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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Ⅰ. 서 론
Ⅱ. 인도네시아의 일반적 이해
A. 간략한 역사
1. 고대사회
2. 힌두 및 불교왕국의 시대
3. 회교 왕국 시대
4. 포루트칼
5. 네덜란드 식민주의 시대
6. 영국 통치시대
7. 네덜란드 통치의 계속
8. 일본 점령 시대
9. 공화국의 탄생
10. 독립 전쟁
B.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및 종교 상황
1. 대통령과 내각
2. 경제 사회
3. 주요 종족
4. 문화 및 습관
5. 언어 관습들
Ⅲ. 종교이해
A. 빤짜시리라(Pancasila)
1. 전지전능한 유일신에 대한 신앙심
2. 정의롭고 예의바른 인간성
3. 인도네시아의 통일
4. 대중합의와 대의 제도를 통한 지혜로운 정책에 의한 민주주의
5. 전 인도네시아 국민을 위한 사회 정의
B. 기독교 선교 역사
1. 인도네시아 선교…과거
2. 현재 기독교 현황
3. 한국교회의 해당국가에 대한 선교현황
Ⅳ. 결 론
A. 코이노니아 선교를 위한 구체적 제안
1. 토착인 지도자 양성
2. 교회 개척 및 지원
3. 방송 선교
4. 교육 선교
5. 집단 개종
6. 인도네시아인들의 예술적인 민족성
7. 집단 이주 정책의 활용
8. 여타의 사회참여를 통한 선교
B. 기도 제목
Ⅰ. 서 론
본 선교협의회 자료는 인도네시아에 대한 전반적 이해를 다루고 있으며 현 시점에서 이것을 토대로 선교전략에 대한 간략한 정보 및 기도제목을 포함하고 있다.
Ⅱ. 인도네시아의 일반적 이해
기본정보
인도네시아의 명칭은 원래 India라는 의미의 'Indos' 그리고 섬이라는 의미의 'Neosos' 라는 Greece에서 유래된 말로서, 1850년 영국인 J.R. Logan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독특하고 이국적인 문화를 가진 열대국가, 인도네시아는 마치 산호및 바다 위에 흩어 놓은 진주 목걸이같다. 13,667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인도네시아 군도는 동남아시아 대륙과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까지 넓게 뻗어있다. 인도네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군도이면서 인구가 네번째로 많은 나라이고, 백개가 넘는 화산을 가지고 있는 전세계에서 가장 화산 활동이 활발한 나라이기도 하다. 약 천여개의 섬에만 사람이 살고 있으며, 그것도 대부분 수마트라, 자바, 셀레베스 보르네오와 뉴기니에 집중되어 있다 자바는 인도네시아 전체 인구의 절반이 넘는 인구를 가진,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섬이다.
적도 상에 위치한 이 나라는 연중 계속되는 열대의 기후를 가지고 있다. 또 세계에서 얼마 남지 않은 열대 우림지역 중의 하나인데 안타깝게도 이 우림지대가 화전농에 의해 자꾸 줄어들고 있다. 적도 상에 위치해 있는 탓으로 인도네시아에는 계절이란 것이 없으며, 낮과 밤이 똑같이 12시간 씩 이 다. 인도네시아에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많은 모슬렘이 있다 정령숭배, 힌두교, 모슬렘의 신앙과 의식들이 뒤섞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 집계에 의하면 인구의 80% 이상이 모슬렘이라고 한다. 이 나라 전체에 흩어져 살고 있는 3백개 이상이 되는 종족 집단들의 대부분은 말레이족의 뿌리를 갖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화된 도시에 살고 있지만 대부분은 시골에서 농사에 종사한다. 이리안자야와 칼리만탄에는 많은 원시 종족들이 살고 있으며, 그 중 몇 종족은 아직도 식인 풍습을 갖고
A. 간략한 역사
1. 고대사회
l890년 Eugence Dubois가 동부 자바섬에서 B.C 50만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Pithecanthropus Erectus), 라고 이름 붙여진 자바원인의 뼈가 발굴됨으로 뼈가 발굴됨으로 이곳이 인류의 발상지의 하나로 보고 있다. B.C 3,000년에서 500년 사이에 아시아부터 몽골계 이주민들이 인도네시아에 이주해서 토착인들과 결혼하였고, 후에 B.C 1,000년쯤에 인도-아리안계의 이주민들과의 혼혈이 있었다.
2. 힌두 및 불교왕국의 시대
1세기와 2세기 사이에 처음으로 인도 불교가 인도네시아에 도착하였다. 불교는 두 분파, 즉 Hinayana와 Mahayana를 소개하였고, 후자가 8세기경에 더욱 번성하였다. 높은 문명을 지닌 많은 왕국들이 힌두 혹은 불교를 믿는 토착인 왕들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이 왕국들은 고대사회로부터 약 16세기까지 계속되었다.
3. 회교 왕국 시대
13세기에 구자랏과 페르시아부터의 회교 상인들이 인도네시아를 방문하기 시작하였고, 인도, 페르시아와 인도네시아 사이에 무역의 다리를 놓았다. 이러한 무역을 통하여 인도네시아 사람들 가운데, 특히 자바의 북쪽 해안을 따라 회교를 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점차적으로 힌두교 왕들을 회교로 개종을 시켰나갔다. 서부 자바의 빠자자란(Pajajaran) 왕국의 수도는 순다끌라빠(Sundakelapa)인데, 현재의 수도 자카르타의 옛 지명이다. 1527년 순다 꺼라빠(Sunda Kelapa)는 데막(Demak)술탄의 회교군대 사령관인 파라테한(Falatehan)에 의해 정복되었다. 정복된 후, 훈다 꺼라빠는 자야 카르타(Jaya Karta, 위대한 도시라는 의미)로 개명되었는데, 현재 이름인 Jakarta의 기원이다. 파라테한은 이 도시를 정령하려는 포르투칼을 물리치기도 하였다.
4. 포르투칼의 침입
향료를 찾기 위하여, 포르투칼은 1511년에 인도네시아에 도착하였고, 말레이 반도에 있는 말라카의 회교왕국을 정복하였다. 뒤이어 스페인이 뒤따라 왔다. 이 둘은 기독교를 전파하였고, 돌루카스로 알려져 있는 말루쿠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5. 네덜란드 식민주의 시대
유럽시장에 향료를 더 비싼 이윤에 팔기 위한 목적으로 인도네시아를 찾아온 네덜란드는 1602년에 네델란드 동인도 회사(Dutch East India Company, VOC)를 세우게 된다.
1799년 VOC를 국가화한 이후에, 네덜란드 정부는 군도의 전 영토를 장악하였고, 원주민들은 그들의 농산물을 네덜란드 상인들에게 넘기도록 강매 당한다. 이것이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 식민지배의 시작이다. 순다 끌라빠는 빠따비아로 개명된다.
