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 실크로드 문화와 톈산산맥의 대자연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부하라, 알마티 9일
2024.5.6.-14일
1부 부하라 -살아있는 역사의 증인
인천국제공항 1터미널 2시에 집합하여 우스백키스칸 타슈켄트로 향한다. 약 7시간 45분 걸린다. 이 정도면 갈만하다고 생각한다.
가까운 듯 먼 나라-중앙아시아 –스탄이다. 땅이란 뜻이다.
이슬람 문화는 나에게 거의 단편적인 지식밖에 없었다.
이번 기회에 이슬람 문화를 공부할 기회가 아닌가? 이런 생각으로 여러 자료를 찾아보며 유튜브도 보며 차분히 여행 준비를 하였다.
"세계는 책이고, 여행하지 않는 이는 오직 한 페이지만을 읽는다"라는 말처럼, 중앙아시아는 나에게는 읽지 않은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즉 나에게는 숨겨진 보석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다.
스탄이라 붙은 나라는 총 7개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인데 키르키스탄은 지난번 여행을 했고, 이번은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여행이다.
이 국가들은 소련의 구성국들이었으나 소련 붕괴로 의도치 않게 독립한 국가들이다.
소련에서 독립한 후 모든 나라가 독재를 겪었는데, 이는 일당독재에 익숙했던 해당 지역 사람들 입장에서 이에 대한 거부감이 적었던 점도 원인이다.
우즈베키스탄은 실크로드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사마르칸트, 부하라, 타슈켄트, 히바 등의 도시는 역사적인 장소들로 가득 차 있다.
실크로드는 인류문명의 교류가 진행된 통로, 즉 고대에 비단무역을 계기로 하여 중국과 서역 각국의 정치·경제·문화를 이어준 육·해 교통로의 총칭이다.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에 의해 '실크로드'가 명명되었고, 이는 우리말로 '비단길'이라고 하기도 한다.
비단길 또는 실크로드(Silk road)는 대항해시대 이전 중국과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의 지중해 세계를 잇던 동서 교역 루트, 또는 이러한 교역 루트를 통해 연결되었던 교역망을 이른다. 동서양을 이어 준 기원전 고속도로가 실크로드이다.
이 루트를 통해 동서 간의 문물이 왕래했으며 비단길이 지나가는 곳마다 크고 작은 도시나 마을이 생겼다.
우즈베키스탄은 실크로드의 중앙에 위치하기 때문에 실크로드의 허브이다.
우즈베키스탄은 비가 거의 오지 않는 사막기후로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농경과 유목 생활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88% 정도가 이슬람교도다.
타슈켄트에서 1박하고 새벽 5시 호텔 로비에 집합하여 고속열차를 타고 부하라로 향한다.
기차에서 크로와상과 따뜻한 음료를 서비스한다. 3시간 반이 걸려 부하라에 도착했다.
부하라
사마르칸트만큼 유명하진 않지만, 결코 놓쳐서는 안 될 명소다. 이 도시들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대 실크로드의 번영을 오늘날까지 이어가는 살아있는 박물관과 같다.
부하라는 고대부터 실크로드의 중심지로 번영했던 도시이다. 도시 이름 부하라는 승려들이 모여서 수행하는 사찰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단어 비하라 혹은 바하라(Vihara, Vahara)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에는 인도 쿠샨 왕조와 중국 사이의 중개 무역으로, 사산 왕조와 튀르크족 사이의 무역으로 번영을 누렸으며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와 마니교의 영향도 많이 받은 국제도시였다. 무역만 했던 것은 아니고 기원 원년 전후로 인도의 관개 농업 기술을 도입하여 양질의 과일을 많이 생산했다.
대상(隊商)들의 숙소 라비 하우스(Lyabi Khauz) 앞에는 호수가 있고 호수 앞에는 550년 된 뽕나무 고사목이 있다.
정문 앞에 전설적인 시인 호자 나스리진의 동상이 있으며
정문 윗부분에 이슬람 전설의 행복새 '세무르'가 날개짓을 하고 있다.
옛날 대상들의 잔영이 짙게 남아 있다.
한때 동서를 연결하던 실크로드의 메인 로드로서 여전히 유목민족의 삶과 애환, 그리고 이슬람 문화가 존재하며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다. 큰 거리의 교차점엔 반구형 지붕으로 덮은 노천시장 굼바스가 있어 좁은 골목길로 연결되어 어느 방향에서 오든 연결된다.
