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분필 시인>>
<<박분필 시인의 양력>>
* 경북 울산 울주군에서 태남.
*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유교경전학괴 졸업.
* 1996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 시집 : 『창포 잎에 바람이 흔들릴 때』, 『산고양이를 보다』, 『물수제비』, 『바다의 골목』 등.
* 동화집 : 『hldid 전설의 날개』, 『홍수와 땟쥐』.
* 제4회 문학청춘작품상, 2011년 KB창작동화 대상, 제11회 동서문학상 맥심상을 수상.
<<박분필 시인의 시>>
파도의 유희/박분필
높게 쌓은 돌담이 무너진다 무너진 벽을
다시 하얗게 쌓아올린다
한 生의 리듬을 끌어당겼다가 밀어내고
허물어지면 다시 일어나
늘어진 날개를 팽팽하게 끌어 모아
정점에 올라 내동댕이치고
세상 뭐 별건가 껄껄껄 한바탕 웃어제끼는
통쾌한 저 웃음소리는 차가운 피를 들끓게 하고
뜨거운 피는 차갑게 식혀주지
짙은 안개에 휘감겨도 함박웃음 만발하는 저
얼굴에서는 언제나 흰빛이 솟지
발끝까지 뛰어올라
참았던 슬픔을 분출하는 은빛폭소
웃으면 슬픔을 잊을 수 있지
잊기 위해 파도는 웃고 또 웃지
진정한 도약은 딱 거기까지만, 우르르
쏟아지면 쏟아져 유유히 새 길을 열어가는
파도의 유희
다시 시작하면 언제나 시작인
海玉/박분필
그 바다에 가면 해옥들이 불을 켜고 앉아있어
마치 고독으로부터 따뜻한 보호를 받는 것 같다
파도가 덮쳐도 꺼지지 않는 알불
이글거리는 불빛은 실상
돌 속에 뿌리 뻗은 금빛 심지들이다
손을 대 보면 까끌까끌 슬픔이 만져진다
금가고 깨진 감정이 전해져온다
잔잔하던 물결이 내안으로 들어오면 파도가 되고
海玉 안으로 밀려들면 노래가 되어 흐르는
차르르 쏴아,
수십 억 개의 모래들이 물결에 미끄러지면서
적어 내리는 빛의 두께와 소리의 두께
시시각각 새로운 태양의 빛
그리고 물의 정화
물거울에 쌓인 저 생의 빛은 얼마나 두터울까
어떤 얼굴이 그림자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그가 나선 문은 어느 문일까
나는 이제 어느 문으로 나서야 하나
어머니의 낮달/박분필
된서리 맞기 전에 청 고추를 땄다
며칠이 지나도록 풋 티를 벗지 못하고
붉으락 푸르락 응석을 부리듯
한바구니 가을이 빨갛게 익어간다
아직은 고집스럽게 초록을 버리지 않는
고추를 골라내다가
어머니가 거처하던 빈 방을 들여다본다
그놈의 고추, 고추 하나를 입에 달고 살았지만
끝끝내 아들을 품지 못하고
서까래에 불과한 딸, 또 딸, 여섯 번째 막내인 나를
기록하고 끝나버린 어머니의 일기를 읽는다
아기가 태어날 때 고추를 달고 나는지 나서 그것이
풋고추처럼 맺히는 것인지 어린 나는 늘 궁금했다
밤사이 뚝딱 고추 하나 단단히 맺혀져 있기를
밤 세워 뒤척이다가 아침이면 그 절망을
앙가슴에 꽁꽁 묻어두시기도 했던
어머니의 소망은 절벽 끝 낙락장송에 걸려있는
