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김씨(慶州金氏)의 시조는 김알지(金閼智)이다. 시조 김알지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가 삼국사기에 자세히 전하는데, 이를 통해 경주김씨의 성씨유래를 알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65년(탈해왕 9) 봄 3월에 왕이 금성(金城) 서쪽의 시림(始林)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자 호공(瓠公)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더니, 금빛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는데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보고하자, 왕은 사람을 보내어 금궤(金櫃)를 가져온 후 뚜껑을 열어보니, 작은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는데, 자태와 용모가 기이하고 컸다. 탈해왕(脫解王)은 기뻐하여 “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보내 준 것이 아니라 하겠는가?”하며 거두어 길렀다. 아이는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을 김(金)으로 하사하였으며, 시림(始林)을 계림(鷄林)으로 고쳐 나라이름을 삼았다. 이후 김알지는 마정부인(摩貞夫人) 석씨(昔氏)와 결혼하여 세한(勢漢)을 낳았다. 세한은 아도(阿道)를 낳았으며,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았고, 수류는 욱보(郁甫)를 낳았다. 욱보는 구도(仇道)를 낳았는데, 구도가 김씨로서 첫 번째 왕위에 오른 미추왕(味鄒王)의 아버지이다. 경주김씨는 미추왕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시작으로 마지막 왕 경순왕(慶順王)까지 38명의 왕을 배출하여 587년 동안 신라를 통치해 왔으며 경주(慶州)를 비롯한 600여 개의 관향(貫鄕)으로 나뉘었다.
경주 김씨는 파계(派系)가 복잡하지만 대표적인 파로는 김명종(金鳴鍾)을 일세조로 하는 영분공(永芬公) 명종파(鳴鍾派), 김은열(金殷說)을 일세조로 하는 대안군(大安君) 은열파(殷說派), 김장유(金將有)를 일세조로 하는 판도판서공(版圖判書公) 장유파(將有派), 김인관(金仁琯)을 일세조로 하는 태사공(太師公) 인관파(仁琯派), 김문기를 일세조로 하는 백촌공 문기파, 김덕재를 일세조로 하는 병판공 덕재파, 김존일을 일세조로 하는 장사랑공 존일파, 김정백을 일세조로 하는 수문장공 정백파로 크게 분파되었고, 각 분파마다 작은 지파가 여러 개씩 있다. 경순왕의 아들 9형제가 각각 파를 형성하였는데, 셋째 아들 김명종과 넷째 아들 김은열, 김순웅(金順雄) 장군의 후손들만이 경주김씨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를 배출한 경주김씨 가문은 신라 경순왕의 4남 김은열을 파조로 하는 대안군 은열파 가운데 계림군(鷄林君) 김균(金稛)을 중시조 1세로 하여 내려오는 계림군 경파(京派)에 속한다.
계림군 경파의 시조인 김균은 개국공신으로 벼슬이 의정부 좌찬성에 이르렀다. 김균의 집안은 그를 포함하여 동생, 당숙도 조선의 개국에 큰 힘을 보태었다. 그리고 개국원종공신 권현(權鉉)의 딸인 부인 안동권씨와의 사이에서 얻은 3남 2녀의 자녀들 또한 모두 태조에게 각별히 우대되었던 공신가와 혼인관계를 맺었다.
그의 손자인 경주김씨 계림군 경파 3세 김종순(金從舜)은 세조때 좌익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고, 7세 김명원(金命元) 또한 선조때 정여립의 난을 수습하는데 공을 세워 평난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인원왕후를 배출한 경주김씨 가계는 조선 개국 초부터 지속적으로 공신가의 지위를 이어왔다.
왕비가문의 가계를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6세 김만균과 7세 김명원을 들 수 있다. 김만균은 문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며, 의정부 대사헌을 지냈다. 그의 생부는 홍문관직제학을 지낸 김천령(金千齡)이었으나 종숙(從叔)인 김인령(金引齡)의 가계를 잇기 위하여 그의 양자가 되었다. 그리고 김만균과 생부인 김천령, 큰아들 김경원(金慶元) 3대가 모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공신가로서의 지위 뿐만 아니라 문장과 실력을 갖춘 가문으로 세인들의 평가를 받게 되었다. 김만균의 아들 김명원은 선조대에 공신의 지위를 얻은 이후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다. 경주김씨 가문은 김만균대에 이르러 재상가의 반열에 오름으로서 16세기말에 이르러 조선시대 공신과 재상을 모두 배출한 명문가가 되었다. 그리고 김명원의 손자인 김남중은 여원정(礪原正) 이세헌(李世憲)의 딸 전주이씨(全州李氏)와 혼인하였다. 부인 전주이씨의 아버지는 성종의 4세손이므로, 전주이씨는 종실의 후손이다.
인원왕후 김씨를 배출한 김주신의 가계는 명문가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할아버지 김일진(金一振)이 일찍 죽으면서 선조들의 정치적 명성을 이어오지 못하였다. 그러나 김주신의 딸이 숙종의 계비로 간택되어 왕실과 혼인함으로써 경주김씨 계림군파에서 처음으로 왕비를 배출하였으며, 조선 후기 왕실의 외척가문이 되었다.
인원왕후의 고조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내고 영의정에 증직된 김수렴(金守廉)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예조판서를 지내고, 좌찬성에 증직된 김남중(金南重)이다. 할아버지는 성균생원으로 영의정에 증직된 김일진이다. 아버지는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이고, 어머니는 가림부부인(嘉林府夫人) 임천조씨(林川趙氏)로 조경창(趙景昌)의 딸이다.
〈인원왕후 경주김씨 가계도〉
김균(金稛-)
김균(1341∼1398)은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호는 취죽당(翠竹堂)이다.
공역승(供驛丞) 김남미(金南美)의 현손, 예빈경(禮賓卿) 김수(金粹)의 증손, 예의판서(禮儀判書) 김기연(金起淵)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지문하부사(知門下府使) 김지윤(金智允)이다.
김균의 부인은 안동권씨로 개국원종공신 밀직부사 권현(權鉉)의 딸이다. 부인 안동권씨와의 사이에서 3남 2녀를 낳았다. 경주김씨의 중시조로, 계림군 경파(京派)의 시조이다.
1360년(공민왕 9)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였다. 공양왕대에는 조준(趙浚)이 권력을 잡자 친우인 인연으로 전법판서(典法判書)에 이르렀다.
조선이 개국한 뒤 태조를 추대한 공으로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가자되고,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벼슬이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김균의 집안은 그를 포함하여 태조의 공신들을 많이 배출하였는데, 동생 김은(金穩), 당숙 김의(金義) 등이 개국원종공신이었다. 김균의 자녀들은 태조에게 각별히 우대된 노은(盧訔)·문계종(文繼宗)·이정간(李貞幹)과 같은 공신가에서 며느리를 맞이하였으며, 사위는 신간(辛僩)과 태조의 지우(知友)이자 고려 입절인(立節人)인 차원부(車原頫)로, 조선을 개국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운 집안이었다. 시호는 제숙(齊肅)이다.
김종순(金從舜)
김종순(1405∼1483)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대주(大冑), 호는 경암(京菴)이다.
아버지는 김계성(金季誠)이고, 어머니는 전의이씨로 이정간(李貞幹)의 딸이다.
1427년(세종 9)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7년(세종 19) 문음(門蔭)으로 충훈부사승(忠勳府司丞)에 제수되었고, 이후 전농시직장(典農寺直長)·한성부중부령(漢城府中部令)·감찰 등을 지냈다. 병조좌랑 재직 중에 부사직(副司直) 이보흠(李甫欽)을 사직에 잘못 승수(陞授)시킨 사건에 연루되어 논죄되었으나 공신자손이라 하여 파직에 그쳤다.
그 뒤 복직되어 봉상시판관·병조정랑·장령·개성부단사관(開城府斷事官) 등을 지냈다.
1455년(세조 1)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고, 이어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를 거쳐 형조참의·동부승지·도승지·이조참판·경기관찰사·한성부윤 등을 지냈다.
1464년(세조 10) 대사헌, 1469년(예종 1)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직하였다.
그 뒤 복직하여 개성부유수·판한성부사·평안도관찰사를 거쳐 1476년(성종 7) 지중추부사로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시사(詩詞)에 능통하여 명성이 높았고 세조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향년은 79세이며, 시호는 공호(恭胡)이다.
〈부인 남양홍씨 묘지문〉
八世祖妣貞夫人洪氏墓誌
夫人墓表。題曰貞夫人洪氏之墓表。陰記曰。判漢城府尹金從舜妻洪氏。弘治十三年二月。葬于高陽大慈山。而不及世系生卒。今皆不可攷。聊記判尹公先系后孫。誌于壙南。而略古詳今。庶有徵於來世。判尹公考曰贈判書季誠。祖曰本朝開國功臣齊肅公稛。曾祖曰贈贊化功臣參知門下府事智允。高祖曰典書起淵。我金氏本慶州人。判尹公歷事世 宗文宗端宗世祖睿宗成宗六朝。卒諡恭胡。有二男三女。男長致運。奉常寺正。次致世。洪州判官。三女適府使權佖,判官金良孫,副正韓允範。寺正子曰持平引齡。判官子曰直提學千齡。直學長男萬億郡守。次萬鈞大司憲。出嗣持平。次萬鎰縣監。次萬鍈。大憲生二子。長曰節度使慶元。次曰左議政命元。議政長男克亨。早沒。次守仁別提。出嗣節度。次守廉僉樞。別提子曰贈參判南獻。僉樞子曰禮曹判書南重。參判三男。始振參判,益振正字,夏振參奉。判書三男。弘振正郞,一振生員,必振府使。參判子正字 男亮臣。生子宗衍縣監。正字男輔臣判官。生子昌衍。參奉男夢臣觀察使。生子世衍。正郞男鼎臣府使。生子履衍,泰衍,復衍。生員二男。聖臣進士。生子象衍,趾衍。柱臣領敦寧。生子後衍,九衍。府使男介臣。夫人墓向丁爲原。己丑五月五日。埋于壙南一尺。
添錄
判尹公墓失其處。先代傳以爲初葬孝陵火巢內。而亦未知其必然也。歷職亦譜佚無傳。而世祖壬午。以嘉靖大夫。爲京畿觀察使。則見於興仁門內古鍾銘。睿宗元年。以資憲大夫。爲慶尙道觀察使。則 見於本道先生案。端宗癸酉。爲掌令。世祖辛巳十二月。以都承旨。與河東府院君鄭麟趾,左議政申叔舟,左贊成黃守身。往相章順王后葬地于高陽縣。及壬午。爲戶曹參判。甲申爲大司憲。成宗辛卯。爲開城府留守。戊戌四月。成宗宴老人于泮宮。公以上護軍。與鄭昌孫,韓明澮,徐居正,許琮諸名公進參。則見於實錄。被選淸白吏。亦見實錄。而公之外曾祖判書李公丘直墓表。立於正統九年。其陰記。卽公所書。而公之官銜。以宣務郞兵曹正郞兼承文院副校理,春秋館記事官書。則其由文科登庸。此可見也。 庚寅十月七日。添埋。
實錄曰。成宗戊戌四月甲午。上幸成均館。行酌獻禮。御明倫堂。宴老人領議政鄭昌孫,行上護軍金從舜等十六人云。而此外進參者亦多。公於諸老臣中。序居第二。則是時似年且大耋。而自戊戌至弘治庚申夫人葬年。爲二十三載也。以此推之。則夫人享年且將百歲。果有是與。家中舊譜。有曰。一本以爲判尹公娶摠制朴培女。恐或前後室云者爲是。而別葬亦以是與。
『壽谷集』卷之四
김천령(金千齡-)
김천령(1469∼1503)은 조선 성종 때의 문신으로 자는 인로(仁老)이다. 판윤(判尹) 종순(從舜)의 손자이고, 통판(通判) 김치세(金致世)의 아들이다. 김만균의 생부이다.
