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한국의 홍익대학에서 디자인 공부를 하고 있는 구미씨 할아버지가 일제시대 때 일본에 건너온 재일 한국인 3세 여성입니다.
옛날은 재일교포는 일본사람에게 차별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차별은 안된다"는 인식이 강해서 살기가 좋아졌습니다. 그래도 이지메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죠. 왜 그러는 지 여기서 조금 소개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이것도 지식의 하나로써 보시길 원합니다^^
만화는 그려다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주의: 여기서 나오는 "일본사람"은 전쟁이 끝나고 고도성장기(1960년)이후에 탄생한 자입니다. 만화에도 그런 말을 넣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몇 년 전에 쓴 글을 다시 찾아서 편집했답니다.
제가 배움이 부족해서 사실과 다른 부분도 있을지 몰라요.
나는 조선(朝鮮)사람이다!!
앗.....
이건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구여?
음......
우선 아쉬운 소식 먼저 보내드리죠.....
우리나라가 잘못한 짓이에여....
같은 민족인데 감싸지도 못하구.....
잘만하믄 우리 태극기 달고 뛸수 있었는데....
ㅡ,.ㅡ
개인적으로 지난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때 일장기를 달고 금메달을 딴 추성훈...
아니...
아키야마선수의 경기를 인공기를 달고 있던 총련계 기자분과 함께 보았답니다...
계속 아키야마!! 아키야마!!라고 외치며 응원하는 사람들을 보고 그 총련계 기자분에게 물으니 순수 일본인덜이 응원온거라구 하더만여....
뭐랄까....
그네덜에게 귀화한 사람....
이제 너는 "조센징"이 아니라 우리 "일본인"이다~~
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하더라구여....
하긴....
제 옆에 있던 아직도 "조선적"을 유지하고 있는 분은 더 씁쓸해 하셨지만여....
ㅠ,ㅜ
우선 아래글 먼저 보세여~~
`마음이 많이 아프지만 유도만 생각하고 싶다`
26일 부산 김해공항으로 입국한 아시안게임 일본 선수단 본진에 섞여 11개월만에 한국땅을 다시 밟은 추성훈(27.일본이름 아키야마 요시히로)의 가슴에는 일장기배지가 달려 있었다.
한때 한국유도 81㎏급 국가대표로 활약했던 추성훈이 지난 해 10월 일본으로 귀화한 뒤 어제의 동지와 금메달을 다퉈야 하는 복잡한 심경을 안고 다시 나타난 것.
재일교포 4세였던 추성훈은 아버지의 조국에 칼 끝을 겨눠야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괴롭지만 이번 대회에서는 경기에만 전념하기로 굳게 마음을 먹었다.
이런 비장한 각오를 보여주 듯 추성훈은 길었던 머리도 스포츠형으로 짧게 깎았고 금메달 획득에 대한 강한 의지와 함께 자신감도 내비쳤다.
맞대결 상대인 안동진(경남도청)과는 역대전적 2승2패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지만 이번 대회를 통해 체급 최강자였던 조인철(용인대 전임강사) 은퇴 후 무주공산이 된 81㎏급에서 새로운 지존으로 등극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추성훈은 지난 74년 한국 전국체전에 재일교포 대표로 출전해 우승했던 아버지 추계이(52)씨의 뜻에 따라 98년 4월 부산시청에 입단하면서 한국생활을 시작했지만 체급 1인자였던 조인철의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고 심한 좌절을 겪어야 했다.
천신만고 끝에 지난 해 2월 국가대표 2진에 발탁되는 행운을 잡았고 태극마크를 달고 첫 출전한 몽골 울란바토르 아시아선수권(4월)과 이란 FAJR 국제유도대회(6월)에서 잇따라 우승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해 7월 조인철의 벽에 다시 막혀 독일 뮌헨 세계선수권 출전이 좌절했지만 3개월 뒤 열린 충남 전국체전에서는 조인철을 밧다리후리기 유효로 매트에 눕혀 2인자의 설움까지 떨쳐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안정적인 생활을 원했던 추성훈은 일본 귀화를 조건으로 내세운 명문 실업팀 헤세 간사이에 입단하면서 결국 한국 국적을 포기하는 길을 택했다.
