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관한 시모음 70)
여름과 모시 /윤무중
여름 색깔로 산뜻하게 태여났다.
언제나 햇빛은 달빛처럼
부드러운 마력이 감춰져 있다
보드라운 살결, 은은한 달빛처럼
까슬 까슬한 소소리 바람이
살갖마다 살포시 깃든다.
바람을 몸안에 듬뿍 낚아채
등줄기 타고 연신 흐르는
땀방울을 소리없이 훔친다
너를 잉태하려면 입술이 허물고
손끝이 패이는 고통을 안기니
여름에 피는 아름다운 꽃이리라
철거덕,철거덕, 태여나는 소리
땀과 침, 눈물없이 볼 수 없는데
품안에 소소리바람이 머문다
여름에는 저녁을 /오규원
여름에는 저녁을
마당에서 먹는다
초저녁에도
환한 달빛
마당 위에는 멍석
멍석 위에는
환한 달빛
달빛을 깔고
저녁을 먹는다
마을도
달빛에 잠기고
밥상도
달빛에 잠기고
여름에는 저녁을
마당에서 먹는다
밥그릇 안에까지
가득 차는 달빛
아! 달빛을 먹는다
여름의 방에서 /김영미
겨울로
피크닉을 떠난다
찬 음료와 푸른 과일
은빛 파도 같은
겨울의 햇살이 돗자리에 꽂힌다
손바닥을 내밀면 손바닥에 꽂힌다
정수리에서도 빛난다
여름의 방에서 나온 겨울의 빛
어쩌다 여름은 이 지경에 이르렀나
겨울은 어쩌다 이 경지에 이르렀나
기류를 타고 셔틀콕은 철새가 된다
무리에서 벗어난 고무공은 통통
겨울의 피크닉에서
여름의 방으로
빛은
앞보다
뒤에서 더 강해
돗자리의 접힌 네 귓속으로 들어가는 시간들
여름의 방에서 곧
어두워진다
여름은 어디에 있나 /박춘석
봉투 속에 들어 있는 두 개의 씨앗을 어디에다 심어서 꽃을 피울까?
나에게 일이란 때에 맞춰 꽃밭에 꽃을 심는 일
누군가 비닐하우스는 신이 사라진 없는 계절이라고 한다.
그곳은 증거가 인멸된 투명한 꽃이 무더기로 핀다고 한다.
여름도 내겐 없는 계절이긴 매한가지라고 하니
두 개의 씨앗이 꽃이 피는 때를 가르쳐줄 때까지, 기다려 보라고 한다.
여름이 꽃을 피우는 힘을 가졌다면 꽃을 심는 나는 신의 힘을 가졌을 거라고 한다.
어쩌면 미래, 내가 찾는 여름과 내가 피울 꽃은 바위처럼 견고할지도 모르겠다.
어떤 마을을 찾아가듯 영원한 꽃, 영원한 여름을 찾아가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커다란 액자 속 같은 내일과 조금 작은 액자 속 같은 모래 속에
심을 꽃씨를 미지의 꽃으로 분류해야겠다.
봉투 속 숨겨둔 비밀이 꽃을 말할 때까지가
여름을 찾는 일이고 꽃의 때를 찾는 일일 것이다.
아직 동어반복 속에 살고 있다.
내 몫의 여름을 만나지 못한 나는
날마다 겸손해지고 있다.
아들과 딸 딱 두 송이 꽃을 피울
여름이 필요한 나는.
이 여름이 가는데 /신성호
봄을 시샘하듯
찾아온 여름
땡볕을 쏟아내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해바라기가 고개를 숙이고
떠나려는 여름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짧은 시간속의 사연들을 챙기고 있구나
목청 컷 울어대던 매미들도
야무진 소리로 여름을 아쉬워하는 듯
오늘도 그렇게 울고 있구나
산으로 바다로 부풀어 떠나던 휴가도
추억의 앨범속에 사진 몇장 남겨놓고
그렇게 이 여름은 떠나가고 있는데
파란하늘을 뒤덮은 저 비구름도
가을의 쓸쓸함의 고독을 알고나 있는지
이 여름이 떠나기를 제촉하는구나
이 여름이 가는길에
흔적이라도 남긴다면
기쁨과 행복의 그 순간과
좋은 기억들만 남겨놓아
세월가고 계절가도
이 여름을 추억하며 살으리라
여름의 이별 /一向 조한직
보인다
들린다
긴 모퉁이를 돌아가는 꼬리
총총걸음으로 성큼 대는 소리
저 소리가 기쁜지 바람도 춤을 춘다
그렇게 가고 말 것을
삼십팔도 선을 넘어버린 그 날의
불꽃처럼 등등한 기세는
죽음 직전의 긴 고통이었다
이젠 가거라
발걸음 서러워도 돌아보지 말고
울일 없이 가거라
하여
다시 돌아올 때는 자지막이 잦아들어라
물같이 흐르는 세월이
푸른 멍처럼 서러워도
나는 가을을 마중하노라.
