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이벽온방
1525년(중종 20)에 의관 김순몽(金順蒙)·유영정(劉永貞)·박세거(朴世擧) 등이 왕명에 의해 온역(瘟疫:돌림병)의 치료에 필요한 방문(方文:처방글)을 모아 엮은 의서(醫書). 1권 1책. 활자본.
그런데 이 책의 편집에 앞서 ≪의방유취≫에 적혀 있지 않은 치역방(治疫方:역병의 치료처방)들을 뽑아 평안도에 보내 시험하게 하였고, 벽온에 관한 약들을 먼저 평안도·함경도에 보내었다.
이러한 전후의 사정으로 미루어볼 때 ≪속벽온방≫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고, 1525년 온역에 필요한 모든 방문들을 뽑아서 최종으로 ≪간이벽온방≫을 엮어 보급한 것이다.
1554년(명종 9) 어숙권(魚叔權)이 엮은 ≪고사촬요 攷事撮要≫의 팔도책판목록에는 이 책의 이름이 없고, 전라도 전주·광양, 경상도 진주판으로 보이는 벽온방이 이 책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 책은 의학사 연구의 자료로서뿐만 아니라 16세기의 국어사 자료로서, 특히 1578년의 중간본은 방점(傍點:곁점. 이해를 돕기 위해 한자 위나 옆에 찍는 점)이 없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현재 원간본은 전하지 않고, 1578년(선조 11)의 을해자, 1613년(광해군 5)의 훈련도감자로 된 중간본이 전한다. 1578년의 내사본이 고려대학교 도서관 만송문고, 가천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그 중 가천박물관 소장본은 1997년 6월에 보물 제1249호로 지정되었다.
한편, 전자를 저본으로 하여 만든 영인본이 ≪민족문화 民族文化≫ 7호(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73)에 수록되어 발간되었다. 일본의 궁내청(宮內廳)에도 같은 책이 있기는 하나 내사본이 아닐 뿐 아니라, ≪우마양저염역치료방 牛馬羊猪染疫治療方≫과 합철되어 있다.
광제비급
1790년(정조 14)에 이경화(李景華)가 간행한 의서(醫書). 4권 4책. 목판본. 정조 때 함경도관찰사인 이병모(李秉模)가 이 지방 사람들이 의료혜택을 받지 못한 것을 한탄하여 구료(救療)에 활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이경화에게 이 책을 편술하게 하였다.
내용을 보면,
권1은 중풍을 비롯하여 제궐(諸厥)·오절(五絶 : 사람이 비명에 죽는 다섯가지)·칠규(七竅 : 사람얼굴에 있는 일곱구멍)·오발(五發)·옹저(癰疽 : 큰 종기의 총칭)·제상(諸傷)·인후(咽喉) 등의 질환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권2는 잡병 약 250개 항목에 관한 내용이 처방과 함께 체계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권3은 부인과질환인 부인문(婦人門)·잉부잡병(孕婦雜病)·부인잡병·소아문(小兒門)·두진(痘疹)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다.
권4는 저자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자연야생약초·무기약품(백반)·재배식용식물 등의 단방치험(單方治驗)에 대하여 폭넓게 기술하고 있고, 특히 개개 생약에 대한 수치방법(修治方法)·제조방법·복용량·적응증 등이 비교적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권4에 수재된 단방치험 약초나 무기약품·식용식물은 인삼을 비롯하여 향부자·동과·석창포·향유·대산(마늘)·쑥·당귀 등 누구나 쉽게 구하고 간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것으로 모두 40여종을 수록하고 있다.
다른 의서와 다른 점은 어려운 병리설을 줄이고 주로 임상과 직결되는 구급·잡병·부인병·소아병에 역점을 두었으며,
특히 단방생약에서는 함경도 산야에서 누구나 구할 수 있는 쑥·황경피나무·승엄초·장군풀·쇠비름·도둑놈의갈고리·으아리 등을 수록한 것이라 하겠다. 지금도 이 책에 기재되어 있는 생약은 질병치료에 많이 이용되고 있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구급간이방 [救急簡易方]
1489년(성종 20) 윤호(尹壕)·임원준(任元濬)·허종(許琮) 등이 편찬, 간행한 의학서. 8권 8책. 을해자본. 우리 나라의 구급방서(救急方書)로서는 가장 완비된 책으로, 질병을 중풍·두통 등 127종으로 나누어서 그 치료방문을 모아 엮었다. 시골에서도 이 책만 있으면 치료할 수 있도록 방문은 물론 병명까지 한글로 언해를 붙여놓았다.
≪성종실록≫ 20년 5월 말일의 기사에 따라 9권으로 알려지기도 하였으나, 권1 첫머리의 서문과 목록 등에 근거하면 8권이 정확하다. 원간본은 전하지 않고, 을해자본의 복각인 중간본만 전한다. 그러므로 원간본은 을해자로 되었으며, 그것을 지방에서 복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전의 ≪고사촬요 攷事撮要≫에 나타난 책판 목록에 의하면 원주·전주·남원·합천·곤양(昆陽)·해주 등에 책판이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 전하는 중간본도 완질이 아니고 권1·2·3·6·7의 5권 5책만 알려져 있다.
이들은 같은 판본이 아니나, 임진왜란 이전의 간본임에는 틀림없다. 이 중 권1·2는 1982년 ≪동양학총서≫ 9집으로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에서 영인본으로 간행하였다. 이 책은 의학서로서 우리 나라 의학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언해로서 중세국어 연구에 특이한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中世語의 한글資料에 대한 綜合的인 考察(安秉禧, 奎章閣 3, 1979)
≪참고문헌≫ 救急簡易方解題(田光鉉, 救急簡易方諺解 影印本, 檀國大學校東洋學硏究所, 1982)
≪참고문헌≫ 朝鮮醫書誌(三木榮 增補版, 大阪學術圖書刊行會, 1973)
구급방 [救急方]
조선 세조 때 간행된 의학서. 2권 2책. 목판본. 흔히 ≪구급방언해≫라고 불리나 이 책의 표지와 판심(版心)의 제목은 모두 ≪구급방≫으로 되어 있다.
초간본의 간행시기는 ≪세조실록≫ 세조 12년 6월조에 “팔도에 구급방을 각각 2건씩 하사하시다(賜八道救急方各二件).”라는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1466년 무렵에 간행, 배포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언해(諺解)는 선조 때 명의 허준(許浚)이 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활자가 을해자(乙亥字)라는 사실과, 국어 및 한자표기법 등으로 미루어보아 중종 이전의 언해임이 확실하므로 허준의 언해라고는 볼 수 없다.
≪구급방≫의 초간본은 전하지 않고 중간본이 전해지고 있는데, 현재 일본의 호사문고(蓬左文庫)에 완질이, 서울대학교 도서관 가람문고에 상권이 전한다. 이들은 완전히 같은 판본으로서 후자가 낙장본임이 다를 뿐이다.
이 중간본은 늦어도 16세기 중엽에는 간행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중간본이라 하더라도 을해자로 된 초간본의 복각본(覆刻本)이므로 15세기 국어 문헌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이 책은 성종 때 9권으로 증보되었는데, ≪구급간이방 救急簡易方≫이라는 이름으로 1489년(성종 20)에 간행, 배포되었다. ≪구급방≫의 내용은 응급조치를 해야 할 위급환자의 병명과 그 치료법을 36개 항목에 걸쳐 수록하고 있다.
상권은 주로 내과(內科)에 속하는 것으로 중풍(中風)·중한(中寒)·중서(中暑)·중기(中氣)·토혈·하혈·대소변불통·요수(溺水) 등 19개 항목이 수록되어 있고, 하권은 주로 외과(外科)에 속하는 것으로 척상(刺傷)·교상(咬傷)·화상(火傷)·독충상(毒蟲傷) 및 해산부(解産婦)의 응급치료법 등이 17개 항목에 걸쳐서 수록되어 있다.
≪구급방≫의 편찬에 참고, 인용한 의서는 34종이나 되는데, 대개가 당나라·송나라·원나라 및 명나라초의 의서 28종에 전래의 국내의서인 ≪향약구급방 鄕藥救急方≫·≪삼화자방 三和子方≫·≪향약집성방 鄕藥集成方≫ 등에서 묘방을 추리고 다시 당시의 처방을 덧붙였다.
≪참고문헌≫ 世祖實錄
≪참고문헌≫ 成宗實錄
≪참고문헌≫ 中世語의 한글資料에 대한 綜合的인 考察(安秉禧, 奎章閣 3, 서울大學校圖書館, 1979)
≪참고문헌≫ 救急方諺解文獻考(金智勇, 한글 148, 1971)
구급양방 [救急良方]
조선 중기에 내의원에서 펴낸 의서(醫書). 이 책은 ≪치종비방 治腫秘方≫ 뒤에 붙여 한 책으로 간행하였다. 권말에 적혀 있는 1559년(명종 14) 안위(安瑋)의 발문에 의하면 좌상(左相)이 내의원제공(內醫院諸公)을 시켜 구급에 필요한 모든 방문들을 수집, 선출한 것이다.
좌상이 호남관찰사로 있을 때 병에 걸려 양의(良醫)를 구하지 못하였던 경험을 살린 것으로 보인다.
이 방서는 병증에 따라 약방(藥方)을 생각하여 약을 조제할 것을 명하였는데 지극히 간요(簡要)하고 신효하여 이 비방을 개인이 소유하기에는 너무 아까워 모든 사람들이 이용하도록 하기 위하여 ≪치종비방≫의 뒤에 붙여 간행한 것이라 하였다.
일본 궁내성도서료(宮內省圖書寮), 교토대학(京都大學) 후지가와문고(富士川文庫), 미키문고(三木榮文庫) 등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참고문헌≫ 朝鮮醫籍考(三木榮, 中外醫事新報, 1932.11.∼1935.1.)
구급이해방 [救急易解方]
1499년(연산군 5)에 간행된 의서. 1책. 활자본. 1523년(중종 18)에 곤양군에서 개간되었다. 홍귀달(洪貴達)의 서(序)와 권건(權健)의 발(跋)에 의하면, 1498년 내의원(內醫院)의 도제조(都提調)인 윤필상(尹弼商)과 제조 홍귀달, 부제조 정미수(鄭眉壽), 내의(內醫) 김흥수(金興守) 등이 왕명에 따라서 찬집하고 이를 또한 언해하여, 1499년에 교서관(校書館)에서 간행, 반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세종 때의 ≪향약집성방 鄕藥集成方≫과 ≪의방유취 醫方類聚≫는 너무 호한(浩瀚)하고 세조 때의 ≪구급방≫은 너무 간략하므로, 이러한 사항을 보충하기 위하여 향리에서 산출되는 약재를 주로 하여 민간 구급에 필요한 간단한 방문(方文)들을 모아서,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적절한 방서로 편집하였다고 한다.
이 책은 당시의 우리나라 고유 의서로서 특기할 만하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서와 발이 없는 ≪구급이해방≫이 소장되어 있으며, 언해본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참고문헌≫ 고친 한글갈(최현배, 정음사, 1961)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6)
≪참고문헌≫ 朝鮮語學史(小倉進平, 東京 刀江書院, 1940)
구황보유방 [救荒補遺方]
1660년(현종 1) 신속(申?)이 기아(饑餓)의 방지와 질병치료를 위하여 펴낸 책. 1책. 목판본. 구황에 필요한 지식을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구황촬요 救荒撮要≫를 합편, 인행하였다. 1676년(숙종 2)에 박치유(朴致維)가 중간하였다.
구황이란 원래 흉년에 사람들의 굶주림을 돕는다는 큰 뜻이 있고, 백성들의 굶주림을 막고 흉년에 대용식량으로, 주위에서 손쉽게 얻을 수 있는 풀·뿌리·줄기·껍질·잎·열매·어린 싹 등으로 연명하게 하는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은 기곤장사인구활법(飢困將死人救活法)·기종인치료법(飢腫人治療法)·취송엽말법(取松葉末法)·취유피즙법(取楡皮汁法)·작송엽죽법(作松葉粥法)·작유피병법(作楡皮餠法)·작구법(作?法)·천금주법(千金酒法)·작삼법(作?法) 등으로, 구황의 대책과 방법을 누구나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예를 들어, 이 책과 ≪구황촬요≫에 적힌 굶주림에서 오는 부종치료법은 느릅나무껍질의 즙을 마시는 방법, 솔잎을 가루로 만들어 복용하는 방법, 어린 솔잎으로 미음을 쑤어 먹는 방법, 그밖에도 미음으로 만들어 먹는 방법을 비롯하여 미숫가루 만드는 방법 등을 나열하고 있다.
또, 약용 겸 식용이 되는 칡·상수리나무열매 등을 식량으로 할 수 있게 하였다. 이 책은 식용식물 연구 및 응용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책이다. 국립중앙도서관·국회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朝鮮産野生食用植物(鄭台鉉·임태치, 朝鮮總督府林業試驗場, 1942)
≪참고문헌≫ 朝鮮醫學史及疾病史(三木榮, 富士精版印刷株式會社)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급유방 [及幼方]
1749년(영조 25)에 조정준(趙廷俊)이 편찬한 소아과전문 의서(醫書). 13권 6책. 필사본.
〔특 징〕
이 책의 특징은 당시 중국 의서의 모방을 탈피하여 독자적이고 새로운 내용을 체계적으로 기술하였다는 점이다. 특히, 저자는 먼저 질병을 파악하여 생약을 투여하려 하였으며, 오랜 경험에 의하여 우리 나라의 풍토에 적합한 방법으로 병을 다스리는 많은 연구를 하였다. 또한, 치료경험의 예를 증세에 따라서 치료법을 설정하여 기술한 것이 특징이다.
〔주요내용〕
13권 가운데 권1은 총론이고, 나머지는 모두 각론에 해당된다.
권1 총론편의 내용은 동방육기론(東方六氣論)을 비롯하여 관형찰색(觀形察色)·오장주병(五臟主病)·소아맥법(小兒脈法) 등으로 되어 있다.
권2는 신생잡증(神生雜症)·태경간풍(胎驚癎風)·야체(夜啼),
권3은 농이(膿耳:귓구멍에서 고름이 나는 병)·단독(丹毒)·태창(胎瘡) 등이며,
권4는 소아의 경련성 질환에 대한 것이다.
권5는 그 때에 가장 초점이 되었던 소아의 마진(痲疹:홍역)과 두드러기질환에 대하여 자신의 경험을 예로 하여 비교적 체계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다.
권6은 소아질환에서 가장 문제되는 모든 열성질환(熱性疾患)·안질(眼疾)·구설창(口舌瘡)·번갈(煩渴: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마름) 등에 대하여 상세히 논하고 있다.
권7은 감질(疳疾:어린아이가 체하여 생기는 병)·적(積:체증이 오래되어 뱃속에 덩어리가 지는 병)에 대한 간단한 해설이 있다.
권8은 소아에게 자주 일어나는 복통·곽란(藿亂)·구토·설사(泄瀉)·이질(痢疾)·복창(腹脹)·기생충 등에 대하여,
권9∼11은 황달·서병(暑病)·해수(咳嗽)·천(喘)에 대하여, 권12·13은 비뇨기계(泌尿器系)의 질환으로 요백탁(尿白濁)·유뇨(遺尿:밤에 자면서 오줌싸는 병)·음종(陰腫) 등에 관하여 적고 있다.
이 책은 소아에게 흔히 나타나는 질환과 홍역·두드러기·열병·단독·곽란 등의 난치성 질환까지 폭넓게 취급하여 지금도 그 가치가 인정되고 있다. 서울특별시 시립종로도서관·규장각 도서 등에 있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66)
≪참고문헌≫ 朝鮮醫學史及疾病史(三木榮, 富士精版印刷株式會社, 1963)
단곡경험방초 [丹谷經驗方抄]
조선 후기에 이진태(李鎭泰)가 지은 신체 각 부분에 발생하는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수록한 의서(醫書). 1책. 필사본. 표지에는 ‘丹經壬午錄(단경·임오록)’이라고 쓰여 있다.
내용은 신체 각 부위의 크기 등의 특징을 설명하고, 그 부분에서 생기는 질병에 대하여 ‘단방(單方)’이라 쓰고 그 치료법을 소개하고 있다. 또, 약을 짓기 전에 각 부분에 대한 신체적 특징을 먼저 상세히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단방비요경험신편
신해용(申海容)이 저술한 의서(醫書). 1책. 1913년 서울 회동서관(匯東書館)에서 발간되었다. 지석영(池錫永)이 교열하였고 오영근(吳榮根)의 서문이 실려 있다.
이 책은 여러가지 질병을 망라하여 그 보통요법을 상세히 기술하고, 일상 볼 수 있는 구병(救病)을 쓰고 권말에 각종 유행성 전염병의 예방법을 부기(附記)하고 있다.
그 예언(例言)에서 약품은 주로 우리나라에서 산출되는 것으로서 일용식물 가운데 쉽게 구할 수 있고 값이 싼 것을 채용하였다. 또, 의약이 희소한 벽지와 약이(藥餌 : 약물과 음식)를 구하기 어려운 가난한 사람이나 의술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편리하도록 하였다.
또한, 일반인도 쉽게 알 수 있도록 쉬운 말로 쓰고, 한자는 하나하나 국문으로 방기(傍記)하여 여자·소아도 읽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책의 구성은 신체부위별로 두부(頭部)를 비롯한 20부, 병인(病因)이나 병세(病勢) 등의 36문(門)으로 되어 있다.
특기할 만한 점으로는 유행성 전염병 예방법을 독립적으로 부기하고 있음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이미 들어와 있던 서양식 전염병명과 전염병관이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韓國藥書攷(金信根, 서울大學校出版部, 1987)
단방신편 [單方新編]
1908년 이의경(李義絅)이 편찬한 의서(醫書). 정약용(丁若鏞)과 신만(申曼)의 경험 약방문을 수집, 편찬하여 간행한 것이다. 각문(各門) 및 445가지 병명을 쓰고, 그 다음 처방예를 싣고, 전문을 한글로 역(譯)을 붙인 것이다.
1908년에 간행된 책은 현전하지 않고 1911년에 간행된 것이 청주대학교·한양대학교·경희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참고문헌≫ 朝鮮醫籍考(三木榮, 中外醫事新報, 1932.11.∼1935.1.)
동은잡저 [東隱雜著]
박형진(朴瀅鎭)이 지은 연대미상의 의서. 1책. 필사본. 내용은 의약론·조리론(調理論)·신촬론(愼撮論)·수양론·이치론(異治論)·부인귀(附人鬼)로 되어 각각에 대하여 자기의 생각하는 바를 적고 있다.
의약론에서는 의자(醫者)를 명의(明醫)·양의(良醫)·예의(例醫)·편의(偏醫)·용의(庸醫)·행의(幸醫)·매의(魅醫)·이의(異醫)의 여덟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것이 특색이다.
≪참고문헌≫ 韓國藥書攷(金信根, 서울大學校出版部, 1987)
동의보감 [東醫寶鑑]
1610년(광해군 2) 허준(許浚)이 지은 의서(醫書). 25권 25책. 목판본. 1613년 내의원(內醫院)에서 훈련도감의 개주갑인자(改鑄甲寅字)로 간행하였다.
허준이 전심전력하여 1610년에 마침내 완성하자, 왕은 곧 내의원에 명하여 인출(印出), 널리 반포하게 하였다.
내용은 5개 강목으로 나뉘어 있는데, 내경편(內景篇) 6권, 외형편(外形篇) 4권, 잡병편(雜病篇) 11권, 탕액편(湯液篇) 3권, 침구편(鍼灸篇) 1권이다.
내경편에는 신형(身形)·정(精)·기(氣)·신(神)·혈(血)·몽(夢)·성음(聲音)·언어(言語)·진액(津液)·담음(痰飮)·오장육부·포(胞)·충(蟲)·대소변 등 내과에 딸린 질병과 함께 수양·양로병들과 목록이 부기되어 있다.
외형편에는 두(頭)·면(面)·이(耳)·비(鼻)·구설(口舌)·치아·인후·두항(頭項)·배(背)에서 흉(胸)·복(腹)·요(腰)·협(脇) 및 사지·피(皮)·육(肉)·골근·모발·전후음(前後陰) 등에 이르는 외과적 질병이 기록되어 있다.
잡병편에는 천지기운·심병(審病)·변증(辨證)·진맥(診脈)·용약(用藥) 등 진단법으로부터 풍(風)·한(寒)·서(暑)·조(燥)·화(火)·내상·허로·곽란·구토·해소·적취(積聚)·부종·창만(脹滿)·소갈·황달·온역(瘟疫)·괴질(怪疾) 등 내과질환과 옹저(癰疽)·제창(諸瘡)·제상(諸傷) 등 외과질환들이 혼잡(混雜)되어 있고, 그 밖에 부인과·소아과가 따로 첨부되어 있어 각 병상들을 그 증후에 따라 배열하였다.
탕액편에는 탕액서례(湯液序例)로서 채약법(採藥法)·건약법(乾藥法)·삼품약성(三品藥性)·수제법(修製法)·제약법·탕산환법(湯散丸法)·자약법(煮藥法)·복약법·오미약성(五味藥性)·기미승강(氣味升降) 등의 사례를 기록하였다.
그 다음에는 전 약물을 수부(水部) 35종, 토부(土部) 18종, 곡부(穀部) 107종 등 140여 부로 나누어, 그 약명 아래에 대개는 우리의 속명을 붙이고 그 다음에 약성·약미·약독의 유무 및 약효와 채취시기 등에 관한 본초학적 지식을 간략하게 기록하였다.
이 책에는 우리 나라의 의서로서 세종 때의 ≪향약집성방 鄕藥集成方≫·≪의방유취 醫方類聚≫와 선조 때의 ≪의림촬요 醫林撮要≫, 복희(伏羲)의 작이라는 ≪천원옥책 天元玉冊≫, 신농(神農)의 작이라는 ≪본초 本草≫, 그리고 ≪소문 素問≫·≪영추경 靈樞經≫ 등 83종의 고전 방서들과, ≪상한론 傷寒論≫·≪맥경 脈經≫·≪단계심법 丹溪心法≫ 등 한(漢)·당(唐) 이래 70여 종의 의방서가 인용되어 있다.
이러한 방서들 중에는 저자의 고증이 확실하지 않은 것과 또 저자의 연대에 관한 차이점도 볼 수 있으나, 수·당 이래로 명나라 초에 이르는 중요한 고전 의방서들이 거의 다 망라되어 있다.
편집의 특징은 내경·외형·잡병·탕액·침구 등 5대 강편 아래에 질병에 따라 항(項)·목(目)을 정하고 각 항목 아래에는 그 항목에 해당되는 병론과 약방들을 출전과 함께 자세히 열거하여 그 병증에 관한 고금의 치방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각 병증을 따르는 단방(單方)과 침구법을 부기하였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경험방을 붙이기도 하였다. 특히, 주목할 것은 각 병증의 항과 목이 주로 증상을 중심으로 열거되어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내경편의 진액항에 한증(汗症)의 처방으로 먼저 그 맥법과 원인을 밝히고, 그 다음에 자한(自汗)·도한(盜汗)·두한(頭汗)·심한(心汗)·수족한(手足汗)·음한(陰汗)·혈한(血汗) 등 8목으로 꾸몄다.
외형편의 복항(腹項)에는 복통의 치방으로 먼저 복위도수(腹位度數)와 맥법 등을 들고, 그 다음에 한복통(寒腹痛)·열복통(熱腹痛)·사혈복통(死血腹痛)·식적복통(食積腹痛)·담음복통(痰飮腹痛)·충복통(蟲腹痛) 등 6목으로, 잡병편의 황달항에는 황달·주달(酒疸)·곡달(穀疸)·여로달(女勞疸)·황한(黃汗) 등 5종으로 분류되어 있어, 주로 환자들이 진찰을 받을 때에 흔히 말할 수 있는 한증(汗症)·복통·황달 등의 병증들이 항목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환자들이 말하는 증상을 식별하기 위하여 많은 방서를 참고할 여가가 없는 임상의가들에게는 이 책을 읽음으로써 손쉽게 해당 병증(病症)에 대한 고금의 의방서들을 열람할 편리를 주고 있다. 이 책이 동양의학계에서 의인들의 많은 환영을 받는 것도 이러한 편집내용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우리 나라에서 출간된 뒤에 청나라와 일본에서는 여러 번 번각되었으며, 최근까지도 민국상해석인본(民國上海石印本)·대만영인본 등이 계속 출간되고 있다.
