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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천리 길을 걷노라면(첫 번째)
(뜬봉샘→진안 감동마을, 2016. 5. 28∼5. 29)
瓦也 정유순
지리산 바래봉 아래에 있는 전라북도학생교육원에는 5월 하순의 더위를 식히려는지 새벽부터 빗방울이 떨어진다. 그래도 지리산 정기를 받아들여서 몸은 가뿐하다. 왜구(倭寇)가 극성을 부리던 고려 말에 장군 이성계가 황산대첩(荒山大捷)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 지금 우리가 달리고 있는 남원시 운봉 땅이다. 운봉은 해발 500m이상의 고원지대로 모내기가 빠른 곳이라 논마다 벼는 땅 맛을 알아 뿌리를 깊게 박고 실하게 자란다.
<전라북도학생교육원>
장수군 번암면을 지나 금강과 남원요천(섬진강)으로 물을 가른다는 수분치(水分峙)를 넘는다. 수분마을 옆에 있는 ‘뜬봉샘생태공원’에 도착하여 ‘금강 천리 길 대장정’을 위한 의식을 올리고 금강이 시작되는 뜬봉샘으로 향한다. 올라가는 길은 데크계단으로 정비를 하였고 주변에 금강사랑물체험관과 자연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여 자연과 환경에 대한 인식을 높일 수 있는 장(場)이 마련되어 있다.
<금강사랑 물체험관>
<뜬봉샘생태공원>
물레방앗간 앞을 지나 하얀 꽃 만개한 산딸나무의 도열을 받으며 숨 가쁘게 올라간다. 용출되는 물의 양은 적지만 물은 계속 흘러나와 내(川)를 이룬다. 바로 이곳이 금강천리길이 시작되는 곳 뜬봉샘이다. 뜬봉샘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백일기도 마지막 날 새벽 단에서 조금 떨어진 골짜기에서 떠오르는 무지개를 타고 오색영롱한 봉황이 공중에서 ‘새 나라를 열라’는 하늘의 계시를 듣고 이곳의 샘물로 제수를 만들어 천재를 모셨는데, 봉황이 떠오른 이 샘이 ‘뜬봉샘’이 되었다고 한다.
<물레방아>
<뜬봉샘>
신무산(897m) 북동쪽 계곡 중턱에 있는 뜬봉샘(780m)은 ‘뜸봉샘’이란 이름도 갖고 있다. 이는 옛날 봉화를 올릴 때 고을의 재앙을 막고 풍년을 기원하기 위하여 이 산에 군데군데 뜸을 떠서 ‘뜸봉샘’이란 설도 있고, 고려태조 왕건이 만든 훈요10조 중 8조에 나오는 “차령(車嶺)이남이나 금강 외는 산형지세가 반역의 형세니 인심 또한 그럴 것”으로 생각하고 지세가 강한 곳에 뜸을 떠서 ‘뜸봉샘’이라는 설이 있으나, 필자는 장수군의 의견에 따라 ‘뜬봉샘’으로 하기로 한다.
금강은 북으로 흐르다가 충북 옥천과 청주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바뀌어 세종시, 공주시, 부여군, 논산시 등으로 휘어져 가는 모양이 송도를 향하여 활을 당기는 모양이라 ‘반역의 강’이란 오명을 갖고 있다. 그러나 비단결 같은 아름다운 금강을 발원지인 뜬봉샘에서 천리 길을 시작한다는 의미가 더 남다르고 더 감동이다.
뜬봉샘에서 솟은 물은 강태등골이란 첫 실개천을 만든다. 강태등골을 시작으로 1.5㎞를 흘러 수분천으로 이어지며, 수분천은 5.5㎞를 흐르며 이웃의 실개천과 합류하여 금강으로 이어진다.
뜬봉샘 올라갈 때 까지 드문드문 내리던 빗방울이 내려올 때는 멎는다. 숨 가쁜 오르막길 보다 내리막길은 한결 여유롭다. 시인 고은의 “내려올 때 보았네/올라갈 때 못 본/그 꽃”이란 시처럼 오라갈 때 못 본 백당나무 꽃, 고광나무 꽃, 붉은색 찔레꽃들이 환하게 반겨준다.
