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둘레길 답사기 6.

[범초]

지리산 둘레길 답사기 6.

 

어제 잘 먹어서 그런지, 모두들 별 아침식욕이 나지 않아 보였다.

식후, 염보살 댁에서 불과 10여분 올라가 청수사라는 자그마한, 새로 지은 절에 올랐다.

절집이라기보다는 사가에서 꾸려 놓은 사랑방 선방 같아 보였다.

모두 출타중인지 인기척이 전연 없고 열려진 창문마다 모기장 덧창이 대어져 있고, 방안은 방금 들기름 매김질 한 것 같은 노란 장판이 반들반들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방 한 구석에는 한지로 엮은 책 몇 권이 포개져 있고 그 위에 새까만 만년필이 하나, 그리고는 온 방안이 덩그러니 비어있다. 집 매무새가 청아하고 단정했다. 생활하기에 별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

이런 곳에서 세상잡사 다 잊어버리고 수도에만 열중하는 생활이라면 필시 상팔자일 게다.

부럽기도 하고 사치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하기야 요즘 세상 도 닦는다고 반드시 고행을 해야 된다는 법은 없으니,

이왕이면 편리하고 능률적으로 수도하는 편이 바람직  할지도 모르겠다.

종교도 점점 영악스러워지는 세태를 압도하고 "리드"해 나가려면, 한 수 더 떠야 교인이 불어날 것이다. 그렇게들 하고 있다. 서울에 그 많은 교회, 교당들도 봉고차, 버스로 예비교인, 고객들을 실어 나르며 "서비스"강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메뉴"도 연령층에 맞추어 다양해진다. 어린이 성경반, 청장년 봉사반, 주일학교, 수련회, 기도회. . . . .

규모가 큰 교회나 법당은 웬만한 사립학교 경영 이상이다.

어차피 인간의 정신, 영혼은 길들이기 나름이요 습관붙이기 나름이다.

종교간의 경쟁에서도 먼저 선수를 쳐야 하는 것이다.

<믿음의 터>도 경영 "마인드"없이는, 경쟁력 없이는 도태되기 마련인 세상이다.

인간이란 믿음이 없이는 불안해지는, 약해지는 존재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지만 부모자식 간, 부부간, 친구, 스승을 못 믿게 된다면,

아마 대다수 사람들이 정신병자나 "노이로제"환자가 되거나. . . 아무튼 정상적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런 불신의 영역이 하루가 무섭게 넓어지고 있는 것이 우리 사회, 아니 전 지구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믿을 수 없는 인간이 많아지고, 믿음직스럽지 못한 교육, 종교, 사상. . .

이래서 현대인들은 뿔뿔이 흩어져 군중 속의 고독, 소외감, 비탄 아니면 광신. . . 그래 정신병동이 자꾸만 늘어나고 있는 것일 게다.

그렇다고 <에라, 모르겠다. 나도 선방에나 틀어박혀 두문불출 할가!>

이럴 수도 없는 일, 모든 것이 인간이 하는 일이요 사람이 살아가야 하는 일이다.

필경 어떤 종교나 사상을 믿기 이전에 인간이 인간을 서로 믿는 것을 우선하는, 종교나 생각이 달라도 최소한 서로 해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는 인간들이 많아져야 이 세상은 숨쉬기가 좀 나아 질 것인즉, 

종교인이건 아니건, 결국 이를 위해 초점을 맞추는 수양과 교육(타인으로부터 믿을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이야말로 막중지산데, 설왕설래 말만 많은 우리 교육 현실이 아난가!

오늘은 염보살이 <업무>(?) 전폐하고 자신의 차로 관광안내에 나섰다.

비는 하루 내 부슬 부슬 내려 더위도 그만하여 유람 다니기에는 그저그만이다.

