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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וָאֵרָא 바에라" 금요설교 in 쿠웨이트 / 다비드리 목사 - 아래를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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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era Sermon in Kuwa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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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וָאֵרָא 바에라" : 1월 넷째 주 토라포션 in 5780
출6:2-9:35(To), 겔28:25-29:21(Haft), 롬9:14-33(Brit), 막4:1-6:13(신약), 왕하1:1-5:27(Ke), 스1-10(Ne)
2부 예배 미리암 자매
주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신다.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지시는 주간을 지나고 있다.
וארא 바에라 --> בא 보
바에라 : (알렢; 주체가 나) 내가 보여지다, 나타나다.
보 : Come
출6
2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이니라
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었다, 그러나 야훼의 이름의 하나님으로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그동안 주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나타나셨지만, 오늘 우리에게 다시 나타나시길 소망한다. 내가 이미 보았다 하는 자는 절대 보지 못한다.
제가 저희 남편을 매일 보는데 연애를 갓 시작했을 때, 막 결혼한 신혼 초에 저는 저의 남편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었다. 나한테 잘 하는 것, 나한테 잘 못하는 것 이러한 남편의 behavior 을 가지고 이것을 남편의 나타남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것은 진짜 나타남이 아니다. 이것을 존재의 나타남이라고 하지 않는다.
내가 정말 남편을 잘 모르는구나, 이것을 깨닫자 남편에 대한 앎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지독히 싫어했던 납달리의 생명과 결합하기 시작했다. 제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지파가 있는데, 바로 저희 남편의 납달리이다. 정말 제 멋대로 인 것 같았다. 지금은 회개하고 있는데, 흔히들 사람을 만나면 납달리 지파가 제일 싫다고, 목사님도 지파의 대한 설명을 하실 때 납달리 지파를 빼먹으시는 것을 보면서 나와 같은 마음이시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판단하고 정죄하고 싫어했던 모습들이 결코 남편의 진짜 생명이 아니였음을 깨닫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아버지가 남편에 대해서 하시는 말씀이 들리기 시작했다. 남편을 비추는 빛이 제게 비춰지게 되었다. 나에게 남편은 한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남편을 보았던 것은 남편의 어떤 능력이였다. 잘 하느냐 못 하느냐, 이것을 보면서 계속 남편을 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남편과 절대 결합함이 일어나지 않았다.
ידה 야다 : 앎, 결합하다
이것은 단순한 결합이 아니라 성관계의 결합이다. 완전히 깊은 곳 까지 하나되는 것이다. 우리는 매년 바에라 기간에 야훼 이름으로 나타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분은 애굽의 신을 부수는 위대한 전쟁, 그 중심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그전에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일이 바로, 우리가 야훼를 모르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출6:3
וָאֵרָא אֶל־אַבְרָהָם אֶל־יִצְחָק וְאֶל־יַעֲקֹב בְּאֵל שַׁדָּי וּשְׁמִי יְהוָה לֹא נֹודַעְתִּי לָהֶם 바에라 엘 아브라함 엘 이쯔악 베엘 야아콥 베엘샤다이 우슈미 야훼 로 노다아티 라헴
주님은 우리에게 야훼로 나타나십니다. 그동안 전능자, 엘샤다이로 나타나셨지만, אל שׁדי 엘 샤다이란, 형상을 가르쳐주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시는 것이다.
이분은 창조의 하나님이다. 우리에게 본질을 주시는 분, 단 하나의 형상이 있다, 이 삶으로 너희가 들어오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엘 샤다이의 하나님이다. 그래서 이 엘 샤다이를 전능자 라고 해석한다. 그분의 능력이 나타난다.
그렇지만 이것은 존재적 앎을 가르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존재적 앎은 다 그분의 본질, 성품을 아는 것이다. 그분의 어떠하심과 결합하는 것이다.
벧후1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다 하지만, 사실 그분을 보는 삶이 무엇 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런데 주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우리가 치열하게, 피흘리기 까지 싸워야 하는 것이냐 하면, 주님의 성품이 아닌 나의 성품이 이미 단단한 틀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전쟁을 치루게 되는 애굽이라는 스테이지가 중요한데, 바로 מצרים 미쯔라임이다. 이 단어는 יצר 야짜르라는 어근을 가지는데 forming, 형성된, 조성된 어떤 틀을 이야기 한다.
