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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채광의 철학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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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신앙 스크랩 ★ 제2장 터전을 옮기고 교세를 넓히다(1904~1912) 제1절~ 3절
늘 그렇게 추천 0 조회 14 10.02.05 10:2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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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장 터전을 옮기고 교세를 넓히다(1904~1912)


                        1. 선교사들의 분담 활동

  1890년대의 호남 선교과정을 지나서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반 선교업무와 병원 설립, 의료선교, 학교교육을 통한 선교사업이 차츰 구체화되면서, 전도를 받고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점점 증가하게 되었다.

 

  당시 전주와 군산에 자리를 정하고 차분히 활동하던 선교사로는 테이트 남매(崔義德과 玖德) 선교사와 레이널즈(李訥瑞) 선교사 내외, 약방을 설치하고 의료선교사역을 겸했던 해리슨(河緯廉) 선교사, 잉골드 여의사 등의 활약이 현저했다.

 

 목포를 거쳐서 이곳 전주로 파송되어 온 매큐첸(Luther Oliver McCutchen, 馬路德) 선교사와 나중에 그의 부인이 된 요세핀(Mrs L.O.Josephine Hounsell) 여선교사, 군산에 파송되어 온 불 선교사와 그의 부인이 된 앨비 선교사 등이 일반선교와 학원선교 또는 의료선교 등을 담당했다.
  




매큐첸(마로덕) 선교사, 마로독 선교사의 부인 요세핀 여사, 전킨 선교사


  특히 선교 초기, 군산에 살면서 전도선으로 군산 연해 지역과 섬들을 순회하며 전도했던 드루 의사와 더불어 열정적으로 군산지역을 개척했던 전킨(全緯廉) 선교사는, 드루 선교사가 1901년 귀국한 다음에도 군산·옥구·김제 등지를 배편을 통해 또는 말을 타고 다니면서 전도 활동에 열중했다.

 

 전킨 선교사는 군산 시내에서 3㎞나 떨어져 있는 궁말(현 구암동)의 습지대에 살면서, 잦은 풍토병으로 고생하다 어린 세 아들(Sidney, Francis, George)을 병으로 인해 잃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도 건강이 쇠약해졌다. 선교사회에서는 그의 사역지를 기후가 나은 전주로 옮기게 했고, 활동 반경을 20리 이내로 제한했다.

 

 1904년부터 전킨 선교사가 전주에 옮겨와서 전주교회를 담임했을 때, 남장로회 파송 한국 선교사 중 리더격인 레이널즈 선교사는 그의 능력과 인격이 뛰어나 다른 선교회인 북장로회 선교회의 청빙을 받아 서울의 다른 곳에 가서 목회를 담당하기도 했다.


[표4] 전라지방 선교기지의 설립과 선교사

선교기지
설립연도
주요선교사
全 州

1895

W. D. Reynolds(李訥瑞) 夫婦
L. B. Tate(崔義德)
M. S. Tate(崔玖德) 최의덕 妹 최매티
W. M. Junkin(全緯廉)夫婦
W. B. Harrison(河緯廉)
M. B. Ingold(잉골드 여의사, 최의덕 부인 됨)
L. O. McCutcheon(馬路德) 夫婦
J. S. Nisbet(柳瑞伯) 夫婦
C. B. Rankin(엄언라)
W. M. Clark(康雲林) 夫婦
T. H. Daniel(丹義烈) 夫婦
W. H. Forsythe(保緯廉) 夫婦
E. E. Kestler(桂瑟羅)
S. M. Buekland(朴世理)
S. D. Winn(衛仁士)
E. A. Winn(衛嚴壹) 위인사 妹氏
F. M. Eversol(呂傅帥) 夫婦
S. A. Colton(孔貞純)
C. L. Austin(吳瑞敦)
H. L. Timmons(金로라 의사) 夫婦
E. T. Boyer(保伊悅) 夫婦
L. R. Fontaine(班理羅)
D. A. Suicord(徐國泰) 夫婦
L. K. Boggs(朴壽老) 夫婦
群 山
1896
W. M. Junkin(全緯廉) 夫婦
A. D. Drew(柳大模)夫婦, 1893년 내한, 1904년 귀국
L. F. Davis(1892 내한, 1898 해리슨과 결혼, 1903 별세)
W. F. Bull(夫偉廉) 夫婦
T. H. Daniel(丹義烈) 夫婦
W. B. Harrison(河緯廉) 夫婦
A. M.Earl(魚亞力) 夫婦
E. E. Kestler(桂瑟羅)
L. Duppy(杜愛蘭)
A. L. Greer(奇安羅)
J. McEachern(梅約翰) 夫婦
W. A. Linton(印敦, 군산영명교장, 1930년 전주신흥교장)
J. B. Patterson(孫培焞) 夫婦
L. R. Fontaine(班理羅)
木 浦
1897
E. Bell(裴裕址) 夫婦
C. C. Owen(吳基元) 夫婦
L. O. McCutchen(馬路德, 후에 전주로 이동)
W. H. Forsythe(保緯廉) 夫婦
L. S. Ledingham(韓三悅) 夫婦
L. T. Newland(南大理) 夫婦
J. F. Preston(邊要翰) 夫婦
J. S. Nisbet(柳瑞伯) 夫婦
H. D. McCallie(孟顯理) 夫婦
D. J. Cumming(金雅各) 夫婦
J. Hopper(趙夏播)夫婦
光 州
1904
E. Bell(裴裕址) 夫婦
C. C. Owen(吳基元) 夫婦
R. T. Coit(高羅福) 夫婦
J. F. Preston(邊要翰) 夫婦
J. V. Talmage(打馬子) 夫婦
A. L. Greer(奇安羅)
R. Knox(魯羅福, 1909년 Borden과 결혼)
M. L. Swinehart(徐路得) 夫婦
R. M. Wilson(禹一善, 1926년 순천애양원 신축)
M. L. Bigger(白美多)
R. L. Newland(南大理) 夫婦
E. J. Shepping(徐舒平)
D. J. Cumming(金亞各) 夫婦
F. E. Root(柳花禮)
M. F. Pritchard(邊摩智)
順 天
1912
J. F. Preston(邊要翰) 夫婦
R. T. Coit(高羅福) 夫婦
H. L. Timmons(金로라) 夫婦
C. H. Pratt(安彩倫, 安緖倫) 夫婦
R. S. Leadingham(韓三悅) 夫婦
M. L. Bigger(白美多)
L. Duppy(杜愛蘭)
A. L. Greer(奇安羅, 1932년 Walker와 결혼 후 귀국)
J. C. Crane(具禮仁) 夫婦
Janet Crane(具慈禮, 전주기전의 최초 음악교사)
J. M. Rogers(魯濟世夫婦, 여수애양원)