美 /박용하
삶이
한 번뿐이듯
죽음도
한 번뿐이다
단 한 번 태어난
죽음 -
기릴 일이다
연못에서는
잉어가
수면을 깨며
날개를 젓는다
여름이 가고 있다
여름 /유자효
이 여름에
우리는 만나야 하리.
여미어 오던
가슴을
풀어헤치고
우리는 맨살로
만나야 하리.
포도송이처럼
석류알처럼
여름은
영롱한 땀방울 속에
생명의 힘으로
충만한 계절.
몸을 떨며 다가서는
저 무성한
성숙의 경이 앞에서
보라.
만남이 이루는
이 풍요한 여름의 기적.
여름을 팝니다 /임영준
그대
넉넉한 이 여름을
얼마나 쓰고 있나요
넘실거리는 파도를
원 없이 품고 왔나요
다소곳한 계곡의 젖내를
한 아름 짊어지고 왔나요
돌아오지 않을 청춘인데
하나라도 더 건져
평생 함께 가야지요
그해 여름 /김용수
-아버지
대지가 뒤끓는 대낮
대청마루 뒤안길은
여름 바람이 몰래 지나가는 길
뒷문 열어 제치면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솔솔이 바람
반질반질한 대청마루 바닥에
목침을 베고 누워
딴청을 부리시던 아버지
매미소리 감상하며
소르르 여름을 즐기시던 우리 아버지
보라색 여름 바지 /문정희
여름 다 지나고 선선한 초가을 날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보라색 여름 바지 하나 사 들고 돌아오며
벌써 바람처럼 숭숭 차가운 후회가
뼛속으로 스미어 옴을 느낀다
왜 나는 모든 것을 저지른 후에야 아는가
만져 보고 난 후에야 뜨겁다고 깨닫는가
늘 화상을 입는가
사람들이 이미 겨울을 준비할 때
여름의 잔해에 가슴을 태우고
사랑을 떠나보낸 후에야 사랑에 빠져
한 생애를 가슴 치고 사는가
내 키보다 턱없이 긴 바지단을 줄이며
내 어리석음을 가위로 잘라내며
애써 따스한 입김을 불어넣어 본다
누구나 정해진 궤도를 가는 건 아니지
돌발과 우연이 인생이기도 해
그러나 어느 가을날 하루가
더운 사랑으로 다시 뒤집힐 수 있을까
이 보라색 바지를 위해
무릎 아래까지 흰 별들이 총총 나 있는
보라색 여름바지를 입고 서서
홀로 낙엽 지는 소리를 듣는다
숭숭 기어드는 차가운 바람 소리를 듣는다
그 해 여름 날 /장수남
해마다 유월이 오면
울컥울컥 가슴 무너지는 아픔들 나는
잊을 수가 없었지.
그 해 여름날
별빛 잊어버린 밤하늘
이맛살 잔주름 깊게 걸어온 길
눈시울 침침해 하얗게
젖어있었지.
이젠 알아 볼 수 없어 생각조차 흐릿한
그 날을 어찌 또 잊으리까.
고사리 꿈 초등학교 입학하고
꿈꿀 때는6.25전쟁의 상처
부모님 따라 남으로 피난 가던 날
그 날의 충격 지울 수 없어
남침하는 인민군 무리들
총부리 앞에 붉은 피 흘리며 죽어가는
우리들의 부모 형제들
내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나는
말 할 수가 없었지.
내 살아생전 정말
그 날은 잊을 수가 없어
남쪽으로 쫓기며 짐짝처럼 밀려오는
부상당한 우리국군 용사도
나는 보았지.
엄마아빠는 폭탄마저 신음하고
혼자 보채며 우는 어린아이도 보았었지.
누가 그 날들을 기억하고 보호하고
이야기 해줄까.
훗날 세월 오래오래 지치면
전설 같은 옛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핵무기 무장하고
제2의 6.25 꿈꾸는 북쪽의 도발행위
반세기 넘게 지나는 동안 하루라도
긴장은 늦출 수가 없었지
이억 만 리 먼 하늘 먼저 가신 호국영영
그 한을 언제 풀 수 있을까.
숲속의 여름 /장수남
이른 아침
푸른 가지 산새 노래하는
숲속의 여름.
햇살 가득히 내려앉아
파란이슬 친구들 옹기종기
소꿉놀이 하자네.
밤이면 하늘에 자리 깔고
외할머니 옛날 하늘꿈나라
먼 이야기 봇짐 푼다네.
이웃집 아기별 엽 눈질
들을까. 말까. 눈비비고 볼까. 말까.
아이. 부끄러워라. 우리아빠.
엄마랑 아빠랑 할머니 몰래
사랑했대요.
밤에는 초승달 뒤에 숨어서
낯에는 구름숲 몰래 사랑했대요.
우리 외할머니
말썽꾸러기 개구쟁이
우리 엄마아빠랑 어릴 때 혼냈을까.
아이. 부끄러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