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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서울대학교 부속병원 학살사건? (한국어 위키백과)
김세창(서울) 추천 0 조회 109 16.05.29 19:18 댓글 6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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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6.05.30 14:51

    첫댓글 대학병원 영안실 앞에 위치한 현충탑은 일년에 수차례나 마주치고 묵념을 하는 곳입니다. 저의 산책길은 혜화동 전철역에서 대학병원을 가로 질러 영안실을 지나는 과정에 탑이 있습니다. 이곳을 지나 창경궁-창덕궁 안을 거닐며 인사동 종로3가역으로 가는 코스의 일부입니다. 1970년대 초기만해도 미아리 고개와 같이 위치한 개운산에서 6.25 당시의 국군 전투흔적으로 남은 녹쓴 칼빈 탄피가 있었습니다.

  • 16.05.30 07:56

    저는 산 증인 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 이였으며 바로 옆 동내 명륜동 3가에 살고 있었습니다.

  • 16.05.31 14:32

    까맣게 어렸던 저도 육이오 사변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던 탓인지 마치 무성영화처럼 몇가지 장면은 기억에 남아서 그후 독감 같은 열병을 앓을 때면 악몽을 꾸면서 그것들이 보이는데, 한번은 눈을 떴는대도 그것이 사라지지 않아 마구 헛소리를 해서 부엌에 계시던 어머니가 놀라 뛰어들어 오신 적도 있읍니다.
    피난지에서 본 공비들의 시체는 형언하기 힘들 만큼 끔찍했는데, 폴란드 화가 벡신스키의 그림은 제가 본 그 시체들을 소재로 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그 공비들의 시체들을 연상케 해 줍니다.
    그 동네 근처의 낮은 산꼭대기에 버려진 초소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학살된 곳이라고 하면서 아무도 그 근처에 얼씬도 안했읍니다.

  • 16.05.31 23:11

    이제 세월이 많이 흘러 옛 일들이 많이 흐미해졌습니다마는, 위에 올리신 글을 보고 당시 겪은 일들이 생각나는 것이 있어 몇자 적습니다. 6.25가 터진 해에는 학제가 바뀌어 몇개월 일찍 중학교 5학년이 되었었지요.
    전쟁인지 뭣인지는 모르지만 미아리쪽에서 대포소리가 계속 나자 혜화동 안쪽에 있던 우리 학교 선생님들은 학생들 보다 더 초조해하였습니다. 학생이란 아침에 학교에 가는 것이 당연하므로 얼마간 계속 학교에
    나갔었지요. 7월 초순경 수십명 학생이 모였는데, 집합을 시키더니 오늘는 상부지시로 근로봉사를 하러 간다고 했고, 창경원 앞쪽으로 갔을 때, 오늘은 서울대병원 뒷마당에 시체가 많이 있어 우리가 치워야 한다며

  • 16.05.31 23:59

    잠시 기다리게 해서, 우리는 깜짝 놀라 어린 학생들이 시체를 어떻게 치우느냐며 겁들을 먹고 있는데, 인솔자가 돌아오더니, 시체는 다른 곳에서 일찍 나와 다 치웠으므로 우리는 내일 다시 나와야 한다고 했고, 학교로
    돌아갔습니다. 이 당시의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을 것인데, 당시 우리는 대학병원 환자들이 왜 갑자기 그렇게 많이 죽었는지 의아했었으나 이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네요. 공산주의자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저는 그 후 학교에는 더 나가지 안했고 서울에서 소위 '적치하의 3개월'을 보냈으며, 12월 중순에 입대통지서가 그 어리고 약한 저에게 나와 입대하였고, 어머님의 기도 덕분에 살아서 3년후 제대했습니다.

  • 16.06.01 14:55

    저는 6.25를 겪지 않은 세대지만 겪으신 웃대 부모님 세대에게서 귀가 닳도록 들었죠
    그래서 그런지 제가 겪은 것인 것 마냥 읊어댈 수 있습니다 ㅎ
    우리 세대 마저 지나가고 나면
    우리 자녀 세대에는 희미한 역사가 되어 5.18의 역사만큼 잔혹한 것은 없었다고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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