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람들 자장면 먹고 나갈 때 옷 속에 그릇 감춰갔어 했던 우체국 앞 개리반점 차성락씨가 생각납니다. “우리 중국사람 춘절에 마작하면 마누라 걸어해!” 하며 웃겼던 그는 이 나라에 없다합니다.
1980년대 중반 다양한 음식과 혁신적인 경영을 하다가 일이 잘못되어 저세상 사람이 된 만춘향 시봉기 사장이 우리를 아쉽게 한답니다.
홍영장 물자장면 참 인기 좋았습니다. 그 집 서재문(徐才文) 영감님은 노환으로 여수 딸집에서 여생을 보낸답니다. 좋은 분이었습니다.
지금도 영화동 영화원 자장면 참 맛있습니다. 하지만 점심 때 가면 손님이 거의 없습니다. 외가가 일본인 그 집 여사장은 가끔 월례 산행에서 만났었습니다. 금강동 삼성아파트 앞 오래 버티고 있는 신풍원은 참 경이롭습니다. 그 집 여흥만 사장이 존경스럽습니다.
사양길에 접어든 중국음식점이야기를 마치면서 군산 화교사회가 가꾸어야할 유산을 생각합니다.
일제 때부터 꿈을 가지고 군산에 건너와 채소밭, 음식점, 포목상, 잡화상 일 등을 하다가 타국인 군산에서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명산동에서 삼학동으로 넘어가는 현 서해대 근방 산비탈에 그들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 초 산 중간으로 도로가 뚫리면서 그들의 유골은 나운동 군경묘지 뒤 산비탈에 집단으로 옮겨졌습니다.
세월이 가면서 그 중 상당수 유골이 후손들에 의해 중국, 대만, 미국으로 옮겨갔지만 아직도 200여기 이상의 묘와 평장이 있습니다. 매년 청명 날에 몇 안 남은 화교들이 합동제사를 모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월 대보름날엔 멀리 축사에서 전기를 끓어다가 관습대로 한밤 내내 불을 밝히며 조상들을 추모하고 있습니다.
이번 설날 내가 아는 화교를 만나 차례를 어떻게 모셨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답합니다. 섣달 그믐날 늦은 오후에 묘소에 가서 직접 신을 집에 모셔와 자정을 막 넘겨 제사를 지낸다 합니다. 절 몇 번하느냐? 고 다시 묻자 네 번 절한다고 그는 답합니다.
다음날 나는 화교 묘역을 가보고 싶었습니다. 군경묘지 정문에 차를 댔습니다. 우측 시멘트 길로 구불구불 한참을 상행했습니다. 험악하고 취약한 산비탈에 협소한 주차장, 엉성한 제단과 허름한 전봇대 등이 살벌하기만 했습니다.
후손들이 저 세상에 간 선조들이 부자 되라고 종이를 썰어서 군데군데 올려놓은 묘역에 궂은비까지 내렸습니다. 하지만 황량한 이곳이 군산화교의 역사와 혼이 숨 쉬고 있는 곳입니다. 이렇게 관리해서는 안 되겠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영화동 노인회관 앞에 중화기독교 군산교회가 있습니다. 허름하지만 고국을 떠나와서 개척의 삶을 살아가는 화교들의 영혼의 안식처이기도 했습니다.
영동 포목상 신흥상회 초경신(初慶新) 사장 부인 조계기趙桂枝 권사는 신앙심이 강한 분입니다. 어머니가 한국 사람인 조 권사는 교회를 짓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당시 미국 사람인 믹켈란 여 선교사가 조권사와 뜻을 같이 합니다. 조 권사는 자기 건물 일부를 팔고 화교들의 성금 그리고 중앙교회, 개복교회 등의 협조로 1959년도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올해 78세의 조 권사 이야기를 나도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7,80년대 그런대로 어느 정도 번창하던 교회가 화교수의 격감과 교회설립에 크게 기여했던 조 권사가 미국으로 떠나버린 후 지금은 명맥만 유지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이 교회의 한국인 이순구 목사를 마났습니다. 부인이 대만사람인 이 목사는 나에게 화교 교인은 거의 없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교회의 재산 관리를 물었더니, 교회의 건물과 땅은 한국화교중앙교단에 등재되어 있다합니다.
그는 최근 중국에서 건너온 한족, 조선족, 유학생, 이주여성, 근로자 들이 한국에 와서 정신적 상처를 받은 이들을 위한 설교를 한다 합니다. 그리고 며 칠 후 본인도 중국으로 떠나기 위해 이사 준비를 하고 있다합니다. 썰렁하기만 했습니다.
군산 화교들의 성지인 묘역과 교회를 알아보았습니다. 다음 회에 화교소학을 끝으로 화교들의 이야기는 마치려 합니다.
첫댓글 ㅋㅋㅋㅋㅋㅋㅋ 이어졌군 ,,,
글 만 봐서는~
분명 나의 형님이 신데~
^^
글 쓰신분 말씀하시나요?
@노발대발 네~!!
글 읽으면서 그냥 막연하게~ 생각해 봤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