이곳에서 가게를 둘러보며 잠시 숨을 돌린다.
난 먼저 천천히 실크 로드를 걸으며 오른쪽에 있는 건물을 둘러보러 갔다.
난 사진 몇 장을 찍으며 천천히 둘러보고 있었는데 우리 일행이 하나도 안 보인다. 순간 가슴이 철렁거렸다. 잰걸음으로 아까 보았던 굼바스로 들어가니 일행들은 그곳에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있었다.
순간 난 옛날로 돌아가고 있었다.
거의 둘이서만 여행을 다니던 나는 세 번의 애들 아빠를 잃어버리고 거리에 서 있었다.
걸음이 빠른 사람. 항상 걸으며 생각에 잠겼던 사람. 그래서 늘 손을 잡고 다녔지만, 어느새 손을 놓고 가기 시작한다. 나도 빨리 걸으려 노력했으나 어느새 잃어버리고 그곳에 서 있었다. 그러면 나를 찾아 되돌아오는 그를 발견하곤 가슴을 쓸어내렸다.
내가 물었다. 왜 그렇게 빨리 가냐고. 자기는 빨리 가는게 아니고 내가 늦게 걸었다 한다.
무얼 생각하느냐 하니, 다음에 쓸 책에 대해서, 또 강의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어서 그렇다고 미안하다고 한다.
그래서 약속을 했다. 내가 보폭도 좁고, 걸음이 느리니 그 사람의 속도를 맞추기가 너무 힘이 들므로, 나는 내 페이스대로 갈 것이니, 둘이 가다 손을 놓게 되고, 앞서가는 그 사람의 뒷모습을 잃게 되면 그곳에 그대로 서 있기로 했다.
서로 찾으려 헤매면 더 힘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면 되돌아와서 나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굼바스는 부하라에 있을 동안 서너 번을 지났던 것 같다. 이 굼바스 위에는 황새 두 마리가 조형물로 있었고 굼바스 통로 앞에도 한 마리가 있었다.
왜 이렇게 도시 곳곳에 황새조형물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만 실지로 황새가 날아다니며 새끼들을 키우는 것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터키를 여행할 때도 황새들이 둥지를 틀고 새끼를 기르는 것을 보았고, 프랑스의 애기생에서도 황새의 도시답게 곳곳에 황새들이 둥지를 틀고 살아가고 있었었다.
황새조형물을 보면서 얼마 전 유튜브에서 보았던 감동적인 황새 이야기가 떠올라서 첨부해 본다.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유명한 황새, 말레나와 클렙톤
<친애하는 레바논 미셸 아운 대통령님께.
제 이름은 스테판 보키치입니다.
25년 전, 나의 조국 크로아티아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날개에 상처를 입은 황새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사냥꾼들의 총에 맞았습니다.
다시는 날 수 없다는 것은 철새에게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임을 아실 겁니다.
저는 어떤 식으로든 황새를 도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에게 말레나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죠
그와 수년간 우정을 쌓으면서 저는 황새에 관해 많은 사실을 배웠고, 그 생물이 얼마나 위대한지 깨달았습니다.
15년 전 봄, 아프리카에서 돌아오던 중 수컷 황새 클렙톤이 둥지에 내려앉았습니다.
그날 이후로 그와 말레나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고, 현재까지 육십 마리나 되는 어린 황새가 둥지를 떠나 세상을 향해 날아갔습니다.
가을이 다가오면 클렙톤은 겨울을 보내기 위해 남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났지만 3월 말에는 크로아티아의 말레나에게로 항상 돌아왔습니다.
이런 일은 벌써 15년 동안이나 이어졌고, 한 해도 거르지 않았습니다.
클렙톤의 16,000km의 여정은 위험으로 가득합니다만, 최근에 그를 기다리는 열흘간의 기간 제 인생에서 가장 긴장된 순간이었습니다.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무엇보다 저를 두렵게 합니다.
여행하는 동안 폭풍, 배고픔, 갈증이 그를 위협하지만, 비행 중 가장 위험한 부분은 레바논 상공을 가로지르는 200km의 비행입니다.
매년 이백만 마리의 철새가 이 항공로에서 죽고 있습니다.
일부는 재미로, 일부는 음식으로, 일부는 판매용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15년과 마찬가지로 올해도 클렙톤은 아프리카로의 여행을 시작하고 다시 한번 레바논 상공을 비행할 겁니다.