내가 염보살에게 <책이 만권이나 되니 조만간 "아파트"를 줄여 이사 갈 때, 처치 곤란이니 이 근처 적당한 글방터가 없겠느냐?>고 했더니, 두어 달 전에 팔려고 내 놓았다는 얘길 들었다며, 백운산 자락에 농막 낀 땅(2천 평 정도)을 당장 보러 가자며 그쪽으로 차를 몰아갔다.

어차피 점심예약을 해놓은 <백운산 식당>이 그쪽이라 선배님들도 흔쾌히 동의해 주었다.

양회장은 625종군기자시절 훈장 하나를 받았는데, 그 수여식을 한곳이 경치가 빼어난 남강 변에 자리 잡은 <농월정>이라 했다.

<백운산식당>가는 길 역시,

용추계곡에서 빠져나와 귀곡천에서 시작되는 안의면 남강 따라 난 국도 26번 도로를 타야 한다.

남강 변을 따라 가다 국도 26번은 육십령(해발 1264미터, 예전에 이곳을 넘다 호식을 당하는 일이 많아, 사람이 60명은 모여야 고개를 넘었다는 데서 붙은 이름)을 넘어 전북 장계, 장수로 빠지게 된다.

남강에는 너럭바위가 많아 족탁(발을 물에 씻음)을 하며 여름 한 철 놀기도 좋은 곳이다.

농월정 앞에서 잠시 하차하여 양회장의 회포 한 마디,

<이 근처서 참 많이들 죽었지! 핏물이 개일 날이 없었어!>

다음 동호정, 군자정, 거연정을 거쳐, 차는 함양군 서하면 송계리에서 좌회전 지방도를 타고 백전면으로 접어 들었다. 점차 고도를 높여 첩첩산중을 한참 가다 하늘이 넓어지며 백운리로 내려간다.

드디어 <백운산식당>(전화 055-963-0661) - 함양군 백전면 백운리 230번지다.

몇 년전 1월20일, 대학동기와 함께 영하 20도가 넘는 추위, 눈보라 속에 전북의 장안산(해발 1237미터)등산을 왔다 눈 언저리에 동상을 입으며 <논개사당>으로 내려온 기억이 생생한데(그래서 날짜를 기억), 지금 점심 먹으러 이곳으로 오다니!

네발 달린 짐승은 한번 보고 두 번 만나기 힘들지만, 산은 항상 그곳에 있으니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장안산(전북)과 백운산(경남, 해발1279미터)은 도계를 경계로 소리치면 들릴, 서로 지척 연봉이다.

지도상으로나 도계이지 한 동네 산들인 것이다.

속으로 이런 기억을 더듬는데, 염보살이 이 근처에 터를 잡으라니!

<누굴 수도승으로 만들 작정인지!>라는 가당치 않은 생각이 들었다.

이 근처는 이미 언급한 명산들 말고도 북으로는 무주구천동, 전북 최고 산골마을인 무주, 진안, 장수(소위 무진장), 남덕유산, 남으로는 바로 지리산 자락으로 연결되는, 대략 해발 천 미터를 오르내리는 고지대여서 여름 피서지로는 제격이나 글방터로 잡기에는 너무 오지이다.

식당주인인 <오00> 아줌마는 한 50 쯤 되었을까, 우리 일행을 보자 버선발로 뛰어나오듯 반긴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염보살은 건너 편 빤히 보이는 그 <농막 낀 땅>이 팔렸는지부터 물어본다.

<팔렸다고 하는 것 같더라!>라는 답을 듣자 이곳저곳 "핸드폰"으로 한참 알아보더니, 한발 늦었단다. 전북 장수사람이 샀다는 결론, 그녀는 애석해 했으나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은근한 말 부담을 벗어버리고 오랜 만에 소주에다 닭백숙을 포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핸드폰"이 참 좋은 세상이다. 그 발명을 한 사람을 안다면, 찾아가서 술이라도 한잔 받아 주고 싶다.

펄펄 살아 뛰놀았을 <산닭>(mountain hen) 두 마리가 우리 일행 도착시간에 맞추어 뼈에서 살이 저절로 발가지도록 푹 물러져 있었다!