1489년(성종 20)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496년(연산군 2) 식년문과에 장원하였다. 성균관전적과 이조좌랑을 거쳐, 1498년에는 사가독서하였다. 이어 홍문관에 들어가 부응교에 올랐다.
학문이 뛰어나고 언동이 강직하며, 정사에 민활하여 촉망을 받았다.
1502년 승문원교감(承文院校勘)으로 성절사(聖節使)를 수행하여 명나라에 다녀온 뒤, 장령(掌令)이 되었다.
이듬해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외유내강하며, 강직한 언사 때문에 재상의 비위를 거슬려 중죄를 입기도 하였다.
그러나 의사를 발표할 때는 반드시 경전에 근거하여 명백하고 조리있게 논평하여 임금의 뜻을 크게 움직였다. 《성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청빈한 대간으로 칭송을 받았으나, 1503년 35세로 요절하였다.
죽은 이듬해의 갑자사화 때, 앞서 대간으로 재직하면서 정침(鄭沈)의 가자(加資)를 주장한 일로 부관참시(剖棺斬屍)의 추형을 당하였다. 중종반정으로 신원되고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김천령 묘지문〉
六世祖考奉正大夫守弘文館直提學,知製敎兼經筵侍讀官,春秋館編修官,藝文館應敎贈通政大夫承政院都承旨,知製敎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藝文館直提學,尙瑞院正金公墓誌。
公諱千齡。字仁老。金氏。系出慶州。新羅敬順王之後。開國功臣齊肅公諱稛,贈判書諱季誠,判漢城府尹諱從舜,洪州判官諱致世。寔公高曾祖考四世。妣竹山安氏。郡守仲聃之女。觀察使望之之孫。配贈淑夫人李氏。恭靖大王孫。明山都正金丁之女。公 以成化己丑生。年二十一。中進士狀元。二十八。又魁文科。官至弘文館直提學兼藝文館應敎。卒于癸亥。享年僅三十五。明年甲子。禍及泉壤。卽燕山十年。痛矣。尙忍言哉。後贈承政院都承旨公。有四男一女。男長萬億郡守。次萬鈞。文科狀元大司憲。次萬鎰縣監。次萬鍈。女適韓世儉。郡守生二男。效元進士。次應元大憲。出後從父持平諱引齡。生二男。長慶元文科狀元公淸兵馬節度使。次命元左議政慶林府院君。縣監生一男。驥臣。萬鍈無后。節度未育。子議政仲子守仁別提。別提生南獻。贈吏曹參判。參判有三子。 曰參判始振。曰正字益振。曰參奉夏振。參判無嗣。子正字次男亮臣。子曰宗衍縣監。正字男輔臣判官。子曰昌衍。參奉男夢臣觀察使。子曰世衍議政。長子克亨早夭。季子守廉僉樞。僉樞生南重禮曹判書。判書有三子。曰正郞弘振。曰生員一振。曰府使必振。正郞男鼎臣府使。子曰履衍,泰衍,復衍。生員男聖臣進士。子曰象衍,趾衍。次男柱臣領敦寧。子曰後衍,九衍。府使男介臣。公墓在今高陽治西五里大慈山負丑原。夫人李氏。祔焉。若公履行終始。有挹翠軒朴先生誾所撰名行記。其文可與天地不朽。玆不揄揚焉。己丑五月 五日。埋于公墓壙南一尺。
添錄
夫人享年及生卒年月。代遠無徵。而按漁村沈參贊彦光遺集。載夫人挽詩一首。有曰。高門生碩媛。遠派聯王室。夙歲配君子。宜家自貞吉。艱危甲子際。零落依蓬蓽。孤燈二十年。生理天所恤。鞠育寧馨兒。欒欒常在膝。譬彼木之生。有根斯有實。蜚英冠多士。業非箕裘失。春暉苦難駐。永無懷橘日。靑靑大慈山。幽隧夜如漆。山有大慈名。棘人淚成血。以此詩語推之。夫人下世。在於大憲公登第之後。而在某年。無可考 據也。然直學公年三十五。卒於癸亥。而大憲公登第。在癸亥後二十六年戊子。則其時夫人年且六旬。可知也。聊書此錄于誌文下。以示後人焉。庚子三月日。添埋。
『壽谷集』卷之四
김인령(金引齡)
김인령(1462∼1504)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수옹(壽翁)이다. 아버지는 봉상시정 치운(致運)이다.
1483년(성종 14) 진사가 되고, 1497년(연산 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어, 봉상시주부를 거쳐 예조좌랑·시강원문학·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유생들이 말을 타고 가벼운 비단옷을 입고 윗사람을 능멸하는 예가 많음을 지적하여 교정시키도록 하고, 언관의 보호도 주장하였다.
같은 해 사헌부에서 숙원 장씨(淑媛張氏)의 이웃집 철거문제를 간언한 일에 관련되어 이자건(李自健)·박의영(朴義榮) 등과 함께 관직을 삭탈당하고 임실에 유배된 뒤에 43세를 일기로 부관참시형에 처해졌다. 그 후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김인령 묘지문〉
六世祖考朝散大夫司憲府持平贈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世子貳師金公墓誌
公諱引齡。字壽翁。慶州金氏。開國功臣齊肅公諱稛。贈判書諱季誠。判漢城府尹諱從舜。奉常寺正贈吏曹判書諱致運。寔公高曾祖考四世。配安東權氏。留守摯之孫。未育。取從弟直提學千齡仲子萬鈞爲后。文科狀元。大司憲有二子。長慶元節度使,季命元左議政。議政長子克亨早沒。仲子守仁別提。出嗣節度。季子守廉僉樞。別提生南獻。贈吏曹參判。參判有三子。曰參判始振。曰正字益振。曰參奉夏振。參判 無嗣子。正字次男亮臣。正字男輔臣判官。參奉男夢臣觀察使。僉樞生南重。禮曹判書。判書有三子。曰正郞弘振。曰生員一振。曰府使必振。正郞男鼎臣府使。生員男聖臣進士。次柱臣領敦寧府使。男介臣。公墓有短表。前面題曰贈通政大夫承政院都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藝文館直提學,尙瑞院正,行朝散大夫,司憲府持平金公之墓。後面陰記。第一行書諱。叙先系處。尤刓缺難讀。而其僅可辨者曰。公成化癸卯。中生員進士。弘治丁巳。登文科。選入承文院。歷奉常寺主簿,禮曹佐郞,侍講院文學。癸亥冬。 拜司憲府持平。燕山甲子春。以言事貶于任實縣。是年四月初三日。卒貶所。享年四十三。娶府使權僴之女。無后。以堂姪萬鈞爲后。乙丑二月二十七日。葬于廣州治西鉢里山。及我聖朝有贈云。凡公履行終始。世遠不可一二紀。而立表在於正德戊辰二月。則是時。大憲公尙幼未顯。乃知此贈官。必於中廟初服。以燕山朝直諫坐貶。特施之褒典也。後以議政公貴。累贈至議政府左贊成。配貞敬夫人。祔公墓左。公墓向午爲原。而鉢里山。今稱芳桋洞云。壬辰五月二十六日。埋于公墓壙南一尺。
『壽谷集』卷之四
김만균(金萬鈞)
김만균(1495~1549)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중임(仲任)이다. 생부는 홍문관직제학 김천령(千齡)이며, 종숙인 지평 김인령(金引齡)의 양자가 되었다.
1515년(중종 10) 진사가 되고, 1528년(중종 23)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사서를 거쳐, 1531년(중종 26)에 홍문관수찬이 되어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안로(金安老)를 탄핵하였으나, 도리어 기묘사화를 일으킨 심정(沈貞)의 무리라고 탄핵당하여 삭직되었다.
그 뒤 1537년(중종 32) 김안로가 축출된 뒤 다시 서용되어 시독관·교리·홍문관부응교·사헌부장령·사간원사간·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543년(중종 38)에는 사은사, 그 이듬해에는 천추사로 파견되었고, 예조참판으로 《중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동지중추부사로 재임 중에 향년 78세를 일기로 죽었다. 그를 비롯하여 생부인 김천령과 큰아들 김경원(金慶元) 3대가 모두 문과에 장원급제하였고, 둘째아들 김명원(金明元)도 갑과 3인으로 급제하여 당시에 문명을 떨쳤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김만균 묘지문〉
五世祖考贈純忠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月城府院君,行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金公墓誌。
公諱萬鈞。字仲任。慶州金氏。新羅敬順王之後。至齊肅公稛。爲開國功臣。於公爲五世祖。高祖諱季誠。贈判書。曾祖諱從舜。判漢城府尹。祖諱致世。洪州判 官。考諱千齡。弘文館直提學。妣李氏。宗室明山都正金丁女。公出嗣從叔持平諱引齡。持平卽判官公兄奉常寺正諱致運之子也。元配驪興閔氏。無嗣。繼配順興安氏。縣監尊義女。育二男二女。男長慶元節度使。次命元左議政。二女適縣令尹千源,正郞林悌。議政長男克亨早沒。次別提守仁。出嗣節度。次僉樞守廉。別提子曰贈參判南獻。僉樞子曰判書南重。參判三男。始振參判,益振正字,夏振參奉。判書三男。弘振正郞,一振生員,必振府使。參判子正字男亮臣。生子宗衍縣監。正字男輔臣判官。生子昌衍。參奉男夢 臣觀察使。生子世衍。正郞男鼎臣府使。生子履衍,泰衍,復衍。生員二男聖臣進士。生子象衍,趾衍。次柱臣領敦寧。生子後衍,九衍。府使男介臣。公以進士。中嘉靖戊子文科狀元。始直學公進士及第。皆狀元。公及公長男慶元。三代連魁文科。世以此。謂設科以來所未有云。公歷事中宗明宗兩朝。官至司憲府大司憲。後贈議政府領議政,月城府院君。葬于高陽大慈山向酉之原。繼配祔焉。元配別葬右岡。相望十數步而近。凡公事行履歷。代遠譜佚。今皆不可考。聊記先系后孫。誌于壙南。庶有徵於來世。
添錄
公之歷官。佚於家譜無傳。而中宗二十五年辛卯十月。爲弘文館修撰。三十四年庚子十二月。爲大司諫。辛丑六月。爲同副承旨。明宗二年丁未四月。爲禮曹參判。則見於實錄。爲舍人。則見於政府先生案。戊申十二月。爲禮曹參判。則見於內賜冊子。明宗元年丙午。爲全羅道觀察使。則見於本道先生案。而公之登第。在於中宗二十三年戊子。則自戊子至戊申。立朝爲二十一年。而下世在戊申後何年及生于某年。皆無可考據也。然直學公年三十五。卒于 弘治癸亥。而朴挹翠所撰名行記曰。有男五人女一人。男大者始十一歲。姆負之。哭於位。吊客益傷之云。以此推之。則公之兄郡守萬億。當生於弘治癸丑。癸丑後十年。連育五子。而公序居第二。則是時雖生。未十歲。亦且已齔。至戊子登第時。則年纔三十三四。可知也。己丑五月五日。埋于公墓壙南一尺。
『壽谷集』卷之四
〈부인 여흥민씨 묘지문〉
五世祖妣贈貞敬夫人驪興閔氏墓誌
夫人大司憲贈領議政月城府院君金公諱萬鈞之元配。直提學諱千齡之介婦。左承旨驪興閔公諱源之女。觀察使諱師騫之孫也。早世未育。繼配安氏。 有二子。長慶元節度使,季命元左議政。議政以下子孫。備載于大憲公墓表及議政公碑陰。夫人葬于高陽大慈原。與大憲公墓相望數十步而近。有短表。以正德辛巳九月立。而未知下世果在何年也。然直學公年三十五。卒于弘治癸亥。而朴挹翠所撰名行記曰。有男五人。女一人。男大者始十一歲云。大憲公序居第二。則是時。似生未十歲。至嘉靖戊子登第時。則年纔三十三四。而立表在於戊子前八年。則夫人享年似不滿三十且數歲也。後贈貞敬夫人。己丑五月五日。埋于壙南一尺。
『壽谷集』卷之四
김명원(金命元)
김명원(1534∼1602)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응순(應順), 호는 주은(酒隱)이다.