1799년 12월 31일, VOC는 경영 미숙과 부패로 인하여 파산하고, 인도네시아의 전 영역은 바따비아(자카르타)에 있는 네덜란드 식민정부로 넘어간다.
6. 영국 통치시대
나폴레옹의 몰락이후, 네덜란드에 대한 프랑스의 점령이 끝났고, 네덜란드는 1814년 8월 13일 런던에서 영국과의 협상을 통하여 1803년이 전에 네덜란드가 점령한 식민지에 대하여 인정을 받고, 되돌려 받는다. 이리하여 인도네시아 군도는 1815년에 영국에서 네덜란드로 되돌아갔다.
7. 네덜란드 통치의 계속
네덜란드가 식민통치를 강압적으로 해나감으로 인하여, 자유를 되찾고자하는 군도의 원주민들에 의하여 격렬한 저항을 받게 되지만, 식민 군대에 의하여 하나씩 진압되고 만다.
8. 일본 점령 시대
진주만에서 기습공격을 개시한 일본은 싱가폴을 함락한 후에 1942년 3월에 인도네시아를 점령하였다. 수카르노와 하타는 그들의 유배지에서 불러 났고 일본의 “위대한 동아시아 공영” (Great East Asia Coprosperity)"를 선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인도네시아 인들은 네덜란드 식민지배를 대신할 일본제국주의의 구호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된다.
9. 공화국의 탄생
일본은 연합군에 의해 패배하였고, 1945년 8월 17일에 인도네시아는 독립을 선포하였다. 빤짜실라(Pancasila)가 공화국의 기본 철학이자 이념이 되었고, 1945년 8월 18일에 헌법이 제정되었다. 헌법 조항에 의하여 국가는 대통령에 의하여 통치되며, 대통령은 행정수반을 겸하고, 부통령과 여러 각료에 의하여 지원을 받는다.
수카르노가 초대 대통령 및 행정 수반이 되었고, 모하멧 하타가 부통령이 되었다. 1945년 9월 5일, 첫 내각이 구성되었다.
10. 독립 전쟁
네덜란드의 계속적인 침략에 대한 국제적인 압력으로 인하여, 1949년 12월 27일 인도네시아 주권 연합공화국이 되었다. 1950년 2월 29일에 인도네시아는 UN의 회원국이 되었다.
독립 후, 아시아, 아프리카의 신흥제국의 리더가 된 수카르노는 천부적인 웅변술로 국제 무대에서 활약, 중국 등과도 관계를 깊게 가지며 사회주의 노선을 걸었다. 정치면에서 공산당을 인정하는 정책을 위했는데, 60년 중반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3백만 명의 당원을 포함, 모두 1천 7백만 명의 지지자를 갖춘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공산당 조직이었다. 그 반면 경제를 중심으로 하는 국내 정치면에서는 신경을 쓰지 못해서, 1960년 대 전반에는 국민 경제가 파탄직전에 이르렀다. 그리고 인플레에 허덕이는 국민들의 불만도 극에 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1965년 9월 30일 밤중에 여섯 명의 반공주의자 장군들이 납치 및 암살되었다. 공산당과 10년 이상 긴장관계를 유지해 왔던 군부는 이를 공산당의 소행으로 간주하고 대대적인 좌익분자 소탕작업에 착수했고, 이 작전을 주도한 사람은 당시 군부의 실력자이자 육군 전략 예비군 사령관인 “수하트토” 장군이었다. 초대 대통령이었던 수카르노는 이 소탕 작업에 반대 입장을 보이다 ‘9.30’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루머에 휘말리게 된다. 그 이후 직접 관여는 부정되었으나, “붕 카르노”라는 애칭으로 존경받던 수카르노 대통령의 권위는 날로 실추되어 갔고, 1966년 5월 수하르토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1970년 6월 세상을 떠났다.
1968년 제2대 대통령에 취임한 수하르토 장군은 지 권 이후에도 공산주의자들을 국가 전복을 노리는 세력, 이슬람 급진주의를 체제 위협 세력으로 정하고, 견제 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그는 경제 개발 추진을 전면에 내걸고, 미국, 일본, 서구 제국과의 협력관계를 중심으로 한 국가 재건에 나섰다. 그 후 여섯 번 대통령에 연임한(약 30)수하르토의 정치에 의해, 국민 소득의 향상, 쌀의 자급 자족 체제 확립, 중공업 부문확대 등의 성과를 울렸다. 그 반면 개발에 혜택을 입은 층과 그것에 소외된 층과의 빈부 격차 등의 문제들이 표면 화 되었다.
B.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및 종교 상황
1. 대통령과 내각
대통령은 국민협의회에서 선출된다. 대통령은 국가 원수로서 일반적인 모든 권한을 가지며, 국민 협의회에서 채택된 국가의 주요시책에 따라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하고, 결과에 대한 책임은 국민협의회에 대해서만 지며, 국회에 대해서는 지지 않는다. 대통령은 국군 통수권, 비상 사태 선포 권을 가지고 있으며, 임기는 5년이나 헌법에 연임제한에 관한 조항이 없기 때문에 연임이 가능하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기구로는 내각이외에도 최고자문위원회(DPA), 중앙정보부 (BAKIN), 국가 안보 위원회 경제 위원회 등이 있다.
내각은 대통령의 정책 수행의 주된 목표나 시대적 상황에 따라 특별한 명칭을 가진다. 1993년 3월에 수하르토의 6 연임 대통령 임기(1993-1998) 동안 대통령을 보좌할 제 6차 개발 내각(Kabinet Pembangunan VI)이 출범하였다. 내각은 21명의 각부 장관, 3명의 조정 각료, 8명의 국무 장관, 6명의 차관, 3명의 장관 대우 고위 인사 등 총 41명으로 구성되었다.
현재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ABdrrachman Wahid 이 제 4 대 대통령으로 임명되어 일하고 있지만 정권을 잡기 위한 다른 정당들과의 치열한 정권 다툼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신문에서 요즘 우리가 보는 것처럼 각종 테러행위와 범죄들이 일어나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현 정치상황은 매우 어렵고 혼란스러운 상태이다.
2. 경제 사회
인도네시아는 광활한 영토와 1억 9천만에 달하는 많은 인구, 그리고 석유, 목재를 포함한 풍부한 천연 자원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50년에 이른 화란 식민 지배와 근대적인 경제 개발의 역사가 짧아 1인당 국민소득은 약 1,000달러 정도에 불과하다.
