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의 선화에대한 글인데 여러 전문가들의 글을 요약 정리한 입니다. 저작권 문제도 있거니와, 기술이 모자라 사진그림을 제대로 넣지는 못했습니다. 그림을 보시고 싶으신 분은 첨부한 파일을 다운로드 받으세요. 개인 공부를 위해서만 스크랩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중국 선화(禪畵)에 대하여
선종과 산수화
일반적으로 산수화 가운데에는 송대의 작품들이 최고의 걸작으로 인정되며, 이런 그림들을 통하여 선종의 정신이 중국문화 속에서 가장 아름답게 꽃핀 예를 볼 수 있다. 산수화가들은 자연을 상상의 평면으로 바꾸어야 한다. 산, 물, 나무, 호수 등은 오직 마음의 산물이며, 무상의 법칙에 지배된다. 송대의 산수화에서 산들은 마치 실재적인 존재가 아닌 채 멀리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해서 기본적인 대승불교의 공사상이 표현된다. 프랑스인 중국학자 그뤼세(Grousser)가 지적했듯이, 배 위에서 홀로 낚시하는 것을 그린 마원(馬遠)의 그림은 가장 좋은 예이다. 호수 한 가운데에 어부가 낚싯대를 손에 들고 배에 앉아 있다. 배는 가장자리가 보이지 않는 호수 안에 들어 있다. 물은 배를 따라 나 있는 몇 가닥 선으로만 표시되었다. 나머지는 텅 비었다.
선종의 교리는 사람, 동물, 나무, 꽃, 산, 강 등에도 불성이 있다는 것이다. 불타의 목소리는 새의 지저귐, 산의 침묵, 폭포의 굉음, 바람에 스치는 나무의 속삭임 속에서도 들린다. 산수화가들은 외형의 가면 뒤에 놓여 있는 사물의 영적 본성을 찾고자 기대하면서, 자연의 여러 모습에 대해 조용히 명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만일 영적인 본성의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할 경우에는 가능한 한 짧은 시간에 그려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선종의 예술가들은 그림을 그릴 때 최대의 자유와 속도 그리고 자발성으로 붓을 놀렸다. 거기에는 생각이나 망설임의 시간이 없었다. 예술가의 영감이 저절로 손을 움직였다.
선종의 예술가들은 꽃과 나무에도 불성이 드러나 있음을 보기 때문에 그림을 그릴 때에는 외형보다 영적 의미의 표현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를 이루기 위해 깊은 집중을 통해 대상과 자신을 일체화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해서 생긴 정신적 영상을 가능한 한 빨리 종이에 옮겼다. 그들이 마음에 들어하는 소재는 대나무였는데, 위로 뻗은 모습은 정직을, 빈속은 불교의 이상인 무심(無心)을 상징하였다. 그래서 10년 동안 대나무를 그린 선종의 화가는 말 그대로 대나무가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대나무를 그리기 시작할 때에는 자신이 대나무라는 것도 잊고서, 영감이 시키는 대로 붓을 놀렸다.
2. 선화(禪畵)에 관하여
(1) 선화의 개념과 종교성 문제
선화란 어떤 것인가? 보통 선승이 그린 그림이나, 선에 관한 사항이 제재인 그림을 선화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규정이 엄밀하지 않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아무리 선승이 그렸다 해도, 화면에 선(禪)이 표현되어 있지 않은 그림을 선화라 할 수는 없다. 또한 제재가 선에 관한 것이라 해서 선이 표현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선화란 그리는 사람이 선승이나 제재가 선에 관계된 사항이라는 것에 꼭 불가결한 조건이 있지 않고, 화면에 선이 표현되어 있는가가 제일의적 조건이다. 그러나 선이 화면에 표현되기 위해서는 그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선을 생생하게 체득하고 있어야만 하는 것은 불가결하다.
중국의 당말부터 송원에 걸친 시대에는 선자가 다수 배출된 시대였기에 선적인 시대가 형성되었다. 따라서 선화도 이 시대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 시대만큼 선이 주체적으로 활동적인 양상을 드러낸 시대는 없었다. 중국의 당, 송, 원나라 시대에는 선월, 석격, 양해, 목계, 옥윤, 인다라 등 다수의 선화 거장이 배출되었다. 현존 선화의 다수가 이들의 시대에 그려진 것이다.