<백당나무>
<고광나무>
<붉은색 찔레꽃>
백당나무는 산수국처럼 가장자리에 가짜 꽃잎을 내세워 벌과 나비 등 매개체를 유혹하여 수분(受粉)을 하며, 고광나무는 찔레꽃과 비슷한데 가지에는 가시 대신 솜털이 있고 쌍떡잎식물이다. 주변의 밭에는 사과나무는 밤톨 만하게 열매가 맺혔고, 오미자도 머루열매처럼 소복하게 매달렸다. 장수사과와 오미자는 품질 좋기로 소문이 나서 인기가 높다.
<사과나무>
<오미자>
길이 고르지 못한 수분천을 따라 장수 삼절(三節)의 한분이신 의암 논개(義巖 論介)사당 까지 내려온다. 논개(1574∼1593)는 장수의 양반 딸로 태어나 당시 장수현감이던 최경회(崔慶會)의 후처로 들어갔다. 최경회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병사로 진주성에서 싸우다가 진주성이 함락될 때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이에 논개는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생으로 위장하고 참석하여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껴안고 남강에 빠져 적장과 함께 죽었다.
<논개 영정>
사과모형으로 앞면을 조형한 ‘장수한누리전당’ 앞에서 의암호 수상데크를 통해 논개사당 쪽으로 가로질러 간다. 사당 앞 넓은 정원에서는 야외 결혼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새 출발하는 가정에 오월의 실록처럼 풍성하기를 바라며 진심으로 축하를 보낸다. 숭앙문(崇仰門)을 지나 연도를 따라 계단을 오르고 중앙에 태극이 그려진 휘광문(揮光門)을 통과하니 논개의 영정이 모셔진 의암사(義巖祠)가 나온다. ‘義巖祠’란 현판은 을미년(1955년) 초가을에 당시 부통령인 함태영(咸台永, 1872∼1964)이 쓴 글씨로 추정된다.
<의암사>
<결혼식 장면>
담벼락에 노란 장미가 화려한 식당에서 오전을 마감하고 노하 숲에서 잠시 숨을 고른 다음 금강 하천 길로 접어든다. 노하 숲은 조선 초기 명재상이었던 황희 정승의 아버지께서 고려 말 장수현감으로 재직할 때 조성하였다고 전해지며, 그때 황희의 어머니는 훌륭한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치성을 드리며 심은 나무가 오늘의 숲이 되었다고 한다.
하천습지가 조성된 길을 따라 북으로 올라오니 장수군 천천면(天川面)이다. 실개천이 하류로 내려오면서 하천 폭이 점점 넓어지고 중간 중간에 보를 만들어 물이 어느 정도 고이면 자동으로 흘러가게 하여 하천의 모습이 만들어져 가고 있다. 천천면 장판리 금강 변에는 타루비(墮淚碑)가 모셔진 타루각이 나온다.
<타루각>
타루비는 장수현감과 생사를 함께 한 어느 관리의 절의(節義)를 기리기 위해 조선 순조 2년(1802년)에 세운 것이다. 어느 날 현감이 말을 타고 장척마을 옆을 지날 때, 주변의 꿩이 말(馬) 소리에 놀라 하늘로 날았고 말도 꿩의 훼치는 소리에 놀라 현감과 함께 절벽 옆 연못에 빠져 죽었는데, 수령을 수행하던 관리는 자신의 잘못으로 현감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손가락을 잘라 “墮淚”(타루,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바위에 통탄의 눈물을 흘린다는 뜻)라는 글자를 새기고 물속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전한다.
<타루비각>
<타루추모비>
타루비각 안에는 “殉義吏白氏墮淚追慕碑(순의리백씨타루추모비)”라고 쓰인 비석이 있고, 공원 안쪽 옆으로 ‘타루각(墮淚閣)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연못 위 절벽에는 말이 떨어지는 모습이 양각(陽刻)되어 있다. 그러나 도로가 나고 타루비 지역을 조성하면서 얼마나 정확한 고증을 거쳤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의리 백씨(義吏 白氏)와 논개, 그리고 정유재란 때 장수향교를 지킨 충복 정경손(忠僕 丁敬孫)을 장수 삼절(長水 三節)이라 하는데, 정충복의 비가 있는 장수향교는 들르지 못했다.
