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봄, 모임을 통해 가본 헌책방에서 카페 모군이 골라준 책이 바로 <엄밀히 감시받는 열차>였다. 새책은 새책대로 처음 넘긴다는 설레임에서 즐겁게 시작하고, 헌책은 헌책대로 어느 누군가의 손길이 스치며 만들어졌을 사연이 묻어나는 것 같다. 세월이 흘러 이 책을 보게 된다면 그래, 2005년 봄, 누군가에 의해 책을 손에 건네받았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될까?...각설하고, 읽기 시작하는 때, 흐뭇한 기분을 안겨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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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로 들어가보자. 1914년생인 보후밀 흐라발, 언젠가(?) 이름만 겨우 들었었다. 알고보니 체코에서는 밀란 쿤데라보다(만큼이나?) 유명한 작가라 한다. 그러니까 체코에는 밀란 쿤데라가 있고, 까렐 차펙이, 보후밀 흐라발이 있다로 기억될까? 흐라발은 '프라하술집에서 들여오는 이야기를 콜라주하는 작가'로 불리며, 사상적 교조주의에 저항하는 자세 때문에 여러 차례 당국의 제제를 받았다고 한다. 책에 옮겨진 약력을 살펴보니, 법학박사학위를 땄으나, 독일의 체코 침공 때문에 법률가로서 활동하지 못하고, 공증사무소 서기, 철도 선로원, 우체부, 제철 노동자 등 온갓 작업을 전전하는 가운데 실험적인 산문을 습작하다가, 1962년 창작에 전념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얘기할 <엄밀히 감시받는 열차>는 1965년작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그의 나이 51세때의 작품이 된다.
어디에서 작가의 개인적 정보를 구할 수는 없는지라, 해설을 쓴 이윤기씩의 글을 통해 흐라발의 목소리를 전해본다. 흐라발은 스스로 자신을 술집의 연대기 기자(年代記 記者)라면서 이렇게 고백했다고 한다.
"나는 쓰는 작가가 아닙니다. 나는 (술집에서) 들은 에피소드를 가위로 오리고, 오려낸 것을 풀로 붙여 콜라주를 만드는 사람인 것이지요."
그랬는데, 1968년 흐라발의 황금기가 지나는 때 그는 말한다.
"이제 볼장 다 봤어요.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말이지요. 내가 저희들 이야기를 듣고 써서 돈푼이나 긁어 모았다는 소문을 들었는지 내가 술집에 들어갈 때마다, '야, 저기 위대한 작가가 오신다,'이러고는 쥐죽은 듯이 맥주잔만 핥는답니다. 그러니 나는 이제 볼장 다 본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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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 <엄밀히 감시받는 열차> 속으로 들어가보자. 작품은 슬픔(고통)마저 덮어버리는 거대한 웃음이 돋보인다. 곳곳에 웃음이다.
때는 독일에서 해방된 해인 1945년이다. 독일인이 밀리는 걸 상공의 제공권으로 얘기하며 시작하고 있다.
"올해, 그러니까 45년에 들어와서 독일은 조그만 우리 마을 상공의 제공권(制空權)을 잃었다. 우리 마을 상공의 제공권을 잃었다는 것은 사실상 우리 지역, 우리 나라 상공의 제공권을 잃었다는 뜻이다."(271쪽)
이틀전에는 적기가 독일기를 공격하여, 한쪽 날개를 떨어져 나가게 했다. 그 날개는 마을 위로 떨어졌다. 날개가 회전하다 금방 멈출줄 알았는데, 회전을 계속하자 한편에는 심드렁해 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사제관쪽으로 내리 꽂혔다. 그 뱅뱅돌다가 추락한 날개가 멈춘지 채 5분도 안 되어, 날개의 판금과 강판을 깡그리 벗겨내어 버렸다는 부분에서부터 웃음이 나오더니, 소설을 읽는 중간중간 웃게 만든다.
