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송국 옆 동물병원 * 제 2화 ▒

[ 방송국 옆 동물병원 : 제 2화 ] “자, 우리 수진이 머리 예쁘게 다 묶었다! 맘에 들어?” “응. 맘에 들어.” 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여자아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출근을 위해 가방까지 손에 든 채로 한참이나 딸의 머리를 묶어주었던 여인이 밝은 표정을 짓더니 아이의 귀엽고 통통한 볼을 두 번 톡톡하고 두드려준다. “그래, 그럼 엄마 회사 갔다올게. 학교 다녀와서 언니들 말 잘듣고, 학교숙제 꼭 하고! 다희야, 희수야, 엄마 회사 다녀온다!“ “다녀오세요.” 이렇게 매일 아침 이 네 식구의 아침은 조금은 분주하다. 회사에 나가는 엄마를 배웅하고 나서야 나란히 남게 된 세 자매는 현관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셋 중 가장 큰 언니로 보이는 여인이 굴곡진 긴 머리카락을 다시 질끈 묶고는 이제야 한숨 돌렸다는 듯 짧은 한숨을 내쉰다. ‘휴, 오늘도 아침부터 정신이 없네.’ 이제 그녀에게 남은 일이라고는 막내 동생인 수진이를 학교에 보내고 일찌감치 병원에 나가 문을 여는 일이었다. 아침 일찍 그녀의 일터인 동물병원의 셔터문이 드르륵 하고 올라가는 소리가 그녀는 왠지 좋았다. 신선한 아침 공기를 가르는 철문의 마찰음은 들으면 들을수록 정겨웠고 그 안에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동물들을 생각하면 기분은 한층 더 좋아졌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어느새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수진아, 얼른 준비해야지. 학교 늦겠…” 그녀가 웃으며 뒤를 돌자 그곳에는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여덟 살배기 수진이가 오늘도 어김없이 퉁퉁 부은 얼굴로 입을 삐죽이 내민 채 작은 손으로 머리끈을 내밀고서 그녀가 자신을 바라봐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역시 빠지지 않는 모습은 기가 막히다는 듯 그런 수진이를 바라보고 있는 큰 동생 희수의 모습. 아침에 엄마가 없는 솜씨로 정성껏 묶어주고 나간 수진이의 머리는 어느새 헝클어져 있었다. “큰언니, 머리 다시 묶어줘!” “다희 언니! 묶어주지마! 저 꼬맹이 완전 못됐어 진짜. 맨날 엄마가 바쁜 시간 쪼개서 묶어준 머리 엄마가 나가자마자 풀러버리고 언니한테 다시 묶어 놓으라고 떼를 쓰잖아! 엄마가 아시면 완전 상처받으실걸?“ 자신의 행동을 못마땅해하는 작은언니인 희수가 수진의 마음에 들턱이 없었다. 수진은 희수를 가볍게 흘겨주고는 다시 다희를 보채기 시작한다. 그러자 다희가 빙긋 웃더니 수진의 머리를 가볍게 쓸어 머리를 다시 묶기 시작한다. 수진이는 ‘헤헤’하고 어린아이답게 한번 웃더니 희수를 보며 ‘이것봐라, 다희언니가 나 훨씬 좋아하지~‘라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희수를 향해 혀를 삐죽 내민다. “너 혼난다! 어디 하늘같은 언니한테 혀를 내밀어 혀를! 요걸 그냥~” “흥! 희수언니 밉다 뭐, 다희 언니! 나 꼬불꼬불 이렇게 막 따는 예쁜 공주머리 해줘!‘ “언니! 해주지 말라니까! 애 버릇 나빠져!” “희수언니 메에에에~롱!” ‘못말려, 정말.’ 그녀에게는 아직 너무 어리기만 한 동생들이었다. 8살짜리 수진이나 이제 어느덧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있는 희수나, 다희 눈에는 한없이 어린 동생이었다. 티격태격하는 동생들의 모습쯤이야 하루이틀도 아니었고, 그가 지난 오랜 세월에 걸쳐 터득한 지혜는 단 하나였다. ‘중립만이 살길이다!’. 지나치리만큼 활달한 두 동생을 둔 언니의 생존법이라고나 할까. “다 묶었다! 우리 수진이 예쁘네~” “정말? 우와, 역시 다희 언니가 짱이야! 헤헤.” “그래. 그럼 이제 수진이 너 학교가야지. 계속 늦장부리다간 지각해. 희수 너도 오늘 새 프로그램 미팅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안가봐도 돼?