『朝鮮長老敎會史典彙集』『全羅老會第1會議錄』『來韓宣敎師名簿』참조.


[표5] 1910년대 전라노회 지방 시찰 구분(6개지방,9개 시찰)

전북 동북편 지방 전주/무주/장수/금산/익산
전주 동편 지방

전주/진안/임실/남원

전주 서편 지방 김제/정읍/고창/부안
군산 북편 지방 익산/서천/부여/보령
군산 남편 지방 군산/옥구/익산/김제/부안
광주/순천/목포/제주 전역


[표6]1920년대 전북노회 지방

담당선교사
담 당 지 역
이눌서 선교사
(전주서북 지방)
전주- 전주서문밖·조촌·구이·난전·우림·이서
김제- 하리(대송·월성)·월촌·부량·김제·백구·용지·금구· 쌍감
강운림 선교사 (전주동남 지방)
전주- 상관
무주- 전역
장수- 계내·계북·천천·읍내
진안- 부귀·마령·용담·정천·진안(군하·역리)·주천·백운·성수·상전
최의덕 선교사 (전주서남 지방)
임실
전주- 구이
정읍- 전역
부안- 백산·건선
고창- 신림·벽사·흥덕
김제- 수류(금산)
위인사 선교사 (전주동남 지방)
남원- 전역
임실- 덕치·읍내·운암·강진·오천·성수
진안- 장안
장수- 산서
마로덕 선교사 (전주동북 지방)
전주- 전주남문밖·서정(서학동)·비봉·화산·봉동·동상·운주·삼기·고산·초곡·삼례·조촌·운산
금산- 전역
익산- 망성·삼기·춘포·여산·금마·황화·팔봉·왕궁
부위렴 선교사 (군산서부 지방)
군산- 전역
옥구- 전역
김제- 전역
익산- 오산
부안- 동진·읍내·행안·상서·산내
하위렴 선교사 (군산동북 지방)
부여- 양화·충화·임천·세도
익산- 용안·웅포·성당·함라·함열·황등·고현·이리
매요한 선교사 (군산서북·충청남서부 지방)
보령- 전역
부여- 옥산·외산·남·홍산
서천- 서남·마동·종초·화양·기산·한산·마산·문화

[표7]1920년대 각 지방 담당 선교사

전주 지방
최의덕·이눌서·마로덕·강운림·위인사
군산 지방
부위렴·하위렴
목포 지방
맹현리·남대리
광주 지방
배유지·도대선·길변하·타마자
순천 지방
변오한·고라복·안채륜
제주 지방
맹현리·남대리,현지목사 이기풍·윤식명

[표8]1903~1910년 호남지방 교세 통계

연도/구분
1903
1904
1905
1907
1908
1909
1910
전북 세례교인수
240
316
415
1,255
2,278
3,156
3,464
전남 세례교인수
27
64
189
708
1,000
1,352
2,045
세례교인 총계
267
380
604
1,961
3,278
4,508
5,509
교인 총계
1,100
9,376
15,512
20,989

G. T. Brown, 『Mission to Korea』 참조.

 

 

 

   ② 전주교회의 성장과 예배당 신축

  1900년에 이르자 전주교회는 그 동안의 부진에서 벗어나 성장을 바라보는 희망적 단계에 들어섰다. 그해 봄에는 교회에 찾아온 많은 사람들이 세례 받기를 원하므로, 레이널즈 목사는 그들을 모아 놓고 먼저 믿음의 기본 도리에 대해 일정기간 교육 시킨 후 52명의 지원자를 문답해, 제대로 대답한 10명에게만 세례를 베풀었다.

 

 당시 선교사들은 청교도 신앙이 투철했으므로, 양적인 증가만을 위해 세례를 준 것이 아니라, 지원자의 문답이 완벽하지 않아도 바른 신앙으로 확신을 고백하는 진정한 세례교인을 얻고자 꾸준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교육 후에도 엄격하게 심사하여 바른 대답과 분명한 신앙고백이 일정한 수준에 올라야만 세례를 허락하였고, 그렇지 못하면 낙제시켰다. 문답고시에 낙제한 교인들은 더욱 열심히 복음 진리 배우기를 노력하며 다음번 문답고시에 대비하였다. 오늘의 교회들이 형식적 세례문답과 수 불리기에 치중하여 적당히 치르는 것과는 달랐다.

