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36. 가벼운 것과 가여운 것 (1)
| 2004·11·06 08:05 | HIT : 1,397 | VOTE : 0 |
제 목:피를 마시는 새 36-1 관련자료:없음 [49385]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11-06 04:20 조회:51
피를 마시는 새
36. 가벼운 것과 가여운 것 - 1
단순화해서 생각해보자. 살인자와 피살자 중 누가 살아남
는가? 살인자다. 후손을 남기는 것은 생존자와 사망자 중
누구인가? 생존자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살인자의 후손이
다. 당신의 삶이 행복하다면 당신의 살인자 조상들에게 감
사해라. 당신이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태초부터 당신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시간 동안 당신의 조상들이 죽느냐 죽이
느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항상 죽이는 쪽을 선택했기 때
문이다. 단 한 명이라도 선택을 잘못했다면 당신은 태어날
수 없다.
우리는 존재 그 자체로 허다한 살육의 증거다. - 라수 규
리하.
"오래간만입니다. 지멘."
지멘은 자신을 향해 미소짓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얼룩 한 점 찾아
볼 수 없는 새하얀 옷은 그 빛깔 때문에 차가워 보였지만 실제로는
따스한 모양이다. 제이어 솔한의 모습에는 추위를 타는 기색이 없었
다.
깃털을 잔뜩 부풀린 채 앉아있던 새들이 나뭇가지를 박찰 때마다 잔
설이 아래로 후드득 떨어졌다. 눈이 떨어지며 드러나는 상록수의 푸
른빛은 검게 보일 지경이다. 하인샤 대사원으로 올라가는 오솔길. 완
만한 경사로와 낮은 계단들 뿐인 걷기 좋은 길이지만 어지러운 세상
사는 올라오지 못하는 듯 정순하다. 하지만 사람들 중엔 세상의 어느
곳에 있어도 그곳과 분리된 채 자신인 인물들이 있는데 제이어 솔한
또한 그런 인물이었다. 어떤 천부적 척력 같은 것을 타고났다고 할
까. 그에게서는 사찰의 냄새가 조금도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곳의 냄새가 나는 것도 아니다.
살인기사를 짧게 관찰한 지멘은 시선을 돌려 일주문 앞에 서있는 무
리를 바라보았다. 지멘은 그 무리를 인솔하고 있는 청년이 규리하 가
문의 일원일 거라 생각했고, 한 번 보았던 이이타 규리하가 아니므로
시카트 규리하일 것이라 생각했다. 지멘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시카트는 갑자기 나타나 지멘을 가로막은 살인기사에 놀라고 화가 나
서 아직 대응책을 결정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지멘은 그 소년이
환영의 주체 노릇을 뺏겨서 그러나 보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제이어. 네게 물어볼 것이 세 개 있다."
제이어는 씩 웃더니 손을 들어 손가락 세 개를 펴보였다.
"황제의 심장병은 어디에 있나."
제이어는 손가락을 하나 굽혔다. 거리가 멀어 지멘의 말을 듣지는
못했지만 대화가 시작된 것을 본 시카트는 잠시 상황을 관망하자고
결정한 것 같았다.
"아실의 편지는 어디에 있나."
제이어는 다시 손가락을 굽혔다. 지멘은 하나 남아있는 손가락을 내
려다보며 말했다.
"요즘은 어떤 실패를 추구하고 있나."
제이어의 손이 주먹으로 바뀌었다. 자신의 주먹을 바라보던 살인기
사는 그것을 좌우로 두어 번 장난스럽게 비틀다가 아래로 떨어뜨렸
다.
"황제의 심장은 용의 탑에 있습니다."
지멘은 가늘게 뜬 눈으로 살인기사를 보다가 어깨 너머를 슬쩍 돌아
보았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거의 없었지만 지멘은 가늘고 규칙적인
아실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배낭 속에서 잠들어 있었
다. 지멘은 다시 제이어를 돌아보았다.
"용의 탑? 그런 탑은 들어본 적이 없다."
"물론 그렇겠지요. 누군가가 신의 심장병을 깨트리거나 하면 곤란하
니까요. 그래서 용이 그 탑을 지키고 있습니다."
"하텐그라쥬의 심장탑? 지금 지상에 있는 용은 아스화리탈……"
지멘은 말을 멈추고는 두 그루의 용화가 피어났으며 하나는 황제에
게, 하나는 즈믄누리로 갔다는 사모의 말을 떠올렸다. 어쩌면 세상에
는 아스화리탈 외에 두 마리의 용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지멘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놓쳤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멘은
의심 속에서 제이어를 노려보았다. 제이어는 어슴푸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 지멘은 자신이 지나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신의 심장병? 너도 그 계획에 대해 알고 있나?"
"재미있는 계획이지요? 신수황권을 누리는 황가가 바람잡이 노릇을
하는 동안 야바위꾼 신이 사람들을 일만육천 년 동안 등쳐먹는 겁니
다. 자, 거기 가는 아저씨. 행운에 관심이 있으신가? 맞추면 열 배!
아무 것도 필요없어. 눈만 똑바로 뜨고 있으면 되니까. 이보다 쉽게
돈 버는 길은 없지."
지멘은 불쾌한 기분을 느꼈다.
"네가 암살공과 규리하공을 돕는 줄로 알았는데."
"그렇습니다. 그러라는 명령을 황제에게 받았고, 그 명령을 따르기
로 결정했으니까요."
"그게 무슨 말이지?"
"말 그대로입니다. 황제가 제게 두 사람을 도우라고 명령했고 그것
이 제 뜻과 맞기 때문에 그 명령을 따랐습니다. 당신을 하텐그라쥬로
보내는 것 같은 경우가 그렇지요. 발케네공은 황제의 전력 약화를 위
해 대장군이 황제의 곁에 없기를 바랐고, 황제 또한 후계자가 질 도
덕적 채무를 피하기 위해 대장군이 자기 곁에 없기를 바랐습니다. 그
래서 따르기로 했지요."
자기 뜻과 맞지 않았다면 무시했을 거라는 투였다. 지멘은 혼란스럽
다고 생각했다. 그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너는 황제의 부하냐?"
제이어는 몸을 돌렸다. 제이어는 일주문에 있는 시카트 일행들을 향
해 움직였고 지멘은 대답을 듣기 위해 따라 움직였다. 지멘이 걸음을
떼자 제이어는 곧 대답했다.
"부하이고 싶을 땐 그렇습니다."
"그러고 싶지 않을 때는?"
"적도 됩니다."
"황제도 네가 그렇다는 것을 아나?"
"저만큼 잘 압니다."
"그게 부하냐?"
"황제는 서약을 거부했습니다."
다가오는 지멘과 제이어를 보며 시카트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
는 자기가 보고 있는 광경을 무시하고 싶다는 듯 수행원과 잡담을 나
누기 시작했다. 시카트와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지멘은 자기도
모르게 속삭였다.
"야바위꾼이라고 했지. 그 계획에 반대하나?"
"그 계획이 여자라면 저는 청혼했을 겁니다."
제이어의 대답은 지멘을 피로하게 했다. 하지만 반문하기엔 시카트
와의 거리가 가까웠다. 걸음을 멈추고 아는 체를 해야 할 거리였다.
지멘이 걸음을 멈추자 제이어는 따라 멈췄다. 지멘의 곁에 바짝 붙
어선 채로. 그리고 제이어는 지멘과 시카트 중 누가 말하기 전에 재
빨리 말했다.
지멘은 시카트가 왜 허를 찔렸다는 표정을 짓는 것인지 알 수 없었
다. 애써 귀족다운 태도를 유지하며 지멘에게 인사하는 동안에도 시
카트는 제이어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제이어는 그 눈길을 못 본 척했
다. 의아해하던 지멘은 시카트가 순순히 휘둘리지 않겠다는 듯이 말
했을 때 비로소 정황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었다.
"제이어 솔한. 각하의 친구분과 함께 은근슬쩍 우리 곁으로 돌아오
려는 졸렬한 시도는 그만둬."
제이어는 창피해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넉살 좋게 말했다.
"들으셨습니까, 지멘? 저는 규리하가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습니다.
당신이 뭐라 말 좀 해주십시오."
시카트가 재빨리 말했다.
"상관없는 분을 끌어들이지마라. 이건 우리와 너 사이의 일이다. 죄
송합니다. 지멘. 저희들이 제대로 단속하지 못해서 이런 불쾌한 자가
나타났습니다. 이 자는 저희들에게 맡기고 아버님께 가시지요."
아직 지멘과 제이어의 관계가 불확정적이었기 때문에 시카트는 행동
으로 돌입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멘이 제이어에게 짤막한 작별 인
사 한 마디만 하면 시카트와 그 수행인들은 제이어를 붙잡아 파름산
아래까지 집어던질 것이다. 제이어는 어쩔 거냐는 투로 지멘을 느긋
하게 바라보았다.
지멘은 제이어가 자신을 동행으로 받아들일 만큼만 정보를 노출시켰
음을 깨달았다. 틀림없이 걸음 하나하나를 계산했을 것이다. 그가 던
진 질문 중 두 가지는 아직 대답을 받지 못했다.
"내가 제이어를 단속하지."
시카트는 낭패감을 필요 이상으로 드러내었다. 그 과장된 반응을 본
지멘은 제이어를 미워하는 것은 시카트가 아니라 아이저나 이이타인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그쪽이 제이어에게 신경 쓸 필요가 없도록 하겠다."
시카트는 불만스러워 했지만 책임이 지멘에게 넘어간 것을 안도하는
것을 숨기지는 못했다. 청년은 제이어를 무시하며 정중하게 지멘을
안내했다. 제이어 또한 그들을 자극하는 짓은 하지 않으려는 듯 지멘
의 소지품이나 되는 것처럼 움직였다.
그들의 모습은 곧 하인샤 대사원의 복잡한 경내 속으로 사라졌다.
볼을 찌르는 햇살을 느낀 시오크 지울비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마도 정오로 치닫는 시간이겠지만 겨울의 낮은 태양은 창턱에 턱
을 기댄 채 방안을 훔쳐보고 있다. 규리하성의 높은 곳에서는 고드름
이 녹아 내리고 있었다. 후두둑, 후둑. 눈 치우는 소리와 규리하성에
서 자신이 제일 분주하다고 믿는 자들이 오가는 소리가 쿵쿵 들려온
다. 어떤 여름이 한없이 음울하듯 어떤 겨울은 꽤나 자발머리 없다.
시오크가 바라보고 있는 겨울이 그러했다.
시오크는 눈 주위를 비비고는 다시 침대를 돌아보았다.
침대에는 지키멜 퍼스가 누워있었다.
지키멜은 불규칙한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독행왕의 몸 전체에서는
차가운 생선이나 비 맞은 땔감에서 느낄 수 있는 냉기가 흘러나왔다.
지키멜을 본 의사는 꽤나 장황한 단어와 복잡한 문장들로 자신이 아
무 것도 모른다는 뜻을 전달하는 재주를 펼쳐보였다. 혼란 때문에 의
사에게 홀려버린 시오크는 몸을 따스하게 해주고 환자를 안정시키라
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신비의 치료법 정도로 오해하고 말았다. 뭔가
속았다는 느낌을 시오크가 받은 것은 의사가 떠나고 한참 후의 일이
었다. 분노로 이를 가는 것은 지키멜에게도, 그리고 치아에도 별 도
움될 것이 없었기에 시오크는 여름이 되돌아온 것으로 착각할 만큼
난방에 힘쓰는 것으로 분풀이를 대신했다. 하지만 지키멜의 몸은 여
전히 차가웠고 그 호흡은 깃털 한 조각 날릴 수 있을까 의심스러울
만큼 미약했다.
시오크는 몸을 수그려 팔꿈치를 허벅지에 얹었다. 지키멜의 생기 없
는 얼굴은 밀랍과 지푸라기를 섞어 만들어 놓은 모조품처럼 보였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오크는 재빨리 허리쪽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옷자락을
거머쥘 뿐이었다. 초자연적인 공포에 빠질 뻔한 시오크는 가까스로
자신이 칼을 풀어두었음을 떠올렸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칼집이 이
곳저곳에 부딪치며 시끄러운 소리를 내어 지키멜의 숙면을 방해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오크는 침착을 되찾지는 못했다. 그는
자신이 그 빌어먹을 칼을 도대체 어디에 두었는지 떠올릴 수 없었다.
그 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오크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그
는 지키멜을 보호하려는 듯 두 팔을 좌우로 펼치며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시오크는 문을 열고 들어서는 파라말 아이솔과 눈을 마주치게
되었다.
파라말은 헐떡거리는 시오크를 보다가 두 손을 들었다.
"진정하시지요."
자신의 모습을 자각한 시오크는 천천히 두 팔을 내렸다. 파라말은
시오크를 안정시키기 위해 뒤로 손을 돌려 문을 확실히 닫았다. 방안
으로 들어선 것이 파라말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시오크
는 긴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파라말은 두 손을 배 아래에 깍지껴 시오크가 잘 볼 수 있게 해주었
다. 시오크는 의자를 가리키며 앉으라는 소리를 웅얼거렸다. 파라말
은 목례하고는 시오크가 가리킨 의자에 앉았다.
산공부사는 병자에 대해 의례적인 관심만 보였다. 지키멜의 상황에
변화가 있다면 당장 알려졌을 것이므로 파라말은 지키멜에게 변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시오크에게 주의했다. 파라말은 시오
크의 상태가 걱정스럽다고 생각했다.
"얼굴이 안 좋습니다. 지울비."
"저는 괜찮습니다. 어, 형님께서는 좀 어떠십니까?"
파라말은 갑자기 늙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는 피로한 목소리로 말
했다.
"형님이오? 문을 사랑하시게 된 것 같습니다."
시오크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묘한 생각들을 떨쳐내려 애써야 했
다. 파라말 또한 형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고는 말했다.
"아직 그 방에 들어갈 방도는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혼자 계십니까? 도와줄 사람들을 부탁하시지요."
시오크는 끈적끈적한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겼다.
"제가 불안해서 안되겠습니다. 차라리 혼자 있는 편이 낫습니다."
"규리하 사람들도 선뜻 후작을 폐하께 보내기는 어려울 겁니다. 후
작은 변경백 각하의 소재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일지도 모르
니까요."
"무향인들은 황제와 의견 충돌을 일으키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지키멜 퍼스가 혼수상태로 발견된 직후 규리하성으로 온 황제의 사
어는 규리하 사람들을 당황시켰다. 황제는 칭왕자 지키멜 퍼스를 즉
각 비나간으로 돌려보내라고 명령했다. 그 명령을 통해 황제가 시오
크와 지키멜의 소재를 정확히 알고 있음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사실
은 규리하인들을 불안하게 했다.
시오크는 그들이 황제의 명령을 해석할 시간을 주지 않기로 했다.
그는 즉각 지키멜의 방으로 쳐들어왔고 병간호를 자신이 책임지겠다
는 핑계 하에 다른 사람들이 지키멜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결
과적으로 시오크는 정신적 압박감과 피로에 시달리고 있었다.
두통을 호소하는 머리를 짚던 시오크는 파라말이 딱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왜 그러십니까?"
"지울비. 규리하 사람들이 우려하는 사람은 후작이 아니라 당신입니
다."
"저요?"
"당신도 폐하께 명령을 받았습니다. 유료도로당으로 돌아가 왕위를
받아야 하지요. 그리고 후작과 달리 당신은 아파서 못간다는 핑계도
댈 수 없습니다."
시오크는 당혹했다. 파라말은 지키멜을 돌아보며 말했다.
"야박한 말이지만 당신은 후작을 구할 수 없습니다. 후작이 아직까
지 이곳에 누워있는 것은 규리하인들이 그것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정말 후작을 돌려보내기로 작정했다면 당신 혼자서 그들을 막
을 수나 있겠습니까? 그들은 당신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고 후작
을 데려갈 수도 있을 겁니다."
시오크는 머리를 떨구었다. 입안에 쓴맛이 가득 느껴졌다. 파라말은
여전히 지키멜에게 시선을 둔 채 말했다.
"규리하 정부쪽에서는 대강 결정이 난 것 같습니다. 그들은 후작의
혼수 상태를 핑계로 최대한 시간을 끌어볼 작정인 것 같습니다. 후작
이 깨어나야 규리하공의 소재에 대한 단서라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요. 당신이 이렇게 지키고 있어서 그들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을 더 곤혹스럽게 하지 마십시오. 지울비."
"그들의 부탁을 받고 왔군요."
파라말은 시오크를 돌아보았다. 시오크는 자신의 몸이 하나라는 사
실에 분노하며 말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폐하께 억류되어 있을 테고 자
칫하면 유료도로당은 수습하기 힘든 혼란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여기
이렇게 있어봐야 지키멜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다는 것, 차라리
당으로 돌아가 왕위를 받는 것이 아버님과 지키멜에게 더 도움이 될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안다면 왜……"
"당연하다는 것이 의심스럽습니다."
파라말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시오크는 정신을 차리려는 듯 눈을
세게 문질렀다. 눈주위가 벌겋게 변한 채 시오크는 빠르게 말했다.
"모든 것이 계획적으로 준비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부사님. 부사님
의 형님께서는 황제 폐하께서 도로를 직접 통제하기 위해 허울뿐인
왕위를 내리는 거라고 설명하셨지요. 스스로는 자신을 지킬 수 없는
왕이라니, 대단합니다. 기막히다고 할 수 있군요. 그런데 그 시점에
서 왕이 되지 않는 왕자들의 마지막 후손이 실종되었습니다. 그렇다
면 그게 누구 소행인 것 같습니까?"
"누구 소행이란 말입니까?"
"이것은 폐하가 한 일입니다."
"뭐라고요?"
"이건 오래된 계획입니다. 충성 서약을 거부했을 때부터 황제는 대
귀족들을 쓸어버리기로 결정했던 겁니다. 충성 서약을 받으면 보호할
의무도 지지 않습니까?"
"맙소사, 지울비……"
"그겁니다. 대귀족들을 파멸시킬 생각이었던 황제는 그래서 충성 서
약을 거부한 겁니다. 규리하가 가장 먼저 공격을 받았지요. 아이저
규리하가 서약지지파의 거두라는 점, 그리고 규리하가 가진 전통 때
문에 최우선 공격대상으로 결정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다른 대귀족들
을 모두 제거할 때까지는 규리하를 남겨둘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것
이 대귀족 사냥이라는 것을 들켜서는 안되니까. 그래서 꼭두각시 변
경백을 잠시 규리하공의 보좌에 앉혀둔 겁니다."
파라말은 말하고 싶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오크는 주의를
촉구하는 눈빛으로 계속 말했다.
"이제 모든 대귀족들이 사라지거나 그 세력이 극도로 축소되었습니
다. 차기 황제와 유료도로왕을 등극시키기에 앞서 필요가 없어진 변
경백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래서 황제는 그렇게 했지요. 어쩌면 동정
심 때문에 무사장과 함께 즈믄누리로 돌려보냈을지도 모르지요."
파라말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무사장의 딱정벌레는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면 죽였나 보지요."
"지울비. 도무지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정우는 죽는 것보다 칼리도
백과 결혼하는 편이 훨씬……"
파라말은 자신도 모르게 꺼낸 말에 놀라 입을 다물었다. 계속 말하
는 것보다 못한 중단이다. 파라말은 자신을 동정하기 시작했다. '아
무리 어처구니 없는 추리에 화가 났다지만 이런 멍청함이라니.' 파라
말은 끝까지 말했다.
"훨씬은 잘못 표현한 말이군요. 절대적으로 낫습니다."
시오크는 둔한 칼로 고기를 썰어야 되는 사람처럼 파라말을 노려보
았다. 파라말은 그 눈빛을 침착하게 받으며 말했다.
"저도 이게 어떤 그림인지는 대강 짐작합니다. 예. 대귀족들은 약화
되었고 차기 황제로 생각해볼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남지 않았
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처럼 이 모든 일이 단 한 사람의 의도에 의
해 이루어졌다고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형님처럼 황제 폐하나 그 주변의 누군가가 희대의 정신억압자라는
식으로 설명하지도 않고 말이야.' 파라말은 그렇게 생각했다. 파라말
은 그 이론을 오래 전에 무시하기로 결정했다. 그것이 지나친 논리적
도약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진실로 그런 말도 안 되는 정신
억압자가 황제 주변에 있다면 황제는 스스로 위험에 빠질 필요가 조
금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정신억압자가 있다면 황제는 발케네공을 공격할 필요가
없다. 빌파 가문 내의 중요 인사 한 사람만, 예를 들어 스카리 빌파
를 정신억압 한다면 그 강력한 가문을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게 할 수
있다. 그것이 훨씬 효율적으로 발케네공을 무너뜨리는 방법이다. 특
히 스카리는 하늘누리에, 즉 황제 가까이에 있었으므로 그를 정신억
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황제가 발케네를 공격
했고 그 과정에서 실종될 뻔한 큰 타격을 입었다면 그 사실 자체가
그런 초인적인 정신억압자가 부재한다는 증거가 된다.
"그보다 훨씬 이성적인 설명을 할 수 있으니까요. 지금 우리가 목도
하고 있는 상황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길을 추구한 끝에 나타난 우
연한 결과일 뿐입니다. 발케네공은 황제 폐하를 싫어했고 칼리도백을
두려워했습니다. 시모그라쥬공은 자기 피지배자들에게 받는 무시 때
문에 생긴 자격지심 때문에 토프탈 가문을 황가로 만들겠다는 야망을
품게 되었겠지요. 여기 누워계신 후작님은 제국의 영속성을 믿지 않
으셨고, 칼리도백은 제국군이 제국을 난자하는 칼날이 되어선 안된다
고 믿었습니다. 지울비. 당신은 황제 때문에 아버지와 적대하게 되었
다고 설명할 겁니까? 유료도로당의 변화는 당신 자신의 바람 아니었
습니까?"