철새 보호를 위해 최선을 다해주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의 깃털로 쓴 이 편지를 보냅니다.
저는 깃털이 칼보다 강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 특별한 깃털을 사용하여 새로운 변화를 주도하고, 철새들을 무자비한 살해로부터 구할 수 있도록 이 문서에 대통령님의 서명을 간절히 바랍니다.
-스테판 보키치->
스테판의 편지는 전 세계의 관심을 일으켰고, 대통령은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후 레바논 정부는 철새보호 정책을 과감하게 시행했습니다.
하지만 클렙톤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에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이미 큰 변을 당했으리라 낙담했지만, 대다수는 그런 추측을 믿고 싶어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새 둥지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시민광장에 생중계할 정도였습니다.
이는 클렙톤이 살아서 둥지로 돌아오길 바라는 사람들의 간절한 희망이었어요.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클렙톤이 돌아왔습니다. 이를 본 시민들은 환호를 지르며 서로를 껴안았습니다. 클렙톤은 결코 놓을 수 없는 사랑의 힘을 사람들에게 보여줬어요.
그의 몸에는 피가 묻어있었고, 상처투성이였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돌아오는 과정이 얼마나 험난했는지 상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종을 초월한 위대한 사랑의 힘. 광장의 시민들은 이 경이로운 모습에 눈물을 훔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 세계 미디어는 이 황새의 실화를 21세기 최고의 러브스토리라 칭송하였으며 스테판은 깃털로 쓴 편지로 무려 200만 마리의 철새를 구했습니다.
이 모든 게 실화라니 정말 감동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감동 스토리들이 있기에 사랑이 무엇인지, 정말 인생에서 값어치 있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사람으로 인해 상처받은 철새들이 또다시 사람으로 인해 살아가기도 합니다.
인간과 동물은 공존해야 아름답다는 것, 그리고 사랑은 숭고하다는 것.
인간만이 만물의 영장이 아닌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이 만물의 영장입니다.“
출처 유튜브 파인딩스타
이 스토리를 생각하며 가슴이 따뜻해졌으며,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떠 올렸다.
부하라는 살아있는 역사의 증인이다.
한 때 몽골군의 의해 도시 인구가 전멸했던 적도 있지만, 탁월한 지리적 입지 덕분에 다시 복구되었다. 티무르 제국이 몰락한 뒤 16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부하라 칸국의 실질적인 수도이기도 했다. 사마르칸트, 히바와 함께 우즈베키스탄은 물론 중앙아시아를 대표하는 역사 도시이기도 하다.
칼란 미나렛(Kalon Minaret)
정복자 칭기즈칸이 부하라를 점령하고 칼란 미나렛 앞에서 첨탑의 꼭대기를 올려다보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 그의 투구가 벗겨져 떨어지는 바람에 불안을 느낀 칭기즈칸이 이 첨탑을 파괴하지 말라고 했다는 말이 전한다.
아마도 첨탑의 아름다움에 파괴를 유보하지 않았을까.
칼란 미나렛은 오아시스 비단길의 등대로 대상들의 희망 등대이다.
칼란 미나렛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칼란 모스크이고, 왼쪽의 미르 아랍 메드레세가 보인다.
칼란 미나렛, 칼란 모스크와 함께 미르 아랍 메드레세(Mir-i-Arab Madrasa)는 하나의 그룹을 형성하는 메드레세이다.
푸른색의 거대한 돔이 압도적이다. 이슬람 문화와 푸른색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이슬람 사원(모스크)의 돔의 색깔은 청옥색, 혹은 코발트블루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데 아프가니스탄에서 3,000년 이상 채굴되고 있는 라피스라즐리(Lapis Lazuli)라는 광물질을 갈아 만든 페르시아 안료를 쓴다고 한다.
사막과 암석이 대부분인 중동의 척박한 환경에서 생명을 상징하는 초록색을 이상향으로 여겨온 문화도 녹색이 이슬람에서 사랑받는 원인으로 꼽히며, 선지자 모하메드가 가장 좋아하는 색으로 여겨지는 초록색으로 중요했다고 한다.
