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을
지혜라 하고,
모든 것을 다 모르는 것을
무명이라 한다.
모든 것을 다 아는 것과
모든 것을 다 모르는 것은
서로 상통하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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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삶의 무게로 인해 매우 힘겨워 보이는
한 보살이 법봉 스님을 찾아왔다.
그 보살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더니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선 자:스님, 예의가 아닌 줄 알면서도
이런 모습으로 찾아왔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외로워서 술 한 잔 했습니다.
스 님:그래 술을 먹으니 외로움이 없어지던가?
선 자:그렇지 않네요.
술을 먹으면 외로움이 좀 가실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네요.
견디기 힘들 정도로 외로움만 더해 갈 뿐입니다.
정말 미칠 것 같습니다.
제 자신의 외로움으로 인해
이렇게 스님께 까지 폐를 끼치게 되는군요.
대단히 죄송합니다.
스 님:술을 먹으니 외로움만 커졌다고 했던가?
그러면 무엇을 먹어야
외로움을 떨굴 수 있겠는가?
선 자: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며,
무엇을 먹어야 이 외로움과 괴로움이 가셔질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스 님:모른다,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른다……
그럼, 이번에는 술 대신
외로움과 괴로움을 먹어 보는 것은 어떠할까?
선 자:듣고 보니 스님 말씀이 참 재미있네요.
외로움을 어떻게 먹어요?
스 님:술은 먹을 줄 알면서도
외로움은 먹을 줄 모른단 말이지.
나는 지금까지 계속,
아니 하루에도 몇 천 번씩
외로움을 먹고 있는데,
선 자:스님 말씀은 참으라는 뜻인가요?
스 님:참긴 왜 참아. 참을 게 있어야 참지.
무엇을 어떻게 참을 건가?
참아서 될 것 같은가?
참으면 또 튀어나오고,
참으면 또 튀어나오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방법은 그 외로운 놈을 붙잡아야 되네.
붙잡지 않고는
그렇지 않고는 요리를 해서 먹을 수가 없잔아.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외로움이란 무엇인가,
외로움은 무엇으로부터 오는가,
무엇이 외로워하고 있는가,
즉 외로움의 실체를 찾아보는 거야.
외로움의 실체를 찾아서
그 외로움이란 놈에게 웃음도 짓고,
애교도 부리고,
눈물도 보이고,
사정도 해보고,
짜증도 부려 보고,
때로는 외로움을 혼내 주기도 하고,
또 때로는 함께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친구도 되어 보는 거지.
이때 조건이 있다면
찾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된다는 거야.
꽉 붙잡아야 해.
그렇지 않고는 외로움을 도저히 먹을 수 없기 때문이야.
선 자:스님 말씀처럼 그렇게 술술 될 수 있으면
이렇게 고생하지 않게요?
스 님:아니야.
나보다 선자가 더 잘하고 있는 거야.
지금 선자는 외로움 때문에 술을 찾았고,
그 외로움으로 인하여 술을 마시지 않았는가 말이야.
그러므로 선자는 혼자서 술집엘 간 것이 아니라
외로움과 같이 간 거야.
그리고 그 외로움으로 인하여
술을 마신 거고.
외로움 속에 술이 있고,
술 속에 외로움이 있어
술이 외로움을 마시고
외로움이 술을 마시며,
외로움에 취하고 술에 취해서
선자는 지금 나를 찾아온 것일 테지.
선 자:스님은 어떻게 그렇게 잘도 제 마음을 헤아리실 수 있나요?
스 님:내가 누구인가? 하하.
그건 그렇고
선자는 술집에 가서는 술로 외로운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와서는
인생의 외로운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게 아닌가?
선 자:그렇긴 하지만
저는 그러한 그림이 정말 싫어요.
스 님:그러면 어떠한 그림을 그리고 싶은가?
선 자:아주 간단하면서도 소박한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아침에 눈을 뜨면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서 환하게 웃음 지어 주고,
그런 웃음 속에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음에
감사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따뜻하게 아침 밥 지어 먹고,
남편 출근길 배웅한 다음 집안일을 열심히 하며
하루해가 저물면
남편의 퇴근 시간을 기다리는
그야말로 평범한 주부로 살고 싶어요.
그래서 밤이 되면
구름처럼 포근한 이불을 덮어 주며
마음껏 사랑을 했으면 좋겠어요.
저도 삶이 현실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요.
반복적인 이야기인데
때로는 남편과 아옹다옹하며
남들처럼 그렇게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스 님:바람[願]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면 될 게 아닌가?
누가 그렇게 하는 것을 방해하던가?
방해하는 놈이 있으면 데려오게.
내가 따끔하게 혼 줄을 내 줄 테니.