인도네시아 경제의 구조적 특징은 1차 산업과 부존자원에 크게 의존하며, 농업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과 일본이나 중국, 구조로 소득 계층과 지역간 편차가 심한 것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상권을 중국인이 소유하고 있다. 대부분의 상권을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다가 보니까 현재 인도네시아 현지인과 중국인들과의 갈등이 계속 일어나며 중국인 가계 약탈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현재 인도네시아는 IMF로 경제뿐 아니라 사회적인 불안으로 여러 가지 범죄가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는 현상이다. IMF 이후 인도네시아의 GNP는 600달러로 떨어지고 또한 물가가 계속 적으로 폭등하고 인도네시아 통화인 루피아 가치의 폭락으로 국민들은 더욱더 어려움 속에 처해 있다. 이런 한 때일수록 정부가 경제대책에 힘을 써야 하는데 사실상 인니 정부는 정치에 의한 정권 다툼으로 경제 회복에 대한 국민들에 기대에 그리 큰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다.
3. 주요 종족
종족별로는 전체인구의 약 45%를 차지하는 자바족, 순다족(14%), 마두라7%), 미낭카바우(3.3%), 수마트란 말레이(003%), 바타(3%), 부기스(3%), 발리(2%) 등의 주요 9개 종족과 300여 종족들이 있으며, 약 250에서 400여의 족속 어 들이 있다. 토착 인구 욍도 중국계가 약 4% 정도 살고 있으며, 인도, 파키스탄 및 아랍인들이 모두 2만 명 정도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그들 고유한 관습과 종교 등을 유지하면서 매우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a. 자바족(Jawa)
자바섬 중, 동부에 주로 거주하고 있다. 그리고 정부의 인구분산 정책에 의하여 수마트라, 깔리만딴 등의 다른 섬으로 많이 이주하고 있다. 대다수 인도네시아의 다른 족들과 마찬가지로, 자바 족들도 인도네시아 공용어(Bahasa Indonesia)를 사용하지만 그들 자신끼리는 자바 어를 아주 즐겨 사용한다. 자바 어는 4세기경에 남인도 Pallwa 문자에서 유래하고 있으며, 대화하는 사람의 지위, 계급, 나이, 친분의 정도에 따라 높임과 낮춤말이 있다. 이웃과 대화를 할 때나 행동을 할 때, 매우 정중하고 예의가 바르다.
이들은 성격이 온순하고, 순종을 잘하지만, 속마음은 잘 표시하지 안고 고집이 센 편이다. 속으로는 싫어해도 겉으로는 항상 부드러운 표정과 언행을 한다. 마음에 상처를 받아도 좀체 들어내지 않는다. 자바 족들의 이름은 흔히 ‘오’로 끝난다. 예를 들면 “수하르토, 수카르노, 위도도, 등”, 대통령을 비롯하여 지도층이 많은 족속이다.
이들은 13세기경부터 회교에로 개종을 하였지만, 전통 종교이며 신비주의적인 경향을 띤 “Kejawen"에 아직까지도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Kejawen 회교도들은 엄격한 회교 율례를 잘 따르지 않는다. 이들은 수많은 악한 영들과 바지한 영들이 있다고 믿으며, 이들 영들은 자바인 개인의 생활에 있어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자바의 기독교인들의 신앙습관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b. 순다족 (Sunda)
자바섬의 서부 고원지대에 자리잡은 약 3천만명의 순다 족속들의 딸은 빠라히앙안(Parahyangan, 즉 “파라다이스”라는 뜻)이라 불리운다. 네덜란드 식민 지배하에서 커피 및 차 재배의 중심지였고, 대부분 농사를 짓고 산지에 살고 있다. 순다 회교도들은 대부분 애니미즘과 오래된 순다 전통 미신과 혼합되어 있고, 복음에 대하여 아주 적대적이다. 이들의 생활은 대부분이 매직(미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불명예스럽게 죽은 사람은 나중에 심술궂은 귀신이 되어 여기저기 방랑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매우 보수적이며, 변화를 싫어하며, 이사나 집을 떠나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c. 바딱족 (Batak)
바딱 족은 4개의 중 언어와 그의 방안들을 사용하며, 토바에 약 80%의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다. 루터 교회가 가장 오래 되었고, 가장 큰 교회를 이루고 있다. 바딱 족들은 활달하고 유쾌하며 성급한 기질을 갖고 있으며 직선적이다. 겉으로는 거칠어 보이나 사귈수록 관계를 돈독히 한다. 군부, 종교계, 학계에 많은 인사가 진출해 있고 과격한 인사가 많다. 한국인과 비슷한 매운 음식을 먹으며, 보신탕도 선호한다.(보통 이슬람국가에서 개고기는 금물이다.)
4. 문화 및 습관
인도네시아는 많은 언어와 종족이 함께 어울러져 있는 복합 문화의 나라이며, 인간 관계를 중시하는 관계 중심의 사회이다. 단일 언어와 단일 문화에 익숙한 한국 사람들은 이러한 이질적 복합문화권을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곧 잘 문화나 생활관습에 대하여 비교하고, 판단하며 비판의식을 갖기가 쉽다. 이것은 곧 다른 문하를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으로 발전하여 문화 충격을 받게 되고, 관계 중심의 사회에서 고립되어, 정신적이거나 육체적인 질병으로 이어지며, 필요치 않은 오해와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
다음의 관습들은 자바섬을 주로 하였다.
a. 인사 및 대화
1) 인도네시아인들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웃으며 인사를 잘한다. 이럴 때는 같이 웃으며 인사를 하는 것이 좋다.
2) 또 각종 예배나 모임 시, 매주 만나는 사람, 심지어 어린아이들에게도 악수를 하면서 인사를 나누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악수를 할 때는 너무 꽉 쥐거나, 흔들지 말고, 살며시 잡는 것이 좋다. 보통 남자가 여자에게,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청한다.
3) 악수 후에 손을 가슴에 대고 내리는 사람들을 가끔 볼 수 있는데, 이는 진정한 마음 으로 인사를 받았다는 의미이다.
4)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남들과 대화를 할 때, 큰 소리로 말하지 않는다. 반면에 우리
한국인은 큰소리로 종종 말하는 경우가 없쟎아 있다. 이러한 태도는 자칫 오해와 불이익을 당할 소지가 잇는 대표적으로 문화 차이이다. 가급적 인도네시아 사람에게는 큰소리로 말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는 화가 나있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 물론 화를내는 것은 금물이다. 상대방의 감정이 한국인에게 극히 좋지 않은데, 화를 낼 경우에는 상해나 어려운 경우를 당할 수도 있음을 알자. 그리고,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당신의 감정을 상하는 이야기를 했다 하더라도, 면전에서 상대방을 비방하거나 주먹질을 하지 않도록 자제해야 한다. 대화 중 불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상급자 혹은 중개인(소개한 사람)에게 말을 하거나, 감정을 어느 정도 삭힌 후에 차근차근 말을 하는 것이 지혜다. 그러나, 암보 및 바딱, 므나도지역 사람들은 대화시 큰소리로 이야기하며, 감정 표현을 직접적으로 하는 경향이 있다.
