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 204/200624]참깨밭 농약치기와 미담美談 3건
초보농사꾼을 자처하며 괜히 참깨와 땅콩 그리고 생강을 심었나? 후회가 된다. 프로농사꾼 아버지가 복지관에 출근하기 전‘해장걸이’로 1시간여, 퇴근 후 2시간 넘게 풀 뽑는 일에 전력투구를 하시기 때문이다. 평생 해오신 일이니까 방안에 가만히 앉아 계시는 것보다는 백 배 나은 일이긴 하나, 온몸을 던져, 해가 저물어 캄캄할 때까지 하는 게 어찌 문제가 아니겠는가. 이러다 밭두렁에 쓰러질지도 모르겠어서 어지간히 하라는 것인데, 도무지 들은 척도 않는다. 아버지와 살면서 유일한 스트레스가 당신의‘오버over노동’이다. 하지만, 내가 왜 모르겠는가? 농삿일은 결코 오버가 없다는 것을.
나는‘한량閑良농부農夫’라고 할 자격도 없다. 심어놓기만 했지, 날마다 작물의 성장상황을 살펴야 하건만 도무지 관심이 없다. 풀도 뽑아야 하고, 때론 농약도 쳐야 하건만, 숫제 뒷전인데 무슨 농부란 말인인가. 그저 툇마루에서 책과 신문을 들여다보는 재미만 쏠쏠하다며‘안분지족安分知足’어쩌고하는 나는 사이비似而非농부, 게으른 농부에 다름 아니다. 보다 못한 아버지가 한 말씀하신다. 참깨 지지대를 해줘야 하느니라. 할 수 없어 지지대 두 뭉치 100개를 4만원에 사와 곳곳에 꽂고 작물 보호끈으로 줄을 쳤다. 장마비에 넘어지지 않도록 한 것인데, 더 자라면 그 키에 맞춰 또 줄을 쳐야 한다. 고추도 마찬가지다. 아무 생각이 없는데, 일이 많다. 어디 공짜로 되는 일이 있던가.
귀농선배의 올바른 '지적질'이 시작됐다. 지독히 냄새나는 벌레, 노린재를 아시리라. 이놈이 극성을 부리기 전에 얼른 농약을 해야 한단다. 찬찬히 들여다보니 벌써 잎들을 갉아먹고 참깨 머리부분을 똑똑 분질러놓고 있다. 일파만파一波萬波라는 말이 실감이 날 거란다. 금세 번지는 것은 시간문제. 하루이틀 사이에 잘 지어놓은 참깨농사 작살이 나게 생겼는데,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종합살충제를 사다 분무기로 오후 농약을 쳤다. 퇴근 후 돌아오신 아버지, 못내 흡족해 하신다. 이놈이 이제야 농사 어려운 것을 알고, 농약도 칠 줄 아는구나, 하는 표정이다. 더구나 장마가 시작된다는데, 줄도 쳐 참깨의 전복顚覆과 노린재 폐해에 대비를 했으니, 나도 조금은 안심이 된다. 스스로 기특한지고!
바랭이풀을 아시리라? 그 질긴 생명력은 정말 아무도 못말린다. 장소 불문, 시기 불문. 아무 때고 어디서나 솟아나는데, 뽑고 뽑아도 사람이 질 수 밖에 도리가 없다. 그러니 어찌 제초제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버지의‘풀과의 전쟁’은 벌써 두 달째에 접어든다.‘이놈의 풀’‘이놈의 풀’소리를 아예 달고 산다. 서너 번 들어도 듣기 싫은데, 백 번을 넘게 듣는다고 생각해 보라. 그냥 내비워요. '잡초는 없다'라는 책을 쓴 농부철학자도 있어요. 걔들도 다 살자고 나왔는데, 나오는 족족 뽑아 씨를 말리면 어떻게 해요? 역시 듣는 척도 하지 않으신다. 말같지 않은 소리 말라는 뜻이다. 지난번 합배미한 밭에 돌을 골라낼 때도 그랬다. 잔자갈까지 골라내는데, 나는 하기 싫고, 행인들도“어르신, 돌도 오줌을 쌌대요. 어지간히 하세요. 너무 힘들잖아요”훈수를 두었지만, 그때마다“택도 없는 소리, 구십 평생을 농사 지어왔지만, 돌이 오줌싼다는 말은 처음 듣는다”며 일축을 해버리고 캄캄할 때까지 돌들을 골라내는 아버지가 나는 오죽하면 밉기까지 했을까.
아무튼, 늘 농사의 시작은 내가 하고, 중간과정과 끝마무리는 아무래도 아버지가 다 해주실 작정인 것같다. 게으르고 암것도 모른 아들을 잘못 둔 탓, 제발 적선하고 밭두렁에서 쓰러지시는 일만은 없어야 할 터인데, 걱정이 크다. 잘못하면 형과 동생들의‘원망’을 바가지로 들을지 모르겠다. 네가 시작을 하지 않았어야지, 아버지 성격을 모르고 자꾸 무엇무엇을 심어서 일을 하게 만드냐는 지청구가 들리는 듯하다. 그래도 오늘 처음 안 게 하나 있다. 세상에 어떤 농작물이든 농약을 치지 않으면 먹잘 게 없는데, 오직 호박과 상추만은 농약을 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아, 그렇구나. 앞으로도 진딧물 잡는 농약도 해야 한단다. 산너머 산은 언제나 끝이 나려는지, 에라이 모르겠다. 케세라 세라, 될대로 되라지. 흐흐.