아버지는 대사헌 김만균(金萬鈞)이며, 어머니는 순흥안씨로 현감 안준의(安尊義)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58년(명종 13)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61년(명종 16)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가 되고 이어 저작(著作)·박사(博士)에 승진하였으나, 이량(李樑)에게 미움을 사 형 경원(慶元)과 함께 파직되었다.
이량이 쫓겨나자 다시 부수찬이 되었으며 헌납·지평·교리·수찬 등을 역임하고, 1568년(선조 1) 함경도의 군무를 순안할 때 산천의 형편을 두루 다니며 살펴보고 요해지(要害地)의 방비 등을 자세하게 보고하였다.
다음해 종성부사가 되고, 그뒤 동래부사·판결사·형조참의·나주목사·정주목사를 지냈다.
1579년(선조 12) 의주목사가 되고 이어 평안병사·호조참판·전라감사·한성부좌윤·경기감사·병조참판을 지내고, 1584년(선조 17) 함경감사·형조판서·도총관을 지냈다.
1587년(선조 20) 우참찬에 승진하였고, 이때 왜구가 녹도(鹿島)를 함락하자 도순찰사(都巡察使)가 되어 이를 퇴치하였다. 이어 형조판서·경기감사를 거쳐 좌참찬으로 지의금부사를 겸했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난을 수습하는 데 공을 세워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책록되고 경림군(慶林君)에 봉해졌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검사가 되고, 이어 팔도도원수로 한강 및 임진강 방어에 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적을 막지 못하고 적의 침공을 지연시키는 데 그쳤다. 평양이 함락된 뒤 순안에 주둔, 행재소(行在所) 경비에 힘썼다.
이듬해 명나라 원병이 오자 명나라 장수들의 자문에 응했고, 그뒤 호조·예조·공조의 판서를 지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는 병조판서로 유도대장(留都大將)을 겸임하였고, 좌찬성·이조판서·우의정을 거쳐 1601년(선조 34) 부원군에 진봉되고 좌의정에 이르렀다. 유학에 조예가 깊었고, 병서와 궁마(弓馬)에도 능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김명원 묘지문〉
高祖考推忠奮義平難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世子傅,慶林府院君贈諡忠翼金公墓誌。
公諱命元。字應順。號酒隱。金氏。系出慶州。新羅敬順王之後。六世祖齊肅公稛。爲本朝開國功臣。封雞林君。生諱季誠。贈判書。生諱從舜。判漢城府尹。於公爲高祖。曾祖諱致世。洪州判官。祖諱千齡。弘文館直提學。考諱萬鈞。司憲府大司憲贈領議政,月城 府院君。妣贈貞敬夫人順興安氏。縣監尊義之女。公生于嘉靖甲午正月二十四日。中戊午生員。登辛酉式年甲科。例授直長。卽選弘文館正字。陞博士。遷修撰,校理。歷司諫,獻納,持平,直講。丙寅。以書狀官。朝皇朝。戊辰。承命廵按咸鏡軍務。拜鍾城府使。陞通政階。瓜滿。又出守東萊。歷判决事,刑曹參議。自是連除羅州,定州,義州。陞嘉善。辛巳。自義州。陞拜平安兵使。癸未。爲全羅監司。遷京畿監司。甲申。陞資憲。拜咸鏡監司。間爲戶兵二曹參判,漢城左尹。遷刑曹判書兼都摠管。丁亥。拜右參贊。己丑。以知義禁。參鞫鄭汝 立。錄平難勳。封慶林君。陞正憲。辛卯三月。丁大夫人憂。壬辰變初。宣廟特命。公起復。爲左參贊。旋拜八道兵馬都元帥。癸巳。協助天兵。克復三京。公遂辭遞元帥。歷工,戶,禮,刑四曹判書。進階崇政。丁酉。倭寇再逞。以兵曹判書兼留都大將。明年。陞崇祿。接伴天將。庚子。特除左贊成。移冢宰。是年。特命拜議政府右議政。明年。陞左揆。壬寅十二月十日。卒于位。享年六十九。明年二月。禮葬于今高陽治西大慈山先兆向酉原。後贈諡忠翼公。配貞敬夫人淸州韓氏。正郞綰之女。領議政效元之孫。祔葬墓左。育三男四 女。男長守愷早沒。無后。次別提守仁。出嗣伯父節度公後。有一男。曰南獻。贈參判。次守廉。僉知中樞府事。有一男。曰南重。禮曹判書。女長適縣監南復始。生子鎭縣監,錫參奉,銑判書。次適宗室文城君健。生子始林正世俊。次適崔尙鎭。生子茂府使。次適鄭晙。判書三子。弘振正郞,一振生員,必振府使。參判三子。始振參判,益振正字,夏振參奉。正郞男府使鼎臣。實主公祀。生三子。履衍,泰衍,復衍。生員二男進士聖臣。生二子象衍,趾衍。次領敦寧柱臣。生二子後衍,九衍。府使男介臣。參判子正字男亮臣。生子宗衍縣監。正字 男判官輔臣。生子昌衍。參奉男監司夢臣。生子世衍。外裔多不盡錄。公之至行盛德。洪功偉蹟。具著于澤堂李公植所撰諡狀及李文忠公廷龜所撰神道碑銘。而亦有昭載于國史者。今於幽堂之誌。不敢私自揄揚。略記先系后孫官歷。祈有徵於淵實之時云。大憲公墓表陰記曰。議政長子守愷。後改名克亨。公之墓表。亦以改諱書。故五代祖以上誌文。皆依墓表書。而獨忠翼公碑文及諡狀。偶以初諱書。故於此依碑狀書。
添錄
明宗乙丑四月。公在玉堂。與諸僚上箚。請斬妖僧普雨。而文出公手。尹月汀根壽祭文。所謂妖髡積孽。神 人同嫉。公奮其筆。上章請殛。義正而嚴。文多奇氣。都人傳誦。洛陽紙貴云者。卽指此事也。其年秋。在諫院。又與大司諫朴淳等。論劾領相尹元衡之橫恣。宣祖戊辰冬。以御史。出廵北關。多奏覆弛張。朝廷稱其幹局。遷拜鍾城府使。公嘗忤於李山海。山海方當路。故自是歷踐州府。不得居內者且十數年。庚子六月。命卜相。左相李恒福等。以原任大臣崔興源,鄭琢,李元翼,尹斗壽,李德馨入啓。命改卜。以沈喜壽加薦。傳曰。相臣之職難矣。古有相德相才相量等語。盖用非其人。成敗係焉。况此時乎。今見卜相。崔,鄭。 則老病。尹斗壽,李元翼則有物議。李德馨則年少。姑未合首揆。沈喜壽前日有言。聽以恭輩之指云。大抵若未有恰當之人。則不如姑闕之。書曰。官不必備。惟其人。祖宗朝或有獨相之時矣。此意回啓。左右相以必求完人。或至失人之意覆奏。敎曰。金命元雖似乏擔當之才。然寬厚有容。白首勤勞王事。韓應寅有大勳。尹承勳性簡。頗盡心國事。此數人。亦在可議之中。第未知其可合否也。再啓曰。上敎所及。皆一時德望。敢以爲賀。答曰。然則上下之見。相符深喜。遂以公拜右議政。及公病篤。宣廟特遣承旨視 疾。訃聞。敎曰。賢大臣遽爾卒逝。極爲痛悼。命官賻贈。公少受易於退溪李先生。先生曰。此子他日必貴。倚以爲干城重者。必此子也。李文忠公元翼。平生敬服公。嘗曰。公度量深邃。人見其仁而忘其畏。奇高峰大升。於文少可與。獨見公諸作。未嘗不嘖嘖歎賞云。右六七條。列碑狀中。或已載而未得其詳。又或有全沒其事者。故今輒添補于誌文之下。以備後人之互見焉。己丑五月五日。埋于公墓壙南一尺。
『壽谷集』卷之四
김수렴(金守廉)
김수렴(1574∼1651)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지혼(志渾), 호는 야당(野堂)이다.
아버지는 좌의정 김명원(金命元)이다. 공신의 적자(嫡子)로 중림찰방(重林察訪)에 초임되었다. 뒤에 홍산현감으로 있을 때 광해군 비인 유씨(柳氏)의 오빠 희발(希發)이 딸과의 결혼을 청했으나 이를 거절하여 파직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복관되어 한성부서윤·익산군수·안성현감·중추부경력·사섬시부정(司贍寺副正) 등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아 모두 나가지 않았다.
1646년(인조 24)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에 승진되었다. 뒤에 오성군(鰲城君)에 추봉되었다.
