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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성학교 진학과 독립운동 참가
소학교를 졸업한 이영식은 곧 바로 외국 선교사에 의하여 건립되어 기독교 교육의 요람이 된 대구 계성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등록금이 없었다. 학교에 근로장학생 제도가 있었으나, 나도래(羅道來) 교장과의 면담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학비부담 능력이 전혀 없으면 근로장학생 선발기준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급한 나머지 그는미국인 선교사 부해리(傅海利) 목사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에 부 목사의 학비부담 보증을 받아서 근로장학생으로 추가 선발되어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연로한 조모와 동생 등 네 식구의 생계를 어머니가 혼자서 감당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였다. 그래서 이영식은 학교에서 근로활동을 하는 외에 선교사의 주선으로 학업에 지장이 없는 범위내에서 시간제 일을 하였다. 잡화상의 점원, 시장의 야경꾼, 양말공장의 직공, 선교사 사택 청소 등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귀천을 가리지 않았다. 이후 서문교회 종지기 사찰집사를 하기도 하였다.
계성학교 3학년 때부터는 서문교회 목사인 정재순(鄭在淳)의 배려로 저녁예배와 청년회, 학생회 면려예배에 설교를 담당하여 그 사례금으로 학비를 조달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대구 신명여학교 졸업생인 이우순(李又順)을 만나 결혼하였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24세였다.
이영식이 계성학교 5학년이 되었던 1919년은 우리 나라의 방방곡곡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던 뜻 깊은 해였다. 이 때에 대구지방의 항일만세운동은 이만집·백남채·이상백·정재순 등이 핵심인물이었고, 남선정(제일)교회, 남산교회, 달남(서문)교회가 중심이 되어 신도들과 계성학교, 신명여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다수 참가하였다.
1919년 3월 8일, 정오를 조금 지나서부터 서문시장에 군중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그날은 서문시장에 장이 서는 날이었고, 마침 토요일이었는데, 먼저 계성학교 학생들이 평복으로 위장하여 삼삼오오 모여 들었고, 신명학교 여학생들도 참가하고 있었으나, 사전에 참가를 약속하고 있었던 대구고보와 대구농림의 학생들은 도중에 경찰의 저지를 받아 오후 3시 가까이에 겨우 동참하였다. 이에 군중들은 이만집(李萬集)과 김태련(金兌鍊)을 나락가마니가 실린 달구지 위에 올려 세웠다.
김태련이 주머니에 숨겨 온 독립선언서를 군중 앞에서 낭독하였고, 이만집의 선창으로 일제히“대한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는데, 그 자리에 계성학교 학생이었던 이영식이 참가하였으며, 이 후에도 여러방법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여 두 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이영식의 항일운동에 관련한 활약상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던 해에 이영식은 계성학교 학생으로서 이만집 등이 서울의 이갑성(李甲成)과 연락을 취하며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자, 계성학교 학생대표로서 비밀리에 전교생을 규합하는 등으로 사전계획에 적극 가담하였고, 3월8일에는 이만집등이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수천 명의 학생, 시민, 장꾼들과 더불어 태극기를 앞세우고 서문파출소 앞에서 출발하여 대구경찰서, 만경관, 남산약국, 구 달성 군청앞까지 행진하였는데, 여기에 참가하였던 이영식은 몰래 행렬을 빠져나와서 독립선언서 23매를 가지고 칠곡군 인동면 진평동교회를 찾아가서 자신의 처족과 일반교인 및지역민들을 선동하여 그날 밤 11시경에 동리 뒷산에서 불을 피우고 만세를 불렀는데,이 사건으로 23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그 후 이영식은 4월 2일에 김수길(金壽吉) 등과 함께 대구시내의 조선상인들에게 폐점철시와 일본인과의 거래를 끊도록 종용하는「동정표시경고문(同情表示警告文)」제1호 300여 매를 등사하여, 시내와 서문시장에 배부하였으며, 이에 80여 점포가 호응하여 폐점하였고, 4월 3일에는 김석진(金石鎭)의 집에서 김수길·이종식(李鍾植) 등과 함께 전 날의「동정표시경고문」제1호를 받고도 이에 호응하지 않는 서문밖 시장의 포복상 김응수(金應壽)·김경부(金敬夫)에게 방화하겠다고 협박하는 문서를 만들어 우송하였다. 또 4월 6일에는 김수길·김석진과 함께 대구경찰서장에게 암살하겠다는 경고문을 우송하였으며, 이어「동정표시경고문」제2호, 제3호를 제작하여 시내 상가에 배부하였고, 4월 13일에는 중추원참의 박중양(朴重陽)과 수정동 2가 구장 박응훈(朴應勳)에게 암살하겠다고 위협하는 경고문을 우송하였다.