우리 나라 사람의 저술로 ≪동의보감≫처럼 중국인이나 일본인들에게 널리 읽힌 책은 아마 없을 것이다. 책명은 ≪동의보감≫이나 실은 동양의학의 보감이며 동양의학의 백과전서이다. 간본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① 우리 나라 간본:내의원 훈련도감활자 초간본(1611∼1613), 호남관찰영 전주장본(全州藏本), 영남관찰영 대구장본, 갑술 내의원 교정 영영개간본(嶺營改刊本, 순조 14, 1814), 갑술 내의원 교정 완영중간본(完營重刊本) 등이 있다.
② 중국 간본:≪동의보감≫ 초간본(1763), ≪동의보감≫ 재간본(1796, 江寧 敦化堂), ≪동의보감≫ 복간본(1890)과 민국상해석인본·대만영인본 등이 있다. 이들 인본 가운데 1890년의 광서복간본(光緖覆刊本)은 건륭판(乾隆版)이나 가경판(嘉慶版)에 의한 것이 아니고 일본 간본에 의한 것으로 밝히고 있다.
③ 일본 간본:≪동의보감≫ 초간본(梱井藤兵衛, 京都書林, 1724), ≪동의보감≫(1799), ≪원원통≫ 훈점(訓點) 재간본(大阪書林, 1799)이 있다. 이 간본들은 일본 에토시대(江戶時代) 의가(醫家)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방서로서 널리 전포되었다.
제22∼24권의 3권 3책은 탕액편으로 향약명(鄕藥名) 649개가 한글로 적혀 있어 국어사 연구에 도움을 준다. 초간본을 중심으로 하여 국어학적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둘째, 원순모음화현상(圓脣母音化現象)이 보이는데, 이것은 선행자음이 양순음(兩脣音)인 경우의 순행동화(順行同化)가 아니라 후행자음이 양순음인 경우의 역행동화(逆行同化)이다(조기룸, 보릿기룸).
이 책은 규장각도서와 장서각도서 및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있다. 1986년에 태학사(太學社)에서 1613년의 활자본 및 그 이후의 중간본을 탕액편만 모아 영인한 적이 있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66)
≪참고문헌≫ 東醫寶鑑(金斗鍾, 韓國의 名著, 玄岩社, 1969)
≪참고문헌≫ 東醫寶鑑解題-東醫寶鑑 湯液篇-(洪允杓, 太學社, 1986)
≪참고문헌≫ 東醫寶鑑解題(尹炳泰, 도서관 106, 1966)
동의수세보원 [東醫壽世保元]
1894년 이제마(李濟馬)가 지은 의서(醫書). 4권 2책. 목활자본. 저자의 대표적인 의학서로서 1893년 7월 13일부터 저술에 착수하여 다음해 4월 13일에 완성하였다. 책명의 ‘동의’는 중국의 의가(醫家)와 구별하기 위한 것이며, ‘수세’는 온 세상 인류의 수명을 연장시킴을 뜻하는 것이다. ‘보원’은 만수(萬殊:세상 모든 것은 여러 가지로 다름)의 일원(一元)의 도(道)를 보전함을 뜻한다.
그가 1백여년 전에 사상체질론(四象體質論)을 제창하여 원리(原理)·생리(生理)·병리(病理)·체질감별(體質鑑別)·진단(診斷) 및 사상체질에 맞는 약물선택과 치료방제조성 등 모든 것을 창도(創道)하고 ≪동의수세보원≫을 저술함으로써 동의임상(東醫臨床)의 새로운 분야가 우리 나라 의자(醫者)에 의하여 개척된 것이다.
사상의학(사람의 체질은 太陽人·太陰人·小陽人·小陰人으로 나누고, 같은 병이라도 체질에 맞게 약을 써야 한다는 학설)은 전인미답의 처녀지를 개척한 세기적인 신학설로서 사상의학의 현묘한 학리, 간편한 운용, 경이적인 영효(靈效)에 수긍하게 되어 의계(醫界)의 대세는 이 사상권(四象圈)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저자는 이 책의 집필을 끝낸 다음해 고향인 함흥에 돌아가서 의업(醫業)에 종사하다가, 1900년에 다시 성명론(性命論)으로부터 태음인론(太陰人論)까지 증책(增冊)하고 태양인(太陽人) 이하 삼론(三論)은 미처 끝내지 못하고 그 해 별세하였다.
다음해 함흥군 율동계(栗洞契)에서 그의 문인 김영관(金永寬)·송현수(宋賢秀)·한창연(韓昌淵)·최겸용(崔謙鏞)·위준혁(魏俊赫)·이섭항(李燮恒) 등의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이 책의 구성은 성명론·사단론(四端論)·확충론(擴充論)·장부론(臟腑論)·의원론(醫源論)·소음인신수열표열병론(少陰人腎受熱表熱病論)·소음인위수한이한병론(少陰人胃受寒裏寒病論)·범론(泛論)·소양인비수한표한병론(少陽人脾受寒表寒病論)·소양인위수열이열병론(少陽人胃受熱裏熱病論)·범론·태음인위완수한표한병론(太陰人胃腕受寒表寒病論)·태음인간수열이열병론(太陰人肝受熱裏熱病論)·태양인외감요척수병론(太陽人外感腰脊髓病論)·태양인내촉소장병론(太陽人內觸小臟病論)·광제설(廣濟說)·사상인변증론(四象人辯證論)의 17론 및 ≪사상방약 四象方藥≫ 등 전 4권으로 되어 있다.
그 가운데 의원론 이하 13론 중 광제설을 제외한 12론 및 사상방약은 그 골자로서 임상연구의 핵심부분이고, 나머지 5론은 거의 관념적 이론에 불과하다. 즉 사상의학은 사상유형(四象類型)의 체질의학(體質醫學)이다. 그의 핵심이론인 사단론에서는 사람을 네 가지 유형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여기에 따라서 처방과 약의 선택이 달라진다.
즉 소음인 체질은 비소신대(脾小腎大), 소양인 체질은 비대신소(脾大腎小), 태음인 체질은 간대폐소(肝大肺小), 태양인 체질은 폐대간소(肺大肝小)라 하여, 실(實:넘치다)은 사(瀉:쏟아내다)하고, 허(虛:부족함)는 보(補:보충하다)하는 방법으로 사람의 병을 고치는 설을 주창하였다.
≪참고문헌≫ 동의사상진료의전(행림서원, 1935)
≪참고문헌≫ 사상체질의학론(윤길영, 한얼문고, 1973)
≪참고문헌≫ 동의수세보원(이제마 저, 이가원 역, 서문문고, 1975)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참고문헌≫ 朝鮮醫學史及疾病史(三木榮, 富士精版印刷株式會社, 1963)
동인경험방 [東人經驗方]
저자·연대 미상의 의서(醫書). 1398년(태조 7)에 제생원(濟生院)에서 편집한 권근(權近)의 ≪향약제생집성방 鄕藥濟生集成方≫에 그 책이름이 보이며, ≪제생집성방≫과 함께 간행한 ≪신편집성마의방·우의방 新編輯成馬醫方·牛醫方≫에 5문(文), ≪향약집성방≫에 6문이 인용되어 있어 그 내용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진휘속고 震彙續攷≫의 하집(夏集)에 ≪동인경험방≫ 2권 찬자부전(撰者不傳)이라고 적혀 있다. 이 경험방은 고려말경부터 조선의 건국초에 이르는 동인(東人)들의 경험방을 수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鄕藥濟生集成方
≪참고문헌≫ 新編集成馬醫方·牛醫方
≪참고문헌≫ 鄕藥集成方
≪참고문헌≫ 震彙續攷
두창경험방 [痘瘡經驗方]
조선 중기에 박진희(朴震禧)가 지은 두창(痘瘡 : 천연두) 치료 의서(醫書). 1권 1책. 목판본. 두의(痘醫)로서 공로가 큰 저자의 경험방으로 알려져 있으나 발행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1636년(인조 14) 이식(李植)의 속수본(續修本)인 ≪고사촬요 攷事撮要≫에는 인용이 되지 않았으며, 현종 말경의 판(板)인 ≪고사촬요부록 攷事撮要附錄≫에 처음으로 첨부되어 있어 현종 말기에 편술된 것으로 짐작된다.
또 1672년(현종 13) 이번(李蕃)의 ≪용산요두편 龍山療痘篇≫에서도 박진희의 두방(痘方)을 참고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의 사장본(私藏本)의 서(序) 또는 책의 끝에도 간행연대는 씌어 있지 않다.
미키(三木榮)가 편집, 간행한 ≪조선의학사급질병사 朝鮮醫學史及疾病史≫에 기재한 두창경험방에는 신묘 11월 이세항(李世恒)의 서우상산제금헌(書于尙山製錦軒)이라는 발문이 적혀 있어 이 의서는 일차적으로 중각(重刻)된 사실을 미루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東醫寶鑑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참고문헌≫ 朝鮮醫學史及疾病史(三木榮, 富士精版印刷株式會社, 1963)
둔몽집 [鈍蒙集]
조선시대 둔몽자(鈍蒙子)가 저술한 의서(醫書). 1871년(고종 8)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사본 1권이 전해지고 있다. 둔몽자의 전기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의 자서(自序)와 1904년 태의원전의(太醫院典醫) 이준규(李峻奎)의 서(序)가 보인다.
이 책의 내용은 오운육기설(五運六氣說)과 질병 발생과의 관계를 저자 자신의 경험을 예로 들어 약방과 함께 간략하게 서술하였다. 그 밖에 홍진(紅疹)·부인병·소아병 및 두진(痘疹) 등에 대한 자신의 치료법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마경초 [馬經抄]
말의 관상〔相馬〕과 병든 말의 진단·치료법 등에 관한 수의서(獸醫書). 저자·연도 미상. 1책. 표제(表題)는 ‘마경방(馬經方)’으로 되어 있으나 내제(內題)는 ‘마경초(馬經抄)’로 되어 있다. 내용은 ≪마경≫을 초록한 것으로 서두에 “32종의 관상을 보는 법 가운데 눈의 상(相)이 가장 중요하며 다음이 두상(頭相)이고 얼굴은 방원(方圓)함이 좋다.”는 상마(相馬)의 비결이 요약되어 있다.
선마상(善馬相)은 “다리가 길고 얼굴은 가죽을 벗긴 토끼얼굴 같고 눈은 방울 같으며, 눈 아래가 두툼하고 두골(頭骨)이 뚜렷하여야 한다. 귀는 깎은 대쪽 같으며 코가 넓고 크되 볼의 뼈는 높고 윗입술은 사각방정(四角方正)하여야 한다. 아랫입술도 뚜렷하고 목은 길어야 한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선마에 대한 기준으로 육종면에서 표현형(表現型)을 통한 우량형질의 선발기준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좋지 않은 말을 도태하는 기준은 “머리가 커서 무겁고 귀가 너무 크며, 아랫입술이 뾰족이 빨고, 볼이 엷으며 목이 굵고 짧으며, 힘줄이 가늘어 보이고, 털이 바랜 듯하며 굵고 발목이 가늘고 배가 커서 처진 듯하며 뒷다리가 곧고 무릎뼈가 작고 허리가 오목하고 눈이 양이나 코끼리 같거나 낙타나 돼지허리 같은 말”로 규정되어 있다.
다음에는 50여 종의 병명과 말의 외양이나 행동 등을 보아서 병을 간접적으로 진단하는 요령과 치료방법이 기록되어 있다. 예컨대 간(肝)이 상하면 눈이 붉고 눈곱과 눈물이 많다는 것이며, 간에 열이 나면 눈망울이 어둡고, 간이 냉하면 눈물이 항상 흐르고 간이 위태로우면 눈빛이 항상 푸르다는 것 등이다.
이러한 병의 치료는 약물치료·물리치료 등이 있으나 침(鍼)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 밝히고, 맨끝에 22개의 혈(穴)을 표시한 그림을 곁들여 이를 설명하고 있다. 이 마의서는 재래의 수의술을 연구하는 데 참고가 되며, 우리 나라 수의기술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農林水産古文獻備要(金榮鎭, 農村經濟硏究所, 1982)
마경초집언해 [馬經抄集諺解]
17세기경에 ≪마경대전 馬經大典≫과 ≪신편집성마의방 新編集成馬醫方≫에서 필요한 내용을 간추려 엮어 언해한 책. 2권 2책. 목판본. ≪마경언해≫라고도 부른다.
간기(刊記)가 없기 때문에 이 책의 편찬자와 편찬경위 및 간행시기 등에 대하여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조선 인조 때 이서(李曙)에 의하여 간행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한편 저자에 대한 언급이 없이 1682년(숙종 8) 전후에 간행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내용은 노마(駑馬)·흉마(凶馬)의 변상법(辨相法), 마수(馬壽)·마치(馬齒)·장부진맥법·양마법·방목법(放牧法)·행침법(行針法)·골명법(骨名法)·혈명도(穴名圖) 등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언해하였다. 그밖에 말의 오장육부 질환과 각종 골저(骨疽)·창상·온역문(瘟疫文) 등이 나누어 해설되어 있다.
이 책에서 드러난 언어기술태도는 동국정운식(東國正韻式) 한자음이 아닌 현실 한자음을 달아놓았다는 것과 국어기술에 있어서 비교적 보수적 태도를 취하여 당시의 국어보다 시간적으로 앞 시대의 언어상태가 그대로 기술되었다는 것 등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이유로 이 책의 언어를 17세기 국어자료로 곧 이해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그러나 아무리 보수적인 표기를 취한다고 하여도 당대의 언어 노출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참고문헌≫ 고친 한글갈(최현배, 정음사, 1961)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66)
≪참고문헌≫ 朝鮮語學史(小倉進平, 東京 刀江書院, 1940)
마과회통 [麻科會通]
1798년(정조 22)에 정약용(丁若鏞)에 의하여 편술된 마진(麻疹 : 홍역)에 관한 의서(醫書). 6권 3책. 필사본. 이 책은 우리나라 마진학의 최고봉이라는 평을 들었는데, 마진치료에 대한 수준이 상당히 발전되어 있었다는 것은 자랑할 만하다.
마과내용을 크게 나누면, 원증편(原證篇)·인증편(因證篇)·변사편(辨似篇)·자이편(資異篇)·아속편(我俗篇)·오견편(吾見篇)·합제편(合劑篇) 등이다.
이 책을 1802년(순조 2)에 남학교수 홍석주(洪奭周)가 개편하였으나 정약용의 원본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장서각도서에 있다.
≪참고문헌≫ 現代方藥合編(陸昌洙, 癸丑文化社, 1976)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참고문헌≫ 中國漢方(藥業新聞社, 1981)
≪참고문헌≫ 韓醫藥書攷(金信根, 서울大學校出版部, 1987)
≪참고문헌≫ 朝鮮醫學史及疾病史(三木榮, 富士精版印刷株式會社, 1963)
마방통휘 [麻方統彙]
1802년(순조 2) 홍석주(洪奭周)에 의하여 간행된 마진(痲疹 : 홍역)에 관한 의서(醫書). 4권 4책. 목판본. 홍석주는 정약용(丁若鏞)의 ≪마과회통 麻科會通≫의 권수에 채록된 초론편에서 중국 마진서들의 서론과 그 일부를 빼고 특히 아속편(我俗篇)과 오견편(吾見篇)을 개편하였다.
그 밖에 제일원증편(第一原證篇)·제이인증편(第二因證篇)·제삼변사편(第三辨似篇)·제사자이편(第四資異篇)·제칠합제편(第七合劑篇) 등을 재편성하여 원병편(原病篇)·잡증편(雜證篇)·변류편(弁類篇)·방통편(房通篇)·탕액편(湯液篇)으로 그 명칭을 일부 변경시켰는데, 다른 각 편(篇)의 내용은 정약용의 원서와 일치되고 있다.
이와같이 홍석주가 ≪마과회통≫의 편저자 정약용의 이름을 노출시키지 않은 것은, 당시 정약용이 서학의 사옥으로 강진에 귀양가 있었던 때문으로 사료되나 책명과 권차를 바꾸어 교정, 개간한 것은 홍씨일파의 세력이 컸던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한독의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東醫寶鑑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참고문헌≫ 韓醫藥書攷(金信根, 서울大學校出版部, 1987)
≪참고문헌≫ 朝鮮醫學史及疾病史(三木榮, 富士精版印刷株式會社, 1963)
마진기방 [麻疹奇方]
1759년(영조 35) 이헌길(李獻吉)이 자신의 경험과 관찰에 의해 두진(痘疹:천연두)을 치료하는 방법을 쓴 의서(醫書). 1책. 필사본.
〔주요내용〕
내용은 운기총론(運氣總論)·인증편(因證篇)·변사편(辨似篇)으로 구분되어 있다. 운기총론에는 독원(毒源)·치법(治法)·시령(時令)·약계(藥戒)·맥도(脈度)·일기(日期)·초열(初熱)·출진(出疹)·출험(出險)·열후(熱候)·여독(餘毒)·부인금기(婦人禁忌)가 있다.
이 책의 발문에 “처음 상경하였을 때는 단복(單服)을 입었기 때문에 시술(施術)하지 못하고 귀향하려고 하였는데, 교외로 나오자 두진으로 사망한 시체를 메고 가는 사람이 잠시 동안 백이나 되었다.
그것을 보고 나는 그들을 구할 의술이 있는데, 예법에 구속이 되어 그냥 간다는 것은 인(仁)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친척집으로 돌아가서 그 비법을 말하여 위태한 자가 회생이 되니, 열흘 동안에 명성이 크게 떨쳐서 살려달라고 오는 사람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래서 문을 나가 다른 집으로 가면 사람들이 벌떼처럼 따라 다녔으며, 이에 약방문을 주었으나 그를 다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치진(治疹)하는 방법을 입으로 불러서 전수하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의 내용은 그 뒤에 발행된 여러 가지 마진서(痲疹書)에 많이 이용되고 있다. 규장각도서 및 한독의약박물관에 있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참고문헌≫ 朝鮮醫籍考(三木榮, 中外醫事新報, 1932.11.∼1935.1.)
마진휘성 [麻疹彙成]
저자는 당시 마진방(麻疹方)에 관한 전문서가 없는 것을 통감하고, 자신이 임상(臨床)을 토대로 하여 얻은 처방을 집성하고 많은 고서를 인용하여 ≪마진휘성≫을 편찬하였고, 그 내용은 원론운기(原論運氣)로부터 출몰잡병(出沒雜病)에 이르기까지 상세히 기록하였다.
또한, 범례에서도 마진치법(麻疹治法)의 항목에는 ≪동의보감≫·≪급유방 及幼方≫ 등의 여러 의서와 동의속방(東醫俗方)을 널리 채록하였다.
설(說)이 다른 것은 반드시 그 아래에 저자의 성씨를 쓰고, 또 증(症)이 같은데 처방이 다른 것은 각문(各門)의 밑에 처방한 사람의 이름을 밝히고, 병상의 논증과 치방이 동일한 것은 가능한 한 이름을 적어 처방의 이동(異同)을 구명(究明)하게 하였다. 한독의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東醫寶鑑
≪참고문헌≫ 及幼方
맥경 [脈經]
중국 진한시대에 왕숙화(王叔和)가 지은 의서(醫書). ≪수서경적지 隋書經籍志≫에는 10권으로 적혀 있으며, 맥리(脈理)와 맥상(脈狀)의 형증(形症)에 따라 질병의 진단·치료 및 예후를 논하는 한의방의 기초지식에 속하는 고전의서이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맥경≫은 그 당시의 원본이 아니고 후인들이 가필한 것으로, ≪맥경≫을 교정한 송(宋)대의 임억(林億) 등이 진정차자(進呈箚子)의 글에 ≪소문 素問≫·≪구허 九墟≫·≪영추 靈樞≫ 등을 교정하여 그 중복을 제외하고 탈루(脫漏)를 보충하였다는 데서 짐작된다.
이 책은 신라에서 692년(효소왕 1)에 처음으로 의학교육을 실시할 때에 교과서로서 채택되었으며, 고려에서 959년(광종 10)에 과거제도를 실시할 때에도 의업식(醫業式)·주금식(呪禁式)에서 모두 채용되었다.
그리고 조선 세조 때에 의학의 취재로 관직의 품위를 정할 때에 방서로서 채용되었으며, ≪의방유취≫나 ≪동의보감≫ 등 우리나라 중요의방서의 인용서목 중에도 보이는 고전의방서이다. 성균관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醫方類聚
≪참고문헌≫ 東醫寶鑑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목과일람 [目科一覽]
작자·연대 미상의 안과(眼科) 전문의서. 1책 55장. 필사본. 이 책은 전후 2편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전편에서 총설 및 내장(內障)·외장(外障) 등 여러 가지 눈의 질병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후편에서는 여러 가지 눈의 질병에 대한 약방(藥方)을 기술하고 있다.
또한, 이 책은 ≪득효방 得效方≫·≪의학입문 醫學入門≫·≪의학강목 醫學講目≫·≪의방강목 醫方綱目≫·≪의방유취 醫方類聚≫·≪동의보감≫ 등에서 인용하고 있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박시양방 [博施良方]
주로 구급에 필요한 경험양방(經驗良方)들을 기술하고 있다. 김두종가(金斗鍾家)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朝鮮醫書誌(三木榮, 大阪學術0xBB76書刊行會, 1973)
방약합편 [方藥合編]
약성강령(藥性綱領)에 있어서는 오색소주(五色所主)·오미소주(五味所主)·승강부침(昇降浮沈)·오미상극(五味相克)·오병소금(五病所禁)·오장오미보사법(五臟五味補瀉法) 등을 기재하였다. 수증용약례(隨症用藥例)에서는 질병에 따라서 군약(君藥, 또는 主藥)을 선택할 수 있게끔 비교적 체계적으로 나열되어 있다.
제허용약례(諸虛用藥例)에 있어서는 병의 증세에 따라서 배합할 수 있는 생약을 2, 3개씩 나열하였다. 그 밖에도 하제(下劑)·토제(吐劑)·한제(汗劑)로 쓸 수 있는 약물을 약성에 따라서 구분하였다. 처방의 구성은 대방(大方)·소방(小方) 등 칠방(七方)을 설명하였고, 약의 종류에 따라서 십제(十劑)를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처방에 바로 활용할 수 있는 약성가(藥性歌)를 수록한 것은 이 책의 장점이며, 그 밖에 구급법·육진양약(六陳良藥) 등이 계통적으로 되어 있다. ≪방약합편≫의 처방 나열은 상통(上統:補劑類, 補藥類)·중통(中統:和劑類)·하통(下統:攻劑類)으로 구분하여 처방마다 간단한 주치(主治) 활용법·가감법·조제방법·복용방법 등을 기재하였으므로 사용에 매우 간편하다.
질환(疾患)의 분류방법은 ≪동의보감≫·≪제중신편≫·≪의문보감≫과 비슷하게 풍(風)·한(寒)·서(暑)·습(濕)·조(燥)·화(火)·내상(內傷)·허로(虛勞)에서 소아(小兒)까지를 처방과 연결하여 나열하고 있다.
이 책을 지금도 많은 임상가들이 쓰고 있는 것은 그만큼 보기가 쉽고 실용에 적합하며, 또 이해하기가 편하기 때문이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참고문헌≫ 方藥合編
≪참고문헌≫ 現代方藥合編(陸昌洙, 癸丑文化社, 1976)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백제신집방 [百濟新集方]
백제시대에 간행되었던 의서. 이 책은 저자와 발간연대를 확실히 알 수 없으나, 고려 성종 3년(984)에 일본인 단파(丹波康0xBD24)가 편술한 ≪의심방 醫心方≫에 그 방문이 두 곳이나 인용되어 있다.
그 중의 하나는 그의 증손(曾孫)인, 단파(丹波雅忠)의 ≪의략초 醫略抄≫에 전재되어 있는데, 그 방문은 치폐옹방(治肺癰方)과 치정종방(治丁腫方)이다.