7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니미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우리는 다 받는 의지로 창조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애굽이라는 forming이 바로 for me 라는 것이다. 나의 받으려는 의도와 목적이 나 자신인 형태로, ‘나’ 라는 옛 자아가 단단히 고정된 틀이 되어 내가 무엇을 받았냐, 내가 무엇을 가졌냐로 나의 생명을 결정하고, 다른 사람의 생명을 결정해 버린다. 이 애굽에서는 무엇을 담아도 나를 위해 받는 모양, 그 틀만 나온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나타나셔서 하시는 중요한 일이 우리로 하여금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빼내시는데, 히브리어로 보면
מִתַּחַת סִבְלֹות מִצְרָיִם 미타카트 씨블림 미쯔라임 : 애굽의 노역 아래에 있다.
미타카트 : 아래에 있다
씨블림 : 노역
씨블림; 애굽이 주는 평가 아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애굽이 주는 평가 아래에서 나를 평가하고 상대를 평가하는 생명 속에서 살고 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바로에게 가서 이야기한다. 그런데 바로가 하는 일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노역을 고되게 한다. 우리는 쉽게 생각했을 때 나에게 고역이 많아지고, 내가 하는 일이 힘들어지면 주님을 찾을 것 같지만 사실 우리는 주님을 더 찾을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애굽의 평가가 더 쉽다. 나를 어떤 틀에 교정해 놓으면 그 누구도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애굽의 틀이다.
내 속에 하나님의 성품, 완전히 새로운 form이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애굽의 평가를 벗어난 새로운 생명의 틀로 절대 나아가지 못한다. 그러면 자신을 향한 평가로 자신의 사연을 만들어 자기 역사 속에서만 살게된다. 그렇기에 주님은 전쟁을 선포하신다. 여기서는 절대 하나님과 결합 할 수 없다는 것이다.
7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니미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וְלָקַחְתִּי 베라카흐티 --> 라카크 : 취하다
라카크, 결혼의 언어 라고 배웠다. 오직 신랑만이 신부를 취할 수 있다. 주님은 내가 너희를 취할 것이라고 하신다. 이것이 야훼가 행하시는 일입니다. 애굽의 노역 가운데에서, 세상의 평가 가운데에서 너희를 데리고 올 것이다, 이것은 바로 전쟁이다. 결혼은 전쟁이다! 이것은 위대한 전쟁 입니다. 결합은 정말 치열한 전쟁과 같다. 그러나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신부로 취하신다는 것이다.
저희 남편과 제가 정말 전쟁하면 기가 막히게 하는데 그때 마다 우리의 형상 귀신의 형상을 부수는데 이 전쟁이 사용되어 짐에 감사하다. 이것이 야훼의 전쟁인 것이 우리에게 구원이다. ‘야’의 손이 임하는데, 이 분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조성되신 예슈아, 예수 그리스도이다. 우리는 그분의 스토리 속에서 주님을 알 수 있고 야훼의 성품과 결합하고 살아내는 것이다. 이 시간 애굽의 형상, 틀을 부수시고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프로세스를 함께 보기 원한다.
바에라는 일곱 가지 재앙을 이야기한다.
애굽의 form
애굽의 일곱 재앙 : 피 / 개 / 이 / 파 / 악 / 악 / 우
하나님의 form
벧후 1
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믿음 / 덕 / 지식 / 절제 / 인내 / 경건 / 형제우애 / 사랑
1. 피 재앙
출7
20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여 바로와 그의 신하의 목전에서 지팡이를 들어 나일 강을 치니 그 물이 다 피로 변하고
21 나일 강의 고기가 죽고 그 물에서는 악취가 나니 애굽 사람들이 나일 강 물을 마시지 못하며 애굽 온 땅에는 피가 있으나
피는 히브리어로 דם 담, 진리에 관한 것이다. 피가 가지는 속성이 나의 진리, 나 선악을 분별하는 진리이다. 사람은 내게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가지고 진리라고 이야기 한다. 이 확신으로 나의 왕국을 세워 다른 생명이 살지 못하게 한다. 과학적으로도 실제로 피가 섞이게 되면 죽게된다. 그래서 주님이 오셔서 하시는 것도 자신의 피를 다 쏟아 부으시는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어둠의 틀, 귀신의 형상이 쏟아내짐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나는 악취는 어마어마 하다.
