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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광표 92군번 예비역 소령
특전13공수여단 훈련 중 사망한 특전요원에 대해 우리 특공전우회원들에게 한마디 말하고 싶다.
난, 우리나라 언론을 신뢰하지 않은지 오래다. 과대 과장, '아님 말구~'식의 허풍포장으로 사실을 왜곡하는 경우가 어디 한둘인지!
과연, 생존 훈련이 미국 특수전부대의 메뉴얼을 가져다가 한국 특수부대와 특수전 양상에 맞게 적용 발전 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인가? 이미 그 신뢰성을 잃은 한국의 언론은 연일 계획성 없고 무책임한 감독의 엉성한 훈련진행으로 미래가 창찬한 아까운 인명이 희생되었다고 떠들어 댄다. 국내에 처음 도입된 훈련이란 말인가? 1986년 송추 오봉산에서도 특수전전문 과정에서 그 훈련의 중요성과 시범 후 극한의 실전 상황하 이 훈련이 국가와 아군의 정보보호에 중요한 것인지를 강조했었고, 1993년과 1995년에도 특수전 전문과정 매 기수에서 여러번 강조된 바 있는 훈련이 바로 이것인데 어찌 한국의 특수전을 미군의 엉덩이를 쫓아가는 졸자 같은 부대로 비하하는지 모르겠다. 국방부도 왜 그렇게 책임을 피하려는 약한 태도를 보였는지 모르겠다. 물론 보안상의 문제가 있다면 난 더이상 할 말이 없다만 특수전에 대해 무얼 아는 사람들이 말하고 논의하고 대책을 수립했으면 하는 바랍이 크다. 메뉴얼도 없는 훈련이라고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작성한 기자의 말은 분명 사실이 아니다. 이번에 처음 미군의 것을 도입했다는 언론의 발표는 사실이 아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이미 특전사에는 고문훈련을 하고 있었다. 오봉산에 위치한 특수전 전문교장에서는 고등산악훈련과 유격전, 그리고 고문훈련을 하는 교장이 있다. 전문화된 교장이며, 보안도 철저한 민간인 통제구역안에 있다. 그곳에서 앞서 말한대로 특수전 상황하 전진에서 포로가 되었을시 일정하고 논리적인 정보유출 거부훈련[아군의 작전기도나 작전명, 팀활동, 목표, 통신관련 사항, 침투로, 탈출 및 복귀로, 재집결, 공중보급 등의 주요 사항을 발설치 않도록 극악한 상황에서의 고문을 이겨내는 정신력과 고통을 극복하는 요령과 인내력, 신문에 응하는 자세나 태도, 질문에 응대하는 요령 등]을 특수전부대의 명예에 걸맞게 매우 단계별로 세부적으로 훈련했다. 그러다 작전위주가 아닌 인사위주의 안일하고 무능력한 특수전을 모르는 군 상부로부터 사고예방차원에서 보신주의 지휘관의 결단력 부족으로 없어졌고, 필요성이 여러번 강조되었지만 훈련의 명맥이 끊어졌다는 것이 맞다. 장교[팀장:중대장, 부팀장:부중대장]를 포함 하여 팀 내 정작하사관과 일부의 통신하사관이 훈련을 받았다, 그 이유는 잘 알겠지만 가장 많은 정보를 알고 있을 대상이기에 그렇다. 물론 모두 다 받았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교육외에 정보를 가장 많이 알고 있던 팀 정보작전하사관(정작하사관)은 일정한 정보유출 거부교육도 받았다. 아래의 내용은 특전부사관들의 고문훈련에 대한 증언들이다. 참고하기 바란다. 강한 군대만이 대한민국을 살릴 수 있다. 살아 남는 자가 나랄 지키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며 국토를 방호할 수 있다. 