선 자:제 팔자가 그렇게 안 되는 거죠.
스 님:팔자가 방해를 하는구먼.
그럼, 그 팔자란 놈을 한 번 내놓아 보게.
내가 혼내 줄 테니.
선 자:제 팔자요? 기생 팔자예요.
스 님:기생 팔자라…… 참 좋은 팔자구먼.
선 자:스님, 지금 저를 놀리시는 거예요.
스 님:그렇게 들렸다면 미안하네.
내가 선자를 놀리긴 왜 놀리겠나.
나는 지금 선자를 통해
인간이 사는 모양을 보고 있는 거야.
그래 왜 선자의 팔자가 기생 팔자라 생각하는가?
선 자:사실 예전에 저를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그 사람이 엄청 싫었어요.
그 남자가 저를 죽자꾸나. 하고 쫓아다녀도
제가 상대를 안 해 주니까
결국에는 다른 여자를 선택하더군요.
그런 반면에 제 쪽에서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 쪽이 저를 버렸어요.
제가 벌을 받았나 봐요.
그러다 어떻게 하여
지금의 사람을 만나게 된 거예요.
스 님:지금의 사람이란?
선 자:부인도 있고, 자식도 여러 명 있는 사람이에요.
처음엔 정말 아무 것도 몰랐어요.
주인이 있는 남자라는 사실을 말이에요.
그 사람은 제가 방황할 때
따뜻하게 보살펴 주었어요.
그러는 사이에 우리 두 사람은 가까워졌어요.
어느 순간
그 사람이 가정이 있는 남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저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어요.
그래서 아무리 정이 들고 내게 따뜻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더 이상 계속 만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우유부단한 제 성격 탓인가 봐요.
그 사람이 만나달라고 사정을 하면
그때마다 냉정히 끊지 못했어요.
그런 식으로 한 달에 두서너 번씩 만나는 사이
제 나이 벌써 서른이 넘었고,
그 사람을 안지도 팔 년이 된 거예요.
물론 그 사이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우여 곡절이 없었던 것도 아니에요.
우리는 만나기만 하면 옥신각신했어요.
그렇긴 하지만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 세월만큼 우리들의 정은 더욱 깊어졌어요.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계속해야 할는지 답답할 뿐이에요.
스님,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스 님:그 남자의 부인은 이 사실을 알고 있는가?
선 자: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았어요.
스 님:선자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를
생각해 본 적은 없는가?
선 자:최선의 방법은 제가 그 사람에게서 떠나는 거죠.
제가 이러한 현실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그 동안 그렇게 해 보려고
부단히 노력도 해 보았어요.
그런데 그게 생각처럼 안 되었어요.
그런데 스님,
얼마나 이상한 상황이 벌어졌는지 아세요?
언제부터인가 우리 두 사람 사이의 입장이 바뀌게 되었어요.
만나자는 말도 제가 먼저 해야 되는 등
제 쪽에서 어떻게 어떻게 하자고
사정하게 되었어요.
그러면서도
또다시 만날 날만 기다리는 꼴이 되고 말았어요.
또 다른 방법은,
할 수만 있다면……
제가 그 사람을 완전히 소유하는 거죠.
그러기 위해서는 한 가정이 파괴되어야 하는데
같은 여자로서
그리고 더 나아가
한 인간으로서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는 거예요.
스 님:그래, 괴로울 거야.
선 자:스님에게 제 말이 어떻게 들릴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그 사람을 일방적으로 유혹한 게 아니었어요.
그 사람 또한 저를 일방적으로 유혹한 게 아니었고요.
과정이야 어찌됐든
우리 두 사람은 지금 사랑하고 있어요.
스 님:사랑하고 있다고……
선자, 이제부터 내 말에 귀 좀 기울여 보게.
외로운 술 냄새도 좀 가신 것 같으니.
선 자:정말 죄송합니다.
이런 모습으로 찾아뵙는 것이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스 님:지금부터 하는 이야기 잘 들어보게.
먼 옛날 일찍이 부모를 여읜 어린 자매가 살고 있었지.
두 자매는 나이 차가 많이 나지 않았어.
고만고만했지.
하지만 언니는
자신의 어린 철부지 동생을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열심히 했어.
언니는 동생을 무척 사랑했거든.
암튼 두 자매는 아주 우애가 돈독했어.
세월의 흐름 속에서 두 자매는
별 탈 없이 곱게 자라고 있었어.
그러던 어느 날.
젊고 씩씩한 청년이 이들 두 자매 앞에 나타난 거야.
청년은 가엾은 두 자매를 위해서
물심양면으로 친동생들처럼 자상하게 보살펴 주었지.