웃음에 잠식된 소설로 생각되게끔, 흐라발의 <엄밀히 감시받는 열차>는 재미있다. 혹은 어이없다. 그리고 슬프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곳(때)을 보여준 다음, 화자인 나는 자신의 가계를 안내한다. 아버지는 48살에 은퇴하여 연금으로 살아가는 자로 스무살 때부터 기관차를 타다가 은퇴했기 때문에 근무 당시 받았던 봉급보다 갑절에 달하는 연금을 받고 있다. 할아버지는 퇴역 장교였다. 아버지는 못 만드는 게 없을 정도의 만물 수리공인데,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이 그리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유는 아마도 증조부 루케 할아버지 때문이라고 한다. 증조할아버지는 육군의 신호고수가 되어 카를레 교(橋) 전투에 참가했다. 이 전투에서 학생들이 길바닥에 박힌 자갈을 군인들을 향해 던졌는데, 증조부가 바로 그 자갈에 맞아 절름발이가 됐다고 한다. 이때부터 증조부는 하루에 금화 한 닢의 연금을 받아 매일 럼 주(酒) 한 병과 담배 두 다발씩을 사는 데 썼다고 한다. 절뚝절뚝 돌아다니며 힘들게 일하는 사람을 놀리는 취미를 행사했다고 한다. 그에 표현을 들어보자. 역시 웃음이다.
"재미로 여기는 것만으로 만족했더라면 또 좋았을 것을, 증조부는 이렇게 일하는 사람들을 보고 싱글벙글 웃으며 이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움으로써 이들의 약을 올렸다. 그래서 이러저러한 일로 이 루케 증조부는 사람들에게 두들겨맞는 일이 많았다. 이렇게 두들겨맞을 때마다 할아버지는 증조부를 손수레에다 싣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274쪽)
이런 일이 한해에 한 두번은 있었다고 하니, 울어야 할까, 웃어야 할까. 바로 웃어냐 할지, 울어야 할지가 이 소설에서는 참으로 자주 등장한다. 결국 증조할아버지는 70년동안이나 누리던 연금 특혜를 뽐내다가, 어이없게도 채석장 인부들에게 맞아 세상을 떠났다.
밀로슈의 할아버지는 최면술사였다고 한다. 그는 독일군이 체코를 점령할 욕심으로 국경을 넘어 프라하로 진격해오자, 독일군 전차를 맞이하러 나간다. 이유는, "프라하로 진격하는 독일군 전차를 저지할 야심"(275쪽)이 있어서였다. (그런데 그게 가능하겠는가? 최면으로, 혼자서...) 결과는 예상처럼 실패로 돌아간다. 그것도 참담한 실패로. 그런데 이 슬픈 현실속에서도 웃음을 잃게하지 않는다.
"전차를 돌려 돌아가버려라!"(275쪽)라는 할아버지의 최면에 대한 결과는,"할아버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결국 전차는 할아버지를 깔아 두개골을 깨뜨려버리고는 계속해서 나아갔다."(275쪽) 그후로는 독일군은 계속해서 진격했다.
"얼마 뒤에야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머리를 찾으러 나갔다. 선도 전차는 프라하 교외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있었다. 할아버지의 머리가 무한 궤도(無限軌道) 틈에 꼭 끼는 바람에 이를 뽑아내자면 전차를 들어올릴 기중기가 있어야 했다."(275쪽)
그후 마을에는 할아버지에 대해 설왕설래가 있었다고 한다.
"일부는 할아버지를 일어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했고, 일부는 할아버지를 일러 바보 같은 사람인 것만은 아니라고 했다. 후자의 주장에 따르면, 모두가 할아버지처럼 독일군의 앞을 막아서되 손에 손에 무기를 들고 막아섰다면 독일군이 어떻게 되었겠느냐는 것이었다."(275쪽)
할아버지의 무한궤도에 끼인 두개골에서 시작한 소설 속 얘기는 '나'의 "집구석에 엉덩이나 붙이고 앉아 있을 일이지......"(342쪽)라는 말로 끝난다.
'나'로부터 얘기를 시작해보자. ' 나'는 석달전 손목 동맥을 잘랐다. 스스로 말하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고 말하는 데, '나'가 생각하길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은 이미 그 이유를 알고 있을 것 같아서라고 한다. 다음 글을 자신의 가계와 연관지어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고민하는 내용이다.