선화는 오도적(悟道的) 목적의 자기수행의 요구에 따른 제작 동기를 갖고 있어서 넓게는 종교화의 범주에 속하지만 도상적(圖上的, iconographic) 제약을 받는 일반불화와는 성격을 달리 한다. 이는 선의 교리자체의 특수성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선은 예배적 대상이 되는 신을 갖고 있지 않으며, 집행할 의식도 없고, 교리적 종교적 장애물로부터 해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이 지향하는 특수한 성격, 즉 도를 자신의 마음속에서 찾되 그 주재자가 자신인, 관념적 지식과 일체의 사념,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절대 자유의 경지, 생사마저 걸림이 없는 절대 무념의 경지, 또는 공의 진리를 표방하는 성격으로 인해 선의 정신은 일상생활과 예술의 다양한 영역에 침투되어 있으며 특히 현대의 추상화가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선화가 교화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림의 소재가 자연이든 인물이든 작품 속에 화가의 내면적 체험에 의한 선적 깨우침의 미학이 담겨 있어야함은 물론이거니와 감상자를 미적 관조체험에 의해서 일깨울 수 있을 만한 예술적인 격조와 작품의 질도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언어와 그림은 중생의 근기에 따라 사용되는 교화의 방편일 뿐이며 추구해야 될 진리 자체가 아니라 진리의 외피에 불과하므로 그 그림 속에 구현된 선의 정신, 즉 그 내용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2) 선화의 주제와 내용
1) 보리달마: 우리가 <달마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인도승의 특징적인 커다란 눈과 눈동자의 강한 표현은 경전이나 지식에 얽매이지 않고 깨달음을 자극하고 환기시키는 수행법으로 벽관(壁觀)을 가르친 달마의 이미지를 부각시킨 것이다. 이는 다른 종교의 초조들의 상에서 볼 수 있는 신격화된 예배의 대상으로서의 이상적인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사물이나 마음의 본성을 직달하는 눈의 묘사는 후대의 선사들에 의해서 더욱 과장되고 해학적인 모습으로 변모되었다.
2) 견성성불
아래 그림은 남송시대 13세기 양해(梁楷)가 그린 육조절죽도(六祖截竹圖)이다. 최소한의 필치로 짙고 옅은 먹을 대비시키는 감필법(減筆法)을 구사하는 양해의 화풍은 선종사상과 결합해 필묵이 자유자재하여 일정한 규범에 얽매이지 않았다.
* http://blog.naver.com/rhomiaie?Redirect=Log&logNo=100128366451 에서 귀한 양해의 많은 선화를 볼 수 있다.
3) 삼매
아래 그림은 5대의 선승화가로 10세기 중엽에 활약한 석각(石恪)의 이조조심도 (二祖調心圖)이다. 무념무상에 가까운 상태, 즉 무색계정에 이르면 모든 상대적 대립을 떠나 선입견이나 편견 분별지의 영역에 갇히지 않고 정신의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된다. 선사들은 인간의 사고에 붙어 다니는 이원성을 초월하고 비사량인 절대영역에 직입하라고 가르치는데, 이러한 주관과 객관, 나와 대경(對境)이 하나가 된 입정 상태에서는 자타의 대립이 없이 무아의 지경에서 모든 것을 너그럽게 포용하게 되고 무아는 결국 대아가 된다. 그림 속 이조 대사는 어깨에 힘을 쫙 빼고, 남은 오른 팔에 고개를 편히 괴고, 함께 졸고 있는 호랑이에 온 몸을 기대어 눈을 살포시 감고 낮잠을 즐기고 있는 모습을 보자면, 그날 밤 번민과 함께 그의 왼팔을 버렸던 것이 아닌가 싶다. 혜가스님의 독한 구도의 모습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이 그림은 해학적이고, 뭔가 간질간질한 즐거움이 넘치는 따뜻한 그림이다.