칼란 미나렛은 1127년, 카라한 왕조 때 지어졌는데, 불로 구워낸 벽돌을 색과 모양을 다르게 놓아서 문양을 만들고 들쑥날쑥하게 배열해 놓았다. 아래에서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데, 벽돌을 쌓아 놓은 것이 한 치의 비뚤어짐도 없이 딱 맞게 직선을 이루고 있다. 첨탑 아래에 서서 푸른 하늘과 맞닿은 꼭대기를 바라보노라면 “와” 하는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높이는 약 48m며, 바닥의 직경은 9m 정도로 거대한 첨탑이다. 조각이나 형태도 독보적으로 뛰어나지만, 칭기즈칸의 파괴에 살아남아 더 의의가 깊다.
칼란 미나렛(첨탑)은 무아진이라 불리는 사람이 꼭대기에 올라가 하루에 다섯 번씩 예배 시간을 알리는 코란을 낭송하던 곳이다. 낮에는 코란 낭송 소리와 높이로, 밤에는 불빛으로 끝없는 사막에 지쳐 있는 실크로드의 상인들에게 등대 구실을 해 주었다.
칼란 모스크(Kalyan Mosque)
칼란 모스크는 부하라의 가장 큰 모스크인 회중 모스크(금요일 모스크)로 1만 명이 동시에 예배를 볼 수 있다. 지금의 모스크는 16세기의 건물로, 정면에 있는 칼란 미나렛에 비해 400년 차이가 난다. 원래 칼란 칸국의 아슬란 칸이 미나렛과 함께 칼란 모스크도 건립하였지만, 칭기즈칸에 의해 모스크만 파괴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모스크 재건과 붕괴가 있었고, 지금의 모습은 1514년 우바이둘라 칸(Ubaidulla-khan)이 샤이반 왕조의 칸이 되기 이전 이 지역의 총독이었던 시기에 맞은 편에 위치한 미르 아랍 마드라사와 함께 만들었다.
현재의 모습은 4개의 이완, 넓은 안뜰과 주 건축물의 대형 돔, 수백 개의 작은 돔과 아치로 구성된 288개의 예배공간이 있다. 사마르칸트에 위치한 비비하눔 모스크의 영향을 받았다. 안뜰은 방대한 넓은 공간으로 인해, 사방으로 막혀있음에도 열린 공간의 느낌을 가진다. 사방이 건물로 둘러싸인 중앙 광장엔 뽕나무가 있고, 그 뒤엔 칭기즈칸에 의해 학살된 수많은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팔각형의 작은 건물이 있다.
미르 아랍 메드레세(Mir Arab Madrasai)
16세기 부하라 칸국의 사이바니 왕조, 우바이둘라 칸(Ubaidulla-khan) 시기에 만들어졌다. 미르 아랍이란 아랍의 왕자라는 뜻인데, 이 왕자는 당시 부하라에서 지지를 얻었던 예멘의 왕자 셰이크 압둘라 야마니를 지칭한다고 한다. 미르 아랍 메드레세의 평면은 73m x 55m로 동서로 긴 직사각형 구조이다. 내부는 일반적인 메드레세와 같이 직사각형의 중앙 정원이 있고, 정원을 둘러싼 건물은 2층 구조로 후즈라(hujra)라고 불리는 학생들의 기숙사가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신학교로 사용하고 있어 안뜰로 들어갈 수 없지만, 그만큼 메드레세로서 제 기능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러시아 제국 시대에 대부분의 메드레세들이 폐쇄되었는데, 이곳만은 남겨졌다고 한다.
아르크 고성(Ark of Bukhara)
부하라의 상징과도 같은 기념물 중 하나인 아르크 고성
부하라의 고성 위치는 기원전 2~3세부터 도시의 중요한 장소로 사용되었다. 성을 쌓은 것은 5세기부터 시작되었지만 여러 시기를 거치며 붕괴와 복원을 반복하며 지금의 형태에 이른다. 정면의 거대한 성문은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성은 1920년까지 지배자의 거처로 사용하였지만, 소련에 병합되며 더이상 성으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지금은 거의 폐허가 되었지만 남아 있는 곳엔 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메드레세 안엔 저녁 식사와 함께 이슬람 전통공연과 패션쇼와 전통춤을 겸한 공연을 하는 레스토랑으로 변한다. 부하라의 야경을 보기 위해 패션쇼를 보다 중간에 나와 환상적인 부하라의 야경을 바라본다.
시토라이 모히 호사(여름 궁전)-달과 별 정원이라는 뜻
여름궁전(Sitorai Mohi Xosa) : 유목민들의 지배자들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계절에 따라 거처가 옮겨졌다. 이러한 습관이 부하라에도 남아 있었다. 지배자들은 더운 여름 가장 시원한 지역에 여름의 궁전을 만들어 기거하였다. 부하라 칸국의 건축 유산으로 유럽의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지금은 박물관의 형태로 사용 중이다
접견실은 그리 크지는 않지만, 유럽풍으로 호화롭다.
