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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감상♬~♪~ 스크랩 잊게해주오-장계현과 템페스트
태백짱구 추천 0 조회 338 11.11.25 10:37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때로는 생각이야 나겠지마는
자꾸만 떠오르는 잊어야 하는 여인
잊게 해 주오

잊게 해 주오
그대를 모르게 잊게 해 주오~
잊게 해 주오

잊게 해 주오
과거를 모르게 잊게 해 주오~~
우연히 나도 몰래 생각이야 나겠지만



때로는 생각이야 나겠지마는
자꾸만 떠오르는 잊어야 하는 여인
잊게 해 주오

잊게 해 주오
그대를 모르게 잊게 해 주오
잊게 해 주오

잊게 해 주오
과거를 모르게 잊게 해 주오~
우연히 나도 몰래 생각이야 나겠지만...

 

 

 

콧수염 가수 장계현은 비음이 가미된 독특한 허스키 보컬로 포크, 록, 팝, 컨트리, 트로트, 발라드 등 여러 장르의 노래를 다양한 스텍트럼으로 펼쳐낸 아티스트. 아마추어 통기타 가수에서 캄보 밴드의 베이스 연주자로, 록 그룹의 보컬에서 싱어 송라이터로 67년 데뷔 이래 40년 가까이 중단 없는 음악 외길인생을 걸어가는 보기 드문 아티스트. 대부분 록 그룹 연주자들이 미 8군의 클럽을 주무대로 경력을 시작했던 것과 달리 그는 콘테스트를 통해 록 그룹의 보컬이 된 특이한 출발점을 지녔다. 오랜 활동 기간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히트 곡은 젊은 층에 어필됐던 ‘ 잊게 해주오’, ‘ 나의 20년’, ‘너너너’, ‘햇빛 쏟아지는 들판’ 정도. 하지만 ‘나의 20년‘은 당시 청소년 층의 큰 사랑 덕택에 정상의 인기를 누려, 그의 대표곡이 되었다.

 

독립유공자 출신으로 서울전화국장을 역임했던 부친 장낙수씨와 평범한 가정 주부였던 김명숙씨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1950년 1월 19일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다. 음악하고는 무관한 집안이었지만, 부친은 취미로 바이올린을 연주하셨다. 늦둥이로 태어난 그는 만5살 때 서울 교동 초등학교를 들어갔다. 전교에서 가장 어린 학생이었던 장계현은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미술에는 재능을 보였지만 음악하고는 아예 담을 쌓았을 정도. 실제로 그는 애국가도 잘 부르지 못했던 아이였다. 대광 중학 시절에도 그림 잘 그리는 아이 장계현은 음악엔 관심이 없었다. 대광고에 진학해서 미술부 활동을 했다. 하지만 잠시 밴드부에 들어가 트럼펫을 부르고 성가부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음악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가수 최헌은 대광고 동기. 고2 때 처음 통기타를 만졌다. 미국에 살고 있는 고모가 스틸 기타를 선물로 주었기 때문. 음악 학원을 다니거나 누구의 도움도 없이 그는 음반이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독학으로 기타를 쳤다.

 

처음으로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해 준 것은 당시 전 세계적으로 청소년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영국 가수 클리프 리차드. 고 2때 클리프 리차드가 주연을 한 청소년 뮤지컬 영화 ‘ 더 영 원스’를 보고 매료되었다. 그 때부터 클리프 리차드 노래는 물론 외국 팝송을 많이 듣기 시작했다. 홍익대 미대 조소과에 입학한 그는 음악을 하고 싶어 학교 캠퍼스 연주 밴드 ‘ 홍익캄보’의 오디션을 보았다. 베이스 기타를 치고 팝송 ‘커튼 필즈’을 불러 홍익 캄보 2기 멤버로 선발되었다. 당시 홍익 캄보의 리더는 뒷날 록 그룹 ‘동방의 빛’의 리더로 신디사이더를 동원한 무그 음악 시대를 연 1기 강근식이었다. 1기 홍익캄보는 67년 제 2회 전국 남녀 재즈 페스티벌에 출전해 1위를 차지했다. 당시는 팝송을 포함 외국 대중음악은 모두 재즈라고 표현했던 시기였다.

 

장계현은 대학 2학년 때인 68년, 홍익캄보밴드의 베이스 주자로 제 3회 대회에서 ‘Rag Doll’이란 곡으로 출전했다. 당시 심사 위원은 이백천. 기성 밴드를 능가하는 실력으로 멋지게 연주를 했다. 그런데 프로급의 실력이 문제가 되어 대학생다운 신선함이 없다는 이유로 입상을 못했다. 이 때 페스티벌에서 만난 경희대생 김세환과 듀엣 ‘트리플’을 결성해 잠시 오비스 케빈 등에서 외국 팝송들을 불렀다. 이후 3학년이 되어서는 주간경향이 주최한 전국 아마추어 포크 콘테스트에서 통기타를 들고 출전했다. 결과는 대상 수상. 당시 2등은 홍민, 3등은 유승엽이었다. 콘테스트 대상 수상으로 주목을 받게 된 그는 각종 방송에 불려 다녔다.