그 질문은 시오크로 하여금 허리를 뒤로 조금 젖히게 만들었다. 자
신에 대한 질문을 피하기 위해 시오크는 파라말의 질문을 모든 사람
에 대한 질문으로 바꿨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바람을 추구했을 뿐이라고요?"
"그랬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연히도 황제가 가장 바랄 것 같은 모습이 되었다고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정우는…… 음, 자꾸 이렇게 부르게 되는군
요. 규리하공은 칼리도백과 맺어지는 편이 절대적으로 낫습니다. 따
라서 규리하공의 실종은 절대로 황제 폐하의 바람이 아닐 겁니다. 저
는 차라리 아이저 규리하가 훨씬 의심스럽습니다."
"전 변경백이오?"
"예.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아이저 규리하에겐 도깨비 감투를 가진
조력자가 있습니다. 규리하의 변경백과 즈믄누리의 무사장이 이렇게
깜쪽같이 사라지게 할 수 있는 사람이지요."
"납치자가 아이저 규리하였다면 그는 오래 전에 나타났어야 합니다.
규리하 정부가 충격에 빠졌을 때 지체없이 규리하를 탈환해야 하니까
요. 왜 아직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단 말입니까?"
"그건 알 수 없는 노릇이지요. 나름의 사정이 있나 봅니다."
시오크는 고집스럽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 또한 증거가 없는 가설이군요. 저는 아직도 황제가 의
심스럽습니다. 새로운 황제와 새로운 왕에게 공공연히 반대할 수 있
는 실력자들을 제거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규리하공이 있는데 신왕을
만든다면 그 꼴이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지울비. 사실을 자기 편리한대로 끼워맞추면 곤란합니다. 규리하
변경백은 락토가와 토프탈가의 봉작에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원시제의 시대였고 공작이었습니다. 부사님. 지금은 치천제의
시대이며 왕입니다."
파라말은 말 나누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좋습니다. 이 모든 일의 배후에 폐하가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사실과 당신이 당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 사이에는 무슨 관련이 있는
겁니까?"
"아버지를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왕위에 오르는 순간 아버지
는 인질의 가치를 잃게 됩니다. 쓸모없어진 아버지는 제거당할 겁니
다."
파라말은 시오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상대방이 불편해하거나 화를
낼 만큼. 시오크가 입을 열 때까지 그렇게 바라보던 파라말은 시오크
가 말하려 할 때 재빨리 말했다.
"지울비. 당신은 후작님에게 죄의식을 느끼고 있는 겁니다."
파라말의 말은 단검처럼 시오크의 가슴을 찔렀다. 시오크는 하려던
말을 삼키고는 황급히 지키멜에게 고개를 돌렸다. 파라말은 시오크의
떨리는 턱을 보며 측은함을 느꼈다.
"당신이 후작님을 배신했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리고 후작님이 저런
꼴이 되자 남자들의 고질병이 도진 겁니다. 여자들이 항상 자기 때문
에 상처 입는다고 믿는 그 측은한 과대망상 말입니다."
"부사님……"
"후작님이 지금 겪고 있는 일은 당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후
작님을 이렇게 만든 것은 당신이 아니라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미량
의 독물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당신을 생각해서 하
는 말이 아닙니다. 인질이 된 춘부장 때문에 하는 말도 아닙니다. 당
신 때문에 난처해하는 규리하 사람들과 지도자를 잃고 당황하고 있을
유료도로당원들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지울비. 당신은 정말
당원들에게 아무런 책임감을 못느낍니까? 당신과 당신의 연인을 위해
수천년 동안 지켜온 당의 이상을 버리고 시모그라쥬군과 싸웠던 그
자들에게? 하르체 도빈이 당신을 보았다면 뭐라고 할 것 같습니까?"
마치 유료도로당원이나 되는 듯한 파라말의 말은 시오크를 화나게
했지만 시오크는 분노를 표현할 수 없었다. 파라말의 지적은 정확했
다. 제2차 대확장 전쟁 당시 소멸이나 다름없는 상태에 이르렀던 유
료도로당을 다시 부활시킨 당의 영웅 하르체 도빈이라면 시오크를 상
대로 나가의 식습관을 시험하려 할 것이다. 시오크는 어금니를 깨물
며 지키멜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우리를 떼어놓으려 할까.'
시오크는 가지 말라고 말하는 지키멜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도도하던 모습, 그 용감한 모습을 모두 잃고 이렇게 무
력한 모습으로 누워있는 그녀 곁을 떠난다고 생각하자 시오크는 심장
이 서늘해지는 것 같은 추위를 느꼈다.
'너는 제국을 조롱했다. 너는 암살공과 무서운 레콘들을 거침없이
야유했다. 너는 죽을 나를 거리낌 없이 사랑했다. 그런 네가 왜 이렇
게? 왜 이래야 하는 거지?'
"지울비."
시오크는 고개를 홱 돌려 무서운 분노로 파라말을 노려보았다. 파라
말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만, 규리하 사람들은 내 방문을
일종의 최종 경고로 간주하는 것 같습니다."
시오크는 가슴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간다고 생각했다.
"최종 경고입니까."
"이성적으로 생각하십시오. 당신이 이곳에 있는다고 해서 후작님에
게 도움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당으로 돌아가면 아버지
와 당원들, 그리고 당신 때문에 곤혹스러워 하는 규리하 사람들을 도
울 수 있습니다."
시오크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시오크는 물밖
에 던져진 물고기처럼 소리 없이 입을 꿈틀거렸다. 파라말은 그의 어
깨를 붙잡아 흔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시오크가 간신히 말을 짜냈다.
"당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파라말은 기쁨을 말하려는 입을 단속한 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들에게 제가 떠날 거라고 말해주십시오. 겨울 여행이니 준
비할 것이 많을 테고, 그래서 언제 떠난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하
지만 준비가 끝나는대로 떠나겠습니다."
"후작님은 이쪽에서 잘 돌볼 겁니다."
시오크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파라말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무향인들은 지키멜이 깨어나면 필요한 것을 물어본 다음 황제에게
보낼 테지요. 황제는 지키멜의 목을 벨 겁니다."
"지울비. 그렇게까지는……"
"아마도 칭왕자의 최후라는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여서 비나간의 대
로에 효시되겠지요. 자신의 후계자를 보호하기 위해…… 엘시 에더리
에게 주어질 제국을 탐내면 무슨 꼴을 당하는지 알려주기 위해……"
시오크의 말꼬리가 젖기 시작했다. 파라말은 말할 수 없는 거북함과
동정심을 동시에 느끼며 시오크를 바라보았다. 시오크는 뜨거운 눈물
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나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겠지요."
파라말은 입을 다물었다. 창밖은 여전히 소란스럽다. 어떤 여름이
한없이 음울하듯 어떤 겨울은 꽤나 자발머리 없다. 시오크가 우는 겨
울이 그러했다.
레콘 힌치오는 좌우를 둘러보았다. 비나간의 꽤나 번화한 대로였고
사람들이 드문 시간도 아니었지만 그의 근처에는 오가는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행인들은 거의 백 미터 저편에서 갑자기 더 좋
은 지름길을 떠올렸다는 듯 황급히 방향을 바꾸었고 무심히 건물 바
깥으로 나오던 자들은 힌치오의 모습을 보자마자 갑자기 잊은 물건을
떠올린 듯 황급히 집안으로 돌아갔다. 물론 그들은 다시 나오지 않았
다.
힌치오는 그 상황이 마음에 들었다. 근처에 아무도 없다는 것은 바
꿔 말하면 많은 자들이 숨어서 이 광경을 보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많은 목격자들은 그만큼 많은 윤색을 가하겠지만 어쨌거나 이곳에서
일어난 일들은 오늘 밤이 오기 전 비나간 전체에 전달할 것이다. 그
러는 편이 좋았다.
힌치오는 다시 앞쪽에 있는 문을 바라보았다. 그 문은 커다란 창고
에 달린 출입문이었다. 창고에는 그 문 외에도 화물이 드나드는 큰
문이 있었지만 사라티본 부대 3대대장 야키보로가 대대원들과 함께
그곳을 지키고 있었기에 힌치오는 그 문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았
다. 힌치오는 자신의 앞쪽에 있는 문을 향해 최후의 경고 삼아 말했
다.
"이봐, 그냥 문 열고 나오지 그래?"
문 안쪽에서 무시무시하게 들리려 애쓰는 외침이 들려왔다.
"이 안에 있는 자들 모두는 물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안으로 들
어왔다간 물벼락을 맞게 될 겁니다!"
힌치오는 그 경고를 똑똑히 들었다. 하지만 힌치오는 문 안에 있는
자들이 원하는 것과는 좀 다른 의미로 그 경고를 해석했다.
"흠. 그렇다면 그 안에 비밀 통로 같은 것은 없다는 말이군."
문 저편에서 당혹감이 잔뜩 묻어나는 침묵이 되돌아왔다. 힌치오는
피식 웃었다.
"멍청한 녀석들. 빠져나갈 구멍이 있는 곳에 모여 작당을 했었어야
지. 그러니 꼼짝 못하고 잡히게 되었잖아."
다시 문 뒤편에서 악쓰는 소리가 되돌아왔다.
"그래요? 그러면 들어와서 잡아보시죠!"
"시간 낭비는 그만두고 투항해라. 팩스벗 졸다비."
팩스벗도 이것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 듯했다. 문 뒤편에서 쿵쿵거
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힌치오는 그 소리가 무엇인지 고민해보다가
어쩐지 사다리를 움직이는 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조금 후 누군가가
사다리를 오르고 있는 소리 같은 것도 들려왔다. 힌치오는 위쪽을 올
려다보았다.
창고의 지붕 가까운 곳에 환기구 삼아 뚫어놓은 듯한 조그마한 창이
보였다. 그곳에서 아래로 물을 끼얹는다면 창고를 포위한 레콘들을
기함하게 할 수 있겠지만 힌치오는 그럴 가능성이 적다고 생각했다.
힌치오의 예상대로 창문에서 나온 것은 물통이 아니라 팩스벗의 머리
였다. 팩스벗은 아래쪽의 레콘들을 잠깐 살펴보고는 고함을 빽 질렀
다.
"들으시오! 비나간인들이여!"
힌치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짓이 어울리겠지.' 팩스벗
은 비장하게 외쳤다.
"우리는 드라카의 아이들이라고 합니다. 이곳에는 열여섯 명의 사람
이 있습니다! 열여섯 명입니다! 우리 드라카의 열여섯 아이들은 오늘
죽습니다. 우리가 왜 이곳에서 죽는지 말하고 싶습니다! 들어주십시
오!"
힌치오는 몇 군데서 오는 눈짓을 느꼈다. 창고를 에워싸고 있던 레
콘들이 팩스벗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눈으로 묻고 있었다. 힌치오는
기다리라는 손짓을 돌려주고는 팔짱을 꼈다.
"당신들이 듣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말하겠습니다. 당신들은, 비나
간의 여러분들은 우리가 선택한 드라카의 아이들이라는 이름이 무슨
의미인지 짐작할 겁니다. 우리는 용의 아이들인 키탈저 사냥꾼의 후
예입니다! 그들이 어떤 자들이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고아라짓 왕국
을 멸망시킨 자들이 나가입니까? 천만에, 바로 키탈저 사냥꾼들이었
습니다! 키탈저 사냥꾼들이 오만한 권능왕을 저주했을 때 고아라짓은
왕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거칠고 용감하고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
았던 자들의 후손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모습을 보십시오! 레콘들이
여러분들의 대로를 빼앗아 저렇게 서있는데도 여러분들은 두려움에
빠져 집안에 숨어있습니다!"
팩스벗은 자기 말에 점점 분노하게 된 것 같았다. 그는 아래쪽에 있
는 레콘들에게 험악한 시선을 보내며 외쳤다.
"여러분들이 모두 집 밖으로 물만 쏟아도 도망갈 자들을 무서워하고
있는 겁니다. 키탈저 사냥꾼들의 후손인 여러분들이!"
팩스벗이 시사하는 상황은 레콘들을 격분시키고 또한 안절부절 못하
게 했다. 많은 사라티본 부대원들이 두렵다는 듯이 주위의 높은 곳을
훔쳐보는 광경을 보자 팩스벗은 기가 오른 듯했다.
"예! 우리는 용감무쌍했던 조상을 잊어버렸습니다. 우리는 키탈저
사냥꾼들의 후예라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신분을 타향인들에게 으스댈
때만 썼습니다. 우리 자신을 단속하는 데는 쓰지 않았습니다! 키탈저
사냥꾼답게 생각하고 키탈저 사냥꾼답게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들 중 진정한 키탈저 사냥꾼은 한 명뿐입니다!"
힌치오는 수염볏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팩스벗이 누구의 이름을 말
할지 알 수 있었다.
"그 분은 바로 독행왕 폐하이십니다!"
팩스벗은 아래로 떨어질 듯 위태롭게 몸을 내밀었다.
"생각해보십시오! 황제는 발케네를 불의하게 공격하다가 실종되었습
니다. 힘을 보여주고 싶은 야망 때문에 자신의 제후를 공격하다가 제
국을 보호해야 할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게 된 겁니다! 황제가
실종되자 시모그라쥬공은 당장 자신의 검은 야망을 드러내었습니다.
황제가 우리를 보호하지 못할 때 우리를 보호해준 것이 누굽니까? 독
행왕 폐하이십니다! 여러분들은 그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우리
의 진정한 신분을 일깨워주시고 키탈저 사냥꾼의 후예답게 적에 맞서
는 법을 알려주신 분은 바로 독행왕 폐하이십니다!"
힌치오는 갑자기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의 창가에서 황
급히 물러나는 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골목길 속으로 숨어드
는 그림자도 보였다. 충분히 많은 자들이 이 광경을 주시하고 있다.
힌치오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옆에 꽂아두었던 이쑤시개를 붙잡
았다.
"그런데 뻔뻔한 황제가 우리의 키탈저 사냥꾼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황제는 제국 수호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을 사과하기는커녕 우리의
유일한 키탈저 사냥꾼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 때문에 독행왕 폐하께
서는 그 분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백성들의 곁을 떠나실 수밖에 없었
습니다. 이같이 어이없는 일을 저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이
럴 수 있단 말입니까? 제가 뭔데, 제까짓 것이 뭔데 우리의 왕을 우
리 곁에서 도망치게 만든단 말입니까? 우리의 키탈저 사냥꾼을! 제까
짓 것이 뭔데!"
점점 고조되던 팩스벗의 목소리는 마침내 심하게 갈라지기 시작했
다. 팩스벗은 말이라기보다는 짐승의 울음처럼 외쳤다.
"우리의 왕을 되찾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누굽니까? 키탈저 사냥
꾼의 후예입니다! 자기 것을 빼앗아간 자를 키탈저 사냥꾼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습니다! 아비가 죽으면 자식이, 그 자식이 죽으면 손자가
보복에 나서는 것이 키탈저 사냥꾼입니다! 끝까지 추적하여 원수를
죽이고 그 생간을 꺼내어 씹는 것이 키탈저 사냥꾼입니다! 어찌하여
우리가 우리의 왕을 빼앗기고……"
거대한 것이 그의 앞을 스쳐지나가는 느낌 때문에 팩스벗은 입을 다
물었다. 제대로 관찰하지는 못했지만 팩스벗은 그것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간다는 희미한 인상을 받았다. 그 인상을 증명하듯 위쪽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창고 주변에 있던 레콘들과 숨어서 그 광경을 보던 비나간인들은 무
슨 일이 일어나는지 똑똑히 보았다. 땅에 꽂아두었던 이쑤시개를 슬
쩍 뽑아낸 힌치오는 그것을 어깨에 걸친 채 다리를 굽혔다. 그리고
힌치오는 발을 굴러 위로 뛰어올랐다. 그 강력한 도약은 힌치오를 높
은 창고 지붕까지 이끌었다. 이곳저곳에서 작은 비명이 터져나왔을
때 지붕에 선 힌치오는 다시 위로 뛰어올랐다. 허공에서 힌치오는 이
쑤시개를 거꾸로 쥐었다.
힌치오는 이쑤시개와 함께 창고 지붕을 강타했다.
힌치오가 지붕을 꿰뚫었음을 알려주는 것은 위로 치솟아오르는 파편
과 굉음뿐이었다. 힌치오의 모습 자체는 마치 아무런 장애물이 없는
것처럼 그대로 지붕 아래로 사라졌다. 묘하게도, 지붕이 뚫리는 소리
가 사라진 직후의 짧은 순간은 놀랍도록 고요했다. 숨소리조차 들리
지 않는 침묵.
그리고 비명이 터져나왔다.
울부짖음, 단말마, 절규, 애원, 저주의 외침, 아니, 애원이다. 애
원, 애원, 살려줘. 제발 살려줘요. 죽고 싶지 않아. 아냐, 이건 안
돼. 무슨 짓이든 하겠어요. 살려만 줘요. 눈 감고 싶지 않아. 이 세
상을 떠나고 싶지 않아.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 다시는 깨
어나지 않는 잠이라니, 말도 안돼!
비나간인들은 강제로 심장 적출을 당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창고 주변의 레콘들 중에는 웃기는커녕 미소짓는 자도 없었다.
애원이 울음으로 바뀌고 울음은 다시 목을 조르는 것 같은 침묵으로
바뀌었다.
문이 열렸다.
인간이 걸어나왔다. 비틀거리며, 눈이 부시다는 듯이. 그리고 또 인
간이 걸어나왔다. 서로를 부축한 채 걸어나오는 자들도 있었다. 레콘
들이 그 인간들 곁으로 다가갔다. 보고 있던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 숫자를 헤아렸다. 셋…… 일곱…… 열하나…… 열넷, 열다섯.
열다섯 명이었다.
팽윤하는 정적이 폭발음을 낼 듯한 시점에 힌치오가 걸어나왔다.
힌치오는 한 손에는 이쑤시개를 들고있었다. 그리고 다른 손은 인간
한 명을 겨드랑이에 끼우고 있었다. 힌치오는 이미 나와있던 열다섯
명 옆에 마지막 사람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열여섯 번째 인간은 신음
을 흘리며 꿈틀거렸다. 기절했던 모양이다.
힌치오는 무관심한 표정으로 레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곧 레콘들
은 반항하지 않는 인간들을 하나씩 주워들었다. 힌치오는 그들을 인
솔하여 후작궁으로 돌아갔다. 발소리 외엔 아무 것도 남기지 않은
채.
낮잠을 자다가 악몽을 꾼 듯한 기분 속에서 비나간인들은 대로를 바
라보았다. 대로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레콘들 때문에 숨을
죽이고 있던 바람이 살짝 불어와 열린 창고문을 한 번 흔들었다. 그
마저도 곧 멈췄다. 햇빛과 먼지, 그리고 정적이 대로에 떨어졌다.
그날 오후, 전세계의 뱀단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름의 제국과 겨울의 제국에서 사람들은 뱀단지를 꺼냈다. 일출의
제국과 일몰의 제국에서 사람들은 뱀들을 쏟아부었다. 귀를 기울인다
는 표현은 부적합하다. 사어는 소리가 아니므로. 제국 전체에서 이십
명 쯤 되는 사람들이 의문을 가졌다. 쓰고 읽는다는 표현을 쓰는데
왜 사문(蛇文)이 아니라 사어(蛇語)일까. 그들 중 일부는 사어가 실
시간으로 움직이며 고정된 기록이 아니기 때문에 문자가 아닌 말이라
는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일부는 입 닥치고 보기나 하라는 대답을
들었다. 대부분은 아무런 대답을 듣지 못했다. 질문하는 대신 다른
자들처럼 입을 다문 채 뱀들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바라보는 이들의 침묵 속에서 뱀들은 자신의 몸을 뒤틀어 황제의 뜻
을 표현했다. 황제의 사어는 별다른 수식 없이 명료했다.
"아라짓 제국의 황제이자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주관자인 치천제가
제국에 고한다.
최근 있었던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짐은 짐의 합당한 후계자가
없다는 사실이 내포한 위험을 알게 되었노라. 심장을 적출한 황제에
게조차 이런 위험이 있다는 사실은 제국의 신민 모두에게 크나큰 불
행인 바, 제국 신민의 진정한 보호자인 짐은 이를 간과할 수 없노라.
이에 짐은 칼리도백 엘시 에더리에게 원시제 그리미 마케로우의 이름
을 하사하여 짐의 양자로 삼는다. 이 시간 이후로 칼리도백은 엘시
에더리 마케로우가 될 것이다. 제국의 신민들은 짐에게 보내는 것과
같은 사랑과 경의를 짐의 아들에게 바치도록 하라."
뱀들을 바라보고 있던 자들은 그 사어에 충격을 받고 제각기 그 의
미를 해석하기 시작했다. 어떤 자들은 이것을 반겼고 어떤 자들은 분
통을 터뜨렸다. 어떤 자들은 황태자라는 말 대신 양자라는 표현이 쓰
인 것에 주의했고 어떤 자들은 황제가 자신의 이름 대신 원시제의 이
름을 사용했다는 사실에 어떤 의미가 있을 거라 추측했다. 뱀들을 직
접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자들만 따져도 수만 명이, 그리고 조금
후에는 그 사어를 알게 된 수십수백 만 명의 사람들이 하던 일을 모
두 멈춘 채 황제의 말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국 사람들 중 유일하게 규리하 사람들만은 생각하는 것을
뒤로 미룬 채 뱀들의 움직임을 계속 바라보았다. 규리하에는 황제의
특별한 지시가 있었다.
"규리하 변경백 비셀스 규리하에게 고한다. 짐의 아들을 대신하여
그대에게 청혼한다. 그대가 엘시 에더리 마케로우의 아내가 되어줄
것을 바란다. 이에 대한 대답은 짐이 직접 들으리라. 짐이 곧 그곳에
갈 것이다. 규리하의 신민들은 그대들의 지배자인 규리하 변경백을
지금보다 더 귀히 여기고 존중하라. 짐의 자부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
이 합당한 존중을 받지 못한다면 짐은 이를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
다."