 

 전주교회는 양적인 성장을 계속하여 1900년 가을에는 113명이나 되었고, 당시 해리슨(하위렴) 선교사는 이 많은 사람들을 일시에 교육시킬 수 없어, 여섯 반으로 나누어 시차를 두고 성경공부를 시켰다. 한번은 54명의 세례지원자들을 교육시킨 후 사흘에 걸쳐 문답고시한 결과 6명만이 합격되어 세례를 허락한 일도 있었다. 그 나머지 인원 48명은 원입교인으로 하고 계속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이렇듯 전주에서의 전도가 착실하게 계속되었고, 교육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비단 전주 사람들만이 아니고 인근 동리 사람들까지도 있었으므로, 선교사들과 전도인들은 전주성 밖의 여러 마을에도 나가 전도운동을 확장하였다.

 

 특히 해리슨 목사는 닷새만에 열리는 전주 장날에는 반드시 장터에 나가서 각지에서 모여드는 사람들(장꾼)을 상대로 열심히 장터전도를 하였다. 이때 매서인(성경 전도지를 반포하는 전도인)의 도움을 받아 큰 성과를 얻기도 하였다. 당시 전주교회의 선교 상황에 대한 글이다(가급적 원문을 살려 옮긴다).

 

                          교회통신 젼쥬 하목사
 '젼쥬교회가 아직 크게 흥셩치는 못하엿으나 차차 날로 흥왕할 모양은 이 아래 몇가지로 알 것이라 제일 깨달아 알 것은 예수의 도는 사나이만 할 것이 아니고 남녀가 다 믿어야 할 줄 알고 쥬일에 례배당에 다니난 사람마다 집안식구가 다 함께 다니기가 어려움으로 차례로 다니는 것과 아이들도 다리고 다님이오. 비록 그 중에 한 형제의 말이 큰 새악씨를 달리 다리고 다니지는 아니하나 례배당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다리고 다닌다 하며 또한 이곳에 남녀학당도 설시하엿으며 교중 연보도 차차 셩심으로 드리며 젼도도 바지런히 하는 이도 잇고, 쟝마다 위인 광좌중에는 책도 팔며 젼도하는 이도 있어 여러촌에 사는 사람이 예수의 말슴을 들어 믿음이오. 지금 젼쥬 근쳐 몇 고을에는 쥬일이면 례배하는 곳이 잇더라'

 

  이를 보면 장터 전도를 할 때는 단순히 성경의 내용만 전한 것이 아니고 동서의 위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또 매서인들의 도움을 받아 이에 관한 서책도 팔았던 것으로 보인다.



린니 데이비스 여선교사 장례식


  1898년 해리슨 목사와 결혼한 이후 전주병원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데이비스 부인이, 사명을 가지고 병원에 입원한 불신 어린이들과 부녀자들을 상대로 열심히 전도를 하는 중, 심한 열병(장티푸스)에 감염되어 치료를 받다가, 1903년 6월 20일 별세하였다. 내한한 선교사 중에 최초로 현지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그녀는 목숨을 바쳐 충성한 신실한 종이라는 영예를 받게 되었다.

 

  레이널즈 선교사는 1893년부터 성서번역위원회 상임 실행위원(위원은 언더우드, 아펜젤러, 게일, 레이널즈 등 14명이다)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목포 주재 벨(Bell, 裵裕址) 선교사의 부인이 1901년 4월 심장병으로 갑자기 별세하자, 벨 선교사는 두 아이를 이끌고 급히 귀국하였고, 또한 목포에 있던 오웬 의사 부부도 신병치료차 미국으로 돌아가자 목포선교부는 한때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1902년 8월에 벨 선교사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목포선교부와 양동교회는 레이널즈 선교사가 임시 담임하였다.

 

 레이널즈는 1902년 9월부터 1906년 3월까지는 서울 구리개(銅峴)교회(일명 서울중앙교회, Central Church) 담임 목사로 서울선교부의 청빙을 받고 만 3년 5개월 동안 목회사역을 담당하였다. 당시 미북장로회 선교부는 어려운 상태에 처한 구리개교회를 원만하게 목회할 분으로 남장로회 소속의 레이널즈 선교사를 지목하고, 미국 북장로회선교부에서 그를 청빙하였던 것이다. 그는 1906년 3월 이후는 평양에 있는 장로회 신학교의 조직신학교수로, 한국 선교사역 말년까지 계속 시무하였다.

 

 1908년 2월 전주의 전킨 선교사가 폐렴으로 별세하자, 다시 전주로 와서 서문밖교회를 맡는 한편, 또 성경 번역 업무도 담당하면서 호남지방 선교사역에 진력하였다.

 

 레이널즈 선교사가 서울 등에서 일해야 할 때 이곳 전주선교부는 테이트(최의덕) 선교사가 주도하였다. 이때 테이트 선교사는 서문밖교회와 전주 주변의 여러 교회들을 돌보며 여러 선교사들과 협력하여 선교 업무를 진행하였다.

 

 매큐첸(마로덕) 선교사는 전북의 동북지방을 순회·전도하였고, 전주에서 활동하다가 부인이 별세하자 군산으로 옮긴 해리슨은 불(부위렴) 선교사와 더불어 군산·익산 등지와 충남 서천·부여 지방을 순회·전도하였다.