남다른 각오와 함께 부산아시안게임에 참가하는 추성훈은 조국을 등진 속사정을 모국에서의 금메달 획득 후 털어놓고 싶어하는 듯 했다.
재일교포 유도선수 추성훈, 관심
부산아시안게임 참가를 위해 26일 오후 김해공항을 통해 입국한 일본 선수단 가운데 재일교포 유도선수로 귀화한 추성훈(27.일본명 아키야마 요시히로)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한국에서 대표선수로까지 활약하다 차별 등을 이유로 일본인으로 국적을 바꾼 추성훈은 가슴에 일장기 배지를 달고 입국, 한국어로 또박또박 취재진의 질문공세에 답했다.
한국에서 뛸 때 길렀던 머리를 스포츠형으로 짧게 자르고 노란색 물을 들인 추성훈은 일본대표 자격으로 조국을 찾은데 대해 `솔직히 마음은 아프다`며 `유도를 하고 싶어서 그 길을 택했고 오직 유도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4월에 입은 허리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했다고 밝힌 추성훈은 `한국을 다시 찾으니 기분은 좋다`고 입국소감을 밝히고 금메달 전망에 대해서는 `조금 자신있다. 즐기면서 경기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조국을 메치지 않았다"
오마이뉴스
2002년 10월 4일 금요일 오후 4:32:58
"나는 '야키야마 요시히로'란 이름보다 '추성훈'이 먼저다. 언제나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2002 부산 아시안게임 유도 81kg 종목에서 금메달을 딴 야키야마 요시히로(27·일본 간사이 소속). 그는 일본 이름 '야키야마 요시히로'보다 한국 이름 '추성훈'이 먼저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추성훈 선수는 재일동포 4세다. 그는 74년 전국체전에 재일동포 유도대표로 뛰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유도를 시작했다. 일본 유도명문 긴키대를 졸업한 98년 4월 "한국인으로서 최고 영광인 유도 국가대표"를 위해 현해탄을 건너왔다.
하지만 추 선수는 조인철 선수에 가려 만년 2인자로 지내다가 3년 7개월간의 한국 생활을 접고, 지난 해 겨울 '자신에게 맞는 유도'를 위해 일본에 돌아가야만 했다. 그리고 지난 1월 일본 대표에 선발된 뒤 이번 아시아 경기대회에서 안동진(경남도청) 선수를 판정으로 이긴 뒤 시상대 꼭대기에 오를 수 있었다.
<스포츠피플> 기자는 어렵게 추성훈 선수와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급히 부산 구덕체육관으로 몸을 옮겼다. 그런데 체육관에 거의 도착했을 때 바로 앞 건널목에 검은 얼굴에 강렬한 눈빛, 건장한 체격의 추 선수가 보이는 게 아닌가. 재빨리 움직여 길을 건너는 추 선수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 요 앞 숙소로 짐을 가지러 가고 있다."
숙소? 일본 대표팀 숙소는 '아시아 경기대회 선수촌'일 터인데. 알고 봤더니 유도 경기가 열렸던 부산 구덕체육관 바로 건너편 '문화 아파트 802호'는 추 선수가 한국에 있을 때 소속팀 부산시청 선수들과 함께 3년간 사용했던 숙소였다. 그리고 추 선수는 금메달을 목에 건 뒤 이틀간 이곳에서 머물렀다. 아직까지 802호는 부산시청 선수들의 숙소다.
"정든 곳이다. 대표선발 된 뒤 하루빨리 오고 싶었다. 부산은 내가 선수생활 하던 곳이다. 바로 내가 살던 동네였다. 바로 이곳에서 금메달 땄다는 것은 다른 일본선수들이 느끼는 기분과 차원이 다를 것이다."
추 선수는 부산에서의 기억들을 되살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한국어로 기자의 질문에 또박또박 대답했다. (추 선수의 한국어 구사 능력은 일상 대화는 편하게 나눌 수 있었지만 세밀한 심정 묘사에는 문제를 겪는 듯 했다. 그는 자주 "어떻게 말해야 하나"며 일본어로 중얼거리곤 했다.)
추 선수의 기대대로 그의 경기가 있던 날 부산 시민들은 그에게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하지만 안동진 선수를 이기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을 땐 야유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는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이번 대회에 참가했다고 한다.