규리하에 도달한 황제의 사어는 규리하 사람들과 그곳에 머물고 있
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반응을 일으켰다. 규리하의 총리대부 리시오
느베라이의 반응은 이러했다. 그는 황제에게 '이걸 어쩌나, 폐하의
며느리감을 잃어버렸는데요?' 라고 말하는 것과 레이헬 라보 태위를
본받아 집무실 벽에 사직서를 휘갈겨놓고 - 사표를 수리해줄 사람이
없으므로 - 야반도주를 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나을지 궁금해하게 되
었다.
피를 마시는 새 36. 가벼운 것과 가여운 것 (2)
| 2004·11·07 09:11 | HIT : 1,142 | VOTE : 0 |
제 목:피를 마시는 새 36-2 관련자료:없음 [49386]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11-07 05:21 조회:68
피를 마시는 새
36. 가벼운 것과 가여운 것 - 2
황제의 사어는 하인샤 대사원에도 전달되었다. 사어 전달이 끝나고
대략 한 시간이 지났을 때 대사원의 모처에서는 겉으로 보아 그 연관
성을 짐작하기 힘든 고위 승려들이 회동을 가지게 되었다.
그곳의 이름은 연행원이라고 한다. 하지만 대사원의 일반적 방문객
들은 물론이거니와 많은 승려들도 그런 곳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다. 연행원은 상설기구라고 말하기도 어렵고 임시기구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대선사를 자문하는 역할을 주로 담당하지만 많은 경우 의결
사항을 집행하기도 한다. 연행원은 사찰의 삼대 목표인 포교, 교육,
수양과는 아무 관련이 없으며, 따라서 종단 내부에서 보면 불필요한
조직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종단 바깥의 지도층 인사들에게 가
장 진지한 영향을 끼치는 결정들은 대부분 연행원에서 나온다.
연행원에 출석한 고승들 중 어떤 자들은 황제의 후계자 발표에 관한
예상 대응책이 이미 수립되어 있다는 것에 놀랐다. 연행원이 종단 대
외 업무를 자주 다룬다는 점을 놓고 본다면 그런 것이 준비되어 있다
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놀랄 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반
응을 탓하기는 어렵다. 비록 상당히 정치적으로 행동할 수 있지만 승
려들은 완전한 정치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또 그들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심장을 적출한 황제가 오랫동안 제국을 다스릴 거라 믿고
있었다. 적어도 삼사십 년 후에 고민해보아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했
던 고승들은 그 소속이 불명확한 학승 한 명이 낭독하는 예상 대응책
을 들으며 기뻐했다. 그리고 그것이 주로 엘시 에더리에 대한 것임을
알고는 더욱 큰 만족감을 느꼈다.
엘시 에더리에게 유념할 만한 부적합 사유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
음 승려들의 토의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들은 칼리도백이 탈법의
소지까지도 엿보이는 제국만병장이라는 권한을 받았을 때부터 후계자
지명은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에 모두 동의했다. 황
제와 백작이 다른 종족이라는 것을 놓고 본다면 양자 입양이라는 방
식은 확실히 파격적인 일이지만 이 또한 후계자에게 지고의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승려들의 토의가 난항을 겪게 된 것은 황제의 선언 시점에 대한 해
석이었다. 많은 승려들이 왜 지금 그런 선언이 이루어져야 하는지 이
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심장을 적출한 나가의 기대수명을 고려할
때 황제는 앞으로 삼사십 년은 제위에 머물 수 있다. 그 정도의 시간
이 지난 후라면 칼리도백은 독서왕의 고령 즉위 기록 갱신에 도전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인간은 나가보다 쉽게 죽고 백작이 전장을
누비는 장수라는 점을 놓고 본다면 그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것은 계
승을 안정화시킨다는 목적에 부합한다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왜?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합리적인 가설은 두 가지였다. 황제가 진짜
바라는 후계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엘시의 자손이라는 가설과 황제
가 조만간 퇴위할 거라는 가설. 하지만 승려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의 존재를 포함하는 전자가 나가답지 않다고 느꼈다. 역시 황제는
조만간 퇴위하리라는 관측이 보다 사실적이었다. 승려들은 황제가 그
런 결심을 한 이유를 고민하다가 동포들의 곁에서 떨어져 혹독한 날
씨를 매일 겪어야 하는 것만으로도 제위를 포기하고 싶은 사유로는
충분하다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또한 그들은 황제가 후계자를 지명한 것은 분란의 시기가 끝났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천명한 것으로 간주하기로 했다. 어쩌면 칼리도백은
갈등의 종식과 화합의 시작을 알리는 새로운 상징이 되어줄지도 모른
다. 그들은 그 시점에서 바로 자신들의 가람에 머물고 있는 한 망명
군주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는 우리들의 믿음을 비웃듯 규리하공은 하늘
치를 통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것은 원한에 사로잡힌 사람이 손에
넣으면 곤란한 힘이지요."
"그 하늘치로 황제를 공격할까요?"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일입니다만 어쩔 수 없이 생각해봐야겠군요.
스님의 질문에는, 아니라고 대답하겠습니다. 하늘치 자체는 군사가
아닙니다. 규리하공은 아마도 최대한 빨리 규리하를 되찾은 다음 자
신의 근거지에서 황제와 맞서 싸우려 하겠지요. 그곳에서라면 군사도
물자도 쉽게 조달할 수 있을 테니까요."
"변경백을 설득할 수 없을까요?"
"하늘치를 움직인 원념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를 설득한다 해서 황제가 그를 용서할지도 의문입니다. 그런 상황에
손에 쥔 무기를 놓는 것은 강대한 군주였던 자에게 쉬운 일이 아닙니
다."
"그렇다면 우리가 황제와 변경백의 화해를 주선하는 것은 어떨까
요?"
"쥬타기 대선사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우리가 제국의 정치에 간섭
하기 시작하면 그 순간 우리도 제국의 정치에 간섭당하게 됩니다. 일
방적인 관계라는 것은 불가능해요."
"옳은 말씀이지요. 종단의 역사에서 가장 정치 편력이 화려했던 분
의 말씀만 아니라면 받아들이기도 쉬울 텐데."
고승들은 실소할 수밖에 없었다. 대호왕 사모 페이가 북부의 왕이
된 곳이 바로 하인샤 대사원이었고 당시 종단의 우두머리는 쥬타기
대선사였다. 물론 실제로 사모 페이를 왕으로 추대한 것은 대사원에
집결한 북부의 군웅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쥬타기 대선사가 장소
제공만 담당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듯 황제는 하인샤 대사원으로부터 어떤 것도,
사실상 지상으로부터의 어떤 설득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성격을 가
지고 있습니다. 조금 전 일방적인 관계란 없다고 말해놓고 이렇게 말
하려니 좀 뭣합니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중에 일방적인 관계에 가
장 가까운 것이 있다면 황제와 제국의 관계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황
제가 우리의 설득을 받아들일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노력은 해
봐야겠지요. 무수한 피가 흐를 것이 뻔한데 못 본 척할 수는 없으니
까요."
"그렇다면 일단 황제와의 화해에 대해 변경백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도록 합시다."
하지만 연행원의 승려들은 아이저 규리하의 의견을 구할 수 없었다.
변경백과 그의 무리들을 찾아갔던 수좌는 그곳이 이미 텅 비어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 수좌는 눈치가 제법 빠른 인물이었고 그래서 하
늘치의 소재 또한 확인한 후에 돌아왔다. 승려들은 변경백이 작별 인
사도 생략한 채 하늘치를 타고 떠났다는 결론밖에 내릴 수 없었다.
말할 수 없이 씁쓸한 기분 속에서 승려들은 규리하에 소식을 전달하
기로 결정했다. 황제에게도 보내고 싶었지만 그들은 황제의 소재를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즈믄누리는 딱정벌레들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좋은 딱정벌레들을
공급한다. 하지만 도깨비의 사육술을 따를 수 없는 다른 자들은 딱정
벌레를 왜소하게 길러낼 수밖에 없다. 아이저 규리하가 하늘치를 손
에 넣은 채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가지고 규리하로 날기 시작
한 딱정벌레도 즈믄누리 출신의 동족보다는 왜소했다. 그 조그마한
딱정벌레가 서쪽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보며 승려들은 그것이 겨울의
모진 날씨를 무사히 이겨내길 기원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 중에 딱정벌레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하
지만 그 때 규리하 방향을 향해 날고 있는 비행체 중에서 딱정벌레는
결코 크기로는 수위를 다툴 수 없었다. 두 번째나 세 번째와의 비교
가 무의미할 정도로 거대한 물체가 규리하를 향해 날고 있었기 때문
이다.
말이나 니름을 할 줄 아는 이들은 모두 그것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생물이 바다나 땅이 아닌 하늘에 있다는 모순
을 가능하게 하는 그 생물은 하늘치였다. 하지만 그 하늘치는 극소수
의 사람들에게는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지금 하늘치의 등에 있는 일
군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태우고 있는 하늘치를 소리라고 불렀다.
따라서 이이타 규리하는 소리에 앉아 소리를 껴안고 있는 셈이었다.
이이타는 그 상황에서 희극적인 분위기를 느끼려 애썼다.
"온세상이 소리로군. 최고야."
소리는 그 말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지만 빙긋 웃으며 이이타를
끌어안았다. 그것은 애정표현이라기보다는 생존활동이다.
그들은 하늘치의 등 위에 천막이나 피난처 같은 것을 만들 수 없었
다. 환상 계단은 그것을 상상한 자에게만 영향을 끼치며 그것을 상상
한 자가 타고 있는 말이나 끌고 있는 수레 같은 것에는 아무런 영향
도 끼치지 않았다. 하늘누리처럼 승강기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휴대할 수 있는 것만 가지고 소리 위로 올라올 수밖에 없었
다. 숲도, 동굴도, 모닥불도 없는 하늘치의 등 위에서 고공을 치닫는
겨울 바람을 고스란히 받으며 앉아있었다간 기껏 손에 넣은 하늘치를
무덤으로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멘은 휴대의 개념이 인간들과 많이 달랐다. 지멘은 하인샤
대사원의 공방에서 수리하기 위해 놓여있던 옷장 몇 개를 구한 다음
그것을 한데 묶어 소리 위로 들고 올라갔다. 그들은 소리의 등 위 우
묵한 곳을 찾아 옷장들을 눕혔다. 그리고 그 안에 소지품들을 집어넣
고는 하늘치를 규리하 방향으로 출발시켰다. 얼마 후 이이타는 자신
이 계속 조종하지 않아도 하늘치가 계속 같은 방향으로 움직일 거라
확신하게 되었다. 밤이 되었을 때 그들은 옷장 문을 열고 그 속에 드
러누웠다. 초소형 오두막인 셈이다. 물론 지멘은 옷장 안에 누울 수
없었지만 설원에 드러누워 자도 동사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기에 상관
없었다. 지멘은 옷장 옆에 앉아 불침번을 서기로 했다. 물론 습격이
있을까봐 불침번을 서는 것은 아니었다. 하늘치가 계속 같은 방향을
유지하는지 관찰하고 혹 비나 눈이 와서 옷장 속에 있는 자들이 굉장
한 봉변을 당하게 되는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옷장 덕분에 동사는 피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속에 누워있는 것은
굉장히 답답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보온을 위해 모포를 두툼하게 깔
아두었지만 어느 틈에선가 자꾸 새어들어오는 바람 또한 신경을 거슬
리게 했다. 이이타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는 옆에 누워있는 소리
의 몸을 힘껏 끌어안았다. 옷장 속의 어둠 때문에 공자를 볼 수 없었
지만 이이타의 불안한 숨소리를 들은 소리는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 뺨은 싸늘했다. 소리는 그 뺨을 살살 문지르며 말했다.
"그러고보니 파지트 스님에게 인사도 못했네요. 공자님. 왜 이렇게
황급히 규리하로 돌아가는 거죠? 봄이라면 이렇게 힘들게 여행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이이타는 소리가 그저 그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질문하는 것임을 알
고 있었다. 그 호의를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황제가 돌아왔기 때문이야. 규리하를 되찾기 위해서든 복수를 위해
서든 황제와의 대결은 불가피해. 그렇다면 한시라도 빨리 규리하를
되찾아야지. 하늘치만 가지고서는 황제와 싸울 수 없어. 지상군도 필
요하고 보급도 필요하니까."
"하지만 이렇게 옷장 속에 누워 여행해야 하는 우리가 규리하를 되
찾을 수 있을까요? 밖에 있는 황제사냥꾼은 굉장히 무서워 보이지만
그래도 혼자잖아요. 공자님의 누님 곁에는 무서운 레콘이 둘이나 있
고 또 도깨비 무사장도 있어요. 그런데 우리에겐 더 이상 헤어릿 언
니도 없잖아요."
이이타는 그 지적을 모두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이 슬펐다.
"그래. 상황이 결코 좋다고는 할 수 없어. 하지만 기다리면 기다릴
수록 상황은 더 악화될 거야. 도리가 없는 거지……"
"공자님?"
이이타는 속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러니 그냥 말하지. 나는 너를
사지로 끌고가는 걸지도 몰라."
"제가 따라오겠다고 한 거잖아요. 공자님."
"그냥 대사원에 남았어야 했어."
소리의 손가락이 이이타의 입 주위를 스쳤다. 이이타는 입을 다물었
다. 소리는 이이타의 차가운 입술을 어루만지다가 말했다.
"안 졸리시면 잠깐만 문 열어볼까요?"
"응?"
"우리는 지금 하늘치의 등 위에 누운 채 밤하늘을 날고 있어요. 공
자님. 밖에는 별들이 반짝일 거예요."
"추울 거야."
"공자님. 우리는 두꺼운 옷 입고 있잖아요. 잠깐 문 여는 것 때문에
얼어죽지는 않아요."
소리는 몸을 돌려 문을 향해 누웠다. 그리고 문을 힘껏 밀었다. 문
이 활짝 열리는 순간 이이타는 냉기 때문에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별빛은 찌푸린 눈속으로도 가득 쏟아져들어왔다.
별들이 어찌나 많은지 어떤 별들은 다른 별의 빛 때문에 감춰지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밤을 추방하기 위해 피워놓는 지상의 그 어
떤 빛도 닿지 않는 이 높은 곳은 자신의 손조차 볼 수 없을 만큼 어
두웠고 그 암흑 속에서 빛을 뿜어내는 것은 별들뿐이었다. 그 때문에
별들은 한 됫박의 쌀을 바닥에 쏟은 것마냥 무수히 번쩍이고 있었다.
더군다나 지평선이 한참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별은 위쪽뿐만 아니
라 전후좌우에 가득했다. 마치 별들 속을 나는 것 같았다. 이이타는
태어나서 처음 별을 보는 사람처럼 정신없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때 그의 머리쪽 어딘가에서 지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문 열리는 소리를 들은 지멘이 안부를 묻고 있었다. 소리가 재빨리
외쳤다.
"잠깐 별 좀 보는 거예요. 황제사냥꾼님! 곧 닫을 거예요."
지멘은 침묵했다. 이이타는 별이 저토록 많은 것을 보니 지멘을 괴
롭힐 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하며 찬란한 별들을 바라보
았다.
이이타의 생각처럼 지멘은 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이타나 소리가 그러는 것처럼 경외감 속에서 별들을 바라보지도 않
았다. 하늘치의 비행 방향에 대해 보내는 주의를 제외한 그의 주의력
은 모두 배낭 속에 누워있는 아실을 향해 있었다.
아실은 옷장 안에 들어가는 것을 사양했다. 혹독한 야외생활에 익숙
한 그녀는 옷장보다 배낭이 훨씬 낫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고공
의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 하늘치의 등 위에서도 아실은 배낭을 선
택했다. 지멘은 그것이 바람직한 선택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하늘치
의 등은 산꼭대기나 다름없었고 아무리 야외 생활에 익숙한 자라고
해도 산꼭대기에서 불기운도 없이 밤을 보낼 수는 없다. 그래서 지멘
은 배낭 옆에 모로 누워 그 위에 팔뚝을 살짝 얹어두고 있었다. 아실
이 들어있는 배낭은 현재 지멘의 깃털 속에 반쯤 파묻힌 듯한 모습으
로 누워있었다.
누군가가 일어나 앉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옷장 문이 닫혔다. 그
소리를 듣던 지멘은 배낭을 살짝 들어 옷장 속에 집어넣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아실은 잠이 얕게 드는 편이다. 배낭을 건드
리면 바로 깨어날 것이다. 지멘은 머뭇거리며 조심스럽게 배낭을 건
드렸다.
"예? 뭐죠, 지멘?"
지멘은 예상이 맞았다는 것에 실망하며 말했다.
"아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별빛밖에 없지만 눈이 밝은 지멘은 아
실이 배낭 밖으로 머리를 내미는 희미한 모습을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자요?"
"몇 명은 아직 못자는 것 같군."
"조용히 이야기 좀 해요."
"그래."
"아이저 규리하를 따라 규리하로 간 다음엔 어쩔 거죠? 정말 그의
규리하 탈환을 도울 건가요?"
"황제가 거기로 갈 거야. 살육을 위해. 그리고 나에게 죽으려 하겠
지."
"그건 대강 짐작해요. 하지만 당신은 황제를 가짜로 죽일 거죠?"
지멘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실은 약간 큰 숨소리를 내다가 말했다.
"진짜로 죽일 거예요?"
"내 숙원이야."
지멘은 어쩐지 자기 말이 거짓말처럼 들린다고 생각했다. 아실도 그
렇게 느꼈다.
"지멘. 당신도 계획을 알잖아요. 황제가 정말로 죽으면 앞으로 수많
은 사람들이 죽을 거예요."
"그게 내 책임이 될 거라는 거야?"
"즈라더는 황제가 불쌍한 사람이라고 했어요."
아실은 지멘을 잘 알고 있었다. 즈라더의 이름은 지멘을 침묵하게
했다.
"즈라더가 그 계획을 알고 있었을 것 같지는 않아요. 그에게 알려줄
필요가 없으니까. 하지만 즈라더는 항상 황제의 곁에 있었으니까 뭔
가를 느꼈겠지요. 황제가 죽음이나 다름없는 생을 선택하려 한다는
것을…… 지멘. 당신이 죽이지 않아도 황제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어
요. 죽은 자를 또 죽일 필요는 없어요. 당신은 철의 대화도 포기했잖
아요. 숙원은 왜 포기할 수 없죠?"
지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자신도 뚜렷이 설명할 수가 없었다. 숙
원을 성취한다 해도 말리 위에서 아실이 그를 불렀을 때만큼의 만족
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아실의 치료를 위해 황제를 도
울 때부터 지멘은 숙원에 대한 절실한 욕구를 잃었다. 공정하게 평가
한다면 이제 숙원은 그의 삶을 지탱하는 유일한 원인에서 부담스러운
짐으로 전락했다. 지멘은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숙
원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을, 하고 나면 홀가분해질 것 같은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다층적인 정신 속에서 의식보다 낮은 곳, 꿈과
대화하길 즐기는 부분에서 그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레콘들의 표현을
따른다면 그래야 할 것 같다는 감이 든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성의 영역에서 지멘은 압도적인 반대 증거 때문에 질식할
것 같았다. 황제의 계획이 실패할 경우 죽을 무수히 많은 사람들. 물
론 그들은 자신들의 우행 때문에 죽어가는 것이다. 백 년 뒤의 누군
가가 다른 누군가를 죽인다면 그것을 가리켜 백 년 전에 죽은 어떤
황제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건 변명
도 될 수 없다. 하지만 지멘이 죽이지 않는다면 황제는 백 년 후에도
살아있을 것이다. 그리고 백 년 뒤에 일어날 어떤 살인을 막을 수 있
을지도 모른다. 천 년 뒤의 어떤 살육도, 만 년 뒤의 어떤 전쟁도 막
을 것이다. 그녀의 목표가 바로 그것이니까.
'그런데 왜 나는 숙원을 포기할 수 없는 걸까? 이 절실한 느낌은 타
이모가 죽었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아득한 곳에서부터 느껴
지는 이 미약하지만 분명한 절실함……'
지멘은 아실의 숨소리가 바뀌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실은 다시 배
낭 속에 들어가 잠들어 있었다. 지멘을 잘 아는 그녀는 지금이 그를
설득할 수 없는 시점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지멘은 그녀가 좌절감
속에서 잠들지 않았나 걱정했다. 지멘은 분노했다.
'빌어먹을. 포기해도 그만이잖아. 타이모는 쟁룡해의 바닥으로 가라
앉으면서도 내가 복수해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거야. 나를 멍
청한 신부탐색자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녀가 그곳에
있던 다른 레콘들보다 나를 더 특별하게 생각하기나 했을까? 그랬을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내가 하는 짓은 도대체 무엇이지?'
그 생각은 지멘을 부풀어오르게 했다. 자신도 모르게 배낭을 뒤덮어
버릴까 걱정된 지멘은 몸을 돌려 하늘을 향해 누웠다. 지멘은 벅차오
르는 호흡을 애써 억눌러 조심스럽게 숨을 내뱉었다.
당장 쏟아져내릴 것 같은 별 속에서 지멘은 자신의 호흡을 세었다.
그는 황제를 죽여야 할 이유가 하나만이라도 있기를 바랐다. 단지 자
신의 숙원이기 때문에 황제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래야 할 보편타
당한 이유가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지멘은 그런 것을 떠올릴 수 없
었다.
'제이어 솔한.'
지멘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늘치의 등에 앉은 지멘은 칠흑 같
은 어둠 속을 바라보며 제이어가 누워있는 옷장을 찾았다. 아이저 규
리하는 하인샤 대사원을 떠날 채비를 하느라 바빠 제이어의 존재를
따지지 못했고 그 틈을 타 제이어는 소리의 위까지 따라올라왔다. 물
론 조심스럽게 행동하긴 했지만 꽤나 뻔뻔한 사내였다. 그리고 지금
소리 위에 있는 자들 중 아마도 황제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인물일 것
이다.