그러는 사이 두 자매는 어엿한 숙녀로 성장한 거야.
남자를 사랑할 나이가 된 거지.
그 청년 역시 말쑥한 신사로 변했지.
그런데 이들 사이를 누가 시기라도 한 듯,
아니 운명의 장난인 듯
두 자매는 자신들을 보살펴 준 그 신사를
동시에 사랑하게 되었지.
누가 먼저랄 것은 없었지만
자연히 성숙이 빨랐던 언니와
그 신사 사이에 사랑의 감정이 싹텄지.
두 사람은 정말 좋아했어.
세상을 다 얻은 듯
행복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지.
그런 어느 날
자신이 사랑하고 있는 그 청년을
동생도 사랑하고 있음을 눈치 챈 언니는
동생을 위해 사랑을 포기했지.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낳고 죽고, 낳고 죽고,
또 낳고 죽고 그렇게 여러 생이 지났어.
그때 그 신사가 누군지 알겠나?
선 자:그러면 제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
그때의 그 신사라는 말씀입니까?
스 님:그렇지. 그 때의 그 언니는?
선 자:누구입니까? 제가 그 때의 언니가 되나요?
스 님:아니지.
그때의 동생이 지금의 선자야.
그때의 언니는
지금 선자가 사랑하고 있다는 사람의 부인이 되겠지.
그 옛날 언니는
누구보다 사랑했던 사람을
자기의 동생을 위해서 양보했던 거야.
지금 선자가 괴로워하고 있는 쓰라림의
몇 백 배나
아니 몇 천 배나 되는 아픔을 가슴 속으로 삭이면서……
선 자:스님, 그게 정말이에요?
스 님:내가 왜 허튼 소리를 하겠나.
이 세상에는 그 어느 것 하나
자기 혼자 구성된 것이 없지.
그러므로 나라는 존재는 우연히 나타났다가
우연히 사라지지 않는 거야.
어느 누구나 할 것 없이
나라고 하는 존재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그 둘레의 조건이 모두 구비되지 않고는
절대로 형성될 수 없지.
멸하는 것 또한 이와 같아서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서 생기고,
인연에 의해서 사라지게 마련이야.
이것은 인간뿐이 아니야.
동물, 식물을 비롯하여
생명이 있거나 없거나
그 대상을 가릴 것 없이
소립자, 원자, 세포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든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고는
생성하거나 소멸할 수 없는 거야.
지금 선자라고 하는 한 여성이 존재하는 것도
오늘날의 어느 한순간에
우연히 형성된 것이 아니야.
외롭고 괴로운 것도 마찬가지야.
어느 한 순간의 삶이 고달프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도 아니고.
선자가 이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아버지 어머니의 결합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임은 틀림없는 사실이야.
하지만 단순히 아버지 어머니의 결합만이
선자가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던
요인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지.
만일 어떠한 원인 없이
단순한 결합만으로 우리들이 이 세상에 나왔다면
우리들의 모양이나 생각이나 행위가
한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는 로봇처럼
똑같은 형태를 갖추고 있어서
개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지.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부모라는 인연에 의해서 지금의 선자가 존재하고 있지만
그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아버지 어머니가 아니라
그-먼 전생으로부터 내려오는
선자의 영혼인 거야.
과거 현재 미래를 흐르면서
태어나고 소멸하고,
소멸하고 태어나면서
존재하는 순간순간이 모두
그 인연에 의해서 모양을 바꾸어가며
지금의 선자가 되어
이곳에 앉아 있는 거야.
다시 말하면
어느 때는 송아지가 되어 음매음매 하며
들판을 뛰어다니기도 했다가,
어느 때는 한 마리 새가 되어
날개를 펄럭이며 푸른 하늘을 휘젓고 다녔다가,
또 어느 때는 예쁜 꽃잎이 되기도 했다가,
또 어느 때는 바닷가에서 밀고 당기며 조잘대는
조약돌도 되었다가,
또 어느 때는 귀신이니 혼이니 하면서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되어
맴돌기도 했던 거야.
불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 중에
‘반야’라는 말이 있지.
반야라는 말은
옛날 부처님 당시 인도에서 사용하던 범어인데,
한자로는 지혜라고 하지.
우리말로는
‘모든 실체의 본질을 꿰뚫어 아는 것’
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지.
지혜는 일반적으로 배워서 알고 있는
피상적인 지식과는 전혀 의미가 다르지.
안다는 의미는 똑같겠지만
무엇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 하는 데서 뜻을 달리 하지.