 

미술 작품 또한 인정을 받고 있던 터라 주위에서는 음악 활동을 말렸다. 하지만 당시 콘테스트 주최사였던 주간경향 기자 서병후의 눈에 들어, 윤항기가 리더로 있던 브라스 록 그룹 키 브라더스와 인연을 맺게 되고 창단 멤버로서 반 년 정도 메인 보컬로 활동했다. 주무대는 한국 최초의 고고클럽이었던 닐바나. 이 무렵 키 브라더스 활동시절 다른 팀의 드러머 유상봉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장계현의 노래를 듣고 반한 유상봉이 새로운 팀 결성을 제안해 왔던 것. 그래서 1970년 대학 졸업반 때 록 그룹 템페스트를 함께 창설했다. 그룹 명 템페스트(돌풍)라는 영어에 능통했던 서병후의 작품. 폭 넓은 대중에게 알려지기 전인 1971년, 마장동 스튜디오에서 단 하루 동안 녹음 작업을 해 첫 음반 ‘템페스트 히트곡 제 1집-성음’을 발표했다. 이 때의 템페스트 1기 라인업은 리더이자 드럼에 유상봉, 리드 기타 성정민, 키보드 유강순, 베이스 김영무와 보컬 장계현의 5인조였다. 첫 음반은 대중의 호응을 전혀 받지 못했다. 하지만 닐바나, 풍전, 맙? 센트럴 등 서울의 중요 나이트 클럽을 주무대로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템페스트는 1972년 이후 밤무대의 슈퍼스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인기가 높아진 템페스트는 1972년 10월 시민회관에서 첫 단독 공연을 했다. 당시는 플레이보이컵 전국 그룹 사운드 대회 등 록 그룹들이 시민회관에서 공연을 많이 하던 시절. 하지만 록 그룹의 단독 리사이틀 공연은 이례적이었다. 템페스트의 매니저 역할을 맡았던 주간경향의 기자 서병후는 1973년 전속금 50만원에 오아시스와 음반계약을 맺게 했다. 이즈음 템페스트는 멤버 교체가 있었다. 키보드 박수천과 기타 박종남이 새로 영입되었다. 그래서 템페스트의 첫 히트 곡 ‘ 잊게 해주오’가 수록된 음반이 발표되었다.

 

솔로곡 <나의 20년> 공전의 히트  록, 컨트리, 트로트 등 끝없는 실험

보컬 장계현의 콧소리가 매력적인 템페스트의 첫 히트곡 ‘잊게 해주오’는 군사정권의 압제에 무력감이 만연되었던 대학생들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밤새 노래하고 연주하는 자체가 즐거웠던 시절이었죠. 작곡가 김영광씨가 우연히 우리 노래를 듣고 음반 내자고 해 발표했는데 히트가 되었습니다.”

장계현은 75년 잠시 템페스트를 떠나 록그룹 ‘하얀 날개’로 둥지를 옮겨 센트럴호텔에서 활동했다. 당시‘하얀 날개’의 라인업은 보컬 장계현, 베이스에 친동생 장계돈, 키보드 박수천, 기타에 라이더스와 히식스 등에서 활동했던 이진동의 5인조였다. 장계현이 빠진 상태에서 지구에서 나온 템페스트의 음반은 전혀 빛을 보지 못했다. 지다연과 함께 취입한 ‘내일이면 간다네’라는 곡 때문. “다연이가 그 곡을 밀고 있어 우리가 양보하고 그 판을 죽여버렸죠. 우리는 나름대로 히트곡이 많았을 때니까 그렇게 했습니다.” 하지만 타워호텔에서 활동하던 친정팀 템페스트의 운영이 힘들어지자 두 팀이 다시 합쳤다.

 

다시 오아시스와 손잡고 76년 '장계현과 돌풍' 음반을 발표했다. 하지만 지금도 개선되지 않고 있듯 노래하는 가수만이 집중 조명을 받는 현실 때문에 늘 리드보컬 장계현의 이름을 따 음반을 발표하는 가운데 갈등이 공존했다. 템페스트의 리더는 유상봉. 결국 음반 발표 이후 장계현과 유상봉은 또 다시 양분되는 아픔을 겪었다. 당시는 대마초 파동으로 중요 인기 록그룹 멤버들이 무대에서 상당수 사라졌던 시기다. 장계현은 대마초는커녕 술 담배도 하지 않았던지라 대마초 돌풍 속에서도 건재했다.

