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어느 날 피자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뭘 하겠다고 말했을 때 대체적으로 말려본 일이 없는 나는 그때도 하고 싶으면 해보려므나 하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궁금했다.왜 하필 피자가게일까?
괜찮은 남자들이 와글와글한 기업체도 있고 그게 아니라 용돈을 조달할 양이라면 또 그 나름대로 알맞은 자리를 물색해 줄 수 있으련만 사전 의논도 없이 피자집으로 정해놓고 지가 쳐들어가서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다. 여의도에 살 때 우리 식구들이 자주 가던 63빌딩의 피자 가게였다.
나중에 알게 된 이유가 걸작이었다. 피자집에서 일을 하다 보면 적어도 레코드 가게에서 일을 하는 것보다는 피자를 얻어먹을 확률이 더 높지 않겠는가 라는 계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오페라의 유령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는 마당에 딸아이 아르바이트 얘기를 왜 꺼냈는고 하니 내가 오페라의 유령(이하 팬텀이라 요약함) 한글 가사 작업을 해줄 수 있느냐는 불문곡직 두 팔을 흔들며 환호작약해서 뛰어나간 것이 딸아이 경우와 같았기 때문이다. 그 작업에 참여하다 보면 적어도 원하는 만큼은 팬텀을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내가 처음 팬텀의 이야기를 들은 것은 88년 뉴욕에 갔을 때였다. 그러나 티켓을 구하려면 6개월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기껏 일주일 아니면 이주일 정도 머물다 가는 여행객에게 엿먹이는거야 밥먹이는거야 툴툴대며 그거 아니라도 볼 거 많다 하고 코러스라인이나 캣츠니 하는 것들만 댓편 보고 왔다. 그러나 그때는 아!재미있다. 정도였지. 몇달 씩 기다렸다가도 봐야 할 만큼의 매력은 느끼지 못했다. 그러면서 불가해한 혼란에 빠졌다. 이 정도의 재미를 가지고 지구가 들썩이도록 야단이란 말인가. 괜찮은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도 더러 있었지만 결국 인간의 능력이란 게 오십 보 백 보인 모양이야. 이 정도 가지고 야단인 것 보면.
그러나 이 사람들, 이 사람들은 대체 어디서 온 거야. 어디서 수도꼭지 물 흐르듯이 쉬지 않고 극장으로 흘러 들어오는거야?
비교적 후발팀 관객이었던 나는 그때까지도 입추의 여지없는 극장을 둘러보며 거의 겁에 질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뮤지컬에 관한 내 첫 충격은 뮤지컬이 아니고 관객이었다.
내가 팬텀을 본 것은 94년 런던에서였다. 이때는 노라리가 아니고 뮤지컬 명성황후를 만들기 위한 학습차원이었다. 에이콤의 런던 지사장이 그 어렵다는 티켓을 주루룩 구해놓고 우리를 공부시킬 채비를 하고 있었다.
에브리나잇 한 편 씩 때리는 환상적인 스케줄이었는데 세상 모든 일이 아마추어로 놀면 해 놓은 밥도 못 얻어먹는 법이었다. 모처럼 유서 깊은 도시에 왔으니 낮에는 이 박물관으로 갈까요 저 박물관으로 갈까요 하면서 런던이 좁다하고 돌아다니고 저녁에는 이 요리를 먹을까요 저 요리를 먹을까요 호사를 부리다가 앗!공연시간이닷! 후다닥 극장에 들어가면 백발백중 잠속에서 꿈속에서 공부(?)를 하고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 일정을 보내고 서울로 돌아와 런던을 회고하니 극장에서 웬만하면 안 자려고 필사적으로 혀 깨물던 생각밖엔 안 나는 것이었다.
"여보 안 되겠어. 다시 갑시다. 이번에는 관광 일체 금지, 저녁식사 폐지." 그렇게 해서 우리는 재차 유학(?)의 길을 떠났다. 첫 번째의 쓰라린 실패를 거울삼아 낮에는 호텔방에서 책을 읽거나 가까운 하이드 파크로 가 가벼운 산책을 하거나 하면서 공연장에서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도록 애썼다. 그렇게 해서 또랑또랑한 정신으로 안광이 지배를 철하는 눈으로 뮤지컬을 훑어갔다. 그 중에서 나를 단연 압도시킨 팬텀.
팬텀은 그것을 한번 본 사람이라면 절대 놔주지 않는 귀신같은 요소를 가지고 있다. 슬프고도 슬픈 사랑의 이야기가 아름답고 화려한 무대속에서 2시간동안 숨을 못 쉬게 하는 환상 속에 가둬 놓기 때문이다. 거기다 가슴을 절이는 절창에 절창이라니.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생겼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들린다고 알아갈수록 다시 봐야할 숙제가 생기는 것이었다.
문제는 다시 보자는 작품이 김희갑 씨와 내가 틀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과 돈이 마냥 남아도는 사람이 아니므로 효율적인 일정을 잡아가야 하는데 한 번 본 팬텀을 두 번 보자 하고 두번 본 팬텀을 세번, 네번 하니까 마침내 김선생이 버럭같이 화를 낸 것이었다. 그쯤에서 나도 약간은 꺾였다. 동행자가 화를 내서가 아니라 캐스팅에 따라 감동의 도가 틀리고 따라서 나의 열광도 수그러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은 늘 팬텀에 닿아있었다.
저 내용을 좀더 디테일하게 알 수 없을까? 대체적인 스토리와 대체적인 상황 판단만이 아니라 화를 내면 무슨 말로 화를 내고 잇고 울고 있을 때는 구체적으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몇가지 매직도 궁금했다. 거울 속으로 사람이 들어간다든지 촛불 위로 보트가 움직인다든지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의자에 앉아 있던 팬텀이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는지...
난 팬텀을 뉴욕에서 본 것까지 해서 솔직히 다섯 번 보았다. 그럼에도 팬텀팀을 만나 열 번 보았노라고 떠벌이며 한글 가사 작업에 내가 적임자임을 은연 중에 강조하고 또 강조한 것은 어쨌든 이 일에 참여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면 디테일한 내용도 알게 될 테고 매직도 풀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가사 작업이 끝났으니 내용은 토씨까지 훤해졌다. 매직은 설명을 듣긴 했지만 아직도 확연하지는 않다.
곧 막이 오른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들릴 테니 이번 공연이 어떠할지 첫날밤 신부처럼 가슴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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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양이 부탁해서 썼습니다..-_-;;
힘들군요..손 아픕니다..ㅠ.ㅠ...
그래도 글 재밌습니다.재밌게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