또 이영식은 4월 17일에 계성학교 학생과 기독교계 인물 등 10여 명이 비밀리에 모여서 혜성단(慧星團)을 조직하였다. 혜성단은 그들의 활동범위를 중국 등 해외로까지 넓히기로 하고, 인쇄물을 만들어서 민중을 계몽할 것과 일본 관청에서 일하는 조선인 관리들에게 경고문을 보내기로 하였으며, 기회를 보아 만주지방에서 활동 중인 독립운동세력과도 연락하기로 하였다.
이에 4월 18일에는 내당동 방명원(方明圓)집에서「근고동포(謹告同胞)」라는 선전문 300여 장을 만들어 시내 요소에 붙였고, 4월 22일과 27일, 5월 7일에도「근고동포, 경계동포(警戒同胞)」, 「경고관공리동포(警告官公吏同胞)등의 선전문과 경고문을 각 300여 장씩 등사하여 요소에 붙이고, 각 관청의 조선인 군수, 면장과 서기 등에게 우송하여 궐기할 것을 촉구하였으며, 이로써 조선인 관공리들은 크게 동요하였고, 일본 경찰은 범인 검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한편으로 4월의 대구지역사회는 지난 3월 8일의 독립만세운동에 관련하여 157명이 경찰에 체포되어 주동자급은 3년형을 선고받고, 그 외에 가담자들도 6월에서 3년까지 형을 언도받는 과정에서 이영식은 궐석재판에서 6월형을 선고 받았으나 체포되지 않고 서울로 도주하여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인 민족대표 33인들과 접촉하기 위하여 활동하다가 같은 해 8월에 체포되어 서울에서의 활동으로 기소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을 복역하게 되었다.
그 후 이영식은 서울을 떠나 육로를 따라 수원, 조치원, 청주, 공주, 대전, 상주, 김천, 대구, 경주로 옮겨 가면서 독립운동을 선동하다가 다시 체포되어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아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1922년 7월에 형무소를 출옥한 이영식은 가정형편이 더욱 곤궁하여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던 중에 어머니의 명에 못 이겨 처 이우순과 이혼하고, 이듬해 4월에 28세의 나이로 일본으로 건너가 고베(神戶)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영식의 민족독립에 대한 열정은 신학교 재학 중에도 계속되어 1926년에는 교민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는 죄명으로 고베경찰서에 1주일간 구금되기도 하였다.그 후 이영식은 1927년 3월에 고베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서문교회 전도사로 취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장로교 총회의 규정에 따라 외국신학교 졸업생은 국내 신학교에서 단기보습교육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평양신학교에 편입하여 그 과정을 마쳤다.
2년간 대구서문교회에 시무하는 동안에도 교인들에게 독립운동을 강조하여 일본경찰로부터 감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가정적으로는 이해 11월 10일에 신명여학교 졸업생인 박두순(朴斗淳)과 재혼의 기쁨을 누리기도 하였고, 서문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런데 이 시기에 이영식은 신앙에 대한 깊은 회의에 빠져 고민하던 중에 1929년 9월에 서문교회 시무를 마감하고, 대구 애락원(愛樂園) 나환자교회에 부임하여 1936년까지 나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하였다.