제이어가 누워있는 옷장을 찾아낸 지멘은 거기로 다가갔다. 옷장 문
을 열자 조금 후 안쪽에서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제이어
의 것이었다. 지멘은 어둠 속으로 손을 뻗어 어둠을 붙잡아 올렸다.
"뭐야? 어? 지멘?"
"조용히 해라."
제이어는 입을 닫았다. 지멘은 제이어를 든 채 하늘치의 등 저편으
로 걸어갔다. 지나치게 멀어지면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을지도 모르기
에 지멘은 가장 가까운 둔덕 위에서 멈춰섰다. 뒤를 돌아본 지멘은
별빛만으로도 옷장들의 위치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제이
어를 내려놓았다.
자다가 깨어나 갑자기 추위에 노출된 제이어는 몸을 와들와들 떨었
다. 지멘만큼 밤눈이 좋지 못한 제이어는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지멘
의 위치를 찾았다. 지멘이 말했다.
"너는 황제의 계획이 실패할 거라 믿기 때문에 따르는 거지?"
"예예예예? 아아아, 지지지멘."
"떨지 말고 말해."
"제제제젠장. 추, 추추춥단 말입니다."
제이어는 추위를 이기기 위해 제자리에서 팔짝팔짝 뛰었다. 지멘은
그런 그를 내려보다가 제이어에게 불어가는 바람을 막는 방향으로 움
직였다. 조금 후 제이어는 보다 안정된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고 했습니까? 실패할 거라서 따른다고요?"
"넌 그렇잖아. 황제의 계획은 실패하는 거지?"
"젠장. 지멘. 제가 살아오면서 많은 실패를 겪었다는 것은 인정합니
다만 그렇다고 해서 남의 인생사를 그렇게 비웃는 것은 너무하잖습니
까. 실패주의자 제이어는 실패할 일이라서 찬성한다고요? 쳇. 그러면
황제는 왜 실패할 일에 매달리는 겁니까? 황제도 실패주의자입니까?"
지멘은 그 지적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부리를 닫고는 팔짱
을 꼈다. 그런데 제이어가 갑자기 그에게 다가왔다. 더듬거리며 지멘
을 찾은 제이어는 지멘에게 닿자 태연히 그에게 안겼다.
"실례 좀 합시다. 너무 추워서."
지멘은 이 기막힐 정도로 낯두꺼운 행동에 그만 할말을 잃었다. 제
지어는 지멘의 깃털 속으로 파고들 듯 몸을 밀어대며 말했다.
"황제는 성공할 겁니다. 내버려두면 서로를 죽일 사람들을 살릴 겁
니다. 뜻 깊은 일이지 않습니까?"
"그 일을 하느라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나는 파르바리 계곡을 보았
다."
"그거요? 그거야 레콘들이 한 일이지요."
"황제가 명령했어."
"황제는 그런 명령 안내렸습니다. 그 명령은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
이 내린 거죠."
"황제가 발케네 공격을 명령했기 때문이야."
"그거요? 발케네공이 황제에게 적대했기 때문이죠. 그 아들은 황제
의 죄수를 훔쳤고. 그런데 이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질 거라는 것은
알고 있지요?"
"황제에겐 아무 죄도 없다는 거냐?"
"죄를 싫어하는군요. 예비살인자가 그렇게 말하니 안 어울리는군
요."
지멘은 부리를 닫았다. 제이어는 쿡쿡 웃었다. 조금 후 그 웃음이
사그라들었다. 제이어는 지멘을 꼭 끌어안은 채 나직하게 말했다.
"지멘. 고민이 뭡니까?"
지멘은 그 말을 무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부리를 열었다.
"내가 왜 황제를 죽여야 되는지 모르겠다."
"그건 당신 숙원 아닙니까."
"그래. 옛날에는 그걸로 설명이 되었어. 그런데 이젠 안돼. 모르겠
어. 황제가 아실을 치료해줬기 때문인지, 아니면 황제가 미래에 많은
사람을 구할 인물이라서 그런 건지…… 어쨌든 난 황제를 죽여야 할
이유를 모르겠어. 하지만 그래야 된다고 느낀다. 모르겠어. 혹시 황
제가 나를 정신억압한 걸까? 아실을 치료했으니 분명히 황제는 다른
사람의 정신을 조작할 수 있어. 그 능력으로 나를 어떻게 한 걸지도
몰라. 대호왕도 내가 준비된 암살자라고 했어. 황제는 안 그랬다고
말했지만, 그러면 도대체 왜 내 생각이 이렇게 꼬이는 거야?"
"황제의 정신억압에 대해 고민하지 마십시오. 지멘."
"고민하지 말라고?"
"고민할 필요가 없더군요."
지멘은 몸을 조금 부풀렸다. 지멘에게 밀착해있던 제이어는 그 반응
을 곧장 깨달았다. 제이어는 희미한 웃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
했다.
"예. 저는 황제에게 정신억압당했습니다. 지멘."
눈길을 뽀드득뽀드득 밟으며 걷던 세레지 파림은 갑자기 뛰어올랐
다.
공중에서 몸을 한 바퀴 돌린 세레지는 맹렬한 뒤후려차기로 그곳에
서있던 나무를 걷어찼다. 이 경쾌한 일격에 나무는 비장해두었던 눈
을 듬뿍 뿌려주는 것으로 반격했다. 세레지의 상반신은 단숨에 눈사
람과의 근연관계를 주장할 수 있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세레지는 목
으로부터 풀죽은 소리를 내며 허리를 앞뒤로 크게 흔들었다. 열심히
인사하는 것 같은 동작으로 머리와 어깨에 쌓인 눈을 떨어뜨린 세레
지는 남은 눈을 손으로 털어내며 말했다.
"웃어요."
세레지의 말은 함께 걷고 있던 야리키를 향한 것이었다. 야리키는
고개를 갸웃했다.
"웃기려고 한 거냐?"
"그건 아니지만 이런 모습 보면 보통 웃거나 조롱하거나 하잖아요."
야리키는 그 말에 대해 잠깐 생각해보곤 반응을 결정했다. 그는 세
레지를 내버려둔 채 앞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세레지는 작게 으르
릉거리고는 재빨리 야리키의 뒤를 쫓았다. 다시 야리키의 옆으로 돌
아온 세레지는 잔뜩 화가 나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라수의 방이 맞는 모양이에요. 어디에도 두 사람의 흔적
이 없어요. 각하처럼 조그마한 사람이라면 혹 몰라도 무사장처럼 커
다란 사람이 눈에 뜨이지 않게 규리하성을 빠져나갈 수는 없어요. 두
사람은 틀림없이 라수의 방에 있을 거예요."
세레지는 어제부터 시작되어 조금 전에 끝난 규리하성 수색 결과를
그렇게 정리했다. 야리키는 그 말에 동의했다. 사실상 세레지와 함께
수색에 나서기 전부터 야리키는 그럴 거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라수
의 방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알지 못했기에 그쪽으로는 손을 쓸 수 없
었던 야리키는 답답한 마음에 세레지를 따라나선 것이다. 두 사람의
흔적을 찾아 규리하성의 출입구 전부와 성벽 바깥까지 샅샅이 뒤져본
수색은 무위로 돌아갔고 이제 그는 성안에서 라수의 방으로 들어갈
방도를 찾아낸 사라말 아이솔을 볼 수 있게 되기만을 바랐다. 세레지
는 걷어찰 만한 또다른 나무를 찾아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말이 안돼요. 라수의 방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나올 수도 있을 텐데 왜 아직까지도 나오지 않는 거죠? 그 안에 음식
물 잔뜩 싸들고 들어가서 농성이라도 하는 걸까요? 그렇다면 왜 농성
을? 알았다. 각하께서는 시집 가기 싫은 거예요. 황제의 청혼은 규리
하공이 사라진 후에 오지 않았느냐고요? 그건 문제가 안돼죠. 틀림없
이 그 신비한 기계새가 미래를 예언한 거예요.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뿐이죠. 제가 각하로 변장하고 칼리도백이 기다리는 신방에 들어가는
거예요……"
세레지가 고질병의 재발에 시달리고 있는 거라 판단한 야리키는 보
나마나 세레지 에더리 마케로우 황비의 파란만장한 일대기가 펼쳐질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어지는 세레지의 말은 그의 예상과 다른 것
이었다.
"그래야 백작님도 덜 놀라겠지요."
세레지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기로 마음먹고 있었지만 야리키는 그
말에 부리를 열 수밖에 없었다.
"더 놀란다고?"
"덜 놀라는 거죠."
"왜?"
"그야 제 옷 아래에는 여자의 몸뿐이니까."
야리키는 '그렇다면 정우의 옷 아래에는 남자의 몸이라도 있다는 거
냐?'고 되물으려다가 자신이 세레지의 병에 전염되었나 보다고 생각
했다. 부리 밖으로 나오려는 어처구니 없는 질문을 도로 삼킨 야리키
는 그것을 좀 더 상식적인 질문으로 바꿨다.
"그러면 정우의 옷 아래에는 뭐가 있는데?"
"아마 그래서 시집 가기 싫으신 걸 거예요. 그걸 보이기 싫어서."
"그게 뭔데?"
세레지의 얼굴을 본 야리키는 그녀가 대답하지 않을 것임을 알게 되
었다. 세레지는 아랫입술을 질겅질겅 씹으며 말없이 걸었다. 야리키
는 오른쪽 어깨에 걸치고 있던 낚시대를 왼쪽 어깨로 옮겼다. 질문을
반복하는 것은 그의 성격에 맞지 않았지만 야리키는 규리하공의 몸에
있을지도 모르는 문제에 대해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정우의 몸에 목숨에 관련된 큰 문제가 있나?"
"목숨? 글쎄요. 그건 아니에요."
야리키는 충분한 대답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부리를 닫았다.
그러자 세레지가 입을 열었다.
"안 궁금해요?"
"목숨과 관련 없는 문제라고 했잖아. 어디가 기형인지 모르지만
……"
"기형? 야리키. 당신이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진실은
그 이상이에요."
야리키는 툭 던지듯 말했다.
"그렇게 입이 간지러우면 말해. 이야기 하는 거 좋아하잖아. 비밀이
면 지켜주지."
세레지는 완강히 입을 닫고는 그것으로 부족하다는 듯 두 손으로 입
을 틀어막았다. 야리키는 벼슬을 꿈틀하고는 다시 걷는 것에 열중했
다. 세레지는 목으로 앓는 소리를 내며 그 뒤를 따라걸었다. 조금 후
어느 정도 진정하게 된 세레지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제가 이 정도나마 이야기한 것도 당신 입이 무겁기 때문이에요. 안
그러면 제가 미칠 것 같으니까. 야리키. 절대로……"
"알아."
"알아요?"
"정우에게 뭔가 이상한 것이 있다는 식의 암시는 아무한테도 하지
않는다."
"고마워요. 이건 정말 비밀이에요. 비밀? 이런, 젠장! 비밀은 무슨!
결혼하면 다 알게 될 텐데!"
세레지는 다시 도약했다. 이번 목표는 근처에 놓여있던 나무통이었
다. 세레지의 호된 발길질은 나무통을 날려버리는 대신 그것을 박살
냈다. 통 바닥이 땅에 단단히 얼어붙어 있었던 모양이다. 세레지는
발을 움켜쥔 채 통의 잔해 속을 깡총깡총 뛰었다. 그 모습을 보던 야
리키는 세레지의 걱정이 자신과 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레
지는 정우의 행방불명보다 그녀가 청혼을 받았다는 것에 더 신경 쓰
고 있었다. 그 이유는 틀림없이 세레지가 감히 말할 수 없는 정우의
몸에 있는 이상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바보가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야리키는 정말 정우가 남자의 몸이라도 가지고 있는 건가
의심했다.
발의 통증에서 회복된 세레지는 쩔뚝거리며 야리키의 곁으로 돌아왔
다. 그녀는 침울한 표정으로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는 눈주위를 세
게 문질렀다.
"불쌍하신 규리하공. 기계새의 예언을 듣고는 그만 어쩔 줄 모르게
되었을 거예요. 그래서 이 성에서 유일하게 혼자 있을 수 있는 라수
의 방으로 도망쳤겠지요. 무사장은 각하를 위로하러 그 안에 들어갔
을 테고……"
자신의 추리가 정확한 사실인 것처럼 중얼거리던 세레지가 갑자기
어조를 바꿔 말했다.
"저 사람, 시오크 지울비죠?"
야리키는 세레지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의 본관 계단에서 시오크가 걸어내려오고 있었다. 먼 여행을 떠나
는 차림새였다. 주위를 조금 둘러본 야리키는 역시 먼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된 말들과 병사들이 걸어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두 사람은 제자리에 서서 시오크가 말에 오르는 것을 보았다. 안장
에 오른 시오크는 본관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가까이 있던 규리
하 병사가 재촉한 후에야 시오크는 말을 출발시켰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규리하의 병사들이 움직였다. 그들이 성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보던 세레지는 설명하듯 말했다.
"당으로 돌아가는 모양이군요. 저 병사들은 유료도로가 있는 곳까지
바래다주러 가는 것일 테고. 저 사람도 참 불쌍해요. 당을 바꾸고 싶
어했는데 이제야말로 그럴 기회가 왔잖아요. 왕이 될 테니까. 그런데
그게 하나도 기쁘지 않을 거예요. 아버지도 위험하고 애인도 위험하
고."
야리키는 별 감흥을 못느꼈다. 그런 야리키를 보던 세레지는 짜증스
럽게 말했다.
"야리키. 당신이 하늘낚시터를 얻어도 그게 하나도 즐거운 일이 아
니라면 기분이 어떻겠어요?"
"즐거울 거야."
"안 그럴 수도 있잖아요."
"그럴 리 없어."
세레지는 세 번째 타격대상으로 레콘의 다리를 선택하면 어떨까 생
각했다. 그녀의 생각을 눈치챈 것은 아니지만 야리키는 세레지를 놔
둔 채 본관 계단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보던 세레지
는 머리를 가로젓고는 걸음을 옮겼다.
정우의 방에서는 아트밀이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레지와
야리키의 모습을 본 아트밀은 그들이 아무런 소득도 올리지 못했다는
것을 짐작했다. 아트밀은 몸을 돌려 방안을 보았다. 잠깐이지만 아트
밀은 꽤 놀랐다. 정우의 방으로 통하는 문 앞에 사라말이 드러누워
있었다. 아트밀은 사라말이 기절했다고 생각하고는 황급히 걸음을 옮
겼다.
그러나 사라말에게 다가가던 아트밀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사라말은 바닥에 누운 채 다리를 구부렸다 폈다 하며 자벌레처럼 기
어가고 있었다. 기가 막힌 아트밀은 걷는 속도를 늦추며 사라말의 행
동을 보다 자세하게 관찰했다. 사라말은 그가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발바닥을 문으로 향한 채 문으로 기어가고 있었다. 문에 도달한 사라
말은 발로 문을 밀었다.
문이 열리며 복도가 나타났다. 머리를 들어 문밖의 광경을 보던 사
라말은 담담히 몸을 일으켰다. 등과 엉덩이를 툭툭 터는 그를 보다가
아트밀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건 뭐였냐?"
"라수의 방으로 떨어지려고 해봤습니다."
혼란스러워 하던 아트밀은 문을 바닥으로 생각한 후에야 사라말의
말을 이해했다. 기발하다는 생각보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
이 먼저 들었다. 문을 닫는 사라말을 향해 아트밀은 단호하게 말했
다.
"너 좀 쉬어야 해. 미친 짓을 하는 걸 보니 상태가 안 좋아…… 뭐
냐?"
"짐작할 텐데요?"
"라수의 방으로 기어올라가려는 거야? 그만둬!"
하지만 사라말은 바닥에 엎드린 채 문으로 기어가는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 문에 도달한 사라말은 손으로 문을 밀었다. 조금 전의 제지
에도 불구하고 아트밀은 문 뒤에 뭐가 나타나는지 바라보았다. 나타
난 것은 복도였다. 사라말은 일어나서 가슴을 툭툭 털고는 문을 닫았
다.
"하긴 정우나 도깨비들이 이렇게 다녔을 것 같지는 않군요."
"그만두고 쉬어. 사라말!"
"정우가 라수의 방에 있다면 아직 나오지 않는다는 것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 자기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일 겁니다. 묶
여있거나 어쩌면 혼수상태일지도 모릅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아트밀은 같은 말을 몇 번씩 반복하지는 않았다. 그는 사라말에게
다가가며 의자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사라말 뒤편에 의자를 내려놓고
는 그를 툭 밀었다. 사라말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서는 아트밀을 빤
히 바라보았다.
"아트밀. 고맙지만……"
"시끄러워! 앉아서 쉬고 있어. 내가 해볼 테니까."
"당신이오?"
"그래. 젠장. 네가 하는 미친 짓들은 많이 봤으니 그거 빼놓고 다른
방법으로 해보지. 어디 보자. 빌어먹을. 문이야, 문. 이건 문이라고.
드나드는 거지 기어오르거나 떨어지는 것이 아니야."
사라말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고맙습니다만 저를 도와주고 싶다면 다른 문으로 가서 시도하시지
요. 어느 문이든 상관없을 테니까."
"사라말. 말 좀 들어."
"저를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화를 내려던 아트밀은 갑자기 부리를 닫았다. 아트밀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사라말을 노려보았다. 사라말은 그 눈을 피해 문을 바라보았
다.
아트밀이 말했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예."
"내가 정신억압 당했으니까?"
"……그렇게 말한 적 없습니다."
"그렇게 말한 거야. 네 말투는 그런 걱정은 잘못된 거라는 투였어.
그래. 내가 널 보호하도록 정신억압되어 있어서, 그래서 너를 말리는
거다, 이 말이지? 이건 가짜 걱정이라는 거지?"
변명은 악효과만 가져올 것이 뻔한 상황이었기에 사라말은 입을 닫
았다. 아트밀은 그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했다.
"사라말 아이솔을 따라다니며 보호하도록 정신억압되어 있다고 했
지. 그래서 얼음바다도 건넜고 시냇물도 건넜다고. 그래. 그거였군.
그래서 내가 네 미친 짓을 계속 보고 있었던 것이군.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문 여는 법만 연구하는 네 꼴이 불쌍해서 그런 것이 아
니라…… 그냥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다는 거지? 누가 내 정신을 비
틀어 놓아서? 젠장. 그 말이 맞아. 진작 깨달았어야 하는 건데."
"아트밀. 당신의 배려를 무시하는 듯이 말한 것 사과하겠습니다. 저
는……"
"부리 닫아."
부리가 아니라 입이었지만 사라말은 그것을 닫았다. 아트밀은 사라
말에게서 눈을 돌려 문을 열었다. 지극히 평범한 방법으로. 그러자
문이 열리며 복도가 나타났다. 아트밀은 밖으로 성큼 걸어나갔다. 그
리고 역시 평범한 방법으로 문을 닫았다.
방안에 홀로 남게 된 사라말은 뒤로 풀썩 주저앉았다. 아트밀이 놓
아준 의자에 앉은 사라말은 두 주먹으로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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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36. 가벼운 것과 가여운 것 (3)
| 2004·11·08 07:52 | HIT : 1,188 | VOTE : 0 |
제 목:피를 마시는 새 36-3 관련자료:없음 [49387]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11-08 06:50 조회:31
피를 마시는 새
36. 가벼운 것과 가여운 것 - 3
소리 로베자는 무거운 눈꺼풀을 몇 번 껌뻑였다. 하늘치 소리는 서
쪽을 향해 날고 있었지만 소리는 하늘치의 꼬리쪽을 향해 서있었다.
그 때문에 소리는 가장자리가 발갛게 변한 보랏빛 구름들 사이로 얼
굴을 반만 내민 해를 마주보고 있었다. 햇빛의 무게가 얼마인지는 모
르지만 그것이 눈꺼풀 위에 내려앉자 소리는 눈꺼풀이 더욱 무거워지
는 것을 느꼈다. 소리는 눈꺼풀에 묻은 햇살을 문질러 떼내듯 눈을
문질렀다.
그녀가 바라보는 곳에서는 지멘이 걷고 있었다. 지멘은 주위를 두리
번거리며 어떤 장소를 찾듯 움직이고 있었고 그 곁에는 아실이 무심
한 표정으로 나란히 걷고 있었다. 밤새 불침번을 섰던 그 레콘은 소
리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햇빛 잘 드는 곳을 찾아 뭘 먹은 다음 잠
들겠다고 말하고는 그들이 있던 우묵한 곳을 떠났다. 소리가 바라보
는 동안 두 사람은 적당한 장소를 찾은 것 같았다. 그들은 하늘치의
융기 너머로 모습을 감췄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잤지만 춥고 불편한 잠자리 때문에 소리는 휴
식을 취했다는 기분을 느낄 수 없었다. 몸은 얼기설기 엮어놓은 막치
라도 되는 것 같았고 파리떼가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머리는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소리는 되도록 빠르게 움직이지
않도록 주의하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 옷장 속에
잠들어 있었다.
하늘치의 등 위에 버린 쓰레기처럼 널려있는 옷장들을 보던 소리는
갑자기 당혹감 같은 것을 느꼈다. 일찍 일어났지만 할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하늘치 소리의 휑한 등에는 당연히 아침식사를 준비할 수 있
는 부뚜막이나 이이타 공자의 세숫물을 퍼올릴 우물 등은 없었다. 그
들이 지참한 먹거리는 모두 물이나 불 없이도 먹을 수 있는 것들이기
에 따로 준비할 일도 없었다. 아무런 할 일이 없다는 사실은 소리를
느긋하게 만들기보다는 안절부절못하게 만들었다. 소리는 자신을 끌
어안은 채 정처없이 눈길을 보냈다. 그 때 소리의 눈에 기이한 것이
들어왔다.
소리는 어리둥절해 하며 걸어갔다. 하늘치의 등에 밤새 반점이라도
생긴 걸까? 소리는 발을 멈추고 바닥에 있는 이상한 얼룩을 보았다.
곧 소리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깨달았다.