전주시장의 모습(1900년대 전후)


  한편 전주교회를 맡은 전킨 선교사는 20리 밖으로는 순회전도를 못하는 대신, 전주를 중심으로 한 장터전도는 물론 저잣거리에서 노방전도와 축호전도를 열심히 했다. 이로 인해 새로 믿기로 하는 사람들이 날로 증가해, 전에 10칸으로 개수하였던 예배당이 비좁게 되어 더이상 수용할 수 없게 되자 넓은 장소에 더 크게 예배당을 새로 지어야 했다.

 

 선교기지가 완산(完山)에서 화산(華山)으로 이전한 뒤였으므로, 선교기지에서 쉽게 바라볼 수 있는 전주의 4대문 중 하나인 서문과 아주 가까우며 전주내를 건너 부중으로 한 발 더 가까이 들어서는 곳(현재의 터)에 예배당 기지 780평을 마련하였다.

 

 1905년 이른 봄부터 터를 닦고 건평 57평의 새 예배당 건축을 착공하여 그해 9월 15일에 낙성하였다. 예배당 건축공사는 담임목사 전킨 선교사의 진두지휘와 장정 교인들의 노력봉사와 여러 선교사들의 협력이 있었다. 특히 육중한 들보를 어깨에 올리는 테이트 선교사의 강한 어깨 힘에 모든 사람들이 경탄의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예배당 건축양식은 한양(韓洋) 절충식으로, 주황색 벽돌벽에다 백회로 눈금을 넣고 간격에 맞추어 유리창문을 여러 곳에 내었으며, 지붕은 두꺼운 한식기와로 덮었으므로 매우 우람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천장은 굵직한 들보와 서까래를 높게 받쳐서 시원하게 보였다. 바닥에는 판자를 깔았으며 내부 전면에 한층 높여서 강단을 설치하였다.

 

 새로 지은 예배당 안에는 남자반과 여자반으로 좌석을 구분하고, 가운데에 휘장을 전후로 길게 쳐서 남녀반이 서로 마주볼 수 없게 하였다. 예배당 안 가운데 휘장을 치는 것은 당시 남녀내외법을 지키는 모든 예배당의 공통적 방식이었다.

 

 예배당 기지 780평과 건평 57평(30칸)의 건축은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따른 자립·자영 정신을 교육받은 교인들이 솔선하여 힘에 겨운 연보를 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총공사비는 3,500냥이 들었는데, 총액의 2/3가 되는 2,300냥은 교인들이 연보하였고, 부족한 부분은 선교사들이 협력하여 완산의 선교사 사택 한 채를 헐어서 자재를 보충하여 소요경비를 충당하였다.

 

 이같이 정성을 기울여 전주 도성의 주요 관문 중 하나인 서문 바로 옆에 예배당을 크게 건립한 일은 국운(國運)이 기울어져가는 당시 우리 민족에게 자긍심을 불어 넣어 주는 일이었으며, 장차 호남선교의 중심을 이룬 점에서도 그 의의(意義)가 큰 것이었다.




서문 밖에 새로 터잡은 예배당.1905.


  이때는 이미 1899년 5월 1일 개항된 바 있는 군산항을 비롯하여 이곳 전주에 하나둘 일본인들이 들어와서 잡초 우거진 서문 밖 바로 옆 빈터에 함석 집을 짓고 상점을 개설해 전주 침략의 교두보로 삼고 있었다. 1900년에는 일본 상인들이 10여 명 정도였으나, 1904년 러·일전쟁 이후에는 70여 명 정도가 전주에 입주하였고, 다음해인 1906년에는 216명으로 급증하였다. 그래서 전주의 서문 밖 시장과 남문 밖 천변 저잣거리에서는 일본말 발음 섞인 어색한 우리말을 흔하게 들을 수 있었으며, 일본인 상가가 서문거리 일대에 점차로 늘어나고 있었다. 뜻있는 동포들은 기울어져가는 나라의 운명을 보며 개탄하였고 정신적인 위안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새로운 사상을 전하는 선교사들의 전도를 듣고 소망을 품고 하나님께 기도로 호소할 수 있는 예배당에 모여드니 교세는 점점 증가되었다. 이때부터 그 동안 전주교회로 불려오던 예배당 이름을 전주서문밖예배당, 혹은 전주서문밖교회, 전주부중(府中)교회 등으로 부르게 되었다.

 

  1893년 1월 미국 북장로회와 남장로회 사이에 장로회 정치형태를 보유하는 선교부끼리 ‘선교사공의회’라는 협의기구를 구성하고, 오스트레일리아장로회 선교부와 캐나다장로회 선교부 등이 참여했고, 1901년 9월에는 장로회 공의회로 개칭하여, 외국 선교사들 외에 한국 교인들도 참석하는 합동공의회 시대를 이루었다.

 

 하부기관으로서 공의회 지방위원회를 구성하여 ‘소회(小會)’라고 부르는 지역 대리회를 조직해서 지교회를 관리했다. 1901년에 공의회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선교회의 헌의로 ‘조선자유장로회’의 설립을 의정할 위원을 선출하였고, 이어서 1905년 6월 25일 회의에서 미국남장로회 선교사 레이널즈는 이제 때가 성숙하였으니 대한국장로회노회를 조직하자고 제의하여 결의되었다.