나환자와 장애자교육에 헌신
일본은 1937년 중국에 대한 전면적인 침략을 개시하고, 1941년에는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 희망없는 전쟁의 수행에서 국가총동원이 실시되고 일본 자체에서도 여러 가지 비상조치가 취해졌지만, 식민지인 조선에서의 일본군국주의자들의 만행은 더욱 노골화하여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표어를 내걸고 민족말살정책을 감행하였다.
이 시기에 이영식의 방황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1938년 이영식은 대구를 떠나 함경북도 성진중앙교회의 목사로 시무하였으며, 1941년 9월에는 두만강을 건너 만주국 간도성 명월구(明月溝) 제일교회에서 시무하기도 하였고, 1943년2월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요코하마(橫兵市) 타월정(打越町)의 조선인교회에서 시무하였다. 또 그 해 12월 26일에는 이영식의 성장에 가장 크게 영향을 주었던 어머니(김덕희)가 향년 77세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영식이 함경도로, 만주 간도지방으로, 일본으로 전전하는 동안 일본의 식민지지배도 도를더하여국내에서는민족신문인『동아일보』,『 조선일보』등이폐간되고, 일본어를 가정에서도 상용하도록 강요되었으며, 쌀이 강제로 공출되었고, 전선의 확대에 따취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장로교 총회의 규정에 따라 외국신학교 졸업생은 국내 신학교에서 단기보습교육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평양신학교에 편입하여 그 과정을 마쳤다.
2년간 대구서문교회에 시무하는 동안에도 교인들에게 독립운동을 강조하여 일본경찰로부터 감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가정적으로는 이해 11월 10일에 신명여학교졸업생인 박두순(朴斗淳)과 재혼의 기쁨을 누리기도 하였고, 서문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런데 이 시기에 이영식은 신앙에 대한 깊은 회의에 빠져 고민하던 중에 1929년 9월에 서문교회 시무를 마감하고, 대구 애락원(愛樂園) 나환자교회에 부임하여 1936년까지 나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하였다.
나환자와 장애자교육에 헌신
일본은 1937년 중국에 대한 전면적인 침략을 개시하고, 1941년에는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 희망없는 전쟁의 수행에서 국가총동원이 실시되고 일본 자체에서도 여러 가지 비상조치가 취해졌지만, 식민지인 조선에서의 일본군국주의자들의 만행은 더욱 노골화하여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표어를 내걸고 민족말살정책을 감행하였다.
이 시기에 이영식의 방황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1938년 이영식은 대구를 떠나 함경북도 성진중앙교회의 목사로 시무하였으며, 1941년 9월에는 두만강을 건너 만주국 간도성 명월구(明月溝) 제일교회에서 시무하기도 하였고, 1943년2월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요코하마(橫兵市) 타월정(打越町)의 조선인교회에서 시무하였다. 또 그 해 12월 26일에는 이영식의 성장에 가장 크게 영향을 주었던 어머니(김덕희)가 향년 77세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영식이 함경도로, 만주 간도지방으로, 일본으로 전전하는 동안 일본의 식민지지배도도를더하여국내에서는민족신문인『동아일보』,『 조선일보』등이폐간되고, 일본어를 가정에서도 상용하도록 강요되었으며, 쌀이 강제로 공출되었고, 전선의 확대에 따르는 노동력의 부족으로 인하여 많은 조선인들이 탄광, 군수공장, 일선기지로 징용되어 강제노동에 종사하였다.
여기에 우리의 애국지사들도 국내에서 혹은 만주, 상해 등지의 외국에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 헌신하였다. 이에 이영식은 일본의 패전이 가까운 장래에 닥칠 것을 예감하고 1945년 5월 25일 가족을 대동하여 일본에서 귀국하였고, 대구에서 8·15광복의 기쁨을 맞이하였다. 같은 해 9월 이영식은 서둘러서 대구애생원(愛生園) 나환자교회를 설립하여 시무하였다.