비바람을 제외하면 하늘치의 등을 청소하는 손길은 없었다. 하늘치
의 등에는 기나긴 시간 동안 먼지가 쌓여 굳어있었다. 그 먼지층에
누군가가 글을 써놓았다. 옆에서 비치는 햇살 때문에 그 글에는 짙은
명암차가 생겼고 그 때문에 소리가 그것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글자
들 옆에 있는 큼직한 자국을 본 소리는 그곳이 지멘의 배낭이 놓여있
던 곳이라고 생각했다. 글씨를 쓴 것은 아마도 아실일 것이다. 지멘
의 손가락으로는 그렇게 가느다란 글을 쓰기 어려울 테니까. 소리는
쭈그리고 앉아서 바닥에 있는 글자들을 바라보았다.
조금 후 소리는 흥미를 느꼈다. 오래된 먼지 위에 쓰여져 있는 그
글은 또박또박한 글씨로 곱게 쓰여져 있었다. 소리는 보존성이 없는
글을 그렇게 정성껏 쓴 것은 기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소리는 두
손으로 뺨을 받쳤다.
'내용을 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소리가 글씨부터 살핀 것은 글을 모르기 때문이다. 소리는 글씨를
이루는 선과 선이 꺾이고 만나고 구부러지는 모습을 살피다보면 갑자
기 그 뜻을 알 수 있게 될 거라 믿는 사람처럼 그 글을 바라보았다.
바람만 불면 사라질 글을 그렇게 정성껏 쓴 이유는 무엇일까. 원래
아실의 필체가 그렇기 때문일까? 소리는 그 이상한 글의 내용을 이리
저리 상상해보았다. 우리는 하늘치를 타고 여행 중이다. 규리하로 가
고 있다. 소리와 이이타 공자는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처럼 보인
다…… 소리가 히죽 웃었을 때 옆에서 갑자기 말소리가 들려왔다.
"소리, 왜?"
소리는 부끄러운 짓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서 옆을 돌
아보았다. 이이타 규리하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소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실과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왜? 누가 너에게……"
공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소리는 눈을 크게 뜬 채 이이타를 바
라보았다. 소리의 표정을 살피던 이이타는 문득 그녀가 문맹자라는
것을 떠올렸다. 이이타는 자신이 착각했음을 깨달았다.
"네가 쓴 것이 아니지? 미안해. 네가 이 글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
어서 난 네가 썼다고 생각했어."
"제가 안 썼어요. 그런데 왜 아실과 안 좋은 일이 있냐고 물으신 거
죠?"
이이타는 대답하려다가 갑자기 턱을 만지작거렸다.
"네가 안 썼다면 누가 쓴 거지?"
"아실이 잔 곳이 여기니까 아마 아실이 썼을 거예요."
그 대답은 이이타로 하여금 눈을 찌푸리게 했다. 이이타는 낮은 목
소리로 말했다.
"아실은 어디 있지?"
"황제 사냥꾼님과 함께 떠났어요. 그 레콘은 볕 좋은 데로 가서 한
숨 자겠다고 했어요. 공자님. 이 글이 뭐 잘못되었나요?"
이이타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소리를 바라보다
가 차분하게 말했다.
"지독한 욕설이야."
"욕설이오?"
"그래. 어떤 여자를 무시무시하게 저주하고 있어. 이렇게 험악한 이
야기는 처음 보는 것 같군. 이곳에 여자는 너와 아실뿐이라서 난 네
가 아실을 욕하고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렇게 물었고. 그런데
이 글을 쓴 것이 아실이라면 아실이 어떤 여자를 욕했다는 건데."
소리는 그 설명에 당황과 분노를 느꼈다. 이이타가 말한 것처럼 그
곳에 여자는 소리와 아실뿐이었다.
"아실이 저를 욕한 거라고요?"
"잠깐만 기다려봐. 좀 더 자세히 읽어보지."
소리는 재빨리 옆으로 비켜섰다. 이이타가 허리를 굽히고 글을 읽는
동안 소리는 분노가 점점 커지는 것을 느꼈다.
'아니꼽다는 거지? 천한 신분인 주제에 감히 무향의 공자님과 사귄
다는 거지? 그래서 나 보라고 이렇게 또박또박 써둔 거지?'
소리는 눈물이 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보라는 듯이 욕설을 써뒀는
데도 읽을 수 없어서 이이타에게 대신 읽어달라고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도 화가 났다. 그리고 이이타가 그 글을 읽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가슴 아팠다.
'네 인생이 다 망가진 것이 나 때문이야? 황제랑 싸우다가 그렇게
된 거잖아.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했어? 왜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
을…… 왜 공연한 사람을 이렇게 화나고 슬프게…… 너무해!'
"네가 아냐. 소리."
이이타가 허리를 펴며 말했을 때 소리는 그를 부여잡고는 천한 신분
이라서 미안하다고 외치며 울 뻔했다. 이이타를 향해 몸을 내밀던 소
리는 문득 이이타의 말을 이해했다.
소리는 안도감과 허탈감을 동시에 느꼈다. 아실이 황제를 욕했다면
그건 당연한 일이다. 고조되었던 분노가 사라지면서 감정의 혼란을
느낀 소리는 좀 기묘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황제요?"
"응. 이거 지독하군. 읽는 나까지 기분이 이상해지는데. 누가 나한
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아마 당장 칼을 뽑을 것 같아. 아실은 황제를
정말 증오하는군. 하긴 그러니 그 긴 세월 동안 지멘과 단 둘이서 황
제와 싸울 수 있었겠지. 어? 왜 그래?"
이이타는 소리에게 다가와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문득 소리
는 자신의 눈 주위가 축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리는 황급히 눈물
을 훔쳤다.
"아, 아뇨. 공자님."
"왜 우는 거야?"
"안심이 되어서…… 아실이 저를 욕한 줄 알았어요. 자기는 인생이
망가진 거나 다름없는데 저랑 공자님이랑 맺어진 것을 보니 질투 나
고 화가 나서, 어, 그래서 제가 얄미워서 저를 욕했다고…… 안심도
되고 아실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기분이 굉장히 이상해요."
이이타는 빙긋 웃고는 발을 옆으로 뻗었다. 그는 바닥에 있는 흉악
한 욕설들을 발로 문질러 지우고는 소리의 어깨를 감싸쥐었다. 위로
의 말은 없었지만 소리에겐 그 손길로 충분했다.
배낭에서 꺼낸 건량으로 아침 식사를 끝낸 지멘은 아침 햇살이 내리
쬐는 곳에 드러누웠다. 그의 허리 곁에 앉아 지멘에게 몸을 기대고
있던 아실은 식사하는 동안 들었던 말에 대해 생각했다.
"제이어 솔한이 정신억압을 당했다고요?" 아실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런데 자기가 그것을 알고 있으며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
다는 것이군요. 다른 말은 없었어요?"
그건 대답이 필요한 질문이었다. 지멘은 말했다.
"그 말뿐이었어."
아실은 두 손으로 뒤통수를 받쳤다. 지멘이 호흡할 때마다 그녀의
몸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러면 이젠 확실히 포기했겠군요. 지멘."
"포기?"
"황제를 죽이는 것 말이에요. 당신이 그러려 해도 그럴 수가 없어
요. 그녀에게 다가가면 정신억압을 당해서 못 죽이게 될 테니까."
지멘은 벼슬을 꿈틀했다. 그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가 밤새
도록 생각했던 것은 제이어의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었다.
하인샤 대사원의 일주문 앞에서 제이어는 자신이 황제의 적도 될 수
있고 동료도 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리고 어젯밤 제이어는
자신이 황제에게 정신억압을 당했음을 고백했다. 지멘은 정신적으로
지배받는 자가 어떻게 지배자의 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지멘은 과거 말리에서 있었던 황제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자신을 정
신억압했느냐는 지멘의 질문에 대해 황제는 이렇게 대답했다.
'짐은 그런 식으로 정신억압하지 않는다.'
지멘이 생각하는 방식과 다른 형태의 정신억압이 있다는 말투였다.
지멘은 제이어의 그토록 모순된 모습은 황제가 암시한 '다른 방식'의
결과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멘이 느끼기에 그 다른
방식이라는 것은 '정신억업하지 않음'과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지멘은 그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를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보다 현
실적인 문제도 많이 있었다.
"아이저에게 말해야 해."
"예?"
"황제에게 정신억압을 받고 있는 자가 이 하늘치에 타고 있다는 것
을 알려야 해. 이건 함정이야. 엘시에게 황위를 물려주기 전 황제가
마지막으로 노리는 대상이 바로 규리하야. 이미 지키멜 퍼스와 시오
크 지울비가 규리하로 갔지."
"부냐 헨로와 스카리 빌파."
"그래. 지금 아이저도 규리하로 향하고 있어. 이건 모든 문제를 규
리하에 모아서 한꺼번에 처리하려는 거야."
"그리고 당신도 규리하로 가고 있고요."
"맞아. 규리하 정벌이 끝난 다음에 나한테 가짜로 죽어서 신이 되어
야 하니까. 그게 황제의 계획이지. 제이어가 따라온 건 우리가 제대
로 규리하로 가는지 감시하려는 거야."
"알리지 말아요."
"황제를 도우라고?"
"알려도 소용이 없을 거예요. 규리하공은 규리하로 갈 수밖에 없어
요. 그러지 않으면 황제와 싸울 수 없으니까. 함정은 사실상 사냥감
에게도 기회에요. 사냥꾼은 사냥감이 다니는 길에 덫을 놓지요. 그런
데 거꾸로 사냥꾼을 공격하고 싶은 사냥감이라면 어디로 가야겠어요?
사냥꾼이 반드시 찾아오는 곳에서 기다려야겠지요. 바로 함정이죠.
이게 함정이라도 규리하공은 규리하로 갈 거예요."
아실의 말이 옳았다. 아이저 규리하는 규리하 외엔 돌아갈 곳이 없
다.
"그 모든 이야기를 꺼내면 규리하공은 오히려 당신을 의심하게 될
거예요. 황제의 계획에 따르면 당신도 황제를 돕게 되어 있잖아요.
칼리도백이 황위를 이어받을 수 있도록 황제를 위장살해하는 것이 당
신 역할이지요. 그런 상황에서 진짜로 황제를 죽일 거라고 말해봐야
설득력이 없을 거예요."
지멘은 촘촘한 거미줄에 붙잡힌 파리가 된 것 같았다. 모르고 들어
가는 덫이라면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덫이라는 것을 잘 알
면서도 그 안으로 걸어들어가야 하는 이 상황은 도대체 무엇인가. 지
멘은 신음을 내지 않기 위해 부리를 꽉 붙여야 했다.
지키멜 퍼스는 새카만 별들이 반짝이는 새하얀 밤하늘을 날았다. 시
작은 도통 끝나지 않았지만 끝은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 인지할 수
있는 모든 사물의 운동 방향은 그녀로부터 멀어지는 것이었다. 하지
만 그녀는 답답했다. 모든 것이 그녀에게서 멀어지고 있음에도 불구
하고 지키멜은 쥐어짜지는 압박감을 느꼈다. 지키멜은 떨어지는 천장
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지키멜은 겁에 질린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
지키멜은 눈을 깜빡였다. 천장이 있었다. 눈동자를 옆으로 굴리자
천장과 이어진 벽들도 보였다. 꾸물거리고 있는 것은 공기 속을 떠다
니는 먼지인지 그녀의 눈 속에서 떠다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냉
기 때문에 지키멜은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지키멜은 이불을 느꼈다.
지키멜은 침대에 누워있었다. 아마 잠에서 깬 모양이다.
입안이 견딜 수 없이 건조했다. 지키멜은 억지로 침을 삼켰다. 이
아침은 좀 기묘하다. 왜 이렇게…… 문득 지키멜은 그것이 매일 겪는
기상과 다른 무엇임을 깨달았다. 조각조각 부서진 기억들이 그녀에게
쇄도했다. 지키멜은 눈을 감고는 안간힘을 다해 뒤죽박죽이 된 기억
들을 정리했다. 하지만 누군가의 비명 같은 외침이 그녀를 방해했다.
"후작님! 깨어나셨군요!"
지키멜은 흠칫하며 눈을 떴다. 누군지 모를 여자가 겁을 주려는 것
같은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무 놀라서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그녀를 마주보던 지키멜은 갑자기 그녀가 반가운 표정을 짓
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여자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있는
것은 놀람 때문이다. 혈색이 좋아 보이는 여자는 어디에도 없는 신께
감사한다느니, 먹을 것을 가져오겠다느니 하는 말을 빠르게 쏟아내고
는 갑자기 사라졌다. 그녀의 목소리에 질려있던 지키멜은 그녀가 사
라진 것에 안도했다. 지키멜은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는 아마도 길지
않을 듯한 고요 속에서 재빨리 상황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차츰 기억
들이 연관성을 가지게 되었다. 혈색 좋은 여자 - 지키멜은 이제 그녀
가 규리하성의 하녀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 가 의사로 짐작되
는 사람과 함께 돌아왔을 때 지키멜은 정신을 잃기 전의 상황을 완전
히 떠올렸다. 그래서 지키멜은 의사가 도달하자마자 질문했다.
"내가 며칠만에 깨어난 거지?"
의사는 그 질문을 무시했다.
"자신이 누군지 말씀해보십시오. 각하."
지키멜은 그런 질문을 하는 의사를 이해했지만 그 질문에는 짜증을
느꼈다. 그녀는 메마른 입을 힘겹게 움직였다.
"나는 지키멜 퍼스다. 내가 제정신을 되찾았는지 확인할 질문들이
더 있다면 잊어버려. 나는 제정신이니까. 그러니 내 질문에 대답해.
내가 며칠만에 깨어난 거지?"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흘입니다. 후작님. 정말 위험하셨습니다."
지키멜은 바짝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사흘 동안 정신을 잃
었다면 정우와 탈해는 사흘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묶여있
었을 것이다. 그녀의 맥박을 재고 이마를 짚는 등 부산을 떠는 의사
에게 지키멜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변경백은? 변경백과 무사장은 어떻게 되었지?"
지키멜이 먹을 것을 가져오라고 지시하던 의사는 당황한 표정으로
지키멜을 돌아보았다.
"저, 두 분은 사라졌습니다. 저희들은 후작님께 두 분의 소재를 여
쭙고…… 그런데 지금 괜찮으십니까? 대화를 하실 수 있겠습니까?"
지키멜은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난 괜찮아."
그 말은 곧 거짓말이 되었다. 사흘 동안 혼절했던 사람답게 지키멜
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끼며 다시 쓰러졌다. 의사는 황급히 그
녀의 상태를 검사했다. 지키멜은 주먹을 꼭 움켜쥐어 손톱으로 손바
닥을 찔렀다. 잠들고 싶은 유혹이 너무도 강했지만 그럴 수는 없다.
두 사람이 굶어죽을지도 모르니까. 지키멜은 되도록 정확히 발음하려
애쓰며 말했다.
"조금 어지러운 것 뿐이야. 난 괜찮아."
두 사람의 실종과 자신의 음독을 어떻게 설명하려고 했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지키멜은 머릿속으로 이야기를 짜내며 동시에 말했
다.
"침입자들이 있었어…… 자객처럼 보이는 자들. 얼굴은 기억이 안
나…… 복면으로 가렸던가? 그 놈들이…… 나를 인질로 삼아서……
아니, 길잡이야. 인질이면서 길잡이야. 무사장에게 안내하도록 했어.
그 놈들은 규리하공이 어디 있는지 알지만…… 무사장은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것 같았어. 그래. 그래서 나를 데려갔던 거야. 무사장의 방
앞에서…… 그 놈들이 내게 뭘…… 약 같은 것을 먹였어."
지키멜은 안도했다. 급조한 것치곤 앞뒤가 그럭저럭 맞는 설명이었
다. 어쩌면 무의식 중에 남아있던 이야기가 떠오른 것일지도 모른다.
지키멜은 눈을 떠 의사의 반응을 살폈다. 의사는 상당한 집중력으로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지키멜은 마른 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무사장은 어떻게 되었지? 규리하공은? 사라졌다고?"
"아, 예. 사라지셨습니다. 그리고 아직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후
작님의 말씀대로라면 두 분은…… 아니, 이건 군인들이 신경 쓸 일이
겠지요. 제가 할 일은 후작님의 회복을 돕는 것일 테고요. 혹시 드셨
던 약의 냄새나 색깔, 맛 같은 것이 기억나십니까?"
의사의 치료를 돕기 위해선 약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것이 좋겠지
만 지키멜은 억지로 먹은 약에 대해 지나치게 잘 기억하고 있다는 인
상을 주게 될까봐 두려웠다. 그래서 그녀는 약에 대해서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얼버무렸다. 의사는 애석해하다가 의식을 회복했으니
더 위험하지는 않을 거라고 말했다.
조금 후 소식을 들은 자들이 몰려왔다. 오니샤 퓨덴 병무대부와 경
비대장, 그리고 그 외 온갖 사람들이 지키멜을 닦달했다. 그들은 형
식적으로 의식을 되찾은 것을 축하한다고 말했지만 자신들이 지키멜
의 안위보다는 규리하공과 무사장의 소재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숨기지도 않았다. 침입자에 대한 끝없는 추궁과 질문을 피하
기 위해 지키멜은 신음을 토하고 몸을 뒤틀어 의사의 사명감을 자극
했다. 의사는 자신의 첫 번째 소임이 환자를 돕는 것이며 지키멜의
도움을 받으려면 그녀가 빨리 회복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하며 그들
모두를 쫓아냈다. 이윽고 음식이 왔다.
"조용히 혼자 먹고 싶어. 시중 들 사람은 필요없어. 사람들을 더 견
딜 수 없을 것 같으니까."
"하지만 후작님."
"제발 나가줘. 사람 냄새만 맡아도 비위가 뒤틀리는 것 같아."
지키멜은 발광이라도 할 듯한 태도로 그들을 쫓아냈다. 방안에 홀로
남은 지키멜은 심호흡을 하고는 조심스럽게 침대 밖으로 발을 뻗었
다.
눈앞에 벼락이 치는 것 같았다. 지키멜은 침대 옆에 주저앉았다. 한
참 동안 자신을 다그친 후에야 지키멜은 겨우 일어났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독려해가며 탁자로 다가간 지키멜은 힘겹게 초에 불을 붙였
다. 한 손으로 촛대를 든 지키멜은 다른 손으로 가까이 있는 가구들
을 짚으며 문쪽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기 전 지키멜은 고민에 빠졌다. '이런 상태에서 내가 정우와
탈해를 통제할 수 있을까?' 하지만 두 사람도 사흘 동안 묶여있었을
테니 팔팔한 상태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더 지체하다간 두 사람이
죽을지도 모른다. 지키멜은 그 시각 성의 다른쪽에서 사라말 아이솔
이 알아내기 위해 무진 애를 쓰는 방법을 통해 문을 열었다.
라수의 방이 나타났다. 지키멜은 무의식적으로 코를 벌름거렸다. 시
체 썩는 냄새가 나지는 않았다. 그녀는 방 안쪽으로 걸어들어갔다.
촛불빛 속에서 라수의 방을 채우고 있는 골동품들이 떠올랐다. 지키
멜은 촛대를 머리 높이까지 들어올렸다. 곧 방 저편에 있는 두 사람
의 모습이 보였다. 지키멜이 묶어둔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의자에 묶
인 채 서로 등을 마주대고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머리를 떨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촛불빛을 보았다면 뭔가 반응을 보여야 할 것이
다. 지키멜은 몸이 싸늘해지는 불안감을 느꼈다. 벌써 죽은 걸까? 그
녀는 당장 쓰러질 듯한 불안한 걸음으로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지키멜은 정우의 앞쪽에 섰다. 정우는 턱을 가슴에 묻고 있었다. 지
키멜은 촛대를 옆에 내려놓고는 그녀의 코 앞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
때 갑자기 정우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날개. 그래. 날개가 좋아."
지키멜은 기절할 뻔했다. 수사적인 표현이 아닌 사실 그대로. 잠깐
동안 선 채로 의식을 잃었던 지키멜은 쓰러지기 직전에 의식을 회복
했다. 그녀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정우의 얼
굴을 보다 자세히 관찰했다.
정우는 잠들어 있었다. 조금 전 지키멜을 기겁하게 한 것은 잠꼬대
였다. 지키멜은 무릎 걸음으로 움직여 탈해쪽으로 돌아갔다. 탈해 역
시 머리를 떨군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배고픔을 잊기 위해 두 사람
은 잠이 든 모양이다. 잠에 관해서라면 도깨비들은 모두 전문가다.
지키멜은 촛대를 내려놓고는 다시 밖으로 나와 음식이 놓인 쟁반을
들고 돌아왔다. 깨어난 정우가 들려준 설명은 지키멜의 예상과 일치
했다. 지키멜은 정우가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한 손만 풀어주었다. 정
우는 그 손으로 힘들게 음식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중간중간에 몇 시간씩 깨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잤어요. 사흘이라고
요? 그렇게 오래되었을 줄은 몰랐어요."
"춥고 자세도 불편했을 텐데 참 대단하군요. 도깨비들이 잠 잘 자는
것을 존경할 만한 일로 여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혹시 자는
것을 따로 연습하기도 하는 거예요?"
입에 음식이 든 정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키멜은 그녀를 만류하
기로 했다.
"미안하지만 많이 먹지는 말아요. 계속 묶여 있어야 하는데 볼일이
급해지면 곤란하니까."
정우는 자유로운 손으로 입 주위를 대강 훔치고는 지키멜을 빤히 바
라보았다. 그 시선에 불편함을 느낀 지키멜은 쟁반을 들고 탈해에게
돌아갔다. 그녀가 잠든 탈해를 깨우려 할 때 정우가 말했다.
"지키멜. 아무 짓도 안 하고 얌전히 있을 테니 풀어달라고 말하면
들어주실 건가요?"
"……내가 왜 그 약속을 믿어야 하지요?"
"약속이니까요."
"미안해요. 정우. 나는 도깨비가 아니에요. 그리고 그건 당신도 마
찬가지죠."