"스물두 살 먹은, 나같은 애송이에게 고민이 있으면 얼마나 있었겠는가. 그렇다. 내 고민은, 우리 마을 사람들이 내가 일이 하기 싫어 손목의 동맥을 잘랐다고 여기고 그런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만일에 내가 일이 하기 싫어 손목의 동맥을 잘랐다면, 나는 그렇지 않아도 격무에 시달리는 내 동료 일꾼들에게 내 몫의 일을 맡긴 셈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빈들빈들 놀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자기네 몫의 일을 하게 했던 루케 증조부나 최면술사 빌렘 할아버지와 다를 바가 없는 짓을 한 셈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아버지는 25년간만 기관차를 오르내리고는 지금까지 나머지 반평생을 무위도식한 사람이 아니었던가."(276쪽)
<엄밀히 감시받는 열차>는 1945년 독일군으로부터 해방된 시기를 선택한 만큼, 한 인간의 조국과 연계된 숭고한/우스운 투쟁의 에피소드로도 볼 수 있다. '에피소드의 콜라주'라고 스스로 말하듯, 소설은 얘기들이 흥미롭게 섞여있다. 종국의 결말은, 독일군 무한궤도에 끼인 할아버지의 두개골과 별반 다르지 않다. 드레스덴이 폭격당했다는 소식에서, 화약를 싣고 가는 수송열차를 폭파하는 상황이니 말이다. 밀로슈 흐르마에게도 흐르는 할아버지의 피이다.
"아니다. 이 생각만 한 것은 아니다. 나는 이 일을 오래전부터 마음속으로 꾸며 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내게는, 그럴만한 이유도 있지 않은가, 내게는, 독일군이 할아버지를 전차로 뭉개고 지나갈 때 이런 이을 꾸밀 이유가 생긴 셈이었다. 할아버지가 단신으로 걸면서 독일군에게 전차를 돌려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했고, 독일군 전차가 이런 우리 할아버지를 깔고 지나갔을 때, 그럴 이유가 생긴 셈이었다. 할아버지의 머리가 독일군 전차의 무한궤도에 깔려 무참하게 부서지던 날, 정말로 부서진 것은 꼬리를 잇는 독일군 부대를, 꼬리는 잇는 독일군 전차를 이 침략군의 본거지로 되돌려 세우려던 할아버지의 정신 바로 그것이다. 결국 이들을 돌려세운 것은 러시아 군이었지만 할아버지 같은 분의 이러한 정신이 전혀 하릴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할아버지의 이러한 정신을 오랫동안 잊은 채로 지내왔다. 만일 할아버지의 정신에 진작 눈을 떴더라면 나는 오래전에 이런 시도를 했을 것이다. 열차, 탄약을 잔뜩 실은 내 열치가 올 시간은 20분 정도 남아 있었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뭔가 보람있는 일을 해야 했다. 나는 더이상 백합처럼 시들어버리는 인간이 아니었다."(333쪽)
내용을 보면 몇가지 얘기거리가 소설속에서 힘을 발휘한다. 먼저 독일군에 저항했던 바보인, 혹은 바보라라고만 말할 수 없는 할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애송이) 체코인 밀로슈가 어떻게 떨면서 독일군에 저항하는가의 문제가 있다. 화약수송열차의 폭파의 한 가운데 존재하는 밀로슈, 독일군을 저도 모르게 총을 쏴버리는/맞는 밀로슈에서 찾을 수 있다.
둘째 독일군 통제하에서의 체코는 성(性)만이 살길이라고 부르짓는 것처럼, 이곳저곳에서 성, 성을 통한 충만/재생성의 장이라는 것이 있다. 물론 이는 누가봐도 과장의 발언이다. 그러나 성은 저항/생성의지, 자부심의 다른 이름이 될 수 있음을 작가는 말하고 있다. 이는 조차계상 흐비츠카를 통해 전해진다. 비르기니아 스바타와 함께 역장의 안락의자를 찢었다는 걸로 예를 들고 잇다. 세번째의 문제는 그가 왜 자살하게 됐는가의 문제에서 찾을 수 있는데, 5분만에 해결된다는 사진관 아저씨의 말에도 결코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밀로슈의 자살기도 후, 그에게 자신감을 심어준 딴따라 여인과의 하룻밤이 있다. 저항과 생성과 개인이 만들어낸 콜라주로서의 소설이다.
<엄밀히 감시받는 열차>를 읽으며 인상적인(놀란) 장면은 드레스텐 폭격과 밀로슈와 빅토리아 프라예와의 정사를 영화에서 오버랩하는 것처럼, 함께 놓고 있는 부분이다. 이는 그전에 묘사된 눈[雪]의 결정과 시계 초침소리에 대한 연관된 사유에서도 읽을 수 있다. 생각하기 나름, 보기 나름, 어느 한 곳만을 경험할 뿐인 인간이라는 점에서, 여러가지의 비슷한 소리들은 어느 때 어느 순간은 하나의 소리로 표현된다. 하나의 행위/소리는 여러가지의 행위/소리가 될 수도 있다. 그렇지 않은가?