그러나 이것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성품은 “믿음” 이다. 하나님 מלכות 말쿠트, 왕국의 기초이다. 이 나라는 우리가 가져야 할 하나의 믿음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얻을 수 있게된다. 하나님 나라는 죽지 않는 생명이 사는 곳이다. 그래서 그 생명나무에서 나오는 물이 온 만국을 소생시킨다.
계22
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살게 하는 믿음이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나의 피를 다 쏟아내는 하나님의 전쟁 가운데로 다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2. 개구리 재앙
개구리의 특성 : 차갑다, 아비를 모른다.
개구리가 애굽 땅에 올라온다. 애굽에서 개구리는 풍요와 다산의 신이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쏘드(기초, 비밀)와 깊은 관련이 있다. 개구리 재앙은 다 자기 만족, 자신의 기쁨을 위해 결합한다. 그렇기에 그 무엇도 책임지지 않는다. 쏘드를 이용해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면 이 곳이 바로 소돔이 된다. 여기서 모든 물질 세계를 나를 기쁘게 하는데 사용한다. 음행이란 자기 사랑이다.
여기서 풀어지는 하나님의 성품은 덕인데, 덕은 다 목적이 다른 존재에게 있다.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마음을 덕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생명은 다 결합을 위해 존재한다. 이 비밀을 통해 이웃과 하나되는 하나님의 성품을 덕 이라고 한다.
3. 이 재앙
땅의 티끌을 치니 이가 되어 사람과 가축에게 오른다.
עפר 아파르 : 티끌
우리가 티끌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잊을 때, 우리는 모든 물질 세상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려고 한다. 이는 다 빨아들인다. 자기만을 위해서 빨아들이기에 많은 것도 필요하지 않는다. 자기 배만 불리다 죽어 버린다.
여기에 속한 하나님의 성품은 지식인데, 이것은 다 더맨의 지식이다. 한 사람의 지식. 이 지식 만이 우리를 예쉬 리 콜 이라고 외치게 한다. 더 이상 나를 위해, 많은 것을 갖기 위해 빨아드리지 않아도 된다. 전체 속에 한 피스로 만물을 소유한 삶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호드, 감사하는 것이다. 호드는 감사, 겸손이다. 이는 히브리어로 키님인데, 여기에 켄이라는 단어가 숨어있다. 겸손한 자의 특징은 예스 하는 것이다.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다. 이 재앙 속에서 예스 하시길 축복한다. 제자 훈련의 가장 핵심은 예스 하는 것이다. 나를 위해 빨아들이는 것을 멈추고 호드 할 때, 감사할 때 우리는 더맨의 지식 속에서 한 피스 부분으로 존재하는 삶으로 나아가게 된다.
4. 파리 재앙
무수한 파리가 바로의 궁과 그의 신하의 집, 온 애굽에 이르는데, 그 이르는 것만으로도 그 땅이 황폐해진다.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어가, 티싸헤트, 싸하트 인데, 오염되고 변질되는 것을 의미한다. 파리가 무엇인데 땅을 오염시키고 변질시키냐면, 에레브: 자기 기쁨, 자기 만족이다. 그런데 여기에 또 다른 뜻이 “섞다” 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생각을 마구 섞어 버린다. 이것이 짐승이 되어 온 땅을 황페하게 한다. 생각을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하는 것보다 더 우리의 마음을 황폐하게 하는 것이 없다. 이것을 망상, 허상이라고도 하는데, 우리 속에 있는 이 망상이 얼마나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 리더와 제자와의 관계를 쉽게 파괴하고, 남편을 잡아먹는 집승이 되는지 모른다. 저희 부부가 싸우고 목사님께 찾아가면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이, 상대방의 말을 즈블론의 언어로, 제 남편에게는 저의 말을 납달리의 언어로 가져와 섞어버리지 말라는 것이다. 파리는 정말 지독하고, 무서운 재앙이다.