"물론 서운했다. 하지만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마 한국 선수를 이기고 금메달 따서 그랬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추 선수는 한국을 떠나야만 했을까. 이는 관중들이 박수만 보낼 수 없었던 주된 이유였을 것이다. 그가 일본으로 돌아간 시점인 지난 해 겨울, 그는 이미 목표였던 국가대표가 돼 있었고(물론 2진이었지만), 작년 체전에서는 1인자 조인철 선수를 눌렀기 때문에 국가대표 1진이 될 기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 선수는 자신에게 보다 맞는 유도를 하고 싶었다고 한다. 20년 이상 해왔던 자율적인 훈련 방식을 택했던 것.
- 일본에 왜 돌아가야만 했나?
"한국 유도스타일보다 일본 스타일이 내게 더 맞는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는) 감독님과 선수들이 모두 열심히 하지만 모든 것을 짜여진 대로만 하는 경향이 있다. 일본은 조금 더 자율적이다.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다. 나를 위해서 보다 자율적으로 훈련하고 싶었다."
- 한국에선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는가?
"가장 컸던 것 중 하나가 국가대표 된 뒤 태릉선수촌에 들어가 있어야만 했다는 것이다. 다른 선수들은 그런 훈련방식을 좋아할 수도 있지만 내겐 맞지 않았다."
일본의 경우, 국가대표에 선발돼도 소속팀 선수들과 훈련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다 가끔씩 대표 선수들을 소집해 기량을 점검한다거나 미팅을 갖는다고.
혹시 다른 이유는 없었을까. 추 선수가 한국에서 선수생활 할 땐 그의 앞에는 항상 조인철 선수(은퇴, 용인대 강사)가 있었다. 늘 2인자 역할만 해온 것.
"조인철은 정말 좋은 선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2인자였던 것에 대해 아쉬웠다든가 하는 점은 없었다."
아니면 유도계 시스템의 문제는 아니었을까. 일단 유도 경기장 안팎에서 만난 유도인들과 팬들은 하나같이 우리나라 유도계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했다.
"추성훈이를 보면 일본에서 기본기 잘 배워 기술과 힘 모두 뛰어나다. 유도계에서 유도대(용인대)를 나오지 않으면 국가대표 달기 힘들다. 추성훈이도 피해자다. 어떻게 보면 성훈이가 자기 스타일에 맞게 일본으로 잘 돌아간 것인지도 모른다."(부산 모 팀 감독)
"비통할 따름이다. 우리 스포츠계는 지연과 학연 때문에 올바로 선수들이 운동을 못하는 거 같다. 실력 있는 선수보다는 후배랍시고 실력 떨어지는 선수를 뽑는다. 어떤 사람들은 추성훈이 조국 버렸다고 말하는데 나는 오히려 조국이 추성훈을 버렸다고 생각한다."(유도 팬 하원옥씨)
하지만 정작 추 선수는 이에 대해 함구했다. 아니 입을 열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그는 포기하고 도망간 것일 수도 있으니까.
또 하나의 걸림돌은 언론이었다. 추 선수는 '조국을 메쳤다'는 제목의 기사를 1면에 다룬 모 스포츠 일간지를 보고 처음에는 좋아했다. 그는 말은 잘 했지만 읽는 것엔 서툴렀기 때문에 내용을 몰랐던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조국을 등지고 한국 선수를 이겼다'는 기사내용을 읽어주자, 이내 들고 있던 신문을 무릎에 내려놓으며 당황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그가 입을 열었다.
"(이런 기사가 나왔는지) 잘 몰랐다. 그냥 나를 유도선수로 봐줬으면 좋겠다. 이런 기사를 보니까 (마음)아프긴 아프다. 서운하기도 하다. 그런 거 때문에(조국 배반하기 위해) 유도한 거 아닌데...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이해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이런 기사 안 냈으면 좋겠다. 이렇게 하는 건 자제했으면 좋겠다. 관심 가져주는 것은 감사하지만..."
이 대목에서 추 선수는 답답한지 "어떻게 말하지"를 되뇌며 일본어 통역을 찾았다. 주위에서 통역원을 못 찾자 경기장 옆 연습장으로 기자들과 함께 갔지만 역시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다시 경기장으로 돌아와 <스플> 기자와의 인터뷰를 매듭지을 수밖에 없었다.