“ “1시야. 지금부터 씻고 슬슬 준비한 다음 나갈테니까 걱정 붙들어 매라구. 어이, 꼬맹이. 엄마의 정성이 듬~뿍 들어간 머리를 잔인하게 풀러내고 다시 묶은 그 공주님 머리가 이젠 마음에 차십니까요?“ 희수가 다시 수진을 놀리듯 말하자 대답없이 픽 하고 돌아서서는 가방에 놓여있는 빨간색 미니마우스 가방과 신발 주머니를 집어든다. “흥. 남이사.” “아주 저게 이젠 별소리를 다해요. 쪼끄만게. 근데 대체 이유가 뭐냐? 그냥 그렇게 언니한 테 묶어달라고 하면 될 걸 갖다가 늘 엄마손을 왜 거치는 건데? 맨날 그렇게 가차 없이 풀어 버릴거면서.“ 희수는 아무리 생각해도 수진의 행동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그것도 모른 채로 딸의 머리를 묶어주고 뿌듯하게 출근하는 엄마가 조금은 안쓰러웠던 탓일까. 그러나 수진이의 대답은 무서우리만치 간단했다. “엄마가 머리를 못 묶긴 하지만, 내 머리 묶는 걸 좋아하니까 그렇지. 언니는 그것도 몰라? 엄마보고 엄마가 해준 머리 안이쁘다고 하면 엄마가 슬플테니까. 근데 엄마가 해준 머리는 다희언니가 해준것보다 너무 안이쁘니까 그런거지. 언니는 바보야! 흥!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                       *                        * “아니, 요즘 애들은 다 그래?” 희수의 목소리가 이제 막 문을 연 동물병원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희수는 오늘 아침 학교에 가기 전 수진이의 발언에 꽤나 충격을 받은 듯 아까부터 다희에게 요즘 아이들, 특히 수진이의 어린아이 답지 않은 영악함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애들이 다 그렇지 뭐. 넌 왜 맨날 수진이 보고 꼬맹이, 꼬맹이 그러면서 수진이 행동 하나하나에 일일이 반응을 하고 그래. 내가 볼적에는 니가 훨씬 꼬맹이 같다 야. 한참 나이어린 동생앞에서 어른스럽지 못하긴.“ 다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제 막 커피메이커에서 내린 커피를 한모금 들이켰다. 매일 아침 동물병원의 문을 열고 그녀의 자식과 다름없는 동물들의 밥을 챙겨주고 난 후, 늘 하루에 한잔씩 마시는 커피는 유난히 향이 좋았다. 평소 같았으면 조용한 가운데 아침시간의 여유를 만끽하며 마셨을 커피였겠지만 오늘만큼은 희수가 병원 문을 여는 다희를 따라나 온 덕분에 아침부터 유난히 들뜬 느낌이었다. 희수는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커피 한잔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듯, 좀처럼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애들이 다 그렇다니 언니! 우리 어릴때는 안그랬다고! 요즘 애들 영악하다, 무섭다는   소리야 맨날 듣고 있지만 이건 분명히 심해도 한참 심한거야. 어린애다운 맛이 없어. 난 걔가 아침마다 웃는얼굴로 엄마 배웅하고 머리끈을 확 풀어버릴 때면 소름이 다 돋는다니까!   아침에 언니도 봤지? 그 나이에 엄마가 내 머리를 하는 걸 좋아하니까 맡기긴 하지만 엄마가 해주는 머리가 마음에 안든다니! 그게 8살 짜리 애가 할 소리냐구. 난 그 나이에는 엄마가 해주는 거라면 뭐든지 좋았는데! 엄마가 불쌍해.“ “그래, 그래.” 흥분을 좀처럼 가라앉힐 줄 모르는 희수를 뒤로 한 채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동물병원의 창가로 향했다. 아직 눈도 못 뜬 시츄 한 마리가 할짝거리며 그녀가 아침에 놓아준 흰 우유를 할짝이고 있었다. 다희는 한참이나 사랑스러운 눈길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검지 손가락으로 슬며서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아직 손바닥 만큼 작은 강아지가 살기 위해 열심히 우유를 핥는 모습은 언제봐도 경이로웠다. 아마도 이것이 그녀를 동물병원 수의사로 살게 하는 이유이지 않을까. “언니! 내말 듣고 있는거야?” “그래그래. 