하나 더하기 둘은 셋이라는 수리적 개념이라든가,
좋은 것,
싫은 것,
나쁜 것,
괜찮은 것,
단 것,
쓴 것 등
대체적인 개념을 알고,
정치 ․ 경제 ․ 문화 ․ 역사 ․ 철학 ․ 인류 등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인류 문화적 지식은
일반적 인식에 의한 지식에 불과해.
그렇긴 하지만
잘난 체하며 거만을 피우는 데는 도움이 되지.
그러나 그러한 지식은 거시적으로 볼 때
자기 인생의 근본을 알고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아.
지금 선자가
외롭고 괴롭다며 몸부림치고 있는데
지금까지 배워 온 수많은 지식이 어떠한 도움이 되던가?
이러한 지식은 생활 속에 많이 이용하지만
진실한 삶의 모습보다는
포장만을 예쁘게 하려하며
또는 쓸데없는 자존심만 내세우려는데
치중하느라 정신없이 에너지만 소비하지.
다시 말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반야의 지혜는
일반적으로 배워서 아는
인식에 의한 지식을 의미하지 않아.
누구나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전부터
갖고 있던 자기의 본래 모습,
즉 지금 선자가 괴롭다고 하는
근원적인 모습을 꿰뚫어 보고,
거기서 우주 만물의 변함없는 진리의 근원을 파악하여
바로 보아 아는 것을 반야의 지혜라 일컫는 거야.
선자는 지금 외롭고 괴롭다고 했지?
선 자:네, 스님.
스 님:그 외로움과 괴로움은 어디서부터 왔는가?
선 자:지금의 외로움과 괴로움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온 게 아닙니까?
스 님:그런가.
선자가 좋아하는 그 사람으로부터 왔다고
생각한단 말이지?
아니라네. 절대로 그런 게 아니라네.
만일 그 사람이 원인이었고,
그 사람에게 원인이 있었다면
그 사람이 괴로워해야지
왜 선자가 이처럼 괴로워하고 있는가 말이야?
일반적인 이치로 생각해도 그렇지 않은가?
선 자:그 사람이 정을 먼저 주었기 때문에
원인은 그 쪽에 있겠지요.
하지만 둘이서 사랑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지금은 제 쪽에서 다른 사람을 더 감싸고도니까
저만 괴로운 거죠.
스 님:모르는 소리야.
괴로움의 원인과 장본인은 선자이지
왜 그 사람이라고 하는가?
선 자:하긴 그렇죠.
나만 잊어버리고 떠나면 그만이니까요.
스 님:만약 선자가 방금 말한 것처럼
그렇게 되면 선자의 괴로움이 사라질 것 같은가?
선 자:그야 어디를 가더라도 괴롭겠지요.
팔자가 하도 기구하니까요.
스 님:팔자라는 단어를 참 편리하게 쓰고 있군. 그래,
그 팔자가 그런 걸
괴로워한다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선 자:글쎄요.
스 님:사람들은 흔히 그렇게 말하더군.
자신에게 어떤 원인이 있었나에 대해
냉철히 돌아보기보다는
무조건 남만 원망하려 하지.
자기가 한 행동은 대개가 정당했고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지.
이 말 저 말로 변명을 하다
끝내 궁색해지면
운명 탓을 하든가 팔자 탓을 하든가.
선 자:스님 말씀이 맞아요.
스 님:그래?
생존 과정에 있어서
자기의 존재성을 피력하는 것이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하지는 않겠네.
그렇지만 고독이나 외로움이나 괴로움 등이
실질적인 자기 인생에는
아무런 보탬이 안 된다는 것이지.
자신의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함이 문제인데,
즉 지금은
선자의 외로움을 해소해야 하는 것이 문제인데
때로는 다른 것에 더 신경을 쓰다 보면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겠지만
근본은 자기의 본래 모양이 어떠한가!
돌아볼 줄 알아야 하지.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이야.
다른 사람의 모습에 대해
저것은 저러한 행동을,
저것은 저러한 마음 씀을,
저것은 저러한 모양이
좋다,
나쁘다,
싫다,
예쁘다,
사랑스럽다,
밉다,
외롭다,
그립다,
슬프다 하는 등
잘 볼 수 있는 것처럼
나는 나의 모습에 대해여
응시하며 통찰해야 하는 거야.
울고 찡그리면서도,
그리고 외로워하고 슬퍼하면서도
얼굴엔 화장을 지트게 하지.
그리고는 자신만 잘났다고 떠들어대며
이것저것에 대해 뭐 그리 아는 게 많은지
아는 체하며 허세 부리다 보면
어느 새 보기 싫은 자기의 모습은 가려지지.
자연히 상대방에게만 원인이 있다고
미워하는 자기 모습을 보면
두말 할 필요도 없이
하찮은 자기 모습이 보인다네.