 

 이 결의안을 캐나다장로회 선교본부와 미국북장로회 선교본부와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선교본부에서 그 해에 인허하였고, 미국남장로회 선교본부에서는 다른 선교부보다 뒤늦게 허락했다. 그리하여 합동공의회에서는 한국에 노회를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최초의 독노회 조직,1907


  1907년은 한국 교회사에서 크게 기억할 만 한 해이다. 바로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가 조직된 해요, 장로교회에 최초로 한국인 목사가 탄생된 해이기 때문이다.

 

 이 해를 전후하여 그 당시 한국 안에서는 심각한 정세변동이 일어났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의 강압적 조치에 의해 국제외교권을 박탈당하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었고 다음해에는 일본의 통감부가 설치되었다. 뜻있는 사람들은 허탈감에서 무엇인가 새로운 길을 찾고 또 위안과 소망을 얻기 위해 교회로 찾아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현상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은 한국 교인들을 차분하게 바른 신앙으로 이끌며 교회조직의 사명을 인식하도록 인도하였다. 곳곳에 세워지는 교회들로 하여금 합심하여 연합하게 하고 힘있는 선교를 펼치도록 하였다. 또한 선교사들은 자기들이 신봉하는 장로회 정치로 교회 질서를 유지하도록 지도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민족주의적 열정을 희석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드디어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댓재(章臺峴)예배당에서 선교사 38인과 한국인 장로 40인(36처 조직교회의 대표들), 도합 78인(남전라지방 총대는 선교사 배유지와 장로 임성옥-목포, 북전라지방 총대로는 선교사 이눌서·최의덕·전위렴·마로덕과 장로 최흥서-임피, 최중진-태인이었다)이 총회로 회집하여 ‘대한국예수교장로회’ 독노회를 조직하였다.

 

 이때 회장에는 선교사 마포삼열, 부회장에는 방기창 목사, 서기에 한석진 목사, 부서기에 송인서 목사, 회계에 선교사 이길함이 선출되었다. 1907년 9월 17일 정오를 기하여 회장 마포삼열 목사는 역사적인 노회 설립 선언을 다음과 같은 요지로 피력하였다.

 

  '이 노회는 교회의 머리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십자가를 든든히 의지하고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고 세상사람 앞에 영화로운 빛이 되며,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정결한 노회를 이루어야 하겠다. 이 대한국장로회 노회는 실로 독립노회로다.

 할렐루야 찬송으로 성부·성자·성신님께 세세토록 영광 돌리세. 아멘'

 

  이 노회의 중요한 첫 결정은 7인의 목사(徐景祚·韓錫晋·宋麟瑞·邦基昌·吉善宙·李基豊·梁甸伯)를 장립하여 한국인 목사가 탄생한 일이었다. 1907년 독노회를 조직하고 집계된 교세의 통계는 목사 47, 장로 53, 조사 131, 예배처소 984, 세례교인 17,890, 원입교인 21,482, 소속 전교인 69,098, 학교수 402, 학생수 8,611이었다.

 

 다음의 표에서 제시되는 통계는 당시 한국 교회 성장의 모습을 보여 준다.




한국교회가 낳은 최초의 7인목사

 

                                           [표9]독노회 임원 일람(1907~1911)

횟 수
장 소
연 도
회 장
부회장
서 기
부서기
회 계
부회계
1회 평양 1907 마포삼열 방기창 한석진 송인서 이길함
2회 서울 1908 기 일 이눌서 한석진 김필수 어아력
3회 평양 1909 원두우 이기풍 한석진 김필수 이길함
4회 선천 1910 기 일 길선주 한석진 김필수 사락수 김성택
5회 대구 1911 이눌서 양전백 한석진 김필수 사락수 김석창

獨老會錄 및 第1回總會錄} 1907∼1912 참조

                   [표10]언더우드의 개신교 전체 교세 증가 통계(1901~1907)

연 도
교회수
전도처
세례교인
학습교인
헌금액
1901
216
284
4,699
16,437
$532,302
1902∼3
252
329
6,395
21,664
$747,579
1903∼4
267
253
7,916
23,356
$822,206
1904∼5
321
470
9,761
30,136
$1,352,867
1907
642
1,045
18,964
99,300
$5,319,785


            [표11]
예수장로회 독노회 총계(전라남북도 통계를 중심으로)(1907~1910)

1907(장로
공의회때)
1908
1909
1910
전라남북
전국연합
남전라
북전라
전국합계
남전라
북전라
전국합계
남전라
북전라
전국
합계
목 사
10
46
8
8
60
7
5
63
7
8
75
장 로
3
33
1
5
73
5
9
108
3
13
133
조 사
19
105
9
10
161
8
9
171
10
15
224
남전도인
44
226
2
6
68
9
12
73
9
8
48
여전도인
4
38
1
5
48
4
4
50
5
5
44
매서인
6
51
2
6
39
4
3
72
7
7
74
의 원
2
2
12
2
2
15
2
2
17
금년세례받은이
361
958
7,100
352
970
8,451
779
1,188
10,082
세례인도합
1,961
14,353
1,000
2,278
24,239
1,352
3,156
30,337
2,045
3,464
39,394
유아세례
65
300
2,682
30
99
3,252
71
243
4,567
금년원입
934
2,033
23,151
1,268
2,403
17,588
2,049
1,676
14,507
원입도합
2,098
12,161
1,276
2,006
24,128
2,263
2,243
30,065
2,361
2,485
33,790
교인도합속인
9,376
59,943
6,400
9,112
94,981
7,500
7,409
119,273
11,837
9,152
140,470
장립집사
9
0
7
17
신학생수
2
6
99
4
25
205
0
14
154
대학교
0
0
2
0
0
1
0
0
1
중학교(남)
(여)
1