듣고 있다니까. 8살도 안되는 어린아이 투정같지만 열심히 들어주려고 노력 중이잖니. 후훗. 야, 커피 식겠다. 얼른 마셔. 참, 너 출근 안해봐도 되는거야?“ “미팅 시간만 맞춰가면 된다니까. 이거 마시고 천천히 가면 딱 맞아. 방송국도 코앞인데 뭐. 아마 가는데 5분밖에 안걸릴거야.“ “이번에 기획한 프로그램, 채택됐다면서? 그거 미팅 가는거야?” “응! 내가 또 한건 하지 않았겠어. 누가 뭐래도 난! 유능한 작가니까.” “그래. 그 자기자랑만 안하면 훨씬 유능할텐데 말이지. 이번엔 어떤 프로그램이야?‘ “음… 그게 말이지.  이번엔 비밀이야! 프로그램 시작하면 봐!” 희수는 이제는 완전히 식어버린 커피를 맛있다는 듯 홀짝홀짝 들이키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다희는 그런 희수의 모습이 의아했다. 무슨 프로그램을 기획하든 자신에게 먼저 자랑을 하고 싶어 못견디던 희수가 비밀이라니, 그럴만도 했다. 왠지 모를 서운함과 동시에 비밀이라는 한마디에 더욱 증폭되는 호기심이란 평소에도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는 성격의 그녀에게는 정말이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너, 치사하다! 뭔데? 어차피 프로그램 시작하면 다~ 알게 될텐데 뭘 숨겨? 언니 궁금하다. 뭔데? 또 대박프로야?“ “아, 거참. 비밀이래도 그러네.” 희수가 갖다 붙이기 좋아하는 ‘대박프로’ 라는 단어까지 써봐도 희수는 여전히 입을 다문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강아지처럼 까맣고 큰 눈을 희수의 눈앞에 아무리 드밀어 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무심하게 커피만 들이키는 희수가 얄밉기 그지 없었다. - 묵비권이라니, 너무 치사한 방법이잖아! “너 희수, 정말 그러면…… 너 이번에 새로 시작하는 프로그램 언니 절대 안본다! 집 TV로 절대 못보게 할거야! 시청률 안올려 줄 거라구!“ 다희는 짧게 한마디를 내뱉고는 ‘내가 이겼지?’하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집안의 가족이 자신이 쓰는 프로그램을 외면하는 것은 희수가 가장 무서워하는 일 중 하나였다. 더군다나 아주 작지만 시청률에도 영향을 주는 일이니 대박대박 노래를 부르고 다니는 희수에게 이보다 더 민감한 일이 어디있을까! 늘 이런식으로 협박하면 ‘언니 잘못했어!’하고 바로 무릎을 굽혀왔던 희수였다. 그런데 문제는 정말 오늘만큼은 희수가 다른 때와 다르다는 사실. “내 새 프로그램을 안보겠다고? 누가? 언니가? 풉. 말도 안 되는 소리. 뭐, 마음대로 해. 언니가 아마 내가 기획한 프로라는걸 알기도 전에 제일먼저 TV앞에 달려와서 앉지 않으면 다행이지. 아, 너무 늦장부렸다. 나 그만 갈게!“ “야, 윤희수!‘ 커피잔을 내려놓자마자 옆에 놓여진 백과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동물병원을 빠져나가버리는 희수를 다희는 벙찐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의 프로그램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넘쳐나 서 걱정인 자신감 정도야 희수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말을 꺼낸 사람이 희수라 할지라도 너무나 대담했던 발언.  안보겠다고 말한 자신이 가장 먼저 TV 앞에 달려가 앉을거라니! 왠지 조금은 약도 오르는 것 같았다. ‘흥, 누가 자기말대로 되게 할 줄 알고? 절대 안 본다, 절대!’ 희수가 나간 후 문에 걸어 놓은 종이 움직여 딸랑딸랑 맑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제 희수도 갔으니 그녀도 그녀의 동물들에게 조금 더 신경을 써야할 시간이었다. “자, 그럼 우리 애기들, 누구부터 볼까~” 그녀의 가는 손이 조금씩 분주해졌다. 그녀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여러 동물들의 울음소리도 서서히 커져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