그것의 원인은 나고,
나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던 모든 것들이
상대방을 통해서 나타난 것뿐이야.
이러한 것을 깊이 통찰해 알게 되면
성인과 범부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고,
너와 내가 둘이 아니어서
나만이 외롭고, 쓸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 식물,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그 작용과 모양이 똑같아서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만큼 고독해서
내가 괴로울 땐
너도 괴롭게 되어 있고,
내가 슬플 땐 너도 슬퍼하게 되어 있어.
나만 괴롭고 나만 슬픈 게 결코 아니야.
좀 더 부연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의 작용은
모두 평등하지. 때로는
내가 슬플 때 상대는 기쁜 것 같아 화가 나고,
상대가 불행할 때 나는 행복한 것 같아
왠지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
그러면서 서로의 감정에 동화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면서.
나의 행복의 척도는
남과 비교해서 나타나는 만족도지
그것도 인생사지만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시시 때때로 보이는 내 모양의 감정이
또는 상대의 감정이
그렇게 나타날 뿐
실체의 작용에서 바라보면 똑같은 거야.
그에 이르기 위한 방법은
내가 하는 말만으로는
또 선자가 지금까지 인식하고 있는 것만 가지고는
불가능하지.
지금 내가 하는 말에 흡수되어
잠깐 동안은 외롭다는 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그것이 어느 것 하나 해결해 줄 수 없어.
왜 그런 줄 아나?
선 자:……
스 님:귀동냥으로 배워서 안 지식이나
인식화 된 지식은
자기의 상념만 늘어나게 하기 때문이지.
그렇다고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이
전혀 필요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네.
인식에 의해 형성된 지식은
번잡한 상념만 일어나게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것이 삶의 이정표가 된다는 사실이야.
바른 이정표냐
왜곡된 이정표냐는 차치하고,
가고 안 가는 행위는
어디까지나 자신에게 달려 있는 거야.
본인 자신의 실천 없이는
그 누구도 본인을 대신할 수 없어.
좀 전에 들려주었던 선자의 전생담도
반신반의한 상태에서
체념과 함께 일시적인 위로가 되긴 하지만
선자 자신이 확신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선자의 외로움이 해결되지는 못하는 거지.
선 자:그러면 저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스 님: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우리들이 마음마음 하는 그 마음,
실질적으로 나의 마음이라고 하면서도
그 마음의 변화가 한량없어
변화에만 좇다 보면
무엇 하나 제대로 알 수 없이
미로에 처하게 되는 것이 마음이지.
인생의 미로란 이것을 두고 말하는 거야.
그래서 불교에서는
근본이니 본질이니 하면서
자기 인생을 해결하는 제일 빠른 방법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마음을 잡으라 하지.
그러나 마음이라는 것 자체가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눈․냄새․촉각으로 느낄 수 있는
물질 등의 형상만 좇아가 길들여지는 것이지.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식별할 수 없는 마음이란 놈의 본질을
알아보기란 무척 힘든 거야.
한 가지 물어 보겠네.
마음이 작용할 때
제일 먼저 통하는 관문이 어디일 것 같은가?
선 자:……
스 님:너무 심각한 표정 짓지 말고.
너무 어려운가?
육체이지.
결국 우리들의 마음이라는 것은
몸뚱이에 의해서
얽히고설키며 나오게 되는 형상이니까.
그 변화무쌍하면서 형상조차 없는 마음은
본질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나의 것 나의 것 하며 끌어안고 있는
자기의 육체로부터 관해 보는 거지.
한 번 해보지 않겠나?
그 물건이 얼마만큼 되는지.
선 자:네!
스 님: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에 따라서
마음으로 행동을 해보게.
무릎을 꿇고 바르게 앉아
어깨의 힘을 빼는 빼봐.
그런 다음 눈을 지그시 감고
자기의 있는 모양을 바라보는 거야.
그리고 겉옷부터 벗어 봐.
(옷의 이름을 대며 차근차근 관법 수행을 할 필요가 있음)
옷을 진짜로 벗으라는 게 아니야.
관법이라고 해서
생각으로 하나씩 하나씩 벗는 거야.
이것은 자신의 인식 속에 인습화된
상념의 옷을 벗어버리기 위해서 하는 방법이야.
그렇지만 그게 잘 안 되니까
자신의 몸뚱이에 거추장스럽게 걸치고 있는
옷을 벗어 보는 거야.
머리는 조금 흐트러지긴 했지만 길게 늘어져 있지.
얼굴을 살펴보면
눈썹, 눈, 코, 입, 옆쪽으로 귀,
그 다음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움직여
긴 목, 그 목 밑의 젖가슴,
그 밑에 배꼽,
조금 더 내려오면 그 밑에 음부,
그 밑으로 쭉 뻗은 두 다리.
