도 키워왔던 터라,
나의 전공분야는 형님의 제안대로 나의 소원과 함께 이렇게 결정되었다.
유학생활 2년 후 박사과정에 들어가자 집안의 중매로 결혼이야기가 나왔다.
신부감은 한국에 있으니 맛선을 볼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마침 그때 형님께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소련을 방문하게 되었다.
미국의 핵물리학자로서 미국대표로 방문하지만 한국여권을 소지하고 있었으므로,
소련 방문 전 한국정부에서 먼저 다녀가라고 형님을 초청했다.
지금은 모스크바로 자유로이 왕래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지금부터 25년 전, 1969년에는 철의장막에 해방 후로는 가 본 사람이 거의 없었으므로
이를 언론이 보도함으로써 우리 사회에 화제거리가 된 사건이었다.
그때 한국방문 일주일간의 짧은 일정 속에 형님은
미래의 제수씨를 나 대신 고려대학교에 가서 선을 보고 오셨다.
그리고 나는 형님의 추천을 받고 혼인을 결정했다.
결혼은 인간사에 가장 중요한 선택이요
또한 가장 중요한 결정임에 틀림없지만, 형님을 부모님처럼 의지하며
형님의 판단을 늘 신뢰했음으로 나는 어려운 결정을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 부부는 서로 잘 만났다고 생각하며 화목하게 살고 있으니
이 또한 형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형님보다 먼저 한국과학기술원으로 12년만의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다.
1983년, 3년 뒤 형님께서도 럭키금성그룹에서 세우는 대학으로 초청받아 학장후보로 영구귀국하셨다.
형님은 늘 서울은 너무 복잡하고 대학도 많으니, 귀국하면 시골에 가서 학교를 한번 해보고 싶다고 하셨다.
형님의 뜻을 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온 것이다.
그러나 진주에 국제수준의 알찬 공과대학을 만들어 보겠다는 꿈은, 경상대학교 외에 한 곳에
4년제 대학을 또 허가할 수 없다는 정부시책으로 무산되었다. 형님은 처음 계획과 달리
전문대학으로 인가가 난 연암공업전문대학에서 우리나라 공업전문대학 교육정상화의 사명을
하늘이 주셨다고 생각하고 보람을 느끼며 정성을 다하셨다.
막 일년이 지난 후, 포항공대 설립계획을 가지고 찾아온 대학설립본부측의
간곡한 설득으로 포항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것이다.
그후 이제 만 9년만에 포항공대는 세계속의 대학으로 놀랄 만큼 발전을 했다.
국제수준의 대학으로 단기간에 자랄 수 있었던 것은 포항제철 및 박태준 전 회장의
흔쾌한 지원과 함께 미국에서 귀국한 우수한 석학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형님은 자나 깨나 포항공대 생각뿐이셨다.
4년 전 미국에서 갑작스런 병환으로 뉴욕 버팔로병원에 입원, 수술하셨었다.
그때 5일간의 혼수상태에 계실 때 무의식 속에서도 온통 포항공대 발전과
한국의 과학기술의 장래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셨다.
옆에서 지켜보던 형수님과 내가 서운할 정도로 가족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으셨다.
형님은 한 가족에게 속하기에는 너무 큰, 나라와 민족을 가슴에 담은 그릇이요 큰 공인이었다.
형님의 설득력은 놀라운 힘이 있어서 포항공대에 가 보면 옛날 메릴랜드대학에 계실 때
자주 만나시던 과학자들이 거의 포항에 다 내려와 계시는 느낌이다.
그때 재미과학기술자협회를 설립, 함께 일하셨던 분들이
초창기부터 많이 오셔서 오늘의 포항공대가 태어나도록 공헌하셨다.
교수님 사모님들 중에는 포항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고, 남편따라 오신 분들도 많다고 들었다.
올해 1월말 내가 기독교 정신으로 세우는 한동대학교에 총장으로 와 달라는 제안을 듣고
결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 형님은 내게 권할 수도 말릴 수도 없다고 난감해 하셨다.
그 이유는 미국에서 귀국한 후, 형님은 대학행정일로 인해 연구를 중단할 수 밖에 없었는데,
앞으로 한창 더 많은 연구를 마음껏 할 수 있는 네가 이제 연구를 중단하게 되니,
이는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도 손해라며, 권할 수가 없다고 하셨다.
형님은 나의 연구와 학문적 성취를 항상 과분하게 칭찬하시며 격려하셨다.
그러나 형님이 말릴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 학교가 기독교 대학으로 예수 믿는 총장을 찾으니,
내가 말릴 수만 있겠는가 하셨다. 나는 기독교인이요,
형님은 아직 크리스찬은 아니셨지만 한번도 신앙적인 문제로 인해 서로 충돌이나 갈등같은 것은 없었다.
미국에서 내가 처음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을 때 형님은 좀 서운해 하시기도 하셨다.
그것은 우리 집안과 같은 유교의 전통가정에서 크리스찬이 되는 것은 그때만 해도 가위 개혁이요,
혁명이기 때문이었다. 기독교인이 되면 형님은 우리의 옛것과 문화를 모두 버리는 것으로 생각하셨다.