제2방의 치정종방은 국엽(菊葉)을 그 줄기와 함께 두드려 즙을 세 되쯤 되게 하여 단번에 복용하는 것이다. 송대(宋代)의 ≪경사증류대전본초 經史證類大全本草≫ 권6의 국화(菊花)의 조에 ≪갈씨주후방≫을 인용하며 “종기를 치료할 때는 국화잎 한 줌을 두드려서 짜낸 즙 한 되를 마시면 즉시 낫는다(治丁腫, 垂死, 菊葉-握, 搗絞汁-升, 入口, 卽治).”라고 적혀 있으니 본 방문도 역시 ≪갈씨주후방≫에 의거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제1방에 있는 황기는 한방의 최초 본초서인 ≪신농본초경 神農本草經≫에 이미 기재되어 있고 그 치방에 있어서도 옹종(癰腫:종기)·저창(疽瘡:등장. 등에 나는 부스럼)에 적용되어 있어 그 치법이 ≪백제신집방≫의 치폐옹방과 거의 일치된다.
제2방의 국엽은 ≪신농본초경≫에는 수록되지 않고 다만 국화만 기재되어 있다. 남조시대(南朝時代)의 도홍경(陶弘景)의 ≪명의별록 名醫別錄≫에는 국엽의 채취방법이 적혀 있을 뿐 아니라 정종에 대한 치방도 갈홍의 주후방과 거의 같게 되어 있다.
이상과 같이 ≪백제신집방≫에 사용된 두 약초는 중국의 고대 본초서에 이미 보이며, 그 응용방법도 거의 일치된다. 그러므로 ≪백제신집방≫은 중국 한방의학이 이미 성숙기에 달하게 되었던 삼국시대 후기에 성립된 것이라 짐작되며, 중국의약과의 교류관계에 있어서 백제는 지역적으로 중국과 서남해역을 격한 남조시대의 ≪갈씨주후방≫이나 ≪신농본초경≫과 ≪명의별록≫ 등 의방서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백제가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의방서에만 의존하지 않고 ≪백제신집방≫ 같은 독자적 의방서를 편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그 당시의 백제의학이 단순히 한의방의 수용에 만족하지 않고 그 지식을 종합, 정리하여 점점 자주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醫心方
≪참고문헌≫ 經史證類大全本草
벽역신방
1613년(광해군 5) 허준(許浚)이 독역(毒疫:전염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편찬한 의서(醫書). 1613년에 당홍역(唐紅疫), 또는 당독역(唐毒疫)이 유행하자 예조에서는 이를 퇴치하려고 당시 내국(內局)의 명의(名醫)로서 방서(方書)와 경험제방(經驗諸方)에 밝은 허준과 그의 협력자로 하여금 일서(一書)를 찬하도록 임금에게 청하였다고 한다.
이에 광해군은 어의(御醫) 허준에게 명하여 전염병의 원인 또는 병원(病原)·유행상황·병상(病狀) 등을 파악하게 하였고, 허준이 진단·치료법·예방·약방(藥方) 등을 기록하여 펴낸 것이 곧 ≪벽역신방≫이다.
이 때에 유행하였던 질환으로 당독역 또는 진(疹)이라는 병명은 지금의 성홍열(猩紅熱)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이며, 당시에는 성홍열의 균주를 확인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벽역신방≫에는 당독역의 병상·화운지세다열질(火運之歲多熱疾)·독역즉진야(毒疫卽疹也)·독역전속심화(毒疫專屬心火)·독역환형(毒疫換形)·독역형증(毒疫形證)·독역치법(毒疫治法)·독역예방·독역침법·약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지금도 성홍열 예방과 치료에 한방을 이용할 때에는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의서라 할 수 있다. 한독의약박물관과 규장각도서·장서각도서에 있다.
≪참고문헌≫ 東醫寶鑑
≪참고문헌≫ 藥品微生物學(陸昌洙 외, 進明出版社, 1979)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참고문헌≫ 朝鮮醫學史及疾病史(三木榮, 富士精版印刷株式會社, 1963)
벽온방
온역이란 급성열성전염병(急性熱性傳染病)에 가까운 질환으로 오늘날의 전염성질환 또는 급성유행성전염병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종류의 의서는 그 뒤 여러가지가 간행되었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참고문헌≫ 朝鮮醫學史及疾病史(三木榮, 富士精版印刷株式會社, 1963)
벽온신방 인쇄
이 책은 ≪벽온방≫에서 약재의 난해한 것은 빼고, 속방의 쓰기 쉬운 것을 첨가하여 언해(諺解)를 붙여 간행하였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참고문헌≫ 朝鮮醫學史及疾病史(三木榮, 富士精版印刷株式會社, 1963)
보유신편 [保幼新編]
1905년 노광리(盧光履)가 편찬한 소아과 전문의서. 1권 1책. 목판본. 무기(無忌)가 지은 것을 편찬한 것인데, 무기선생이 누구인지 상세하지 않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참고문헌≫ 韓醫藥書攷(金信根, 서울大學校出版部, 1987)
본초강목 [本草綱目]
중국 명(明)나라 때 이시진(李時珍)이 저술한 의서(醫書). 52권 37책. 필사본. 저자는 30여 년의 노력을 거치면서 고서 800여 종을 참열(參閱:두루 읽어 참고함)하고, 명의와 숙유(宿儒:학식과 덕행이 높은 선비)를 방문하여 민간의 경험방을 구했고, 심산과 광야를 누비면서 약물을 관찰, 수집하였다. 그리하여 공전불후(空前不朽)의 ≪본초강목≫이 저술된 것이다.
제5∼52권은 약품 각론으로, 수(水)·화(火)·토(土)·금석(金石)·초(草)·곡(穀)·채(菜)·과(果)·목(木)·기복(器服)·충(蟲)·인(鱗)·개(介)·금(禽)·수(獸) 및 인(人)의 차례로 16부 60류로 모두 1,892종의 약물을 싣고 있다. 약물의 하면에는 또 교정(校正)·석명(釋明)·집해(集解)·정오(正誤)·수치(修治)·기미·주치(主治)·발명(發明)·부록(附錄)·부방(附方) 등으로 나누어서 분별, 서술하고 있다.
그 가운데 집해·기미·주치·발명은 모두 역대 명가의 설을 인용하고 난 뒤, 자신이 다시 보충식으로 평론을 가했다. 그리고 부방은 모두 1만 1096수에 달하며, 그 중의 몇몇은 실제 치험례(治驗例)가 붙어 있다. 이 밖에 책의 앞부분에 총목 1권, 도보(圖譜) 3권이 덧붙어 있다.
이 책의 최대 공헌은 16세기 이전의 이른바 본초학에 대해서 일차적으로 비교적 완전한 총결을 한 것이다.
첫째 조금이라도 불합리한 전설은 비판을 하였다.
둘째 금·원(金元) 이래로 발전한 여러 약리학설을 흡수하였고, 아울러 허다한 약물의 주치항 밑에 단순한 주치증후를 기록하고, 다시 약물의 작용을 설명하여 변증론치(變證論治:병의 증세를 분별하여 치료함)에 편리하게 하였다.
셋째 새로 발견된 유효한 약물을 기재하고 긍정하였으며,
넷째 많은 과거의 의가들이 주장한 본초에 대한 이론과 구체적인 약물운용에 대한 실제 체험을 보존, 소개하여 후학들이 참고하고 선택하는 데 편리하게 하였고, 또한 어떤 식물에 대한 묘사는 매우 상세하고도 정확하여 약물의 감별과 식물학의 연구에 있어서도 훌륭한 자료이다.
이런 내용과 배경을 가진 ≪본초강목≫이 우리 나라에 전해진 것은 조선 선조 이후일 것으로 추측되나, ≪본초강목≫이 우리 나라의 본초학에 미친 영향은 크다고 할 수는 없다. ≪동의보감≫에는 ≪본초강목≫을 참조한 흔적이 전혀 없으며, 우리 나라에서는 계속 ≪증류본초 證類本草≫를 이용해 왔다.
≪참고문헌≫ 本草精華
≪참고문헌≫ 醫宗損益
본초유함요령 [本草類函要領]
1833년(순조 33) 현재덕(玄在德)이 편찬한 임상응용 본초서(本草書). 14권 14책. 필사본. 약물학적 지식을 임상에 응용할 수 있도록 전·후 두 편으로 나누었다.
각 편을 모두 통치부(通治部)·상부(上部)·중부(中部)·하부(下部)·부과부(婦科部)·아과부(兒科部)·외과부(外科部)로 6대별하여 전편에서는 6부의 각종 질병에 대하여 병리(病理)를 설명하고, 후편에서는 6부의 각종 질병에 대한 응용약물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상편의 설명은 역대의 의학지식을 저자 나름대로 간단하게 요약, 정리하여 싣고 있으며, 하편에서는 각각의 병증에 응용할 수 있는 수개의 약물들을 열거하고 그 용법을 설명하였는데 보통 그 약물을 한개만 쓰든지, 기타약물 한두가지와 배합하여 사용하도록 하는 간단한 방법을 많이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입론(立論)이 간요하고 분류방식이 특유하며 병에 따른 약물을 화제(和劑)의 개념보다는 본초(本草)의 개념으로 배속함으로써 약물자체의 특성을 강조한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널리 이용하던 약물을 취집(聚集)하고, 실전(失傳)하였던 용법을 발명(發明)한 바가 많다.
다만, 희귀한 약물이나 제법(製法)이 어려운 약물, 유독성·광물성 약물이 비교적 많고 대증위주(對症爲主)의 단순한 용약이 많아 약리의 설명에는 미흡한 점이 있다. 장서각도서에 있다.
본초정화 [本草精華]
저자·연대 미상의 의서(醫書). 2권 2책. 필사본. 여러가지 본초서(本草書) 중에서 필요한 부분만을 발췌하여 편성한 의서이다.
이 책에 인용된 서적은 ≪신농본초경 神農本草經≫·≪명의별록 名醫別錄≫을 비롯한 송대(宋代) 맹세(孟洗)의 ≪장정식료본초 張鼎食療本草≫와 위(魏)·당(唐)·원(元)·명(明)의 모든 본초서를 총망라하여 엮었다.
강령(綱領)에는 채약법·제약법·인경보사(引經報使)·약성승강(藥性昇降)·사시용약(四時用藥)·기미음양(氣味陰陽)·오기오미(五氣五味) 등이 있고, 방민(方民)에는 각 지방에 따라 인물이 다름을 말하고 있다.
내용은 다른 본초서와 마찬가지로 초부(草部)·곡부(穀部)·채부(菜部)·과부(果部)·목부(木部)·충부(蟲部)·인부(鱗部)·개부(介部)·금부(禽部)·수부(獸部)·보유(補遺) 등으로 각기 분류하였고 약명에는 간혹 한글로 우리의 음을 병기(倂記)하기도 하였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참고문헌≫ 神農本草經
≪참고문헌≫ 韓醫藥書攷(金信根, 서울大學校出版部, 1987)
부방편람 [附方便覽]
1855년(철종 6) 황도연(黃道淵)이 편찬한 의서(醫書). 28권 14책. 필사본. 이 책은 허준(許浚)이 쓴 ≪동의보감 東醫寶鑑≫을 기본으로 여러 가지 병명과 복잡한 치료법 중에서 유익한 것 만을 발췌하였다.
병증(病症)에는 복방(復方) 또는 수종의 생약을 배합하여 치료하게 하였는데, 처방(處方) 중에 약물의 본초학적(本草學的) 지식은 청나라 채열선(蔡列先)의 ≪본초침선 本草鍼線≫을 인용하여 편찬하였다.
즉, 의학과 본초를 합쳐 질병치료를 용이하게 하고, 실제 의가(醫家)들에게 치료방(治療方)에 대한 약물학적 지식을 쉽게 이해하게 하였다. 이 책에서는 본초학적인 이해와 응용력을 확산시켰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부방편람≫은 ≪동의보감≫에 비하면 상당히 축소되어 있으나, 활용하기는 매우 간편하다고 볼 수 있고, 특히 ≪동의보감≫ 중의 잡병편(雜病篇)의 천지운기(天地運氣) 등은 삽입시키지 않은 것 같다. 장서각도서에 있다.
≪참고문헌≫ 黃度淵과 그의 醫學(安炳國, 醫藥社, 1976)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참고문헌≫ 朝鮮醫學史及疾病史(三木榮, 富士精版印刷株式會社, 1963)
부인양방대전 [婦人良方大全]
중국 송나라 때(1237년) 진자명(陳自明)이 지은 부산과(婦産科) 전문 의서(醫書). 1책. 필사본. ‘부인양방(婦人良方)’·‘부인양방집요(婦人良方集要)’·‘부인대전(婦人大全)’이라고도 한다.
이 책에서는 부산과의 각종 질병을 조경(調經)·중질(衆疾)·구사(求嗣)·태교(胎敎)·후태(候胎)·임신질병(妊娠疾病)·좌월(坐月)·난산(難産)·산후(産後)의 9문(門)으로 나누고 매 문마다 수십 가지의 병증을 기술하여 모두 296종의 논(論)을 싣고 있으며, 각 논에는 병인(病因)과 증후(症候), 치법(治法)을 기록하였다.
그 내용이 정밀하고 실용적이었으므로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명대에 와서 설기(薛己)가 교주(校注)하여 이름을 ≪교주부인양방 校注婦人良方≫이라고 하였으며, 부분적으로 내용을 첨삭한 외에 편마다 안어(按語)·치험(治驗)을 부가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건국 초부터 의과의 시험과목으로 채택하였으며, ≪경국대전≫에서는 초시·복시에 모두 이 책을 포함시키고 있으나 그뒤 ≪속대전≫에서는 제외시키고 있다.
그러나 의학교육기관이었던 전의감과 혜민서(惠民署)에서는 이 책을 교재로 사용하였다. 1912년 석인본으로 6권 6책이 간행되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분문온역이해방 [分門瘟疫易解方]
1542년(중종 37) 김안국(金安國) 등이 편찬한 의서(醫書). 1책. 목판본. 김안국이 왕명을 받아 의사(醫司) 호군(護軍) 박세거(朴世擧), 사맹(司猛) 홍침(洪沈)을 시켜 내의원정(內醫院正) 문세련(文世璉), 직장(直長) 유지번(柳之蕃), 전의(典醫) 이척(李倜), 전직장(前直長) 정추(鄭樞), 혜민서(惠民署) 전직장 홍세하(洪世河) 등과 함께 만들었다.
모든 서책 중에서 실시하기 쉬운 약방과 비치하기 쉬운 약재를 골라 구초(舊抄) 60여방에 다시 40여방을 보태어 진양(鎭穰)·불상전염(不相傳染)·복약(服藥)·노복(勞服) 등 4문(門)에 나누고, 이어 약이름과 채취법을 더하여 모두 한글로 번역, 간행하게 하였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사의경험방 [四醫經驗方]
조선 중기에 이석간(李碩幹) 등이 편찬한 의서(醫書). 1책. 필사본. 당시의 사의(四醫)였던 이석간·채득기(蔡得沂)·박렴(朴濂)·허임(許任) 등이 자신들의 경험방을 모으고, 그 밖에 ≪본초서 本草書≫·≪동의보감≫·≪문견방 聞見方≫ 등의 여러 가지 서적을 인용하여 편집한 책이다.
이 책들은 계속 간행되어 민간의방서로서 애용되었는데, 그 특징은 ≪경험방≫·≪본초서≫·≪동의문견방≫ 등의 출전(出典)을 밝혀서 그 내용을 충실히 하였고, 증목(症目:증세)을 우리말로 해석하여 경험방의 고증과 그 지식을 대중화시키는 데 큰 공헌을 남겼다.
이 책은 비교적 사물의 경험을 중심으로 편술되었고, 임상(臨床)을 통하여 체험으로 익힌 실증적이고 살아 있는 의약의 전승(傳承)을 역력히 볼 수 있으며, 특히 300여 종류의 생약은 그 당시의 약에 대한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참고문헌≫ 朝鮮醫學史及疾病史(三木榮, 大阪, 富士精版社, 1963)
산거사요 [山居四要]
원(元)나라 순제(順帝) 때의 학자 왕여무(王汝懋)가 산촌에 사는 사람이 일상생활에 알아야 할 네가지 요결(要訣(綱))을 사항별로 분류하여 기술한 책. 4권 1책. 목판본. 보물 제1207호.
태사령(太史令) 양우(楊瑀)의 ≪산거사요≫를 증보·편집한 것으로, 우리나라 사람의 서·발(序跋) 및 간기(刊記)가 없어 간행연도는 알 수 없으나 상태 등을 미루어 조선 성종연간으로 추정되고 있다.
책 머리에 1360년(공민왕 9)에 쓴 유인태(劉仁台)의 서가 있고, 1권 머리에는 같은해에 쓴 왕여무의 소지(小識)가 있다.
권1에는 섭생지요(攝生之要)란 제목 아래에 기거격언(起居格言) 등 6항목,
권2에는 양생지요(養生之要)란 제목 아래에 복약기식(服藥忌食) 등 9항목,
권3에는 위생지요(衛生之要)란 제목 아래에 제풍(諸風)·육축병방(六畜病方) 등 18항목,
권4에는 치생지요(治生之要)란 제목 아래에 12개월의 축월사무(逐月事務) 6항목과 모란 등 종화과소채법(種花果疏菜法) 29항목이 서술되었고, 부록으로 문방필용(文房必用)·행주비급(行廚備急)·성심법언(省心法言) 등이 서술되었다.
이 책은 간년이 미상이기는 하나 도서목록에 보이지 않는 조선 전기 간본(추정)으로 추정되며, 건강에 필요한 의약서로서 당시의 의서 간행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인천광역시 남동구 가천문화재단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動産文化財指定報告書-’94∼’95 指定篇-(文化財管理局, 1996)
산서 [産書]
저자·연대 미상의 출산에 관한 의서. ≪해동문헌총록 海東文獻總錄≫에 “왕명을 받들어 모든 서책을 수집하여 별도로 ≪산서≫ 1부를 만들어 중외에 반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430년(세종 12) 12월 의원(醫員)의 사맹삭취재(四孟朔取才) 때와 의녀(醫女)의 매월고강(每月考講) 때 강서의 하나로 채택되었으며, 1463년(세조 9) 2월 약방승지(藥房承旨)와 내의원(內醫院) 당상관들이 궐내에 모여서 의학습독관(醫學習讀官)의 임문습독서(臨文習讀書)를 정할 때, 1465년 5월 예조에서 의원취재(醫員取才) 때의 강서를 정할 때, 1478년(성종 9) 2월 예조가 의녀권과(醫女勸課)의 조항을 논할 때 등 반드시 읽어야 되는 방서로서, ≪직지맥 直指脈≫·≪동인경 銅人經≫과 함께 이 책을 들고 있어, 당시의 의원·의녀들의 필독서로서 널리 이용된 것 같다.
1543년(중종 38) 7월 예조의 계청(啓請)에 따라 이 ≪산서≫를 인출하여 폐가 없도록 하라고 명령하였고, 세종 때 노중례(盧重禮)가 편집한 ≪태산요록 胎産要錄≫의 인용서목 중에도 왕악(王岳)의 ≪산서≫와 함께 이 책이 따로 제시되어 있어, 왕악의 ≪산서≫와는 별도의 것임을 밝히고 있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참고문헌≫ 世祖實錄
≪참고문헌≫ 成宗實錄
≪참고문헌≫ 中宗實錄
≪참고문헌≫ 海東文獻總錄(金烋)
상마경 [相馬經]
저자·연대 미상의 말에 관한 수의학서(獸醫學書). 필사본 1책. 이 책은 서문과 목차 등이 없이 순한문으로 기록된 필사본으로, 끝부분에 말에 관한 도해와 경락도가 2장 곁들여져 있는데, 그 내용은 표제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그 내용은 앞부분은 동계문어곡천왈(東溪問於曲川曰)로 시작되는 논마유부모(論馬有父母)로부터 32가지의 마상(馬相)에 관한 상마가(相馬歌), 육양육음(六陽六陰)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대체로 ≪마경초집언해 馬經抄集諺解≫와 대동소이하다.
뒷 부분의 내용은 ≪마의방서 馬醫方書≫와 더욱 유사한 감이 있으나 다소 다른 일면도 있다.
예를 들면, 소의 80개 혈(穴), 55개의 마골(馬骨)에 관한 기록 등을 들 수 있는데, 이 책은 초록자가 대체적으로 보아 ≪마경초집언해≫·≪마의방서≫·≪마경방≫·≪신편집성마의방≫·≪조선우마의방≫ 등 각종 마의서에서 적절히 초록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 책은 재래의 마의서와 함께 우리나라의 마의술(馬醫術)을 이해하는 데 좋은 참고가 된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農林水産古文獻備要(金榮鎭, 農村經濟硏究所, 1982)
세의득효방 [世醫得效方]
16세기(중종∼명종대)에 간행된 의서(醫書). 2권 1책. 활자본. 보물 제1250호. 이 책은 원나라 남풍(南豊)의 의학교수 위역림(危亦林)이 선조인 고조(高祖)에서 이하 5세 동안 치료한 경험방(經驗方)을 모아 편찬한 책으로서, 우리 나라에서는 1425년(세종 7) 2월에 춘천부사가 원나라판을 복각하여 인출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책은 당시 20권 22책으로 간행되었는데, 의학취재(醫學取才) 또는 의과시강서(醫科試講書)로 사용되어 널리 읽혔고 ≪경국대전≫에도 등재되어 있다.
≪사고전서총목제요 四庫全書總目提要≫에는 전체를 8과(科) 276자목(子目)으로 나누어 19권을 만들고, 그뒤에 손진인(孫眞人)의 〈양생법절문 養生法節文〉 1권을 덧붙여 모두 20권으로 편성하였다고 하였다.
과목으로는 대방맥잡의과(大方脈雜醫科) 91자목, 소방맥과(小方脈科) 71자목, 풍과(風科) 10자목, 산과겸부인잡병과(産科兼婦人雜病科) 33자목, 안과(眼科) 12자목, 구치겸인후과(口齒兼咽喉科) 6자목, 정골겸금족과(正骨兼金鏃科) 29자목, 창종과(瘡腫科) 24자목, 침구과(針灸科) 등이다.
이 책은 권제10∼11의 영본(零本)으로 권10은 대방맥잡의과로 두통(頭痛)·면병(面病) 등 10항목, 권11은 소방맥과로 활유론(活幼論)·초생(初生) 등 22항목이 수록되어 있다. 기술방법은 해당 항목을 3자 낮추어 ○표하여 적고, 그 아래에 각 대증(對證)의 처방을 적고 있다. 갑진자본은 그간 전존사실이 알려진 바 없었다.
따라서, 이 책은 전20권 중 2권 1책의 영본이기는 하지만 의학분야 연구자료임은 물론, 서지학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인천광역시 남동구 구월동 가천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소아의방 [小兒醫方]
조선 말기 최규헌(崔圭憲)이 지은 소아전문 의서(醫書). 1책. 활자본. 1936년에 이기승(李基承)·이명칠(李命七)이 처음으로 간행하였다.
저자는 1864년(고종 1)에 의과에 등과하여 1898년에 태의원(太醫院) 전의(典醫)를 역임하였는데, 생전에 소아에 대한 비방을 자주 실험하여 효과가 좋은 비방들을 초록한 것으로 전해져 있다.
이 책에서는 소아조호법(小兒調護法)·찰색법(察色法)·맥법(脈法)·초생제증(初生諸症) 등 100종에 가까운 병증들을 열거하고 그 아래에 그 병의 원인과 증상 등을 간략하게 해설하고 그와 함께 치료에 필요한 약방들을 기입하였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醫科榜目
≪참고문헌≫ 醫科入世譜
수민묘전 [壽民妙詮]
조선 정조가 친찬(親撰)한 의서(醫書). 4권 2책. 필사본. 정조는 젊어서부터 의방서를 즐겨 읽어왔고, 선왕인 영조가 아플 때 10년 동안이나 친히 옆에서 모셨으며, 자신이 병이 났을 때에도 스스로 의약(議藥:의약처방을 논의함)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 책의 서문에는 “의(醫)는 군생(群生)을 구제하는 것이므로 사친자(事親子:어버이를 모시는 아들)가 가히 의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의가 어찌 천한 것이겠는가. 우리 동방풍속이 방술(方術:방법과 기술)에 종사하기를 부끄러워한다. 이것이 어찌 숭유(崇儒)의 소이겠느냐. 의도 또한 유술(儒術) 중의 일단이다. 내가 어렸을 때 의서를 탐독하여 병술년(丙戌年)부터 병신년(丙申年)까지 선대왕의 질병을 시측(侍側:옆에서 모심)하기 위하여 대(帶)를 풀지 않던 10년 동안에 맥결약성(脈訣藥性:진맥의 비결과 약의 성품)에 방통(旁通:자세히 앎)한 바 있다. 그러나 인품의 금고(今古)가 다르고 동서의 풍기(風氣:풍속)가 같지 않다. 고금의 의서 중에 우리 나라의 소용에 적합한 것은 오직 양평군(陽平君) 허준(許浚)의 ≪동의보감≫ 하나뿐이다. 그러나 논리논방(論理論方)이 서로 착잡하여 체례(體例:체제와 사례)가 정제(整齊:정연함)함이 결여되어 있다. 내가 그 예를 좀 고쳐 그 정화(精華)를 찰(擦)하고 또 탕액(湯液) 각방으로써 따로 속편을 만들어 ‘수민묘전’이라 이름하였다.”라고 적혀져 있다.