목숨을 다한 전우들이 더 용감하기에 내가 맞은 총탄을 대신 맞아 준것이다. 그런데 어찌 우리에게 부여된 임무를 완수치 않을 수 있겠는가? 내 목숨이 아까와 정보를 유출해 아군의 전투력이 상실되고 아작전의 기도를 노출 시킨다는 것이 과연 바람직 한것인가? 좀 더 지혜롭고 숙연하며 구체적인 근거와 대처방안을 가지고나서 평정심을 가지고 이야기 해야 할 것이 기자들의 무개념에 상처 받게 된 내용이 너무 아쉽다. 만약 실전과 같은 모의 훈련에서 최정예 요원이 고문도중 정보를 유출한 사례가 있다고 하자. 그것을 기자가 알아차렸다면 이런 기사가 나왔을 것이다. "우리가 믿는 특전사, 고문앞에 무너지다.." 정말 안타까운 후배들의 목숨이기에 더욱 가치 있는 죽음으로 우리가 그 바탕과 더욱 강한 특수전부대의 견고할 초석으로 상징화 되어야 한다. 사건화하여 문제를 파헤치는 것이 특전사의 명예에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한다. 특전사는 특전사의 명예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 국가나 국민이 아닌 특전사의 명예를 위해 이 한목숨 바친다고 말한다. 그것도 거침없이.... 특전사가 이어야 대한민국이 있다라는 절대절명의 국가수호가 그들의 명분이기에 더욱 강한 조국애와 충성심을 강조한다.
증거자료
지금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특수전 교육 안에는 분명 심리전과 심문 대처 내용이 있었으나 딱히 무얼 실습했던 건 안 떠오른다. 또한 이 CO훈련 이전에 다른 형태의 포로심문 대처훈련이 존재했을 수도 있다. 후배 중에 특수전 과정 중에 사고와 비슷한 감금훈련을 받은 사람도 있다고 하나 난 없었다. 다른 공수부대 잇빨칼럼에도 썼지만, 그 훈련을 CO 훈련이라 불렀는데, 지금의 명칭은 아니고 현대 미군의 명칭으로 말하면 SERE가 올바른 명칭으로 생각한다. 그 기원은 바로 본인이 자대에서 하사 1호봉이었던 1985년. 우리 특전9공수여단과 가깝고 꽤 교류가 있던 5공수특전여단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특전5공수여단의 한 고위장교분이 미국 군사유학인가를 하였고 거기서 '미군 조종사 고문극복훈련(CO)'를 접하고 그걸 5여단의 대대 대항 고문훈련으로 시험적으로 운영되었다. 당시 야전훈련에서 많이 겹치던 모 저수지에서 장거리 교신을 훈련하던 나는 5여단 병력이 팀별로 돌아다니는 걸 봤다. CO훈련 중이었다. 좀 이상했던 것이, 특전사 팀은 전원이 단독군장으로 다니는 일이 거의 없고, 모든 작전은 완전군장에 나가서 은거지 잡고 타격/습격 가면 팀에서 2-3명은 군장에 작전물품과 무전기를 가지고 다니니까. 알고 보면 그건 자기팀 순서를 기다리며 전술훈련으로 돌아다니던 거였다. 그리고 중사 시절 부평에서 우연히 모병 따블백 5여단 동기를 만나 동향이라 시외버스에서 한 시간 반 정도 이야기를 듣고 나도 많이 놀랐다. 총 7단계의 고문훈련으로 적군으로 가장한 타 대대 인원이 북한군복에 북한 말을 쓰면서 너무 심한 고문들을 훈련으로 가했다. 7단계가 끝나면 빈 총으로 약식 총살 당하고 땅 구덩이에 던져지고 끝난다. 1단계는 언어 회유이나 2단계가 내 기억에 대바늘로 손톱 끝까지 찌르고, 몽둥이, 안면에 천 놓고 물 붓기(숨 막혀 죽을 것 같다고 한다), 주리 틀기, 거꾸로 매달아 코에 고춧가루 물 붓기, 물고문, 전기고문 등등. 무슨 이근안 고문?같은 것들이었고, 이?