선 자:스님……
스 님:아니 왜 얼굴이 빨개지나.
부끄러운 생각이 드는가?
만약 부끄럽다면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마저 벗어 던지게.
외롭다는 생각도,
쓸쓸하다는 생각도,
남자니 여자니,
사랑이니 미움이니 하는 생각도
모두 벗어 던지게.
나라는 생각도 너라는 생각도,
그리고 너와 나
우리들 모두 알게 모르게 습관이 되어 몸에 밴
그 모든 인식도 벗어 던지게.
그리곤 선자의 모습,
선자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바라보는 거야.
보이나?
적나라한 자신의 모습이 보이나?
자신의 마음속에
자신의 몸뚱이 속에
어색하게 입혀 놓고
거추장스럽게 걸쳐놓은
인식의 옷을 벗어 던지는 거야.
그래서
자신의 청정한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거야.
아니
그러한 모습에 도전하는 거야.
즉 부끄럽네,
예쁘네,
슬프네,
보고 싶네,
외롭네,
밉네.
하는 등의 모든 감정.
그리고 얽히고설켜서
거추장스럽고 복잡한 모든 것을 벗어 던져
아무것도 걸친 게 없는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에 도전하는 거야.
적나라한 몸뚱이 하나
눈을 지그시 감고 앉아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선 자:……
스 님:숨만 헐떡이고 있는가?
그곳에 무엇이 있는가?
나의 말소리,
목탁소리,
시냇물 소리,
바람 소리,
나뭇잎 버석거리는 소리,
사람들 움직이는 소리,
자동차 소리,
망치 소리 등
그 소리들이 어떠한가?
선 자:아주 멀게 느껴져요.
스 님:그래, 바로 그거야.
멀고 고요하게 들린다는 사실 말이야.
나와 우주(세상)가 하나가 되어
마음이 파동 없이 고요한 것을
정적이라고 하지.
순간이나마 이러한 정적에 몰입해 본 적이 있는가?
선 자:없습니다.
스 님:그랬군.
정적은 소리가 없음을 말하는 게 아니야.
마음이 고요해서
세상의 모두 뒤흔들리는 것 같은 소리도
고요하게 들릴 때를 정적이라고 하지.
마음이 고요해지면
옆에 폭탄이 떨어져도 흔들림이 없고,
깊은 잠 속에 빠져들면서
어머니의 자장가를 듣는 것과 같이
그렇게 고요함에 들어가는 거야.
이와 반대로 시끄러움이라는 것도 있는데,
이것 또한 자기 마음으로부터 나오지.
즉 외로운 소리도,
괴로운 소리도
자기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지.
그렇기 때문에 같은 소리도
때에 따라서 시끄럽게도 들리고
고요하게도 들리는 거야.
소리 자체에는 아무런 실체가 없어.
이보게, 선자?
선 자:네, 스님.
스 님:어떤 비방에도 흔들리지 않고,
사랑과 미움에도 걸림이 없고,
욕망에도 허덕이지 않으며,
입가에 고요히 번지는 웃음을 본 적이 있나?
집착함도 없고
배척함도 없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얽매이지도 않는 그런 웃음 말이야.
선 자:아직은 없어요.
스 님:수행인과 범부의 차는 이러하지.
사랑도 해보고,
미워도 해보고,
방황도 해보고,
슬퍼도 해보고,
외로워도 해 보고,
괴로워도 해보면서,
그것을 완전히 소화하는 사람을
수행인이라고 하지.
수행인이란 결코 깨친 자를 의미하는 게 아니야.
수행인이란 자기 속에 본래 갖고 있는
고뇌의 실체를 찾아서
파고드는 사람을 뜻하는 거야.
이런 반면 상대가 있어
그것만을 좇으며
명예니 사랑이니 돈이니 하고,
너와 나를 분별하며
너와 나 속에 괴로워하는 사람을
범부라 하지.
다시 말하면 범부란
본래 실체가 없는 허망한 허깨비를 가지고
무엇이 있는 것처럼 허덕이고 있는
중생을 의미하는데,
수행인도 깨닫지 못하면 범부와 같은 거야.
자기가 고뇌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 고뇌가 어디로부터 오는지,
그 고뇌의 실체에 대해 알고자 노력하는 사람과
그 근본인 자기의 모양은 모르고
상대방의 형상에만 집착하여
그 형상에 이끌리는 사람을 구별할 때
전자를 수행인이라 하고
후자를 범부라고 하는 거야.
본래 범부와 수행인에 대한 구별은 없지.
이해가 되는가?
선 자:무슨 말뜻인지는 알겠습니다.
스 님:이보게, 선자?