추성훈 선수는 한민족의 핏줄을 가지고 한국의 대표가 되기 위해 한국에 왔다. 하지만 돌아가야만 했다. 어떤 이들은 그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야유를 보냈고, 어떤 이들은 박수를 보냈다. 추 선수는 그에게 부정적인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했지만, 이를 강조하는 그의 마음 한 구석엔 상처가 있는 듯 했다.
"(금메달 땄을 때) 특별히 더 많이 기쁘다거나 만족감이 든 것은 아니다. 보통만큼만 기쁘다고 생각했다. 내가 금메달 딴 것을 두고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솔직히 유도가 좋았을 뿐이다."
그의 말대로 그는 단지 자신에게 맞는 스타일을 찾아 일본으로 간 것일 지도 모른다. 사인을 부탁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친절하게 사인을 해주는 추 선수의 모습이 조금은 측은해 보였다. 4일 아침 9시, 경기를 마친 유도대표팀과 한국을 떠나는 추 선수의 마음은 어떨까.
"그동안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들었어요. 일본에 돌아가면 일단 쉬어야죠. 여행이나 갈까요. 음...그리고 난 조국을 배반하지 않았어요. 아까 뭐라고 했죠? 그 신문에서..."
- '조국을 메쳤다'요.
"난 조국을 메치거나 그러지 않았어요."
<스포츠조선>의 이상한 '추성훈 금메달' 보도
'추성훈 선수 금메달 보도'에 가장 많은 공을 들인 신문은 <스포츠조선>(이하 '조선')이다. 2일자 조선은 1면과 4면에 걸쳐 `추성훈 선수`에 대해 가장 많은 지면과 사진을 할애했다. 또한 5개 스포츠신문 중 유일하게 추성훈 선수와의 인터뷰 내용을 일문일답 형식으로 소개했다.
1면에는 '조국을 메쳤다'는 제목 아래 "만화에서나 나올법한 슬픈" 추성훈 선수의 운명적 스토리를 소개했고, 4면에는 '선수는 승부에서 이기는 게 생명' 제하로 추성훈 선수의 결승전 소감과 한국 텃세에 좌절해서 일본으로 귀화했다는 내용의 박스기사를 함께 실었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다른 신문사에 실려 있는 추성훈 선수의 '말'을 찾아볼 수가 없다. 조선은 '한국 선수로 활약하다가 일본대표로 출전한다는 것이 어색했을텐데', '이번 대회에 대비해 훈련은 어떻게 했나', '결승전에서 승리를 자신했나', '앞으로의 목표' 등 4개 질문을 던졌다. 조선의 인터뷰 기사에서 볼 수 있는 '귀화'와 관련한 멘트는 "부담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운동선수는 우선 승부에서 이기는 것이 생명이라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했다"는 답이 유일하다.
다른 신문에 나와 있는 추성훈 선수의 말은 어떨까. 간단하게 경기소식과 추성훈 선수 소개를 박스 기사로 처리한 <굿데이>를 제외한 나머지 3개 신문사에 실려 있는 추성훈 선수의 말은 다음과 같다.
"유도를 하기 위해 귀화했고 유도는 국적과 관계없다는 걸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래도 저는 한국 사람입니다. 감사합니다. 우승해 기분이 좋습니다"(스포츠서울)
"대한민국 구호가 나를 응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국적은 상관없다. 유도를 계속하고 싶었을 뿐이다" "유도가 좋아 선택한 길인만큼 앞으로도 열심히 할 것이다" (일간스포츠)
"나는 한국사람입니다. 귀화는 유도 때문에 했습니다. 유도에는 국적이 없습니다" (스포츠투데이)
모두 '조국을 메쳤다'는 조선의 기사 제목을 어색하게 만드는 말들이다. 다른 신문들의 기사 제목 또한 조선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래도 전 한국입니다'(스포츠서울), '유도가 좋았을 뿐'(일간스포츠), '추성훈 "유도위해 귀화...난 한국인"(스포츠투데이)
특히 <한겨레신문>을 보면, 신문 기사가 '사람을 보는 시각'에 어느 만큼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다. 한겨레 기사는 "추성훈은 1일 금메달을 따낸 뒤 '열심히 응원해주신 동포여러분께 정말 감사드린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로 시작, "그가 경기장을 나서며 던진 능숙한 한국말은 우리들의 가슴을 깊숙이 찌른다"며 '나는 영원한 한국 사람입니다'는 추성훈 선수의 말로 끝맺고 있다.
