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타미라 벽화
정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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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로는 좁았어요 에스컬레이터로 도착한 층계에서 핸드백 같은 하이힐 같은 그리고 벨트 같은 짐승들의 허울을 보았어요 내게도 하나쯤 매달려 있는 소가죽 핸드백 지퍼를 열 때마다 슬프게 눈 껌벅거리는 황소의 긴 숨소리가 옆구리에 지근지근 파고들었어요 세상 모든 짐승들이 내뿜는 숨소리의 올가미에 나는 깔려 있었어요 어둠을 찍어 짐승들은 내 뇌리에 벽화 하나씩 그리기 시작했어요 뿔을 그리고 등뼈를 그렸어요 천정 어디쯤엔 별 몇 개 옛날의 수림을 찾아 푸른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었어요 층계를 빠져나오기도 전에 슬픔을 껴안은 조그만 동굴 하나 수렁처럼 아득히 뚫려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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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아마 빨간 딱지로 표시된 일요일 이었지요 아직 떨어질 수 없는 홍조 띤 잎새를 배경으로 벤치에 앉은 굽신한 등이 눈에 들어왔어요 미동도 하지 않았어요 털갈이 중인 비둘기들 땅콩 모이로 더 여문 살이 오르고 있었어요 철제다리 너머 잎새든 깃털이든 상관없는 바람이 불고 벤치와 벤치 사이 깃털 같은 흙먼지가 벤치의 발목을 잡고 놀았어요 빨간 딱지로 표시된 일요일이라고 지루한 평화라고 말하는 듯했어요
알타미라 벽화였어요 황소 눈알 같은 슬픈 껌벅임이 들리는 듯했어요
-2000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정진경 시인
1962년 부산출생
동아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부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2000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알타미라 벽화> <잔혹한 연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