4) 공
현실의 물질적 존재의 진상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여 거기에 하등 집착할 것이 없는 공의 존재임을 색즉시공이라 한다. 한편, 공의 원리 위에 그대로 현실의 존재가 진실로 긍정되는 가치를 인정하는 것을 공즉시색이라 한다. 절대적인 무 또는 우주전체를 표하는 궁극적인 공을 상징화한 것이 바로 하나의 원상(圓相)이다. 수묵으로 그린 원상은 선사들의 오도의 경지를 반영하며 상이한 형태의 원상과 기이한 게송들과 함께 수없이 다양하다. 선사들이 수행과 오도의 차원에서 즐겨 그리는 이 원상의 시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목우도(牧牛圖)>나 <심우도(尋牛圖)>에서 일진법계의 세계를 일원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래는 조선시대에 발간된 중국 곽암본 <심우도>이다. 중엽 중국 송나라 때 곽암선사(廓庵禪師)가 십우도(十牛圖)를 그렸다고 하며, 청거(淸居)선사가 처음 그렸다는 설도 있으나 확실치 않다.
(3) 선화의 양식적 특성
① 선승화가들은 선의 정신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감각적인 느낌의 채색화보다는 고도의 정신내용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수묵화를 선호했다. 선승화가들이나 선종의 영향을 받은 중국사대부들이 추구하는 것은 내심의 평정과 청정하고 담백한 세속을 떠난 초탈한 생활이었으며, 이들은 맑고, 그윽하고, 차고, 조용한 심미정취를 갖게 되었다. 수식 없이 천연 그대로인 담담하고 그윽한 한적(閑寂)의 정(情), 이것이 그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예술적 경계였다. 그들은 사람에게 시끄럽고 번잡한 티끌 세상을 연상시키는 갖가지 고운 색깔을 싫어했고, 대신 담담한 청색이나 백색을 좋아했다. 그들은 구름, 안개, 하늘 등을 여백으로 처리해 감상자의 연상 작용을 유발시키고 한적하고 허허로운 느낌을 고취시켰다.
② 둘째, 궁극적 절대인 공의 진리를 표현하기 위해 그들은 색채뿐만 아니라 형태에 있어서도 지극히 단순화하였다. 그리하여 공의 극단적인 묘사는 일원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목계의 <육시도>(六柿圖)란 그림을 보면 감이 여섯 개 그려져 있는데, 감을 편평한 원으로 묘사했으며, 흑색의 농담에 따라 짙은 것에서 옅은 것, 즉 생명이 있는 것에서 죽은 것을 암시하고 있는데, 죽은 감은 필선으로만 하얗게 상징적으로 나타내었다.
③ 돈오견성을 통한 선적 깨달음을 중시하는 선종의 정신을 잘 반영하는 수단으로 발묵법(潑墨法: 먹이 종이에 스며들면서 번져나가는 효과)과 감필법(減筆法: 필선을 최소한으로 줄여 대상의 핵심만을 활달하게 묘사하는 방법—앞서 그림의 달마도)을 발전시켰다. 설리반(Sullivan)에 의하면 13세기의 영옥간(瑩玉澗)은 선의 달인에게 있는 갑작스럽고 불합리한 깨달음의 순간을 자발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완벽한 전달수단으로 먹물을 내던지는 식의 발묵법에서 찾은 것 같다고도 했다. 또한 선기직참(禪機直參)을 그림으로 가시화하기 위해서 감필법이 요구됨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리고자 하는 인물의 세부묘사나 한 그루 한 그루 나무에 너무나 집착하는 것보다 전체적 숲을 포괄적으로 균형 있게 보는 관찰력과 종합적 판단력이 중요하다. 선화를 그릴 때 중요한 것은 사색의 집중과 그 마음의 울림에 따라 전체적으로 파악한 대상과의 교감을 통한 뒤에 자신의 의경(意境)을 즉각적으로 표현하는 일이다. 소동파가 말하는 흉중성죽(胸中成竹: 가슴 속에 각인된 대나무)이 이루어진 후에는 마치 토끼가 튀는 순간 솔개가 번개가 치듯 순식간에 덮치는 것처럼 빨리 그려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수묵직참(水墨直參)과 유사하다.