"인질이나 약점, 담보물 같은 것이 필요한 것이겠죠?"
"그런 것이 필요해요."
"당신이 그래야 편하겠다면 그런 걸 주고 싶어요. 하지만 뭘 주어야
할지 모르겠네요."
지키멜은 입을 닫고 탈해를 깨웠다. 탈해의 팔을 풀어 식사할 수 있
도록 해준 지키멜은 정우에게 돌아와 그녀의 팔을 묶었다. 정우는 반
항하지 않았다. 하지만 손에 힘이 없었던 지키멜은 정우를 도로 묶느
라 기진맥진해야 했다.
"지키멜. 너무 안 좋아 보여요."
"당신은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군요. 아무리 계속 잤다지만 사흘 동
안 굶은 사람 같지 않아요. 무사장님도 그렇고."
"우리를 여기 붙잡아두고 뭘 어떻게 할 생각이죠?"
지키멜은 정확히 무엇인지 모를 물건에 걸터앉았다. 아직은 계획을
알려줄 때가 아니었다. 그녀가 침묵하자 정우 또한 입을 다물었다.
지키멜은 정우와 마찬가지로 탈해 또한 아사하지 않을 정도만 먹게
한 다음 그의 식사를 중단시켰다.
"내가 깨어났으니 이젠 자주 올 수 있을 거예요. 밤에 다시 돌아오
지요."
지키멜은 촛대를 쟁반 위에 놓고 힘겹게 그것을 들어올렸다. 밖으로
나가는 짧은 길이 들어올 때보다 훨씬 길어진 것 같았다. 그녀가 문
에 도달했을 때 정우가 말했다.
"지키멜, 몸조심해요."
지키멜은 잠깐 멈춰섰다가 다시 밖으로 나갔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
와 쟁반을 탁자에 내려놓았을 때 지키멜은 자신이 정신을 잃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무의식 상태에서 움직이던 지키멜은 자신이 제발 잠
자리에 제대로 들어와 있길 바라며 잠들었다.
깊은 밤, 규리하성의 대부분 구역은 불이 꺼져 있었다. 밤늦게까지
불이 밝혀진 몇 군데에서는 규리하가 직면하고 있는 복잡한 문제를
보다 단순한 것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문제 해
결이 아니라 단순화라는 것은 규리하의 상황이 얼마나 복잡한 것인
지,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의기소침해있는지에 대한 증거가 될 것이
다. 그런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사람들 중 한 명이었던 세레지는 기
나긴 정신노동 끝에 바깥 공기에 대한 그리움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주저없이 외투를 꺼내어 어깨에 걸치고는 밖으로 나왔다.
설핏 부풀어오른 달이 파르스름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별다른 목적
없이 정원과 연병장, 계단과 축대를 거닐던 세레지는 우연히 바라본
성벽 위에서 거대한 형체를 발견했다. 세레지는 멈춰서서 그 모습을
보다가 성벽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찾았다. 가장 가까운 계단으로 걸
어간 세레지는 그대로 주랑 위까지 걸어올라갔다.
경비를 서고 있던 병사들이 다가왔다가 세레지임을 확인하고는 물러
갔다. 세레지는 주랑 저편에 있는 커다란 형체 쪽으로 다가갔다. 대
화가 가능해지는 거리에 도달하자 세레지는 곧장 말했다.
"밤낚시?"
야리키는 성 안쪽을 향해 흉벽에 걸터앉아있는 자세를 바꾸지 않았
고 세레지에게 대답하지도 않았다. 세레지는 그의 곁에 섰다. 야리키
는 성 안쪽을 향해 자신의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하지만 줄은
풀지 않았다. 세레지는 성 안쪽을 순찰하던 경비병의 머리를 때리게
될까봐 줄을 감아둔 거라고 판단했다.
"당신에게 전할 기쁜 소식이 있어요."
그런 말이 보통 받게 되는 관심을, 세레지는 받지 못했다. 야리키는
세레지가 또 이야기를 지어내기 시작한 거라 믿었다. 세레지는 볼을
조금 부풀렸다가 되도록 담담하게 말했다.
"아까 저녁 무렵에 온 딱정벌레는 하인샤 대사원에서 온 거였어요.
아이저 규리하가 온대요. 그는 하늘치를 다룰 수 있게 되었어요."
야리키는 벼슬을 꿈틀했다. 그제서야 세레지에게 얼굴을 돌린 야리
키는 둔하게 말했다.
"성공했군."
"하늘낚시터를 만들어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 늘어난 거죠.
어때요?"
"아냐."
"아니에요?"
"나는 정우에게 걸었다."
세레지는 자신의 코에서 새어나오는 하얀 김을 바라보았다. 사실상
야리키가 아이저의 호의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이이타 규리하의 습
격 당시 야리키는 지금 생각해도 오싹해지는 무시무시한 방식으로 그
들을 물리쳤다. 야리키가 정우에게 희망을 품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
만 세레지는 정우에게 걸었다는 그 말에서 어떤 각별함이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희망일지도 모르지만.
"규리하공은 아직도 못돌아왔어요. 도대체 비나간후가 말하는 그 침
입자들은 어떻게 성으로 들어왔다가 나간 거죠? 이해할 수가 없어요.
아무도 그런 침입자를 보지 못했어요. 어쩌면 그 침입자들은 성 안의
배반자들일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아무리 조사해봐도 혐의를 둘 만한
사람이 없어요."
"돌아올 거다."
"그랬으면 정말 좋겠지만…… 돌아오실 거라면 빨리 돌아와야 해요.
황제가 며느리감 만나겠다고 오고 있다는 것만 해도 머리가 아픈 노
릇인데 이젠 아이저 규리하까지 오고 있어요. 여기 바깥은 고요해서
알 수 없겠지만 지금 저 안쪽은 벌집 쑤셔 놓은 것 같아요. 자칫하면
규리하의 하늘에서 황제와 전 변경백이 맞닥뜨리게 될지도 몰라요.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어요?"
"둘이 동시에 도착하나?"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전 변경백이 손에 넣은 하늘치는 아무런 부
대 시설이 없는 야생 하늘치니까 빨리 오기는 어려울 거예요."
"아무런 시설이 없으면 더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면 위에 있는 사람들이 죽어요."
"아아."
"자주 하늘치를 멈춰세우고 아래로 내려와서 보급을 해결해야 할 거
예요. 그러니 빨리 오기는 어렵겠지요. 아무래도 황제가 먼저 도착할
것 같아요. 지금까지 결정된 것은 황제가 먼저 도착하면 아이저 규리
하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황제에게 대응책을 요청하자는 것이에
요. 하지만 그러면 규리하는 아무런 주도권을 가질 수 없어요. 최악
의 경우 황제가 아이저 규리하에게 규리하를 다시 넘겨줄 수도 있어
요. 싸움을 일으키기도 싫고 규리하의 현지배자도 없어졌으니 일을
그렇게 처리할 수도 있지요. 그렇게 되면 우린 정말 골치아파지는 거
죠. 우리는 아무래도 아이저파가 아니라 정우파니까."
"아이저 규리하가 황제의 그런 주선을 받아들일까."
"모르겠어요. 규리하를 되찾는 것이 복수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다면 그럴 수도 있지요. 어떤 사람들은 그걸 은근히 바라는 것 같아
요. 만약 일이 그렇게 되면 당신은 어떻게 할 거죠?"
야리키는 규리하성의 본관을 바라보았다. 이 늦은 밤에도 불을 밝혀
둔 곳 중 하나는 정우의 방이었다. 그곳에서는 사라말이 라수의 방으
로 통하는 길을 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나는 정우에게 걸었어."
"만약 규리하가 다시 아이저에게 넘어가면 당신 여기서 못 버텨요.
당장 도망쳐야 하지요."
"너 도망치는 거 도와주길 바라는 거냐?"
세레지는 움찔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상체를 똑바로 세우며 말했
다.
"저와 아버지요."
"난 정우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 있을 거다."
세레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알았어요. 나도 도망치는 건 싫어요. 일이 꼭 그렇게 풀려
갈 것 같지도 않고. 하지만 아버지 때문에 여러 가지 생각해둬야
……"
"내가 어떻게 네가 하려는 말을 짐작했겠냐."
세레지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야리키는 어둠 속에 드리운 자신의
낚싯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도 당신한테……?"
"딸 때문에 여러 가지 생각해둬야겠다고 말하더군."
세레지는 웃음을 터뜨렸다. 꽤 명랑한 웃음이었지만 마냥 유쾌한 웃
음은 아니었다.
"알았어요. 우리 아버지는 당신하고 헤어질 때 뭐라고 말씀하셨지
요?"
"생각 바뀌면 말해달라더군."
"제가 하고 싶은 말이네요. 저도 그걸로 작별 인사 삼지요. 그럼 잘
자요!"
"잘 자."
잠에서 깬 사라말 아이솔은 자신에 대한 의문에 빠졌다. 그는 자신
이 어디에, 그리고 어떻게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머리를 이리저리 돌려 주위를 살핀 후에야 사라말은 자신의 현재 상
태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 의자는 앞쪽의
다리들을 허공에 띄우고 등받이는 벽에 기댄 비스듬한 모습으로 놓여
있었고 그 때문에 사라말의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비스듬하게
보였다. 사라말은 자신이 왜 그런 기묘한 자세로 잠든 것인지 추리해
보았다. 하지만 잠든 시점이 정확히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도 잠깐
휴식을 취하기 위해 그렇게 앉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잠들었던 모양이
다. 사라말은 그 불안한 수면 자세에서도 의자가 미끄러지거나 자신
이 굴러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보다 다
른 걱정이 머리를 꽉 채웠기 때문이다.
몸을 살짝 흔들어 의자를 똑바로 세운 사라말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낮이었다. 그의 계산이 맞다면 정우와 탈해가 사라진 후 열이틀째 되
는 날이었다. 사라말은 팔꿈치로 무릎을 짚은 채 머리를 떨구었다.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정우와 탈해가 라수의 방에 있지 않기를 바라
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아직도 그 방 안에 있다면 이미 굶어죽었을
테니까. 그 때문에 사람들은 라수의 방으로 들어가려는 사라말의 계
속된 시도를 무시하거나 심지어 그에 대해 화를 내었다. 하지만 사라
말은 포기할 수 없었다.
'어르신이 나타나지 않았다. 탈해 머리돌이 사망했다면 그는 어르신
이 되었을 테고 즈믄누리로 돌아가기 전에 짤막한 말 정도는 남겼을
것이다. 탈해 머리돌은 아직까지 무사하다. 그렇다면 정우도 무사히
있을 가능성이 높다. 세레지가 그토록 고생했지만 바깥에서는 두 사
람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딱정벌레 번뜩이도 여전히 규리하성에
있고. 두 사람은 라수의 방에 있다.'
하지만 열이틀 동안 온갖 해괴한 문열기를 시도해본 끝에 사라말은
더이상 아무런 발상도 할 수 없었다. 사라말은 무뚝뚝한 눈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사라말에게 끊임없이 시험당한 그 문은 경첩이 느슨해져
서 잘 닫히지도 않았다.
아직까지 시도해보지 않은 새로운 문열기를 떠올리려 애쓰던 사라말
의 귀에 소음이 들려왔다.
사라말은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밖을 내다본 사라말은
많은 사람들이 바깥에 서있는 것을 발견했다. 눈을 찡그린 채 그들이
나와있는 이유를 추측해본 사라말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재빨리
시선을 위로 올렸다.
하늘 저편에는 사라말이 예상했던 것이 있었다. 하늘치가 규리하성
을 향해 똑바로 날아오고 있었다.
파라말 아이솔은 황제를 환영하기 위해 규리하의 고관들과 함께 바
깥에 서있었다. 환영식은 그렇게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황제는 지상
으로 내려오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기에 그들이 황제를 직접 맞이할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황제의 대리인이 지상으로 내려와 황제가
왔음을 알리고 규리하의 대표가 황제를 환영한다는 말을 하는 것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환영식장에 모여있는 자들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많지 않은 자들은 한결같이 불행한 얼굴을 하고
잇었다. 자신들의 지배자가 없는 상황에서 황제를 맞이해야 하면 누
구나 자신이 불행해진 듯한 기분을 느끼겠지만 규리하 사람들의 불행
은 그 이상이었다. 그들의 지배자는 황제로부터 청혼을 받았다. 황제
는 규리하공의 실종을 불쾌하게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파라말은 체념한 표정으로 서있는 총리대부 리시오 느베라이를 보았
다. 그는 규리하공의 대행자이고 이 환영식의 주체지만 리시오는 이
자리를 자신의 은퇴식장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황제의 대리
인이 내려오면 그는 유려한 환영사를 말하는 대신 주군을 제대로 모
시지 못한 죄를 인정하고 벌을 요청할 것이다.
파라말은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아직 은퇴를 생각할 나이는
아니니 다시 제국 정부로 돌아가 제국을 위해 일하게 될 것이다. 비
록 황제의 실종으로 제국에 크나큰 위기가 있었지만 황제는 다시 돌
아왔고 혼란을 틈타 할거했던 야심가들도 모두 패퇴되었다. 그 동안
일어났던 혼란을 전부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만들 수는 없을 테지
만 웃으면서 그 혼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는 만들 수 있
을 것이다. 파라말은 자신의 실질적인 직속상관이라 할 수 있는 데라
시를 생각했다. 황제가 돌아왔다면 비스그라쥬백 또한 돌아왔을 것이
다. 다시 그를 보좌하며 제국을……
파라말은 입을 벌렸다.
속도를 점점 줄이며 규리하성을 향해 다가오는 하늘치는 하늘누리가
아니었다. 위쪽의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보안판을 수납하는 장치들
의 형태가 달랐고 나루터가 너무 짧았다. 파라말은 발케네에서 일어
났던 폭주와 빙해에 충돌한 것 때문에 일어난 변화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그의 직감은 그것이 하늘누리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
었다. 그 위에서 무수히 많은 나날을 보낸 파라말이었다. 그것은 결
코 하늘누리가 아니다. 파라말은 문득 소름끼치는 생각을 떠올렸다.
'아이저 규리하의 하늘치인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아이저 규리하라면 하늘치에 보안판을 장
착하고 나루터를 만드는 일 따위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것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제국, 그러니까 황제뿐이다. 그것은 분명히 황제
의 하늘치였다. 하지만 하늘누리는 아니다.
갑자기 들려온 굉음에 파라말의 상념이 멈췄다.
사람들은 당혹하여 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성의 본관 모퉁
이에서 한 명의 레콘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아트밀이었다. 아트밀
은 한 손에 기름통과 철극을, 그리고 다른 손에는 방금 뽑아낸 듯한
8미터짜리 소나무를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놀라게
했던 굉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아트밀은 사람들을 향해 주저없이 걸어왔다. 사람들은 황급히 좌우
로 물러나 길을 열어주었다. 사람들 사이를 성큼성큼 걸어가는 아트
밀과 그의 어깨에 걸쳐져 있는 소나무를 보며 파라말은 저것이 레콘
식의 화환일까 하는 황당한 생각을 해보았다. 도대체 왜 소나무를 뽑
아들고 온 거지?
아트밀은 성벽 위로 걸어올라갔다. 주랑 위에 도달한 아트밀은 하늘
치를 흘깃 올려다고는 소나무를 주랑에 내려놓았다. 아트밀은 기름통
윗부분을 주먹으로 때려부수고는 소나무의 수관 부분에 기름을 뿌렸
다. 그 모습을 보던 파라말은 갑자기 심장이 오그라드는 기분을 느꼈
다.
아트밀은 점화통을 꺼내어 수관에 불을 붙였다.
기름을 부어놓은 소나무의 수관은 당장 화르르 타올랐다. 아트밀은
점화통을 집어던지고는 불타는 소나무의 줄기 아랫부분을 붙잡았다.
그는 불티를 흩날리며 소나무를 집어들었다.
아트밀은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누리가 아닌 하늘치는 멈춰 있었다.
아트밀은 뿌리를 쥔 오른팔을 뒤로 끌어당기며 줄기를 부여잡은 왼
팔은 위로 높이 들어올렸다. 소나무는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연기와
새빨간 불티를 깃발처럼 흩날리며 위로 솟아올랐다. 소나무가 수직에
접근함에 따라 아트밀의 오른팔이 부풀었다. 긴장한 근육 때문에 깃
털이 곤두서 아트밀의 오른팔은 왼팔보다 두 배는 더 굵어진 것처럼
보였다. 나무에서 떨어진 불티들이 아트밀의 깃털을 불살랐고 그 때
문에 아트밀의 몸 여기저기서도 연기 줄기가 가느다랗게 피어올랐다.
사람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황 자체
를 이해할 수 없었고 따라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뭔가가 완전히 꼬여버렸다는 느낌, 멈출
수 없는 비탈길에 접어들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트밀은 규리하성
전체가 토해놓는 듯한 비명과 절규를 무시했다.
그는 도저히 말이라고 할 수 없는 소리를 내지르며 소나무를 집어던
졌다.
거꾸로 떨어지는 유성처럼 불타는 소나무가 솟아올랐다.
사람들이 처음 느낀 감정은 공포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 도발적인
시위에 대한 우려를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말리는 사람이 던진 물
건이 도저히 닿을 수 없는 높이에 있었고 따라서 아트밀의 행동은 공
격이라기보다는 시위다. 사람들은 곧 불타는 소나무가 포물선을 그리
며 떨어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소나무는 마치 무엇인가가 위에서 세차게 잡아당기는 것처럼
굽힘 없이 날아올랐다. 그 나무에 얼마만한 힘이 실렸는지 어렴풋이
짐작하게 된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소나무는 똑바로, 똑바로
날며 점점 작아졌다. 그것은 곧 하늘치의 거체가 던지는 그림자 속에
서 까불거리는 광점이 되었다. 이른 저녁에 너무 빨리 나타난 반딧불
이 한 마리. 혹은 모래알 위에서 반짝이는 햇빛. 한없이 움츠러든 빛
은 마침내 사라졌다. 그리고……
하늘치의 배, 그 광활한 어둠의 한 부분에서 갑자기 작은 폭발이 나
타났다.
폭발이 일어난 지점에서 불티들이 떨어져 내렸다. 대부분의 불티들
은 낙하하면서 사라졌지만 그 중 거대한 것들은 바라보는 자들의 망
막에 광선으로 맺히는 선을 그리며 아래로 떨어졌다. 마치 하늘치가
빛나는 피를 흘리는 것 같았다.
바람에 따라 구불구불하게 떨어지는 광선 사이에서 소나무가 떨어졌
다. 하늘치와 충돌할 때 많은 가지와 뿌리들을 잃은 소나무는 화염에
휩싸인 통나무 같은 모습으로 낙하했다. 규리하성 근처의 황야에 충
돌한 그것은 팽그르르 돌며 위로 뛰어올라 다시 불티를 흩뿌렸다. 몇
번을 그렇게 되튀어오르던 소나무는 마침내 땅에 쓰러져 검게 사그라
들었다.
소리의 부재로 나타나는 침묵이 아니라 소리를 다 죽여버린 것 같은
침묵이 규리하성을 점령했다. 정적 속에서 갑자기 무엇인가가 움직였
다. 사람들은 느리게 그곳을 돌아보았다.
철극을 꼬나쥔 아트밀이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발 아래엔 아
무 것도 없었고 그 진행 방향도 수평이 아니었다. 아트밀은 말리로
이어지는 사면을 따라 달리고 있었다.
아트밀이 규리하성과 하늘치 사이의 중간 쯤 되는 지점에 도달했을
때, 불타는 나무의 일격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말리에서
갑자기 반응이 나타났다. 말리를 쏘아보고 있던 아트밀은 거목이 쓰
러진 숲에서 일제히 날아오르는 거대한 새떼를 떠올렸다. 하늘치의
옆에서 갑자기 출현한 검은 점들의 모습은 꼭 그와 같았다.
폭포의 수많은 물방울처럼 하늘에서 오천 명의 나가들이 뛰어내렸
다.
아무런 함성도, 고함도 지르지 않는 그 조용한 무리들은 보이지 않
는 사면을 따라 아래로 급격하게 쇄도했다. 아트밀은 철극을 뒤로 잡
아당겼다. 그 기묘한 정적 속에서 누군가의 절규가 들려왔다.
"아트밀!"
사람들은 그것이 규리하성의 본관쪽에서 들려온다고 생각했다. 고개
를 돌린 몇몇 사람들은 정우의 방에서 몸을 내민 채 하늘을 향해 손
을 휘두르는 사라말 아이솔의 모습을 목격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
람들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기우는 햇빛에 비늘을 반짝이는 나가
들과 깃털을 빳빳하게 세운 채 달려올라가는 아트밀 모두 놀랄 정도
로 빠른 속도로 움직였지만 바라보는 자들의 눈에 그 광경은 멈춘 그
림 같았다. 다시 한 번 사라말의 갈라지는 비명이 들려왔을 때 길 잃
은 천둥 같은 아트밀의 계명성이 들려왔다.
"나-는-내-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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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밤 되세요.
피를 마시는 새 36. 가벼운 것과 가여운 것 (4)
| 2004·11·09 08:10 | HIT : 1,600 | VOTE : 0 |
제 목:피를 마시는 새 36-4 관련자료:없음 [49388]
보낸이:이영도 (jin46 ) 2004-11-09 06:35 조회:61
피를 마시는 새
36. 가벼운 것과 가여운 것 - 4
대략 한 시간 전부터 독행왕 지키멜 퍼스는 창가의 어둑한 자리에서
하늘치의 접근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거워지는 공포와 고조되는 희망
사이에서 부침하며.