조선이 왜 그렇게 추성훈 선수 보도에 많은 공을 들였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조국을 메쳤다'고 보기 힘들게 만드는 추성훈 선수의 말들은 왜 쏙 빼버렸을까. 2일자 조선은 확실히 이상했다. 특히 아키야마의 마음속에 '추성훈이란 이름 석자와 한국'이 살아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 이정환 기자
강이종행/이정환
제일교포 4세로서 조국에서 활동하면서 겪었을 수많은 고통... 그러한 고통을 모두 감내하면서까지 조국땅에서 유도를 계속할만큼의 용기 혹은 신념이 부족했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조국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간직하고 한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를 조국의 너른 품은 언제나 기다리고 안아줄 것입니다.
조선일보는 어디가나 말썽이군...
-기사를 본 어느 분의 답 글-
혹시 독일 어느 인종주의자 감독이 만든 "쇼킹 아시아"를 보셨는지......
보신 분덜은 아시겠지만 독일의 그 그 나치즘 비스무리한 사상 가지고 있는 그 감독이 아시아를 멸시하는 내용들로 채워져있는데 일본애덜을 돈만 많기나하지 성적으로는 겁나 이상한 나라사람으로 묘사하져......
아시아를 무시한 것에 분통하기보다 그걸 우리는 일부 관음증 형태로 좋아한적도 있죠......
일본거리를 잠시 비춰주는데 검은 치마와 흰저고리를 입고 나오는 여학생들 몇몇이서 약 1.5초간 나와여.......
확인하실분 확인!!
또......
열분께 함 봐보시라구 추천해 드리는데 재일동포를 다룬 영화 GO 라는 영화에도 나오는......
GO!! 대한 기사 한토막~
아래주소에 함 드가보세여~
탤런트 "김민"도 나오고 "명계남"도 나오고 한답니다.
탤런트 "김민"이 "불알~~"이라고 말하는 장면도 나온답니다.
http://go.lycos.co.kr/news.asp
한인도 일인도 아닌 우린 누구야?" '고'(일간 스포츠) [2001/11/23]
제작 방식과 내용에서 독특함이 돋보이는 영화 'GO'가 ‘재일한국인’과 똑같은 운명을 반복할 것인가.
'GO'가 ‘상당한’ 관심 속에서 24일 개봉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상당한’ 관심은 일부에 국한된 반응이다. 영화 'GO'가 제한됐지만 뜨거운 관심을 끌고 있는 이유는 독특한 성격에 있다.
'GO'는 일본 배우가 출연진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연출자까지 일본인(유키사다 이사오)이다. 당연히 일본 영화로 느껴진다. 그러나 재일 한국인을 이야기하고, 한국 자본으로 만들어진 때문에 ‘법적’으론 한국 영화 대접을 받았다.
이렇듯 독특한 태생에 주목해 'GO'에 관심을 드러낸다면 그것은 표피적인 한계에 머문다. 'GO'가 관심을 끄는 이유는 도리어 ‘재일 한국인’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란데서 찾아야 된다.
’재일 한국인’은 원작자인 재일동포 3세 소설가 가네시로 카쓰키의 말대로 ‘코리안 재패니즈’다.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소속이 불분명한 인간들이다.
이들은 남과 북으로 나뉜 조국, 어디에서도 그리 환영받지 못한다. 기껏해야 호기심 또는 측은지심의 대상에 그친다. 삶의 터전인 일본에서 살아가는데도 재일 한국인이란 신분은 도움 되지 않는다.
이런 재일 한국인 문제를 'GO'에선 젊은 세대에 투영해 새롭게 바라봤다. 한 편의 연애 드라마를 만들어 젊은 재일 한국인의 정체성을 드러낸 'GO'는 핏대 높여 재일동포의 아픔을 떠드는 것처럼 하지 않았다는것 하나 만으로도 매우 슬기롭다.
이 덕택에 는 일본 개봉에서 청춘 영화로 환영받았다. 그 반응이독특한 소재에 대한 천박한 관심이었다 하더라도 값지다. 재일 한국인의 조국인 한국에선 그런 천박한 관심조차 일지 않고 있는 탓이다.