④ 마지막으로, 선화의 중요한 특성은 잘 그리고자 하는 생각마저 초월해버린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표현된 자연스러움이다. 선화는 어디까지나 종교적 수행의 부수적인 수단일 뿐이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마음을 비운 순수한 선종의 정신적 세계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직각(直覺)으로 체험하고 느껴야만 한다. 무념무욕의 상태에서 표현된 순수한 그림을 관조한 감상자의 순수함이 그림에 내재된 순수함과 맞부딪힐 때에 선화가 갖는 오도적 기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3. 명말청초의 선승화가 석도(石濤, 1642-1707)
(1) 석도의 화풍
명말청초에 활동한 석도는 팔대산인(八大山人, 1624-1703)과 더불어 중국화가 특히 선승화가들 중에서 가장 개성적이고 창의력이 걸출한 화가로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특히 일본과 구미에서 매우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는 선인들의 고법에 구애받지 않는 투철한 자아정신의 소유자로 역대화가들의 필풍을 무조건 답습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하여 참신하고도 독창적인 표현의 산수화, 묵죽, 화과화(花果畵) 등을 통하여 개성미가 넘치는 주관적인 양식을 창출했을 뿐만 아니라 시문과 서예에서도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다.
또한 그는 18장으로 된 『화어록(畵語錄)』을 남겼다. 이 『화어록』은 석도의 자연관과 회화사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지침서일 뿐 아니라 중국의 역대회화이론서들 중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책으로 상세한 주석과 함께 세계 각국에서 다양한 언어로 번역 출판되었다(한국에서는 김용옥 교수가 번역 출간했다).
석도의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소양과 천부적인 회화적 감수성이 융합되어 형성된 그의 독창적인 화풍은, 후대의 화가들, 특히 양주팔괴, 장대천 등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2) 석도의 생애
석도는 명태조 주원장의 후손이었으나, 그가 어렸을 때 명조는 망했다. 그는 부친이 남강의 당왕에 의해 복주에서 처형된 후 환관의 도움으로 광서성 전주로 피신했다. 그후 출가하여 구봉산에 은거하던 여암선사아래서 선승으로서의 본격적인 수행을 시작했다.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승려, 문인들과 교류하며 명산대천을 찾아 유람하거나 중국의 여러 도시에서 떠돌이 생활을 했다.
석도는 20대 초반부터 30대 중반까지(1660-1675) 안미성 선성의 경정산 남쪽에 위치한 광교사에 기거했으며 이때에 매청(梅淸, 1623-1697)과 함께 황산(黃山)을 올랐다고 한다. 석도는 평생 동안 수많은 <황산도>를 남겼다.
석도가 40대 초반(1680-86)에는 남격의 장천사의 일지각에서 기거했다. 이곳에서 강희황제를 배알했으며, 황제는 석도에게 강남의 경치를 그리도록 명했다고 한다. 1867년 석도는 양주로 이주했고 1689년에 양주의 평산당에서 강희황제를 다시 배알했고 그를 위해 <해안하청도>를 상납했다.
석도의 중년기를 대표하는 작품들로는 상해박물관 소장의 <세우규송도>나 일본인이 소장한 <<황산팔승화책>>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황산팔승화책>>은 8폭으로 구성된 화첩인데 석도화의 백미로서 애호가들에게 가장 각광받는 대표작이다.
석도는 말년(1693년 이후)에는 양주에 정착해 집을 짓고 정주했다. 석두가 팔대산인에게 보냈다는 편지에 의하면, 이 시절의 석도는 승복을 벗고 머리를 길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양주에 정착한 이후 석도는 화가로서의 진면목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며 그의 말년의 호방한 화풍을 대표하는 <<우노도형정산수책>>과 <황산수권> 등을 남겼다. 인터넷을 통해 구글의 검색창에 “石濤”를 넣어 이미지를 검색하면 수많은 석도의 그림과 만날 수 있다. 아래는 그 중 일부이다.
매화도
蘭亭:大圖欣賞
新華書畫_新華網
(3) 석도의 화론(畵論)
① 그의 유명한 『화어록』은 그가 얼마나 예술 창작에 있어서 독창성과 개성을 중시했으며 옛 그림을 답습함에 그쳤던 과거의 구태의연한 화풍에 대해 신랄한 비판의식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실제 여행을 통한 관찰과 사생을 중시했으며 화실에서 관념으로만 그리는 방법을 경멸했다.