0
2

1
11

6
1

0
2
24
1
2

2
22
소학교(남)
(여)
44
238
27
30
542
26

2
36

2
694
21

3
38

2
684
대학생수
0
1
30
0
0
21
0
0
37
중학도(남)
(여)
497
5,124
84

0
62

30
682

202
20
64
1,332
15
82

30
1,442
소학도(남)
(여)
336

52
400

35
10,491

2,644
737

95
867

120
15,673
485

130
1,036

89
14,863
예배처소
121
546
84
123
1,119
118
142
1,580
26
175
1,632
예배당
109
584
63
105
897
80
151
1,193
85
152
1,157

『독노회록 및 제1회총회록』 참조


                                       [표12]인도별(1896~1907)교인수 통계

연 도
장로교
감리교
합 계
1896
2,530
1,826
4,356
1897
3,276
2,888
6,614
1898
4,899
3,465
8,364
1900
14,509
6,409
20,918
1904
25,356
10,439
35,795
1905
37,407
18,140
55,547
1906
56,934
32,718
89,652
1907
72,968
33,319
106,287


『한국교회 100년 종합조사연구보고서』 1982. 145∼150쪽 참조. 장로회 교인수가 10년 동안 25배나 증가한 엄청난 변화를 볼 수 있다.

 

 

  ② 독노회의 활동상황


(1) 북전라·남전라에서 독노회에 파송된 회원

제1회 1907년 9월 17일
북전라회원 목사-이눌서, 최의덕, 마로덕, 전위렴
           장로-최중진(태인 매계), 최흥서(임피 만자산)
남전라회원 목사-배유지
           장로-임성옥(무안 목포)

제2회 1908년 9월 6일
북전라회원 목사-이눌서, 최의덕, 류서백(전주), 부위렴, 어아력(군산)
           장로-김필수(전주), 최중진, 최흥서, 최치국(만경 송지동)
남전라회원 목사-변요한(목포), 배유지(광주)
           장로-임성옥(무안 목포), 변창연(장성 영신촌)

제3회 1909년 9월 3일
북전라회원 목사-이눌서, 류서백, 부위렴, 어아력
           장로-김필수, 최흥서, 최치국, 이자익(김제 팟정리),
           황운섭(태인 매계), 서영선(천원)
남전라회원 목사-배유지, 이기풍(제주도), 하위렴
           장로-임성옥, 변창연

제4회 1910년 9월 18일
북전라회원 목사-부위렴, 어아력, 마로덕, 김필수
           장로-김규배(한산 연봉), 오인묵(궁말), 신경운(부안 관동),
           최치국
남전라회원 목사-배유지, 변요한, 고라복, 로라복, 맹현리, 윤식명,
           이기풍
           장로-임성옥

제5회 1911년 9월 17일
북전라회원 목사-이눌서, 최의덕, 마로덕, 부위렴, 김필수, 강운림
           장로-김규배, 김응규, 이승두, 서영선, 조덕삼, 최국현,
           오인묵, 이성일, 최흥서, 최학삼, 이원필, 신경운, 류기택
남전라회원 목사-배유지, 윤식명, 타마자, 이기풍, 하위렴
           장로-변창연, 양성률




이기풍목사

제1회
  1907년 대한예수교장로회(독노회)가 창립선언을 하였다. 한국인 최초의 7인 목사를 안수 장립하여(서경조, 한석진, 송인서, 양전백, 방기창, 길선주, 이기풍) 장로회 신경과 규칙을 제정 채택 실시하되 1년 임시 채용하여 검사하기로 결정하다. 제주도에 선교사(이기풍 목사)를 처음으로 파송하였다. 총회의시 사용할 사회봉을 제작하고 ‘고퇴’라고 이름하다.


제2회

  1908년 노회 아래 각 지방에 8대리회(경기, 남평안, 북평안, 황해, 남전라, 북전라, 경상, 함경)를 설치하여 노회업무를 위임·처리하게 하다. 교인의 이명을 당회가 주관할 것이며 당회가 미조직된 경우에는 담임조사와 영수가 처리하되 그 지방 담당목사에게 보고하게 하다. 교인의 혼인은 교인 간에만 할 것이며 불신자와는 하지 못하도록 하다.

제3회
  1909년 전라대리회 출신 신학준사 김필수·최중진·윤식명과 다른 지방 대리회 출신 김찬성·이원민·최관흘·장관선 8명이 평양 장대현예배당에서 9월 6일 하오 8시에 노회장 원두우 목사의 주례로 목사 장립을 받다. 북전라·남전라 출신 목사에게 다음의 임무를 맡기다 ① 최중진 목사는 정읍·태인 등지 교회에서 류서백 선교사와 동사(同事)목사로, ② 김필수 목사는 진안·장수·무주 등지 교회에서 마로덕 선교사와 동사목사로, ③ 윤식명 목사는 무안·목포지방에서 하위렴 선교사와 동사목사로 각각 담당하게 하다. 독노회에서 주간신문(대한예수교회보)을 발행하기로 하다. 책벌받은 교인의 이명천서에 책벌사항을 기재하기로 하며 해벌권 역시 이양하기로 하다. 교회에서는 여자교인 또는 여학생들의 품행이 외부의 비난거리가 되지 않도록 유의하기로 하다.