지키멜의 목적은 정우의 부재 기간 동안 규리하와 황제 사이에 회복
불가능한 반목을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키멜이 그 세부 계획의
담당자로 선택한 것은 그녀 자신이 아니었다. 퍽이나 역설적인 사실
이지만 그 시점에서 지키멜이 가장 신뢰하고 있었던 사람은 바로 치
천제였다. 지키멜은 황제가 기필코 규리하를 공격할 것이라고 믿었
다. 그 믿음이 지극히 확고했기에 지키멜은 정우가 엘시로부터 청혼
을 받았다는 소식에 당황하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규리하에 오기 위
한, 그리고 기습을 성공시키기 위한 핑계일 뿐이다. 지키멜은 그토록
분명한 사실을 왜 규리하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지 이상하게 여겼
다.
황제의 도착 시점에 어떤 사고가 일어날 것이다. 보는 사람 모두가
단번에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하면서도 직접적인 형태로 황
제와 규리하 사이에 갈등이 출현할 것이다. 만약 어떤 사고도 일어나
지 않는다면 그것은 지키멜의 추리에 대한 결정적 반증이 되겠지만
지키멜은 그 경우에 대해서는 생각하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분명히 일어나리라 확신했던 일이 일어났지만 그 형태는 기대하고
있던 지키멜도 놀라게 만들었다. 아트밀이 불타는 소나무를 들어올릴
땐 지키멜도 다른 규리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눈을 믿을 수 없
었다. 그것은 염치없다 할 만큼 직설적이고 단순한, 도저히 변명이나
다른 해석이 불가능한 적대적 상징이었다. 그러면서도 황제 자신에겐
아무 피해가 없는 공격이었다. 지키멜은 규리하 사람이 된 듯한 공포
와 황제가 느낄 법한 만족감을 동시에 느끼며 창틀을 부여잡았다.
"그래, 이거였군!"
레콘 아트밀이 바로 황제가 준비해둔 미끼였다.
황제는 이 적대 행위에 '당연한' 분노를 표시할 수 있고 또한 그렇
게 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져내려오는 나가들의 모습은 모
든 것이 예정된 일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황제가 준비한 다음 단
계는 나가들에 의한 규리하성 함락일 것이다. 성채매장자의 성이 황
제의 분노 앞에서 매장될 것이다……
그 시점에서 지키멜은 그녀 자신의 만족을 느꼈다. 지키멜은 취한
사람처럼 뒤로 물러나 가장 가까운 문으로 달려갔다.
그 계획의 결정적 변수를 목격할 시간이야, 황제!
지키멜은 라수의 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쏟아져내려오는 나가들을 향해 달리며 아트밀은 몸 속의 혈관들이
꿈틀거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정신억압은 나가의 능력이다. 하늘치 위에 있는 어떤 나가가 그를
정신억압했을 거라는 것은 의심할 필요도 없는 일이고 따라서 아트밀
은 하늘치 위의 나가를 다 죽일 작정이었다. 그것이 세 번째 벽난로
방의 어떤 나가든, 비스그라쥬백 데라시든, 혹은 치천제든. 비늘 덮
인 것을 모조리 제거하면 정신억압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단순한
논리 앞에서 상대방의 다른 것들, 성별이나 나이나 신분 같은 것에
대한 고려는 피어날 틈도 없었다. 오직 종족만이 중요하다. 나가를
전부 죽인다.
그런 결심으로 비상한 아트밀을 향해 쏟아져 내려온 것이 다름 아닌
나가들이라는 사실은 아트밀을 주춤하게 하기는커녕 그의 분노를 오
천 배로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정신이 어떻게 되어버릴 것 같은
분노 속에서 아트밀은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멈추기로 했다. 그 순
간 한 명의 레콘 남자가, 아트밀이라는 이름이, 10년 근속 휘장을 가
지고 있으며 수교위 진급에 관심이 없는 듯이 행동하지만 마음 속으
로는 구구단 7단을 만든 녀석을 불구대천의 원수라 생각하는 한 교위
가 사라졌다. 격노는 그 모든 것을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아트밀은 살인의 등가물이 되었다.
이성적인 판단이 아닌 맹목적 본능에 의해 아트밀은 평상시라면 꿈
도 꿀 수 없는 일을 성공시켰다. 그는 거의 깨닫지 못했지만 어느 순
간 아트밀이 달리고 있던 환상계단의 폭이 500여 미터로 늘어났다.
그가 살인을 위해 새로 마련해야 할 것은 그것뿐이었다. 나머지는 모
두 그의 몸과 그의 철극에 준비되어 있었다.
아트밀은 무지막지한 기세로 나가들에게 격돌했다.
지상에서 정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허공을 바라보던 규리하인들이 동
시에 숨을 들이쉬었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쾌속으로
움직이는 배의 이물에서 일어나는 일이 규리하성의 상공에서 일어났
다. 아트밀과 격돌한 쏟아져내려오던 나가들의 대열이 쫘악 찢어지며
뱃머리에서 갈라지는 물처럼 세차게 튀어올랐다.
"나-는-내-가-된-다-!"
폭포를 반으로 갈라놓듯 나가들의 대열을 찢어놓은 아트밀이 멈춰섰
다. 완전무결한 살인이 된 아트밀이 철극을 휘둘렀다. 온전한 나가들
이, 반토막난 나가들이, 나가의 파편들이 가을숲에 불어닥친 돌풍에
휘날리는 낙엽을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날아올랐다. 소드락을 복용했
지만 이곳은 겨울의 규리하였고 나가들은 한계선 남쪽에서 움직이는
정도의 속도밖에 보여줄 수 없었다. 그런 나가들을 상대로 아트밀은
계속해서 나가의 회오리를 만들어내었다.
"내-가-된-다-!"
사라말은 아트밀이 내뿜는 계명성의 여운 속에서 고개를 가로저었
다. 열린 그의 입에서는 사라말을 아는 사람들이 잘 기억하는 침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냐."
뒤로 물러난 사라말을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두 손을 창턱에 얹은
사라말은 두 팔 사이로 머리를 떨구었다. 마치 형벌을 기다리는 사람
같은 모습이 된 사라말은 아트밀의 계명성이 들려올 때마다 정신의
일부가 뜯겨져나가는 기분을 느끼며 흠칫했다.
"내-가-된-다-!"
"유감이지만 사실에 부합하는 발언이라고 할 수 없군요."
사라말은 갑자기 모든 것이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다. 아트밀이 사
라말을 따라온 것이 아니다. 사라말이 아트밀을 안내한 것이다. 형식
적으로는 같지만 그 내적 논리는 완전히 다르다.
왜 정신억압이라는 방식을 썼는가? 수교위 진급이 가장 큰 야망인
평범한 교위가 사라말을 보호할 것을 황제가 바랐다면 황제는 짤막한
명령만으로도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사라말이 바다를 가로지
를 것을 예견하고 강력한 정신억압이 아니면 그런 여행을 따를 수 없
다고 판단하여 명령 대신 정신억압을 선택했다는 것은 지나치게 복잡
한 설명이다. 훨씬 간단한 설명이 있다.
명령 대신 정신억압을 쓴 이유는, 그래야만 필요할 경우 억압당사자
의 분노를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신억압된 아트밀에게 필요한 것은 두 가지다. 아트밀을 규
리하로 이끌어줄 사람, 그리고 그에게 '너는 사실 정신억압되어 있
다'고 알려줄 사람. 그런데 율형부사 사라말 아이솔은 그 두 가지 일
을 모두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아트밀의 길잡이로 사라말이 선택된
것이다.
"그곳에서, 하늘누리가 파멸을 향해 날고 있는 그 때 폐하께서는 이
미 귀환과 발케네 다음 목표를 모두 준비하고 있었던 겁니까? 이 복
잡한 계획을 아트밀의 머리 속에 '사라말을 따라가야 한다'는 강박관
념을 밀어넣는 단순한 행동으로 해치우셨군요. 존경스럽습니다. 폐
하. 그리고 저는 자신도 모르는 새 폐하의 바람을 모두 성취시켜 드
렸고요. 흐음. 그렇다면 저는 황제의 으뜸가는 신료라고 주장할 수
있겠군요. 마음대로 행동해도 황제의 뜻을 따르게 되니 이보다 더 충
성스러운 신하가 어디 있겠습니까. 무의식적 충신이라고 할 수 있군
요."
"내-가-된-다-!"
사라말은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구토가 치밀어 올랐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오는 단어들은 사라말의 차분한 말을 형성했다.
"아니오. 정반대입니다. 당신은 황제의 도구로서 기능하고 있어요.
그 어느 때보다도 분명하게."
차분한 말투도, 무표정한 얼굴도 그대로다. 하지만 사라말의 눈에선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사라말은 표정도 소리도 없이 오직 눈물
만으로 울었다.
갑자기 사라말이 일어났다. 그는 하늘에 있는 아트밀을 뚫어지게 바
라보다가 갑자기 손바닥으로 창턱을 탕 내리쳤다.
"사라말이 친구에게 저지른 실수를 만회하기로 결정한 창턱이다."
율형부사는 발을 들어 창턱을 밟았다. 아마도 아트밀에게 접근하기
도 전에 죽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사라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트
밀에게 다가가 자신이 되려는 그 시도가 바로 황제의 뜻에 놀아나는
것임을 알려야 한다. 그가 정신억압에 대해 알려주었기 때문에 그것
은 그의 책임이었다.
사라말은 환상계단을 상상했다.
아트밀은 자신이 죽이고 있는 나가들에게 대해 그들이 나가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그들이 나가라는 것만으로도 아트밀
에겐 충분한 투쟁의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그 나가들에게도 자신들
모두를 가리키는 이름은 있었다. 가없는 미래로 떠날 치천제를 끝까
지 따르기로 맹세한 그 나가들의 이름은 아라짓 전사였다.
그들의 종족 특성 때문에 아라짓 전사들은 아트밀에 대해 냉철한 계
획을 가지고 있었다. 강대한 적을 상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담은 무
용을 펼치는 일은 아라짓 전사들에게 조금도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
들은 그저 자신들 전체의 무게로 아트밀을 '그의 환상계단' 밖으로
밀어내는 것으로 만족할 작정이었다. 그 다음에는 중력이 아트밀을
죽일 것이다. 오천여 명이라는 그들의 숫자는 그런 작전에 필요한 무
게를 간단히 만들어낼 수 있었고 또 그들은 쉽게 재생하는 몸을 지니
고 있었다. 피해를 무시한 채 그저 달려가서 몸통으로 부딪치기만 해
도 된다.
그 때문에 아라짓 전사들은 아트밀에 대해 별다른 고려를 하지 않았
다. 격돌 직후의 짧은 시간 동안 아트밀이 놀랄 만한 전과를 올린 것
은, 위로 달리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줄어든 것 같지 않은 레
콘의 돌파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라짓 전사들의 그런 판단 때문이기
도 하다. 아라짓 전사들은 아트밀이 자신을 어떻게 하든 상관하지 않
는다는 태도로 계속 접근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난 후 아라짓 전사들은 계획의 수정이 불가피
함을 느꼈다. 아트밀은 근처의 모든 나가들을 때려눕히고는 다른 나
가들을 따라 종횡무진으로 달렸다. 그 모습을 본 나가들은 아트밀이
상상한 환상계단이 예상외로 넓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라짓 전사들은 초조함을 느꼈다. 소드락의 약효는 17분. 그 동안
규리하성에 대한 치명적인 공격을 가하고 말리로 돌아가야 한다. 그
런데 뜻하지 않게 아트밀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었다. 니름들이 재빨
리 교환되었다. 그들은 몇 개의 무리로 자연스럽게 흩어지기 시작했
다.
대략 이천여 명의 나가들이 온갖 궤도의 환상계단을 만들어 전후좌
우에서뿐만 아니라 위아래에서도 아트밀에게 달려들었다. 위에서의
공격도 위험했지만 아래쪽으로부터의 공격은 치명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아트밀이 만든 넓은 환상계단은 다른 사람에겐 보이지 않
지만 그것을 만들어낸 그 자신에겐 잘 보였다. 따라서 아트밀은 자신
이 딛고 있는 계단 때문에 아래쪽에서 치솟아오르는 나가들을 볼 수
없었다. 아트밀에게 달려들던 아라짓 전사들은 곧 그가 아래쪽의 공
격에 대해 대처하기 어려워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곧 아래쪽으로부터
의 공격이 늘어났다. 그에 대한 아트밀의 대처는 계속 달리고 도약하
는 것뿐이었다. 그 시점에서 그를 돕는 것은 레콘의 힘이나 속도가
아닌 야수적인 감각이었다. 아트밀에게 공격당하는 나가들의 숫자가
차츰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 동안 다른 아라짓 전사들은 더 중요한 목표인 규리하성을 향해
쇄도했다. 넋을 잃은 채 허공을 바라보던 규리하인들은 비명을 지르
기 시작했다.
잠들어 있던 정우 규리하는 자신의 몸이 거칠게 다루어지는 것을 느
끼고는 눈을 떴다. 그러자 밝은 빛이 눈을 찔렀다. 깜짝 놀란 정우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누군가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
었다.
"일어났어요? 눈을 떠요!"
정우는 실눈을 떠서 앞을 보았다. 지키멜 퍼스가 창백한 얼굴로 그
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우가 눈을 뜬 것을 본 지키멜은 안도하며
몸을 움직였다. 지키멜은 탈해에게 다가가 그의 몸을 묶고 있던 밧줄
을 단검으로 끊었다. 그녀가 탈해의 몸을 흔들자 곧 탈해도 정신을
차렸다.
결박이 풀린 것을 알게 된 정우는 오랫동안 묶여있었던 팔다리를 움
직여보았다. 열이틀 동안 계속 묶여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나흘만
에 돌아온 후로 지키멜은 간혹 그들을 찾아와 음식을 주었고 또 눈을
가린 채 그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일 수 있게 해주었다. 만약 그런 배
려가 없었다면 정우는 풀리자마자 쓰러져 일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팔다리에서 자신의 수족이 아닌 것 같은 생경함이 느껴졌지만 정우는
의자를 붙잡고 간신히 일어날 수 있었다. 그 때 지키멜이 부축하듯
정우를 붙잡았다.
"나가야 해요, 정우!"
나간다는 말은 고마웠지만 정우는 지키멜의 목소리에 담긴 다급함에
신경이 쓰였다. 그녀는 지키멜이 이끄는대로 비틀비틀 걸으며 말했
다.
"왜죠? 무슨 일인데요?"
"규리하성이 공격받고 있어요."
"뭐라고요?"
정우를 밖으로 데려가기 위해 애를 쓰고 있던 지키멜은 헐떡이며 말
했다.
"지금 황제가 규리하를 공격하고 있어요! 내가 그랬잖아요. 황제는
규리하도 공격할 거라고! 당신은 그것을 막아야 해요!"
정우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스스로 발을 내디뎠다.
그 때 등 뒤에서 탈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격받고 있다고요?"
문을 나서려던 지키멜은 탈해의 목소리에 놀랐다.
"따라오면 안돼요! 밖은 유혈인데 당신은-"
지키멜의 목소리와 정우를 부축하던 그녀의 손이 한꺼번에 사라졌
다. 정우는 휘청하며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쓰러지지 않기 위
해 몇 발자국 걷는 동안 정우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게 되었
다. 라수의 방은 들어간 곳으로만 나올 수 있다. 열이틀 전 자신의
방에서 라수의 방으로 들어갔던 정우는 그곳에서 나오자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정우를 부축하던 지키멜은 그녀의 방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탈해 또한 탈해의 방으로 갔을 것이다.
똑바로 서게 된 정우는 탈해가 뒤따라 나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재
빨리 방안을 둘러보았다.
창쪽을 보았을 때 정우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지키멜에게 습격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정우는 창턱에 발을 올린 남자가 자살하려 한
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우의 발소리를 들은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정우를 본 그는 황급히 방안으로 돌아왔다.
"정우?"
"좋은 꿈 꾸셨어요, 사라말? 성이 공격받고 있다고요?"
정우는 조금 멈췄다가 말했다.
"우신 거예요, 사라말?"
"지금까지 어디에…… 아니, 됐습니다. 지금 급한 일은 그것이 아니
니까."
사라말은 눈 주위를 빠르게 훔쳤다. 팔뚝이 사라지자 그곳에는 사라
말의 엄격한 얼굴이 나타났다. 그는 정우에게 다가오라는 손짓을 했
다. 하지만 정우는 빨리 걷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정우의 상태를 깨
달은 사라말은 그녀를 부축해서 창가로 인도했다.
창밖을 보자마자 정우는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받은 최
초의 인상은 하늘에서 나가눈이 쏟아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정우는
자신의 당혹을 달래가며 좀 더 자세히 관찰했고 조금 후에는 창밖의
광경을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하늘과 땅 사이의 허공에
서 수천 명의 나가와 한 명의 레콘이 싸우고 있는 광경이 그렇게 상
식적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때 아래쪽에서 다급한 외침들이 들
려왔다. 정우는 아트밀에 대한 걱정을 억지로 뿌리치며 아래쪽을 살
폈다.
사람들이 쏟아져 내려오는 나가들을 피해 미친 듯이 도망치고 있었
다. 제대로 된 지시를 받지도 못한 상태에서 달려나온 병사들이 하늘
을 향해 창칼을 들어올리는 모습도 보였다. 도망치려는 자와 싸우려
는 자들이 뒤엉켜 엄청난 혼란이 일어났다. 그 상황을 통제해보려 애
쓰는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그러기엔 숫자가 너무 적었고 혼란의 요
인이 지나치게 공포스러웠다. 규리하에 나타난 나가도, 하늘에서 내
려오는 적도 모두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규리하인들이
맞닥뜨린 것은 그 두 가지가 복합된 것이었다. 그들을 도와야 했지만
정우는 도대체 무슨 말을 외쳐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다행히 사라
말이 해결책을 제시했다.
"정우! 저 하늘치를 움직이십시오! 규리하성에서 멀어지게 해요!"
정우는 황급히 말리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다음 행동은 사라말을
낙담하게 했다. 평범하다 못해 좀 한심해 보이기까지 한 행동이기 때
문이다.
정우는 두 손을 입 앞에 모아 손나팔을 만들어 외쳤다.
"가! 제발 가! 부탁이야!"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평가하는 우를 범하고 싶지 않았던 사
라말은 그 정도의 일이라면 나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
생각을 꾹 눌러 참았다. 사라말은 희망을 담아 말리를 올려다보았다.
목적만 달성할 수 있다면 그 형식의 기품이야 그리 중요할 것이 없
다.
말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사라말은 일그러진 얼굴로 정우를 돌아보았다. 정우는 좌절을 담아
말했다.
"안돼요. 제 말을 안 들어요. 저 하늘치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부탁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아요. 저 하늘치를 부리는 사람들
일…… 고모부님?"
사라말은 황급히 아래쪽을 보았다. 단구의 무사가 장창을 꼬나든 채
하늘로 뛰어오르고 있었다.
판사이 남작 발리츠 굴도하는 말이 환상계단을 상상할 수 없다는 것
에 큰 아쉬움을 느꼈다. 물론 말 아래에서도 탁월한 무사인 그였지만
그의 기량이 십분 발휘될 수 있는 곳은 역시 마상이었다. 말을 통제
하면서 동시에 무기를 다루는 어려움은 발리츠와는 관련 없는 말이었
다. 발리츠 굴도하가 갑주로 몸을 두르고 손에 장창을 들고 명마 위
에 앉았을 때 남작과 장창과 말은 하나의 무기, 발톱과 이빨 대신 창
이 달려있는 한 마리의 맹수였다.
하지만 세상의 그 어떤 말도 환상계단을 상상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는 발리츠 굴도하도 환상계단의 사용에 그리 능숙한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트밀의 움직임과 아라짓 전사들의 움직임은 그에
게 좋은 시범이 되어주었다. 발리츠는 자신이 환상계단에 대해 좀 더
많은 것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러자 발리츠는 더
생각할 필요 없이 창을 꼬나쥐고 허공에 비스듬한 싸움터를 만들었
다. 바라던 것이 나타나자 발리츠는 그 위를 따라 달려올라갔다.
아라짓 전사들은 자신의 머리 위로 뛰어오르는 발리츠를 보고는 당
혹했다.
발리츠는 자신의 무술을 신뢰했지만 결코 바보는 아니었다. 수천 명
의 적을 향해 용감하게 쇄도하는 것은 레콘의 일이지 인간의 일이 아
니다. 수천 명은커녕 적이 세 명만 넘으면 발리츠는 좁은 통로에 서
거나 벽을 등지지 않는 이상 주저없이 도망쳤을 것이다. 그리고 허공
에는 통로나 벽 같은 것은 없었다. 그래서 발리츠는 뛰어내려오는 나
가들의 머리 위로 뻗어 있는 환상계단을 만들었다. 그의 목표는 하늘
치 말리였다. 말리를 통제하는 자들을 장악하거나 황제 자신을 장악
할 수 있다면 단숨에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다. 발리츠는 아트밀의
실수를 사과하고 황제를 설득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 일은 아
트밀의 돌출 행동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
져내려오는 나가들의 모습으로 보건대 분명히 황제는 규리하를 칠 의
도를 가지고 있었다. 나가들에게 소드락을 먹이려면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그는 이미 황제를 적으로 규정했다.
발리츠의 의도를 눈치 챈 아라짓 전사들은 황급히 니름을 교환했다.
다시 몇 무리의 나가들이 딛고 있던 환상계단의 형태를 바꾸며 발리
츠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발리츠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나가들을
뒤돌아보고는 자신의 단신을 원망했다. 키가 작으면 당연히 다리도
짧은 법이고 다리가 짧으면 빨리 뛰기 어렵다. 그리고 말리는 너무
높은 곳에 떠있다. 발리츠는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꼈다. 나가들에게
붙잡히기 전에 말리에 오르는 것은 불가능했고 호흡이 힘든 상태에서
불사에 가까운 적과 싸우는 것은 무모하다. 발리츠는 차라리 지금 싸
우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는 창을 휘두르며 뒤로 돌아섰다. 곧
첫 번째 나가가 사이커를 휘두르며 다가왔다. 발리츠는 짧게 속삭였
다.
"아이넬."