 

77년 솔로 가수로 독립한 그는 자작곡인 ‘나의 20년’을 발표했다. 반응은 대단했다. KBS TBC DBS CBS 등 유명 방송사의 가요 관련 상들을 휩쓸고 TBC라디오 인기 프로그램 ‘밤을 잊은 그대’에서는 15주 연속 1위를 차지했을 만큼 공전의 히트가 터졌다. 단번에 인기가수 대열에 오른 그는 콧수염을 기른 특이한 외모와 비음이 가미된 독특한 음색의 가수로 주목받으며 폭넓은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방송에서는 솔로 가수였지만 클럽과 음반 세션은 템테스트 멤버들과 변함없이 이어갔다.

 

‘햇빛 쏟아지는 들판-신세계’(78년) 발표 때 섹스폰 송명석이 보강되었다. 이후 장계현은 연주 활동에 전념하려는 마음에 3년간 템페스트 멤버들과 함께 부산 코모도호텔 나이트클럽 무대에서 활동했다.‘나의 20년’의 빅히트로 정상의 인기가수가 되었건만 그는 솔로 가수로서의 인기보다는 음악적인 만족을 주는 그룹사운드에 훨씬 애착을 느꼈다.

 

81년 장계현은 사랑의 아픔을 가벼운 디스코 리듬에 표현한 ‘너너너’를 발표해 건재를 과시했다. 이때 오리엔트의 나현구 사장과 포크 곡 메들리 작업을 했다. 원래 나 사장의 친척인 김세환이 부르기로 했지만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어 활동 금지가 되어 대신 장계현이 작업한 것이다. “2~3일 만에 30곡이나 불러 힘들었습니다.” 87년 이색 트로트 곡 ‘나 없이도 행복해다오’를 발표해 초판이 모두 팔려나가고 방송 인기순위 10위권에 진출하기도 했다. “자꾸 다른 장르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 시도해 본 거죠. 트로트가 노래하기 가장 힘든 것 같아요.” 이후 그는 교통사고 등으로 2년 동안 휴양한다. 91년 트로트 곡 ‘내청춘의 이력서’는 신시사이저와 컴퓨터 음향을 배제하고 통기타와 바이올린 등 현 위주의 24인조 어쿠스틱 반주의 대담한 편곡으로 야심차게 시도했던 곡이다.

 

온 나라가 IMF 경제 난국에 신음하던 98년 4월. 한동안 잠잠하던 장계현은 이번엔 컨트리음악인 9집 ‘어둠 속에 서서’를 발표했다. 미국 테네시주 내시빌에서 녹음 작업을 한 이 음반은 미국과 일본에서 동시 발매되었다. 음반 발표 기념으로 자신의 히트 곡들과 신곡들을 모아 정동문화예술회관에서 이틀간 콘서트도 개최했다. 불황의 찬 바람에 몸서리치던 30대 이상을 위한 공연이었다. 2001년 4월 정동문화예술회관의 팝콘서트 '원더풀 투나잇'에서도 장계현과 템페스트는 중견 가수들의 백세션과 더불어 추억의 팝송을 노래했다. 5월엔 이틀간 세종문화회관에서 한대수, 송창식등 70,80년대 포크가수 25팀과 함께 한국포크 30년 기념공연 ‘행복의 나라로’에 참여했다.

 

2003년에는 부산 송정에서 '동녘에 해뜰 때' 카페를 열어 사업가로도 변신한 그는 올해 4월 성인가요 취향의 '내 청춘 다시 한번' '잊을 거에요' 등 5곡을 비롯, 왕년의 히트곡들을 포함한 10곡을 담아 11번째 앨범 '아픈 사랑'을 발표했다. "중년가수가 밀려나면서 가요계가 시끄러운 댄스와 힙합, 그리고 트로트로 양분되는 시점에서 퓨전 트로트를 선택했습니다. 멜로디 강한 곡에 팝 창법으로 노래를 불러 성인가요에 내 스타일을 접목하려 애썼습니다." 또한 7월에는 템페스트 멤버들과 함께 시청 광장에서 7080세대를 위한 ‘여행을 떠나요’ 콘서트 무대에 올라 주옥같은 팝 레퍼토리로 열대야를 잊게 해줬다.

 

현재 마포 공덕동에서 '장 스튜디오'와 부천 중동의 라이브 카페 '사운드'를 운영하며 음악 외길 인생을 걸어가고 있는 그는 "선진 음악시장의 경우 컨트리 가수를 비롯해 다양한 장르의 가수들이 두터운 팬 층의 지지로 음악적인 열정을 이어가는 것을 보면 국내 가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고 털어 놓는다.


[ 출처 : 주간한국(
http://weekly.hankooki.com/
) 추억의 LP여행 2004. 9.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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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11.26 16:10

    첫댓글 잘듣고갑니다

  • 11.11.28 10:07

    "나의 20년"... 한때 나의 아침 기상노래였는데...ㅋㅋㅋ
    그때는 그래도 꿈많았던 젊은이 였는데...이제는...ㅠㅠㅠ
    잠시 옛생각에 젖어 봅니다...

  • 12.01.26 17:09

    동녘에 해뜰때 어머님 날 낳으시고 ......
    이노래 맞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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