작은 귀주머니를 따는 것이었을까
너무 높고 아슬아슬해서 줄이 끊어진 악기 같아서
끝끝내 따지 못한 까마득히 올려다만 보다가
평생토록 목젖이 아팠던
저 희끄무레한 낮달
비로소 홀가분하게 낙락장송에 도달했다
주머니쥐의 추억/박분필
벽장은 벽의 호주머니
아주 작은 아이만
주머니쥐같이 호주머니 속에 폭 담길 수가 있어
단춧구멍에 꼭 맞는 단추처럼 끼워질 수 있어
보이지 않는 곳에 누룩을
숨겨두었던 시절이 있었지
누룩 몇 장을 꺼내야 할 때 마다 아이는
주머니쥐처럼 단추처럼 끼워졌어
흙냄새와 그을음 향기와 아궁이의 시간을 먹은
아늑하고 달큼한 두근거리는 동굴 같았지
사각형 작은 문과 벽 사이에 낀 햇살은 긴 송곳니 같았지
벽장 속 어둠을 와작와작 씹어 먹는
반짝반짝 까만빛의 가루가 비밀을 숨겨주었어
동그란 조청단지가 자꾸 나를 돌아보았어
그래서 나는 자주 벽을 열고 닫았지
벽장은 내 호주머니가 되었어
자작나무 自敍傳/박분필
자작나무 숲속에 들어서자
반듯하게 갖춰진 지필묵부터 먼저 보인다
눈부신 백지 한 장이 바닥에 깔려 반짝이고
명암이 깊은 하늘에 자작나무붓끝이 막 묵墨을 찍는 중이다
붓을 떼자 기러기 한 마리
깃털에 묻은 먹을 털고 푸른 하늘로 날아오른다
쭉쭉 곧게 세워진 붓대들의 연결사이로
가득한 여백의 연결이 도드라져 보이고
붓과 여백이 마음껏 필묵의
자유를 누리며 작품을 자작自作하는 중이다
먹을 갈고 붓을 다듬는다
찍고, 긋고, 맺기를 반복한다
자작나무 숲 백지 위에
구김 없는 또 한 장의 백지를 반듯하게 펼친다
자작자작 찢어 흩뿌리는
파지조각이 내 어깨에 하얗게 쌓인다
굴비와 파라오/박분필
1
표정을 빼 내고 감정을 건조시킨 미라
천하제일의 맛을 자랑하는 굴비가 해체되는 순간이다
몸에 배어있던 시간들은 초침간격으로 말라버렸고
고요에 잠긴 꼬리는 자신의 한때 활동에 대해 몰두하는 중이다
완성이라고 생각했던 꿈의 직조가 조각조각 뜯겨나간다
어제 꾼 나쁜 꿈으로 쪼그라든 기억은 이제 껍질일 뿐이다
삶의 맥동을 놓아버린 지느러미가
질긴 침목의 세계와 대결 중이다
2
질긴 침묵의 세계와 대결 중인 파라오, 세계 최강의 제국을
호령했던 람세스 2세의 미라가 이집트 밖으로 반출될 때
관계대상품목에 미라 항목이 없어서 건어물 관세로 매겨졌다니
파라오와 굴비가 동일했다는 것이므로
그 사실에 대해
생명의 한 문장이 끝난 곳, 잠시 운행했던 삶의 궤적이 사라진
곳에 찍히는 마침표는 모두 평등하다는 신의 증언이라 생각한다
궤도 수정/박분필
해가
이글이글 낮을 꼬박 태우고 나면
밤은
낮을 태운 뜨거움이 잿무덤이 되어 가맣게 쌓인다
맨손으로
나는 다 타버린 숯 검댕이 밤을 헤집어 보다가
우리가
별이라고 불렀던 반짝이는 이름을 기어이 찾아낸다
나는
막 먼동에 옮겨 붙을 생명의 불씨라고 이름을 바꾼다
오늘은
궤도를 이탈한 그가 보름가량 병원에서 궤도 수정을 거치고
마침내 불씨를 얻어 집으로 무사귀환 하는 날
달밤에
목련꽃 봉두난발로 굿을 했고, 지구의 공전과 자전도
탈선이나 연착 없이 무사했다
귀/박분필