② 무법이법론(無法而法論)을 전개하여 “무법의 법이 법을 이루게 된다. 대개 법이 있으면 반드시 변화가 있으며, 변화가 있은 후에는 무법이 된다”고 하였다. 즉 “작가가 처음에는 화법을 따라 배우지만, 법은 어떤 법이든지 변화가 있게 마련이니 그 변화를 터득한 이후에는 기존의 법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③ “지인무법(至人無法)이요 무법이법”이라 하여 지인, 즉 어느 분야에 통달한 사람은 남의 업적에 매달리지 말고 자신의 개성과 독창성을 발휘함이 예술 창작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하였다. 그는 “어떤 대가의 작품과 꼭 닮게 그렸다고 해봤자 그 역시 그 사람이 먹다 남은 국찌꺼기를 들이키는 것과 같으니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는 나다. 옛 사람의 수염과 눈썹이 내 얼굴에 날 수 없으며, 옛 사람의 오장육부가 내 뱃속에 들어올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④ 석도의 『화어록』 중 일획론은 그의 미학사상의 핵심으로 불가와 도가사상인 유무상생과 상호거래성에 기초하여 일획이 마침내 만 가지 형상을 만들어내는 만획의 근본임을 주장하였다. 그것은 “하나는 모든 것이요, 모든 것이 하나”라는 선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⑤ “붓이 마르면 아름답고 붓에 물기가 많으면 속되다” 했던 석도는 66세로 눈을 감을 때까지 마른 붓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무엇이 ‘나의 법’인가 끊임없이 물었던 그가 후학에게 남긴 한마디는 평범하면서도 가슴에 사무친다. “상투성에서는 심안(心眼)이 죽는다. 옛것을 모범으로 삼는 것이 필요하지만 절대로 옛것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옛것을 배워 그것을 변화시켜야 한다. 어떤 법도 세우지 마라.”
첫댓글 도안거사님, 계속 엄청난 내용들에 감히 댓글을 못![달](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_11.gif)
겠어요 흐흑. ![ㅜㅜ](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7.gif)
![!](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4.gif)
... 감사합니다 아미타불_()_
공부하고 다시 올께요
모든 내용은 몇 가지 책을 요약정리한 것입니다. 각주가 달린 것을 첨부파일로 올렸으니 참고하세요. 그림에는 아마츄어라서 정리하면서 어느 정도의 이해를 했을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구도적 열정으로 불교 전체적인 세계를 재조명하시는
열정과 불학적 선견에 공경 합장 드립니다. 아미타불 _()_
격려의 말씀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고맙습니다. 중국선화 감상 오도적 목적의 자기수행의 결과로 빚어낸 격조높은 작품들! 아미타불!_()_
불화와는 또 다른 좀더 깊이 생각하게 하고 무언가 선지가 번득이는 것이 선화인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_()_
직각(直覺)을 통한 깨달음을 자유자재하게 표현하는 선화! 불화와는 또다른 느낌! 믿음이 깊어지는 불화와 깨달음의 선화!
도안님 덕분에 좀 더 유식해 지는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_()_
불화와 선화에 대한 견해에 공감이 갑니다. 함께 공부하시죠.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옛것을 배워 그것을 변화시켜야 한다. 어떤 법도 세우지 마라"...감사히 받아 새깁니다.도안님 덕분에 날로날로 안목이 높아집니다...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_()_
석도 선사의 화론은 그야말로 백척간두 진일보의 정신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귀한 글 감사합니다, 다시 찬찬히 음미 해야 겠습니다, 고맙습니다,아미타불
대명님, 관심 가져주시어 감사합ㄴ다. 아미타불 _()_
선화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첨부파일 그림들 잘 보았습니다. .....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정심화님 참고가 되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미타불_()_
병아리의 털이 살아 숨쉬는 듯한 어느 수도 중인 스님의 수묵 그림이 다시 그려 지는 듯 합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수도 중인 스님이야말로 제대로 된 선화를 그릴 가능성이 가장 높다 하겠지요. 감사하니다. 아미타불_()_
꼼꼼하게 음미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네 거사님, 관심 가져주시어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