후유증은 상당히 심했고, 고문 도중 타 대대 인원을 알아본 피고문자들이 욕설을 퍼붓고 나중에 교대하면 보자 등등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했고, 1-3단계 안에 고문에 굴복해도 증언을 무시하며 거의 끝 단계까지 일부러 끌고 가려고 해서 더욱 고통스러웠고, 기절하거나 더 이상 불가능한 상태만 7단계 이전에 떨어져 나갔고, 이렇게 초반에 굴복한 자는 초급자일 경우 훈련 끝나고 결산[얼차려]이 있기에 무서워 함부로 포기도 못했다. 신앙이 깊은 사람들이 잘 버티더라는 동기의 말도.... 5여단에서 시작해 유격전문으로 이어진 이 훈련이 가혹했던 것은, 너는 물고문 너는 고춧가루가 아니라 1인이 이 모든 단계의 모든 종목?의 고문을 다 받아야 했다는 것이다. 유격전문 과정의 CO는 고문 받으면서 그 무서운 교관 조교에게 온갖 쌍욕을 다 퍼부어도 웃으면서 고문이 계속 갔다고.... 특전사가 항상 그렇지만 이런 훈련 역시 지역대장인 소령과 중대장인 대위, 부중대장인 소위, 중위는 물론 인사계 상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역대는 측정에서 아무도 빠지지 못한다. 말해준 내 동기도 걸레되어 시체구덩이에 던져 졌는데 옆을 보니 지역대장이 널부러져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타 대대 북한군 역할은 북한군복에 선그래스나 마스크 등으로 신분을 가렸고, 그 고문 내용은 분명 당시 미국에서 존재하던 '미 조종사 고문극복훈련' 교범을 사용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미 당시 미군도 물리적인 육체고문은 줄어들기 시작한 시점으로 추정한다.
증거자료2
나는 특전사 현재 전시 작전계획을 모른다. 우리 시절 작계를 아직도 자세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일부 제대를 제외하고는 모두 개전과 동시에 각자 제대에게 주어진 섹터의 이북으로 몽땅 넘어가는 거였다. 희망 같은 건 버려야 하는 5027 내용. 이 훈련은 5여단에서 한 번 하고 끝났는데, 이 고문과정이 사령부 자대 인원 입교 훈련인 유격전문(레인저, 나중에는 특전문)의 한 과목으로 들어갔다. 특전문은 조금 특이한 교육으로 사령부 스쿠버와 함께 고통스런 악명의 교육으로 유명해, 명목은 산악조교 양성과 특수전 전문이란 교육이었지만 자대에서 사고치면 벌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고, 구타와 가혹행위 등 굉장히 힘들고 자기 마음대로 포기도 못한다고 봐야 한다. 하후생 시절 옆 내무반의 모병 14기 주축 유격전문반 때문에 술먹고 내무반 습격해 야밤에 자다 일어나 쳐맞는 일이 종종 생겨, 어서 레인저반이 야전으로 나가기를 빌었었다. 저런 생 또라이들이 우리들의 자대 14기 고참이란 말인가 사색에 사색. 유격전문은 1년에 한 3-4기수가 나오고 기억에 한 기수는 많아야 60명 정도였다. 84년도 교육단에서 이 유격전문반으로 인해 항상 조심하고 있을 때, 이 교육에는 타군도 있었다. 유디티였는지 해병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으나 고생 많이 했을 것이다. CO훈련 추가 전에 이 유격전문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래서 유격전문도 고문훈련 이전과 이후로 약간 구분하는 경향도 있었다. 