5)연장자가 말할 동안에는 조용히 관심을 가지고 듣는 것이 예의이며,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해서도 안되며, 다리는 나란히 혹은 겹쳐놓고 한다. 무의식중에 허리에 손을 얹고 서있는 것은 “나는 화가 나있다”는 표시이다. 상식적인 것이지만, 앉을 때 발을 곁다리 하는 것도 좋은 행동이 아니며, 남의 얘기를 들을 때 손으로 턱을 받치거나, 손을 깍지해서 뒷머리에 두는 것도 좋지 않은 자세이다. 이러한 행동은 듣는 이가 상대방의 얘기에 관심이 없다는 표시로 받아 들여 지다.
6) 다른 사람의 머리에 손을 대지 말고, 무의식 중에라도 손으로 상대방의 몸을 툭툭치는 것도 좋은 예의가 아니다. 그리고 발을 가지고 사람이나 물건을 가리키는 것도 상대를 화나게 한다.
7) 회교도 인도네시아인들의 경우, 돼지고기와 개고기는 금기에 속하는 음식이다. 돼지고기의 경우, 기독교인들은 별 문제가 없다. 개고기의 경우, 므나도와 바딱 족의 경우에는 즐겨 먹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싫어한다. 이런 음식 문화를 잘 알고 있을 때, 상대에게 덕이 되지 않는다고 느낄 경우에는 환경에 따라 삼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8) 대체로 중국계를 제외한 본토 인도네시아 남자들은 코밑 수염을 기르는데, 이는 어른이 되었다는 표시이다.
b. 체면과 자존심
1)인도네시아 사람들, 특히 자바사람들에게 체면은 내용보다 훨씬 중요하며, 자기들의 약점, 부족함은 공개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잘 시인하려고 하지 않는다. 특히 남이 보는 앞에서 그렇다.
공장에서 기술을 가르쳐 줄 때, 의사 소통이 잘 안된 경우인데도 “안다”고 대답을 하여, 한국 기술자들이 애를 먹거나, 화를 내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이럴 때, 참는 것이 약이다). 길을 물을 때도, 어렴풋이만 알아도, “안다”고 하면서 가르쳐 준다. 모르는 길을 갈 때에는 적어도 세 명 이상에게 물어서 두 사람의 말이 일치하면 믿어도 좋다(외국인에게 일부러 골탕 먹이려고 하는 이들도 있으니). 교회 목회자의 위신을 깍는 말이나 행동은 가급적 삼가는 것이 좋다. 한국에서도 동일하지만… 가끔 선교사는 목회자와 교인을 구별하지 않고 얘기하는 경향이 있고, 이로 인하여 목회자가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되어지면, 본의 아니게 선교 사역에 큰 장애가 될 수 있다.
2) 인도네시아 사람으로부터 진지한 사과의 말을 듣는 것은 드문 사례이다(감사의 말도). 왜냐하면 자존심 때문이다. 언제나 모임이 끝날 때나 이별시에 공식적으로 하는 말에 “만약 잘못한 것이 있으면 큰 용서를 빕니다”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실제로 잘못한 것이 있는 경우에 사과를 못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례이다.
5. 언어 관습들
a. 현재의 인도네시아 어는 1928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Trade-Malay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이곳은 많은 방언과 족속들로 이루어진 곳이라, 자기 민족어로 얘기를 해주면 무척 좋아한다. 이들에게 순다어나 자바어 등의 지방어로 인사말 몇 마디를 알아 놓고 사용하면 의외로 반갑게 대해 준다.
b. 대답시 “Ya(야)”, 혹은 대화시 “Lah(라)” 등의 말이, 한국어 어감에서는 명령형이지만 인도네시아 어 표현에서는 정중한 말이다. 그리고 가급적 존칭어나 공경 어를 뜻하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예를 들면, 상대방을 호칭할 때, "Kamu"보다는 “Anda"라는 말이 훨씬 공경어이다. 인도네시아 공용어는 영어처럼, 평어이지만, 자바어, 순다어 등, 족속 언어는 한국말처럼 공경 어와 낮춤 말 등 여러 등급이 있다.
c. 이들의 어제(kemarin)와 내일(Besok)이란 말에는 지나간 과거와 다가올 미래란 의미도 있다. 그러므로 이들이 약속을 할 경우 몇 월, 몇 일 날 까지 해줄 것이라는 말이 없이, 단지 베속(내일)이라고 할 때. 그것은 기약 없는 먼 미래를 의미할 수 도 있다.
d. 인도네시아에서는 사람을 부를 때 꼭 호칭을 사용해야 한다. 대개 결혼한 남자는 “Bapak (바빡)”, 여자는 “Ibu(이부)”라고 부르고 줄여서 “빡(Pak)", "부(Bu)"라고 해도 좋다. 결혼하지 않는 남자를 높여서 불러줄 때, ”Mas"여자는 “Mbak" 혹은 ”Neng"(순나족)라고 하면된다. 지역마다 베짝 운전수, 기사나 점원 등의 호칭이 다르므로, 잣니이 사는 지역에서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부르는 지를 머저 배우는 것이 좋다. 자바등의 지역에서는 중국인이나 외국인 남자어른을 향하여 “옴(Om)"이라고 부른다. 중국계 교회에서 목사를 Om(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Ⅲ. 종교이해
인도네시아의 헌법은 이슬람, 개신교, 카톨릭, 힌두교, 불교의 5대 종교를 인정하고 있다.
(헌법 제 17조 3항)
A. 빤짜실라(Pancasila)
인도네시아 정부의 종교 정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가 최고 이념인 "빤짜실라"를 알아야 한다. 빤짜실라(Pancasila) 라는 말은 다섯을 뜻하는 'Panca'와 원리를 뜻하는 'Sila'의 복합어이다.
1945년 5월 29일 Rajiman 박사를 수반으로 하는 인도네시아 독립 준비위원회는 다가오는 독립을 앞두고 신생국 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를 하던 중, 독립의 정당성과 근거를 합법화할 모체를 연구하고 있었다. 빤짜실라는 수카르노에 의해서 주창되고 이로니적 체계가 완성되었지만, 인도네시아의 전통적인 가치관인 가족 중심주의, 협의주의, 상부상조 정신을 근간으로 하여 발전하고 구체화된 것으로 생각된다.
1. 전지전능한 유일신에 대한 신앙심
신의 존재를 인정함을 전제로 하여 인도네시아 인들은 각자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서 한 신을 섬기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 특정 종교에 대한 신앙을 강요할 수 없도록 헌법에 선언되어 있다.