손님이라곤 우리 일행 뿐, 주인아줌마는 지극정성이다.

옆에 앉아 먹기 좋게 살코기 발가주랴, 술잔 치랴, 염보살 비위 맞추랴. . .

주인아줌마는 염보살보다 연상인 것 같으나 염보살을 "가톨릭"으로 치자면 대모 대하듯 한다.

자신의 인생을 온탕 맡기고 그저 처분만 바라는 듯한 표정과 반가움이 아무렇지도 않게 배어나온다.

주인아줌마에게는 큰 손에다 큰 손님, 그 이상의 존재가 염보살이다.

그러고 보니 염보살은 이 지역에서 상당히 소문난 유지인가 보다.

나중에 돌아오는 차속에서 염보살 얘길 들어보니, 식당주인 아줌마의 인생은 기구하고도 슬픈 사연의 연속이었다. 필력이 좋은 사람이 한 며칠 같이 지나면, 이 아줌마를 주인공으로 한 한국판 <춘희>가 나올 런지, <제인에어>가 나올 런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홍삼분말을 소주에다 타며 최고문은 <홍삼주와 백숙은 찹살궁합, 양기에도 좋고 음기에도 좋고>흥이 절로 나신다. 이럴 때 그의 모습은 한 백수는 할 것 같은 대구약전골목의 풍채 좋은 한방의 같다.

권 커니 잣 커니, 안주 좋겠다, 수발 들어주겠다, 만고강산에 천상인심이라,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이잔에 흰소리 저잔에 무용담에 파안대소 노안에 주름살은 깊어지는데, 어느 덧 두 쟁반 그득하던 백숙이 동이 나 가고 소주병 이리 딩굴 저리 딩굴 할 제, 때 맞춰  김이 물씬 나는 닭죽이  솥 채로 들어온다. 동지섣달 팥죽 푸듯 푹 퍼주는 닭죽 맛에 취하고 소주에 또 취해 세상사 모두가 아스라해진다.

나는 평소에도 밥보다는 죽 좋아하는 입맛이라 두 대접을 호기로이 먹어 치웠다.

기분 좋아 느긋하게 먹는 과식은 체하지를 않는 법,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다.

활짝 열어 제친 문밖으로 동료가 황천객이 되었는지 천당행이 되었는지 알 턱이 없는 <칸츄리 꼬꼬>(촌 닭)가 뒷발질 채가며, 무심히 모이 추어 먹는 풍경이 한가로이 보였다.

느긋이 취해 세상만사 시들한데, 염보살은

<함양읍내 구경도 안 하실랑교, 빨리 일라이소. 함양 상림을 여어까지 와갔고 안 보고 간다카마 말이 안되는 기라요, 지도 읍내 볼 일도 좀 있고예, 고마 일라이소 마!>, 주인집 아줌마가 투명"비닐"에다 백김치 한 보따리를 염보살에게 건네주는 걸 받아들며 갈 길을 재촉한다.

시원해 보이는 물 백김치, 군침이 돌아 술도 깰 겸 국물 한 대접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새큼 시원한 맛이 국수 말아 주면 또 한 그릇 다 먹을 것 같았다.

보살님 재촉에 먼저 일어나는 분이 최고문,

경주최씨 문중 제일 자랑스러운 어른이 고운 최치원 선생이라며 옷 매무새부터 달리했다.  

고운 선생이 벼슬해서 처음 부임했던 곳이 바로 이 함양이고, 이곳에 유명한 인공조림 <상림>을 조성했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울울창창하여 유치원생부터 남녀노소 막론하고 언제나 찾을 수 있는 휴식처이다.

위치도 함양읍 "센터"와 거의 붙어 있다.

최고문은 이런 조상의 얼이 숨 쉬고 있는 <상림>을 가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던 것이다.

첩첩산중 돌고 돌아, 거연정, 군자정, 동호정, 농월정 다시 눈 안에 넣으며 함양읍내로 접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함양군 안의면을 거의 한 바퀴 다 돌다시피 한 것이다.