〈김수렴 묘지문〉
曾祖考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鼇原君,行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金公墓誌。
公諱守廉。字志渾。慶州金氏。新羅敬順王之後。曾祖官弘文館直提學諱千齡。祖官司憲府大司憲諱萬鈞。考官議政府左議政,勳封慶林府院君贈諡忠翼公諱命元。妣淸州韓氏。封貞敬夫人。父曰綰。戶曹正郞。祖曰效元。領議政。公以萬曆二年二月十一日 生。年二十二。以門子。參會盟。授重林道察訪。後轉靑丹。陞通禮院引儀兼漢城府參軍。拜陽德縣監。亡何。以親老。移監陽城。歷忠勳府都事,漢城府庶尹,中樞府經歷,司贍寺副正,宗親府典籤,內贍寺正,濟用監正。間出爲鴻山縣監,高陽,益山二郡守。仁祖丙戌。又參會盟。例陞資。拜僉知中樞府事。辛卯正月十三日卒。享年七十八。以恩例。累贈至議政府領議政,鼇原君。配貞敬夫人昌寧成氏。生員狀元恂之女。靖國功臣,昌城君希雍之玄孫。後公三年卒。壽八十二。端莊靜一。事舅姑。事君子。無違則。敎子女以義。閨門 之內。肅然可法。育一男一女。男南重。禮曹判書,慶川君。女適應敎沈東龜。判書有三男三女。男長戶曹正郞弘振。次生員一振。次成川府使必振。三女壻。牧使羅星斗,牧使徐正履,僉正鄭載岳。應敎四男。敞攸副提學,轍郡守,儆縣令。正郞男曰鼎臣。今淸風府使。生員男曰聖臣進士,柱臣領敦寧。府使男曰介臣。內外曾玄男女凡百餘人。公天資仁厚。而器度端方。篤於孝友。而尤謹追遠。齊沐之禮。至老不衰。常痛二兄一姪相繼早沒。撫視從孫。無異己子。見有微過。輒加警責。不少假。從孫參判始振,正字益振兄弟。常俯首恭 聽。若無自容焉。當光海西宮閉時。公傷痛謂家人曰三綱絶矣。何以仕爲。卽棄常祿。退處田里。且十年。丙子亂後。又謂家人曰。吾以病老。寇至而不得從上。今亂已而受官。義不安。自是。雖有除命。輒辭。杜門屛跡。閑居十有六年。公及成夫人旣並享高年。而判書公又早顯致養。每節序良辰。軒駟溢巷。子孫環擁。各擧觴上壽以爲樂。人皆曰。福祿之盛。當世罕比。公始葬高陽先兆。夫人始葬牛峰新阡。後卜吉于楊州治東南三里東亭里負辛之原。以庚子二月二十七日。移公及夫人墓。從地家言。爲內卯外乙二向之 制。而合窆焉。公之履行終始。有壺谷南公龍翼所撰述。前已埋誌。而今又略叙公先系官歷後孫。並納于壙南。祈有徵於淵實之時云。戊子十月十二日。埋于公墓壙南一尺。○埋誌後五年至壬辰三月。刪節此文。刻于墓表。
『壽谷集』卷之四
김남중(金南重)
김남중(1596∼1663)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백진(白珍), 호는 야당(野塘)이다. 할아버지는 좌의정 김명원(金命元)이며,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김수렴(金守廉)이다.
김남중의 첫 번째 부인 여흥민씨는 도정(都正) 민유경(閔有慶)의 딸로 2녀를 낳았다. 두 번째 부인은 전주이씨로 여원정(礪原正) 이세헌(李世憲)의 딸이며, 성종의 5세손이다.
1618년(광해군 10)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가주서(假注書)가 되고 1623년(인조 1) 검열이 되었다.
이듬해 회답사(回答使) 정립(鄭岦)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와 1625년(인조 3) 병조좌랑이 되었으나, 변경의 오랑캐 침입을 잘못 보고하여 파직당했다. 뒤에 곧 기용되어 수찬·교리·지평·장령을 거쳐 1628년(인조 6) 부수찬이 되었는데, 대수롭지 않은 병을 이유로 휴가를 청하였다가 연소한 관료가 나태하다 하여 두번째 파직되었다. 다시 장령으로 기용되어 그뒤 사간·시독관·부응교를 거쳐 1632년(인조 10) 집의가 되고 추숭도감도청(追崇都監都廳)을 겸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예조참의로서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하고, 이듬해 대사간이 되어 강화도가 함락당한 데 대한 수장(守將)의 책임을 물어 처형할 것과, 척화신(斥和臣)을 문책하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그해에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는데, 생일에 여러 읍으로부터 선물을 받았으며 전주에 내려가 가족과 어울려 가무연락(歌舞宴樂)한 것이 문제가 되어 파직당하였다.
1641년(인조 19)에 대사간으로 기용되어 우부빈객·도승지를 거쳐 1644년(인조 22)에 다시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대사헌이 된 뒤 1649년(효종 즉위)까지 대사성·대사간·대사헌을 번갈아 지냈다.
1650년(효종 1) 이조참판이 되고 경천군(慶川君)에 봉해졌으며, 대사헌을 거쳐 1656년(효종7) 동지춘추관사가 되어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58년(효종 9) 공조판서에 오른 뒤 형조판서를 지냈고, 1661년(현종 2) 다시 공조판서가 된 뒤 형조판서·예조판서·개성유수를 역임하였다.
저서로 《역대인감(歷代人鑑)》이 있다. 시호는 정효(貞孝)이다.
〈김남중 묘지명〉
禮曹判書慶川君金公墓誌銘
公諱南重。字自珍。其先慶州人。新羅敬順王之後。在高麗時。仁渭,元鼎皆貴顯。後至稛。爲開國功臣。鷄林君。諡齊肅。再世判尹從舜。又再世直提學千齡。文章節行。負名一時。進士及第。俱爲狀元。是曰高祖。曾祖大司憲諱萬鈞。實後從父持平引齡。大父左議政平難功臣慶林府院君諱命元諡忠翼。父僉知中樞贈領議政鼇原君諱守廉。母貞敬夫人昌寧成氏。生員狀元恂女。公生於宣祖二十九年丙申十一月四日。幼而岐嶷。見者言相門又出相。鼇原公持喪過瘠。公方七歲。能扶護如成人。光海十年戊午。擢第。權知承文副正字。光海寵姬有妹。知公喪耦。逼爲副室。訹以禍福。終不爲動。轉著作,博士兼說書。癸亥仁祖反正。薦爲檢閱。轉待敎,奉敎。遷典籍。移戶曹佐郞。坐事罷。敍兵曹佐郞。乙丑。又罷。旋敍兵曹,知製敎。爲弘文修撰。改禮曹佐郞。秋拜正言。移副校理。冬。改禮曹正郞。復還玉堂。丙寅春。拜持平。新榜及第。多考官子第。執義尹知敬欲論之。諸僚畏避。獨公與之論執。是歲。爲正言者一。爲修撰,持平者三。冬。遷掌令。丁卯春。還玉堂。爲留都從事。迎駕還京。是年。爲正言,典籍,直講,弼善,司藝者一。爲持平者再。爲掌令者三。爲修撰者五。戊辰春。復還修撰。以事罷。敍拜校理。是年。爲副修撰,副校理,弼善,司諫,司成者一。直講,掌令,校理者再。修撰者三。時數開筵。講宮極一時之選。公旣音讀朗暢。又多援引經義。諷喩時政。上聳聽。鄭桐溪蘊曰。金學士陳說文義。豈讓老師宿儒。己巳春。拜司諫。言事特褫。敍校理。歷典籍,堂樂正,副校理,直講,弼善,執義。冬。復拜司諫。劾睦性善營護逆珙。並斥同僚陰扶性善。忤旨。久於散班。庚午夏。爲開城經歷。存心字民。辛未夏。召爲鞫德。三爲司成。再爲校理,舍人,執義。一爲副應敎,司諫,應敎。兼漢學敎授。壬申。一爲兼弼善,執義,司僕正,修撰,司諫,宗簿正。再爲校理,舍人。五月。追崇禮成。以都廳進通政。拜同副承旨。轉右副。癸酉五月。使楊都督。楊驩甚。贈鐵如意。秋。爲禮曹參議。甲戌夏。移左副承旨。秋。轉右。大憲姜碩期。大諫趙廷虎。爭章陵入廟。被譴。旨下。公封還。用是坐罷。丙子夏。敍禮曹參議。冬。敵兵猝至。徒步隨駕入南漢。丁丑春。和成。世子北行。當以宰臣從。進嘉善。公自陳二親老病。而兵亂後不聞存沒。請及未行訪求。得許。已而。朴代公。公還納資。拜大司諫。論金慶徵,李敏求,張紳等失陷江都之罪。又請收還尹煌諸人竄黜之命。又爭都監屯田。言聖人有言去兵去食民無信不立。諸屯革罷。而獨都監因舊。是失信於民。夏。賞從。復進嘉善。爲刑曹參判。秋。以副使入瀋。冬。還爲大司諫,兵曹參判。觀察京畿。喪亂之餘。公私凋殘。經紀煨燼。撫摩瘡痍。施罷得宜。民賴以蘇。追思不忘。爲之立碑。戊寅冬。乞解得請。己卯。復入銀臺。秋。爲開城留守。辛巳秋。再長諫院。間充接伴。爲兵曹參判。壬午春。爲全州府尹。冬。拜左副賓客。時世子未還。公當赴瀋。上知公親老且病而無他兄弟。改公官。癸未夏。拜都承旨。以副使使瀋。還拜左尹。甲申春。再按京畿。乙酉春。秩滿。夏。充遠接使。拜大司憲。會求言。公疏言求言將欲用言。言不用。何事於求。趙錫胤藥石之言。一無所施。臣雖欲極論時政。不出錫胤所陳。又言近來言路閉塞。必擇臺諫。容受其言。綱紀肅矣。傾軋成風。必擇大臣忠正。人所信服倚任。禮讓行矣。世子備嘗艱難。閱理久熟。無待輔導。然氣習易變。必選端方之士。朝夕啓迪。無使昵狎庸妄。奇衰雜進。涵養有方矣。又言李景曾曾爲冡宰參卜相。因微犯決杖。非盛朝美事。用此忤旨。久散地。丙戌。爲戶參,大成者一。爲大諫者再。大憲者四。又兼義禁府,春秋館事。時漢人從王子來。路辱近侍。無敢言者。公面論罪如法。丁亥。爲大司憲,刑曹參判,大司諫,大司成者皆一。兼備局有司。戊子。復爲大司憲。麟坪大君占地東郊。禁絶樵採。爲民所苦。公入侍。力言其橫。爲之少戢。又劾閔馨男判銓。不厭衆望。諫官姜柏年擊公等。於是副提學李基祚等。論諫官眩亂是非。上以爲相軋。姜,李俱補遠邑。馨男亦褫。改大司成,都承旨,刑曹參判。兼賑恤及摠管。己丑。爲都憲。改知申。五月。仁祖昇遐。公諳練故典。出納惟允。秋。