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나옹선사의 너무도 유명한 선시(禪詩)다. 속세의 인간은 그 도저함을 흉내낼 수 없기에 싯구나마 마음에 품고 위로를 받는 지 모른다.
대곡사 일주문
일상에 지친 탓도 있었지만, 경북 의성군 다인면에 있는 사찰 대곡사 가는 길에 차창을 활짝 열어젖히고 ‘청산은 나를 보고…’를 외친 건 이 절을 창건한 이가 나옹선사라는 사실 때문에서이리라.
해학적인 벅수
지공, 무학대사와 함께 고려말 3대 화상으로 불리는 나옹선사는 중국으로 건너가 10년 넘게 수행했으나 그가 정작 깨달음을 얻은 건 좌선 정진하던 그 때가 아니라 돌아와 청평산에 한가로이 머물 때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깨달음의 요체 또한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고 피곤하면 잔다’(飢飡喝飮困安眠)는 것이었다.
부실한 이정표를 보고 달리다가 아스팔트길까지 덜렁 나와 앉아 있는 대곡사 일주문과 마주했을 땐 이 것도 나옹선사의 가르침인가 하는 생각이 얼핏 든다. 깨달음이 선방이나 토굴의 장좌불와, 용맹정진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살아가는 순간순간이 모두 수행처요, 일상의 삶이 바로 수행이라고 했던…. 하지만 좀 황당하기까지 한 일주문의 첫인상에 마음 한구석에서 푸시식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난 것도 사실이다.
멋스런 쓰레기 소각장
점입가경. 일주문을 지나자마자 느닷없이 벅수(돌장승)가 나타나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고 있다. 거기에다 쓰레기 소각장의 현대적이고 예술적인 모습은 절집 분위기를 더욱 아리송하게 만든다.
고풍스런 대웅전
그러나 대곡사는 과연 고찰다운 고찰이었다. 고려 공민왕 17년(1368)에 창건돼 긴 세월 풍상을 견뎌 온 대웅전과 범종각은 단청조차 찾아볼 수 없는 빛바램으로 절집 분위기를 더없이 고풍스럽게 만든다. 대웅전 앞마당에 있는, 흔하지 않은 모양의 검은 돌탑도 그 분위기를 더해준다. 탑신은 없고 지대석 위에 옥개석만 포개져 있는 청석탑으로, 고려시대 때 유행한 탑 양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구 동화사와 합천 해인사 원당암에서 이 같은 계통의 청석탑을 찾아볼 수 있다. 탑돌이하듯 빙글빙글 돌아가며 한참동안 탑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고졸한 멋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걸 느끼게 한다.
대웅전과 마주하고 서있는 범종각은 법고와 목어, 운판을 매달고 있는 게 용하다 싶을 만큼 낡았다. 세월의 무게를 가까스로 버티고 선 빛바랜 그 모습만을 기억하며 돌아섰건만 원고를 쓰기 위해 자료를 찾다보니 ‘아는 만큼 보인다’는 사실이 새삼 무릎을 치게 했다. 대곡사 범종각 2층 누각에 그 유명한 백운거사 이규보의 편액이 걸려 있다는 게 아닌가. 시와 술과 거문고를 좋아해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으로도 불렸던 이규보가 대곡사를 찾아 그 느낌을 적은 시라고 한다. 아쉽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은 놓치지 말고 꼭 확인해보시길.
13층석탑
한 때 대곡사는 본원을 중심으로 비봉산 일대에 아홉 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찰이었으나 지금은 대웅전과 범종각 외 명부전, 산신각, 나한전, 요사채가 경내를 차지하고 있다. 위풍당당함은 잃었으나 오랜 세월을 지탱해 온 작은 절집은 이제 그 보다 더 큰 울림으로 속세의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듯싶다.
나한전의 익살스런 나한들
*맛집
정읍 산외 한우마을, 영월 주천면 다하누촌과 함께 국내산 한우를 부담없는 가격에 맘껏 먹을 수 있는 소문난 맛집이 대곡사 가까이 있다. 예천군 지보면 소화리 지보초등학교 정문 앞에 있는 참우마을(054- 653-9282)은 한우 사육 농민들로 구성된 예천 지보참우 작목반이 소비자와 직거래하는 정육점이자 식당이다. 주말이면 전국에서 몰려 온 사람들로 자리를 얻기조차 힘들지만 맛있는 한우를 싼 값에 먹을 수 있다는 매력에 사람들은 기다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정육점에서 고기를 사서 옆 식당에 1인당 3,500원을 주고 입장하면 야채+불판세트가 제공된다. 600g 기준 불고기 1만2,000원, 등심·안심 2만7,000원, 갈비살·안창살 3만5,000원선이다.
범종각
*가는 요령
중부내륙고속도로 점촌·함창 인터체인지를 빠져나가 문경시(옛 점촌시)에서 34번 국도를 타고 예천 방면으로 향한다. 용궁 - 예천휴게소를 지나 국도 28번으로 옮겨 타고 지보 - 자인교를 건너 양서리에서 좌회전해 가면 대곡사 일주문 앞 주차장이다. 혹은 중앙고속도로 의성 인터체인지에서 빠져 예천 방면 국도 28번을 타고 안계 - 다인중학교 앞에서 우회전, 봉정리를 지나 대곡사다.
첫댓글 종교와 상관없이 여행시 절에 들려오곤 합니다. 볼 것도 많지만 왠지 편안한 그 느낌...여기도 좋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