드디어 상림!

이런 도심의 정원이 또 딴 데 있을까. 펀펀한 들판에 활엽수림이 하늘을 덮어 어둑하다.

신기하게도 우리나라 어딜 가든 쉽게 볼 수 있는 소나무 한 그루 없이 낙엽수로만 되어 있는 공원이다.

소나무는 조림할 그 당시 모두 뽑아버렸다고 한다.

당시에는 지금의 위천수가 함양읍의 중앙을 흐르고 있어서,

해마다 홍수로 피해가 컸음으로 그것을 막기 위해 나무를 심어 가꾸게 된 것이라 한다.

처음에는 숲을 <대관림>이라 이름 짓고 잘 보호하였으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 중간이 유실파괴되어 지금과 같이 상림과 하림으로 갈라졌으며, 현재는 면적 약 188,358제곱미터, 100여종 20,000여 그루의 활엽수가 여름철 그늘을 드리워 주고 있는 것이다.

상림안에는 고운을 사모한다는 의미의 <사운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잠시 피해 가기 좋은 곳이다.

선현들의 지혜가 천년은 벌써 지났고, 만년은 갈 것 같다.

<새천년> 은 10년도 못가는데!

내가 고운의 지혜에 감탄하며 요즈음 정치인들 중 그런 인재가 잘 보이질 않는다는 말을 받아, 정보통에다 수다스런 염보살이 한 마디 거들기를,

<요즈음 세상 망치는 세 년이 있는데, 새천 년, 자민 년, 시민 년 이라 카데예!>

우리 정치현실을 풍자하는, 특히 경상도 쪽 사람들이 즐겨 말하는, 좀 보수적인 우스갯소리인 듯하다. 나도 서울서 들어 본 말이지만, 여기에 <시민 년>이 들어가는 것은 지나친 감이 있다.

각종 "캠페인" 벌리는 <시민연대>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처음 의도와는 달리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거나 "포인트"를 잃고 "오버"하는 면이 더러 있는 것을 풍자하는 뜻이기는 하겠지만, 그 공해 서열을 아무래도 너무 높게 잡은 것 같아서다.

어느 정도 시행착오는 있겠지만 이해관계를 떠나 공익을 위한, 순수한 열정을 가진 시민운동은 적극 지지 동참해야 할 시대인 것이다. 그래야 건전한 시민사회, 시민문화가 앞당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상림>을 벗어나 함양읍내, 읍사무소에 염보살이 몇 가지 서류를 뗄 게 있다고 하여 들렸다.

시골 읍내 사무소가 이렇게 발전되었나 싶을 정도로 사무자동화 기기들이 자리 잡아 직원들이 손으로 쓰는 일은 많이 줄어든 것 같았다.

<거리의 소멸>(The Death of Distance)이란 책을 읽은 기억이 났다.

영국의 <에코노믹스>잡지 편집장을 지낸 여류작가의 <인터넷>혁명에 관한 방대한 저서다.

거기 나오는 웬만한 일들이 이제 한국에서도 실현되어 가고 있는 현실을, 이번 여행 곳곳에서 확인할 수가 있었다. 굳이 서울, 대도시 생활을 고집할 이유가 점차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물리적인 거리를 미련스레 찾아 다녀야 하는 시대가 아닌 것이다.

<핸드폰> <텔레비젼> <인터넷> <디지탈>. . .로 인해, 우리의 생활방식, 근로양식이 격변하고 있다. 웬만한 사무직은 출퇴근시간이 점차 줄어드는 <플렉스 시스템>(출퇴근시간을 본인의 자유에 맡김)

<직주일체>(직장과 주거의 구분이 없어짐) 의 <홈워킹>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옛스런 고가들이 고만 고만 이웃 이루고 있는 조용한 마을, 비온 뒤끝이라 그런지 골목마다 산뜻하다. 나팔 꽃이 만발한 자그마한 한방의원 집, 동네 이발소, 구멍가게, 문 창살이 가지런한 여염집들, 모두가 고향에 온 듯한 정감을 불러 일으킨다. 염보살이 처녀 때 살았던 고향마을이다.