썩은 나무 등걸에 영지버섯 두 개가 피어있다
귀를 열고 있다, 숲이
뚫리기 시작한 귀가 죽은 나무를 받들고 있다
결핍이었던 그늘이 뭉클, 성숙해진 그늘로
땅속 깊은 곳까지 닿는 소리를 정중히 담고 있다
빛마저 눅눅한 숲, 카본의 통속들이
이 몸에서 저 몸으로 헤엄쳐 다니다가, 꽃인 척
잎사귀인 척, 열매인 척 눌러 앉기도 하는데
가끔은
빛의 방랑객들에 의해 축축한 발가락들이
미라가 되고, 미라들은 한 무리 악기가 되어
숲은 신들린 음악을 밤중 내내 연주하기도 하는데
숲이, 더 넓고 깊게 귀를 열어서
내 다락방의 밀어를 훔치기도 한다
해안의 골목/박분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들
대나무 울타리를 나지막이 친 해안을 본다
뼈만 남은 고생대 짐승 한 마리가
등뼈에서 꼬리뼈까지 꿈쩍 않는 산맥이
모래알을 품고 있는 아름다운 골목
골목을 돌아 갓 쓴 바람이 온다
두루마기를 펄럭이며 산맥을 넘어 온다
밤눈이 밝아 하룻밤에도 고개 서너 개쯤은 넉넉히 넘으시던
고개를 넘다 만난 짐승에게는 훈기가 느껴오고
사람에게서는 냉기가 느껴온다고 하던
훈기보다 확 끼치는 냉기가 소름 돋게 한다고 하던
그분이 조개껍질을 줍는다
흰 껍질과 검은 껍질로 바둑판 위에 헛집을 짓는다
마음은 마음을 지우지 못해서
몸은 죽어도 모습은 살아있어서
내안에 존재하는 푸른 나무 한그루
모래알 하나하나 마다
별 하나하나가 불을 켠다
잠이 들락 말락 하는
당신의 차안과 피안이 만 만년 따뜻하겠다
고양이의 에로틱한 청혼/박분필
에나보 호수 길을 산책하는데
성냥개비들이 초록풀밭에 불을 지른다
그건
참 오랜만에 보는 반딧불이의 불꽃놀이였다
앙징스럽게 피어오르는 불꽃 한 송이를 꺾으려고
사뿐사뿐 두 손 두발에 시신경을 다 끌어 모은
얼룩무늬 고양이 한 마리
날카롭게 곧추세운 귀에서 청각이 느껴진다
뒷발로 욕정을 박차며 점프
빳빳한 몇 올 수염이 솟구친다
다시, 네발에 힘을 골고루 배정한다
몸이 앞으로 솔리거나 뒤로 젖혀지지 않게
허리를 팽팽하게 끌어당겼다 탁 친다
아랫배가 화살처럼 날아 너는 공중에 박힌다
현실은 냉정 할뿐
오늘밤 청혼은 아마도 내일로 미뤄야할 것 같은 너
망막에 촉촉한 물기가 반짝인다
개울을 지나
숲속을 지나
고양이 한 마리가 타운하우스 뒷마당까지 나를 따라온다
갸르릉 갸르릉 울음이 벽을 타고 흘러내린다
난 알지
네 울음은 울음이 아닌 특등 급 속삭임이란 걸
계란의 해빙기/박분필
1
냉장고 속 계란이 빙하기를 꿈꾼다
껍질이 깨어지자
노란 핵 한 덩이가 둥글게 떠오른다
生을 지켜준 껍질이 살얼음절벽보다 더 아슬 하다니
生이 생으로 잠시 머물다 진득하게 흘러내린다
2
새벽닭 긴 울음소리에 반눈을 뜬다
계란의 해빙기가 도래한 것
산에서 마을로 빙하가 서서히 흘러내린다
안개가 검고 딱딱한 바위무개를 동그랗게 감싸
수 만길 벼랑을 바위 속에 개켜 넣는다
3
바위가 만삭의 언어를 한사코, 한사코 품고 있다
메마른 겨울 숲이여, 말을 하라, 감정을 흐르게 하라
네 심장의 초록빛 고동소리를 시인은 들어야 하니까
탁!