선 자:예, 스님.
선 자:불교에서는
“항상 변함없이 존재하여
내 것이라고 하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
라고 해서 무상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어.
그렇다고 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상이라는 말에 있는 것은 아니야.
이 말은 실질적인 면에 있어서
내 것이라고 하여
변함없이 고정되어 있는 것은 하나도 없는데,
그것에 내 것인 양 집착하여
고통 받는 것을 경계해서 이르는 말이야.
그래 괴로움이란
별도로 나의 것을 가지려고 하는 데서 오는 것이지.
괴로움이 어떤 형태로 특별히 존재하는 것은 아니야.
물론 다른 것도 마찬가지야.
이 세상에
나의 것,
나만의 것,
나만의 독립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전혀 없기 때문이야.
있는 것을 가지고 나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없는 것을 가지고 나의 것이라고 주장하니
무리가 일어나
괴로울 수밖에 없지.
그래서 괴로우니 어찌하겠나?
또한 인간에게 있어서
괴로움이 따르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 살아 있음을
무엇으로 확인하겠는가?
반야의 지혜란
세상이 무상하다고 하여
항상 하는 것이 없음의 이치만을 통달해서
갖는 뜻이 아니네.
일반적으로 벗어난다.
초월한다. 라는 말을 하지만
참으로의 실제는
생하고 멸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도 초월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스스로 여여할 따름이야.
반야의 지혜란
실지의 모습을 근본적으로 파악하여
보고 흡수하는 것을 말하지.
여기서 흡수한다는 말은
자기가 흡수당한다는 말과 똑같다고 생각하면 돼.
우주 법계에 있는 모든 형상의 근원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형상과
육체의 움직임과 똑같고,
다른 물질도 모두 이와 똑같아서
우리들은 모두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평등하게 존재하고 있는 거야.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나는 너보다 조금은 잘났고,
조금은 다르고,
또는 나는 너보다 조금 못났고,
조금 부족하다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생하고 멸하는 과정 속의
에너지에 대해
기쁘다,
슬프다,
예쁘다,
밉다,
배부르다,
배고프다,
재미있다,
지루하다,
행복하다,
쓸쓸하다,
젊었다,
늙었다. 라는 등의 말을 하는 거야.
이것은 오직 생로병사, 즉
낳고, 늙고, 병들고, 죽고 하는 데만 얽매여
전체의 흐름을 보지 못하는 것이지.
그 전체의 흐름 속에서
자기도 같이 흐르면서 세상의 모양을 볼 때에
반야의 지혜가 솟아나는 거야.
그럼,
두 가지 경우를 생각 해 보자구.
외롭고 괴로움에 푹 빠진 선자와
외로움도 괴로움도 모두 떨쳐 버려
아무것도 걸림이 없는 선자가 있다면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하겠는가?
선 자:후자를 선택하겠습니다.
스 님:예상했던 답이야.
하지만 앞으론 외로움이 없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생하고 멸하는 과정에 있어서
외로움이나 괴로움은 꼭 필요한 에너지야.
좀 더 많이 외로워해 보고,
좀 더 많이 괴로워해 보는 거야.
외로움과 괴로움에 푹 빠져 보란 말이야.
사실 우리들은 살아감에 있어서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잖아.
사랑도 미음도
푹 빠져 보지 않고서는 제대로 알지 못하지.
양전자와 음전자가 합쳐서 하나의 불꽃이 튀듯이
우주 속에 형성된 모든 물체는
다 이와 같은 작용을 하고 있지.
외로움이라는 것도
물과 물이 끝없이 합치려는
인력 작용에 불과해.
집착을 버려라,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라고들 말하지만
욕망이나 집착은 버리는 것도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야.
그것은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는 에너지이며,
우주의 실체이며,
자기 생명의 실체며 힘이기 때문이야.
오직 그것이 고정된 나만의 것인 양
나만의 사랑,
나만의 명예,
나만의 재산,
나만의 지식
하면서 허덕일 때 오히려 우스운 거지.
외로움이 없는 것을 진리라고 말하지 말게.
외로움은 인간이 살아 있다는 증표야.
이것에는 크게 나누어 세 가지 유형의 사람이 있지.
더러는 외로움이라는 것에 질질 끌려 다니며
한숨도 짓고 눈물도 흘리며
허덕이는 사람이 그 하나의 유형이지.
두 번째 유형은
외로움을 날마다 집어삼키고
눈만 크게 뜨고 앉아 있는 사람이지.
나머지 한 유형은
외로움이란 반려자를 영원히 받아드리며
즐겁게 함께 하는 사람이야.
선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이
이 말을 이해하고 실천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리라고 생각해.