復長憲。同僚欲並論士夫諂事自點及遊元斗杓門者。公以元異於自點。論其所親爲過當避。褫爲兵曹參判,同知經筵。山陵畢。用例進嘉義。爲吏曹參判。時。兪棨以議諡忤旨而見注銓郞。上怒。故責銓曹。公抗辭褫免。復爲兵曹參判。坐罷。辛卯春。丁外憂。年當不毀。持服盡禮。癸巳春。免制。封慶川君。拜大司憲。有投比爲通官者。其親屬以陰事潛通。人不敢發。公執欲致法。會公去而竟不死。夏。復長憲。上勉以振肅頹綱。以衰病乞免。不許。公益自感勵。劾重臣縱奴犯法。又論謝恩書狀李光載不糾非法。副使兪㯙對不以實。皆不從。時多傳麟坪自燕携僭制衣以歸。公欲論之。上因對開釋。乃止。而流言謂公意在害大君。上怒甚。欲罪公。諫官力救得已。冬。丁內憂。執禮如前喪。丙申。服除。拜戶曹參判。秋。以副使赴燕。還拜工曹參判。移大司憲。丁酉。以使勞進資憲。再爲都憲。夏。停資。爲禮曹參判。移知申。戊戌春。進長冬官。奬以老成。辭不許。再爲都憲。爭荒歲抄兵不能得。冬。移秋官爲儐使。己亥春。爲伴送拜判尹。五月。孝宗昇遐。又長冬官。兼董山陵。冬。功訖。進正憲。爲都憲。庚子春。判京兆。移都憲。時尹善道投疏。假言服制。意甚凶譎。公率諸僚。言其惑亂人心。至謂宗統不明。群志未定。計在傾陷。聽聞痛心。宜正法。夏。兼知春秋。參修孝宗實錄。七月。坐寧陵工不緻。下吏罷免奪階。冬。敍冬官。辛丑春。爲儐使。夏。一爲秋官。再爲都憲。時趙絅疏救善道。兩司論竄。公獨以絅有重名。其言雖悖。旣聖鑑痛斥。可以明好惡定是非。求言之日。不宜有重譴。由是忤時議。復長秋官。辭褫。旋拜宗伯。當祔廟。贊相大禮。進止雍容。周旋中矩。廷中屬目。鄭公太和歎曰。卽此可見前輩風流。秋又長秋官還宗伯。壬寅春。坐試事罷。秋。留守開城。自趙絅事後。不安于朝。有是拜。民喜曰我公來矣。癸卯春。示憊。三月免歸。秋。疾益甚。却藥不御曰。七十之年。強湯劑。非達人也。口占詩云。殘生七十誰能料。八座官封分已踰。便死歸眞應快活。何勞覓藥更須臾。九月六日。卒于第。壽六十八。訃聞輟朝弔賻。十一月。葬楊州。戊申三月二日。遷于全義治南素谷負子之原。前夫人驪興閔氏。都正有慶女。賢而早卒。初葬高陽。遷楊州。後夫人宗室李氏。礪原正世憲女。端莊柔嘉。事舅姑盡誠敬。先公五年卒。初葬原州。後遷祔于全義。閔夫人二女。適羅星斗,徐正履。俱牧使。李夫人三男一女。男弘振正郞。一振生員。必振府使。女適府使鄭載岳。側室四男二女。得振,有振,以振,末振。女壻朴君望,朴世。弘振一男鼎臣郡守。一女適李慶著。一振二男。聖臣進士。柱臣縣令。二女。適李鎭岳,韓配道。必振一男介臣。早夭。五女。適參奉趙道輔,李奎著,林澥,李衡坤,林世謙。公長不踰中人。而神采蔭映數人。寬厚慈仁。表裏坦平。誠孝早著。二親俱壽康。公耆艾之年。侍傍怡怡。每佳辰壽節。親客來集。軒駟溢巷。金貂照坐。華髮奉觴。盡歡極娛。一世稱艶。奉先尤誠格。親視供具。齋沐待時。至老不惰。節豐約爲祭式以遺後。質性儉素。絶去華靡。官高而家不潤。濟施貧窶。如不及。撫恤僮僕。有恩意。不喜交游。恬靖自守。門庭寂然。至雅素適意。酣暢竟夕。絶干請。李公厚源言吾典選久。口不言私者。唯金自珍一人。常曰。朝家制事。宜守經常。士夫持論。須戒新奇。趙公錫胤。宋公浚吉。皆以德量推公。少勤書至老不懈。常讀論語。晩好綱目。參以史傳。分爲十冊。目曰歷代人鑑。藏于家。公爲先友。世堂時得拜床下。公之視之不異諸子。今公之孫柱臣。屬以竁銘。分不敢辭。謹按狀敍次事行。系之以銘。銘曰。
仁祖臨御。賢能嚮用。材盡棟舟。祥皆麟鳳。公居其間。上下伯仲。高馳逸驅。並轡齊鞚。望實俱隆。觀聽皆聳。出入三朝。孤卿任重。及當考終。理達識洞。却藥屛醫。神志不動。二十八字。口內吟諷。君子之言。人多傳誦。我銘載石。庸告來衆。
『西溪集』卷之十
김일진(金一振)
김일진(1633∼1665)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자는 사옥(士玉)이다.
고조는 대사헌(大司憲) 증영의정(贈領議政)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 김만균(金萬鈞)이고, 증조는 경림부원군(慶林府院君) 충익공(忠翼公) 김명원(金命元)이며, 조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증영의정 김수렴(金守廉)이다. 부친 경천군(慶川君) 정효공(貞孝公) 김남중(金南重)과 모친 여원정(礪原正) 이세헌(李世憲)의 딸 정부인(貞夫人) 전주이씨(全州李氏) 사이에서 3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 김홍진(金弘振)과 동생 김필진(金必振)이 있다. 부인은 증 좌승지(贈左承旨) 조래양(趙來陽)의 딸 풍양조씨(豊壤趙氏)이다.
어려서부터 암기력이 탁월하고 총명하였다.
1654년(효종 5) 식년시 생원 2등 11위로 진사시에 합격한 후, 성균관에서 공부하면서 함께 공부하던 유생들의 임원이 되었는데, 규율을 엄격히 하여 성균관의 학습 분위기를 좋게 만들었다. 그러던 중 친척 형 참판(參判) 김시진(金始振)이 수차례 형벌을 받음에 따라 스스로 성균관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자, 정직한 사람이라고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을 아끼고 베풀기를 좋아하여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힘써 도와주었다. 동호(東湖)에 땅을 사서 집을 짓고 훗날을 계획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33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김성신(金聖臣)·김주신(金柱臣)이다.
묘는 경기도 고양(高陽) 대자산(大慈山)에 있다.
〈김일진 묘지명〉
先考成均生員府君墓誌銘 此文。初以碣銘作。後改作誌文用。
嗚呼。先考成均生員府君。始葬高陽先兆丙向原。及先妣孺人趙氏之喪。不肖孤慮墓道不寧。遂卜吉于墓後稍西六十步負子之阡。而虛其右。以越明年九月八日。移奉先考之墓。而先妣祔焉。實郡西五里許大慈洞之原也。後四年仲秋望。不肖孤因薦牲而省塋域。見左有鼷鼴之跡。而右則雨齧也。怛然大懼。惕念于心曰。我先君純行盛德。先妣至性懿範。匪有立言君子。莫可彰示來後。則今之顯刻幽誌。俱闕於墓壙者。顯刻幽誌。初作幽誌顯刻。墓壙。初作壙域。非緩也。有待也。而顧惟不肖孤病。且悲餘日少。因循不就。一朝溘然。則將亦終 無徵於淵實之時。豈非大可痛心哉。遂先燒甆納竁。此下。初有旣又治石樹表六字。略記世系生卒及子姓如左。而又系以銘辭。用戒于犯斯丘者。先君諱一振。字士玉。我金氏。系出慶州。自敬順遜王位。至今七百餘禩。圭組名德。代承相望。至齊肅公稛。爲開國功臣。齊肅公有孫曰判漢城府尹從舜。判尹有孫曰弘文館直提學千齡。寔先君五世祖也。是生高祖諱萬鈞。司憲府大司憲贈議政府領議政月城府院君。出嗣堂叔司憲府持平贈議政府左贊成諱引齡。是生曾祖諱命元。平難功臣,議政府左議政,慶林府院君。皇祖官僉 知中樞府事贈議政府領議政,鼇原君諱守廉。皇考官禮曹判書,襲封慶川君諱南重。妣貞夫人完山李氏。宗室礪原正諱世憲女。成宗五世孫也。先君生于皇明崇禎六年十月三日。踰冠。中甲午生員。以乙巳三月十六日卒。享年僅三十三。才志抑隕。未施于世。嗚呼慟哉。先妣豐壤望族。成均進士贈承政院左承旨諱來陽之女。議政府左議政文孝公諱翼之孫。僉知中樞府事贈議政府領議政諱瑩中之曾孫。靖社功臣議政府領議政,延陽府院君李忠翼公時白外孫也。生于癸酉二月十六日。後先君 二十年甲子正月十八日卒。育二男二女。男長聖臣。辛酉進士。有文行。早沒。葬在先君墓下十八步。有二男一女。男曰象衍,趾衍。次柱臣。有二女。女長適士人李鎭岳。生一男一女。次適士人韓配道。早夭無后。其銘曰。
嗚呼哀哉。柱臣幼而失怙。不省父顔。則已含人代之至慟矣。長而無祿。將母不卒。則重抱終身之至恨矣。哀我塡壑之日。苟有未散之魂。幾何不長泣彷徨於宿草荒原。而呵禁芻牧。作靈恠於千秋也。陵谷易位之前。動斯丘而得斯甎者。自陵谷至斯甎。初作烝嘗已替之後。登斯丘而覽斯 文。如其有父子之恩。而知幽明之故。尙勿毁而反一抔也。反一抔。初作却一步。嗚呼痛矣。
誌凡四本。二本。分埋于兩墓間塋南塋北各二尺許。卽柱臣所自撰錄。又二本。分埋于先考壙南及先妣壙南一尺間。皆金公昌協所撰。而一本石刻。埋于先考壙前。餘皆甆本云。
『壽谷集』卷之五
김필진(金必振)
김필진(1635∼1691)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대옥(大玉), 호는 평옹(萍翁)·풍애(楓崖)·야당(野塘)이다.
아버지는 예조판서 남중(南重)이고,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 세헌(世憲)의 딸이다.
1657년(효종 8) 진사가 된 뒤, 여러 차례 대과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고, 1669년(현종 10) 음사(蔭仕)로 빙고별검(氷庫別檢)가 되었고, 그뒤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였다.
특히, 원성현감(原城縣監)으로 있을 때 둑이 무너진 것을 개축하여 공을 세웠다.
1691년에 평시서령(平市署令)이 되었으나 병으로 퇴직하였다. 만사에 박식하였고 글씨를 잘 썼다.
저서로는 《풍애유고》·《인감(人鑑)》이 있다.