그리고 1946년 4월 19일에는 심신장애자의 교육과 복지사회의 구현을 목적으로 대구맹아학원(大邱盲啞學院)을 설립하였고, 초창기 학원의 설비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대구형무소의 교무과장을 겸임하였다.이영식이 장애자교육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었음은 그가 한 자리에 오래 머물지 않았던 과거의 이력에 비추어 애생원 나환자교회의 목사를 15년 3개월간 담당하고, 대구맹아학교 교장을 15년간 봉직하고 있음에서 잘 엿볼 수 있다.
그가 장애자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된 직접적인 동기에 대해서는 직접 작성한 공적조서에 잘 나타나 있다.(전략)어머니가 잠시 실명하여 맹인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불러 일으켰으며, 3·1운동시에는 서울형무소의 감방에서 눈먼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며 크게 느낀 바 있고, 또복역 중 신흥군관학교 교가를 부르다가 간수에게 뺨을 얻어 맞아 본인의 오른쪽 귀가 파열되어 남의 말을 잘 듣지 못하였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후략)
대구맹아학원의 설립을 주도한 이영식은 이전에 항일독립운동에 참가하여 투옥된 바있는 기독교 목사로서 대구애락원 나환자교회에서의 시무를 통해서 소외된 이들의 고달픈 삶을 몸소 체험하였고, 해방 이후에 조국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사업을 구상하던 중에 대구에도 맹·농아인을 위한 교육기관이 필요하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관계기관의 협력을 받아 이 사업을 적극 추진하게 되었다.
대구맹아학원 설립의 정신적 기반은 기독교적 박애주의 사상에 입각한 인간존엄과 평등 이념이 주축이 된 민주주의 사상이고,도의를 기반으로 한‘인류의 최고 문화국’건설을 지향하는 일에 공헌하려는 것이였다. 이에 학원의 기본 임무는 교육을 통한 장애인의 재활과 복지증진을 실현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구맹아학원이 정식 출범하기까지는 수많은 난관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는데, 당시의 사정을『영광학원 50년사』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대구맹아학원 기성회 창립총회는 1946년 4월 20일 오전 10시 경상북도 도청 제1회 의실에서 김의균(金宜均) 도지사를 비롯한 각계 각층의 유지 인사 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고, 이영식이 임시의장을 맡아 진행하였다.
위의 기성회 창립총회에서 명예이사장에 김의균 도지사를 추대하고, 이사장 겸 원장에 이영식을 선임하였으며, 고문 8명과 이사 12명을 선출하였는데, 인적 구성은 종교계, 교육계, 금융계, 산업계, 의약계, 여성계 등을 망라하였다.
대구맹아학원의 운영이사회 제1차회의는 4월 22일 오후 4시 경상북도 후생과장실에서 개최하였다. 이날 회의에서는 설립인가 신청 건과 운영기금 모금 건 및 교사(校舍)확보문제를 논의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곳을 물색하던 중에 마침내 대구부 서성정에 소재한 중앙교회 지하층을 임시교사로 빌릴 수 있게 되었다.
이에 1947년 3월 20일 오후 3시에 경북인쇄소장실에서 다시 이사회를 개최하여 개교식 날짜를 결정하고 새로 경북지사에 부임한 최희송(催熙松)을 명예원장으로 추대하였다.
대구맹아학원이 정식으로 개교한 것은 1947년 4월 9일이었다. 개교 당시의 학생은 맹생 2명, 아생 10명이었다. 또 개교식 후에 아담스(安斗華) 선교사댁에서 제3회 이사회를 개최하여 앞으로 장기간 사용할 수 있는 교사(校舍)를 물색해 보기로 하였다.