2. 정의롭고 예의 바른 인간성
모든 인간은 신의 피조물로서 존엄한 대우를 받는다. 인종이나 가문, 종교, 사회적 지위의 다름에도 누구나 똑같은 권리와 의무를 갖고 서로 존경하고 사랑해야 하며 동등한 대우와 기회를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
3. 인도네시아의 통일
민족주의적 개념을 내포하고 있는데 국민의 통합을 촉진시키고 국가의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 애국심을 강조한다. 1928년 서약되고 지키져 온 원칙인 “한 국가, 한 국민, 한 언어”의 일체감은 “다양성 속의 통일”(Bhinneka Tunggal ika)을 토대로 하여 발전된다고 믿는 것이다. 다양한 민족과 많은 도서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는 인도네시아를 하나로 뭉치는 데에 크게 공헌하고 있는 것이 ‘바하사 인도네시아’(bahasa Indonesia)라 할 수 있다. 이는 옛날 상인들이 장사를 위해 쓰던 말로서, 말레이어가 그 근본인데, 정부는 국교 의무 교육을 통해 국어 보급에 힘쓰고 있다.
4. 대중합의와 대의 제도를 통한 지혜로운 정책에 의한 민주주의
모든 인도네시아 인은 국가의 일원으로서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갖고 있으며, 이러한 권리와 의무를 행사함에 있어서 항상 사회와 국가의 중요성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결정은 반드시 대중 합의에 의해 만장 일치로 이루어 져야 한다.
5. 전 인도네시아 국민을 위한 사회 정의
국민 복리의 공정한 분배를 의미한다. 이는 국가의 자연 자원과 잠재력이 가능한 한 전 국민들에게 최대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데 유용 되어져야 한다.
정부는 헌법의 전문에 “전지전능한 유일신에 대한 신앙”을 천명하고 이슬람, 불교, 힌두교, 기독교, 천주교를 공식 종교로 인정하여 동등한 권리와 특권을 부여하였다. 이들 종교를 관장하기 위해 종교 국을 두고 적극적인 대책을 수립하며 종교를 지원하고 있는 것이다.
인도네시아 종교 정책의 한 특성은 정부가 종교를 적극 지원하는 것인데, 그 목적은 궁극적으로 국가 발전을 위해서이며, 종교들이 사회 관계 속에 조화를 이루어 상호간에 관용을 유지토록 하기 위함이다. 헌법상 모든 종교는 동등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 같으나 사실상 정부의 종교 정책은 다수파의 종교 위주로 시행되기 마련이다.
*법령 제 70호, 77호
1978년 8월 인도네시아 정부는 여러 지역에서 종교적 긴장이 발생하자, 법령 제 70호, 제 77호를 발표하였다. 이 긴장은 주로 회교 국가 수립을 지향하는 이슬람교에 의해 생긴 것인데, 이들과 타종교간의 갈등, 인도네시아 고유한 사회 관습과 이슬람법의 갈등, 이슬람교도와 정치 군부와의 갈등, 모슬렘끼리의 신학적 입장차이에 의한 갈등 등이다.
정부는 법령 70호에 “모든 사람은 자신의 종교를 가질 권리가 있으며, 다른 사람을 공개적으로 개종시키려는 시도는 불법적인 것”으로 규정 짓고, 소책자 배포, 야외 전도와 심방 전도 등을 공식적으로 금지 시켰다. 그리고 개종 및 전도를 목적으로 한 활동이나 금품 수여, 구호 등도 사실상 금하였다.
또 외국 선교사들에 대해서는 법령 제 77호에 의해 선교사들은 인도네시아 인들을 훈련시켜 그들의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정하였다. 따라서 모든 외국인 선교사들은 일정 기간 내에 현지 인을 훈련시켜 선교사의 사업을 인수케 할 목적으로만 체류할 수 있게 하였다.**
B. 기독교 선교 역사
인도네시아는 “빤짜실라”라는 국가 이념에 의해 특히 종교의 면에서 누구든 한 종교를 택해 주민 등록 중에 종교를 기재해야 하고 국가의 안정을 위해 각 종교는 다른 종교에 적대적일 수 없고 다른 종교를 가진 자에게 자기의 종교를 강권해서는 안되는 상황에서 내심이야 어떻든 겉으로 보기에 기독교는 다른 종교 특히 이슬람과 대화(dialog)의 관계를 유지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다. 이런 가운데 앞으로 인도네시아 교회가 가야할 길이 무엇이며 선교의 방향을 잡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하겠다. 여기에도 “역사에서 배운다”는 평범한 진리가 적용될 성싶다.
1. 인도네시아 선교…과거
처음 기독교가 인도네시아에 들어오기 전 인도네시아는 긴 종교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가 이미 들어와 있었고 각 종족이 가진 자신들의 전통적인 민속종교가 이미 뿌리 깊게 내려오고 있었다.
민족 종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들은 무역과 함께 인도네시아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미 불교와 힌두교가 들어와 있었고 15세기에 이슬람이 들어오고 16-17세기에 서구의 문물과 함께 포르투갈을 통한 로마 카톨릭(잠시나마 스페인에 의해서도) 네덜란드를 통한 개신교가 들어오게 되었는가. 대부분 무역과 함께 시작되었기에 무역이나 종교의 중심지가 해변을 중심으로 발달하게 된다.
16-18세기에 서구인들은 교회를 세우는데 주력하게 되는데 그 전략은 거의 비슷했다. 즉 전도하고 교회 세우고 파트너쉽이란 명목으로 서구인들의 말할 수 없는 권위가 앞섰다. 그러면서 그들의 더 중요한 과제는 경제와 정치에 있었다. 그러기에 전하는 자들, 즉 자신들의 선교사적 삶에 관심이 없던 때였다.
a. 포르투갈과 함께 열린 인도네시아 교회 시작
1) 역사 배경
15세기 인도네시아 상황은 정치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는 시대이다. 이것은 세상에서 넓어지는 무역과 관련이 있다. 서구문물과의 접촉으로 인해 정치 경제만이 아니라 문화에까지도 그 영향이 세차게 불어 닥쳤다. 그것은 당연히 포르투갈 상인들이 그들의 종교인 기독교를 가지고 왔음을 뜻한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보면 이슬람을 신봉하는 상인 특이 이란 사람들의 영향도 인도네시아에 크게 미치게 되었다. 그러기에 인도네시아에서 16세기는 모든 분야에서 격변의 시기라고 말해 틀림이 없다.
2) 네덜란드 사람들이 들어오며 인도네시아 선교의 장이 열리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 뿐 아니라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을 잘 돌보지 못해 목적도 계획도 업는 종교를 전하는 선에서 끝이 났다. 그런 반면 이슬람은 더 강해지고 많은 지역에 전파되었다. 그들은 포르투갈 인들을 그들의 적으로 간주하여 자주 싸움이 일었다. 그 와중에 이미 기독교인들이 된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럴수록 아직 어린 기독교인들은 더욱 강하게 단련 되어갔다.