여름 궁전 뒤로는 후궁들의 거처인 하렘이 나오고 제법 큰 연못도 보이고 이곳에서 왕의 여인들이 수영하였다고 한다.
정원엔 한가로이 공작이 날개를 편다. 한참을 공작주위를 맴돌며 날개펴기를 기다렸다.
이스마일 사마니의 영묘
이스마일 사마니의 묘당은 현재 남아 있는 중앙아시아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고 인정받고 있는데, 사만 왕조의 가족들을 묻은 왕족 무덤이다.
9세기 말에 지어진 건물인데, 규모가 작은데, 알면 알수록 놀라운 건물이다.
1925년 흙더미 속에서 발견된 이 건물은 햇볕에 말린 벽돌이 요철 모양으로 차곡차곡 벽을 이루고 있고, 지붕은 둥근 반원 모양이다. 사각의 바닥은 땅을, 지붕은 우주를 의미한다.
정교한 조각과 기하학적인 벽돌 건축의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가로, 세로가 10m인 정사각형 건축물은 비록 크지는 않지만,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
태양의 위치에 따라 무늬의 빛깔이 변화하여 신비감을 준다고 한다.
입구 문 위의 중앙에 있는 역삼각형은 죽은 사람을 뜻하고, 양쪽에 있는 사각형의 무늬는 이슬람교와 불교, 조로아스터교의 혼합을 나타내고 있다.
이스마일 영묘의 형태는 조로아스터교의 불의 사원 (Temple of Fire)에서 기인했다고 한다.
벽면의 포인트마다 달라지는 조적기법이 신비롭다.
이 지역은 큰 지진이 몇 차례 있었기에 대부분 건물이 붕괴되었는데, 이렇게 벽돌로 화려한 조적 기법을 사용하였는데도 천 년 이상 버티고 있는 그 자체만으로 대단하다. 놀라움은 내부로 가면 더욱 더해진다. 화려한 돔이 눈에 들어온다. 벽돌 건물이 이렇게 아름다운 건물이었던가. 특히 모서리 부분의 아치가 이슬람 건축사적 측면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후대에 지어진 건물은 모두 이런 모서리 아치를 모방했다.
모서리 부분의 아치는 후대에 지어진 건물이 모두 모방했듯이 이슬람 건축사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점심 식사를 위해 다시 칼란 미나렛을 지난다. '굼바스"를 다시 지난다.
레스토랑 DOLON에서 점심을 먹었다.
부하라에서 사마르칸트로 고속열차를 탔다
첫댓글 시야님
고맙습니다 다시 여행하는 것같습니다
차분하게 여행을 되 짚어 봅니다
더 깊게 더 많은 것을 느끼는 감동을 갖습니다
감사합니다 건강계속 잘 지키시길 빕니다
잘 알지 못했던 이슬람 문화, 실크로드의 흔적과 애환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우즈베키스탄 기행은 약간 예사롭지 않은 기억을 남겨주었습니다.
인류의 문명사적 발자취를 더듬어 본 기행, 시야님의 다양한 접근으로 다시 정리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람과 황새, 그 이야기들에 주목합니다.
러시아와 인근 국가, 그리고 스탄의 나라 7개,
부하라 하면 화려한 춤과 노래, 행복감 등등이 저는 생각납니다.
가보지는 못했어도 음악공부를 하면서 조사했던 지역들이라~~~
공작새, 기다림의 미학이 주는 선물입니다. 멋집니다~^^
문항님이 올려주신 내용과 같고 다른 모습으로 또다시 한 번 즐감하게 됩니다.
감사드려요~^^ 기록해주는 사람 덕분에 가지않고 앉아서 잘 봅니다~^^
시야님~
입이 떡 벌어지며
할 말을 잃습니다 ㆍ
문항님에 이은
두번째 여행 공부 들어가나요 이제 ㅋㆍㆍ
여행 후기에 이렇게 찐하게
설레어 보긴
처음입니다~ㅎ
땀을 불사르듯이
몰두하셨던 시야님의 모습이
뇌리에 남아 있기에
후기가 와 닫습니다 ㆍㆍ
고맙습니다
리마인드여행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