북한산 오봉에서 하는 암벽등반교육이 가장 힘든 내용 중에 하나로 알고 있다. 27교육과 유격전문 암벽 훈련의 공통점은 로프로 무지하게 맞는다는 것. 자대에서 많이 대화도 나누고 했던 14기 유격전문 수료생도 CO훈련 없이 이 과정을 다녀왔다. 유격전문 산악 PT는 고관절 잡어먹는다. 보통 암벽등반, 공중탈출, 무성무기, 즉각조치 사격, 특전무술 등등을 하며 거기에 CO훈련이 추가된 것이다. 유격전문 마지막 기간이 되면 강원도나 충청도 외딴 산골로 들어가 도피 및 탈출 훈련을 시작하고, 결국 어떻게든 잡히게 되어 고문훈련에 들어간다. 원래는 종합전술훈련 뒤에 사령부 교육단으로 천리행군 복귀였는데, 결국 CO훈련 뒤의 천리행군은 불가라는 결론이 난다. 유격전문 천리행군 복귀는 완전군장 행군에서 '앞에 총' 자세로 가야 하는 전통이 있었다. 이번에 사고가 난 내용을 보면 이해가 힘들겠지만, 이 도피 탈출 생존 훈련은 총 3단계로, 먼저 전술타격 등을 하다 적에게 발각되어 추격과 도피를 시작한다, 2단계는 감금 상태로 원래는 포로가 잡힐 경우 곧바로 심문하면 반항의지나 체력이 남아 있어 고립시켜 굶기면서 완력이 풀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넋이 약간 풀리면 그때부터 3단계 심문/고문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현 사고는 2단계에서 난 것이다. 특히나 유격전문(특전문) CO훈련은 악명이 높아서 보통 여러 교육생들이 교육단에 돌아다니는데, CO훈련 끝내고 온 레인저 교육생들은 유일하게 열을 짓지 않고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왜냐하면 주리도 틀리고 해서 거의 병신처럼 어그적어그적 다니기 때문에 우린 멀리서 봐도 레인저인줄 안다. 일단 빨간 추리닝을 맞춰 입기도 해서 눈에 띠고... 천리행군 복귀 날 증상 2-3배 어그적어그적.... 87년도 중사를 달기 위해 하사관 보수교육 들어가 일주일 유격 끝내고 조금 지나 레인저 반이 CO 끝내고 돌아와 보통 천리행군 끝난 직후보다 더 심한 상태로 다리를 절면서 병신들처럼 빨간 추리닝 입고 돌아디나는 걸 봤다. 우리 하보수 안의 레인저 수료생들도 킥킥거리고... 유격전문 나온 동기들은 그 교관 조교들에게 이를 간다. 이 유격전문 CO훈련은 육체적 고문으로 시작되었다가 나중에는 후유증이 너무 심하다고 해서 특전문 교육 후반부에는 잠깐 정신적 고문으로 바뀌기도 했다. 이 외딴 산골에서 하던 유격전문 고문훈련에는 하나 전설 아닌 전설이 내려온다. 그 고문장 가깝게 살던 입대영장을 받은 시골 젊은이가 병역을 거부하고 도주했다는 것. 사령부 스쿠버 교육에도 전설이 아닌 실제 삽자루 사건이 있었다. 동해안 훈련장 바로 옆에 살던 할아버지가 며칠을 훈련을 지켜보다 삽자루를 휘두르며 훈련장에 난입해 눈물을 흘리면서 교관 조교들에게 "니들이 사람이냐!" 광분하셨다는... 서양의 특수전부대도 현재는 육체고문보다 정신적인 고문을 주류로 한다. 왜냐하면 총을 맞고도 잘 싸우기 위해서 총알을 맞아볼 수는 없는 것이고, 어차피 완벽하게 물리적 모든 고문을 대처할 수도 없는 것이기에 '정신과 대처요령, 의지'를 주류로 다룬다. 앤디 맥랩의 80년대 초 SAS 후반 마지막 고문/심문 과정도 물리적인 고문은 거의 없고 정신적인 고문을 위주로 하고, 미 케네디 특수전학교 생존반이나 로빈 세이지 종합훈련에서도 포로심문과정이 있으나 그렇게 80년대 특전사에서 했던 너무도 심한 물리적 고문은 이제 하지 않는다. 