"눈의 결정은 하나하나가 미세하기 짝이 없는 시계 초침의 움직임, 아니면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 같았다. 눈은 찬란한 햇살에 무수한 빛깔로 빛나며 째깍리고 있었다. 내 귀에는, 이 째깍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물론 이 째깍거리는 소리는 내 손목시계에서도 나고 있었다. 나는 귀를 기울였다. 분명히 내 손목 시계에서 들리는 것과 다른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것도, 내 앞에 쌓인 항공기 동체의 잔해에서 들려오고 있었다."(276-277쪽)
소설은 이렇듯 같은 것을 달리 볼 수 있는 시선이 있다. 앞뒤로 붙혀진 밀로슈와 마샤가 등을 대는 것처럼 뒤면으로 붙혀진 사진 그리고 반복연상, 소파를 찢는 행위의 반복, 국가와 연관된 가계의 반복순환 등 <엄밀히 감시받는 열차>는 반복과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의 랑데부, 거기에 슬픔마저 덮어버리는 (거대한) 웃음이 있다. 울어야 할 상황인데도 울 수도 없게 만드는, 웃음을 잊지못하도록 하는.
보후밀 흐라발, <엄밀히 감시받는 열차>, 이윤기옮김, 중앙일보사, 1990
첫댓글 이야기를 읽으며 배실배실 웃다가 뇌리를 베고는 감쪽같이 숨어버리는 차가운 이성의 광기 같은 걸 느끼게 하는 건가요? 《농담》에서처럼 …말이죠.^^ 책장을 덮고 나면, 이야기보다는 이야기꾼을 더 생각해보게 만드는, 말하자면.
토마토님/ 폭주님을 대신해 덧붙이자면, 이성보단 정념에 치우친 작가가 맞습니다. 헌데 특이한 점은 그 전달방식-화법이나 퍼즐처럼 맞물리는 인물-사건의 콜라주 수법이 매우 모던하다는 데 있습니다. 매우 세련된 한편 차가운 우울을 웃음과 함께 보여주는 게 이 작가의 장점이자 주조음 같습니다.
브릭님, 그럼 그 이야기에 우울의 대안 내지 보상으로서의 아름다움은 없는 건가요?
토마토님께/읽으며 배실거리는 웃음이라기보다는, 분명 웃음을 자아내는 상황인데도 생각해보면 정작은 슬픔인 그런 표현이 많습니다. 맞아 돌아가신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상황이 독일군대에 대한 저항의 방법으로 최면을 선택했으나 결과적으로 전차에 두개골이 끼인 상황이라는데서,
어이없어보일수도 있는 이유의 자살상황에서, 이미 일을 저지른 후 죽어가는 상황에서 독일군을 쏘지 마걸 그랬다, 집구석에 엉덩이나 붙이고 앉아 있을 것이지, 라는 말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언젠가 <불멸>의 아녜스의 몸짓을 얘기하신 걸 보면,밀란 쿤데라에 대한 집중도가 강하실 듯한데...
읽어보시면 밀란 쿤데라도, 라블레도, 에밀 쿠스투리차의 영화 <삶의 기적이다> 의 정서, 로베르또 베르니니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와 만나는 지점이 있을 것입니다. 우여곡절의 삶. (혹여 읽고싶으시다면, 70여페이지정도의 짧은 소설이니, 시간날 때 제가 타이핑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읽어보고는 싶지만 그렇게까지 수고를 끼치게 되면, 후환이 두렵겠지요?^^
폭주기관차님께, 《불멸》에서 아녜스의 몸짓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서 토마스의 냄새는 그것이 표상하는 바 닮은 점이 참 많았어요. 로라와 테레사에서 얼핏 유사성이 감지되듯이. 아녜스는 토마스의 여성 버전이었을까 생각하게 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일지 그래서,일지 아녜스나 토마스의 삶을 통해 인간의 내적 가치에 대한 어떤 아름다움이 엿보였고, 또한 마음에 희망이 서리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두려운 후환이 있었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