소재나 방식의 독특함을 떠나 재미있고, 완성도 높은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GO'가 국내 관객들에게선 제한된 관심밖에 못 받고 있어 안타깝다. 일본에서 지난 달 개봉 때 첫 주말 51만 명의 관객을 기록했는데 한국에선 거의 불가능처럼 보인다.
정경문 기자
한일합작영화 '고' '세상울타리 넘기'(동아일보) [2001/11/23]
나, 일본 도쿄에 사는 재일교포 3세 스기하라. 한국 이름 이정호. 싸울 때 가끔 옷 안에 숨긴 ‘현대조선혁명력사’라는 책으로 일본 불량배들의 주먹을 막곤 하지. 그렇다고 내가 ‘붉은 물’이 든 조총련계란 것도 아냐. 수백쪽 짜리 두꺼운 책이라 방패막이로 사용할 뿐. 나는 일본어로 말하고 일본인처럼 사는 ‘코리안 재패니즈’. 누구라도 나보고 ‘재일 한국인’이라고 부르면 죽어!
그래서 나는 조선인 중학교를 나왔지만 일본인 고등학교에 진학했지. 난 거기서도 내 국적을 알리지않았어. 그런데 어느새 일본 친구들이 그걸 알고는 자전거 체인과 각목을 들고 덤비더라고. 전적은 24전 24승. 우리 아버지는 전직 권투 선수였고 난 어릴 적부터 코피 터져가며 싸우는 법을 배웠지.
그러던 어느날 나이트클럽에서 사쿠라이라는 일본 여자애를 만났어. 한눈에 서로 ‘필’이 꽂혀 그날로 연애했어. 그리고 ‘일’을 치르려는 그날 밤, 그녀의 옷을 벗기기 전 갑자기 내 국적을 말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어. 제길, 내가 왜 이러지. 내가 언제 나라를, 색깔을 따졌다고. 어쨌거나 그녀는 돌아서더군. 자기네 아빠가 한국인하고 중국인 남자와는 연애하지 말라고 했데. 그냥 옷을 주워들고 내뺄 수 밖에.
한계인가봐. 내가 아무리 영화 속에서 “이건 분명 내 연애 이야기”라고 수없이 뇌까려도 내 스스로도 결국 이데올로기에 부딪혀. 그리고 영화를 보는 사람들도 결국 일본 속의 한국을 찾으려 하지.
그래서 유달리 내가 아버지와 권투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나 봐. 사실 말이 권투지, 아버지와 아들이 주먹질하는 게 스포츠냐? 나는 번번히 아버지에게 얻어맞는데, 아무리 내가 막나가도 아버지라는 벽을 넘어설 수 없는 것처럼 일본 속 한국인은 합법이라는 울타리 안의 어떤 ‘유리 벽’에 막혀있는 것 같아.
원작자인 가네시로 카즈키(金城一紀)는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교포인데 나와 이력이 비슷해. 자기 얘기를 쓴 셈인데, 영화와 같은 제목의 책으로 지난해 일본에서 대중문학작품에게 주는 나오키 상을 받았어.
내 역을 맡은 구보쓰카 요스케(22)는 NHK 드라마 ‘한번 더 키스’(2001년) 등에 출연한, 요즘 일본에서 제일 잘 나가는 아이돌 스타. 영화 내내 인상 벅벅 쓰며 사자후를 터뜨리지. 얼마 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 영화가 ‘아시아 영화의 창’ 부문에 초청돼 이 친구도 부산에 왔는데 영화와는 달리 약간 어수룩해. 특히 영화 속 긴 갈기머리를 빡빡 밀었던데, 영화찍고 느낀게 많아서 그랬다고 해. 15세 이상 관람가. 23일 개봉.
이승헌 기자
2002년도 11년만에 벌어진 남북축구대회에 서울과 전주에서의 공연을 마친 재일조선학생소년예술단 학생들도 `통~일 조국`을 외치며 응원에 열을 올렸다.
[사진 - 통일뉴스 송정미기자]
우리가 흔히 말하는 "조총련 사람덜".....
바로 그 사람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910년 당시 러일전쟁이 끝난후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이미 외교권은 박탈당한 상태였긴 해도 1897년(맞나? ^^;;) 고종황제께서 선포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이나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는 유지하고 있었으나......