앤디 맥랩의 경우를 보면, 정글전 과정을 통과하고 영국으로 돌아와 도피탈출 생존 통과훈련을 받는데, 며칠 간 잠을 안 재우고 사생아였던 맥랩의 신상을 가지고 어머니 욕까지 하면서 끈질기게 감정적으로 동요될 때까지 정신적으로 괴롭힌다. 이 유격전문 - 레인저 - 특전문 교육은 정확한 년도는 기억이 나지 않으나 90년대 중반 정도에 폐지되고, 대신 하보수교육을 들어온 인원의 필수 선택 교육 중 하나로 전환되었고, 이때는 고문훈련은 사라지고 '암벽/고등산악기술' 위주의 교육이 되었다. 21기 후배들이 중사를 달 무렵 그렇게 되었던 것으로 후배들에게 들었던 것 같다. 전인범 특전사령관님은 분명 이 5여단과 특전문의 CO훈련을 기억할 것이다. 이 외에도 장교분들의 상무대 유격훈련 후반부에 CO훈련이 90년대 초까지 더욱 혹독한 과정으로 존재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내 부사관 따블백 동기회에 한 20명 모이면 거기 유격전문 수료자 한 5명은 항상 있다. 그리고 그렇게 유격전문을 받은 수료자인 원사들이 특전사 안에 분명히 상당수 존재한다. 문제는 그 명맥이 끊어진 것이다. [전문유격이 올바른 명칭인지도 모르겠다.] 그때 교관 조교는 다 군에서 나갔을 것이고 피교육생이었던 사람들이 원사로 남아있을 것이다. 이번 특전사의 발표를 보면, 육체적인든 정신적이든 일정한 고문/심문대처훈련을 앞두고 리허설 형식으로 실행해보다가 사고가 난 것으로 말했다. 문제는 앤디 맥랩의 SAS 기초과정 고문훈련 당시를 보면, 이 훈련과정 안에 군의관은 물론 심리학 전문가가 동참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심리학자는 교육생들이 현재 과정에서 심리적으로 얼마나 버티고 있고 SAS의 심리적인 자질까지 갖췄는가를 교육점수에 반영하는 두 가지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거 배워야 한다. 내가 번역한 많은 글에 보면 델타포스나 네이비씰 선발과정에도 심리학 군의관이나 전문가 등이 존재하면서 훈련을 지켜본다. 브라보 투 제로를 어디까지 믿어야할 지 모르겠으나 앤디 맥랩의 SAS팀이 이라크군 고문/심문에 일정하게 대처해 성공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그러므로 통과과정의 정신적인 고문이었으나 이 훈련의 효과가 없다고는 말하기 힘들다. 다만 군의관 심리학 전문가는 필요하다. 그러므로 뉴스에 나온 내용 중 매뉴얼의 미비는 틀린 말이 아니다. 설마 그런 일까지 벌어질까 그랬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너무 가슴이 답답하고 아까운 청춘에 뭐라 선배로써 할 말이 없다. 물론 85년도부터 시작되었던 이 대부분 육체적 물리적인 CO훈련은 근 10년만에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나 개인적으로는 전인범 특전사령관님이 타격을 받지 않기를 바란다. 유가족 입장에서는 특전사령관도 궁극적인 책임이 있다고 느끼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모부대의 발전을 바라는 입장에서 전인범 사령관은 분명 특전사를 좀 더 정예화하는데 신경을 쓰고 있었고, 대부분의 우리 예비역들은 이를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다만, 여단에 천리행군을 안 시키는 방향으로 가는 것에는 반대한다. 나도 다섯 번 했지만 천리행군 군인으로써 '할만' 하다. 