공의 행적
타자가 친 해가
낙하하지 않고 지구 반대편으로 유람을 떠난다
해는 유물이다
생성과 소멸이 함께 살고 있는
구멍/박분필
밤은 계란 같은 혼돈입니다
나도 혼돈 속 혼돈입니다
딱따그르 따르르 딱따그르…
도량을 도는 스님의 목탁소리가 구멍을 뚫습니다
소나무에 뚫린 딱따구리의 구멍처럼 드디어
내 막힌 가슴을 관통하는 구멍하나가 뚫어지고 있습니다
첫째 날은, 내가 본 것들을 지우고
둘째 날은, 내가 들은 것들을 지우고
셋째 날은, ……, 지우고 또 지우고
그 하나의 구멍이 눈이었으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외눈 속에서 얼룩얼룩한 얇은 막을 깨고
콩자반 같은 눈동자가 금방 태어날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 구멍이
눈이 아닌 입이어도 좋겠습니다
빛을 물고 날아와 끝없이 먹여주는 입과
그 빛을 꿈처럼 받아먹는 입
아니면,
입이 아니고 귀가 되어도 좋겠습니다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구름의 날갯짓 소리와 분홍빛 숨소리를 담아두는
늙은 나무여, 네 얼굴에 동그란 숨구멍이 뚫였으니
누군가도 나처럼 소통이 간절했던 혼돈이었나 보구나
봄을 보낸다/박분필
봄을 붙들어 액자에 넣고
거실 벽에 걸어두었다
가지마다 화안하게
꽃등 밝힌 벚꽃그늘 밟으며
은어 떼처럼 봄비 몰려온다
액자 밑 흔들의자에 기대
꽃잠 든 어머니의 무릎 위로
팔랑팔랑 꽃잎들이 떨어진다
꽃잎이 가는 길로
어머니도 갈 길 서두르신다
바람/박분필
당나귀처럼 귀를 세웠습니다
섣달그믐 밤늦은 마당이 귀를 기울이고
발자국을 기다렸습니다
저벅저벅
각설이바람이 나뒹구는 마른댓잎으로
마당가득 낙서 휘갈기는 소리가 났습니다
사그락 사그락
스치는 소리 벌떡 방문을 열었습니다
은박지처럼 눈이 마당귀를 덮고 있었습니다
싸리비로 마당을 쓸어 막힌 귀를 뚫었습니다
처마에 걸린 등불이
애비 없는 신짝들을 지켜주었습니다
터벅터벅
발자국소리가 났습니다
매우 큰 반발작용에 방문을 벌컥 열고
아버지! 라고 불렀습니다
눈 덮인 늙은 감나무 가지에 등불이 스며들어
주홍빛 생기가 집안을 돌기 시작했습니다
점괘마다 이승에는 없다고 했던
허제비바람이 삽짝을 밀고 들어왔습니다
무전으로 세상을 떠돌다 온 꺼칠한 바람
물수제비/박분필
발가락이 노란 새 한 마리 숲을 꿰고 있습니다
새의 맥박소리 가늘게 흔들려서 고요를 꿰고 있습니다
거북돌이 물 밑에 가만가만 엎드려 물살을 꿰고 있습니다
시간이 물소리를 꿰고 물소리는 시간을 꿰고 있습니다
물뱀이 단풍을 맑게 시침질하는 햇살을 꿰고 있습니다
푸른 물잠자리 날갯짓이 바람을 꿰고 있습니다
너와집 처마의 그을음이 가을 한 접을 꿰고 있습니다
오체투지/박분필
비온 뒤의 보도블럭
지렁이들이 온 몸을 붓 삼아 수상한 상형문자를 기록한다
쓰다가 발에 깔려 문질러진 놈, 토막토막 여며진 채 기는 놈
흙속을 벗어나면 순식간에 미라가 되고 말 걸
알까 모를까
오로지 죽음을 향해 오체투지하는
저 봄날의 장렬한 육박전 같은 몸부림은
저 봄날의 화려한 사육제 같은 몸부림은