1947년 4월 15일에는“사설학술강습회 대구맹아학원”설치 인가신청서를 경북도지사에게 제출하였고, 같은 해 5월 22일에 경북도지사로부터 정식 인가서를 교부받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교사로 사용하던 중앙교회에서는 수용아들이 불결하다는 이유로 퇴거를 요구하였고, 다시 대구부 남성로에 소재한 대구제일교회당의 지하층을 교사로 빌렸는데, 여기서도 4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같은 해 9월 1일에는 대구부 삼덕동에 소재한 이영식 사택(당시 형무소관사)으로 옮겨 수업을 실시하다가 마침 미국 선교사 아담스의 도움을 받아 선교사댁을 임시 교사로 사용하였다.
초창기 대구맹아학원의 가장 큰 애로는 학원운영비 확보와 교사로 쓸 건물을 구하는 것이었는데, 이를 해결할 목적에서 한때‘부립화’가 적극 추진되었지만, 성사되지 못하였으며, 1949년 2월에는 대구시 태평로 150번지에 위치한 대구시 소유의 건물을수 차의 교섭 끝에 우선 3년 기한으로 임대 허가를 받았다.
개교 이래 많은 난관을 겪었던 대구맹아학원은 개교 3년째인 1950년 6월 2일 초등과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당시 졸업생은 맹생 1명,농생 1명이었다.
대구맹아학원이 제1회 졸업식을 거행한 후 20여 일만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1950년 7월 20일에 대구맹아학원은 무기휴학을 맞이하게 되었고, 전쟁이 더욱 격렬해지고 북한군이 낙동강까지 진출한 사정에서 이영식은 가족을 피난시키기 위하여 성주에 들어갔다가 낙동강 인도교가 두절되는 바람에 돌아 올 수 없는 처지가 되었으며, 그 해 9월 17일에는 지방의 인민위원회에 연행되어 성주 가천지서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취조과정에서 목사와 대구형무소 교무과장이라는 신분이 탄로되어 총살형을 당할 위기를 맞이하였으나, 그 동안 자신이 나환자와 장애자들을 위해서 애써 온 지난 삶을 열변하여 집행관들을 감동시킴으로써 극적으로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 후 대구맹아학원은 1950년 10월 5일에 임시로 사용하던 태평로 교사가 군 헌병대에 징발을 당한 관계로 다시 태평로 200번지의 대구시 소유 건물을 임대받아 1952년 3월 20일까지 사용하였다. 그 당시 원생은 초등과 맹생 8명, 농생 11명, 중등과는 맹생 1명이었다. 그리하여 대구맹아학원의 독립된 교사 신축을 계획하였던 이영식은 1952년 7월까지 무려 400여 곳(기관, 일반인)을 순방하여 지원을 요청하기에 이르렀고, 그 결과 약 9백만 원의 금액이 모금되었다.
이영식의 대구맹아학원 교사 신축의 꿈은 1953년에 성취되었다. 그 동안 수 차례에 걸쳐 대구시장 김종환(金鍾煥)을 찾아가 시유지 중에서 학원부지를 배려해 주도록 요청하였던 이영식에게 1953년 4월 13일에 대구시 대명동 소재 공동묘지터 일부 약 1만평을 학원 부지로 증여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1953년 3월 19일 역사적인 원사신축 기공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다행히 공사가 빨리 진행되어 1953년 11월 23일에 대구맹아학원을 대명동의 신축공사로 옮기고, 155평의 원사 낙성식을 거행하게 되었으며, 1954년 12월11일에는 본관 건물 242평을 준공하였다. 1955년 4월 16일에는 본 학원을 정규학교체제로 승격시키기로 하였다.
한국사회사업대학 설립
대구맹아학교 경영이 어느 정도로 자리 잡게 되었던 1954년 1월에 이영식은 사회사업 경상북도연합회 회장에 피선되었고, 1955년 1월에는 한국맹농아교육기관 연합회장을 그 후 대구맹아학원은 1950년 10월 5일에 임시로 사용하던 태평로 교사가 군 헌병대에 징발을 당한 관계로 다시 태평로 200번지의 대구시 소유 건물을 임대받아 1952년 3월 20일까지 사용하였다.