고문훈련이 무슨 의미이며 특전사 팀원이 하나 잡힌다고 뭘 알겠냐 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불면 전우가 죽는 것이고 그로 인해 한 명이 잡히면, 은거지-임무지원지점- 1~2~3차 재집결지 등을 모두 바꾸어야 한다. 우리 생존에 관한 문제다. 부대원은 소수이고 내가 불면 내 전우가 죽는다는 것이 명백하다. 큰 부대라면 내가 불어버린 내용으로 어떤 파장과 영향이 오는지 불투명하나 특전사는 안 그렇다. 누설자 없이 지리산 공비 토벌이 가능했을까?... 과거 두어 달에 한 번은 사령부 교육단이나 타 여단에서 사망사고가 계속 일어났지만 모두 그러려니 했다. 요즘은 언론의 부각을 받지만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나도 판단하기 힘들다. 몇 년 전에 모 여단 해상훈련에서 사망자 나왔을 때 한 줄 기사 달랑에 누가 신경이나 썼는가?... 군대에서 하는 훈련은 특전사가 아니라도 항상 위험하고, 그래서 사고도 나고 아까운 인명이 손실되거나 다치기도 하지만, 결국?훈련이란 전시에 나를 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이 안 나기를 나 역시 진심으로 기원하지만 실전이 닥친다면 우리가 하던 힘든 훈련 정도는 결국 아무것도 아니다. 또 다시 전장 환경에서 적어도 3일을 버텨야 병사답게 싸우게 된다. 평시 군대가 오래 지속되나 정말 체력의 극한과 수면부족에 굶으면서 해야 전투에서 이긴다. 여러 분이 보병 현역이셨다면 RCT 3일 동안 총 수면 5시간도 안 되는 상태. 이것이 우리가 전시에 싸우는 병사의 기본 상태다. KCTC에서 쫄쫄히 굶고 잠보다 어떻게 하면 이기나 온갖 피로와 체력 저하 속에 정신이 살아 숨쉬는 상태가 바로 전투에 준비된 진짜 상태라고 본인은 생각하기 때문이다. KCTC 훈련부대도 공격이나 방어 한 번 하고 나면 병사들이 눈빛부터 달라진다고 한다. 요즘 같은 하이텍크 시대에 천리행군 같은 거 왜냐하며 묻는 분이 계실 것이다. 천리행군 4-5일 차 상태가 바로 실제 전투 전투피로와 같은 상태다. 천리행군도 한 3일차 들어가면 수면부족에는 적응된다. 다만 발이 좆나게 아프고 어깨가 군장 때문에 뽀개질 것 같고, 몇 시간 자고 일어나면 목이 안 들리고 손 하나 들기도 힘들다. 한 레벨이 지나가면 딱히 심탐도 안 느껴진다. (일단 군장의 쌀을 버리고도 싶고) 그리고 몸도 가벼워진다. 몇 숟갈 먹고 또 걷는다. 내가 특전하사관으로 자대에 도달하기 한 2년 전에 힘든 훈련 많이 사라졌다. 전에는 1년에 천리행군 두 번이었다. 전술종합과 유격천리라고 따로 천리행군했고, 2천리행군 실험도 있었으나 병사 부상이 너무 극심해 결국 철회되었다. 그리고 810인가 보복계획에 따라 타격후 24km를 뛰는 훈련도 있었다. 도피탈출훈련인데 거의 다 토하고 지나가는 차에 뛰어들고 싶었다고 다리 밑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다고 고참들이 하는 소리를 들었다. 추격제대가 뛰쫓아 오는 훈련. 특전사 고문훈련은 처음하는 게 아니다. 다만 명맥이 끊어졌을 뿐이다. 유격전문의 CO는 일단 사령부 교육단 특교과 모든 교관 조교가 모두 완전 가학적 또라이라고 생각했다. 자기들이 짜준 작전계획을 불라고 고문하고 7단계 전에 포기해도 자백이 거짓이라고 몰아부치면서 모든 레인저 교육생을 강제로 7단계까지 끌고 갔다. 이 특교과 교관 조교들은 대부분 고공과 유디티를 모두 받은 사람들이었다. 여러분들의 상상과 달리 고공 유디티 둘 다 받은 사람은 기본적으로 또라이가 아닌가 당시 의심했다. 