누구더러
누구더러 읽으라는
아득한 메시지일까
마침표/박분필
기쁨 슬픔 외로움의 시간들이 버무려진 공간에
백발의 마침표 고요하다 저들의 사랑은 넉넉한
분량의 봄날이었지만 한 생의 계절은 짧았다
슬픔도 기억도 다시는 찾을 수 없도록 깊이
묻은 마침표, 불꽃 꺼진 후의 정적
달과 붉은 산호숲/박분필
지난밤 빨간 산호가지에 나의 달이 걸렸다
산호 숲은 달의 감정을 단번에 사로잡는 색
모든 달은 그렇게 바다 속 붉은 풍경 속으로
부드럽게 빠져들곤 하지
달은 물을 움직이고 바람을 일으키고
밀물과 썰물에서 여자의
몸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기운을 펼치지
괜찮다 괜찮다
늘렸다 당겼다 고무줄 하듯 세상을 즐기는 파도
걸으면 걸을수록 마음의 거리까지 좁혀주는 섬
당신의 착각이 믿음일지라도
내 믿음이 착각일지라도
달 없는 밤, 나는 룰루랄라
갈매기의 춤이 앤딩커턴처럼 내리는
지금, 나는 룰루랄라
만취晩翠/박분필
―허난설헌 생가에서
아껴놓았다가 마지막 선심으로 내놓은 듯
늦가을 마당 가득 피어있는 분홍장미
그대는 절기보다 너무 앞서 핀, 꽃
조용히 움직여도 향기가 진하다
그랬어, 늦게 핀 장미꽃처럼 짧게 살다 간
분홍빛 가을 장미였어, 그대는
장미가 만들어 내는 소리,
삐꺽대는 툇마루 소리 살며시 문 여닫는 소리
낮은 굴뚝이 피운 연기 돌담에 젖는 소리
집 구경이 아닌 그녀의 마음속을 구석구석 둘러본다
한쪽 쟁반에는 열린 세계를 한쪽 쟁반에는
닫혀있는 한 시대를 담은 하늘저울을
내 더듬이로 어렴풋 어루만져본다
바람 때문인가 서글픈 생각 때문인가
나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눈물 한 방울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베르나르의 『속세의 능멸에 대하여』에 나오는 1절
파도의 유희/박분필
한 生의 리듬을 끌어당겼다가 밀어내고
허물어지면 다시 일어난다
높게 쌓은 돌담이 무너진다 무너진 벽을
다시 하얗게 쌓아올린다
늘어진 날개를 팽팽하게 끌어모아
정점에 올라 내동댕이치고
세상 뭐 별건가 껄껄껄 한바탕 웃어재끼는
통쾌한 저 웃음소리는 차가운 피를 들끓게 하고
뜨거운 피는 차갑게 식혀주지
짙은 안개에 휘감겨도 함박웃음 만발하는 저
얼굴에서는 언제나 흰빛이 솟지
발끝까지 뛰어올라
참았던 슬픔을 분출하는 은빛폭소
진정한 도약은 딱 거기까지만, 우르르
쏟아지면 쏟아져 유유히 새 길을 열어가는
파도의 유희
다시 시작하면 언제나 시작인
향일암에서/박분필
붉은 해가 나뭇가지에 걸리자
나뭇가지에 걸린 오늘이
살금살금 가지를 타고 내려온다
햇살의 발길에 몰려 한발 한발 뒷걸음질 치던
밤의 그림자가 꼬리를 말고 달아난다
떠나온 곳과 떠나갈 곳의 경계
슬피 울고 환히 웃었던 기억의 사이
참이면서 참이 아닌 저 그림자
꿈이 실려 있는 내 생의 연속이 또 다른
시간으로 길을 내는 중이다
내가 움직이면 따라 움직이고
정지하면 따라 정지하던 내 그림자
바위 속, 그림자 숲에 숨어버렸다
뒷모습뿐인 구름과
모습 없는 바람이 그 숲을 통과하고