남작에게 돌격한 아라짓 전사는 눈 앞에 있는 인간이 혹 인간 전용
소드락을 먹은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순식간에 목과 배, 그리고 무
릎을 찔려 자신이 만든 환상계단 위를 우당탕 구르면서. 쓰러진 나가
에서 눈을 돌린 남작은 다음 상대의 접근을 기다렸다. 그 때 커다란
계명성이 들려왔다. 발리츠는 그 말이 익숙한 말의 변형된 형태임을
깨달았다.
"공-기-반-고-기-반-이-군-!"
발리츠는 왼쪽 눈 아래의 살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끼며 계명성이 들
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지상에서는 열성적인 조사를 연상시키는 모습
으로 야리키가 낚싯대를 휘두르고 있었다.
야리키는 자신의 괴기스러운 농담을 즐기지는 않았다. 필요할 땐 상
당히 괴기스러운 행동도 하지만 그런 행동을 즐기지 않는 것과 마찬
가지다. 그의 외침은 아라짓 전사들에게 공포를 주기 위한 전술적인
시도였다. 하지만 그 시도는 큰 반응을 얻지 못했다. 아라짓 전사들
은 모두 적출식 직후에 곧장 냉동되어 육성을 쓸 기회도 적었고 낚시
취미를 가져본 적도 없었다. 야리키의 협박을 이해할 만한 소질을 결
여한 자들인 것이다.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아라짓 전사들을 본 야리키는 그의 평소 성
격대로 그냥 입을 닫고 행동에 돌입했다. 그는 조간을 채찍처럼 회둘
렀다. 인간이 쓰는 조간이라면 그런 짓은 불가능하겠지만 야리키의
낚싯줄은 쇠사슬이었고 그 자체로도 상당한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곧 운 나쁜 나가들이 별철 낚싯대와 쇠사슬에 맞아 쓰러지기 시작했
다. 아라짓 전사들은 곧 그 웃기게 생긴 도구가 무기로 사용될 수 있
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 형태는 격투에 적합하다고 할 수 없었지만
그 무게는 어느 무기에도 부족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길이는 오히려
여느 무기 이상이었다. 길다란 낚싯대에 낚싯줄까지 더해지자 야리키
의 조간은 거의 투사 병기에 가까운 공격권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격투에 적합하지 않은 것은 명백했다. 그 커다란 물
건을 휘두르느라 야리키는 많은 틈을 보이게 되었다. 재생하는 몸을
가진 나가들이 그 틈을 파고 들었다.
곧 아라짓 전사들은 자신들이 뭔가를 간과했음을 깨달았다.
조간을 무기로 보지 않는다면 야리키에게는 무기가 없다. 따라서 야
리키는 손발과 부리를 사용하는 것에 익숙했다. 야리키의 빈틈을 파
고든 나가들은 곧 한두 군데씩 부러지거나 몸 어딘가에 구멍이 난 채
로 쓰러지게 되었다. 가까이 접근하기도 어렵고 워낙 긴 조간 때문에
거리를 두기도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아라짓 전사들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주변의 나가들이 뒤로 물러나자 야리키는 태연히 아트밀을
올려다보기까지 했다.
아트밀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아직도 기운차게 허공을 뛰어다니고
있었고 철극이 닿는 거리에 나가가 들어오면 반드시 중상을 입히고
있었지만 주도권을 잡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야리키
는 지상으로 내려오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지상에서라면 발 아
래에서 오는 공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아-트-밀-! 내-려-와-! 땅-에-서-싸-워-!"
아라짓 전사들이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기에 야리키의 계명성은
고공에 있는 아트밀에게 확실히 전달되었다. 아트밀은 야리키의 지시
가 옳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그 지시를 따를 수 없었다. 아라짓
전사들이 그를 보내주지 않았다. 추락한 벌집에서 뛰쳐나온 벌들을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아라짓 전사들이 날아들자 아트밀은 화를 내며
다시 더 높은 곳으로 움직였다. 야리키는 벼슬을 빳빳하게 세웠다.
사라말은 정우의 어깨를 살짝 붙잡았다.
"항복하십시오."
"예? 예?"
"당신은 환상계단을 능숙하게 다룹니다. 저기에서 싸우는 자들을 피
해 하늘치 위까지 날아오를 수 있을 겁니다. 황제에게 찾아가 항복하
십시오."
정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항복을 거부한다고 생각한 사라말
은 재빨리 설명했다.
"정우. 규리하 병사들이 아무리 용맹하다 해도 죽지 않는 적을 상대
로 이길 수는 없습니다. 설령 소드락의 약효가 떨어져서 돌아간다 해
도 저 나가들은 충분히 쉰 다음 말끔히 나아서 다시 돌아올 수 있습
니다. 당신이 저 하늘치를 움직일 수 없다면 규리하엔 아무런 희망도
없습니다. 이길 수 없다면 개죽음이라도 막아야 합니다. 보십시오.
아트밀과 남작은 당장이라도 죽을 지경에 처해 있습니다."
정우는 커다랗게 뜬 눈으로 사라말을 바라보았다. 조금 후 정우는
약간 코막힌 소리로 말했다.
"항복을 받아주실까요?"
"예?"
정우는 후응 하는 소리를 내며 코를 들이마셨다.
"지키멜은 폐하께서 원하시는 것이 바로 유혈이라고 말했어요. 자꾸
만 쪼개지려는 제국을 지금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계속 피를 흘려야
한다고 말했어요.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피를 마시는 새가 가장
오래 사니까……"
정우는 자신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사라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조금 후 낯선 것에 당황한 시선으로 바뀌었
다. 사라말은 그녀가 자신이 아닌 '킴'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 번밖에 못 사는…… 그래서 그 한 번을 오래오래 살아야 하고
그 때문에 피를 마셔야 하고……"
정우는 움찔하고는 아랫입술을 붙잡았다. 조금 후 그녀는 다시 사라
말에게 말했다.
"폐하께서 원하시는 것이 승리가 아니라 유혈이라면, 폐하께서는 항
복을 받아주시지 않으실 거예요."
"하지만 시도는 해봐야하지 않겠습니까."
"시도요?"
"예."
정우는 잡아당기던 아랫입술을 놓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마치 자신
의 발끝을 보듯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정우가 말했다.
"예. 시도해봐야지요. 사람들이 죽으면 안되니까."
말이 끝나자마자 정우의 몸이 부웅 떠올랐다. 정우는 고향인 하늘로
돌아가려는 커다란 새처럼 날렵하게 창문을 빠져나갔다. 오래 전 하
늘누리에서 한 번 일어났던 일이지만 사라말은 발을 움직이지도 않은
채 날아가는 정우의 모습을 보고는 놀람을 금할 수 없었다.
그 때 정우의 방으로 통하는 문이 벌컥 열렸다. 사라말은 혹 라수의
방에서 탈해가 나타난 건가 생각했지만 열린 문 뒤편은 복도였다. 문
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것은 옷차림이 흐트러지고 숨이 턱에 닿아있
는 파라말이었다. 어디서 구한 것인지 파라말은 손에 칼 한 자루를
들고 있었다. 그는 문을 잠그고는 탁자와 의자를 문 앞에 쌓기 시작
했다.
"형님. 이제 폐하께서 정신억압자가 아니라는 것을 아셨죠? 폐하께
서 정신억압자셨다면 아트밀을 정신억압해서 그 광태를 멈추셨을 겁
니다. 소드락 약효가 떨어질 때까지 여기서 버티다가 저 위로 올라가
도록 하지요. 그리고 폐하를 뵙고……"
"아트밀은 정신억압 당했다."
의자를 밀던 파라말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사라말을 돌아보고는 자
신이 밀어놓은 의자에 걸터앉았다. 형의 말에 반박하려던 파라말은
잠시 생각해 보고는 미심쩍게 말했다.
"공격 빌미란 말씀입니까? 하지만 왜 며느리의 영토를 공격합니까?"
"결혼도 빌미다."
파라말은 다시 고민에 빠졌다가 말했다.
"방심시켜놓고 기습하기 위한? 형님. 그러면 왜 폐하께서 폐하의 부
재 기간에도 아무런 역심을 드러내지 않았고 심지어 황제의 대장군을
돕기까지 했던 규리하를 공격하시는 겁니까?"
"그건 모르겠다. 하지만 규리하 공격은 그 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 뭐 하시는 거야?"
사라말은 창밖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어리둥절해진 파라말은 의자
에서 일어나 형의 곁으로 다가갔다. 형과 같은 방향을 보게 된 파라
말은 형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뭐 하시는 거죠? 설마……?"
파라말은 말을 멈췄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 없는 말이었기 때
문이다.
하지만 그 어처구니 없는 일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다.
규리하성을 빠져나온 정우는 날개를 접고 활강하는 새처럼 위로 치
솟아올랐다. 그녀가 상상하여 자신을 떠받치게 한 환상계단은 계단이
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을뿐만 아니라 정우의 눈에도 보이지 않았다. 정우는 시야를 가리
는 형태와 빛깔, 질감 등을 구태여 상상하지 않았다. 하늘을 나는 것
에는 불필요한 것이니까. 따라서 정우가 상상하는 것은 그녀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불확실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우를 안전하고
빠르게 날아다닐 수 있게 해주었다.
규리하성과 허공의 전쟁터, 그리고 말리가 모두 잘 보이지만 그 모
든 곳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으로 치솟아오른 정우는 그곳에서 멈춰섰
다. 허공에 똑바로 선 정우는 잠시 쓸쓸한 표정으로 먼 지평선 쪽을
보았다.
조각구름들이 뚜렷한 목표를 가진 양 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음지마다 남아있는 잔설과 곳곳에 형성된 빙판, 그리고 그 사이사이
에 노출된 검은 흙 때문에 규리하의 평야는 차가운 무채색으로 물들
어 있었다. 초록빛이나 붉은 빛은 보이지 않았다.
'바보. 한 번밖에 못 사는 사람들이 죽고 있어.'
정우는 하늘치와 규리하성 사이에서 싸우고 있는 아트밀과 아라짓
전사들을 보았다. 그들 각자가 딛고 있는 환상계단이 보이지 않기 때
문에 끊임없이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은 커다란 파리떼와 그 속에 뛰
어든 한 마리 잠자리처럼 보였다. 발리츠 굴도하는 장창을 휘두르며
이리저리 도망쳐다니고 있었다. 규리하성에서는 야리키와 규리하의
병사들이 땅에 내려선 아라짓 전사들과 싸우고 있었다.
'한 번밖에 못 살면서. 그렇게 빨리들 사라지면서.'
정우는 합장하듯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그녀의 떨리는 손가락
이 몇 번 미끄러지다가 손목을 조이고 있는 소매의 여밈끈을 풀었다.
소맷자락이 풀리자 바람이 그것을 파르르 흔들었다. 양쪽 소매를 푼
정우는 가슴으로 손을 옮겼다.
정우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머뭇거림 때문에 정우의 동작은 옷 입는 법을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서툴렀다. 간신히 윗옷을 벗자 세찬 바람이 정우의 손에서 그것을 나
꿔챘다. 정우는 무의식적으로 움찔하며 두 팔로 앞을 가렸다. 고개를
숙인 채 가늘게 떨던 정우는 한숨을 내쉬고는 팔을 들어 속옷을 벗었
다. 추웠다. 노출된 팔은 순식간에 얼어버린 것 같았다. 정우의 코와
입에서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위아랫니가 덜덜 부딪쳤다. 입을 꼭
붙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정우는 입을 조금 벌렸다. 입
안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윗옷을 뺏어가고 그녀에게 혹독한 추위를 선사하던 바람이 정우의
속옷을 내리눌렀다. 그래서는 안된다고 만류하는 것처럼 바람은 얇은
속옷을 정우의 몸에 대고 눌렀다. 정우는 바람의 제지를 살짝살짝 피
하며 속옷들도 벗었다. 바람은 체념하듯 그녀의 속옷을 받아들었다.
작고 얇은 천들이 깃털처럼 정우의 몸에서 떨어져나갔다.
정우는 알몸으로 허공에 섰다. 옷을 벗는 동안 풀려버린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두 팔로 가슴과 아랫배를 가리고 있던 정우는 그
팔들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정우는 눈을 감았다. 그것으로 부족하다
는 듯 정우는 들어올린 두 팔을 얼굴 앞에서 엇걸었다. 가리고 덮어
줄 것 없는 허공에서 그녀의 작은 몸이 낱낱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것'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황제는 말리의 나라미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번의 공격으로 규리하를 함락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바뀌
고 있었다. 많은 규리하의 병사들과 규리하인들이 아라짓 전사들의
공격으로 사망했지만 아트밀과 야리키, 두 명의 레콘은 아직까지도
하늘과 땅에서 아라짓 전사들을 거침없이 때려눕히고 있었다. 그리고
발리츠 굴도하는 허공을 뛰어다니며 나가들을 이리저리 흩어놓고 있
었다. 허공에는 몸을 감출 곳이 하나도 없었지만 바꿔 말하면 뛰어다
니는 것에 방해가 될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들도 영원히 그렇게 싸
울 수는 없겠지만 아라짓 전사들에게 허락된 시간은 그들보다 더 짧
다. 소드락의 약효가 끝나서 물러나기 전 최대한 타격을 입혀야 한다
고 결정한 황제는 강력한 니름을 보냈다.
[두 레콘과 장창 든 인간의 곁에서 물러나라.]
황제의 니름에 따라 아트밀과 야리키, 그리고 발리츠의 주위에서 나
가들이 물러났다. 발리츠는 헐떡이며 환상계단에 주저앉았고 야리키
는 의아해하며 물러나는 나가들을 따라 움직였다. 셋 중 가장 많은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아트밀은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말리와 지상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는 이것을 지상으로 내려갈 좋
은 기회로 삼아야 할지 말리 위로 뛰어오를 기회로 삼아야 할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트밀의 곁에서 물러나던 아라짓 전사들은
그 모습을 보고는 주춤했다. 그들은 아트밀이 황제에게 다가갈까봐
걱정하고 있었다.
[내버려둬! 모두들 지상으로 내려가라. 규리하성의 인간들을 죽여
라!]
황제의 명령에 따라 아라짓 전사들은 황급히 물러났다. 하지만 지상
을 향하던 그들의 움직임이 다시 멎었다. 그 정지에 조금 놀란 황제
가 다시 다그치려 할 때 아라짓 전사들에게서 니름이 들려왔다.
[이라세오날이여. 저곳을 보십시오.]
그 니름에는 의아함과 두려움이 조금씩 섞여 있었다. 황제는 그들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그들의 유일한 주인에게 바쳐야 하는 헌신과 복종을 놓고 볼 때 아
라짓 전사들은 그런 보고는 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아라짓 전사들이
가리킨 것이 무엇인지 확인한 순간 치천제는 죽을 뻔했다.
하늘과 땅에서 벌어지던 모든 싸움이 멈췄다.
규리하성과 그 상공에서 나가와 인간, 레콘은 모두 하늘을 바라보았
다. 그들의 시선은 정우를 향하고 이었지만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정우가 아니었다. 그것은 정우의 몸에 있었다. 하지만 거리와 상관없
이 그것은 눈앞에 있는 것마냥 똑똑히 잘 보였다. 원근은 상당히 무
의미한 것이 되었다. 멀지만 잘 보이고 가깝지만 결코 손 뻗어 만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것은 아름다웠지만 꿈처럼 아름답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무
시무시했지만 악몽처럼 무섭다고 말할 수도 없다.
왜냐 하면 그것이 바로 꿈이고 악몽이니까.
정우의 몸은 꿈으로 덮혀 있었다.
눈을 감아도 꿈을 가릴 수 없다. 고개를 돌려 꿈을 외면할 수도 없
다. 사람들은 정우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사실 그것은 불필요한 일이
었다. 그들이 뒤로 돌거나 눈을 감는다 해도 그들은 정우의 몸을 뒤
덮고 있는 꿈을 볼 것이다. 꿈은 과거를 예견하고 미래를 기억할 수
있다. 공간이 꿈을 제약할 수 없듯 시간 또한 마찬가지다. 사람들의
정신을 둘러싸고 있는 강력한 요새를 무시하며 가장 용감한 자도 두
려움에 빠지게 만들고 가장 무정한 자도 숨 막히도록 울게 만드는 그
것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피할 수 없었다.
규리하성의 본관에서 아이솔 형제 또한 정우의 모습을 뚫어지게 바
라보았다.
"밤의…… 다섯째 따님?"
파라말은 헐떡였다. 사라말은 정우가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큰 사고가 났고 그 소녀는 죽을 뻔했지요.'
나야. 내가 그 소녀를 죽일 뻔했어. 왜냐 하면 그녀는 나의 반갑습
니다. 붉은 개구리의 등을 밟고 뛰어올랐을 때 나비는 바람으로. 그
의자에는 분명히 비행하는 정적이었어. 소녀가 죽는 것이 두꺼웠지.
'제가 옷을 벗으면 아마 굉장히 놀라실 거예요.'
좋은 돌려줘. 그 책은 뜨거운 얌체. 너의 추적은 미끄러워. 정말이
야? 내가 뭐라고 했어. 그럴 줄 먹었어. 안돼. 살려줍시다? 살려줄까
요! 살려줌! 알아차렸군. 맞아. 살려줌이지. 그런데 껴안고 의자는
왜 이러십니까?
"형님, 형님?"
사라말은 자신의 상태를 비몽사몽 속을 헤매는 것 같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는 비몽사몽을 헤매고 있었으니까. 파라말이 힘겹게, 하지
만 달콤하게 말했다.
"이상해, 너무…… 지금 제가 제대로 말하고 있습니까? 나는…… 으
악!"
사라말은 이름을 말할 수 있는 온갖 것을 보았지만 그 중 아무 것도
기억할 수 없었다. 사라말은 자신의 뺨을 꼬집었다. 그런데 아프지
않았다. 사라말은 잠에서 깨어났다. 그런데 그는 자고 있었다. 어렴
풋이 사라말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눈 앞
에 미소를 머금은 채 비명을 지르고 있는 파라말의 얼굴이 보였다.
사라말은 따스한 목소리로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파라말."
사라말은 동생의 이마에 박치기를 했다.
파라말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그는 이마를 부여잡은 채 사라
말을 올려다보았다. 사라말은 이마를 게으르게 문지르며 말했다.
"정신이 좀 드는군."
파라말은 씩씩거리며 꼭 그런 방법을 쓸 수 밖에 없었냐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사라말은 자신의 팔을 꼬집으며 창밖을 보고 있었다.
"올라가고 있어."
"예?"
"나가들이 하늘치로 올라가고 있다."
사라말의 말대로였다. 규리하성을 공격하던 나가들이 겁에 질린 채,
도취된 채, 의혹에 빠져서, 혹은 즐거워하며 하늘치로 오르고 있었
다. 파라말은 형을 따라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꼬집으며 말했다.
"왜 돌아가는 거죠?"
"모른다. 어쩌면 자기 잠자리로 돌아가고 있는 저기가 그들의 잠자
리니까 잠자리로 돌아가니 자고 있어……"
횡설수설하던 사라말은 고개를 툭 떨구었다. 파라말은 형이 서서히
드러누워 잠드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만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
지만 파라말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파라말은 안간힘을 다해 창쪽을
보았다. 하늘치가 움직이고 있다는 어렴풋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도
잠시, 파라말은 곧 바닥에 누워 잠들었다.
그것은 수면이라기보다는 꿈에서 빠져나가는 과정이다. 꿈에서 빠져
나가려면 잠에서 깨야 하는데, 잠에서 깨려면 당연히 잠들어 있어야
한다. 아이솔 형제들뿐만 아니라 정우를 보았던 사람들은 모두 차례
차례 잠에 빠졌다. 잠에서 깨어나기 위해.
그 시각 하늘치 한 마리가 과텔의 교외 상공을 지나고 있었다. 과텔
사람들은 그 하늘치에 특별히 주의하지 않았다. 그 하늘치는 눈이 몇
개 깨어진 것 외엔 보통의 하늘치와 다를 것이 없었다. 적어도 아래
에서 보면 그러했다. 하지만 그 하늘치의 등쪽에는 다른 하늘치에는
없는 것이 있었다. 몇 개의 옷장과 초췌한 얼굴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규리하로 향하는 아이저 규리하 일행이었다. 불기나 물기라
곤 찾아볼 수 없는 하늘치의 등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끝에 그들 모두
는 어지간한 전쟁유민도 비교하기 힘든 처참한 꼴을 하고 있었다. 하
지만 고향으로 다가감에 따라 그들의 얼굴에는 조금씩 흥분이 떠오르
고 있었다. 아이저 규리하와 그의 두 아들, 그리고 그 때까지도 그들
을 따르고 있던 규리하가의 옛가신들은 규리하 수복의 계획을 검토하
고 또 검토했다.
세상의 다른 곳에도 그런 자들이 있지만, 하늘치 소리 위의 조그마
한 사회에도 다른 자들의 흥분에 동화되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지멘
과 아실, 제이어는 다른 자들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소리의 지느러
미 쪽에 앉아있었다. 아이저는 제이어가 자신의 곁에 접근하는 것에
대해 불쾌해했다. 제이어를 관리하겠다고 약속했기에 지멘 또한 제이
어 곁에 있었다. 아실은 바닥을 짚은 지멘의 손등을 벤 채 누워 있었
다.
지느러미에는 융기가 없기 때문에 풍경을 보기 좋았다. 세 사람은
각자의 생각에 잠긴 채 그 풍경들을 바라보았다. 드러누운 채 구름의
움직임을 보던 아실이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하늘치는 가볍지요."
지멘은 아실을 내려다보았다. 아실이 말했다.
"하늘에 떠있으니까."
지멘은 아실이 심심해서 아무렇게나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때 제이어가 말했다.
"하늘치는 가엾지요."
지멘은 제이어를 돌아보았다. 아실 또한 머리를 조금 들어 살인기사
를 보았다.
"아직까지도 약속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무슨 약속?"
제이어는 빙그레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세 사람은 다시 침묵 속
에서 각자의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약속을 기다리는 하늘치는 규리
하를 향해 조용히 날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