형님은 우리의 것, 우리 문화와 전통, 우리나라의 모든 것을 너무 사랑하셨다.
말하자면 기독교는 우리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우리 것을 혹 소흘히 여기게 될까봐, 형님은 기독교를 애써 멀리하시는 것 같았다.
그러나 몇년 전 우리 집에 오셔서, 한번은 기독교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종교에는 신앙과 함께 윤리와 도덕이 중요한데, 그중에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우애하며
가정화목이 근본 덕목이라 할 수 있다. 너희 부부가 사는 것을 보니,
이 세 가지를 고르게 잘 해나가고 있는 것 같으니, 네가 믿는 기독교 신앙도 괜찮은 것 같다"고 하시며
기독교를 좋게 여기셨다. 아마 그동안 우리들을 눈여겨 살피신 듯했다.
그러시면서도 하시는 말씀이
"그래도 나를 끌어들이려고 하지는 말고 우리는 서로 존중해서
동서 양진영이 평화공존하자"고 하셔서 한바탕 웃었다.
우리 형제는 서로 바쁜 가운데 만나면 나의 연구프로젝트에 관한 것이나
우리나라 과학기술 이야기로 의견을 나누었다.
그 외에도 형님은 특유의 시원하고 구수한 재담으로
주로 이야기를 하셨고, 나는 즐겁게 듣는 편이었다.
형님이 함께 하신 가족의 자리는 언제나 활기와 웃음이 넘쳤다.
내가 한동대학교 총장직 수락을 결정한 후에는 무척 기뻐하시면서 형제가
나란히 한 지역에서 선의의 경쟁을 하며 서로 도와서 미국의 MIT와 하버드대학처럼
두 대학을 통해 나라의 발전에 기여하자고 하셨다.
그리고 형님은 신설대학을 먼저 해보신 경험들을 토대로 많은 조언을 내게 해주셨다.
지난 1월말부터 4월말까지 한동대학교 일도 볼겸, 형님께도 여러가지 자문을 받으려고
대개 주말에 내가 포항으로 내려가서 함께 시간을 많이 보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최근의 어느 때보다 자주 뵈올 수 있었으니 그 기회라도 내게 있었던 것을 감사한다.
이제 형님께서는 속절없이 이 모든 것을 두고 가셨다.
그토록 사랑하셨던 포항공대와 그리고 심혈을 기울이셨던
방사광가속기의 준공도 보지 못하고 형님은 홀홀히 가셨다.
또한 형님이 사랑하신 형수님과 자녀들을 두고 그냥 훌쩍 이곳을 떠나시고 말았다.
포항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형님 설득에 홀려서 왔다는
포항공대 교수식구들과 그분들의 우정도 두시고 형님은 떠나셨다.
차마 믿기지 않던 사실이, 세월이 가면서 서서히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듯이,
일마다 때마다 커다란 빈 자리로 내게 다가선다. 나는 의지하고 따르던 형님과 스승을 동시에 잃은 것이다.
내게 큰 도움과 힘이 되어 주셨던 형님 ! 형을 잃은 동생의 비통함은 말로 다 표현할 길이 없다.
옛부터 형제는 부모님으로부터 한몸을 물려받아 한 줄기라 하였으니,
한몸이나 다름없다 하지 않았는가! 나의 한쪽이 떨어져 나간 것이다.
그토록 지극하게 받드셨던 노부모님을 두고 먼저 가시다니, 형님은 마지막에 큰 불효를 하시고 말았다.
형님의 본의는 아니셨겠지만!
형님을 두고 산에서 내려오면서 차마 아버님을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한 어느 친척에게
아버님은 북받치는 슬픔을 참으시면서 말씀하셨다.
"호길이는 참 멋지게 살다가 갔지!" 이 말씀으로 당신도 슬픔을 달래셨다.
누구나 한번은 가는 인생길에서, 짧은 삶이 아깝지만, 형님은 자신의 성품처럼 참으로 명쾌하게 살다가 가셨다.
형님을 아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 잊혀질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남겨놓으시고...!
김 영 길
(전· 한동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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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호길 박사님은
어려운시절 불편한 환경에서도
위축되거나
구애 받지않고 마음은 부자로
당당하게 살아오셨기에
존경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가족들도 화기애애
특히 아버님의 너그러우신 교육방식은
대단히 닮고싶은~~~~~
부모님을 앞서 가신
김호길 형님을 그리는 회고록 잘 읽었네.
임하댐이 나오는데
혹시 임동분이신가?
임동이야기니 임동 분이시겠지만 임동 어디서
태어났는지?
김호길 박사는 임동면 지례출신으로
김호길 박사의 부친 김용대 옹이
지례에 간이학교를 만들었는데
나중에 길산국민학교로 이어지고
지례가 임동으로 편입되고 부터는
임동초등학교 길산분교로 있다가
지금은 폐교되었죠
향우카페 <고향의 이사람-김호길 박사>를
참조하시면 김호길 박사를 더
가까이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