즉, 정조는 우리 나라 옛 풍속이 방술을 천하게 여기는 것을 개탄하고 허준의 ≪동의보감≫ 중에서 우리의 풍습에 적합한 것을 친히 선집하여 각 병문들의 증론(證論)과 맥결(脈訣)을 중심으로 ≪수민묘전≫ 4권을 초록하고 속편으로 탕액 제방들의 치료법 5권을 편성하였다.
속편 5권은 이미 산일되고 다만 ≪수민묘전≫ 4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규장각도서에 있고, 정조의 시문(詩文)·윤음(綸音:임금의 말씀)·교명(敎命:왕비·세자를 책봉하는 임금의 명령) 등을 편집한 ≪홍재전서 弘齋全書≫ 중에도 수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수양총서유집 [壽養叢書類輯]
1620년(광해군 12) 이창정(李昌庭)이 편찬한 의서(醫書). 2권 2책. 목판본. 섭생·양생의 방법 등을 쓴 책이다.
중국의 수양총서들은 편집이 고르지 못하고 논리도 여러 갈래로 되었으며 식물·약물들은 중국과 우리나라가 생산지가 같지 않고 이름도 많이 달라서 실제로 이용하기가 곤란하므로, 여러 책을 참고하여 번문(繁文)은 줄이고 잘못된 것은 고쳐서 우리의 현실에 적합한 알기 쉽고 행하기 쉬운 것을 뽑아 상·하 2권에 나누어 집성하였다.
권상은 섭생 및 양생에 관한 요법으로 총론·양심지편(養心志篇)·보신체편(保身體篇)·신기거편(愼起居篇)·생기욕편(省耆慾篇)·절음식편(節飮食篇) 등이며, 권하는 약물 및 구급단방(救急單方)들을 기록한 것으로 복용편(服用篇)·미곡편(米穀篇)·초목편(草木篇)·금수편(禽獸篇)·충어편(蟲魚篇)·도인편(導引篇)·의약편 등으로 나누어 우리나라에서 산출되는 것으로서 실용에 적합한 식물·약물 등에 더욱 유의하였다.
이 책이 일본으로 전해져 1669년(현종 10)에 무라카미(村上三郎兵衛)가 간행한 바 있다.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시종통편 [時種通編]
조선 순조 때 이종인(李鍾仁)이 편찬한 두창(痘瘡 : 천연두)에 관한 의서(醫書). 상하 2권 1책. 필사본. 이 책 이름의 시는 시두(時痘), 즉 두창을 말한 것이고, 종은 종두법(種痘法)을 가리킨 것으로서, 양자를 종합, 편성한 인두종법(人痘種法)의 전문서이다.
이종인은 영평부사(永平府使) 박제가(朴齊家)로부터 인두종법을 전수한 뒤, 서울 북방의 여러 신가(紳家)에 실시하여 인두종법이 우리나라에 널리 전해지게 하였다.
그런데 1801년(순조 1) 봄에 서학(西學)의 혐의로 인두종법이 한때 중단되었다가 영남에 전해져 다시 보급되게 되었다.
이 책의 내용은 두창의 총설, 증후 및 치료법을 설명하고 있다. 특히, 중요시한 것은 종두로서, 종두시종법례(種痘始終法例)·종두원목(種痘源目)·종두법·종두예선조리론(種痘豫先調理論)·종두아정신형기론(種痘兒精神形氣論) 등으로 되어 있다.
≪참고문헌≫ 與猶堂全書
≪참고문헌≫ 五洲衍文長箋散稿
≪참고문헌≫ 時種通編自序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식료찬요 [食療纂要]
조선 중기 전순의(全循義)가 찬한 식이요법 의서(醫書). 1책. ≪해동문헌총록 海東文獻總錄≫에 전순의가 ≪식의심감 食醫心鑑≫과 ≪식료본초 食療本草≫로써 식료를 보결하고, ≪경사증류대전본초 經史證類大全本草≫ 등으로 늘 쓰는 식치(食治)의 간이방(簡易方)을 상고하여 45문(門)으로 나누어 각 문의 물류(物類) 아래 언해(諺解)를 붙여 상고하기 쉽게 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1585년(선조 18) 간행된 ≪고사촬요 攷事撮要≫의 팔도책판목록(八道冊板目錄) 중에 강원도 양양판, 경상도 상주판이 보인다. 1487년(성종 18) 4월에 우찬성 손순효(孫舜孝)가 ≪식료찬요 食療撰要≫를 성종에게 올렸다.
이 책은 의원(醫員) 전순의가 편집한 것을 손순효가 일찍이 경상감사로 있을 때에 상주에서 간행하게 한 것이라고 조선왕조실록에 밝혀져 있다. ‘찬요(撰要)’는 아마 ‘찬요(纂要)’를 잘못 쓴 것 같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식물본초 [食物本草]
중국 명(明)나라의 적충(狄?)·요문청(姚文淸) 등이 편집한 의서(醫書). 2권 2책, 갑진자본(甲辰字本). 보물 제1227호. 우리 나라의 서(序)·발(跋)·간기 등이 없어 간행한 연대가 정확하지 않으나 갑진자의 사용연대인 중종∼명종연간에 간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식물(食物)로 질병을 예방하는 내용의 전문 의서로, 상권에는 수(水)·곡(穀)·채(菜)·과(菓) 등 4류(類) 212조가, 하권에는 금(禽)·수(獸)·어(魚)·미(味) 등 4류 175조가 수록되어 있다. 각류(各類)에서는 조목마다 해당 식물(食物)의 맛·본성과 이익·해독 등을 적어 설명하고, 그 말미에 각류의 식물에 대한 총론을 적고 있다.
이 책은 간년이 정확하지 않으며 또 상권의 반수 이상이 반쪽 정도 파손되어 보사(補寫)한 결함이 있으나, 중종∼명종연간에 간행된 갑진자본으로 도서목록에 보이지 않는 희귀본 의서(醫書)라는 점에서 서지학, 특히 의서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인천광역시 남동구의 이길녀(李吉女)가 소장하고 있다.
≪참고문헌≫ 動産文化財指定報告書-’94∼’95 指定篇-(文化財管理局, 1996.)
신기천험 [身機踐驗]
1866년(고종 3) 최한기(崔漢綺)가 동서의학을 집성하여 편찬한 의학서. 8권 6책. 필사본. 1866년 11월에 영국 의사 홉슨(Hobson)이 지은 ≪전체신론 全體新論≫·≪내과신설 內科新說≫·≪서의약론 西醫略論≫·≪부영신설 婦?新說≫ 등의 내용을 취하여 편찬하였다.
홉슨은 중국 상하이(上海)에 머무르면서 20년간 진료사업을 벌였는데, 그는 중국인의 체질과 약료의 사용법을 대강 알아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을 잘 조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최한기는 이러한 홉슨의 의서를 통하여 서양의학 지식을 받아들이면서도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태도 위에서 서양의 종교적인 측면은 엄격히 배제하고 이 책을 편찬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권1에 뇌위일신지주(腦爲一身之主) 등 12항목, 권2에 구관(口官) 등 29항목, 권3에 중서의학(中西醫學) 등 18항목, 권4에 위병(胃病) 등 14항목, 권5에 탕화상(湯火傷) 등 13항목, 권6에 두뇌상(頭腦傷) 등 11항목, 권7에 소장산증(小?疝?) 등 38항목, 권8에 제기치용(諸器致用) 등 23항목, 권8 속(續)에는 동서본초녹요(東西本草錄要) 등 17항목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에서는 동서의학의 각 전문분야에 대한 다양한 내용뿐만 아니라 지각(知覺)의 주체에 대한 철학적 문제를 비롯하여 산소·탄소 등의 지식이라든가 전기에 대한 내용도 소개되어 있다.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에 소장되어 있으며, 여강출판사에서 영인 간행한 ≪명남루전집≫ 제3책에 수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明南樓全集(驪江出版社, 1986)
≪참고문헌≫ 氣學의 成立과 體系에 관한 硏究(李賢九, 成均館大學校 大學院 博士學位論文, 1993)
≪참고문헌≫ 최한기의 의학사상(여인석·노재훈, 醫史學 2-1, 1993)
신라법사방 [新羅法師方]
작자·연대 미상의 의서(醫書). 다른 저서의 기록으로 보아 신라시대에 만들어졌다고 생각된다. ≪백제신집방 百濟新集方≫과 같이 고려 성종 3년(984)에 일본의 단파(丹波康?)가 편술한 ≪의심방 醫心方≫ 중에 ≪신라법사방≫이 두 곳, ≪신라법사유관비밀요술방 新羅法師流觀?密要術方≫이 각각 한 곳씩 모두 4개의 방문이 소개되어 있다.
제1의 ≪신라법사방≫(의심방 권2)은 약을 먹을 때에 외우는 주문(呪文)인데, 주문을 읽어서 병액(病厄)을 없애버리고자 하는 인도 고대의 신비적 의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신앙을 중심으로 한 불도(佛道)의 의료술법들이 당시 신라의 의료에 널리 파급되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제2의 ≪신라법사방≫(의심방 권10)은 약초인 속수자(續隨子)로써 적취병을 치료한 것인데, 이 약초는 중국의 고전 본초서(本草書)인 ≪신농본초경 神農本草經≫에는 보이지 않으나 남조시대 양(梁)나라의 도홍경(陶弘景)이 수집한 명의별록에 소개되어 있다.
제3의 ≪신라법사유관비밀요술방≫(의심방 권28)은 방중어비(房中御妃)의 술법(術法)을 논한 것인데, 방중술법(房中術法:성교의 방법과 기술)은 ≪한서 漢書≫ 예문지(藝文志)에 의료술법의 일부로서 오래 전부터 의방술에 포함되어 있다. 이 술법은 신선도가(神仙道家)들의 방중보익법(房中補益法:방중술로 몸의 기운을 증강함)에 관한 약물의 효능을 논한 것인데, 신라시대의 의료술법이 신선도가들의 사상에 영향받았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방서가 당의 법사 혜충전(惠忠傳)의 ≪법장험기 法藏驗記≫를 인용한 것이나, 그 밖에도 불교의 고승 대덕(大德)으로서 의학에 달통한 용수(龍樹)·마명(馬鳴)과 약사여래(藥師如來)들의 교유(敎喩:가르침과 비유)를 논한 것은 신라의학이 의술에 정통한 법사들의 승려의학(僧侶醫學)에도 많이 의존하였던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제4의 ≪신라법사비밀방≫(의심방 권28)에 채용된 노봉방(露蜂房:말벌의 집)은 ≪신농본초경≫에 기재되어 있어 오래 전부터 널리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그 약효에 있어서는 서로 일치되지 않을 뿐 아니라 방문에 적혀 있는 여러가지의 증상인 남녀(男女)·신정(神靜)·심민(心敏)·이총(耳聰)·목명(目明)·구비기향(口鼻氣香) 등등의 약효들은 중국의 남북조시대로부터, 수·당나라에 이르는 고전의방서와 경사제설(經史諸說:經書와 史記에 나오는 가르침)을 수집한 송대의 ≪경사증류대전본초 經史證類大全本草≫에도 전연 보이지 않는다.
이상과 같이 노봉방은 중국에서 오래 전부터 널리 사용되어 온 약재이지만, 그 응용방법이 서로 일치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 신라의 의료술법이 중국 한의학의 권내에 있으면서도 선행적인 고유의술의 전통을 조금도 등한히 하지 않고 도리어 양자를 융합, 선택하여 자립적 의료술법을 수립하고자 하는 데 노력해 온 자취를 충분히 찾아볼 수 있게 한다.
≪참고문헌≫ 醫心方
≪참고문헌≫ 漢書
신선태을자금단 [神仙太乙紫金丹]
조선 전기의 문신 이종준(李宗準)이 저술한 의서. 불분권(不分卷) 1책. 목판본. 책 뒤에 1497년(연산군 3) 단양절(端陽節)에 저자 스스로 간행한다는 발문과 간기가 있다.
책의 내용은 서명이기도 한 신선태을자금단이라는 신령스러운 환약의 자료와 제조법, 이어서 황종(黃腫)·중풍 등에 듣는 효험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자세한 설명으로 되어 있다.
그 설명은 거의 중국의 의서에 근거하였으나, 각 항목마다 저자 스스로 연구하고 경험한 내용을 ‘今按(금안)’이라 하여 붙여놓았다. 그 내용이 저자의 실증적인 정신과 정밀한 의학지식을 담고 있어서 우리나라 의학사연구에서 높이 평가된다.
그 예로서 이 환약의 주된 원료인 산자고(山茨菰) 곧 까치무릇이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잘못 알려지고 있는 것을 바로잡기 위하여 저자가 산과 들에서 직접 채취하여 그 생태를 살피고, 나아가 그것으로 만든 환약의 효능으로 확인한 사실을 들 수 있다.
서화에 능한 저자는 책의 첫머리 1장에 까치무릇의 생태상 특징을 ‘長苗(장묘), 開花(개화), 殘花(잔화), 結子(결자), 葉枯(엽고)’의 다섯 가지 그림으로 보였는데, 앞의 사실을 뒷받침하는 일이다.
이 책은 절반 정도의 내용에 대하여 한글만으로 언해를 베풀고, 간혹 특수한 약재는 본문 사이에 한글로 고유어를 주기하였다.
이 책의 내용은 일본에 전하는 사본과 ≪동의보감 東醫寶鑑≫·≪산림경제 山林經濟≫ 등 우리 의서에 전재된 것으로써 일찍부터 알려져 왔으나, 원본은 없어진 것으로 추측되어 왔었다.
최근에 성암고서박물관(誠庵古書博物館)에 원본 1책이 수장되어 학계에 소개되었을 뿐 아니라, ≪서지학보 書誌學報≫ 6호(1991)의 부록으로 영인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참고문헌≫ 增修版朝鮮醫書誌(三木榮, 日本 學術圖書刊行會, 1973)
≪참고문헌≫ 神仙太乙紫金丹 解題(安秉禧, 書誌學報 6, 1991)
신선태을자금단방 [神仙太乙紫金丹方]
1497년(연산군 3) 이종준(李宗準)이 편찬한 의서(醫書). 1권. 찬자가 태을자금단의 약효가 신기한 것을 경험하고 ‘神仙(신선)’이라는 글자를 위에 붙이고 그 방문을 언해하여 널리 간행, 반포하였다.
태을자금단은 중국의 송나라 때부터 전해 오던 약방으로서 자금정(紫金錠)·옥추단(玉樞丹)·만병해독단(萬病解毒丹) 등의 이름으로 널리 쓰여지는 방문이다.
이 책이 간행된 후 ≪동의보감≫을 비롯하여 ≪납약증치방 臘藥症治方≫·≪제중신편 濟衆新編≫·≪의종손익 醫宗損益≫ 등 중요의서에 널리 인용되었을 뿐 아니라 ≪산림경제≫ 등의 민간구급방에도 전재되었으며, 그밖에 간략한 초본으로 각 지방에 널리 전해져 있다. 일본 경도대학(京都大學)에 초본이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신주무원록 [新註無寃錄]
1438년(세종 20) 최치운(崔致雲) 등이 원나라 왕여(王與)가 편찬한 ≪무원록 無寃錄≫에 주해를 더하고 음훈(音訓)을 붙여 편찬한 의서(醫書). 상·하 2권 1책. 목활자본.
이 책은 검험(檢驗:시체를 부검함)의 전문서로서 법의학(法醫學)과 비슷한 지식체계를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송대(宋代)의 ≪세원록 洗寃錄≫이나 ≪평원록 平寃錄≫에 비하여 그 내용이 훨씬 더 완비되어 있다.
고려 중기인 1047년(문종 1)부터 인명 살상에 관한 재판에서 신중을 기하기 위하여 삼심제도(三審制度)를 실시하게 되어 ≪무원록≫이 출판된 뒤 곧 고려에 수입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문헌상으로는 1419년(세종 1) 2월에 형조가 검시의 문안(文案)을 주청(奏請)하는 중에 이 책의 이름이 처음으로 보이며, 그 뒤 1430년 2월에 율학(律學)의 취재과목에 ≪무원록≫이 열거되었으며, 1435년 6월에는 인명의 살상험증(殺傷驗證)에는 반드시 ≪무원록≫의 검시 규례에 의거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438년 11월에 세종은 최치운·이세형(李世衡)·변효문(卞孝文)·김황(金滉) 등에게 명하여 이 책을 편찬하게 하여 유의손(柳義孫)에게 서문을 쓰게 한 뒤 ≪신주무원록≫이라는 이름으로 경향 각도에 반포하였다.
그 다음해 2월에는 한성부에 명하여 검시장식(檢屍狀式:검시의 보고서를 쓰는 서식)을 따로 공포, 간행하고 다시 각도 관찰사를 시켜 그 각판을 모인(模印)하여 각 도 각관에게 반포하게 하였다.
1442년에는 모든 검시의 법을 ≪무원록≫의 규정에 따르도록 하였을 뿐 아니라, 인명치사(人命致死)에 관한 사건이 있을 때에는 그 사체가 있는 곳에서 검증을 행한 뒤에 검시장식에 따라 사체검안서(死體檢案書)를 만들어 재판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법의학적 지식을 형사재판에 이용한 것은 우리 나라의 형사재판에 있어 획기적인 발전이다.
① 초검(初檢):살인사건이 발생한 때에는 사체가 있는 곳의 지방관이 먼저 제1차의 시체검험, 즉 초검을 실시한 뒤에 검안서를 ≪무원록≫ 시장식의 규례에 따라 만들어 상부관에 제출한다.
② 복검(覆檢):초검관은 인근 지방관에게 제2차의 검험, 즉 복검을 위촉하는데, 초검관이 그 검험의 사정을 복검관에게 누설하지 못하도록 별칙이 규정되어 있으므로, 복검관은 독자적 검안서를 만들어 상부관에 제출한다.
상부관은 제출된 초검·복검관의 의견이 일치될 때에는 이것으로 그 사건을 결정짓도록 하나, 만일에 두 검관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거나 또는 그 검험에 의혹이 있을 때에는 다시 3검(三檢)을 명하게 된다.
③ 3검·4검:3검은 중앙에서는 형조에서 낭관(郎官:六曹의 5∼6품급 문관)을 보내고, 지방에서는 관찰사가 차원(差員:지방관아의 관리)을 정하여 다시 검험을 실시한 뒤에 초검·복검관들의 검안서를 참작하여 최후의 판결을 내리게 되나, 사건에 따라서는 4검 내지 5사(五査)·6사를 거치는 수가 있으며, 또는 국왕에게 직소(直訴)할 수도 있다.
그런데 재판의 절차에 있어 3검·4검을 명할 때에는 초복·복검관의 검안서 및 기타의 서류들을 첨부하여 참고할 수 있도록 하였다.
상권은 시장식(屍帳式)·시장례(屍帳例) 등 17항목, 하권은 검복총설(檢覆總說)·험법(驗法) 등 43항목으로 되어 있다.
각권에는 주로 시체검안에 관한 법규와 원나라의 검험 판례문이 수록되어 있으며, 하권에는 시상변별(屍傷辨別:시체의 상처 판별법)에 관한 사인들이 자세히 열거되어 있다. 이 책은 그 뒤 중국 및 일본에 유포되기도 하였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신집어의촬요방 [新集御醫撮要方]
1226년(고려 고종 13) 최종준(崔宗峻)이 편찬한 의서(醫書). 2권. 인본.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에 실려 있는 이 책의 서문에 의하면, 종래부터 고려 궁중에서 전해오던 다방(茶房)에서 수집한 약방 중에 신효한 방문들이 있었으나 오랜 세월에 거의 탈락, 폐실되어감을 저자가 애석히 여겨 고종의 재가를 얻어 2권으로 나누고 다시 긴요한 많은 방문들을 첨부하여 ‘신집어의촬요방’이라 이름하고 평양유수에 보내 1226년에 간인(刊印), 반포하였다.
이 책은 이미 산일되었으나 조선 세종 때 편성한 ≪향약집성방 鄕藥集成方≫ 중에 12방문이 채록되어 있어 이 책의 편모를 조금이라도 살필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이 방문에 응용된 주치병증(主治病症)과 주요약재들은 중국 한의방의 지식 전통을 거의 그대로 받아왔다.
그러나 당나라의 고전의방서인 ≪외대비요 外臺秘要≫나 송나라의 칙찬(勅撰)인 ≪성제총록 聖濟總錄≫과 비교하여보면 그 약재들의 실용방법에 있어서는 일치되지 않는 것을 적지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이 방서가 당·송의 의학지식을 기초로 하여 자기나라의 풍습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경험술법을 발전시키는 데 노력해온 증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東國李相國集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신찬벽온방
1613년(광해군 5)에 허준(許浚)이 편찬한 의서(醫書). 1권 1책. 활자본. 보물 제1087호. 이 책은 ≪동의보감≫보다 약 9개월 앞서 발간되었다.
당독역은 보통의 온역(瘟疫)과는 다르고 때때로 열이 심하고 혹독한 증세가 나타나므로 속칭 이 질환을 당홍역이라 칭한다고 하였다.
역사적으로 보아 허준은 온역과 당홍역과 시대를 같이함으로써 전염병치료에 대한 업적이 크다고 할 수 있고, 특히 관의(官醫)라는 점에서 좋은 여건을 갖춘 관학파의 저자라고 할 수도 있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신편의학정전 [新編醫學正傳]
중국 명나라 때 우박(虞博)이 편술한 의서(醫書). 1권. 목판본. ‘의학정전’이라고도 한다. ≪동의보감≫의 인용서목 중에 우박의 저서로서 이 ≪의학정전≫과 함께 ≪의학권여 醫學權輿≫와 ≪의학집성 醫學集成≫의 이름이 보인다.
그뒤 1744년(영조 20)에 편성된 ≪속대전≫에 의과취재(醫科取才)와 의과초복시(醫科初覆試)에 강서(講書)로서 ≪의학정전≫이 새로 첨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1785년(정조 9)의 ≪대전통편≫과 1865년(고종 2)의 ≪대전회통≫에도 계속 채택되었다.
≪참고문헌≫ 續大典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신편집성마의방우의방 [新編集成馬醫方牛醫方]
1399년(정종 1)에 편찬된 수의학서(獸醫學書). 1책. 목판본. 편자는 권중화(權仲和)·한상경(韓尙敬)·조준(趙浚)·김사형(金士衡)·방사량(房士良) 등이다. 이 책은 ≪향약제생집성방 鄕藥濟生集成方≫과 함께 간행된 것이다.
전의소감지제생원사(典醫少監知濟生院事) 방사량의 서문에 의하면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이 권중화와 한상경에게 명하여 중국의 백락(伯樂)의 경(經)을 날〔經〕로 하고 원나라의 결(訣)을 씨〔緯〕로 하여 제서(諸書)의 효력 있는 방문들을 모으고 동인(東人)이 이미 시험한 술법을 채집하여 편성한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이 책은 송·원나라 때의 마의방·우의방서와 동인들의 경험방을 참작, 수집한 고려시대의 수의학의 전통을 이어 온 전문의방서라 할 수 있다.
책의 내용을 보면, 마의방에는 양마상도(良馬相圖)·양마선모지도(良馬旋毛之圖) 등을 비롯하여 오장각부병치(五臟各部病治)·풍문(風門)·황문(黃門)·창문(脹門)·잡병문 등에 이르는 마상(馬相)·마병(馬病)에 관한 치료법이 열거되어 있고, 우의방에서도 마의방과 비슷하게 상우법(相牛法)으로부터 온역문(溫疫門)·안병문(眼病門)·산병문(産病門) 및 잡병문에 이르는 우상(牛相)·우병(牛病)에 관한 술법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 밖에 동인경험방으로서 동인경험목양법(東人經驗牧養法)·동인경험치마개(東人經驗治馬疥)·치졸천수(治卒喘嗽) 등이 열거되어 있어 고려시대의 수의학에 관한 지식 전통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1399년 강원도에서 초간된 뒤 전주·의주·제주 등 각지에서 중간되었으며, 1634년(인조 12)에는 훈련도감활자(訓鍊都監活字)의 소활자로 인출하기도 하였다.