1910년 8월 29일이후에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조선총독이 우리를 통치하게됨으로써 우리의 국호는 사라지게 되죠.........
그 후 1945년 8월 15일........
비록 우리 스스로의 힘은 아니고 외세에 의한 것이지만 일본의 항복으로 인한 광복을 맞게되져......
해방의 기쁨과 동시에 많은 동포들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구여......
허나 "정들면 고향"이 되는 법이고 사정이 있으셔서 그곳에 머물러 사시는 동포들도 생기게 되져......
그러면서 러시아나 중국에 사시는 동포들은 그 나라의 소수민족의 일원으로써 국적은 그곳의 국적을 따르며 살게 되구여.....
▶남북 통일 축구을 관람할 수 있어 기쁘다는 재일조선학생소년예술단 남명나
학생(오른쪽).
이건 잡설인디....
특히나 중국애덜이 이른바 "동북(東北)"이라 부르는 "만주(滿州)"지역에 사는 동포들은 "중화민주주의 인민공화국(中華民主主義 人民共和國 1949. 10. 1)"보다 1년일찍 건국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朝鮮民主主義 人民共化國 1948년....날짜는 기억안남)의 일원이 되었을수도 있는데 참 아쉽져?
그 당시에 김일성이 모택동한테 만주땅 우리한테 달라고 말했다가 실패했다고 하는디 잘만 됐다믄 나중에 우리가 통일이 되믄 만주도 우리땅이 되는디....
근데.......
문제는 일본(日本).......
불행하게도 재일동포사회는 우리 남쪽을 지지(?)하는 "민단(民團)"과 "조총련(朝總聯)"으로 나누어져 있쪄......
또 잡설인데.......
"조총련(朝總聯)"이란 말은 우리 군사독재시절 친북성향인 그들을 음해하기 위해 북한을 연상시키는 말인 "조선(朝鮮)"에서 따온 "조(朝)~~"라는 말을 붙은거랍니다....
다시 정리하자믄.......
"조총련(朝總聯)"이 아니라 "총련(總聯)"이라는 말이 맞는거에여.....
언제 함 기회가 되서 "총련(總聯)"사람덜을 보게 되었을때 괜시리 "조총련(朝總聯)"이라는 용어 쓰시지 마시길......
다음에 다룰테지만 우리가 중국에 사는 동포들을 부르는 "조선족(朝鮮族)"이라는 말처럼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이에여......
"조총련(朝總聯)"이란 말이 넘 익숙해져있는 말이기는 하지만 쪼매 오해받을 말이랍니다........
잘 모르지만 잠시 재일동포들에 대해 잠시 말씀드리면........
원래 해방 직후에는 그전의 자신들의 모국인 "조선(朝鮮)"이 자신들의 국적 이었지만 문제는
1948년 이후입니다..
우리 남과 북이 각각 "대~한민국(大~韓民國)"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朝鮮民主主義 人民共化國)으로 나누어지게 되자.......
내선일체(內鮮一體... 내지(內地: 일본을 뜻함)와 조"선鮮"은 한몸뚱아리一體다) 란 말로 동화를 강요당하며 차별받던 이른바 일본에 남아있던 "조센징(朝鮮人)"들은 당황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이른바 "조선(朝鮮)은 하나다"인데 말이져.....
가뜩이나 일본넘들한테 차별받고 그러는데 고국이 분열되니 얼마나 답답했겠어여.......
평소에 강한 민족정신으로 인해 일본국적을 취득할수 있게 일본에 귀화(歸化)할수도 없는 노릇이었는데......
워낙 일본애덜이 차별을 하는지라 미국엔 "빌 게이츠"가 있다면 일본애덜 스스로 일본에는 "손정의"가 있다는 말을 할정도로
일본 정보화기수의 선두주자이자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부자중에 하나인 "소프트 뱅크社"의 손정의(일본명:손마사요시)도 결국은 귀화하게 되자나여.......
일본에서 사업을 하려고 어쩔수없었긴 해도 대신 강한민족심으로 인해 자신의 민족의 성(姓)이었던 손(孫)이라는 것만은 유지하려고 일본에서는 없는 새로운 성인 손(孫)씨 성을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