1605년 암본에서 네덜란드가 포르투갈을 내어쫓고 인도네시아에 발을 들였다. 포르투갈에서 네덜란드로 옮겨가는 이 시기에는 기독교가 인도네시아에서 평가 절하되는 기간이었지만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 큰 영향을 끼치며 기회를 연 때였다.
b.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시대의 인도네시아 교회(1605-1799)
1)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라 표기) 통치와 교회 상황
VOC가 들어서고 아시아에 세력을 끼치고 인도네시아를 다스리면서 인도네시아 교회는 싫든 좋든 그 영향과 간섭에 들어가게 되었다. 교회에 대한 정부(VOC)의 간섭은 교회가 국 교회라는 인상을 주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정부도 어려움을 겪었는데 정치적이고 경제에 초점을 맞춘 VOC가 영적인 교회와 갈등을 빗기 때문이다. 정부는 모든 교회의 상황을 알려 했고 모든 교회가 당면하는 모든 문제나 언론을 휘어잡으려 했다. 예를 들면 교회에서 한 사람을 교회 법으로 다스리려 해도 그가 정부의 요원이면 불가능했다. 그래서 이때 교회 성장은 어색하고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VOC - Vereenigde Oost-Indische Campagnie(동인도 회사)
2) 17-18세기의 인도네시아 교회 성장
VOC가 들어온 곳에 일반적으로 교회도 세워졌다. VOC는 스스로 교회 안에 권한이 있다고 느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 모든 영적인 일을 돌보며 아주 사소한 것까지 조정할 권한이 있다고 생각했다. 결과는 여러 어려움이 있기는 했지만 기독교가 정부의 비호 아래 성장케 되었다. 17세기에 자카르타의 목사들이 서부 수마트라와 다른 자바섬의 시골 지역들로 파송되고 18세기에는 빠당, 중부 자바의 서마랑 동부 자바의 수라바야에 교회가 서게 되었다. 인도네시아에서 교회 성장은 아주 느리게 진행되었다. 요인은 교회 안에 현지인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이 전도를 위해 파송을 받아도 VOC 밑에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만 보내졌다. 그러기에 보내지는 장소 월급, 몇 명을 목회 하는가, 등이 위로부터 정해졌다.
3) VOC시대의 교회 조직, 교훈 그리고 교회 생활
네덜란드 교회 조직, 신앙고백, 신앙생활, 신앙 훈련 등이 인도네시아 교회에 그대로 심어져, 인도네시아 교회 모델이 되고 규격이 되었다. 인도네시아 교회는 칼빈주의에 입각한 개혁주의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네덜란드 식민통치 밑에서 그들의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큰 고통이었다. 네덜란드로부터 온 교회 행정, 기반은 성장을 원하는 식민지역에(인도네시아) 적합하지 않은 것이었다. 인도네시아 지도자들은 네덜란드인들의 정치적이거나 식민지적 발상에서 나온 목사들은 그들이 정한 곳으로 보내는데 대해 큰 반발을 보였다. 네덜란드의 교회들은 인도네시아 교회가 칼빈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성화가 대단했다.
4) VOC 시대의 인도네시아 사람들 사이의 기독교
식민지하의 인도네시아 인들의 삶은 모든 분야에서 질서가 잡힌 반면 정부에 의해 너무 제한되어 있었다. 정신적이고 실제적인 면에서 해방하여 자유를 얻을 만한 여력이 없었다. 네덜란드인은 삶의 어느 부분에서건 자유로웠지만 인도네시아 인들의 상황은 정반대였다. 인도네시아인 스스로 교회를 세우지 못하며 교회 안에서도 인도네시아인 스스로 무엇을 결정하지 못했다. 늘 네덜란드 교인이 곁에 있어야만 했고 교회도 그들이 있어야만 세워 질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 인은 네덜란드 교인 옆에서 들러리 아니면 구색 맞추기에 불과 했다. 결론적으로 이런 상황에서 인도네시아인들의 영적인 성장은 기대할 수 없다. 이 시대의 기독교의 성장은 오직 인도네시아 교회 성장의 서곡에 불과하다. 19세기에 들어서야 진정한 교회 성장의 첫발을 딛게 된다.
c. 19세기 교회 성장의 개요
1) VOC가 물러가고 일본이 침략할 때까지 정치적 개요
VOC의 말할 수 없는 독점으로 인해 사회 경제가 혼란하게 되고 결국 영국과의 해상 권력 다툼에서 지고 1799년 12월 31일 VOC는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때 이래로 인도네시아는 더 이상 무역을 미끼로 한 어떤 조직에 속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네덜란드의 식민 통치하에 있었다. 프랑스 혁명의 결과로서 종교의 자유라는 기치아래 많은 전도자들이 인도네시아로 돌아왔다.
2) 개신교의 영적 부흥은 1800년경에야 비로소 일어났다.
전 세계의 기독교 사회에서 교회가 복음을 어디든 가서 전해야 한다는 책임에 대한 자각이 있었다. 인도네시아에 들어온 많은 선교사들은 경건과 복음 전파를 강조하는 청교도 정신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들 경건주의 자들로 인해 기독교 기구들이 서고 성경학교가 서곤 했다.
d. VOC교회를 대신한 개신교회
1) 새 환경
새 선교사들이 인도네시아에 들어 올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고 그들은 인도네시아 교회가 어디서든 성장할 수 있는 뜨거움을 가지고 왔다. J.KAM은 NZG 라는 네덜란드의 기구로부터 파송받은 첫 선교사였다. 그는 말루꾸에서의 사역에서 그가 보인 강인함과 용기로 인해 말루꾸의 사도로 불린다. 그로 인해 인도네시아 교회 내에 새 피가 흐르게 되었고 영적 성장으로 이어 졌다.
2) 국교회로서 인도네시아 개신 교회의 조직
각 종교가 정치와 관계없이 자기의 종교를 확장하고 보존 할 수 있는 자유가 정부 (인디아 부란다라 불림: 네덜란드 식민지하의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의 합작 정부)에 의해 이때 주어진다. 이로 인해 더 크게 인도네시아 교회가 성장하게 된다. 더 이상 어느 특정 교회의 교리를 따르지 않아도 되었다. 인도네시아 개신 교회는 자립된 교회이다. 그 교회는 인도네시아 교인들로 구성되었고 인도네시아 개신 교인들을 위해 활짝 열려있다.
그들은 오직 복음을 전하는데 힘을 합치기 위해 교회가 갈라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기에 목사들은 주일 설교 계획과 설교 장소들을 정부에 보고하여 서로간에 조정을 하였다. 그러나 위험한 것은 교회의 행정을 국가가 맡아 하는 격이 되었다. 그래서 결국은 반 작용으로 교회가 스스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1863년부터 1918년부터 일어나 결국 1935년 교회와 국가의 행정이 분리되게 되었다.