〈김필진 묘지문〉
叔父通訓大夫行成川都護府使金公墓誌
公諱必振。字大玉。金氏。系出慶州。高祖諱萬鈞。大司憲。曾祖諱命元。左議政,忠翼公。祖諱守廉。僉知中樞府事贈領議政,鼇原君。考諱南重。禮曹判書,貞孝公。妣貞夫人李氏。宗室礪原正世憲女。公生于崇禎乙亥二月十五日。幼而岐嶷沉凝。旣長。篤學强記。弱冠。三魁泮試。時金息庵錫胄詞章。鳴一世。然等第數出公下。丁酉。中進士一等。己酉。始補氷庫別檢。後四年。陞通禮院引儀。轉戶曹佐郞。自是歷職。內則爲義 禁府都事,軍資監主簿,宗廟署令,工曹正郞,司僕寺掌樂院僉正,平巿署令。外則爲禮安,茂朱,和順,原城四縣。咸興,成川,二府。通川,寧越,榮川,平昌四郡。禮,成,通,寧,榮,平六邑。皆辭不赴。在太僕與樂院。受賜馬賜臯比之命。雖係賞勞。皆異數也。公屢擧竟不中。逮于己巳。時事大異。則歎曰已幸吾廢擧休官。連有除命。則又曰病未可從仕。皆力辭乃已。辛未十二月廿三日卒。明年二月。葬于楊州牧東南三里東亭里鼇原君兆右向巽之原。公娶安東權氏。禮曹參判堣之女。達城尉徐公景霌外孫也。凡擧五男 七女。男長介臣早沒。時未樹後。次男四人女二人。皆殤而不育。女長適縣監趙道輔。生三男一女。次適李奎著。次適林澥。生一男三女。次適李衡坤。生二男二女。次適生員林世謙早沒。公天資醇厚。志氣凝遠。自爲秀才。儼然有大人器度。世期以公輔。平生葆靜任眞。閉戶看書。爲文渾浩。尤長騈儷。文塲先輩如南壺谷,金文谷諸公。見公諸作。每稱大手。而嗟惜其沉屈。藥泉南相國九萬。嘗與公同治擧業。稱賞甚至。公嘗自號楓崖。所著有楓崖亂藁及人鑑三十卷。藏于家。公之履行終始。具著于西溪朴公世堂所撰墓碣。今 略記先系官歷以誌幽堂焉。戊子十月十二日。埋于壙南一尺。
『壽谷集』卷之五
〈김필진 묘지명〉
成川府使金君墓誌銘
府君諱必振。字大玉。姓金氏。金氏籍慶州。出自新羅敬順王。終高麗五百年。珪組代承。至齊肅公稇。事太祖爲開國功臣。有孫從舜。判漢城府尹。又再世爲弘文館直提學千齡。生大司憲萬鈞。於府君爲高祖。曽大父。平難功臣左議政忠翼公諱命元。大父。僉知中樞府事諱守廉。父禮曹判書慶川君諱南重。母貞夫人李氏。宗室礪原正世憲之女。府君生於仁祖十三年乙亥二月卜五日。幼沈凝。長而勤學強記。弱冠。首泮宮之選者三。息庵金公。詞章擅一世。猶出府君下。孝宗八年。進士。息庵爲狀元。府君卽屈居後列。時蔡湖淵主文。得府君卷。深加奬賞擬擧首。爲諸議所奪。後屢試。卒迍遭。顯宗十年。始補氷庫別檢。又四年。轉通禮院引儀。遷戶曹佐郞。其冬。除禮安縣監。哭長子不赴官。明年。敍茂朱縣監。未久。縣陞爲府。府君資淺改。今上元年夏。復除和順縣監。數月。又坐事罷。己未。敍義禁府都事。不就。庚申夏。除軍資監主簿。遷宗廟令。出爲咸興判官。居二年。以病免歸。明年。爲工曹正郞。尋除通川郡守。辭不行。甲子正月。拜司僕寺僉正。三月。除成川府使。府君素多病。意不樂遠宦。會上將謁先陵。太僕遂謂僉正掌乘不當易。府君以故得留。明年。除寧越郡守。亦不赴。秋。除掌樂僉正。時上壽東朝。備儀物隷伶樂。府君受事。齊整樂章之缺誤。一洗舊陋。禮成。賜虎皮。丙寅秋。拜原城縣監。府君前屢辭外。不敢安。勉就官。丁卯夏。大雨三日。縣治近水。舊有防以避汎溢。至是。水穿防走。民居一朝而流下百餘家。府君急懸賞購善泅者拯之。故水雖盛而死者亦少。水去防壞。議改築。吏民憚勞。皆謂今歲之水。不常有。無事於改築。府君喩之曰。今不早治。後必爲患。復如今日。遂調戶丁及僧徒日二千人。曳石凡七日而隄成。有老人携一丈夫。立堤下。使負手而交其指。又使一丈夫。躡掌踏肩而立。防高可齊眉。民始大讙曰。防比初更高。後雖有大水。可安寢而無憂也。是歲大饑。民仰哺於官者萬餘人。府君牒使府請於朝。得穀二千石。錢十四萬。分賑之。此萬餘人。皆獲全活。縣人李仁。爲人告不孝。配遠地。父尙翼數走官訟子冤。官以仁罪首五刑。率不爲理。至是。當更覈同里之證仁不孝者幾二十人。府君曰。편001彼多朝士及仁宗黨。宜仁之久被抑也。乃閱實論報。且曰。昔仇香爲蒲亭長。民告子不孝。香爲陳人倫。夫母告不孝而不卽致法者。古人懲厲之道。豈眞不嚴。蓋其平恕。先於法律。敎誨急於敲扑。令人父子之恩。不欲遽壞。飭倫敦俗之意。自在其中也。觀察使讀狀。歎曰。此眞有古循吏風。聞於朝。仁卒獲宥。其仁恕爲政。下無枉屈。多類此。在原三年而歸。自是謝病閑居。唯哦詩種花以自遣。府君爲官。不肯爲皦厲。不喜更張。其去也。公藏常牣而家無所潤。後政或煩而怨興於下。民始追思而人服其淸。府君以偉器儁才。浮沈下位。每當遷除。悶悶如有羞。前後爲外吏。四縣四郡二府。辭不行者六。成川盛麗。雄西關。柳判書尙運曰。惜君辭百年不再來之官。然旣困躓一第。未展蘊抱。有時慨然。至己巳。時事大異。乃歎曰。吾幸矣。益無意於世。及秉政者欲收世家雅望。連除榮川,平昌二郡。私語子弟。吾今袖衰髮白。安能復戴帽碌碌爲妻孥耶。皆以病辭。辛未秋。復授平市令。已三告矣。時議謂不仕者爲怨訕。府君曰。定本世祿。不可受此名。遽出一月。復引疾免。其年夏。有白虹數丈見于庭。至冬十二月二十三日。終于正寢。壬申二月十六日。葬于楊州治南東亭里負乾之原。權淑人。望安東禮曹參判堣之女。凡擧十二子。男介臣。有異質。早亡。生子亦繼沒。女五人。壻趙道輔,李奎著,林澥,李衡坤,林世謙。趙道輔妻。生三男一女。林澥妻。生二女四男。二女俱不育。府君醇厚而寬慈。任眞而敦素。然沈深有度。細行不遺。其於思慮。必周以盡。故擧事無失。不輕爲然諾。故與人寡悔。常自號萍翁。所居有楓林斷崖。晩號楓崖。閉戶看書。未嘗去手。爲文渾浩。操筆沛然。尤長騈儷。或至累千言而思不詘。諸公咸服。書亦遒逸。所著有楓崖亂藁及人鑑三十卷藏于家。府君兄子柱臣早孤。府君鞠養。訓誨之不怠。柱臣治府君喪。旣葬而以狀來曰。柳子厚爲殿中君墓版云。小子少孤。移其孝於叔父。天將窮我而奪其志。又曰。輟哭記事。故哀不能文。今柱臣忍誦斯語。仰籲於執事。幸愍其情哀其爲。無靳一言。以賁幽阡而垂無窮。則柱臣庶報萬一於冥冥。世堂辭不獲。謹受而敍次。爲銘曰。
才不試。從于吏。吏非樂。勉而已。攻偃蹇。寡所累。志之屈。昔同悲。我銘斯。嘅以嘻。嗟後人。其傷之。
『西溪集』卷之十
김주신(金柱臣)
김주신(1661∼1721)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하경(廈卿), 호는 수곡(壽谷)·세심재(洗心齋)이다.
할아버지는 예조판서 김남중(金南重), 아버지는 생원 김일진(金一振)이다. 숙종 계비 인원왕후의 아버지이다. 박세당(朴世堂)의 문인으로, 1686년(숙종 12)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이듬해 장원서별검(掌苑署別檢), 1699년 귀후서별제(歸厚署別提)에 이어 사헌부감찰·호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700년(숙종 26) 순안현령(順安縣令)으로서 명관으로 이름이 높았다.
1702년(숙종 28) 그의 딸이 숙종의 계비(繼妃: 仁元王后)가 되자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이 되고, 이어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로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으로서 상의원(尙衣院)·장악원(掌樂院)의 제조(提調) 및 호위대장(扈衛大將)을 겸임했다.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굳었으며, 문장은 깊고 무게가 있었다.
당대의 문사 최석정(崔錫鼎)·김창협(金昌協)·서종태(徐宗泰) 등과 교유하였다.
저서로는 《거가기문 居家紀問》·《수사차록 隨事箚錄》·《산언 散言》·《수곡집(壽谷集)》 등이 있다.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졸기〉
○慶恩府院君金柱臣卒。 壽六十一, 諡孝簡。 柱臣, 肅廟繼妃父也。 稟姿恬靜, 儀度端雅, 自少喜文辭, 士友推許之。 及爲國舅, 益存謹愼之心, 平居儉約, 無異寒素。 當官處事, 務加節損, 內行又篤, 至事叔母如事母, 率育兄子婦, 營屋而廩之。 未嘗參涉於朝議, 亦不爲干澤之事, 時論莫不稱之。 然平日親舊, 遠嫌而絶跡, 金昌集諉以族誼, 往來無常, 間爲其所詿誤。 末年見時勢漸至難言之域, 力不能挽, 憂憤不知所出, 日飮醇酎, 多近婦人, 以至於促壽云。
『景宗實錄』 4卷, 1年(1721) 7月 24日(癸丑)
○癸丑/領敦寧府事金柱臣卒。 柱臣字厦卿, 仁元王妃父也。 肅宗二十二年, 擧生員爲順安縣令, 仁元王妃, 正位中宮, 柱臣進領敦寧府事, 封慶恩府院君。 持身謹密, 至誠爲國。 上卽位, 宦官用事, 領議政金昌集, 嘗與柱臣言: “王室朝夕將亡。” 因流涕, 柱臣亦泣。 昌集曰: “先王介子, 延礽君, 仁孝有行。 公如白于王大妃, 立爲儲嗣, 宦官可誅, 而宗國亦可安矣。” 柱臣曰: “敢不盡力?” 已而, 柱臣卒, 年六十一。 上發哀, 進素膳, 諡曰孝簡。 柱臣旣卒之二十六日, 王大妃立延礽君, 爲世弟。 嗚呼! 宗社之得至今日, 基億萬斯年之業者, 皆柱臣之力也。
『景宗修正實錄』 2卷, 1年(1721) 7月 24日(癸丑)
인원왕후(1687~1757)는 1686년(숙종 13) 9월 29일 축시(丑時, 새벽 1시~3시)에 한양 순화방(順化坊)에 있는 사제(私第)의 양정재(養正齋)에서 태어났다. 인원왕후가 태어난 집은 외고조부인 조희일(趙希逸)의 옛집이다.
인원왕후가 태어났을 당시 할아버지 김일진은 33세로 요절하였고, 할머니 풍양조씨는 인원왕후가 태어나기 몇 년 전에 돌아가시고 안계셨다. 아버지 김만기는 작은아버지인 김필진을 아버지처럼 섬기며 가까이 지냈고, 작은어머니인 김필진의 부인 안동권씨가 친할머니처럼 인원왕후를 사랑하며 돌봐주었다. 작은할머니 안동권씨는 어렸을 적 인원왕후를 보고 ‘걸음걸이가 얌전하고 행동이 단정하니 범상치 않다.’라고 말하였는데, 어릴 때부터 몸가짐이 특별한 아이였다.