이 골목 저 골목 기웃거리다 곱게 단청 입힌 마을 향교같은 제법 큰 건물이 나타나 가보니,

<법인사>라는 절집, <대한불교 조계종 안의 포교당>이라는 문패가 단정히 걸려 있고 <어린이 여름 불교학교>라는 현수막이 문패보다 열배나 더 큰 크기로 솟을대문을 덮어 누르듯 가로지르고 있었다.

열려진 대문안으로 들어가 보니 천년은 되어보이는 아름드리 느티나무고목이, 이 마을이 만만치 않은 역사를 지니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나무 아랫 둥치에는 새파란 이끼가 끼어 있어 이곳이 공해 없는 청정지역이라는 생각이 새삼스레 들어 큰 숨을 쉬었다. 싱싱한 산소가 술기운을 모두 몰아 내는 듯 하였다.

다시 용추계곡 길, 골물은 불어나 물보라를 일으키며 사정없이 바위를 때리며 폭포수처럼 흘러내린다. 멀리 안개에 잠겼다 벗어나는 준령들, 대자연의 위용은 변함이 없다. 자연은 자연의 법칙대로 억겁의 세월을 한결같이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 갈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天地不仁> - 자연은 인정사정없다는 <노자>의 말이다.

이번 여름 한 철에도 우리 인간들은 얼마나 많은 물난리, 태풍의 피해를 입을 런지. . .

문득 <천지불인>을 닮아가는 인간들이 점점 많아져 가는 세태라는 씁쓸한 생각에서 <人間不仁>이란 조어(造語)가 절로 떠올랐다.

화산폭발 같은 <천지불인>이야  대자연이 하는 일이니 어찌 할 수 없는 일이나,

매일 같이 세계도처에서 터져 나오는 <테러> <전쟁뉴스> 와 같은 <인간불인>의 사태는 우리 인간들이 막아야 할 것 아닌가!

인간세계도 대자연의 일부라 바람 잔 봄날, 따사한 햇살과 같은 세상만물 소생케 하는 소담스런 면만을 닮아가면 얼마나 좋겠나 만은 . . . .점차 착하고 어진 면 사라지며 영악해져 대자연의 광포한 면만 닮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이런 넋두리 같은 생각에 잠겨있는데 <정말, 내일 올라가실랑교, 웬만하믄 하루 더 묵어 가시지예!>라는 염보살의 애교섞인 말이 귓전을 때린다.

이에 <회자정리요 생자필멸이라. 갈 때는 가야지 무얼 뭉그적 거리겠소. . . 이번에 신세 많이 졌소.

노교수 만나거든 잘 놀고 귀경했다고 안부나 전해 주시요!>라고, 양회장님이 아예 뒷말을 막아버린다.

<귀경>하겠다는 말의 여운이 천상병 시인의 대표작 <귀천>이라는 시를 생각나게 하고, 한 달 전인가 지리산 중산리 산허리에 <천상병>시인의 시비제막식에 양회장, 남유소 화백과 함께 참석했던 기억이 났다. 우람한 자연석<시비>에 음각된 <귀천>을 옮겨 본다.

            귀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슰 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 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 .

천상병!

서울상대 대선배, 1967년 동백림사건의 고문후유증으로 더욱 순수한 바보(?)가 되어버린,

이 시대의 고행자!

1971년 고문의 후유증과 심한 음주로 인한 영양실조로 거리에서 쓰러져 행려병자로 서울 시립병원에 입원, 그러나 그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행방불명, 사망으로 추정되어 유고시집<새>가 출판되었었고, 이로써 살아있는 시인의 유고시집이 발간되는 초유의 일화를 남기기도 했었다. 

이 <귀천>은 행불 직전인 1970년 6월에 <창작과 비평>에 발표된 작품이다.