일본에서는 에토시대(江戶時代)에 전주판(1580년판)을 대본으로 하여 복간되었고, 1939년 만주 심양(瀋陽) 췌문재(萃文齋)에서는 제주판(1633년판)을 대본으로 하여 영인되기도 하였다. 전주판은 고려대학교·서울대학교 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고, 갑진활자본(甲辰活字本)은 황의돈가(黃義敦家)에서 소장하고 있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심약사례 [審藥事例]
조선시대에 전의감(典醫監)에서 편찬하여 간행한 의약서. 1책. 필사본. 각 도의 감영 및 병영에서 진상해오는 약재(藥材)의 양 또는 그 대전(代錢)을 적은 기록이다. 작성연월은 병진 9월이라고만 적혀 있어 확실하지 않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약산호고종방촬요 [若山好古腫方撮要]
조선 후기에 강이오(姜彛五)가 펴낸 의서(醫書). 1권 1책. 필사본. 종기의 치료법에 대하여 쓴 책으로 그 편찬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강이오가 정조 12년(1788)에 출생, 무과에 급제하고 군수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아 순조 후기나 헌종 연간으로 보인다.
내용은 여러 가지 종류의 종기치료법과 이것에 유효한 약물명을 수록하고, 또 320여종의 약제에 대하여 약성가(藥性歌)를 붙였다. 장서각도서에 있다.
양방금단 [良方金丹]
저자·연대 미상의 본초서(本草書). 2책. 필사본. 질병에 대하여 투약하는 단방요법을 여러 가지 의서에서 뽑아 모은 책이다. 질병을 두면(頭面)·이목(耳目)·구비(口鼻)·심흉(心胸)·인후(咽喉) 등 54부로 나누고 각부의 세목 하나하나의 병증에 치료법을 기록하였다. 병명과 약명에는 한글로 우리 속명을 부기하였다.
그리고 권말에는 약재의 속명을 목부(木部)·석부(石部)·과부(果部)·채부(菜部)·수부(水部)·토부(土部)·곡부(穀部)·인부(人部)·금부(禽部)·수부(獸部) 등으로 나누어 기재하여 산야에 있는 약재를 누구나 손쉽게 채취할 수 있도록 하였다. 옛날의 우리나라 본초를 연구하는 데 좋은 참고서이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양성서 [養性書]
1790년(정조 14)경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저자 미상의 의서(醫書). 1권 1책. 필사본. 질병치료와 건강증진법에 관해서 쓴 책으로 일명 ‘의감(醫鑑)’이라고도 한다.
내용은 신체 각부를 마찰·심호흡·고치(鼓齒)·안마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제시한 다음, 약재 또는 식품으로 모든 질병을 제거하여 건강을 증진하고 정신을 각성시켜 연년익수(延年益壽) 또는 불로장수하는 비방을 서술하였다.
양의미 [瘍醫微]
1836년(헌종 2) 이의춘(李宜春)이 지은 치종법(治腫法)에 관한 의서(醫書). 3권 1책. 필사본. 이의춘이 저술한 것을 제자인 신기영(申耆永)이 정리하여 재편집하였다.
옹저(癰疽 : 큰 종기의 총칭)에 관한 치법을 논한 전문서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난치성인 부스럼과 종기 등의 치료를 목적으로 하였다는 데 특색이 있다. 김두종가(金斗鍾家)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언해납약증치방 [諺解臘藥證治方]
저자·연대 미상의 의서(醫書). 1권 1책. 목판본. 납약의 증상에 따른 사용방법과 그 약을 복용할 때 피해야 하는 사항을 기록한 책으로, 언해문의 한글표기상 특징으로 보아 16세기 이전의 것은 아닌 것 같고, 17세기경에 발간된 것 같다.
이 책은 매년 납월(臘月 : 12월)에 내의원에서 그해에 수용될 각종 상비약방을 초록한 것인데, 납월에 조제하므로 납약이라 불렀다.
수록된 납약의 종류는 우황청심원(牛黃淸心元)·구미청심원(九味淸心元) 등 37종류로, 그 약제의 방문·제조방법은 쓰여져 있지 않으나 적응증·용법 및 금기사항에 대하여 먼저 한문으로 쓰고, 이것을 다시 한글로 번역하여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이들 약제의 대부분이 환약(丸藥)으로 오늘날 말하는 가정상비약이라 할 수 있으며, 당시 부녀자들은 한글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이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언해하였다고 생각된다.
≪언해두창집요 諺解痘瘡集要≫·≪언해태산집요 諺解胎産集要≫·≪언해구급방 諺解救急方≫과 더불어 한의학의 자료로서뿐만 아니라 옛날의 한글을 연구하는 데에도 그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언해두창집요 [諺解痘瘡集要]
1601년(선조 34)에 허준(許浚)이 왕의 명을 받아 지은 것을 1608년에 내의원(內醫院)에서 발간한 의서(醫書). 2권 2책. 목판본. 이 책은 상권에 두창의 원인·예방법 및 그 증상, 그리고 이들의 해독법(解毒法)에 대하여 설명하고, 하권에는 두창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증상에 대하여 쓰고 있으며, 음식·금기(禁忌)·욕법(浴法)·양법(穰法)·두후잡병(痘后雜病)·잉부두창(孕婦痘瘡)·반진(斑疹)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은 원래 세조 때의 내의(內醫) 임원준(任元濬)이 편찬한 ≪창진집 瘡疹集≫을 개편, 언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창은 당시 치료가 매우 어려워 역대 국왕이 모두 이의 퇴치에 온힘을 기울였는데, 이 ≪창진집≫이 의과(醫科) 초시(初試) 또는 관학(官學)에서 교본으로 사용된 것을 보면 그 가치를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이 책이 언해된 뒤부터는 전문적인 치료방법이 민간에까지 널리 보급된 것으로 생각된다.
≪창진집≫이 처음 언해된 것이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현재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것으로는 1517년(중종 12)에 목판본 1권 1책으로 간행된 ≪창진방촬요 瘡疹方撮要≫가 전할 뿐이다. ≪창진집≫ 자체가 임진란을 전후하여 망실(亡失)되었으므로 내용이 동일한지는 알 수 없으나, 창진관계 언해문헌 중 전하는 것 중에서는 ≪창진방촬요≫가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인 듯하다.
이 책은 상하 양권 모두 둘째줄에 ‘어의신허준봉교찬(御醫臣許浚奉敎撰)’이라 밝혀져 있어 편찬자에 대하여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상권 138면, 하권 142면 도합 280면에 각 면은 11행으로 한문과 언해문이 같이 실려 있다.
현재 서울대학교 일사문고(一蓑文庫)에 소장되어 있고, 1973년 아세아문화사(亞細亞文化社)에서 다른 한방서(漢方書)와 합본으로 영인, 출이 17세기 국어연구에 지니는 가치는 물론, 그 이전의 언해본들과의 비교연구에서 얻는 국어사적 가치는 매우 클 것으로 보인다. 또한, 우리의 고유한 한방의 사료로서의 가치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언해태산집요 [諺解胎産集要]
1608년(선조 41)에 허준(許浚)이 왕명을 받들어 편찬, 간행한 산부인과 계통의 의서. 1권 1책. 목판본. 원래 1434년(세종 16)에 노중례(盧重禮)가 편찬한 ≪태산요록 胎産要錄≫ 2권을 개편, 언해한 것으로서 주로 부인과에 속하는 잉태에서부터 출산과 유아보호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처방과 치료방법을 부문별로 수집, 편찬한 책이다.
산부인과계통의 한방서로는 원래 세종 때의 ≪산서 産書≫와 노중례의 ≪태산요록≫ 및 연산군 때의 ≪임신최요방 妊娠最要方≫ 등이 있었으나, 이들은 모두 한문으로 쓰여져 부녀자가 보기에는 너무 어려웠으므로, 선조 때 허준이 언해하여 이 책을 편찬하였다.
내용은, ① 구사(求嗣), ② 잉태(孕胎), ③ 태맥(胎脈), ④ 험태(驗胎), ⑤ 변남녀법(辨男女法), ⑥ 전녀위남법(轉女爲男法), ⑦ 오조(惡阻), ⑧ 금기(禁忌), ⑨ 장리(將理), ⑩ 통치(通治), ⑪ 안태(安胎), ⑫ 욕산후(欲産候), ⑬ 보산(保産), ⑭ 반산(半産), ⑮ 찰색험태생사(察色驗胎生死), {{#204}} 하사태(下死胎), {{#205}} 하포의(下胞衣), {{#206}} 산전제증(産前諸證), {{#207}} 산후제증(産後諸證), {{#208}} 임산예비약물(臨産預備藥物), {{#209}} 첩산도법(貼産圖法), {{#210}} 부초생소아구급(附初生小兒救急) 등 43개 항목으로 세세히 나뉘어 있으며 각각 증세와 처방이 한문과 언해문으로 나와 있다.
이 책의 여러 처방에 나오는 우리말의 어휘와 표기법 및 한자음표기 등은 17세기의 국어연구에 많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고, 그 이전·이후의 언해문헌들과의 비교연구에서 얻는 국어사적 가치도 매우 클 것으로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우리 한방(漢方) 수준을 잘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므로, 한방의학사료로서의 가치 또한 적지 않을 것으로 평가된다.
국립중앙도서관과 규장각도서에 있으며, 1973년 아세아문화사(亞細亞文化社)에서 ≪언해두창경험방 諺解痘瘡經驗方≫·≪언해두창집요 諺解痘瘡集要≫·≪언해납약증치방 諺解臘藥證治方≫·≪언해구급방 諺解救急方≫·≪벽역신방 僻疫神方≫ 등과 함께 합본으로 영인, 출판하였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 全(金斗鍾, 探求堂, 1966)
예방고 [例方攷]
1818년(순조 18)에 간행된, 고시(顧?)가 지은 의학서. 1권 1책. 필사본. 이 책의 내용은 풍일(風一)·한이(寒二)·서삼(暑三)·습사(濕四)·조오(燥五)·화육(火六)·내상칠(內傷七)·허로팔(虛勞八)·곽란구(?亂九)·구토십(嘔吐十)·해수십일(咳嗽十一) 등과 신(身)·정(精)·몽설(夢泄)·기신(氣神)·혈몽(血夢)·성음(聲音) 등의 잡방(雜方)에 이르는 예방(例方)을 집성한 것이다. 그러나 사장본으로 널리 이용되지 않았다. 현재 김두종(金斗鍾)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용산요두편 [龍山療痘編]
1672년(현종 13) 이번(李蕃)이 지은 두창(痘瘡 : 천연두)에 관한 의서(醫書). 1권 1책. 필사본. 이 책은 박진희(朴震禧)의 ≪두창경험방 痘瘡經驗方≫을 참고로 하여 편술한 것이다.
자서(自序)에 “근래 여러 의원들의 경험방이 증세에 따라 간략하게 약을 수록한 것이 없지는 않으나, 다시 다른 서적의 두방(痘方)과 두진(痘疹) 치료의 견문을 종합하여 편찬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유만(柳萬)의 발문에도 “박진희의 두방이 대증투약에 신효하나 희귀한 약을 중용하므로 현실에 맞지 않은 느낌이 있던 차에 이중거(李仲擧)가 널리 제방(諸方)을 참작하여 취사선택과 보충을 하여 이 책을 편찬한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이와같이, 이 책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편찬한 것이다. 또, 이 책은 ≪산림경제≫의 의약방에 인용되어 있어 의료혜택을 쉽게 받지 못한 시골사람들에게까지 널리 이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김두종가(金斗鍾家)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우두신설 [牛痘新說]
1885년(고종 22) 4월 지석영(池錫永)이 지은 의서(醫書). 2권 1책. 활자본. 우리 나라 최초의 종두서(種痘書)이다. 상·하 두 권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은 지석영이 오랫동안 경험해온 지식을 종합하여 간행하였다.
상권의 서두에 김홍집(金弘集)·이도재(李道宰)의 서(序) 및 저자의 서가 있고, 그 다음에는 영국 의사 제너(Jenner, E.)의 ≪우두고 牛痘考≫·≪우두속고 牛痘續稿≫, 햅슨(Habson)의 ≪종두론≫과 ≪만국공보≫에 소개된 ≪우두내력≫ 등을 기재하였다.
그밖에도 청나라 가경(嘉慶) 22년(1817) 남해구희(南海邱熺)의 〈인두약서 引痘藥序〉, 청나라 도광(道光) 8년(1828) ≪인두략 引痘略≫을 중간(重刊)한 회망언(會望彦)의 서(序), 조난정(趙蘭亭)의 ≪증보우두삼요 增補牛痘三要≫ 서문 등을 수록하였다.
특히, 하권에는 실기방법 등을 체계적으로, 소아접종법(小兒接種法)·진두가두(眞痘假痘)·종두중금기·소아두장채취법·두묘제조(痘苗製造) 및 축장법(蓄藏法), 채두가수장법(採痘痂收藏法)·독우종두(犢牛種痘) 및 경과, 독우채장법·독우사육법·방약(方藥) 등을 기술하고, 그밖에도 계우상도(繫牛床圖) 및 종두기구류도가 실려 있다.
이와같이, 제너의 우두종법 발견으로부터 이 법(法)의 한역서의 소개, 우두의 시종(施種)·치료 또는 두묘(痘苗)의 제조와 종우(種牛)의 사양법(飼養法)에 이르기까지 모든 방법을 간명히 서술하였다. 고려대학교 도서관 및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 [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
1541년(중종 36) 가축의 전염병에 대한 치료방문을 모아서 번역한 책. 1책. 활자본. 편자의 이름은 밝혀져 있지 않다.
1541년 봄, 평안도에 소의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여 다른 도로 번질 뿐만 아니라, 양이나 돼지에게도 병이 퍼지게 되자, 왕의 명령으로 소·말·양·돼지의 염역에 필요한 치료방들을 발췌, 초록하여 그해에 간행하였다. 이 책은 우리 나라 우역사(牛疫史)나 수의사(獸醫史)를 밝히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체재 및 이본〕
체재에 있어서 한문으로 된 본문에 이두(吏讀)와 한글로 된 두 가지의 번역을 함께 실은 점이 특이하다. 원간본으로 추정되는 책은 한 일본인이 소장하고 있는데, 활자본이며 한글에 방점 표기까지 있다고 한다. 이 책의 이름은 ≪우양저염역치료방≫으로서 ‘마(馬)’가 누락되어 있다. 1541년 11월의 권응창(權應昌)의 서문에서도 말에 대한 언급이 없으므로 중간본부터 ‘마’가 서명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의의〕 ≪참고문헌≫ 고친 한글갈(최현배, 정음사, 1961)
≪참고문헌≫ 增訂朝鮮語學史(小倉進平, 東京刀江書院, 1940)
≪참고문헌≫ 朝鮮醫書誌(三木榮, 大阪 學術圖書刊行會, 1973)
≪참고문헌≫ 養蠶經驗撮要와 牛疫方의 吏讀의 硏究(安秉禧, 東洋學 7, 1977)
≪참고문헌≫ 中世語의 한글資料에 대한 綜合的인 考察(安秉禧, 奎章閣 3, 1979)
운기연론 [運氣衍論]
1725년(영조 1) 윤동리(尹東里)가 편찬한 의서(醫書). 1권 1책. 필사본. 이 책은 ‘초창결(草窓訣)’·‘삼리결(三理訣)’·‘원기활법(圓機活法)’ 등의 이름으로 전해져 있는데, 그 내용에 있어서는 일치하지 않는 것도 있다.
내용은 인체의 생리와 병리가 모두 오운육기(五運六氣)에 의한다는 것을 논하였는데, 그런 까닭으로 그 치법에 있어서도 오운육기의 세령(歲令)을 자세히 살펴 질병의 형증(形證)과 맥식(脈息)을 구분하여 용약의 원칙을 정하게 된다.
이러한 의설(醫說)은 송나라의 ≪소문입식운기논오 素門入式運氣論奧≫에 적혀 있는 오운육기설을 거의 그대로 답습한 데 지나지 않는 것인데, 이러한 병리와 취법을 음양오행·오운육기의 원리로 논하게 된 것은 의학의 원리를 파악하고자 하는 올바른 견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송대 이후로 그 당시에 성행하던 성리설(性理說)의 영향을 받아 오운육기의 병리설이 의학의 많은 부분을 지배하게 되어, 우리나라에서도 고려 후반기경부터 근세 조선의 전기에 이르도록 많은 의가들이 이런 운기설을 신봉해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오운육기에 관한 전문서를 보지 못하였는데, 이런 의미에서 ≪운기연론≫은 이 분야를 소개한 최초의 전문서로서 의의가 크다. 현재 초본으로만 전해지고 있으며, 김두종가(金斗鍾家)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유유일심 [幼幼一心]
1781년(정조 5) 이정읍(李廷揖)이 편찬한 의서(醫書). 3권 1책. 필사본. ‘유유집성(幼幼集成)’이라고도 한다.
이 책의 교정을 본 김기헌(金紀憲)의 서문에 의하면, 이정읍은 소시에 명의(名醫)로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나 불행히도 사고로 유배되어 30여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면서 ≪의유 醫幼≫ 수십권을 찬집하였는데, 모두 흩어져버려 전하지 못하고 오직 본서 3권이 남아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본서는 이정읍이 유배지에서 찬집한 것인데, 그 내용은 소아의 해독법(解毒法)·단제법(斷臍法)·세목법(洗沐法)·유포법(乳哺法)·보호법(保護法)·단유법(斷乳法)·초생간병결(初生看病訣)·관형찰색(觀形察色)·초생잡병(初生雜病)·태병(胎病)·촬구(撮口)·금구(○口)·제풍(臍風)·제창(臍瘡)·야제(夜啼) 등의 소아병 69증(症)에 대하여 간단히 병증을 논하고, 그 병증에 해당되는 약방들을 열거한 소아과의 전문방서이다. 일본 미키문고(三木榮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의가신방 [醫家神方]
1836년(헌종 2)에 씌어진 것으로 추측되는 저자 미상의 의서(醫書). 1권 1책. 필사본. 두창(痘瘡 : 천연두)에 관한 저술로 내용 목차는 다음과 같다. 초일삼조(初日三朝)·출두삼조(出痘三朝)·기창삼조(起脹三朝)·관농삼조(貫膿三朝)·수렴삼조(收?三朝)·변두형색(辨痘形色)·의학초행입문(醫學初行入門)·종두방(種痘方) 등이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참고문헌≫ 韓醫藥書攷(金信根, 서울大學校出版部, 1987)
의감산정요결 [醫鑑刪定要訣]
1849년(헌종 15) 이이두(李以斗)가 지은 의서(醫書). 3권 3책. 석인본. 천·지·인의 3권으로 되어 있는데, 그뒤 100년이 지나 그의 후손인 상준(相駿)이 간행하였다.
저자는 원래 유학에 종사하였으나 의약·천문·지리·산수에도 능통하여 일찍이 허준(許浚)의 ≪동의보감≫을 읽고 자신이 시험한 가장 요긴한 것을 수초(手抄)하고, 혹은 약물의 군신좌사(君臣佐使)를 뽑아 그 중량을 가감하며, 또는 신방(新方)을 별도로 구상하여 원방 밑에 부기하고, 기타 잡방과 속방을 신방 밑에 열거하였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의감중마 [醫鑑重磨]
1908년에 이규준(李圭晙)이 지은 의서(醫書). 6권 3책. 목판본. 이 책은 그가 평소 주장하던 부양론(扶陽論)과 기혈론(氣血論)을 ≪동의보감≫ 중에서 상통된 부분을 발췌하여 엮은 것이다. 그래서 ≪동의보감≫을 거듭 연마한다는 뜻에서 ‘의감중마’라고 책명을 지었다.
그는 송의학의 전통을 이어온 자음강화(滋陰降火)의 설을 배척하고, “양은 항상 부족한 것을 걱정하고, 음은 항상 남음이 있는 것을 걱정한다(陽常患不足 陰常患有餘).”고 주창하여 유아로부터 노년기까지 양을 돕는 약을 준용하여왔고, ≪내경 內經≫의 고전을 연구하여 진화(眞火)를 잘 보존하는 부양강음(扶陽降陰)의 치법(治法)을 강조하였다. 한독의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의감집요 [醫鑑集要]
저자·연대 미상의 의서(醫書). 7권 7책. 필사본. 여러 가지 의서에서 진료에 필요한 치료법과 약물을 발췌하여 사용에 편리하도록 엮은 책으로, ≪의림촬요 醫林撮要≫가 인용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영조 이후에 쓴 것으로 생각된다.
내용은 내경편(內景篇)·외형편(外形篇)·잡병편(雜病篇)·탕액편(湯液篇)으로 되어 있으며, 약성총목(藥性總目)에는 거기에 실린 약재 개개의 약성과 효능에 대하여 씌어져 있고, 그 약명에는 한글을 병기하였기 때문에 당시의 식물명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참고문헌≫ 韓醫藥書攷(金信根, 서울大學校出版部, 1987)
의령 [醫零]
1798년(정조 22) 정약용(丁若鏞)이 편찬한 의서(醫書). 1권. 활자본.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與猶堂全書≫의 ≪마과회통 麻科會通≫ 권말에 1권으로 되어 있다.
그 내용은 육기론(六氣論)·외감론(外感論)·이증론(理證論)·허실론(虛實論)·비풍론(非風論)·제량론(劑量論)·시령론(時令論)·근시론(近視論)·인면창론(人面瘡論)·잡설(雜說) 등으로 나누어 해설하고 있다.
〈육기론〉에서는 ≪소문 素問≫의 설을 인용하여 “천하에 낮보다 더 조(燥)한 것이 없는데 금(金)이 조하여진다는 것은 무슨 까닭이며, 천하에 수(水)보다 더 습(濕)한 것이 없는데 토(土)가 습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라 하여 ≪소문≫의 설을 반박하였다.
〈근시론〉에서는 “종래의 의설에 의하면 근시(近視)치 못한 자는 양부족(陽不足)이요, 원시(遠視)치 못한 자는 음부족(陰不足)인 까닭이라 하였으며, 혹은 근시치 못한 자는 수(水)가 없음이요, 원시치 못한 자는 화(火)가 없음이라 하였으나 근시와 원시가 그런 음양부족이나 수화의 유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안구(眼球)의 평돌(平突)에 달려 있다.
안구가 평하면 시심(視心)이 원(遠)에 회(會)하는 고로 원시가 되고, 안구가 돌(突)하면 시심이 근(近)에 회하는 고로 근시가 된다. 안경이 평하면 문자가 좀 멀리 떨어져도 잘 볼 수 있으나, 돌하면 가까운 것은 볼 수 있어도 조금 멀면 잘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 ”라고 하여, 초점의 거리에 관한 근세 물리학적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이와같이 종래의 음양오행설에 반항적 태도를 취하고, 근세 물리학적 이론을 전개하게 된 것은 서구의학적 사상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麻科會通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의림비서 ≪참고문헌≫ 韓醫藥書攷(金信根, 서울大學校出版部, 1987)
의문보감 [醫門寶鑑]
1724년(경종 4) 주명신(周命新)이 편찬한 의서(醫書). 8권 1책. 필사본. 그뒤 1919년 이명석(李命錫)이 고정(考訂)하여 활자본으로 출간하였다.
이 책은 주명신의 자서(自序)에 적혀 있는 것과 같이 모든 임상적(臨床的) 병증들을 중심으로 각 병문(病門)을 나누고 그 병문에 해당되는 병원(病源)과 병인(病因)을 논하였으며, 그 다음에는 치법(治法)과 약방으로 고금 명의 및 자신의 치험례를 붙여서 병증에 따라 쉽게 그 방약들을 찾을 수 있도록 질서정연하게 편성하였다.
