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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신 중위는 대구에 있는 미8군사령부 정보처에서 3시간가량 북한에 관한 여러 가지 정보사항을 알려주었다.
원산의 진지 구축 상황, 평강 고랑포 등의 정확한 보급소 위치와 방어배치 상황 등을 제보했다. 나중에 미군이 폭격할 때 필요한 정보들이었다.
심문이 끝나자 ‘앞으로 희망이 무엇이냐’고 내게 심문관이 묻기에 나는 “한국군 육군본부로 보내 달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곧바로 지프가 와서 나를 육본으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예상보다 신속한 조치였다. 나는 우리 육본 정보국 장교의 안내로 내가 근무했던 작전국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내가 전쟁 전에 주로 근무했던 곳, 그래서 제일 먼저 찾아간 것이었다.
육본 작전국 도착 아무도 못 알아봐
그런데 내가 막상 작전국 실내에 들어서자 처음엔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당시 얼굴이 심하게 부어 있다 보니 더더욱 나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게다가 나는 이미 죽은 전사자로 등록돼 있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이렇게 외쳤다. “나 박정인 소령이오!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서 돌아왔소!” 나는 목이 메어 더 이상 다른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작전국 사람들은 그때서야 내게 달려 와 “이게 웬일이냐!”며 부둥켜안았다. 나도 몰래 눈물이 흘렀다. 이때 나의 육사 동기생인 유근국(柳根國) 소령이 “너 기어코 살아 있었구나! 우리 모두는 네가 전사한 줄만 알고 있었는데…” 하며 기쁨의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진한 전우애를 느끼는 순간이었다. 유 소령은 자기 군복과 군모를 내게 벗어주었다.
포로가 된 이후 소령 계급장을 달고 정식 복장을 갖춰보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공산군 병졸로 위장하느라 머리를 빡빡 밀어버렸기 때문에 나는 그후로도 한동안 모자를 쓰고 다녀야 했다.그 길로 작전국 강문봉(姜文奉) 국장께 인사를 드리러 갔더니 깜짝 놀라며 “아니, 이거 유령 아니야?” 하며 내 손을 꼭 잡아주셨다.
그러면서 육사6기 동기생들이 내가 죽은 줄로 알고 조위금(弔慰金)을 거둬 놓았다는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손경수(孫鏡洙) 소령이 54만 원을 내게 전해주었다. 죽지도 않고 살아서 조위금을 받아 본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을까? 그 돈으로 나는 한 달 동안 후방에서 편안한 휴식을 즐길 수 있었다. 당시 일반 참모 비서실장으로 있던 강문봉 장군은 조위금과는 별도로 내게 많은 위로금을 주었다.
나는 치료와 휴양을 마치고 거제도(巨濟島)를 찾아갔다. 그곳에는 1·4후퇴 때 함흥과 원산에서 20만 명의 피란민이 와서 산다는 소문이 있었다. 내 고향 함흥에서 우리 부모님과 형제들이 그곳에 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거제도를 찾아간 것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내 남동생의 친구를 만났다.
그는 우리 국군이 함경도 영흥(永興)에 도달했을 때 거기서 후퇴하려는 공산군을 습격하다가 내 동생 정찬(定瓚)이가 그만 사살당했다고 전해 주었다. 또 우리 부모님들은 미군이 공습할 때 농촌으로 흩어진 채 남하(南下)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돌이켜 보면 평안북도 벽동 포로수용소에서 서울까지 직선거리로는 360㎞. 그러나 우리가 헤쳐 온 실제 거리는 이보다 두세 배 더 긴 여정이었을 것이다.
장장 5개월에 걸쳐 탈출, 복귀 성공
영하 30도의 혹한 속에서 그 길고 긴 적지(敵地)를 돌파하기란 치열한 전투 이상으로 험난한 일이었다. 인간이란 위급한 상황에 직면하면 이해득실에 따라 개인행동을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 일행 다섯 명은 완전한 행동통일을 이뤘을 뿐만 아니라 단 한 사람도 배신하지 않았다. 나는 그 성공을 외람되지만 내 통솔의 결과로 본다.
6·25전쟁 당시 포로가 된 국군 가운데 적진 2000리를 장장 5개월에 걸쳐 탈출, 복귀에 성공한 사례는 우리가 유일하다. 나머지 사람들은 휴전 후 포로교환 때 모두 복귀했다. 탈출 도중 우리 일행과 헤어져 춘천으로 갔던 안태석·김규철 중위, 인현철 소위, 이 중사 등도 탈출에 성공해 원대복귀했다는 소식을 나는 육본에 돌아와서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