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낙원 郭樂園(1859~1939)】 "백범(白凡) 의 생모, 독정신적 물질적으로 뒷바라지"
황해도 재령(載寧) 사람이다.
백범(白凡) 김 구(金九)의 생모로서 독립운동가들을 정신적 물질적으로 뒷바라지하면서 국내 및 중국에서
조국광복을 위한 항일투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였다.
아들 김 구가 1911년 7월 22일 비밀결시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서울에 도독부(都督府)와 각 도에 총
감(總監)을 두고 중국 동삼성(東三省)에 독립운동기지를 창설, 독립군 양성을 꾀하며 황해도 대표로 활동하
다가 일경에게 피체되어 징역 15년을 받고 서대문(西大門)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있을 때, 아들을 면회
하러 와서 조금도 슬픈 기색을 보이지 않고 위로하며 집 걱정은 하지 말도록 당부하면서 하루 2번씩 사식
을 제공하는 등 뒷바라지를 하였다.
그 뒤 김 구가 1922년 중국 상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경무국장(警務局長)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 상해로 가서 때로는 조석이 어려워 중국사람이 버린 쓰레기통에서 배추잎을 주워 끼니
를 이어오면서도, 생활비를 절약하여 저축한 돈과 생일축하금으로 단총 2자루를 구입하여 독립운동에 쓰도
록 제공하였다. 상해에서 고난을 겪으며 독립운동을 뒷바라지 하다가 1925년 12월 황해도 안악(安岳)으로
돌아와서 생활비를 절약하여 아들 김 구에게 송금하며 계속 독립운동하도록 지원 격려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가 날로 심하여지자 1934년 3월 19일 손자인 김 인(金仁:당시 18세)과 김 신(金信:당시
13세)을 데리고 일경의 감시를 피하여 황해도 안악(安岳)에서 재령을 경유하여 상해로 탈출하는데 성공하
였다.
상해에 도착한 후 장손인 김 인을 군관학교에 입교시키는 한편,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中央軍官學校 洛陽
分校)에서 군사훈련중인 청년 20여명의 병영생활을 돌보는 등 아들과 더불어 고락을 같이하다가 병을 얻
어, 1940년 4월 26일 평생 소원이던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중국 사천성(四川省) 중경(重慶)에서 사망하
였다.
14세 때 황해도 해주의 산골인 백운방 텃골에 살던 안동 김씨 김순영(金淳永)과 결혼하였다. 두 집안 모두 어려웠다. 결혼도 세 성씨가 혼기의 자녀를 서로 교환하는 ‘삼각혼’이라는 방법으로 하였다. 17세 때 아들 김구(金九, 1876~1949)를 낳았다.
1896년 3월 아들 김구가 치하포에서 일본 육군 중위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처단한 일을 계기로 그의 삶도 바뀌었다. 김구가 그해 6월 해주에서 체포된 후 인천감리서로 이송되어 재판을 받고 투옥될 때 아들을 따라갔다. 인천 박영문(朴永文)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며, 1898년 3월 김구가 탈옥할 때까지 2년 가까이 아들의 옥바라지를 하였다. 1911년 김구가 안명근(安明根, 1879~1927)의 독립운동 자금 모집을 계기로 황해도 일대의 인사들이 체포된 안악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감옥에 투옥되었을 때에도, 1915년 8월 가출옥할 때까지 옥바라지하였다.
1922년 아들 김구가 있는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앞서 1919년 3월 김구가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1920년에는 며느리 최준례(崔遵禮), 손자 김인(金仁, 1917~1945)과 함께 상하이로 갔다. 1924년 1월 며느리 최준례가 둘째 손자 김신(金信, 1922~)을 낳은 지 얼마 안 되어 사망한 후, 어린 두 손자를 키웠다. 임시정부의 경제 상황이 어려워지고, 거기에 아들도 임시정부에 매달려 가정을 돌보지 않아 손자를 키우는 일이 어렵게 되자, 고향에 가면 굶지는 않을 것이라며 1925년 11월 손자를 데리고 귀국하였다.
1927년 9월 맏손자 김인도 국내로 왔다. 김홍량(金鴻亮) 등의 도움을 받았지만, 두 손자를 키우며 힘겨운 생활을 이어갔다. 일제 경찰로부터 김구와의 연락을 추궁당하는 등 끊임없는 감시를 받기도 하였다. 특히 1932년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결행된 후, 일제 경찰의 감시가 훨씬 심해졌다. 1934년 4월 두 손자를 데리고 국내를 탈출하여, 김구가 피신하고 있던 자싱(嘉興)으로 갔다.
가족사진(가운데 곽낙원, 1934) [판형3] |
아들 김구를 만났지만, 함께 지낼 형편은 아니었다. 이동녕·이시영·조성환·엄항섭 등 임시정부 요인 및 그 가족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정정화(鄭靖和, 1900~1991)·김효숙(金孝淑, 1915~?) 등은 그를 ‘매섭고’ ‘대범하고’ ‘절제되고’ ‘소박한‘ 어른으로 존경과 공경을 받았다고 회고해 놓았다. 돈을 허투루 쓰지 못하게 하고, 돈이 생기면 임시정부에 주어 권총을 사게 하거나 청년들에게 총 대신 붓으로 일본과 싸우라는 의미로 만년필을 사 주었다고 한다.
임시정부에서 특별한 직책을 맡거나 활동을 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함께 생활하였던 정정화는 “그분이 젊은 사람처럼 독립운동을 한다 하여 여기저기 뛰어다닐 것도 아니요, 임정의 일을 나서서 지휘하고 감독할 것도 아니었지만, 그 한 분이 우리 가운데 말없이 앉아 계신 것만 해도 우리에게는 큰 힘이 되었고, 정신적으로도 우리의 큰 기둥이 되기에 충분하였다”라고 회고하였다. 이처럼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이 결속하고 어려움을 극복해낼 수 있는 ‘기둥’과 같은 존재였다.
자싱에서 임시정부 요인 및 가족들과 함께 지내기 시작한 이래, 줄곧 이들과 함께 지냈다. 난징(南京)으로 가서 머물다가 중일전쟁을 맞았다. 일본군이 난징을 침략해 오자 임시정부와 함께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로 옮겨갔고, 다시 광둥성(廣東省) 광저우(廣州), 광시성(廣西省) 류저우(柳州)로 피난하였다. 1939년 4월 류저우에서 충칭(重慶)으로 이동할 때, 인후염에 걸리고 말았다.
병이 심해졌지만, 아들 김구는 중국 정부와 교섭하느라 직접 돌볼 처지가 아니었다. 창장 남안(南岸)에 거주하던 김홍서(金弘敍, 1886~1959)가 모셨고, 만현(萬縣)에서 병원을 열고 있던 유진동(劉振東)이 치료하였지만, 1939년 4월 26일 81세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충칭의 화상산(和尙山)에 안장되었다가 1948년 손자 김신이 유해를 국내로 모셔왔고, 국립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