이것은 그 당시의 실증적 학풍에 따라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 의한 철리적공론(哲理的空論)에 휩쓸리지 않고 임상병증을 중심으로 각 병문의 증후에 따라 치방을 확립하도록 한 것이다. 김두종가(金斗鍾家)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의문정요 [醫門精要]
1504년(연산군 10) 허종(許琮)이 지은 의서(醫書). 50권 87문(門). ≪해동문헌총록 海東文獻總錄≫의 의약류에, 책의 권수는 50, 문은 87이라 하고 그 아래에 신용개(申用漑)의 발문을 간략하게 소개하였는데, 권50은 잘못된 것 같다.
허종은 내의원도제조로 윤호(尹壕)·임원준(任元濬)과 함께 1490년(성종 21)에 ≪신찬구급간이방 新撰救急簡易方≫을 편술한 공으로 상을 받았다. 현재 전하지 않고 있다.
≪참고문헌≫ 海東文獻總錄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의방신감 [醫方新鑑]
조선 말기 한병련(韓秉璉)이 지은 의학서. 3권 1책. 활자본. 1915년 그의 아들 석원(錫元)이 교열하여 간행하였다. 서울 회동서관(匯東書館)에서 발행하였다. 이 책의 집필 동기는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을 비교하고자 함에 있었는데, 양의학서를 연구하여 고방(古方)을 주축으로 하고 신방(新方)을 가미하여 서술하였다. 당시로서는 동서의학의 비교학으로 귀한 책이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韓醫藥書攷(金信根, 서울大學校出版部, 1987)
의방요록 [醫方要錄]
1493년(성종 24)에 허저(許?)가 저은 의서. 3권. ≪성종실록≫에 의하면 "성종 24년(1493) 2월 내의원(內醫院) 주부 허저가 ≪의방요록≫ 3권을 찬진하였는데, 심히 관람(觀覽)에 편리하므로 내의원에서 교정(校正)하여 간행하게 하다."라고 쓰여 있을 뿐 현전하지 않는다.
≪참고문헌≫ 朝鮮王朝實錄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의방유취 [醫方類聚]
1445년(세종 27) 왕명에 의하여 편찬된 의서(醫書). 266권 264책. 목활자본. 한방의학의 백과사전격인 의전(醫典)이다.
1442년 세종은 의서들의 유취(類聚:종류별로 모집함.)를 편찬하기 위하여 집현전 부교리 김예몽(金禮蒙), 저작랑 유성원(柳誠源), 사직 민보화(閔普和) 등에 명하여 편성시킨 뒤, 다시 집현전 직제학 김문(金汶)·신석조(辛碩祖), 부교리 이예(李芮), 승문원 교리 김수온(金守溫)에 명하여 의관 김순의(金循義)·최윤(崔閏)·김유지(金有智) 등을 모아 편집하게 하였다.
그리고 안평대군 용(安平大君瑢)과 도승지 김사철(金思哲), 우부승지 이사순(李師純), 첨지중추원사 노중례(盧仲禮)로 하여금 감수하게 하여 3년이 지난 1445년에 모두 365권을 편성, 완료하였다. 그러나 그 뒤 실제로 간행할 때에는 총권수 266권 264책으로 되어 있어 편성 당시에 비하여 훨씬 정리, 축소되었다.
이 책은 권질이 너무나 방대하므로 간행될 때까지 여러 해 동안 산삭교정(刪削校正)과 이합정리(離合整理)를 거쳐서, 1477년(성종 8) 5월에 을해자(乙亥字)로 겨우 30질을 인출(印出)하였다. 인출된 뒤 내의원(內醫院)·전의감(典醫監)·혜민서(惠民署)·활인서(活人署) 등을 비롯한 관계관서에 나누어 배치되었다.
간행부수가 겨우 30질밖에 되지 않고 그 뒤 다시 재간되지도 못하였으므로 동양 최대의 의전이면서도 일반적으로 널리 실용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그 서목조차도 비교적 희소하게 보인다. 더구나 의방서인 까닭으로 널리 주목을 끌지도 못하였다.
그 다음에는 모든 질병을 91대 강문으로 나누어 각 병문의 아래에 먼저 그 문에 해당되는 병론(病論)을 들고, 그 다음에는 약방들을 그 출전(出典)의 연대순에 따라 열거하였으며, 그 방문들을 채록하는 데에도 연대의 선후와 문자의 중출 및 이동(異同)에 따라 일일이 주해하였을 뿐 아니라 각 방서들을 원문 그대로 질서정연하게 유에 따라 편입하였다.
그리고 병문 분류방법에 있어 병증을 중심으로 한 것과 신체의 부위로 한 것들이 섞여 있어 근세의학 각 분과의 계통적 지식을 쉽게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각 분야에 관한 지식이 거의 망라되어 있다.
그리고 이 의전에 인용된 고전 의서들은 한·당·송·원시대에 이르는 중요한 고전 방서들이 153부나 망라되어 있으며, 그 밖에 명초의 방서들도 보인다.
다만 ≪어의촬요≫는 고려 중엽에 최종준(崔宗峻)이 편성한 ≪신집어의촬요방≫일 것이다. 이러한 중요한 고전 의방서들이 이 책을 편집할 때 기본자료로서 원문 그대로 충실히 채록되어 있는 것은 이 책의 편찬이 얼마나 충실하였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의 편집을 단순히 한의방서들을 유취한 총서식 유서라고만 볼 것이 아니라, 그것은 어디까지나 민족문화의 자주적 건설의 일환으로 우리 의학을 자주적으로 발전시킬 전제로서 먼저 고전 한의방서들을 유취, 정리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외래지식인 한방의학을 자신의 의학으로 쉽게 수용, 동화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는 이러한 정리작업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먼저 향약을 중심으로 한 ≪향약집성방≫을 완성하고, 그 다음에 이 책을 편집하기 시작한 것도 그 의도가 이런 데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므로 이 책의 성립과 함께 우리 의학은 더욱 자주적 발전의 태세를 갖추게 되었으며, 그 술법도 더욱 확대되었다.
이 책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가토(加藤淸正)가 약탈해 가서 일본 센다이(仙台)의 의사 구토가(工藤家)에 보관해 오다가, 현재 일본 궁내성 도서료(宮內省圖書寮)에 비장된 유일한 을해자 원간본이 남아 있다.
그 뒤 1852년(철종 3) 의관 기타무라(喜多村直寬)가 에도(江戶)에서 10년에 걸쳐 목활자로 축판(縮板), 중간하였는데, 이는 ≪의방유취≫가 완성된 뒤 거의 400여 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1965년 경희대학교 의과대학에서도 모두 11책으로 간행하였다.
이 책이 약탈될 때 12책이 결본되었는데, 중간할 때 의관인 다쿠에(濯江抽齊)가 원간본의 형식에 따라 12책을 보충하여 원간본의 권수와 합치되는 266권의 완본으로 중인하였다.
그 뒤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이 강행될 때에 일본은 이 원간본이 우리 나라에서 망실된 것을 재삼 확인한 뒤, 목활자 중인본 2질을 우리 정부에 수호예물로 헌납하였다. 이 2질 중 1질은 태의원(太醫院)에 보관되었다가 현재 장서각도서에 이장되었는데 이미 많이 낙질되었다.
나머지 1질은 고종이 그 당시의 전의인 홍철보(洪哲普)에게 하사하였던 것인데, 그 뒤 다시 홍택주(洪宅柱)가 소장하고 있다가 현재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의방촬요 [醫方撮要]
1906년 이준규(李峻奎)가 편찬한 의서(醫書). 1권 1책. 활자본. 저자가 태의원(太醫院)의 의관으로서 고종의 명에 의하여 왕실에서 임상적으로 쓰인 여러 의방(醫方)을 모아서 집대성시킨 것이다.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면 분류방식은 다른 의서와 비슷하며 특징적인 몇 가지 항목을 나열하면, 장부(臟腑)·오운주약(五運主藥)·육기주약(六氣主藥)·반진(斑疹)·마목(麻木)·심위통(心胃痛)·요통(腰痛)·통풍(痛風)·두창(痘瘡)·관농(貫膿)·외과(外科)·보유(補遺)·본초(本草) 등이 수록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병론(病論)과 용약(用藥)의 방(方)을 부(附)하여 독자가 보기 좋게 한 데 지나지 않는다. 특히 한의서로서 실용적 가치는 적으나 방대하게 전개한 내용을 보아서는 마치 ≪동의보감≫의 축소판을 연상할 수 있으나 비교가 되지 않으며, 단지 몇몇 내용은 참조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김두종가(金斗鍾家)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의방활투 [醫方活套]
1869년(고종 6) 간행된 황도연(黃度淵)이 쓴 의서(醫書). 1권 1책. 목활자본. 이 책은 저자가 쓴 ≪의종손익 醫宗損益≫을 간편한 표식(表式)으로 쓴 것이다.
서문에 적혀 있는 것과 같이 모든 방문 중에서 가장 긴요하게 쓰여지는 처방들을 상·중·하 삼통(三統)으로 나누어, 상통은 보제(補劑), 중통은 화제(和劑), 하통은 공제(攻劑)의 삼품(三品), 삼단(三段)으로 되어 있는 처방집이다.
예를 들면, 권두의 침선(針線)의 부에 각종 질병을 열거하고, 세목으로 나눈 지병에 대하여 각각 처방을 싣고, 그 처방 아래에 정수(丁數)를 붙여 색인에 편리하게 하였다.
즉, 중풍에 효과가 있는 약방(藥方)을 알려면 중통의 1을 보면 소속명탕(小續命湯)의 처방례가 나와 있다. 반대로 처방을 보면 그 효력이 미치는 대체적인 질병을 알 수 있다.
또한, 처방들은 주치병증(主治病症)과 약명 및 중량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실제 임상가들의 응급적 참고에 쉽게 이용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의종손익 [醫宗損益]
1868년(고종 5) 황도연(黃度淵)이 저술, 간행한 의서(醫書). 12권 6책, 부록 1책. 목판본.
〔편 찬〕
원래 이 책은 1867년에 완성한 원고를 다음해인 1868년에 당시 서울 무교동에 있던 찬화당(贊化堂)에서 간행하였다.
이것은 1855년에 그가 찬술한 ≪부방편람 附方便覽≫을 더욱 간편하고 이해하기 쉽게 개정한 것이다. 부록 1책은 〈본초 本草〉로서 속칭 ‘약성가(藥性歌)’로 불리고 있다.
≪의종손익≫은 ≪동의보감≫을 축소시켜 간결하게 정리한 것이지만 복잡성을 면하지 못하여, 그 중에서 중요한 부분만을 골라 암기하기에 비교적 간편하도록 표식(表式)으로 다시 엮은 것이 1869년 ≪의방활투 醫方活套≫로 출간되었다.
〔주요내용〕
≪의종손익≫의 편집내용을 보면, 권1은 총론(總論)·신형(身形)·정(精)·기(氣)·신(神), 권2는 혈(血)·몽(夢)·성음(聲音)·언어(言語)·진액(津液)·육부(六腑)·포(胞)·담음(痰飮)·충(蟲), 권3은 소변(小便)·대변(大便)·두(頭)·면(面)·안(眼), 권4는 이(耳)·비(鼻)·구설(口舌)·아치(牙齒)·인후(咽喉)·경항(頸項)·흉(胸)·유(乳)·복(腹)·제(臍)·요(腰)·협(脇), 권5는 피(皮:단독·은진·반진 등)·맥(脈)·근(筋)·수(手)·족(足)·전음(前陰)·후음(後陰)으로 되어 있다.
부록인 〈약성가〉는 뒤에 ≪방약합편 方藥合編≫에 인용되어 그 빛을 보게 되었고, 또한 약성(藥性)의 끝에 생약의 이름을 국명(國名)으로 표기하여 그 당시의 생약을 구명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이 책은 그의 대표작이며, 당시 우리 나라 제일의 의학전서로 인정되었다. 규장각도서 등에 있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盧正祐-韓國文化史大系 Ⅲ, 高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1968)
의학침선 [醫學鍼線]
1853년(철종 4) 이용의(李龍儀)가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는 의서(醫書). 1책. 필사본. 이 책에는 그가 쓴 글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황기(黃岐)의 ≪내경 內經≫과 우리나라의 많은 의서의 방문(方文)을 종합한 것으로, 편집자인 이용의가 후배인 윤재혁(尹在赫)으로 하여금 요방(要方)만을 초출(抄出)하여 재편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책의 내용은 신형(身形)·정(精)·기(氣)·신(神)을 비롯한 38개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韓醫藥書攷(金信根, 서울大學校出版部, 1987)
이생록
1523년(중종 18) 정유인(鄭惟仁)이 지은 의서(醫書). 1권 1책. 필사본. ≪해동문헌총록 海東文獻總錄≫ 고양생방(古養生方) 중에서 가법(可法)·가계자(可戒者)를 분류하여 간간이 자기 의견을 붙여 60여조를 1권으로 합성한 것이라 하였다.
≪참고문헌≫ 海東文獻總錄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이양편 [二養編]
1613년(광해군 5) 간행된 조탁(曺倬)이 지은 의서(醫書). 상하 9권. 목판본. 이 책은 의학전문치료방서가 아니고 주로 양생(養生)·운기(運氣)·섭생(攝生)을 다룬 위생서로서, 저자의 호가 이양당(二養堂)이라 이런 이름이 붙었다.
치망 제1편은 천지·운기·내경(內景)·외형(外形)편으로 되어 있으며, 치순·무치 두 편은 선현 및 선유(先儒)들의 양생에 관한 기록과 함께 이욕(耳慾)·목욕(目慾)·비욕(鼻慾)·구욕(口慾)·사지욕(四肢慾)을 경계하는 격언과 그밖에 양생·운기·섭생·치병 등으로 되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임신진역방 [壬申疹疫方]
1752년(영조 28)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임서봉(任瑞鳳)의 의서(醫書). 이 책은 현재 망실되어 그 내용을 알 수 없으나, 정약용(丁若鏞)의 ≪마과회통 麻科會通≫ 권1에 인용된 제가성씨서목(諸家姓氏書目) 가운데에서 ‘임서봉임신방’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는 데에서 알려지게 되었다.
임신년은 영조 28년에 해당되는데, 이해부터 그 다음해까지 홍진(紅疹)이 크게 유행하여 경향 각지를 통하여 사망자가 많았던 것은 ≪영조실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임신년에 유행한 진역의 병증을 실증적으로 관찰한 기록이라고 생각된다.
≪마과회통≫ 아속편(我俗篇)에 일곱 군데에 걸쳐 그 요법을 채록(採錄)하게 된 것으로 보아, 이 책이 ≪마과회통≫이 간행되었던 1798년(정조 22)경까지 민간에서 널리 이용되어왔던 것으로 할 수 있다.
≪참고문헌≫ 麻科會通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임신최요방 [妊娠最要方]
1503년(연산군 9)에 간행된 편자 미상의 의서(醫書). 1권 1책. 활자본. 부인이 임신하였을 때에 식물의 가식(可食), 금기(禁忌) 및 식독(食毒) 등에 관하여 쓴 작은 책이다. 당시 내사(內賜)한 을해자(乙亥字) 인본(印本)을 현재 일본인 스에마츠(末松保和)가 소장하고 있을 뿐이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자항 [慈航]
1889년(고종 26) 이재하(李在夏)가 지은 의서(醫書). 6권 6책. 필사본. 이 책은 여러가지 질병에 대하여 칠언(七言)으로 그 질병에 대한 개요를 설명하고, 또 이들 질병의 원리와 맥법(脈法) 및 여기에 필요한 약명을 적어 설명하고 있다.
정선가정구급방 [精選家庭救急方]
1909년 박용남(朴容南)이 찬술(簒述)한 의서(醫書). 1책. 활자본. 김상건(金相健)이 교정하여 서울 공애당(共愛堂)에서 발행하였다.
내용은
제1장 내과병의 구급방,
제2장 중독(中毒),
제3장 이물적출법(異物摘出法),
제4장 화상 및 동상,
제5장 지혈법,
제6장 실기(失氣) 및 가사(假死),
제7장 인공호흡법,
제8장 외상,
제9장 교상(咬傷)으로 되어 있고,
부록으로 임신의 증후가 수록되어 있다.
주로 서양의학의 구급법을 다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독의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66)
제명진편 [濟命眞篇]
1898년(고종 35) 함태호(咸泰鎬)가 지은 의서. 1책. 필사본. 자서에 의하면, “고종 35년 겨울에 이제마(李濟馬)를 만나고 ≪수세보원내경 壽世保元內經≫ 1편을 전수받아 3년에 걸친 연구 끝에 이를 기초로 하여 삼음(三陰)·삼양(三陽)·64변역법괘(變易法卦)를 서술하고 침구법(鍼灸法)과 제방법(諸方法)을 합편한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한독의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韓醫藥書攷(金信根, 서울대학교출판부, 1987)
제영신론
1902년 박화진(朴華鎭)·조정국(趙鼎國)·이현유(李鉉有) 등이 지은 종두(種痘)에 관한 의서(醫書). 1권. 활자본. 내부(內部) 위생국(衛生局)에서 간행하였다. 저자의 한 사람이며 함경북도 종두위원(種痘委員)인 이현유의 서(序)에 의하면, 1881년(고종 18)에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종두법을 배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언어의 불통으로 여의치 못하여 다시 청나라 길림성(吉林省)의 우두관(牛痘館)에서 종두법을 학습한 뒤에 종두의 기계와 약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와 종두를 실시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우리나라의 우두종법의 수입은 지석영(池錫永)을 중심으로 일본에서 전해온 것 이외에 청나라로부터 전해오기도 한 것을 알 수 있다. 한독의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제영신편
1889년(고종 26) 이재하(李在夏)가 편찬한 우두(牛痘)에 관한 의서(醫書). 2권 1책. 목판본. 이 책의 서문에 의하면 청나라의 길림성(吉林省)의 우두관(牛痘館)에서 미국인으로부터 우두방법을 배운 다음 이를 실험하여 그 효과를 확인하였다고 한다.
또한, 일본인에게서 배운 지석영(池錫永)과 중국인에게 배운 최창진(崔昌鎭)에 이어 본격적으로 서양사람으로부터 배운 방법이라 쓰여 있다. 이재하는 이 책을 교정한 강해원(姜海遠) 등과 함께 대구에서 우두국(牛痘局)을 개설하고 종두(種痘)를 실시하면서 이 책을 간행하였는데, 내용은 지석영의 ≪우두신설≫을 발췌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66).
제중신편 [濟衆新編]
1799년(정조 23) 왕명에 의하여 내의원(內醫院)수의였던 강명길(康命吉)이 편술한 의서(醫書). 8권 5책. 목판본.
이 책의 간행경위에 대해서는 ≪정조실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정조가 춘저(春邸:세자 시절 살던 저택)에 있을 때 10년 동안 시탕(侍湯:부모의 약시중을 들음)하면서 조석으로 맥결(脈訣:진맥의 비결)과 약론(藥論)·의리(醫理)를 연구하며 고전의방서 및 역대 한방서들을 열람하던 중 대표적 의서인 허준(許浚)의 ≪동의보감≫에도 빠진 것이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내의원에 명하여 모든 의방들을 채집하게 하여 ≪제중신편≫ 8권, 목록 1권을 편성시킨 뒤, 주자소(鑄字所)에 보내어 각판인반(刻板印頒:판각하고 인쇄하여 널리 배포함)하게 하고 내의원 도제조이며 좌의정인 이병모(李秉模)에게 서문을 쓰게 하였다고 한다.
각 항목의 분류방법은 주로 ≪동의보감≫의 내경편(內景篇)·외형편(外形篇) 및 잡병편에 의거하였으며, 약방문들의 출전도 ≪동의보감≫에서 많이 인용하였다.
그러나 이 책에 새로 증보된 양로(養老)·약성가(藥性歌) 등은 ≪동의보감≫에는 없는 것이며, 특히 내의원의 상비약방들은 내국방(內國方)으로서 자세히 첨부시켜 왕실내의원 전용 약방들을 민간에까지 보급시켰고, 더러는 자가경험의 치방(治方)들을 부기하였다.
이 책의 제8권에는 중요한 약물(藥物)의 효용을 사언사구로 엮은 약성가(藥性歌) 386수가 있는데, 약성가 한 수마다 그 아래에 소자(小字)의 한글로 약물명을 쓴 것이 276개 보인다. 이 한글표기의 약물명에 보이는 국어학적 특징을 들면 다음과 같다.
이 향약명은 ≪동의보감≫을 비롯한 의서에 출현하는 향약명과 비교하여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의종손익 醫宗損益≫에는 이 ≪제중신편≫의 약성가를 수정한 약성가가 있어서 비교가 된다.
이 책은 간행된 뒤 널리 보급되어 많은 의인들에게 읽혀왔을 뿐 아니라, 청나라에까지 건너가 8권 7책으로 발간되기도 하였다. 한독의약박물관과 규장각도서에 있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참고문헌≫ 東醫寶鑑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제중입효방 [濟衆立效方]
고려 의종 때 김영석(金永錫)이 찬한 의서. 저자는 인종과 의종 때 내외 요직을 지내면서 신라 및 송나라의 의서를 참작하여 이 책을 편찬하였다.
현재 전하지 않아 그 내용을 짐작하기 어려우나, 조선 세종 때 편찬된 ≪향약집성방 鄕藥集成方≫에 그 방문이 남아 있다.
그런데 당나라의 ≪천금방 千金方≫이나 ≪외대비요 外臺秘要≫에서는 편풍적년불차(偏風積年不差)의 병에 푸른 솔잎의 즙〔靑松葉汁〕과 청주(淸酒)를 섞어서 내복하도록 되어 있을 뿐이고, ≪제중입효방≫에서 보이는 솔잎을 찜질하는 외용적 방법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같은 사실로써 고려의학이 한의학의 영향을 받고 있으면서도 자주적 전통을 보존하여온 것을 다소나마 추상할 수 있다.
≪참고문헌≫ 鄕藥集成方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66)
종두심법요지 [種痘心法要旨]
1800년(정조 24) 정약용(丁若鏞)이 종두(種痘)의 유래에 대하여 쓴 책. 활자본. 정약용이 쓴 ≪마과회통 麻科會通≫의 권말에 부록으로 실려 있다. 중국 청나라 때 ≪의종금감 醫宗金鑑≫ 중에 채록된 유과종두심법요지(幼科種痘心法要旨)와 ≪정씨종두방 鄭氏種痘方≫을 합하여 다시 개편한 것이다.
간행유래는 저자의 ≪종두설≫(여유당집 제1집)과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 종두변증설(種痘辨證說) 및 이종인(李鍾仁)의 ≪시종통편 時種通編≫ 자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저자는 여러 번의 실제 실험을 거쳐 성공한 뒤 경기도 포천에 있는 한의사 이종인에게 이 법을 전수하였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주촌신방 [舟村新方]
1687년(숙종 13)에 신만(申曼)이 편찬한 의서(醫書). 3권 1책. 연활자본. 1930년 충청북도 옥천에서 서우석(徐雨錫)이 발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주촌이 호인 그의 자서에 의하면, 옛 방문들 중에서 얻기 어려운 것은 빼고 향리에서 대체할 수 있는 약재를 충당하는 새로운 제방(製方)을 만든 것이라 하였다.
내용은 소아편·부인편·대인편의 3편으로 되어 있다. 소아편에는 운기유행(運氣流行) 외 90항목에 소아의 여러가지 질병을 상세히 설명하고 약방을 실었으며, 부인편에는 산전(産前)·산후·구사방(求嗣方)을 수록하였고, 대인편에는 상한(傷寒) 등 30항목의 제증(諸證)과 약방을 쓰고 끝에 약성가(藥性歌)를 수재하고 있다.
한독의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밖에도 편자를 알 수 없는 사본 1책이 규장각도서에 있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증수무원록 [增修無寃錄]
조선 후기 법의학서인 ≪무원록≫을 증보한 책. 중국 송대(宋代)의 ≪세원록 洗寃錄≫과 ≪평원록 平寃錄≫·≪결안정식 結案程式≫을 원나라 왕여(王與)가 종합해 ≪무원록≫으로 편찬하였다.
이를 1440년(세종 22)에 주석을 붙여 ≪신주무원록 新註無寃錄≫으로 간행하였다. 그러나 애매하고 잘못된 점이 있으므로 1748년(영조 24) 왕의 특명으로 구택규(具宅奎)가 내용을 증보하고, 애매한 용어를 바로잡은 뒤 해석을 붙여 새로 편찬한 것이 ≪증수무원록≫의 구본이다.