타루각을 나와 다시 금강을 따라 앞으로 나아간다. 물이 얕은 하천에서는 1급수에서만 산다는 다슬기를 채취하는 사람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너와로 지붕이 된 효자정문(孝子旌門)도 보이고, 멀리 익산∼장수 간 고속도로 고가다리가 보인다. 고가다리에서 가까운 곳에는 장미를 집단 제배하는 대규모 온실이 자리한다.
<효자정문>
<장미시설제배 단지>
<익산~장수 간 고속도로>
천천면 춘송리 도로변 그늘에서 지인이 사준 아이스크림으로 더위를 식히며 숨을 돌린다. 마을을 가로 질러 13번 국도를 따라 금강과 장계천이 만나는 용광삼거리를 거쳐 진안 쪽으로 가는데 천천1교 부근에는 벼락을 맞았는지 하늘로 솟구치지 못하고 가지를 땅을 향해 밑으로 축 늘어뜨린 수령 300년 된 소나무가 외롭게 서있다.
<장계천과 금강이 만나는 합수지점>
<소나무-보호수>
포장이 잘된 국도를 따라 걷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가끔 지나가는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이나 걸어가는 사람이나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리라. 그래도 우거진 녹음이 피로감을 늦춰주는 것 같다. 가을이면 제철 맛을 전해주는 다래넝쿨의 꽃이 잎 사이로 수줍게 얼굴을 내민다. 해가 옆으로 더 기울기 전인 천천면 연평리에서 오늘을 마감한다.
<금강변 포장도로>
<다래 꽃>
새벽에 몇 방울의 비가 떨어지다 그친다. 쌍암마을에 도착하여 새로 내는 길을 따라 하천 제방으로 들어선다. 앞서 가던 일행 일부는 하천의 바위를 따라 들어갔으나 그중 일부는 제방으로 되돌아 나오고 일부는 길을 만들며 전진한다. 나는 언덕 위로 난 길을 따라 우회하다가 논둑으로 들어서서 제방까지 나오는데, 풀 섶이 우거진 가파른 옹벽을 타고 어렵게 내려와 물길 사이가 넓은 보를 건너 726번 지방도로로 나온다.
<공사 중인 길>
<길을 막은 하천 바위>
<하천 보>
다시 726번 지방도로를 따라 하류로 조금 내려오니 ‘하늘내들꽃마을’이 나오고, 하천 건너 녹음이 짙은 숲에는 백로가 한가로이 휴식을 즐긴다. 길옆의 감자 밭에는 자색 꽃이 환하게 피었고, 평지마을 입구에는 금강을 향해 허리가 90°로 굽은 느티나무가 당산을 지킨다.
<백로의 휴식>
<자색감자 꽃>
<평지마을 보호수-느티나무>
하류로 더 내려와 연화교를 건너 천천면 연평리 연화마을이 나온다. 연화마을 뒷산은 ‘청나라사람 변발’한 것처럼 숲의 피부를 벗겨버렸다.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수종을 개량하기 위한 목적일 것이다. 그러나 숲의 생태를 망가뜨리면서 까지 하여야 할 긴박한 사연이 있는 것일까? 그 안에서 평화롭게 살던 수많은 생명들은 어찌하란 말인가? 인간 위주로 생각하지 말고, 하찮은 생명일지라도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행정을 집행한다면 하는 간절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숲의 피복을 벗겨버린 산>
연화마을 뒤 언덕에는 연파정(蓮坡亭)이란 정자가 있다.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들어가는 입구가 잡초로 막혔다. 더듬더듬 찾아 들어가 건물을 보니 빛바랜 현판만 보인다. 원래 정자(亭子)란 산천경치가 좋은 곳에서 주변경치를 감상하고 풍류를 즐기며 쉬기 위해 지은 건물로 여유로운 사람들의 쉼터다. 그러나 금강을 따라 내려오면서 처음 맞이하는 정자라서 그런지 반갑다. 연화마을 어느 집 울타리에는 낯달맞이 꽃이 화사하게 피었는데, 그 옆의 홑잎 장미가 더 화려하고 매력적이다.
<연파정>
<연파정 현판>
<홑겹 장미>
<낯 달맞이 꽃>
다시 연화교를 건너나와 하천을 따라 하류로 계속 걸어간다. 도로를 우로 돌아 꺾어지는 외진 곳에는 양산 같은 모양의 한그루의 소나무가 외롭게 서있다. 가막교를 건너기 전 신기마을에는‘우리의 전통과 예절을 교육’하는 장수 명륜학당 표지판이 보인다. 가막교를 건너며 위쪽으로 보이는 단애는 한 폭의 동양화다.