햇살과 바람이 관음전 앞 나무에 세월을 새기는 동안
나무 밑에 떨어진 붉은 동백을 새들이 쪼는 동안
고향냄새는 참 참기가 힘들지
햇살경전 한 질씩 등에 싣고
돌산앞바다를 향해 턱 괴고 있는 돌거북들
매번 마음만 먼 곳까지 다녀오는
낮은 굴뚝/박분필
내가 본 그 들판은 시베리아입니다
언제 내려앉을지 모르는 판잣집에서
굴뚝도 아궁이도 없는 식수마저 얼어 터진 곳에서
노부부가 이민자처럼 언어를 소통할 이웃도 없이
절뚝거리며 골목을 뒤져 폐지를 줍습니다
폐지 판, 돈으로 사온
홍시 두 개로 하루치 식사를 겨우 때웁니다
그것마저도 감사해서 맛있다, 맛있다
아내의 웃는 입과 눈을 바라보는 거무죽죽한 그 얼굴에
여러 종류의 굴뚝이 다 보입니다
어느 사대부의 고택에서 본 담장보다 낮은 굴뚝이
끼니 거른 민초들에게 밥 짓는
연기냄새를 부끄러워한
사대부들의 마음씀씀이였다, 로 기록된
감정 없는 그 굴뚝도 보입니다
그들이 과연 이 시베리아벌판을 알기나 할까요
시베리아 쪽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항상 살을
깎아대는 지독스런 바람이어서
눈물마저도 고드름으로 매달린다는 것을
시베리아에 또 바글바글 눈이 내려쌓입니다
태모필 胎毛筆/박분필
진한 먹물에 붓을 찍습니다 생명선이 살아있어
차람차람 붓끝이 차진 태붓
떨리는 듯 곧은 선을 긋습니다
태안에서 그리고 태어나서 다시 백일을
더 자란 딸애의 머리카락에서 따스한 울림이
고물고물 기어 나와 그의 심장에 닿습니다 그렇게
사군자를 쳤고 좋은 글귀 뽑아 열두 폭 병풍
준비해 두었는데
시집을 안 가겠다 물러서지 않는 딸
30여 년 걸어놓았던 실고리가 삭아 걸지조차 못하는
붓만 같습니다
한때 붉은 발가락이었고 말랑말랑한 마디였고
솜털이었던 저 닮은 손주라도 안고 온다면야 명주실로
짱짱한 고리를 만들어 붓걸이에 걸어둘 것인데
책상 서랍 구석으로 밀어내 버린
침묵 한 자루
근 삼 년 만에 그가 다시 붓을 잡습니다
젖배 곯은 아기가 젖을 빨 듯
물 타지 않은 진한 먹물을 빨아들이는 붓
그가 탱탱해진 붓을 어르고 달래는 일은 침묵에 빠진
자신을 구출해 내는 일
입 성근 잣나무 한 그루 일으켜 세웁니다 그 아래
쌓기도 하고 흩기도 했던 한 생의 명암이
누군가를 사랑했던 그의 호흡들이 골고루
펴 발라진 오두막 한 채
지난한 한 생을 떠받친 서까래가
그저 고요히 달빛을 뿜어냅니다
슬픔포식자/박분필
흰색과 붉은 갈색이 섞인, 빛나는 예쁜 털을 가진
비걸들 각자의 캐비지에서 쏟아져 나온다
약을 개발하기 위해 실험개가 되어야 했지, 손을 대도
움직이지 않는 훈련과 아파도 소리 지르지 않는
인내심으로 길러진 슬픔포식자들
자신의 그림자에도 발이 걸려 넘어지곤 했던
절망들이 있는 힘을 다해 낑낑거린다
한쪽 눈에는 낮이 한쪽 눈에는 밤이 담긴
젊은 시인 윤동주를 닮은 흔들리는 눈빛들이
욱신거리는 상처를 핥는다
밤마다 문틈으로 스미는 슬픔을 먹었지, 오늘
이전까지는 모두 다 안락사를 시켰다지
죽음보다 처절한 생체실험의 기나긴 터널을 지나
입양을 기다리는
여리고 순한 눈빛들이 어떤 종류의 문자처럼
내 푸른 정맥에 깊게 새겨진다