다소나마 느낌이 있으면
지금부터 조금씩 노력해 보는 거야.
어느 면으로 보면
도달하기보다는
그에 도달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그에 도달한 것보다 더 큰 의미가 있을지도 몰라.
우리들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너다, 나다,
지식이다,
자존심이다. 하는 등의
단정적인 때 묻은 인습에 찌들어 있어.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이대로 허덕이며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안 그런가?
선 자:그렇지요.
스 님: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으니
거기서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
인습에 찌들지 않은 본래의 자기 모습에 대해
말하는 연습부터 해보는 거야.
그러다 보면
어느 새 찌들어 있던 인습의 뿌연 안개는 사라지고
본래부터 있는 그 모습 그대로의
자신의 세상을 바라보게 되지.
바로 이것을 가리켜
반야 지혜의 눈이라고 말하는 거야.
지혜란 모든 근본을 다 알아 깨친 세계를 말해.
하지만 모든 것을 다 안다는 것은
모든 것을 다 모른다는 것과
상통하는 거야.
왜 그런 말도 있잖아.
극과 극은 통한다고.
그러므로 어설프게 알아 분별하는 게 아니고
깨쳐서 모든 것을 다 통달해
거기서 나오는 것을 지혜라 하는 거야.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
차별도 없는 모양,
분별도 없는 모양,
욕망도 없는 모양,
그리고 인습의 지식마저 없는 모양에서
바라보아 솟아났을 때
지혜의 눈이 열리지.
날아라!
날아라.
새들아 날아라.
인습의 옷을 벗고
욕망의 옷을 벗고
분별의 옷을 벗고
차별의 옷을 벗고
날개를 활짝 펴고
훨훨 날아라.
이 세상에는
승리자도 없고
패배자도 없는데
오직 그대 스스로
없는 지옥을 만들고
그 속에 들어가
스스로 불행해지네.
그대 스스로 어여뻐라.
그대 스스로 사랑스럽고,
그대 스스로 행복한 것을.
수행자의 방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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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 큰 마 당
따스한 봄날~ 외로움 떨쳐내는 지혜 $$$$$$$$$$$$$$$$$$$
여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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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3.27 16:38
댓글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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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에구 넘 길어서 뭘 읽었는지조차 잊어버렸스,,,아튼 좋은 말인것 같기는한데,,,ㅎㅎㅎㅎ
넘 너무 길지만 잘 읽었아와요, 부처님 설법 듣는 자세로......좋은글 명심 하고 뭔가 가 필요 한때에 도움 주셔서 고맙 사와요.건강 하시구 좋은글 많이 부탁 드려유ㅠ
*^^* 따스한 봄날~ 점심 먹고 봤는데 해가 다 질라하네.....돌아삔다~~~ㅎㅎ
넘길어서 읽다 포기...나에 한계는 열줄..
잘구에 담아뒀다 낸중에 쬐끔씩 꺼내보면 될껄.....ㅋㅋ
지송합니다. 넘 기러서리~ 마지막 맨트가 결론이겠쥬... 이 세상에는 승리자도 없고 패배자도 없는데 오직 그대 스스로 없는 지옥을 만들고 그 속에 들어가 스스로 불행해지네. 그대 스스로 어여뻐라. 그대 스스로 사랑스럽고, 그대 스스로 행복한 것을.
흑, 너무 길어서리....암튼 행복하세요...^^
뭔~말인고...?... 못난 중생 잘 새겨들으란 말씀 같기도헌디...으~따 참말로 길기도허네요..끝까지 보는것 또한 수행자의 길이련가~~.................성불하소서~~
선 문답~~~~~~
선자와 스님...이야기입니다.
으으ㅡㅡㅡㅡㅡㅡㅡㅡㅡ아프로 열번은 봐야될듯...정말 제게피료한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또 한번 보려니 인내가 필요 합니다 . 나중에 다시 또 봐야 겠어요 글 쓰시느라 정말 수고 하셨아와요..... 성불 하십시요...... 건강 하시고.....
여행자님 아.........우 넘 길어서 힘들어요 그냥 밑줄 긋고 꼬리말 달고 외로움을 떨처 버리려 갑니다 ㅎㅎㅎ
불교 진리의 진수를 담은 글인것 같슴다. 좋은 글 올려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여행자님 잘 계시죠 ? 가까운곳에서 연락도 못드렸네요.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 뒤를 돌아볼수 있는 시간이었네요
작년 이맘때 수행자의 방에서 내용이 너무 좋아서 자게판에 퍼왔던 글~해가 바뀌어 다시 읽어보니 아직도 스스로 없는지옥 만들고 그속에 들어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네요올해는 이 지옥을 탈피해야 할텐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