남편이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갔었다. 그 친구에게 토라를 소개하고 영의 아버지를 만나게 해주고 싶어했다. 비장한 마음으로 제게 기도부탁을 하며 남편은 친구를 만나고 돌아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남편이 친구와 나눈 이야기가 순간 제게 거슬렸다. 남편 친구가 의사인데, 준*처럼 레지던트 생활을 하고 있는데, 예전부터 만나면 그 친구가 남편에게 병원을 차리면 같이 일하자고 이야기 했었고, 이번에도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남편이 그래, 돈만 만이 줘, 병원 키워줄께~ 라고 한 이야기를 듣는데, 순간 화가 났다. 아니 자기 직업을 아직도 자기가 결정하나? 저희가 결혼한지 만 3년, 직업이 5번이 바뀌었는데, 아직도 저런 허왕된 생각을 하나, 이해가 안되었다. 남편이 아무리 설명을 해주어도 전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남편의 말을 나의 듣기 좋은 방식, 내게 익숙한 틀에 넣어 섞어 버린 것이다. 사실 남편에게는 정확한 목적이 있었다. 한 생명을 얻는 것, 그 친구를 얻는 것이 남편의 최고의 목적이었기에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남편만의 방식이고 표현이었다. 그 누구도 쉽게 하지 못하는 말을 저희 남편은 천연덕스럽게 한다. 그리고 그 말 한마디로 존재를 얻어 버린다. 그 친구가 유일하게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고, 힘들 때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이 저희 남편이다. 아버지의 뜻을 전달 하기 위한 관계를 쌓는 남편이 참 존경스럽다.
우리는 아주 쉽게 이웃을, 이웃의 말을 나의 언어로 섞어 버린다. 왜냐하면, 이것을 통해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함이다. 이 파리 떼는 우리의 마음에 씽크홀을 낸다. 깊은 구멍을 내어 결합을 위한 생각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막는다.
이 망상의 재앙을 끊을 수 있는 하나님의 성품, 그 반대편의 성품이 바로 절제이다. Self- control 자기 멋대로 하는 생각을 멈춰야 한다. 이것이 우리에게 영원한 승리를 준다. 우리는 먼저 일어설 수 있어야 한다. 우리로 하여금 일어서지 못하게, 주저앉게 하는 사단의 틀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감사함으로, self-control 으로 자기 생각을 제어하며 나아가시길 축복한다.
5. 악성 전염병
- 심한 돌림병이 발생한다.
데베르 카베드
데베르는 다바르, 말이다. 나의 말에 무게를 두는 것이다. 이것은 악성 전염병과 같아서 전체를 흩어지게 한다. 피부병의 특징이 함께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격리되고, 분리되게 한다. 자기의 말에 무게를 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은 안 된다는 것이다. 넌 이래서 안되, 이것을 악한 말 이라고 한다.
모세는 다 토라를 설명한다. 하나님의 형상에 무게를 둔다. 심지어 토라를 가지고 자기를 설명한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이에게 토라를 잣대 삼아 이야기 한다. 이것으로 얼마나 상대방이 죽어가는지 모른다. 육아를 하다보면, 나의 말에 얼마나 힘이 실리는지 모르겠다.
이 악성 전염병은 가슴에 위치하는데, 샤다이의 영역이다. 여기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성품은 인내인데, 인내는 결국 나의 말에 무게를 두는 것이 아닌, 모든 것을 씨앗으로 보는, 하나님의 말에 무게를 두는 것이다. 이 성품은 우리로 하여금 인내하게 한다. 이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이다. 아이가 젖을 빠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우리의 모든 말이 씨앗을 보는, 씨앗을 움트게 하는 말이 되길 원한다.
6. 악성 종기
화덕의 재 두 움쿰을 가지고 바로의 목전에서 하늘을 향하여 날리니 그것이 악성 종기가 된다. 악성종기는 히브리어로 아바크 인데, 같은 어근을 가진 단어가 바카크 이다. 파괴하다는 뜻을 가진다. 하나의 비전, 하나의 소망이 아닌, 나뉘어진 소망이다. 나의 소망을 높이 세우기 시작하면, 내게 주어진 모든 능력을 가지고 자기를 세우는데 사용한다.
이것에 대응하는 하나님의 성품은 경건이다. 경건이란,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는 것을 경건이라고 한다.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와 함께 낮아지는 것이다.