그 뒤 중국의 문자나 방언이 많고 용어가 너무 간결해 이해하기 어려우므로 구윤명(具允明)이 보완해 주석하였으나 완결짓지 못했다. 이후 율학교수(律學敎授) 김취하(金就夏)의 도움을 받아 전반적으로 증수했는데 이것이 ≪증수무원록≫의 신본이다.
1790년(정조 14)에 전 형조판서인 서유린(徐有隣)의 주관하에 김취하를 비롯해 전 형조정랑 유한돈(兪漢敦), 율학별제(律學別提) 한종호(韓宗祜), 박재신(朴在新)이 함께 고증하고 바로 잡아 한글로 토를 달고 필요한 주석을 달아 증보해 1792년에 간행하였다.
이것을 ≪증수무원록≫ 또는 ≪증수무원록언해 增修無寃錄諺解≫ 혹은 ≪증수무원록대전 增修無寃錄大全≫이라고 부른다. 언해본은 조선 말기까지 살인 사건의 지침서로서 법률과 다름없이 적용되었다. 언해본은 1796년에, 그리고 광무연간에도 간행했다.
구택규의 구본, 구윤명의 신본, 서유린의 언해본은 모두 ≪무원록≫ 또는 ≪증수무원록≫이라고 불렀다. 특히 언해본은 ≪증수무원록대전≫이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新註無寃錄
≪참고문헌≫ 增補文獻備考
≪참고문헌≫ 英祖實錄
≪참고문헌≫ 正祖實錄
증수무원록언해 [增修無寃錄諺解]
1790년(정조 14)에 ≪증수무원록대전 增修無寃錄大全≫을 정조의 명에 의하여 서유린(徐有隣) 등이 언해한 법의학서(法醫學書). 3권 2책. 운각활자본(芸閣活字本). 정조 때 구윤명(具允明) 등에 의하여 편찬된 ≪증수무원록대전≫을 언해하여 1792년에 간행하였다.
〔편찬동기 및 내용〕
정조가 ≪증수무원록대전≫을 편찬하게 하고, 또 이를 언해하도록 명령한 것은 형률관(刑律官)들에게 검험(檢驗)에 관한 지식을 정확하게 알리고자 한 때문이다.
1792년 운각(芸閣)에서 감인(監印), 완성된 이 책을 관서(關西)·양남(兩南) 감영에 명하여 간인(刊印)하게 하고, 1797년에는 영영(嶺營)에서 ≪증수무원록대전≫과 함께 목판본으로 간행하기도 하였다.
시체의 시기적인 변화로부터 사인(死因)의 규명에 이르기까지의 법의학적 감정을 필요로 한 각종 사항과 검사 종류의 재료, 또는 검안서식(檢案書式)의 수속·절차에 대한 기록까지 취급되어 있는 법의학적 재판의 전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법의학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18세기 말의 국어를 연구하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특히, 신체어휘(身體語彙)의 좋은 자료를 제공하여준다.
〔국어학적 특징〕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66)
≪참고문헌≫ 한글갈(최현배, 정음사, 1971)
진맥도결 [診脈圖訣]
1389년(공양왕 1) 정도전(鄭道傳)이 편찬한 의서(醫書). 이 책은 현재 망실되어 전하여지지 않으나, ≪동문선≫ 권105와 이숭인(李崇仁)이 찬한 ≪도은집 陶隱集≫의 진맥도지(診脈圖誌)에 적혀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도은집≫에 의하면 제조관(提調官) 이예문(李藝文)이 “의인들은 마땅히 맥을 정확히 진단하여 처방하여야 효과를 볼 수 있다 말하고, 제가(諸家)들의 진단에 필요한 모든 논설들을 상고하여 도(圖)로써 그 이론의 전체를 표시하고, 결(訣)로써 그 이론을 더욱 밝히도록 하였다.”고 한다.
정도전은 개국공신으로 정치에 참여하였지만, 의술에도 정통하여 전의시의 제조관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東文選
≪참고문헌≫ 陶隱集
찬도방론맥결집성 [纂圖方論脈訣集成]
1581년(선조 14) 허준(許浚)이 편찬한 침구(鍼灸)에 관한 의서(醫書). 보물 제1111호. 4권 4책. 목판본. 중국 육조(六朝) 때의 고양생(高陽生)이 편한 의서를 발췌, 교정하여 저술한 것으로 1612년(광해군 4)이 되어서야 내의원에서 개간(開刊)하였다.
내용은 진맥입식(診脈入式), 오장육부, 좌우수진맥(左右手診脈), 이십사맥총론(二十四脈總論, 七表·八裏·九道), 진잡병생사후 급폭병후(診雜病生死候及暴病候), 진임부(診妊婦), 진임부상한(診妊婦傷寒), 소아생사후(小兒生死候) 등으로 나누어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은 일명 ≪찬도맥결 纂圖脈訣≫이라고도 하며, 조선시대 의과시(醫科試)의 강서(講書)로 채택되었다. 현재 규장각도서와 한독의약박물관에 있다.
≪참고문헌≫ 韓醫藥書攷(金信根, 서울大學校出版部, 1987)
창진방촬요 [瘡疹方撮要]
1517년(중종 12) 김안국(金安國)이 간행한 의학서(醫學書). 목판본. 창진의 증세와 그 처방을 추려모아 만든 책이다. 현재 전하는 것은 성환갑(成煥甲) 소장의 책으로, 1517년의 판각본이기는 하나 초쇄본(初刷本)이 아니라 후쇄본이다.
이 책은 창진방촬요목록 4장, 창진방촬요론 69장, 발문(跋文) 1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내용을 보면 예방(預防)·발출(發出)·화해(和解)·구함(救陷)·소독(消毒)·호안(護眼)·최건(催乾)·멸반(滅瘢)·통치(統治)·가식(可食)·금기(禁忌)·본조경험방(本朝經驗方)으로 나누어 각 증세에 따른 처방을 제시하였다.
즉, 성혜방(聖惠方)·약증직결(藥證直訣)·직지소아방(直指小兒方)·발수방(拔粹方)·진씨소아등진방(陳氏小兒痘疹方)·영류령방(永類鈴方)·경험량방(經驗良方) 등이 인용되어 있다. ≪중종실록≫에 실려 있는 김안국의 장계(狀啓)나 이 책의 발문을 참조할 때 언해자는 김안국일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瘡疹方撮要의 漢字音硏究(成煥甲, 中央大學校論文集 25, 1981)
창진집 [瘡疹集]
조선 세조 때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는 창진(瘡疹)에 관한 의서(醫書). 망실되어 현존하지 않는다. ≪창진방 瘡疹方≫이라고도 하는데, 저자는 불확실하다.
세조 때 의원취재(醫員取才) 강서(講書)로 되었다.
≪경국대전≫에도 의과취재(醫科取才) 강서로 채택된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의인(醫人)들 간에 널리 보급되었을 것이다. 선조말경 허준(許浚)은 이 책을 개편하여 ≪언해두창집요 諺解痘瘡集要≫를 간행하였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66)
초창결 [草窓訣]
1725년(영조 1) 윤동리(尹東里)가 편찬한 운기론(運氣論)에 대한 의서(醫書). 1책. 필사본. ‘초창(草窓)’이란 윤동리의 호인데, 그는 사인(士人)으로서 유의(儒醫)에 속한 세업(世業)을 가지고 숙종·영조 때 저술과 의업을 겸하였다고 여겨지고 있다.
원래 초창이란 호는 중국의 의인(醫人)으로 주염계(周濂溪)를 흠모하여 창 앞에 풀을 자르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는 유보(劉溥)의 것이었는데, 윤동리가 그의 의학을 이어받았다는 의미로 붙인 것이다.
유보의 의론(醫論)은 운기론이며, 이 책도 이 설을 논하고 있다. 운기론이란 천지운기로써 생년과 병기(病紀)가 정해진다고 보고, 따라서 의가(醫家)는 이것을 일정한 규정으로 푼 다음 치료를 하여야 한다는 이론으로서 운기가 모든 질병의 병리는 물론 치료법도 지배한다는 설이다.
이 책의 이름은 ‘삼리결(三理訣)’·‘원기치법(圓機治法)’·‘운기연론(運氣衍論)’ 등으로도 전해지고 있는데 내용에서 서로 일치되지 않는 점도 많이 발견된다. 구성은 대략 2부로 나누어진다.
그 하나는 ‘운기연론’에서 운기론을 싣고 그것과 생년 및 질병과의 관계를, 또 다른 하나는 ‘용약(用藥)’으로 운기의 정해진 질병의 치료법을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운기론적 의서로서 중시되었다. 한독의약박물관에 필사본이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韓醫藥書攷(金信根, 서울大學校出版部, 1987)
촌가구급방 [村家救急方]
조선 전기의 문신 김정국(金正國)이 시골 백성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약방문을 수집하여 편찬한 책. 1권 1책. 목판본.
김정국의 자서에 의하면, “여러 의방약서 중에서 민간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약방(藥方)과 또는 시골 부로(父老)들의 문견(聞見)에서 효력을 보았다고 전하는 여러 방문들을 수집하여 ≪촌가구급방≫ 1권을 편집하였다.”고 하여 편집경위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가 경기도 고양 망동(芒洞)의 촌가에 있을 때에 편집한 것을, 1538년(중종 33) 전라감사로 있을 때 남원에서 간행한 것이다. 이 책은 벽촌의 시골 백성들이 병이 났을 때 손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맨처음 본초부(本草部)에서 약재 120여 종에 향명(鄕名)을 붙여 알기 쉽게 기록하였으며, 그 다음에는 대방과(大方科)·부인문(婦人門)·소아문(小兒門)의 3부로 나누었다. 대방과에서는 늘 볼 수 있는 병증 70여 종에 대한 치료법을 논하고, 부인문에서는 24종, 소아문에서도 24종의 병증에 대한 치료법을 알기 쉽게 해설하였다.
권말에는 익수(溺水)·자의(自縊)·파상풍(破傷風)·괴질(怪疾)·육독(肉毒) 등의 치료방법을 부가하였다. 이 책은 1538년의 초간본과 1572년(선조 5)의 재간본이 현재 전하고 있는데, ≪고사촬요 攷事撮要≫의 팔도책판목록(八道冊板目錄) 중에는 전라도 남원판과 경상도 진주판이 보인다.
이들 자료와, 본문 안에 한글로 표기된 약간의 약재 이름이 중세 국어의 연구자료가 된다. 현재 공개된 책은 1572년 무렵 관찰사 이우민(李友閔)이 함경도 함흥에서 중간한 것이므로, 자료에는 당시의 함경도방언의 영향도 있다고 생각된다.
구개음화현상은 전라도방언을 반영하는 ≪몽산법어언해≫ 등 1577년(선조 10) 중간의 송광사판에 처음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이 자료는 그보다 약 4년 앞선 점에서 국어사 자료로서 가치가 크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66)
≪참고문헌≫ 村家救急方의 鄕名에 대하여(安秉禧, 언어학 3, 1978)
≪참고문헌≫ 韓醫藥書攷(金信根, 서울大學校 出版部, 1987)
춘감록 [春鑑錄]
조선 말기 이영춘(李永春)이 지은 의서(醫書). 2권 1책. 활자본. 1927년 저자의 방손인 주영(周榮)과 규동(圭東)이 경상북도 의성에서 간행하였다.
정형(鄭瀅)이 쓴 서문에 의하면, 경상도관찰사 유봉춘(柳逢春)이 이영춘을 어의(御醫)로 추천하였으나 응하지 않고 이 책을 저술하는 데에만 힘썼다고 한다.
기타 소변불통(小便不通)·이질(痢疾)·두풍(頭風) 등의 질병에 대하여 그 진단법과 약방문을 싣고 있다. 이 책에 수록된 내용은 저자가 직접 임상투약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하여 쓰여진 것이다. 한독의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韓醫藥書攷(金信根, 서울大學校出版部, 1987)
치종비방
조선 명종 때 임언국(任彦國)이 지은 외과전문 의서(醫書). 1559년(명종 14)에 금산(錦山)에서 간행되었다. 전라도관찰사 안위(安偉)의 서문에 의하면, 종기(腫氣)치료의 명의(名醫) 임언국의 유방(遺方)을 자신이 구득(求得)하여 금산군수에게 위촉하여 간행하게 한 것이라고 한다.
종래와 같은 고식적 침술에 의하여 종양을 절개하는 것이 아니고, 현대의 외과수술을 연상할 수 있는 관혈적 절개요법(觀血的切開療法)을 많이 응용해온 것을 볼 수 있다. 종양을 전문으로 치료하는 특색있는 외과처방서로, 현재 일본 궁내청서릉부(宮內廳書陵部)에 비장되어 있고, 영인본이 장서각도서에 있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치종지남 [治腫指南]
조선 명종 때의 의원 임언국(任彦國)과 그 제자들의 저술로 추정되는 외과전문 의서(醫書). 2권 1책. 권1에는 배종도(背腫圖)·이농종형도침파법(已膿腫形圖鍼破法)·장종형도침파법(長腫形圖鍼破法)·종중함리형도(腫中陷裏形圖)·원종형침파도(圓腫形鍼破圖)·내종도(內腫圖)·음종도(陰腫圖)·항발제종도(項髮際腫圖)·고창도(鼓脹圖)·흉복통도(胸腹痛圖)·요통도(腰痛圖)·부종도(浮腫圖) 등의 30여 도가 열거되어 있다.
부도 제3의 장종형(長腫形)의 옹창에는 중앙에 침으로 십자형을 절개하고 상하의 종두(腫頭)에는 침봉으로 종양의 복판을 향하여 찌른다. 원종형(圓腫形)은 독기가 부채 모양으로 산발하는 것인데, 좌·우·상·하의 네 곳을 침으로 절개하는 수술도형이다.
권2에는 배종(背腫)·내종(內腫)·음종(陰腫)·항종(項腫)·고창(鼓脹)·부종(浮腫) 등의 증치(證治) 95종과 치법강요(治法綱要)가 9조에 나누어져 자세히 해설되었으며, 그 밖에 용약법(用藥法)으로 토란고법(土卵膏法)·황납육법(黃蠟肉法)·두부부법(豆腐附法)·산매자근용법(山梅子根用法) 등의 특색 있는 방법들이 17항에 나누어져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종래의 한방의학 외과서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현대의 관혈적 수술방법을 연상할 수 있게 하는 대담한 수법을 전개하였으며, 외용적 처치방법에 있어서도 독자적인 신기한 방법들을 볼 수 있다. 이 책의 인본(印本)은 전하지 않고, 다만 초본(抄本)이 일본 교토대학(京都大學)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치포이험 [治疱易驗]
조선 중기에 간행된 포창(疱瘡)에 관한 의서(醫書). 망실되어 전해지지 않으나 1585년(선조 18) 간행한 어숙권(魚叔權)의 ≪고사촬요 攷事撮要≫의 팔도책판목록(八道冊板目錄) 중에 평안도 평양의 판본으로 실려 있다.
그런데 세종 때에 편찬한 ≪향약집성방 鄕藥集成方≫의 옹저창양(癰疽瘡瘍) 중에는 포창은 보이지 않으나, ≪동의보감≫의 잡병편(雜病篇)에는 옹창의 일종으로써 대풍창(大風瘡)·백라창(白癩瘡) 등과 함께 천포창(天疱瘡)을 들고있다.
그 아래 일명 ‘양매창(楊梅瘡)’인데 나(癩)와 비슷하다고 하고, 천포창을 치료하는 처방들의 출전을 밝히는 인용서목 중 ≪치포방 治疱方≫이 세 곳이나 소개되었다. 이 ≪치포방≫이 ≪치포이험≫을 가리킨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포(疱)의 일명이 양매창이라는 데 비추어 ≪치포이험≫이나 ≪치포방≫은 매독을 치료하는 전문방서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독은 15세기가 거의 끝날 무렵에 유행하기 시작하여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한 항해선원들에 의하여 유럽에 전파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와 거의 같은 시대 ≪동의보감≫에도 천포창 일명 양매창이라고 적혀 있으므로, 16세기 중기인 1585년경 우리나라에서도 매독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의방서가 있을 수 있다.
≪참고문헌≫ 攷事撮要
≪참고문헌≫ 東醫寶鑑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침구경험방 [鍼灸經驗方]
1644년(인조 22) 허임(許任)이 찬술한 침구에 관한 의서(醫書). 1권 1책. 목판본. 권두에 자서가 있고, 말미에 내의원제조 이경석(李景奭)의 발이 있다.
1664년(현종 5) 내의원에서 전라관찰사에게 위촉하여 전주에서 간행하였다. 이 책은 태의(太醫) 허임이 자기 경험을 중심으로 침구의 경락공혈을 잘 알 수 있도록 정리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침구의 보사법(補瀉法)에 있어 독자적 분야가 개척되어 있는 침구전문서이다.
이 책은 전주에서 간행된 뒤 80년이 지난 1725년(영조 1)에 번각되었다. 규장각도서와 한독의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참고문헌≫ 韓醫藥書攷(金信根, 서울大學校出版部, 1987)
침구요결 [鍼灸要訣]
1600년(선조 33) 유성룡(柳成龍)이 편찬한 침구에 관한 의서(醫書). 1책. 목판본.
≪의학입문 醫學入門≫의 침구편(鍼灸篇)에서 발췌하여 저술한 것인데, 후손 오영(伍榮) 등에 의하여 300년뒤인 1901년 간행되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지인물기후상응설(天地人物氣候相應說)·천지인물기후상응도(天地人物氣候相應圖)·정면경락제혈기지도(正面經絡諸穴起止圖)·십이경혈명(十二經穴名)·배부경락제혈기지도(背部經絡諸穴起止圖)·장부내관도(臟腑內觀圖)·장부조분(臟腑條分)·십이경혈법치법침구직횡도(十二經穴法治法鍼灸直橫圖)·독임맥혈도(督任脈穴圖)·십오낙도(十五絡圖)·기경팔맥도(奇經八脈圖)·치병기혈(治病奇穴)·명당척촌법(明堂尺寸法)·점혈법(點穴法)·조양법(調養法)·연제법(煉臍法) 등의 순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의 인용서는 서문에서도 있는 바와 같이 ≪의학입문≫인데, 십이경혈법치법침구직횡도 이하는 계통적으로 분류하여 표도(表圖)를 사용하여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유성룡은 의자(醫者)가 아닌데도 침구학의 복잡한 경혈과 그 시행방법 및 효과를 표로써 계통적으로 분류한 것은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한독의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침구택일편집 [鍼灸擇日編集]
조선 세종 때 전순의(全循義)·김의손(金義孫)이 편찬한 침구에 대한 의서. 1권 1책. 목판본. 이 책은 침구를 실시할 때 그 시일이 좋은 때를 선택하기 위하여 1445년(세종 27)에 내의원의관 호군(護軍) 전순의와 사직(司直) 김의손이 함께 편술하였다.
이 책이 간행된 다음 언제 일본에 전하여졌는지 자세하지 않으나 다기가(多紀家)에 초본(抄本)이 수장되었고, 1884년 청나라의 나가걸(羅嘉杰)이 상해(上海)에서 번각하여 간행한 것이 있다고 한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참고문헌≫ 韓醫藥書攷(金信根, 서울大學校出版部, 1987)
태산요록 [胎産要錄]
조선 세종 때 의학자 노중례(盧重禮)가 편술한 태산(胎産)과 어린아이의 질병 치료에 관한 의서(醫書). 2권 1책. 활자본. 저자가 1434년(세종 16) 3월에 판전의감사로 있을 때 편술한 후 주자(鑄字)로써 간행하였다. 상권은 주로 태산교양(胎産敎養)의 법을 논하고, 하권은 주로 유아의 보호법을 기술하였는데, 그 목차는 다음과 같다.
상권에는 태산문(胎産門)에 관한 것으로 태교론(胎敎論)·양태근신법(養胎謹愼法)·태살피기산전장호(胎殺避忌産前將護)·십이월산도(十二月産圖)·임신난산유오(姙娠難産有五)·산보제방(産寶諸方)·장호산부(將護産婦)·산후피기(産後避忌) 등 20항목을 열거하였다.
그리고 인용서목 중에는 당나라의 ≪천금방 千金方≫, 송나라의 ≪성혜방 聖惠方≫·≪성제총록 聖濟總錄≫·≪직지방 直指方≫·≪비급대전 備急大全≫·≪득효방 得效方≫ 등을 비롯하여, 산부인과의 전문서로서 ≪부인대전양방 婦人大全良方≫·≪태산구급방 胎産救急方≫·≪왕악산서 王岳産書≫·≪산서 産書≫·≪산서집록 産書集錄≫을 들고, 소아과의 전문서로서 ≪활유구의 活幼口議≫·≪전씨소아방 錢氏小兒方≫ 등을 들었다.
이상과 같이 당·송의 고전방서와 함께 태산 및 소아의 전문서들을 참작하여 산부의 임신, 분만, 산전·산후에 필요한 사항과 초생아 및 유아들의 양호와 치료에 관한 필요한 사항들을 정연하고 알기 쉽게 서술하였다. 특히 이 책은 조선 중기까지 산서로서 폭넓게 사용되었다. 태산에 있어 실용에 편리하도록 엮어진 요목이다. 고려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참고문헌≫ 韓醫藥書攷(金信根, 서울大學校 出版部, 1987)
통현집 [通玄集]
조선 정조 때 수의(首醫)였던 강명길(康命吉)이 지은 의서(醫書). 5책. 필사본. 이 책은 강명길의 자필로 쓰여져 있으나 서문·발문이 없어 만들어진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저자가 지은 ≪제중신편 濟衆新編≫에 앞서 ≪동의보감≫으로부터 중요한 것을 발췌하고 번잡한 것을 삭제하여 편찬하였다. 일본의 미키(三木榮)는 그의 저서 ≪조선의서지 朝鮮醫書誌≫에서 강명길의 인기(印記)가 찍혀 있는 자필 사본 5책을 수장하였다고 쓰고 있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참고문헌≫ 韓醫藥學攷(金信根, 서울大學校出版部, 1987)
해혹변의 [解惑辨疑]
순조 말기에서 헌종 초년에 이진하(李眞夏)가 모은 의서. 1책. 필사본. 이 책은 시제직지방해혹변의(時齊直指方解惑辨疑)·시제동원십서해혹변의(時齊東垣十書解惑辨疑)·시제의학정전해혹변의(時齊醫學正傳解惑辨疑)로 되어 있다.
이들 의서 가운데 중국의 언어로서 우리 나라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초출(抄出), 간단하게 설명하고 이들에 음주(音註)를 붙이거나 혹은 언해(諺解)를 한 것으로, 주석본의 형태로 되어 있어 우리 나라 의가에서 중국의서를 파독(播讀)하는 데 유익한 책이다. 장서각도서에 있다.
《참고문헌》 韓國藥書攷(金信根, 서울大學校出版部, 1987).
향약간이방 [鄕藥簡易方]
고려 말기에 저술된 것으로 추정되는 의약서(醫藥書).
〔간행시기〕
고려 말기의 향약방서(鄕藥方書)인 ≪삼화자향약방 三和子鄕藥方≫에 가편수집(加編蒐輯)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향약집성방≫의 원본(原本)으로, 그 근간을 형성한 것이지만 산실(散失)되어 없기 때문에 ≪향약집성방≫에 인용되어 있는 유문(遺文)으로 추측할 따름이다.
이 책의 정확한 간행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고려 말기에 유행하던 향약방서들을 조선 초기에 수집한 것 같다고 하는 학설도 있다.
즉, 이 책이 고려 말부터 실용된 것이라면 1393년(태조 2) 정월 각도 의학교수의 교과용으로 사용된 ≪향약혜민경험방 鄕藥惠民經驗方≫에 앞서 반드시 추천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뜻에서 이 책은 태조 2년 정월 이후, ≪향약제생집성방 鄕藥濟生集成方≫이 편성된 1398년 이전에 성립된 것으로 믿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전부 고려시대에 실용되던 향약방으로 되었으리라 생각되는 까닭에 고려시대의 의약서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간행경위〕
권근(權近)의 ≪양촌집 陽村集≫에는 ≪삼화자향약방≫이 너무 간략하여 권중화(權仲和)가 서찬(徐贊)에게 명하여 이 책을 저술한 것이라고 편찬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은 ≪향약집성방≫의 병문(病門) 중에 풍병(風病)·적열(積熱)·학질·각기·요통·곽란·중독·부인과 난산·소아과 등 14문(門)에 걸쳐 50여 방문이 인용된 것을 볼 수 있다.