3) 교회 장소들과 상황
이때 교회 적으로나 영적으로 개신교가 큰 이득을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보면 교회가 인도네시아 사람이든 유럽 사람이든 영적인 관리를 하거나 조직을 만들 수 있는 권위가 주어진다. 그러면서도 하나가 되려는 노력은 계속되어 19세기까지 오직 한 개신 교단 (GPI)만이 있었다. 그리고 영적인 사역을 높이기 위해 1878년 데뽁에 신학교를 세웠다.
4) 국가와 분리된 후의 개신교
1935년 국가와 교회 행정이 분리된 후 새로운 개신 교회 성장의 표식이 나타나기 시작했음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개신교 총회에서는 예배 순서, 전도 전략 등 교회 법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하나이던 교회조직이 분열하기 시작하여, 1934년, 35년, 48년에 각각 다른 교회조직체가 세워졌다. 지금은 인도네시아에 복음 적인 교단협의체, WCC 계통의 교단협의체 그리고 오순절 교단협의체, 침례교회 연합회 등 4개의 큰 조직아래 약 280여 교단이 분산되어 가입되어 있다.
2. 현재 기독교 현황
현재 인도네시아는 정치적으로 불안하고 안정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국민들이 매우 불안해하는 시점에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인도네시아에 정치가 불안할 때 인도네시아 교회들이 많은 타격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실제적으로 이슬람들이 자신들의 정권다툼을 위해서 교회를 불태우고 여러 가지 행정적인 방법으로 교회들을 핍박하고 있다. 더욱이 요즘 메스컴에 많이 등장하는 암본 사태는 많은 크리스챤의 피를 흘리게 했다. 암본은 이슬람 숫자보다 크리스챤이 많은 특별한 섬이다. 하지만 암본에 있는 무슬림들을 위해 자바섬에 있는 강한 이슬람 세력이 무기를 가지고 암본으로 들어가 크리스챤들을 학살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이렇게 종교적인 문제가 굉장히 민감하기 때문에 작은 섬에서 발생한 문제가 인도네시아 전체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 외부로 부터의 비난의 소리를 인식한 인니 정부는 현재 크리스챤을 보호한다고 하지만 강하고 조직적인 이슬람 세력의 핍박을 막기는 힘든 형편이다. 특별히 암본지방의 크리스챤을 보호하기 위한 대책이 시급히 필요하며 이러한 어려운 상황속에서 인도네시아 교회들이 기도로 잘 극복할 수 있도록 우리들의 중보도 필요한 시기이다.
3. 한국교회의 해당국가에 대한 선교현황
현재 한국에서는 98가정 약100가정의 선교사들이 인도네시아에 파송되어 인도네시아의 거의 대부분의 섬에 흩어져 사역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 약100 가정의 선교사들은 인도네시아 선교사 협회에 가입한 선교사 수이지만 사실 그 외에도 선교사 협회에 가입하지 않고 활동하고 있는 선교사들이 있다.
a. 신학교 교수 사역
인도네시아에 들어가 있는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당면하는 제일 큰 문제는 비자 문제이다. 사실상 선교사비자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대부분 신학교 교수비자로 들어가 인도네시아에 서 활동하고 있으며 현지 신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현지 신학교에는 우리 나라뿐 아니라 인도네시아 현지 교수들과 다른 외국에서 온 교수들이 있지만 현지 학생들에게 우리 나라 선교사들은 복음의 열정이 있는 교수로 많이 알려져 있다.
선교사들은 신학교에서 현지 목회자 후보생들을 양육하면서 현지 교회 지도자 양성을 위해서 학생들을 선발에 한국에 보내어 교육받을 수 잇도록 돕기도 한다.
b. 현지교회 목회
현지 교회 목회사역은 다른 사역에 비해 그리 많지 않은 선교사들이 참여하고 있지 않지만 열심히 진행되고 있다. 이 사역을 하고 있는 선교사들은 대부분 인도네시아 생활에 익숙한 선교사들이지만 한국과는 많이 다른 인도네시아 문화와 언어 차이 때문에 한국 선교사가 현지 목회를 하는 것은 어려운 사역 중에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인도네시아에 있는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신학교에서 사역하면서 현지 교회 목회자와 동역 하는 형태를 많이 취하고 있다.
c. 어린이 사역
인도네시아에서 거리를 다니면 많은 어린이들을 만날 수 있는데 인도네시아는 교육환경이 열악하여서 학교에 가야할 아이들이 길에서 동량을 하고 있거나 음료수나 사탕같은 작은 것들을 도로에서 팔고 있는 모습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러한 어린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현재 어린이 전도협회에서 파송된 선교사와 여러 선교사들의 협력으로 어린이들에게 성경학교를 열고 유치원을 세우는 등 어린이들을 위한 사역이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에는 한국 선교사가 직접 인도네시아 아이들을 양육하기도 하지만 먼 장래를 위해서 현지인 교사 양육을 위한 사역도 이루워 지고 있다.
d. 성경번역
우리 나라에서는 세 명의 선교사가 현재 이리얀자야에서 성경번역 사역을 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공용어가 있지만 인도네시아는 여러 종족이 모여서 사는 곳이기 때문에 섬이나 밀림으로 들어가면 공용어를 사용하지 않거나 모르기 때문에 이들을 선교하기 위해서 성경번역 사역이 필요하다. 특별히 선교사님이 계시는 이리얀쟈야는 여러 가지 환경이 열악한 조건으로 선교사님들의 건강문제나 가정문제가 많이 일어나고 있다.
e. 기술사역
인도네시아는 기술이 많이 발전되지 않은 나라이기 때문에 외국인 기술자들에 대한 배려가 크다. 현재 인터넷에 관심이 많은 인도네시아에 우리 나라 선교사가 기술을 가르쳐 주며 선교사역을 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의학, 건축, 농업, 미싱등 경제 회복의 과제를 안고 있는 인도네시아에 기술을 전하면서 정말로 그들에게 필요한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는 사역이 이루워 지고 있다. 이러한 기술사역은 이슬람 사회인 인도네시아에서 조금더 쉽게 무슬림들과 만나고 대화를 할수 있는 장점이 있다.
f. 한인교회 목회
인도네시아는 천연자원과 인적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에 자원이 부족한 우리 나라와 여러 가지 사업적인 면에서 관계를 가지고 있고, 현재 우리 나라에 많은 회사들이 인도네시아에 진출해 있다. 한인교회 선교사들은 인도네시아에 있는 한국인들을 위해 교회를 세우고 이들을 말씀으로 양육하는 사역을 하고 있다. 실제로 많은 한국인들이 이곳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나는 사례도 있다. 한인교회 목회는 한국인들을 위한 사역뿐 아니라 현지 교회를 돕기도 한다.