그 당시 원생은 초등과 맹생 8명, 농생 11명, 중등과는 맹생 1명이었다. 그리하여 대구맹아학원의 독립된 교사 신축을 계획하였던 이영식은 1952년 7월까지 무려 400여 곳(기관, 일반인)을 순방하여 지원을 요청 하기에 이르렀고, 그 결과 약 9백만 원의 금액이 모금되었다.
이영식의 대구맹아학원 교사 신축의 꿈은 1953년에 성취되었다. 그 동안 수 차례에 걸쳐 대구시장 김종환(金鍾煥)을 찾아가 시유지 중에서 학원부지를 배려해 주도록 요청하였던 이영식에게 1953년 4월 13일에 대구시 대명동 소재 공동묘지터 일부 약 1만평을 학원 부지로 증여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1953년 3월 19일 역사적인 원사신축 기공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다행히 공사가 빨리 진행되어 1953년 11월 23일에 대구맹아학원을 대명동의 신축공사로 옮기고, 155평의 원사 낙성식을 거행하게 되었으며, 1954년 12월11일에는 본관 건물 242평을 준공하였다. 1955년 4월 16일에는 본 학원을 정규학교체제로 승격시키기로 하였다.
한국사회사업대학 설립
대구맹아학교 경영이 어느 정도로 자리 잡게 되었던 1954년 1월에 이영식은 사회사업경상북도연합회 회장에 피선되었고, 1955년 1월에는 한국맹농아교육기관 연합회장을 맡기도 하였으며, 1956년 2월 15일에는 장남인 이태영이 일본에서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부자가 함께 장애자교육에 진력하였다.
1956년 5월에는 본 학원의 원활한 운영과 우리 나라 특수교육 교사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교육재단을 구성하여 4년제 대학을 설립키로 하고 우선“한국이공학원”을 개강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1956년 4월 1일 제15회 이사회에서 대명동 대구맹아학원부지 약 1만평과 교사, 기숙사, 사택 등의 건물을 기본 재산으로 하여“한국특수교육재단”을 구성하고, 같은 해 6월 2일자로 경상북도로부터“대구공학원”설치를 인가 받았다가 6월 27일에 그 명칭을“한국이공학원”으로 개칭하고, 이영식이 초대 학장에 취임하였다. 한국이공학원의 입학생은 주·야 70명이었다.
그 후 한국이공학원은 1957년 4월 1일자로 그 명칭을“한국사회사업학교”로 바꾸어 문교부의 허가를 받았고, 1958년 2월 4일에는 문교부로부터 재단법인 대구맹아학원의 설립을 인가 받음으로써 한국사회사업학교가 교육법에 의거한 정규학교로 인정받을 수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재단법인의 초대 이사장 겸 원장을 이영식이 맡았다.
1959년에는 대구맹아학교를 맹생전문학교인 대구광명학교와 농아교육전문학교인 대구영화학교로 분리하고 두 학교의 교장은 장남인 이태영이 취임하였다. 그 이후 1961년 11월 25일에는 한국사회사업학교의 학장직도 이태영에게 물려주고, 이영식은 재단법인 일과 대외활동에 전념하였다.
1961년에는 한국특수교육연구협회의 초대회장에 피선되고, 1963년 광복절에는 그 동안 장애자교육을 위하여 노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문화훈장 국민장을 수여 받기도 하였는데, 같은 해12월에 처 박두순이 별세하고, 그 이듬해 6월 10일에는 첫 부인이였던 이우순과 다시 결혼하였다.