15세인 1701년(숙종 27) 8월 14일 인현왕후가 병으로 승하하고, 인현왕후의 뒤를 이어 왕실 내명부를 주관할 왕비를 새로 간택하게 되었다. 숙종에게는 세 번째 부인을 맞이하는 가례였다. 당시 왕실에 어른이 없어서 1702년(숙종 28) 9월 3일 숙종이 직접 간택을 하였다. 숙종은 인원왕후를 왕비로 맞이할 때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 조씨의 가례에 의거하여 가례를 치르도록 하였다. 9월 6일에 아버지 김주신은 영돈녕부사 경은부원군에, 어머니 임천조씨는 가림부부인으로 봉해졌다. 다음달 10월 3일 왕비로 책봉하는 책비례를 행하였다. 10월 13일 어의동 별궁에서 친영례를 거행하였고, 대궐에서 동뢰연을 마지막으로 가례를 마쳤다. 친영례를 행하는 전날에 지속적으로 내리던 비가 더욱 심하게 내리다가 새벽녘에 비가 크치고, 친영례를 행할 때는 날씨가 청명하고 따뜻하여 백성들이 기뻐하며 축하하였다고 한다. 이 때 숙종은 42세였고, 인원왕후는 16세였다.
인원왕후가 숙종의 세 번째 비로 간택되어 16세의 나이로 입궁하였을 당시 왕실의 분위기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인원왕후가 간택되기 전인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가 병이 깊어져 젊은 나이에 갑자기 승하하였고, 이로 인하여 희빈장씨가 사사되었다. 희빈장씨 소생 경종이 왕세자의 자리에 있었고, 숙빈최씨 소생 연잉군(후일의 영조)과 명빈박씨 소생 연령군이 궁중에서 함께 생활하였다.
젊은 시절 인원왕후는 각종 병에 시달렸다. 17세에는 종기로 고생하였고, 25세에는 마마를 앓았으며, 32세에는 홍진(紅疹)으로 의약청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34세인 1720년(숙종 46) 6월 8일 숙종이 60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6월 13일 경종이 즉위하면서, 인원왕후는 왕대비가 되었다. 그리고 다음해 7월 24일 아버지 김주신이 향년 61세로 졸하였다. 인원왕후는 숙종의 유교를 따라 경종이 병약하여 후사가 없으니 이복동생 연잉군을 왕세제로 세우도록 하였다. 숙종이 죽은 후 2개월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그 후 노론과 소론이 연잉군의 세제책봉을 둘러싸고 정쟁을 벌임으로써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났다. 그 당시 환관 박상검이 궁녀들과 함께 왕세제를 죽이려 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인원왕후가 연잉군을 적극적으로 보호하였다. 38세인 1724년(경종 4)에 경종이 승하하고, 왕세제인 영조가 즉위하면서 인원왕후는 대왕대비가 되었다. 영조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왕실어른이었던 인원왕후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은 바가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영조는 왕위에 오른 이후 인원왕후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존호를 올리고 때때로 진연을 열어 인원왕후를 즐겁게 하였다. 특히 9월 29일 인원왕후의 탄일에 하례를 행하는 것이 연례행사로 자리잡게 되었다. 인원왕후는 그 이전 왕비들이 장수하지 못하고 40세 이전에 승하한 것과 비교할 때 비교적 건강하게 장수의 복을 누렸다.
1757년(영조 33) 3월 26일 창덕궁 경복전(景福殿) 서쪽에 위치한 영모당(永慕堂)에서 71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인원왕후는 자신의 상례에 사용될 각종 물건들을 절약하고, 검소하게 하도록 유교하였을 뿐만 아니라 백금(白金) 1천 5백냥과 물품들을 하사하여 국휼에 쓰도록 하였다.
시호를 ‘인원(仁元)’, 전호를 ‘효소(孝昭)라 하였다. 능은 숙종이 묻힌 명릉의 오른쪽, 능호를 ’명릉‘이라 하였다. 1759년(영조 35) 5월 6일 종묘에 부묘하였다.
〈인원왕후 어제행록〉
○上親製大行大王大妃行錄。 以議號迫近, 夜召承旨, 飮泣呼寫, 氣憊翌日始畢, 敎曰: “精神未耗之前, 欲揄揚慈德之萬一也。” 其文曰:
惟我大行慈聖, 卽我聖考肅宗大王之繼妃也, 姓金氏, 本慶州, 始祖閼智, 追尊世祖。 二十七代孫傅, 高麗封敬順王。 其後智允贈忠勤亮節贊化功臣知(文化)〔門下〕府事判都評議事。 子稛入我朝, 開國功臣左贊成鷄林君, 諡齊肅。 孫從舜, 被選淸白, 諡恭胡, 歷事世宗、文宗、端宗、世祖、睿宗、成宗。 六代祖萬勻, 文科壯元, 都憲, 贈勳領議政月城府院君, 生父千齡文科壯元, 官至直提學。 五代祖命元, 以宣廟朝名勳左議政慶林府院君, 諡忠翼。 高祖守廉, 贈領議政鰲原君。 曾祖南重, 禮曹判書慶川君, 贈左贊成, 諡貞孝。 祖一振, 贈領議政, 考慶恩府院君柱臣, 贈領議政, 諡孝簡。 妣嘉林府夫人趙氏。 始祖天赫, 仕高麗, 爲嘉林伯, 九代祖連城, 始入我朝, 知洪州事。 高祖瑗司馬壯元, 文科承旨, 曾祖希逸, 司馬壯元, 文科重試, 官至參判。 祖錫馨, 司馬壯元, 贈參判, 考景昌, 小子嗣服三十一年, 遵昔年故事, 特贈左贊成。 丁卯九月二十九日丑時, 我慈聖誕降于順化坊私第之養正齋, 卽希逸之舊第也。 壬午冊封王妃, 仍行嘉禮。 聖后幼時, 從祖母權氏見而異之曰, ‘步履安詳, 擧止端正, 必也非常’ 云, 可謂鑑識之明矣。 我聖母, 性本端莊貞一, 沈默寡言, 周《南之》化, 洋溢宮壼, 濯龍之戒, 逈出尋常, 本家子孫, 雖微官小職, 輒稱過焉。 七年侍湯, 一心靡懈, 五朔殯殿, 雖隆寒盛暑, 未嘗或離。 三年祭奠, 必誠必敬, 以此該司所進祭物, 莫敢不致恪。 深體昔年聖德, 愛民之恩, 恤民之澤, 浹于肌髓, 慈愛之仁, 邁於漢之明德, 若小子淺孝, 亦蒙慈渥。 雖在靜攝之中, 猶眷眷不已, 嗚呼! 慈恩河海莫量。 上冊揚徽, 稱觴奉歡, 臣子當然之事, 而深自謙抑, 絶不受焉, 雖或勉從, 而幾次進號、幾番進宴, 俱不躬臨。 顧復之恩, 至衰彌篤, 一衣一食, 莫非慈恩攸曁。 而雖今番沈綿之中, 其於粥飮, 爲小子必也强進而俯勸, 自二十五日以後, 不復承聞, 此小子號泣哀慕, 寧欲溘然者也。 且躬自儉約, 以今番自內書留者觀之, 可以仰認矣。 凡於祭奠, 皆定器數, 古之所有, 今多減焉。 內帑銀子、御庫疋緞, 遺命下都監, 陵殿所用銀器, 以庚子進用者命用, 今日襲斂諸具、殯殿物件, 雖帷帳之屬、大轝之飾, 俱皆自內備置, 慕昔年之慈心、恤經費之懿德, 卽往牒未聞, 昔年敬天恤民之盛意, 尙今追慕。 一風一雨, 無一放過, 若値小子行禮陵廟之時, 則或開閤觀象, 或步楹仰察, 其若日朗風淸, 則對小子而先諭心喜之意, 其或久霖久旱, 一陰一晴, 輒慰小子。 噫! 述編旣諭, 此正知我心者, 莫如父母也。 嗚呼! 此後小子, 雖欲復承玉音, 焉可得也? 呼寫及此, 不覺淚隨聲下。 噫! 黨論卽亡國之根柢, 而深軫此弊, 語或及此, 必也深慨戚屬之相戒無黨, 非徒國舅家訓, 是亦慈化攸曁。 及夫《昭鑑》已成之後, 慈心欣豫下敎曰, ‘因此而若無黨, 邦國幸矣。’ 噫! 考諸往牒, 雖賢君猶以祛黨爲難。 至於后妃, 在宋宣仁, 亦未聞者, 猗歟盛哉! 噫! 小子之四紀守此心, 猶恐或懈者, 一則仰體聖考之心, 一則上慰慈聖之意也。 昔年祛黨, 出於至誠。 慈聖勤勤眷眷, 又若是卓越前牒, 而小子不孝不肖, 莫能體聖意慰慈心, 闡義之後, 舊習猶存, 此負昔年負慈聖也。 思之及此, 寧欲無語矣。 噫! 我慈聖母臨五紀, 慈化普洽, 實算靈長, 壽至望八, 愛日之誠, 罔陵之祝, 交切於中。 頃日違豫, 幸賴神明之默佑, 遄臻回春, 因此而彌切, 如松如栢之頌, 豈意衰憊之症, 挾表氣而眞元日下, 醫藥罔效, 乃於丁丑三月二十六日巳時, 昇遐于昌德宮景福殿西永慕堂? 此蓋小子誠孝淺薄之致, 叫天號泣天不應, 叩地欲隕, 地亦不應, 悠悠彼蒼! 此何人斯? 此正小子終身永慕者也。 噫! 是月何月? 頃於毓祥宮忌日, 慈聖念昔飮涕, 勸小子而往焉, 纔一望仙馭上賓, 雖欲攀也, 龍髯莫逮, 雖欲養也, 長樂閴寂, 遙望暮雲, 涕淚霑臆。 小子自編髮時, 奉我慈聖, 慈聖享年望八, 小子年亦望七。 此誠往牒所稀, 心竊慶幸, 而近者氣益衰耄, 尤切懍惕。 何意戊戌、庚子、甲辰、庚戌之衰麻與杖, 復衣復杖於六十四歲乎? 噫! 彼內殿不覩今日, 而吁嗟不肖, 白首被髮, 慈音漠然。 噫! 昨年毓祥宮冬享祭文中, 我慈聖一衣一食眷戀之句, 專由慰解之意, 噫! 我慈親今侍慈聖, 必也欣幸, 而眷小子之心, 其將一倍, 此正小子所以尤爲隕心者也。 噫! 以慈聖慈愛之心, 於皇兄與小子, 無少間焉, 念三宗之血脈, 悶皇兄之無嗣, 特命建儲, 往牒無聞, 因此而皇兄有子, 小子有依。 豈意有戊申、乙亥乎? 此非徒小子之直欲溘然, 實國人之所共憤者, 而慈聖聞此, 笑而答之, 無異平日。 此小子所以欽歎者也, 大哉至哉! 禮陟越七日, 議徽號曰定懿章穆, 六月十三日上諡曰仁元, 七月十二日奉葬于明陵右罔辛向原, 春秋七十一歲。 祔葬, 卽昔年之遺敎, 慈聖之至願也, 而適因舊標坐向之有忌, 幸卜此罔。 昔之隔遠者, 今爲密邇。 丁閣仍舊, 三榻儼然, 神理人情, 俱爲洽然, 此豈非陟降之眷佑, 慈誠之攸曁耶? 從今以後, 小子有欣幸歸拜之顔, 哀慕之中, 庶慰此心矣。 下玄宮銘旌、梓宮上字、表石前後面, 皆躬自敬寫, 少伸哀慕之懷。 今者行錄, 只擧實事, 而猶不能悉, 何敢以繁文剩語, 負慈聖日撝謙之德意乎? 令都監以此文仍作誌文, 一片微誠, 盡載于此, 呼寫以畢, 血淚被面。 我聖考三十九年癸巳受尊號曰惠順, 皇兄二年壬寅又上尊號曰慈敬, 小子嗣服二年丙午又上尊號曰獻烈, 十六年庚申又上尊號曰光宣, 同年又上尊號曰顯翼, 二十三年丁卯又上尊號曰康聖, 二十七年辛未又上尊號曰貞德, 二十八年壬申又上尊號曰壽昌, 二十九年癸酉又上尊號曰永福, 三十二年丙子又上尊號曰隆化。 嗚呼! 揄揚慈德, 止於此耶? 小子有二男, 長孝章世子, 初封敬義君, 嗣服元年, 冊封, 娶豐陵府院君趙文命女, 卽孝純賢嬪也。 次初封元子, 丙辰冊封世子, 娶判書洪鳳漢女。 有十二翁主, 第二和順翁主下嫁月城尉金漢藎, 卽議政奉朝賀興慶子。 第三和平翁主下嫁錦城尉朴明源, 卽參判贈議政師正子, 繼子相喆文科庭試, 娶縣令金簡行女。 第八和協翁主下嫁永城尉申光綏, 卽右議政晩子, 有繼子年幼。 第九和緩翁主下嫁日城尉鄭致達, 贈諡孝敏, 卽右議政羽良子, 有小主。 第十和柔翁主下嫁昌城尉黃仁點, 卽參判梓子。 第十一十二尙幼。 世子有四男, 長懿昭世孫, 次元孫, 皆嬪所誕也。 與二王孫俱年幼, 有二郡主而年亦幼焉。 兼附行錄, 永垂千億云爾。【自禮陟越七日以下追後足成。】
『英祖實錄』 89卷, 33年(1757) 3月 26日(丁巳)
김구연(金九衍)
김구연(1699∼1742)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자구(子九)이다.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나, 김주신의 작은아버지 김필진의 외아들인 김개신(金介臣)의 양자가 되었다. 숙종비 인원왕후의 동생이다.