딤후 2
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16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17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바울은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려라. 그것이 경건의 삶에서 멀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경건의 능력을 얻으시길 축복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게부라, 능력이 되어 한 몸을 세우고, 전체를 살리는 삶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7. 우박
레드, 내려감. 사랑이 식는 것이다. 조건적인 사랑을 하면 식는다. 로맨스는 다 받기 위해 주는 사랑이다. 언약적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사랑의 경지인지, 언약적 사랑은 생명까지 기꺼이 내어준다.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조건적인지 모르겠다. 나에게 돌아와야 하는 것이 저절로 계산된다. 이것이 우리의 악한 틀 이라는 것이다. 이 틀이 반드시 부숴져야 한다. 그래야만 진짜 형제 우애로 나아갈 수 있다.
어디까지 주는 것인가, 어느 선 까지 줘야 하는 것인가? 그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받으려는 목적을 가지고 준다 라는 것이다. 주님이 이 시간 우리를 비춰주시길 원한다. 내 속에 얼마나 이 받으려고 주는 로맨스의 사랑으로 가득차서, 나의 헌신에 따르는 대가가 오지 않을 때 그 분노가 차면 우박으로 내리친다. 집을 부수고, 생명을 죽이고, 밭의 채소, 열매까지 다 짖밟는다. 조금만 내게 서운하게 해도, 내가 준 모든 것을 기억해 내는 우리의 악한 틀을 주님께서 부수신다.
형제는 다 아흐, 신성한 생명이다. 헤세드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신성을 사는 진정한 형제 사랑의 단계, 제자 삼는 삶으로 인도하신다. 우리가 주님을 살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아들의 성품에 참여함으로 그분과 같이 사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출애굽, 쉐모트에 와서야 우리는 주님이 보여지시는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주님은 우리를 이 귀신의 틀, 형상에서 구속하시기 위해 전쟁하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스토리, HISTORY이다. 우리의 삶에 나의 스토리 밖에 없을 때, 인간에게 구원은 일어나지 않는다. 주님이 반드시 나타나셔야 한다.
요일 3:5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주님의 나타나심 앞에 우리를 내어드려야 한다. 바에라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인식하게 한다. 그분의 오심은 우리 속에 있는 악한 틀, 죄의 틀을 제거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인정하지 않고, 내어드리지 않으면 주님은 전쟁하실 수 없으시다. 내가 주님을 만난 적이 없음을, 당신의 이름을 야훼로 만난적이 없음을 인정하는 만큼,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타나신다. 그리고 이 만남은 나로 하여금 그분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게 하시는 목적이 있음을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 포기해서는 안된다.
애굽의 노역은 우리로 하여금 야훼의 이름을 만나지 못하게 한다. 그냥 네가 가진 틀, 악한 틀을 가지고 스스로를 판단하며, 이웃을 판단하며 정죄하며 그렇게 분리속에서 고통받고 열매 맺지 못하고, 빼앗기고 약탈 당하며 살라고 한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의 존재, 본질을 나타내신다. 우리를 속이는 실체가 드러난다.
벧후1
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이것이 바로 생명에 속한 것이고 하나님됨이다. 주님의 큰 역사가 있어서, 우리의 옛 생명의 틀, 귀신의 틀을 부수고 하나님의 성품과 결합하는, 사랑에 속하는 그 길 위에 담대히 일어나시길 축복한다.
* 기도
이제 주님의 형상을 알게하소서. 주님이 나타나셔서 파라오의 형상을, 애굽의 신의 틀을 심판하여 주소서. 이제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오십시요. 주님 요청합니다. 당신이 주시는 위대한 역사 속으로 들어갑니다. 나는 그동안 귀신의 형상을 쫓았고, 어떤 형상이 되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제자가 뭔지도 모르고, 그저 나는 내가 되고 싶은 것을 선택해서 그 형상을 쫓아갔습니다. 이제 내게 참된 갈망이 생깁니다. 오직 주님을 알고 싶고, 주님의 형상이 되고 싶습니다.
이제 그 속에서 나오게 하십시오. 우리를 겉 사람의 지배가 아니라, 속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속사람으로 살게 하십시오. 받는 의지가 여전히 나를 위한 유익이 되는, 그런 모습에서 이제는 타인의 유익이 되는 그런 모습으로 살게 하십시요. 우리를 건져내십시요. 뺴내십시요. 우리를 속량하십시요.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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