이렇듯 무심하게, 아름답게, 천연덕스럽게 죽음과 삶을 표현한 시가 또 있을까!

그는 한 세상 삶을 죽음과 같이,

죽음을 삶과 같이 함께하며 살다가,

하늘나라로 돌아가 <이승의 보고서>를 쓰듯이,

살아생전에 죽음을 엿보며 아름다운 삶을 노래한 <귀천>을 쓴 것이다.

하기야 하루 하루 수많은 사람이 태어나고 죽어가는 일상을 생각하면 어차피 늘 죽음과 공존하는 것이 인간의 삶인 것이다. 미망인 목순옥 여사는 지금도 인사동에서 <귀천>이라는 찻집을 하며, 불우한 이웃을 많이 돕고 있다. 시비제막식 때, 

남유소 화백

(순간의 "퍼포먼스"를 "크로키"로 그려내는 데는 거의 제일인자, 나와 같은 양띠 생. 양회장 소개로 만난이래, 예술인들이 흔히 갖고 있는 외곬기질이나 편협함이 거의 없는 그가 좋아, 나는 근래 자주 어울려 소주잔이나 기울이고 지남)

은 생생한 순간들을 <크로키>로 여러 장 그리고, 그 밑에 참석한 사람들이 돌아가며 <사인>을 했었다.

아마 그 <크로키> 두어 장은, 지금 쯤 찻집 <귀천> 에 걸려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 추신 : 양재형 회장의 <회자정리요 생자필멸이라, 갈 때는 가야지 무얼 그리 뭉그적 거리겠소!>라는 말이 지금도 귀에 쟁쟁한데, 말씀 대로일까 다음 해 여름에 금산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급작스레 돌아가셨습니다. 향년 77세, 늘 유언처럼 말씀하신대로 제가 조사 쓰고 호상 맡아 장례 치르고 화장하여 대전 근교 절집 납골당에 모셨습니다. 인삼업계 거목이셨는데 참으로 애석하게 돌아가셨습니다! ***

( 다음 회에. . . .)

[청한]

폭포처럼 끊임없이 쏟아지는 선생님의 이야기에 폭 빠지다 갑니다.

[범초]

지난 얘기라 실감이 덜 할텐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엊저녁 뉴스에 마침내 삼성전자에서 <플렉스-시스템>(출퇴근시간을 사원 각자 자유에 맡기는 것)을 도입했다고 하네요! 이 제도는 사원들에게 업무의 집중도를 높여주어 보다 효과적일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연구직에는 거의 필수라는 생각이 듭니다!

[♡묏골녀♡]

범초님의 박식함에 한번더 놀라고 갑니다

[범초]

함양 땅에도 몇 번 가서 그렇지요! 묏골농원 정경이 눈에 선하네요! 농사철이라 여러가지로 바쁘실 텐데, 이렇게 범초 방에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수향]

며칠분 글을 단숨에 다 읽었습니다,어느 소설보다도 재미나고 실감납니다,어쩜 그리 소상하고 꾸밈없는 진솔한 생각들을 잘 풀어 놓으시는지요,귀한 글꾼(?)만나 풍부한 정보와 읽는 즐거움을 동시에 느낌니다~!

[범초]

아이구, 수향님 감사합니다. 제글을 그렇게 단숨에 읽으시다니!

[별꽃]

삶을 초월하여 사신분들을 범초님을 통해 뵙게 되네요. 지금도 그분들의 정신이 살아있으리라 믿고 싶습니다. *^^*

[범초]

인간의 정신이란 다이아몬드보다 더 견고할 수도 있고 썩은 두부모보다 더 흐늘거릴 수 있다는 걸, 살아가면서 늘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견고한 정신이 올바른 방향으로 박혀야 되는데, 독재나 폭력으로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는 아집으로 견고해 질때는 몸서리가 쳐지게 되지요, 히틀러나 박정희 정신의 견고함이 많은 사람을 죽이고 폐인으로 만들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