≪삼화자향약방≫에 의하여 이 책이 만들어지고, 이것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다시 여러 방문을 더하여 ≪향약제생집성방≫이 생기고, 계속하여 ≪향약집성방≫으로 대성된 것이다.
≪삼화자향약방≫과 ≪향약간이방≫은 고려 말기의 것이고, ≪향약제생집성방≫과 ≪향약집성방≫은 조선시대의 소산이라고 확연하게 시대별로 구분할 것이 아니라, 고려 말기에 발흥되어 온 의약의 발전이 그대로 조선시대에 계승, 발전되어 온 것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는 문화적으로 연계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이 책은 당시에 향약의 보급과 의료 확충을 목적으로 하여 우리의 국산의약품을 써서 쉽게 병을 치료할 수 있도록 노력한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鄕藥集成方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66)
≪참고문헌≫ 韓醫藥書攷(金信根, 서울大學校 出版部, 1987)
향약구급방 [鄕藥救急方]
향약으로 질병을 치료하는 데 쓰인 편자 미상의 의약서(醫藥書). 3권 1책. 활자본. 우리 나라에 전해져 오는 가장 오래된 의방서이다.
이 책은 본래 고려시대 1236년(고종 23)경 강화도에서 팔만대장경을 만들던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처음으로 간행하였다고 생각되며, 그 뒤 1417년(태종 17) 7월 경상도 의흥현(義興縣:지금의 군위군 의흥면)에서 중간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 둘 다 전하지 않고 1417년 간본 1부가 일본 궁내청 서릉부(宮內廳書陵部)에 비장되어 있을 뿐이다.
이 책의 책명으로 되어 있는 ‘향약’이라는 말은 자기 나라 향토에서 산출되는 약재를 의미한 것인데, 중국에서 수입되는 약을 당재(唐材) 혹은 당약이라고 부르는데 대해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는 약재의 총칭이다.
고려 중기 후반경에 해당되는 고종 때 이 책을 간행하게 된 것은 종래에 많이 사용되어 오던 외국산 약재들을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는 향약으로 충당하고자 한 것인데, 이때부터 우리 의약을 자주적 방향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향약 자립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부록으로 향약목·초부(草部) 아래 향약 180종에 대한 속명·약미(藥味)·약독(藥毒)·채취방법들이 알기 쉽게 설명되어 있는데, 그 약재명은 다음과 같다.
여기에 쓰인 180종의 향약 중에서 번잡을 피하기 위하여 원문 그대로의 옛 문례(文例)를 들었으며, 이로써 그 당시 본초학에 관한 지식의 개요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구급방이 간행되던 고려 중기 이후 말기는 향약의 연구가 점차 확충되어 많은 향약의 방서들을 보게 되었는데, 그 예로 ≪삼화자향약방 三和子鄕藥方≫을 비롯하여 ≪향약고방 鄕藥古方≫·≪향약혜민방 鄕藥惠民方≫ 등 수종의 향약방서들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상의 약초들 중에 대개는 속명이 적혀 있으나, 인삼·애엽·목단피 등과 같이 속명이 적혀 있지 않은 것도 있으며, 그 속명들 중 현재의 우리들의 용어와도 거의 일치하는 것이 있으나 그 의미가 전혀 통하지 않는 것도 있다.
그러므로 이 구급방에 부록된 향약들은 고려시대의 고전어의 연구와 그 시대의 이두식 한자의 사용법을 고증하는 데도 귀중한 자료가 될 뿐 아니라, 그 시대의 본초학 내지 약용식물들의 연구에도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문헌이다.
≪향약구급방≫은 민간에서 구할 수 있는 약재로 급한 병을 구하는 방문(方文)을 모아놓은 것이므로, 약재나 병의 한어명(漢語名)에 해당하는 우리말〔鄕名〕을 차자(借字)로 기록하여 민간인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이 향명이 13세기 중엽의 국어를 보여주는 것이어서 국어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향명은 본문인 방문 가운데 한어명의 세주(細註)로 기록되기도 하였지만, 부록인 권말의 방중향약목초부(方中鄕藥目草部)에 정리되어 있다.
이러한 표기법은 삼국시대부터 시대의 변천과 함께 발달되어 온 여러 표기법을 반영하는 것으로 13세기 중엽까지 이어져 내려온 향찰(鄕札)의 표기법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향명들이 보여주는 언어현상들은 다음과 같은 것이 특징적이다.
≪참고문헌≫ 國語音韻史硏究(李基文, 서울大學校 韓國文化硏究所, 1972)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참고문헌≫ 借字表記法硏究(南豊鉉, 檀國大學校 出版部, 1981)
≪참고문헌≫ 十三世紀中葉의 國語資料(李基文, 東亞文化 1, 서울大學校 東亞文化硏究所, 1963)
≪참고문헌≫ 鄕藥救急方의 方中鄕藥目硏究(李德鳳, 亞細亞硏究 6, 高麗大學校 亞細亞問題硏究所, 1960)
향약제생집성방 [鄕藥濟生集成方] 동의어 : 삼화자향약방
1398년(태조 7) 조준(趙浚)·권중화(權仲和)·김희선(金希善)·김사형(金士衡) 등이 편찬한 의약서(醫藥書). 30권으로 되어 있으며, 1399년(정종 1) 김희선이 강원도에서 간행하였다.
이 책은 망실되어 그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세종 때 발간한 ≪향약집성방 鄕藥集成方≫과 ≪향약제생집성방≫에서 388증(症)과 2,803방(方)을 인용하였다고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방대함을 짐작할 수 있다.
≪향약제생집성방≫을 만들게 된 경위에 대하여 ≪양촌집 陽村集≫ 권17에 당시의 석학인 권근(權近)이 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서문·발문에 있다.
“우리 나라가 중국과 떨어져 있기 때문에 국토에서 생산되지 않는 약물을 얻기 어렵다. 나라의 풍속에 간간이 일초(一草)로써 일병(一病)을 치료하여 효력을 보았다. 일찍이 ≪삼화자향약방 三和子鄕藥方≫이 있었으나 너무 간략하였다.
이제 판문하(判門下) 권중화가 서찬(徐贊)에게 명령하여 ≪간이방 簡易方≫을 저술하게 하였는데 세간에서 널리 쓰이지 않았다.
태조가 개국한 다음 박시제중(博施濟衆)할 뜻으로 궁민(窮民)들이 병에 의약을 얻지 못하는 것을 측연히 생각하여 오던 차에 좌정승 평양백(左政丞平壤伯) 조준과 우정승 상락백(右政丞上絡伯) 김사형이 태조의 마음을 헤아려 제생원을 두기를 청하고, 중추(中樞) 김희선을 시켜 향약을 채취하여 민질(民疾)을 널리 고치게 하였다.
또 각 도에 의학원(醫學院)을 두어 교수를 보내어 질병을 치료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관약국관(官藥局官)에게 특명을 내려 여러 가지 약방문을 검토하게 하고, 우리 나라에서 얻은 경험방(東人經驗方)을 채집하여 그 종류에 따라서 문(門)으로 나누어 ≪향약제생집성방≫을 편집하고, 끝에 우마의방(牛馬醫方)을 덧붙여 김희선이 관찰사로 재직 중인 강원도에서 간행된 것이다.”
이어서 이 책의 성립에 공헌을 한 조준·김사형·김희선·권중화 네 사람의 공적을 찬양하고, 자국풍토(自國風土)에서 생산되는 약제로써 자국민의 질병을 구료하기를 강조하였고, 이를 위하여 이와 같은 방대한 책이 만들어졌다고 하였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66)
≪참고문헌≫ 韓醫藥書攷(金信根, 서울大學校 出版部, 1987)
향약집성방 [鄕藥集成方]
1433년(세종 15)에 간행된 향약에 관한 의약서(醫藥書). 85권 30책. 활자본.
〔편 찬〕
1431년 가을에 집현전 직제학 유효통(兪孝通), 전의감정 노중례(盧重禮), 동 부정 박윤덕(朴允德)에게 명하여 1년여에 걸친 작업 끝에 1433년 6월에 완성하였다.
이 책은 1399년(정종 1) 제생원에서 간행한 ≪향약제생집성방 鄕藥濟生集成方≫ 30권의 구증(舊症)과 구방을 기본으로 하여 다시 향약의 모든 방문들을 수집하고, 또는 널리 방서들을 빠짐없이 모아서 분류, 첨가하여 만든 것이다.
향약이라는 말은 우리 나라 향토에서 생산되는 약재를 의미한 것인데, 중국산의 약을 당재(唐材)라고 부르는 데 대한 우리 나라산의 총칭이다.
그런데 세종은 우리 나라 사람의 질병을 치료하는 데에는 우리 나라 풍토에 적합하고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는 약재가 더 효과적일 것이라는 병과 약에 대한 의토성(宜土性)을 강조하여 의약 제민(濟民)에 대한 자주적 방책을 세우고자 향약방을 종합수집한 ≪향약집성방≫을 편집하게 한 것이다.
이 책을 편집하기 위하여 먼저 향약과 당재를 비교, 연구하고, 각 도 각 읍에서 생산되는 향약의 실태를 조사하게 하고, 그 다음 ≪향약채취월령 鄕藥採取月令≫을 반포하도록 하였다.
〔편찬경위〕
① 향약과 당재와의 비교 연구:향약의 이용을 권장하기 위해서는 향약과 당약과의 약효를 비교, 검토하여 그 약성의 차이를 잘 감별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1421년(세종 3) 10월 약리에 정통한 황자후(黃子厚)를 부사로서 명나라에 보내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지 않는 당재들을 널리 구해오게 하였다.
1423년 대호군 김을해(金乙亥), 사재부정 노중례 등을 명나라에 보내 우리 나라의 약재에 대한 질의를 거듭하여 향약과 당재의 약성을 비교, 연구하게 하였다.
그 해 4월 전의감·혜민국·제생원의 청으로 명나라에 가는 사절이 있을 때마다 당약을 가져오게 하였으며, 그 뒤에도 명나라의 사절들과 함께 따라간 우리 나라의 의관들이 명나라의 대의원 태의(太醫)들과 만나 서로 약리 약성을 문의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원래 향약은 산지에 따라 같은 종류이면서 그 이름이나 약성을 달리하고 있으며, 혹은 이름은 같으면서도 품종은 다른 예도 있다.
이런 약성에 따라 당재들도 때에 따라서는 우리 나라산으로 대용할 수도 있었다. 그 한 예로는 우리 나라산의 당귀(當歸)는 중국이나 일본산과는 형태는 비슷하나, 식물학적으로는 다른 종류가 대용되어 있다.
현재 우리 나라 약방에서 석고(石膏)라고 부르는 것은 중국·일본 약방에서 부르는 석고가 아니라 방해석(方解石)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분야의 전문의들을 국외에 파견하여 향약과 당재들을 비교, 연구하여 약재의 형태와 약성의 같고 다른 것을 자세히 검색(檢索)하도록 하였다.
② 향약의 분포실태조사:1424년(세종 6) 11월 각 도의 지리지 및 월령(月令)을 편찬하기 위하여 각 도 관찰관에게 명하여 각 도 각 읍에서 산출되는 토산품을 조사하게 하면서, 약재에 있어서는 토산공품(土産貢品)·생산약재(生産藥材)·종양약재(種養藥材) 등으로 나누어 약초들의 분포실태를 세밀히 조사하였다.
이것은 의약을 자주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각 도 각 읍에서 산출되는 그 분포실태를 먼저 파악하여야 되며, 그 실태의 파악은 어디까지나 현실적 통계조사에 기초를 두어야 될 것은 물론이다. 근대국가들이 제각기 엄격한 국세조사를 하고 있는 것도 비슷한 방법이다.
이와 같이, 전국의 팔도에서 산출되는 토산공품과 약재에 있어 생산품과 종양품을 구분하여 조사하게 한 것은 향약의 채집과 재배에 필요한 지식을 알리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③ ≪향약채취월령≫의 간행:이 월령은 1428년(세종 10) ≪향약집성방≫과 같은 편자들에게 명하여 편성하게 하였다. 이 책은 이름 그대로 향약의 채취에 적합한 월령들을 배치하였는데, 수백 종이 넘는 토산약초의 아래에 향명을 낱낱이 기록하고, 그 다음에는 약미, 약성 또는 봄·가을 채취의 조만(早晩), 음양·건폭(乾暴)의 호부(好否:좋고 나쁨) 등을 자세히 교정하였다.
약초의 아래 향명을 붙인 것은 약용식물을 감식하는 데 있어서뿐 아니라, 우리의 고전어의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이지만, 채약정부(採藥丁夫)들이 알기 쉽게 향약을 채취할 수 있도록 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으리라 믿어진다.
이 때는 ≪팔도지리지≫가 거의 완성되었으므로 이 월령의 편집과 함께 각 도 각 읍에서 쉽게 약초를 채취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이상의 작업이 모두 끝난 뒤인 1431년 가을 ≪향약집성방≫을 편집하기 시작하여 2년이 지난 세종 15년 6월에 완성을 보게 되었다.
〔구성과 내용〕
이 책은 모든 질병을 57대강문(大綱門)으로 나누어 그 아래 959조의 소목을 나누고, 각 강문과 조목에 해당되는 병론과 방약들을 출전(出典)과 함께 낱낱이 열거하였다.
57병문들을 총괄하여 보면, 분류방법에 있어 인체 부위를 중심으로 한 병문과 병증을 중심으로 한 병문들이 서로 섞여 있어서, 근세 임상의학의 각 분과별에 대한 계통적 지식을 파악하기는 좀 어려운 느낌이 있다.
그러나 그 내용에 있어 내과 및 전염병·외과·이비인후과·안과·산부인과·소아과 및 치과 등에 이르는 임상 각 과가 거의 망라되어 있어, 종합된 의방서로서 넓은 범위에 걸쳐 자세히 논증되어 있다. 그리고 이 책의 인용 서목은 한·당·송·원의 방서가 160여 종이나 된다.
그러나 그 서명들은 ≪의방유취 醫方類聚≫에 인용된 서목과 거의 일치되므로 생략하기로 하고, 인용된 우리의 고유 의방서들의 이름만을 들어보면 ≪삼화자향약방 三和子鄕藥方≫·≪본조경험방 本朝經驗方≫·≪향약구급방 鄕藥救急方≫·≪향약혜민방 鄕藥惠民方≫·≪향약간이방 鄕藥簡易方≫·≪어의촬요방 御醫撮要方≫·≪동인경험방 東人經驗方≫·≪향약고방 鄕藥古方≫·≪제중립효방 濟衆立效方≫ 등이다.
이상의 방서들은 ≪향약구급방≫을 제외하고는 모두 망실되어 내용을 짐작하기 어려우나, 그 중 ≪삼화자향약방≫·≪본조경험방≫·≪향약간이방≫ 등은 이 책에 비교적 많이 채록되어 있어 그 원상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특 징〕
이 책은 그 서명을 특히 향약이라 하고 그 내용에 있어서도 고려 후반기부터 민간 노인들이 사용해 오던 향약방을 많이 채집한 데서 우리 고유 의학의 전통을 중국에서 수입한 한의방과 융합시켜 우리 의학의 독자적 전통을 찾아보려고 노력해 온 자취를 넉넉히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을 편집하기 위한 전 작업으로 국내에서 생산되는 향약을 당재와 비교, 연구하고, 또는 각 도 각 읍에 분포된 향약의 실태를 조사하여 향약의 채취를 시기에 적절하도록 하는 ≪향약채취월령≫을 간행하게 함으로써 이 책의 편성과 함께 당시의 우리 의약적 지식은 어느 정도의 학술적 체계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향약의 아래에 고유의 향명을 붙이게 한 것은 우리 고전언어의 연구에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게 하고 있다. 한독의약박물관과 규장각도서에 있다.
≪참고문헌≫ 韓醫藥學史(金斗鍾, 探求堂, 1979)
향약채취월령 [鄕藥採取月令]
1431년(세종 13)에 왕명으로 유효통(兪孝通)·노중례(盧重禮)·박윤덕(朴允德) 등이 간행한 의약서. 1권 1책. 필사본.
세종 때는 국내의 향약의 분포실태조사를 전국적으로 실시하여 ≪세종실록≫ 지리지 및 ≪경상도지리지≫ 등에 수록하였다.
또한 향약의 올바른 채취·감별·재배·수납 등을 위한 약무행정책을 수립하고, 더 나아가서는 향약본초학 및 향약의방을 수립하기 위하여 ≪향약채취월령≫ 및 ≪향약집성방≫ 등을 편찬, 간행하였다.
이 책은 ≪향약집성방≫ 중의 본초지부(本草之部)를 편찬하기 위한 준비용으로 일반대중이 향약채취에 직접 편리하게 활용하게 하기 위하여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인본(印本)은 산실되어 존재하지 않고, 일본으로 건너간 수사본(手寫本)을 전사한 것이 규장각도서에 보관되어 있을 따름이다.
내용은 춘하추동 12개월로 나누어서 토산약재를 배열하고 채취에 중점을 두어 각 약초들의 채취에 적합한 월령과 약초의 이름 아래에는 이두로 된 향약명이 부기되어 있다. 이 향약명은 약용식물의 연구뿐만 아니라 우리의 고전어의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실제로 향약채취에 종사하는 채취정부(採取丁夫)들이 알기 쉬운 약초의 향명(鄕名)을 붙이게 된 것으로 짐작된다.
윤회(尹淮)의 발(跋)에는 “토산약재 수백 종에 대하여 향명을 쓰고, 다음에 미(味)와 성(性), 춘추채취(春秋採取)의 조만(早晩), 음양건폭(陰陽乾暴)의 법(法)을 간단히 적은 것이다……”라는 글귀가 보인다.
수재되어 있는 약재의 수효가 수백 종이라고 되어 있으나 실제로 수록되어 있는 약재의 종류는 160종이며, 두 개의 달에 중복해서 수록된 5종의 약재를 빼면 155종에 불과하다.
일본에서 사본을 만들 때 자기네들에게 필요한 품목만 초록하여 그렇게 된 것인지, 처음부터 155종의 간략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향약채취월령≫은 민간에서 월별로 채취하여야 될 약재의 명칭을 목록화한 것이므로, 한어의 약재명과 함께 그에 해당하는 우리의 향명을 차자(借字)로 기록하여 민간인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하였다. 이 향명은 훈민정음 창제 직전의 우리말이므로 국어의 발달사를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책은 134종의 한어 약재명에 대하여 143종의 향명표기를 보여주는데, 이 가운데 주서(朱書)라고 한 것은 본래부터 이 책에 있던 것이 아니고 전사자(轉寫者)가 다른 책에서 옮겨 적은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원간본은 전하지 않고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우리말을 모르는 일본인이 전사한 것이기 때문에 전사과정에서의 잘못도 여럿 나타난다.
≪참고문헌≫ 韓國醫學史(金斗鍾, 深求堂, 1979)
≪참고문헌≫ 借字表記法硏究(南豊鉉, 檀國大學校 出版部, 1981)
≪참고문헌≫ 鄕藥採取月令의 借字表記體系硏究(趙成五, 檀國大學校大學院, 1982)
≪참고문헌≫ 韓醫藥書攷(金信根, 서울大學校 出版部, 1987)
≪참고문헌≫ 鄕藥採取月令 解讀考察(南廣祐, 文耕 11, 中央大學校, 1961)
≪참고문헌≫ 鄕藥名硏究(方鍾鉉, 一 國語學論集, 民衆書館, 1963)
향약혜민경험방 [鄕藥惠民經驗方]
고려 후기에 관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의약서(醫藥書). 이 책은 산실되어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단지, ≪향약집성방≫의 본문 가운데 풍병(風病)·상한(傷寒)·학병(?病)·요통·심통(心痛)·해수(咳嗽)·비뉵(鼻?)·안병(眼病)·인후·제리(諸痢)·옹저(癰疽)·창양(瘡瘍) 등의 11병문(病門)에 26개 방문(方文)이 인용되고 있다.
또한, ≪태조실록≫(태조 2년 정월 23일)에 “전라도안렴사 김희선(金希善)이 도평의사사에게 올린 글에서, 외방(外方)에는 의약을 잘 아는 사람이 없으니, 각 도에 의학교수(醫學敎授) 한 사람씩을 파견하고 계수관(界首官)마다 하나의 의원을 설치하였다.
이를 통해 양반의 자제를 뽑아 모아서 생도로 삼고 그 중에서 글을 알고 조심성 있는 온후한 사람을 뽑아 교도(敎導)로 정하여 그들로 하여금 ≪향약혜민경험방≫을 익히게 하였다.”는 내용의 글이 실려 있는 바 이로 보아 당시 중요한 향약방서(鄕藥方書)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은 송나라 화제혜민(和劑惠民)의 주지(主旨)로 엮어진 ≪태평혜민화제국방 太平惠民和劑局方≫을 본떠서 만들었으며, ≪태평혜민화제국방≫이 관용의서(官用醫書)로서 계속 중용된 예에 따라 고려의 혜민국에서도 향약을 의료에 응용할 수 있는 처방집으로 이용할 목적으로 간행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조선개국 초기에 관아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아, 고려 후기에 간행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문헌≫ 太祖實錄
≪참고문헌≫ 鄕藥集成方
≪참고문헌≫ 韓醫藥書攷(金信根, 서울大學校出版部, 1987)
활인신방 [活人新方]
조선 중종 때 박영(朴英)이 지은 의서. 현재 발견되어 있지 않으나 ≪중종실록≫ 중종 35년 3월조)에 보이는 그의 전기(傳記) 중에 ≪경험방 經驗方≫과 ≪활인신방≫의 저서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박영은 의술에 정통하고 약초를 많이 채집하였으며, 또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 후 고향에 돌아가 의서를 많이 읽고 활인(活人)을 많이 하였는데 그때의 경험을 적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참고문헌≫ 韓醫藥書攷(金信根, 서울大學校出版部, 1987)
황달학질치료방
황달과 학질을 치료하는 방법에 관한 내용을 담은 조선시대의 의서(醫書). 이 책은 망실되어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간행시기와 편찬한 사람을 알 수 없고,≪명종실록≫(명종 5 11월 10일)에 ≪황달학질치료방≫을 승정원에 내려 각 도 주·부·군·현의 첨사(僉使)·만호(萬戶) 등이 간행하였다.
그러나, 산간벽지의 사람은 널리 볼 수 없었으므로 감사 및 주·부거읍(州府巨邑)에서 이 책을 인출하여 경내의 인민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중요한 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달학이해방≫과 ≪황달학질치료방≫이 같은 방서인지 혹은 다른 것인지 속단하기는 어려우나, 두 방서가 모두 황달과 학질을 치료하기 위하여 같은 시기에 관명으로 편집된 것으로 보아 같은 계통의 방서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황제내경소문대요 [黃帝內經素問大要]
조선 말기의 의학자 이규준(李圭晙)이 편찬한 의서. 4권 2책. 목판본. 1906년에 경상도 밀양 금천(琴川)에서 간행하였다. 약칭하여 ‘소문대요’라고 말한다. 중국의 가장 오래된 의학고전의 하나인 ≪황제내경≫의 소문(素問)에 대하여 이규준이 그의 제자들과 문답한 내용을 기술한 것으로 그가 주장한 부양론(扶陽論)을 강조하고 있으며 모두 25편으로 되어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의서
한국에서는 취업시장이 예나 지금이나 참 힘듭니다. 대학을 졸업해도 힘들고 취직해서 직장을 다녀도 미래가 불안합니다.
한국에서 자연의학 의사 자격증 시험대비 한의학 공부를 IBS 강의로 모두 공부한 후, 유네스코 정규대학교 SCU 한의대를 졸업하고 한의학 학사학위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한국 경희대학교, SCU한의대, 중국 중의대.... 전 세계 어디에서나 고등교육국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정규대학교는 학사학위를 수여합니다. 그러나 비정규 한의대는 한의학 학사학위를 수여할 수 없습니다. .
요즘 미국(뉴욕,뉴저지, 플로리다.. 등등 전지역)이나 캐나다에서 대체의학 인기가 치솟고 있다는 뉴스는 '침구사(AcupuncturiSt)'의 얘기가 아니라, 대체의학으로서 자연의학 의사 인기가 상승하고 있다는 뉴스임을 알려 드립니다. 미국에서는 침구사가 되면 고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