가막교를 막 건너니 전북 진안 땅(진안읍 가막리)이다. 지방도로 49번을 따라 천반산자연휴양림 입구를 약2㎞ 이상 지점을 가막리에서 진안군 수동면 상전리 산 13 번지 지점까지 버스로 이동하여 절벽 위로 올라간다. 그강의 단애(斷崖)도 영월 동강 못지않다. 우선 정면으로 보이는 천반산(千盤山, 647m)의 서북으로 뻗은 모습은 한반도 지형의 반대형상이다.
<죽도를 조망하는 단애>
<거꾸로 된 한반도 지형>
그리고 구량천(九良川)과 금강이 산지 사이를 휘돌아 돌며 감입곡류(嵌入曲流) 형상으로 섬 같이 되어버린 죽도(竹島)가 한눈으로 쏙 들어온다. 죽도는 조선조 선조 22년(1589년)에 일어난 조선 최대의 당쟁비극인 기축옥사(己丑獄死)의 주인공 정여립(鄭汝立)이 최후로 맞이한 곳이다. 사건의 전말이나 진위여부를 떠나서 이 사건으로 정여립 본인과 반역(叛逆)의 고장으로 인식되어 인재등용에서 배제된 호남지방의 전체로 보아 비극의 역사임에는 틀림없다.
<죽도 전경>
두 귀를 쫑긋하며 반갑게 맞이하는 마이산을 바라보며 진안읍내로 이동하여 점심식사 후 ‘인삼의 고장’으로 각광받고 있는 진안재래시장을 잠시 둘러보고, 용담호 주변인 진안군 정천면 갈용리에 있는 천황사로 간다. 천황사(天皇寺)는 신라 헌강왕 원년(875년)에 무염(無染)스님이 처음 세웠으며,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다시 세웠다. 대웅전의 단청은 퇴색하여 빛바랜 자연목 색조를 띄고 있다. 그리고 입구에는 수령 800년이 넘은 전나무가 흘러간 세월을 대변한다.
<천황사 대웅전>
<800년 전나무-보호수>
용담댐으로 수몰된 지역민들의 한을 담은 ‘용담망향의 동산’에는 3층 팔각정이 우뚝하고, 운장산 밑으로 도수(導水)터널을 뚫어 용담호 물을 만경강으로 퍼 나르는 취수탑이 멀리 보인다. “우리고장∙용담, 울 가슴에 묻고서”로 시작하는 ‘망향의 노래비’가 망향탑과 함께 서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영조 28년(1752년) 현령(縣令) 홍석(洪錫)이 세운 태고정(太古亭)이 용담호 수몰지역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이전하여 세워졌다. 그리고 수몰지역 안에 있던 지석묘군도 태고정 옆으로 이전했다.
<도수터널 취수탑>
<망향정>
<태고정>
<지석묘 군>
용담다목적댐은 일제강점기에 검토되었으나 해방 후 1990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2001년 10월에 준공되었다. 용담호의 물은 도수터널을 통해 만경강으로 보내져 전주, 군산, 익산 등지의 생활∙공업∙농업용수뿐만 아니라 수력을 이용한 전력도 생산하고 있다. 용담댐 앞을 지나 섬바위로 이동한다.
천년송을 머리에 이고 강바닥에서 솟아오른 것 같은 섬바위는 금강을 흐르는 온갖 역사와 풍상을 이야기 하는 것 같다. 물살은 잔잔하여 숨소리조차 내기 힘들 정도로 수면이 너무 고요하다. 마치 수도승이 기도하는 절간처럼 조용한 명상의 강이다.
<섬바위>
폭이 좁은 여울을 지날 때는 맑은 소리로 자연을 노래한다. 강변을 따라 때론 부드럽게 때론 가파르게 오솔길을 따라 가노라면 녹음이 우거진 숲속에서 짝을 찾는 뻐꾸기 노래하고, 햇빛에 반짝이는 물비늘은 밤하늘의 은하수 같다. 감동실개천공원에서는 잠시 탁족(濯足)을 하며 어제 뜬봉샘부터 감동마을까지 걸어오며 쌓인 피로를 한방에 확 날려버린다.
<금강의 물여울>
<감동실개천공원>
<탁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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