장교가 고공과 유디티를 다 받았다면 그건 최상급 또라이다. 하여간 그런 경향이 있었다. 무서울 정도로 저돌적인 특전맨으로 이해하시면 된다. 특전문은 두 가지 이유로 대부분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1. 특수수당이 없는 교육이다, 2. 교육단 특교과 교관 조교 또라이에 사람 잡는 CO훈련... 당시 유격전문 공식적인 마크가 있었으나 오히려 수료자들은 거의 달지 않았고, 스쿠버는 마크도 없었다. 대대 작전상황판에 교육 수료자 숫자만 써 있다. - 위 내용은 본인 개인의 주장이라고 표현될 수 없는 당시 근무한 사람들에게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평범한 지식에 불과합니다. 부대에 관심 없던 사람들은 "아니 왜 고문훈련이 처음이라는 거지...??" 할 겁니다. 요즘 군이 너무 실추되고 동네북처럼 되어가는데, 이러다 전쟁 나면 왜 실전적으로 빡시게 안 굴렸냐고 항의할 것은 오히려 국민들이다. 미군처럼 FM처럼 훈련 해보라. 내가 피곤해 죽겠는데 무슨 졸병을 갈구고 때릴 시간이 있나. 이번 구타사건은 80년대 군대를 나온 나도 충격이었다. 1년에 간부들이 반은 집에 못 갈 정도로 야외훈련도 많고 대기도 많고, 여단 막사에 들어오면 거지 같은 밥도 아닌 밥을 먹다 식당밥 먹으면 눈물 난다. 이해를 못하겠지만 당시 야외훈련에서 우리가 가장 선호 한 것은 동결건조 쇠고기 비빔밥이란 전투식량이었다. 양도 많고 맛도 좋았다. 우리는 정말 맛있었다. 그게 안 나오면 그냥 야전훈련에서 심하면 전술종합 6주 동안 모든 취사를 우리가 해먹는데, 보리 섞인 쌀에 진짜 많이 먹은 것은 소금기 쩐 깻잎 무말랭이 등등 정말 많이 먹었다. 콩장도 많이 먹었고 천리행군 막판에 닥꽝이 나온 적도 있다. 특수부대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내 개인적으로 가장 힘겹고 지겨운 것은 그 놈의 행군, 행군, 부식은 엉망이고... 야밤에 한 30km 독도법 팀별 선착순 행군하고 (반은 뛴다) 다음 날 정상일과에 지구가 망하는 날에도 시킬 것으로 추정되는 아침 체력단련 2시간. 그러니 여단 주둔지 돌아오면 행복했고, 정말 잘못했으면 정확히 모여 룰로 정해진 군번대로 서는 법과 맞는 법에 따라 정확히 맞고 가혹행위 거의 없었다. 한 성격 개 같은 한 장교에게 당한 것 외에는 고참들에게 받은 얼차려나 구타 앙금 남은 것 일절 없다. 그런 일 벌어지는 부대는 처벌이 아니라 온 몸이 곤드레가 되도록 산악행군 같은거 시켜야 한다. 한 보름 간. 군인이 뭔지 정신 좀 차릴거다. 군대 훈련에서 피곤하면 피곤할 수록 너나 집합도 없고 자질구레한 것 가지고 남자가 쪽팔리게 건수 잡아서 애들 놀리고 장난치고 지저분한 짓 시키고 가혹행위하고.... 우리도 맞았지만 그렇게 심하다는 생각 별로 못 했고 [물론 그런 분이 1기수에 한두 명은 꼭 있다] 그런 이야기 들으면 숨이 막히고 납득도 잘 안 된다. 물론 특전사는 제대하기 직전까지 고참이라고 고참행세 못한다. 장기자 고참들 있어서 꼴깝떨다가 쳐맞는다. 중사 때도 심심하면 대가리 박았다. 물론 특전사 각 여단 각 대대 각 지역대는 시기별로 분위기가 많이 달라서 어떤 곳은 매우 힘들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난 우리 젠틀했던 지역대 14기 선배들에게 감사한다. 우리 윗 지역대는 분위기 전혀 다르다. 중사 달고 태권도 숙달 지시가 내려오자 두 번째 대대장님 아래 앞올리기 100 옆차기 100 앞돌려차기 100 찍기 100 뒷차기 100 무한반복에 밤 9시까지 이어지고. 