제4회
  1910년 전국교회가 장로회 감리교 연합하여 백만인구령(전도)운동을 전개하기로 하다(한 주간 특별 새벽기도회 실시). 교인의 신급(信級)을 원입, 학습, 세례로 각 교파에서 일치하도록 하다. 정사위원회(定事委員會)는 전북대리회가 최중진 목사가 교회를 해롭게 하고 노회 앞에 한 약속을 배반하였다 하여 휴직처리한 바 본인이 불복하므로 회개를 바라나 불응하면 면직(免職)함이 가하다고 심의·보고하였고

다시 본회의에서는 최중진 목사와 최중진 목사가 담당하던 각 지교회 편지위원회로 하여금 권면 편지하기로 하다.


제5회
  1911년 주일을 못 지키는 사람에게 세례 주는 일은 불가한 것으로 규정하다. 1912년에 총회 조직업무 책임자로 다음 7인을 선정하고 창립총회 소집일자는 9월 첫주일로 정하다. 남평안(주공삼), 북평안(로세영), 황해(이원민), 경충(원두우), 남북함경(부두일), 남북전라(김필수), 남북경상(왕길지) 등 총회를 조직할 때 7개 노회를 설립하기로 하다.




대한예수교회보
 
 
 
        ③ 독노회의 지방대리회 설치


                              (1) 지방대리회 설치와 지교회 설립

  선교사들만으로 한국 교회를 관장하던 선교사공의회시대(1893∼1900년)가 지나고, 1901년부터 선교사 25인과 한국인 총대 9인(한국에서 장로 선거는 1900년부터 시작하였으므로 총대 중 장로는 3인, 조사는 6인)으로 구성된 합동공의회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때에는 전국 교회의 치리를 지역을 나누어 담당하였는데, 먼저 지방 공의회 위원이 설립된 서울과 평양에 이어 1901년에는 전라와 경상에 공의회 위원을 두었다. 1902년 합동공의는 장로 4, 조사 5, 집사 2, 기타 총대 5, 선교사 28명 모였으나 그해 말경 전국 장로회회의 통계에서는 선교사 34, 장로 5, 조사 46, 교회 366, 학교 60, 학생 1,300명이었고 1904년에는 전국 교회의 장로의 수만도 25명으로 증가되었다.

   전라공의회에서는 1904년 당시 장로 총대는 없었으나 조사(助事)또는 기타 총대로서 4인(金弼秀·尹植明·崔重珍·金昶國)이 참석하여 위원으로 임무를 담당하였다. 지역대리회의 전신(前身)인 전라공의회가 조직되어 각 지방 교회 설립을 활발하게 진행하므로 교세가 날로 확장되었다. 전라공의회가 조직된 때부터 공인되는 지방 교회의 설립 상황은 다음과 같다(1901~1907년 독노회 창립 때까지 전라도 지방교회 설립 상황).

1901년 익산군 남전(南田)교회, 무주군 돌목(石項)교회, 광주군 우산리(牛山里)에 세운 것을 이전하여 송정리(松汀里)교회를 세움.

1902년 순창군 반월리(半月里)교회, 장성군 보생리(寶生里)교회, 화순군 대포리(大浦里)교회, 해남군 우수영(右水營)교회, 해남군 선두리(先頭里)교회, 익산군 춘포면 판문(板門)교회
1903년 고창군 신촌(新村)교회, 익산군 고내리(高內里)교회, 김제군 대장리(大長里)교회, 김제군 월성리(月城里)교회, 익산군 삼기면 서두리(三箕面西豆里)교회, 장성 율곡리(栗谷里)교회, 장성군 황룡리(黃龍里)교회, 영광군 대전리(大田里)교회, 나주군 광암리(廣岩里)교회

1904년 김제군 대송리(大松里)교회, 정읍군 천원(川原)교회, 부안군 건선면 관동(冠洞)교회, 광주군 양림(楊林)교회, 영광군 신천리(新川里)교회, 곡성군 옥과리(玉果里)교회, 나주군 덕림리(德林里)교회, 완도군 관산리(冠山里)교회

1905년 임실군 삼길(三吉)교회, 전주군 소룡리(巢龍里)교회, 소룡리 교회에서 고산읍(高山邑)교회와 율곡리(栗谷里)교회가 분립, 익산군 선리(船里)교회, 익산군 동련(東蓮)교회, 옥구군 장평리(長坪里)교회, 김제군 팟정리(豆亭里)교회, 팟정리교회에서 같은 군 구봉리(九峰里)교회와 임실군 삼길(三吉)교회를 분립함, 충남 서천군 화산리(華山里)교회, 충남 서천군 구동(九洞)교회, 전주군 삼례(參禮)교회, 전주군 제내리(堤內里)교회, 충남 부여군 초왕리(草旺里)교회, 군산 개복동(開福洞)교회, 보성군 무만리(武萬里)교회, 광주군 삼소지(三所旨)교회, 장성군 소룡리(小龍里)교회, 나주군 방산리(芳山里)교회, 영광군 무령리(武靈里)교회, 함평군 용성(龍成)교회, 강진군 만덕리(萬德里)교회, 장흥군 도청리(都廳里)교회, 해남군 신덕리(新德里)교회, 보성군 신천리(新泉里)교회, 고창군 구암리(九巖里)교회, 진도군 분토리(粉土里)교회, 광주군 요기리(堯基里)교회, 나주군 덕림(德林)교회

 