*이번 주에 생긴 3건의 사건은 미담美談으로 꼭 부기해 놓아야 할 듯하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므로. 더구나 6학년 중반쯤 이르니, 자꾸 까막까막, 예전과 달리 총기가 흐려지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우리 친구들도 많이 겪어보았을 듯. ㅎㅎ.
# 툇마루에 책소포가 와 있다. 화들짝 반가워 뜯어보니, 엊그제‘찬샘통신 202회’에서 언급한 정세현 장관의 회고록『판문점의 협상가-북한과 마주한 40년』이 아닌가. 서울의 친구가‘얼른 사서 봐야겠다’는 구절에 필이 꽂혔던 모양이다. 세상에나, 만상에나, 통신을 읽고 일부러 이 책을 사서 보내주다니, 너무 고마워 전화를 걸었다. 별 것도 아닌데 무슨 전화까지 주었냐는 이 친구, 앞으로도 읽고 싶은, 사고 싶은 책 있으면 언제든 얘기하라는 것이다. 이 착한 친구는 맨날 이렇게‘착한 생각’만 하고, 곧바로 실천으로 옮기는 모양이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을, 우리는(전북이나 경남 남부 등)‘고진’이라고 부른다. 한 동네에 한두 명은 있게 마련이었다. 진짜 고진인 이 친구. 고맙고 또 고맙다. 600쪽도 넘지만, 얼른 읽고 제법 깊이있는 서평書評이나 독후감으로 그 고마움에 대신해야겠다.
# 정년퇴직을 하고도 최근 여수 어느 화학회사에 감사실장으로 취업을 한 친구가 있다. 고향이 장흥인데, 지난해 부모님을 위해 형제가 돈을 모아 멋진 양옥 2층집을 성주成主하면서, 당호堂號를 부탁해왔다. 서슴지 않고 추천한 게‘애일당愛日堂’이었다. 하여 전북 임실과 전남 장흥에 애일당 1, 2호가 등장하게 되었다. 애일당의‘애일愛日’이 무슨 뜻이고,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총명한 우리 친구들은 모두 알리라(찬샘통신 21회 참조). 이 친구의 돌연한 방문이 엊그제 있었다. 여수에서 막 끓인‘짱어탕’과 돌산갓김치, 알타리김치 1kg씩을 사갖고 1시간여를 달려온 것이다. 세상에나, 만상에나, 어찌 이런 일이? 고백하건대, 말로만 듣던 짱어탕을 처음 먹어봤다. 입에서 실실 녹는다. 이렇게 맛있다니, 명불허전名不虛傳. 아버지도 짱어탕에 밥을 말아 모처럼 배부르게 잡수신다. 아버지의‘아들 친구들 자랑거리’레퍼토리에 메뉴 하나가 추가됐다(지난 5월 일요일 오전, 아버지와 바깥 동네꽃밭을 만들고 있는데, 남원에서 선지해장국을 끓여 달려온 친구부부 얘기를‘자기 부모한테도 그리 못하겠다’며 보는 사람들에게‘아들친구 자랑’이 백 번은 넘었다).
# 여수의 친구에게 말린새우와 말린 고사리 한 봉지를 주려고 툇마루에 내놓았건만, 잠깐 집구경만 하고 가는 바람에 깜빡 잊고 말았다. 그런데, 물건의‘임자’는 따로 있는가. 친구가 떠나자마자 수원에서 변호사를 하는 10년 후배님이 전화를 했다. 처가인 남원에 내려가는 길. 총동창회 송년모임 등에서 한두 번 악수를 나눈 고등학교-대학교 후배여서 성명 석 자를 확실히 기억하는 친구이다. 애교심이 투철하다고 들었다. 장인어른이 편찮아 입맛을 잃었는데, 말린새우가 있느냐고 묻는다. 예전에 잘 드시는 걸 봤다면서. 새우이야기를‘찬샘통신’에서 읽은 게 생각난 것이다. 17번 지방국도변이기에 잠깐 들르는 것은 시간을 많이 잡아먹지도 않는‘장점’이 있다. 화들짝 반가워 마지막으로 조금 남아있는데, 오라고 했다. 미국 유학이 확정된 대학신입생 아들과 아주머니가 동행했다, 주는 물건이 빈약해 손이 부끄러웠으나, 기분만큼은 너무 좋았다. 어느 누가 이런 돌연한 전화로 아주 친하지도 않는 선배를 찾는단 말인가. 들러준 것만도 고마운 일이거늘. 가져온 커다란 수박은 네 쪽으로 잘라 유제(이웃)와 나눠 먹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아버지는 이런 미담들이 아주 이상하신 모양이다. 아들이 세상을 잘 산 것으로 생각하시는지 어쩐지는 나로선 알 수 없지만, 이것도 자랑거리일 것이다. 그것 참, 또 한번 행복하다. 내가 무슨 복이 이리 많을까. 전생에 과연 나라를 구했을까?
첫댓글 친구의 착한 마음이 나라를 구하고 친구를 구하고 이웃을 구하고 정은 정을 낳고
미움은 미움을 낳고
이말이 생각난다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