간부들은 결산 1분에 조용히 사라지고 나는 BEQ에 내려가 그대로 쓰려져 자다가 그대로 도복으로 출근 반복 일주일. 피곤해 죽겠는데 무슨 집합 무슨 구타 무슨 가혹행위. 앞서 말했듯이 이런 훈련은 대위나 상사도 절대로 예외되지 않는다. 중사나 중위 정도는 정말 퇴근 가능한 분대원이다. 보자보자 하니, 사람을 돌봐야 할 주특기의 인생 경험도 없는 계급 하사란 친구가 엄청난 일을 방관하고 병사 머리를 스탠드로 찍어 이런 부사관들은 엄벌 후에 전투부대 말단으로 보직 발령해서 밑바닥 체험부터 시켜야 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부사관은 주특기가 무엇이건 보병분대부터 시작해야 한다. 바람이 있다면 모든 장교 부사관 병사들에게 '당신들은 잠시일지 몰라도 전시에 살아남아 적에게 총알을 박아야 하는 군인!...'임을 먼저 주입시켰으면 합니다. 그 개념이 약하니 이상한 짓들을 하지요. kctc 참가해 본 현역 출신들은 알 겁니다. 길지도 않은 군생활 반은 고참인데, 실제로 해보니 계급이고 개뿔이고 안 되면 못하면 정말 창피한 것이란 사실을... 군인이 장교 부사관 병사 떠나서 저녁밥 든든히 먹고 오늘 목에서 노란물 안 넘어오고 발 뻗고 편안히 잘 수 있으면 고마운지 알아야 한다. 징집이다 나는 간부다 떠나서 상상하기도 싫은 전쟁 나서 체력부족 훈련부족으로 개죽음 당할 수 있다는 경각심이 있어야 한다. 내가 군인 답게 강해야 나를 지키고 적을 더 죽이고 그리고 국민을 지키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고 내용으로 인해 옛날 기억도 나지만, 두 아까운 청춘 후배 하사들이 훈련준비 미흡으로 명을 달리한 것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고, 선배로써 미안하나, 남은 현역 후배님들은 기죽지 말고 더 열심히 열성적으로 군생활 보람차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명을 달리한 전우 몫까지 열심히...
단결!!!??
증거자료3
전투용 소모품.... 경의를 표합니다. 우린 당신들의 죽음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간만에 잇빨중사님 글을 보내요. 특인동을 인연으로 이촌동에서 용산방면으로 걷던생각이 납니다. 16기 최규용 입니다. 선배님이 위에 언급하신 특수전전문 #18 수료했구요. 당시 같이 수료를한 인원은 47명뿐 이였고, 통상 1년에 1~2차수만 입교를 했던것으로 기억 됩니다. 지금도 생생한 1986년 CO훈련(SERER) 세월이 많이 지났음에도 잊혀지지 않구요. 작금의 언론에서 마치 마루타 취급소식을 들으면, 가슴이 먹먹 합니다. 예기치 않은 우발적인 사고에 언론은 희생양을 찾는것 같습니다.
종합한다.
특공대원으로서의 자부와 긍지를 갖자.
지금의 특공대가 있기까지 무한 에너지를 만들어 주신 선배님들과 지금도 현역으로 근무하고 있는 후배들, 그리고 특공대원으로서의 포부를 가지고 열심히 훈련에 임하는 특교단 특공대원 후보자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특공대원으로서의 자부심을 높이자. 역사는 늘 우리를 통해 만들어지고 있음을 잊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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