이영식과 이우순의 재결합은 실로 42년만의 일로서 찢어지게 가난하던 시절 어머니의 강요로 헤어진 다음 새로운 가정을 이룩하여 4남 3녀를 낳아 훌륭하게 키워 낸 이영식이였지만, 이때까지 첫부인이 홀로 쓸쓸하게 노후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자녀들의 동의를 받아 첫부인을 다시 처로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 부분은 이영식의 인간미를 물씬 느끼게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그 후 이영식은 1967년 3월 학교법인 산하에 정신박약아교육기관인 대구보명학교와 지체부자유아교육기관인 대구보건학교를 개교하였다. 1969년 5월 16일에 5·16민족상 교육부문 본상을 수여 받았고, 1971년 광복절에는 국민훈장을 수여 받았으며, 1973년 9월부터는 광복회 경상북도지회장을 맡아 항일독립운동 정신의 함양에 노력하였다.
또 1973년 12월 19일에는 한국사회사업대학 병설 전문학교를 설립하였고, 1975년에는 한국사회사업대학 부설 노인복지대학을 설립하여 우리 나라에서 가장 먼저 평생교육에 관심을 기울여 노인들에게 교양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여가를 선용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으며, 같은 시기에『애, 광, 자유』라는 저서를 일본 동경에서 출판하기도 하였다. 그 당시 이영식의 사상은 자신이 직접 쓴“나의 인생관”에 잘 반영되어 있다.
나의 인생관
인간은 대우주법칙 속에서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존재로서 부모의 혈연을 통하여 독립한 인간으로 태어나 이 세계를 무대로 하여 능력대로 연기하다가 최후에 죽음이라는 관문을 통하여 근본인 대우주법칙 속에 다시 환원되어 간다.
인간은 언제나 대자연법칙 속에 살고 대자연법칙은 언제나 밤낮없이 내 속에 충만하고 있으므로 내가 곧 자연법칙이요 자연법칙이 곧 나다.다시 말하면 아버지는 아들과 같고 또 아들이 아버지와 같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와 자연법칙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부자의 관계와도 같고 부부의 관계와도 같고 형제의 관계와도 같으며, 친우의 관계와도 같은 깊은 관련성을 갖고 있다. 어느 곳에서 흐르는 강물이라도 바다에 들어가서 바다의 물로 통일됨과 같이 우리 인간세계도 죽음 저편에서는 하나의 생명체로 통일된다.
우리가 서로 합심하면 없는 것을 있게도 하고 있는 것을 없게도 하며, 변하는 것을 불변하게도 하는 무소불능(無所不能)의 존재자로서 우주공간에 군림하는 빛이요 사랑이요 자유이며, 영원의 생명이 되는 주인공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죽음은 화학적 변화가 아니라 물리적 변화로서 우리들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한 존재자가 되어 있지만 인간본연의 자체는 추호도 변함없는 대자연법칙속의 무궁한 생명체 속에서 벌써 한 존재자로서 군림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신념을 태산같이 믿고 이 세상에서 보람있는 인간다운 인간으로서 최후의 일각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할 것이다.(1975. 8. 16) 이영식은 나이 80세가 되던 해에 16절지 9장 분량의 유훈(遺訓)을 작성하여 수하 자녀들에게 돌렸는데, 그 내용 중에 이런 글귀가 눈에 들어 온다.
나의 장례식에는 성경, 찬송, 기도, 설교 등의 모든 종교의식이 필요없다. 그것은 죽는 순간에 나의 육신은 이미 모든 것이 끝났기 때문이다.
나를 기념하기 위한 동상, 비석 등은 어느 것도 필요없다. 다만 아래와 같은 글을 새긴 조그마한 돌 하나를 세워 주면 족하다. “ 큰 뜻을 품고 인간세상의 밑바닥을 헤매면서 모든 공포를 벗어나 저 하늘을 넘어선 한 사람이 여기 잠들다”
창조적 생활에 힘쓰라. 너희들은 항상 인간의 존엄성에 입각하여 하루하루를 창조하는 보람있는 직업에 앞장서라. 행복을 자신에서 구하고 과거를 후회하지 말고 미래에 걸지도 말고 오늘의 인생관을 바르게 하여 인생길을 엮어 가라.이영식은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인간존엄을 위한 사업에 열정적으로 활동하였으며,그 사업의 하나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사이판·티니안 등에서 전사한 무명한국인의 영령(英靈)을 봉환하는 것이었다.