Ⅳ. 결 론
A. 코이노니아 선교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
1. 토착인 지도자 양성
현지 교회의 지도자를 양성하고 훈련하는 것이다. 현지인의 신학교육을 위하여 더 많은 전문 선교사를 파송하고 필요한 지원이 있어야 한다. 또한 이것은 현지인 유학 추진 사업을 통해 이루어질 수도 있다.
2. 교회 개척 및 지원
교회의 개척에 드는 비용이 한국의 경우와 비교할 때 매우 적다. 교회를 개척하는 일 뿐만 아니라 사역자와 그의 가족을 돕는 일도 중요하다. ACTS에서 현재 38개 교회를 지원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개척한 전체 교회 수는 279개 교회이다.
3. 방송 선교
제한적인 TV 사역 외에 라디오 방송과 인터넷 사역은 제한하지 않고 수시로 복음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 신문 역시 좋은 도구이다.
4. 교육 선교
인니 정부는 낙후된 교육수준을 개선하기 위하여 학교를 설립하는 일에 매우 호의적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학교를 세우는 일은 회교 지역에 복음을 심을 수 있는 좋은 수단이다. 학교를 선교의 전초기지로 삼을 뿐만 아니라 복음 사역자를 훈련하는 장으로 삼을 수 있다.
5. 집단 개종
집단 개종이란 부족 혹은 계급, 씨족 혹은 혈통 즉 교회로 전환해 올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사회를 통한 연쇄적 반응으로 집단적으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다. 이 집단 개종은 사회적 이탈 없이 사람들로 하여금 신자가 되게 한다. 이 집단 개종에는 추장이나 그 부족의 지도자를 개종시키는 것이 선결되어야 한다.
6. 인도네시아인들의 예술적인 민족성
그들의 예식과 춤, 연극, 음악 등을 활용하여 복음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전하는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
7. 집단 이주 정책의 활용
인니 정부는 심각한 인구 편중 현상해결을 위해 집단적인 이민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이 이민 인구는 사회의 폐쇄성이 약화되고 새로운 문물에 대해 개방적 성향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현지 선교단체나 교회와 연합하여 집단 이주정책에 참여하여 개발 및 정착 사업에 힘쓰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8. 여타의 사회참여를 통한 선교
방송이나 교육 외에도 의료활동, 기술 전수, 문서 활동 등을 통한 특수 선교의 영역이 매우 요청된다.
B. 기도 제목
1. 정보는 정부나 군 내부에서 열성적인 회교도에게 직위를 주는 정책을 쓰고 있고, 거대한 회교사원 건축을 계획하고 있다. 회교도 지식인들이 학술기관에서 영향력 있는 기독교인을 대신하기도 한다. 국가기관이 점차 회교 화되고 있으며 많은 지역에서 복음전파와 교제모임이 제한 받고 있다. 회교도가 절대다수인 지역에서는 폭동, 교회방화, 기독교인 박해가 일어나고 있다. 술라웨시, 수마트라, 그리고 특히 자바와 같은 강한이슬람 지역에서 교회가 크게 성장하는 것에 대한 반발적 핍박이 있어 왔다. 그리스도인들은 지혜와 담대함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국가 지도자들이 회교도들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도록 기도하고, 기독교인이 지혜와 사랑으로 핍박에 대응하고, 모든 방법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하자.
2. 훈련된 지도자의 부족으로 인하여 단지 명목상의 신앙 인을 낳거나 혹은 잘못 성장한 기형적 신앙인을 낳지 않도록 기도하자. 자유주의 신학의 성장과 함께 기독교 정신이 신비주의나 정령숭배적인 사고 방식과 혼합되기도 하며 도시의 많은 카리스마틱교회에서는 “성공”신학에 대한 논쟁이 있다.
3. 인도네시아 교회의 필요들이 채워질 수 있도록 기도하자. 무엇보다도 현지인이나 외국인을 무론하고 영적인 지도자들 특히 유능한 평신도 사역자들이 시급히 요청되며, 성경 번역사업의 조속한 진척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영적 필요뿐만 아니라 재정적인 지원 또한 절실하다. Asian Theological Association에 연관된 18개의 복음주의학교는 학생으로 가득 차 있고 여러 가능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학교들로부터 배출된 졸업생을 통해 인도네시아의 복음화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하자.
4. 현지 교회의 영적 각성을 위해 기도하자. 많은 교회가 초 신자에게 관심이 없다. 새신 자는 대개 명목상의 기독교인이다. 부흥에 대한 그들의 무관심을 깨고 복음 전파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하자.
5. 다원적인 협력선교가 이루어지기 위해 기도하자. 지나친 경쟁심, 선교정보의 독점, 개별적 선교 훈련 등으로 인해 많은 시간과 자원이 낭비되지 않아야 한다. 특별히 이슬람 선교전략에 대해 현지 교회 및 선교 단체들 상호 협력적 연구가 절실하다. 성경번역선교회는124개 언어로 성경을 번역할 계획을 갖고 있다. 비자 문제로 선교사들이 추방되어 선교사의 수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어 번역활동이 큰 제한을 받고 있다. 인도네시아 토착 성경번역 단체인 카르티다야를 위해 그리고 많은 토착인 번역자가 세워지도록 기도하자. 이 나라에는 시급히 번역되어야 할 129개 언어와 그 외 번역이 필요한 372개 언어가 존재한다. 문서 선교단체(기독교출판협회, CLC, 베다니 하우스등)들을 위해 기도하자. 좋은 기독교 문서가 너무 부족하다. 150만 기독교 가정에 성경이 없다. 방송선교가 더욱 활성화될 수 있기 위해 기도하자.
8. 한국교회가 영적인 자만심에 사로잡혀 있을 것이 아니라 인도네시아 회교도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더욱 선교에의 열정을 일으킬 수 있도록 위해 기도하자.
9. 인도네시아 국민들이 정치경제의 불안으로 많은 어려움이 일어나고 있다 경제와 정치적 안정을 위해서 기도하자.
10. 한국에 들어와 있는 약 이만 사천명의 인도네시아 외국인 근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자 이들에게 한국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역자들과 한국 교회의 협력이 이루어 져서 이들이 한국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며 인도네시아의 복음을 전할수 있는 복음의 사역자로 파송 될수 있도록
11. 사역을 위협하는 요소들을 위해 기도하자. 엄청난 모슬렘 인구-인도네시아는 세계에서 제일 큰 모슬렘 왕국으로서 정령숭배, 우상숭배와 기독교의 혼합-특히 발리, 숨바, 플로레에서 심하다 이곳에 모든 악한 영이 무너지도록 함께 기도하며 현재 선교사 비자의 감소로 외국 선교사가 점점 감소하고 있는데 인도네시아에 들어갈 수 있는 문 또한 하나님께서 여실수 있도록 기도하자.
12. 암본 지역의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립이 속히 끝날 수 있도록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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