수樹수水카페 옆에는 청보리가 피고 있었다/박분필
몽상의 언덕에 청보리가 피고 있었습니다
진열장에 꽂혀있는 붓 같았습니다
붓 속에는 밝아오는 새벽 같은 생명들이
가지를 뻗어나가는 꿈이 들어있습니다
언 흙을 움켜잡고 지켜 온 여린 발가락이
사라져버린 맥을 이어가는 캔버스에
엉겅퀴 꽃들은 보랏빛 심장을
오래 늙은 은행나무와 푸른 강과 풋보리 밭을
생동적인 노을 속으로 휘감겨들게
하는 부드러운 붓질
추억 속에 멈춘 나를 잠깐 지웠다가
다시 또렷하게 그려줍니다
청둥오리 한 마리 한 발짝 한 발짝
외로움을 끌며
불타는 일몰의 저녁 강을 저어가고 있었습니다
세계는 지금 코로나19 세계적 팬데믹이어도
겨울의 무게가 무너진 자연의 낙서판은
이토록 평화롭고 아름답습니다
겨울 강/박분필
새하얀 거짓말인 것 같았다
강함과 부드러움이 어울림과 흩어짐이
구름 속 어느 충동적인 몸짓이 칠해 놓은
장밋빛 하늘이
밤의 마을에 뿌려진 온갖 별과
저 하얀 빙판이 서로 대결중이라는 것이
섬진강을 꽉 틀어막고 있던 빙판이 단 한 번의
진동에 쩍 금이 갔다
마음이 찢어지는 굉음 후에 벌어진, 저 틈
강철보다 단단하게 묶었던
사랑 하나가 헐거워진 탓일까
얼어버린 날개 하나가 하얗게 날아오른다
임종조차 지키지 못한 이 슬픈 짐승을 키우기 위해
희생하신 어머니의 가슴팍에 난 흉터 같은
깊고 푸른 칼금 위로 햇살이
참새 떼처럼 내려앉는다
저 그림에 뭔가 강력한 힘이
잠들어버린 수면을 흔들어 깨우는 듯
울컥 그리운 냄새가 피어오른다
멀리서 보면 아름답고 가까이서 보면
상처 많은 어머니의 숨결 같은
적송밭 속에 누가 마침표를 찍었을까/박분필
―선덕여왕릉에서
1
폭염을 뚫고 낭산을 오르자 붉은 솔밭이
여왕의 무덤을 심장처럼 품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단단하게 다지고 다져져
아무 감정도 남아있지 않을
불 꺼진 후의 정적 같은
한 생의 결미에 찍힌 마침표 같습니다
풀숲에 핀 보랏빛 꽃을 봅니다
그 어떤 왕도, 왕이 품은 거대한 꿈도
다시는 꽃피우지 못하지만
작년에도 피었을 저 작은 풀꽃은 후년에도
후후년에도 다시 아름답게 필 것입니다
2
여왕은 자신이 죽을 날을 예언하며
도리천에 묻어 달라 유언을 했습니다
30여년 뒤에
능
아래쪽에 도리천의 호불신인 사천왕사가 창건되었습니다
하늘위에 하늘
층층이 떠오르는
여왕의 꿈 한 채
편히 쉬라는 신호처럼 노을이
수미산 붉은 솔밭 솔잎과 넝쿨과
가녀린 들꽃의 뿌리들을 물들입니다
벚꽃 향을 마시다
며칠 전 섬진강에서 터지기 시작했다던
벚꽃들 길목마다 쏟아져
아귀아귀 길을 먹어치우며
남에서부터 북으로 올라 온
저 민중들의 불길
찻길로 몰려나와
트럭이나 버스, 바퀴달린 것들이 지나갈 때마다
한참이나 쫓아가다 쓰러진다
절뚝거리면서도 움직일 수만 있다면
흩어졌다가도 또 다시 뭉쳐 뒹구는 동맹들
쫓다가 밟혀 바닥에 짓뭉개진 채로
천지강산에 순교의 향기를 뿌리는
벚꽃들의 아우성
뜨겁게 뭉쳐서
내 안의 푸른 경맥마다 불끈거리는
저, 벚꽃 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