1975년 12월 29일에 미국령 괌도에 국제복지문화센터(I.W.C.C)를 설립하고, 이 센터를 중심으로 1977년 5월 15일에 제2차대전 중에 태평양지역의 사이판·티니안도에서 희생된 한국인 전사자 유해 5000여 구를 천안“망향의 동산”으로 봉환하여 안장하는 작업을 담당하였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티니안 묘지공원에 이들 영령들에 대한 위령탑(慰靈搭) 건립을 완료하였다.
당시의 사정은 학교법인영광학원에서 작성한「영령봉환 사업결과보고」에 잘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요약하면다음과 같다.
1975년 4월 23일부터 3일간 이영식의 주선으로『서울신문』특파원 이우세(李寓世)가 괌과 사이판·티니안을 답사하여 2차대전 당시에 전몰된 한국인들의 현황을 조사하여 소개하였다.
1976년 10월 티니안을 방문한 이영식은 티니안 시의원 보라하의 안내를 받아 티니안 추루지방 정글 속에서“조선인지묘(朝鮮人之墓)”라 적힌 비석과 합장된 무덤 3기를 발견하였다.
이에 1977년 3월 23일 학교법인 영광학원 이사장의 명의로 보건사회부 및 재외동포모국방문후원회에 봉환허가 신청서를 제출하여 4월 23일에 허락을 받았다.
1977년 3월 25일에 봉환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4월 30일 봉환추진위원 제1진이현지에 도착하였으며, 5월 10일에 제2진이 현지에 도착하여 유해 수습작업을 진행한 결과 5월 12일에 작업을 마치고 사이판을 출발하여 5월 15일에 천안에 소재한 망향의 동산에 안장하는 작업을 완료하였다.
1977년 12월 5일에는 티니안 현지에“평화기원 한국인위령비”를 제막하여 제2차대전 중 전사한 한국인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세계의 평화를 기원하였다.
그 후 이영식은 1977년부터 영광학원장을 맡아 건강하게 노후를 보냈는데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건강법을 가르치기도 하고 자신이 직접 만든 건강식품을 무상으로 나누어 주기도 하면서 인간사랑을 몸으로 실천하였으며, 1980년 9월 2일에는 안중근의사 동상건립 추진위원회 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이시기 한국사회사업대학은 1979년 3월부터 경산시 내리리 일대에 학교부지 100만 평을 확보하여 경산캠퍼스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1979년 11월 13일에는 교명을“한사대학”으로 변경하였고, 1980년 3월부터 경상학부와 이공학부의 강의를 경산캠퍼스에서 하게 되었다. 1981년에는“UN세계장애자의 해”를맞이하여 6월 1일 경산캠퍼스에 점자도서관을 개관하여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맹인들의 완전한 사회참여를 뒷받침하게 되었다.
한편 한국사회사업대학은 오랜 세월 동안 갈망하여 오던 종합대학교로의 꿈을 이루게 되어 1981년 7월 31일에 교명을“한사대학교”로 변경하였다가 같은 해 10월 20일에 다시“대구대학교”로 바꾸었으며, 이에 맞추어 6개의 단과대학으로 편제하고, 대학원, 사회개발대학원, 교육대학원을 설치하였다.
또 그 동안 학부에 병설되어 있던 한사실업전문대학을 1981년 11월 30일자로 폐교하고, 전문대에 설치되었던 학과들을 개편하여 3개단대를 증설하였다.이때 이영식은 1981년에 다시 괌도로 건너가 제2차대전때 희생된 무명동포의 위령사업을 추진하던 중에 12월 8일 그곳에서 87세를 일기로 소천하였다. 이영식의 묘소는 대구대학교 경산캠퍼스 본관(성산기념관) 서편 낮은 구릉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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