양어머니는 이주(李週)의 딸 증숙부인(贈淑夫人)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다. 우의정 완남부원군 이후원의 손녀이다. 부인은 현령(縣令) 박필구(朴弼耉)의 딸 나주박씨(羅州朴氏)이다.
관직은 돈령부참봉(敦寧府參奉)·제용감한성부돈령부주부(濟用監漢城府敦寧府主簿)·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사옹원사도시첨정(司饔院司䆃寺僉正)·종묘서령(宗廟署令)·제용감판관(濟用監判官)·가평군수(加平郡守)·익위사익위(翊衛司翊衛)·군자감사복시정(軍資監司僕寺正) 등을 역임하였고, 돈령사복시주부(敦寧司僕寺主簿)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외직으로 교하(交河)현감·이천(利川)현감을 지냈다. 슬하에 아들이 없어 김세연(金世衍)의 아들 김기대(金器大)를 양자로 삼았다. 아들 김기대는 1756년(영조 32) 식년시 갑과 3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묘는 경기도 과천(果川)에 있다
김효대(金孝大)
김효대(1721∼1781)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여원(汝原)이다.
할아버지는 김주신(金柱臣), 아버지는 공조참의 김후연(金後衍)이며, 어머니는 정지익(鄭志翼)의 딸이다.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의 조카이다.
1737년(영조 13)에 음보로 돈령부참봉이 되었고, 포천군수와 고양군수를 역임한 뒤 1753년(영조 29) 낭관(郞官)으로서 숙종에게 존호를 올리는 데 참여하였다.
1756년(영조 32) 성천부사를 거쳐서 1758년(영조 34) 수원부사가 되었다.
그 뒤 승지와 공조·병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1778년(정조 2)에는 총융사(摠戎使)에 올랐다.
1780년(정조 4) 한성부판윤을 거쳐 형조판서가 되었고, 1781년(정조 5)에는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김기대(金器大)
김기대(1714∼1775)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덕용(德容)이다.
친아버지는 인원왕후의 동생인 은율현감 김세연(金世衍)이며, 사복시정(司僕寺正) 김구연(金九衍)의 양자가 되었다.
처음에는 문음(門蔭)으로 이천부사가 되었다가 1756년(영조 32)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에 승지로 특진되었다. 1762년(영조 38)에는 대사헌에 임명되었고 뒤에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다. 1764년(영조 40)에 전은군(全恩君) 돈(墩)·안표(安杓)와 함께 사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767년(영조 43)에는 함경도관찰사로서 백두산의 제사를 위한 제단 설치의 논의에 참여, 그 위치를 갑산에 정하도록 건의하여 채택되었다.
그 뒤에 예조판서를 지냈다.
〈참고문헌〉
『경주김씨족보』(1985)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30-1 서오릉에 위치한 조선 제19대 왕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 그리고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金氏)의 능이다. 사적 제198호로 지정되었다. 숙종과 인현왕후는 쌍릉이고, 인원왕후는 400보 떨어진 왼쪽 위에 있다. 서오릉 매표소를 들어서면 오른쪽 외따로 떨어져 조성된 것이 명릉이다.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가 죽은 뒤에 이곳에 묘지를 정하고 명릉이라 하였다. 그 뒤 1720년 숙종이 승하하자 이곳에 나란히 묻었으며, 1757년(영조 33)에는 인원왕후의 상을 당하여 그 우강(右岡)에 묘를 쓰게 됨으로써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과 함께 동원이강(同原異岡)을 이루게 되었다.
정자각 옆의 비각에는 두 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왼쪽의 비면에는 ‘조선국 숙종대왕 명릉 인현왕후부좌(朝鮮國肅宗大王明陵 仁顯王后祔左)’, 오른쪽의 비면에는 ‘조선국 인원왕후 부우강(朝鮮國 仁元王后 祔右岡)’이라고 새겨져있다.
능의 석물은 석인(石人)과 등신대돌짐승〔等身大石獸〕으로 크기를 실물에 가깝도록 작게 하였고, 부장명기(副葬明器 : 무덤 안에 묻는 기물)도 간소하게 하였다. 석인상의 촌스러운 듯한 미소를 머금은 입과 남바위모양으로 늘어진 무석(武石)의 투구 등은 18세기 석인양식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이 능을 보호하기 위하여 영(令) 1인과 참봉 1인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사진〉 명릉(숙종,인현왕후,인원왕후)
1. 묘의 위치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 1661-1721)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大慈洞) 산 26-1번지에 있다. 자동차로 이용하여 서울외곽 고속도로의 양주 요금소를 나와 고양시로 진입한다. 대자동으로 들어가는 2차선 도로를 달려서 마을로 들어간다. 마을에 차를 대고 걸어서 올라간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고가를 지나서 올라가면 신도비가 있고 그 곳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올라가면 새로 지은 경주김씨 재실이 있다.
재실에서 산골짜기로 올라가면 경주김씨 묘가 있다. 경주김씨 묘는 크게 두 등성이에 나뉘어져 있고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묘는 따로 꾸며져 있다. 그리고 김주신의 5대손으로 아관파천 후 내각 수반이 된 김홍집(金弘集)의 묘가 있다. 김홍집은 묘는 본래 파주(坡州)에 있던 것을 1975년도에 이 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2. 묘역의 분포
우선 대단위 묘가 있는 곳에는 김주신의 아버지 김일진(金一振)과 자신의 후손들의 묘가 대대로 조성되어 있다. 김일진(金一振)→1자 김성신(金聖臣)→자 김상연(金象衍)→자 김형대(金亨大)이고, [김일진]→2자 김주신(金柱臣)→자 김후연(金後衍)→1자 김효대(金孝大)→1자 김사목(金思穆)→손자 김정집(金鼎集)·김중집(金中集)으로 이어진다. [김효대]→2자 김사석(金思䄷), 3자 김사직(金思稙)→자 김영작(金永爵)→자 김홍집(金弘集)으로 이어진다.
편의상 묘역의 구분 없이 표시하였지만 김일진 이하의 묘라고 할 수 있다. 이 곳에 묘가 몇 십 기에 이르고 다른 부원군 묘의 규모에 비추어 크기 때문에 개략적으로 규모를 적어주는 것으로 대신하고 부원군 묘를 서술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1) 경은부원군 김주신 묘
김주신 묘는 고양시 대자동에 소재한 경주김씨가 묘역에서 따로 떼어져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김주신 묘에는 2010-2011년도 대상 가문 가운데 숙종비 명성왕후(明聖王后)의 부 김우명(金佑明) 묘와 같이 봉분 둘레에 담장을 두른 것이다. 석물도 다른 부원군 묘에 비해서 규모가 있는 편이다.
[사진1] 金柱臣 묘 석물(2)
[사진2] 金柱臣 묘 석물(3)
석물은 장명등, 망주석, 문인석, 향로석, 상석, 혼유석, 묘표가 고루 갖추어져 있다. 장명등, 망주석, 문인석은 비교적 수려한 규모로 조성되었으나, 향로석, 상석, 혼유석은 새로 갖추어진 것이다. 상석을 바쳐주는 고임돌은 이전 것으로 보이며 벽사 문양이 이채롭다.
장명등 크기는 가로 92× 세로 92×높이 78cm이다. 왼쪽 문인석 크기는 가로 73×세로 54×높이 215cm이고, 오른쪽 문인석 크기는 가로 75×세로 56×높이 215cm이다. 왼쪽 망주석 크기는 가로 37×세로 36×높이 210cm이고, 오른쪽 망주석 크기는 가로 36×세로 36×높이 210cm이다. 향로석 크기는 가로 47×세로 34×높이 59cm이다. 상석 크기는 가로 170×세로 106×높이 37cm이다. 혼유석 크기는 가로 102×세로 61×높이 19cm이다.
[사진3] 金柱臣 묘표
[사진4] 金柱臣 묘표(옆면3)
묘표의 덮개돌은 가로 117×세로 84×높이 46cm이고, 비신 크기는 가로 66×세로 33×높이 164cm이고, 기단 크기는 가로 114×세로 73×높이 67cm이다. 묘표의 음기는 숙종 후반― 영조 초반 소론의 핵심이었던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가 지은 것이고 글씨는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썼다. 건립된 시기는 1734년(영조 10)이다.
(2) 김주신(金柱臣) 신도비
경은부원군 김주신 신도비는 새로 지어진 경주김씨 재실에서 올라와서 평지에 자리잡고 있다. 신도비는 이조판서 박종훈(朴宗薰)이 짓고 행이조판서 김이교(金履喬)가 쓰고 전액은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이 썼다. 건립된 시기는 1826년(순조 26)이다. 비문에서, 박종훈은 김주신이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의 제자였고 자신이 박세당의 방손(傍孫)이라는 인연으로 글을 지었노라고 하였다. 앞서 소개하였듯이 묘 음기를 지은 인물도 소론의 핵심이었던 최규서(崔奎瑞)였고 김주신의 아버지 김일진(金一振)의 묘표를 남구만(南九萬)이 짓고 김주신의 형 김성신(金聖臣)의 묘표 또한 같은 소론 최석정(崔錫鼎)이었다.
[사진5] 慶恩府院君 金柱臣 신도비(2)
신도비의 크기는 너비 96×두께 45×높이 253cm이다. 돌 재질은 오석(烏石)이고, 사각으로 된 기단부가 있고 비신 위에 이수(螭首)를 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