1906년 전주군 삼례면 어전리(於田里)교회가 익산군 널문리(板門)교회에서 분립, 전주군 신리(新里)교회, 금산군 지방동(芝芳洞)교회, 익산군 곰개(熊浦)교회, 익산군 고현리(古縣里)교회, 익산군 송산리(松山里)교회, 충남 보령군 평라리(平羅里)교회, 전주군 율곡리(栗谷里)교회, 익산군 대붕암리(大鵬岩里)교회, 장성군 대악리(大岳里)교회, 나주군 상촌(上村)교회, 강진군 학명리(鶴鳴里)교회, 장흥군 진목리(眞木里)교회, 장흥군 삭금리(朔金里)교회, 장흥군 대리(大里)교회, 해남군 고당리(古堂里)교회, 고흥군 옥하리(玉下里)교회, 순천군 평촌(平村)교회

 

  위와 같이 합동공의회 시대에는 지방의 소회(小會)로서 교회 치리를 담당해왔으나 1907년 드디어 독노회가 조직되어 명실공히 합법적인 장로회 정치체제가 이루어졌으므로 전국적인 모든 교회 정치를 노회가 담당하게 되었다.

 

 1907년 독노회 설립회의에서 노회 처리 주요 7개 사항 중 “전국 지경이 광활하고 거리가 서로 멀어서 노회 회집을 빈번히 할 수 없으니 경기·충청과 평북과 평남과 경상과 함경과 전라지방에 7대리회를 두어서 노회의 위임사건을 처리하게 한다.”라는 결정이었다. 따라서 과거 합동공의회 시대 때 지방 소회에 위임했던 바와 같이 지교회 치리를 지방대리회에 위임처리하게 하는 셈이었다. 그래서 호남지방에는 전라대리회가 설치되어 1911년 전라노회가 조직될 때까지 독노회의 위임사항을 처리하게 되었다.

 

  독노회의 대리회 기간에 새로 설립된 교회는 다음과 같다.
1907년 전주군 구재리(九宰里)교회, 전주군 유상리(柳上里)교회, 익산군 황화정(皇華亭)교회, 전주군 두현리(斗峴里)교회, 정읍군 예동(禮洞)교회, 진안군 세동(細洞)교회, 전주군 밀파리(密波里)교회, 금산군 읍내(邑內)교회, 김제 난산(卵山)교회, 충남 부여군 청포리(菁浦里)교회, 부여군 좌홍리(坐鴻里)교회, 진안군 대불리(大佛里)교회, 부안군 용서리(龍西里)교회가고잔리(古棧里)교회에서 분립, 충남 부여군 홍량리(鴻良里)교회, 김제군 학천리(鶴川里, 전주군 구이면 항가리)교회,부안군 당상리(堂上里)교회, 금산군 하가리(下佳里)교회, 정읍군 신덕리(新德里)교회, 광주군 중흥리(中興里)교회, 순창군 쌍계리(雙溪里)교회, 화순군 읍(邑)교회, 화순군 칠정리(漆井里)교회, 보성군 운림리(雲林里)교회, 함평군 월봉리(月奉里)교회, 해남군 원진(院津)교회, 장성군 신호리(莘湖里)교회가 백치리(白雉里)교회에서 분립, 여수군 장천리(長泉里)교회, 고흥군 신흥리(新興里)교회, 광양군 신황리(新黃里)교회, 여수군 우학리(牛鶴里)교회, 순천군 용당(龍塘)교회

 

1908년 진안군 진상동(鎭相洞)교회, 전주군 금평리(金坪里)교회, 남원읍(南原邑)교회, 무주군 삼가리(三加里)교회, 진안군 읍내(邑內)교회, 충남 보령군 도화담(桃花潭)교회, 김제군 묘라리(竗羅里)교회, 충남 서천군 장구리(長久里)교회, 전북 무주군 이목리(梨木里, 배남기)교회, 김제군 후독(后犢)교회, 전주군 구정리(九井里)교회, 익산군 두화리(杜花里)교회, 전남 순천군 신평리(新坪里)교회, 고흥군 금산 신평리(錦山 新坪里)교회, 순천군 이미(二美)교회, 광양군 읍(邑)교회, 구례군 읍(邑)교회, 광양군 웅동(熊洞)교회, 광양군 대방리(大芳里)교회, 보성군 양동(陽洞)교회, 영광군 봉산(奉山)교회, 영광군 염산리(鹽山里)교회, 순창군 구룡리(九龍里)교회, 나주군 내산리(內山里)교회, 순창군 금성리(金城里)교회, 나주군 서문정(西門町)교회, 화순군 수리(水里)교회, 무안군 덕산리(德山里)교회, 무안군 대척리(大尺里)교회, 무안군 성남리(城南里)교회, 강진군 서산리(瑞山里)교회, 해남군 초송리(草松里)교회, 제주도 금성리(錦城里)교회

 

1909년 서천군 종초동(種楚洞)교회, 서천군 금당리(金堂里)교회, 전주군 남문밖(南門外)교회, 김제군 구봉리(九峯里)교회, 전주군 종리(宗里)교회, 임실군 응암리(鷹岩里)교회, 남원군 신풍리(新豊里)교회, 익산군 장등(長登)교회, 임실군 도하리(道夏里)교회, 광주군 일곡(日谷)교회, 나주군 덕곡리(德谷里)교회, 무안군 성암리(星岩里)교회, 함평군 영흥리(永興里)교회, 해남군 맹진리(孟津里) 교회, 제주도 조천리(朝天里)교회, 해남군 마산면 대월(大月)교회, 광양군 백암리(栢岩里)교회, 순천군 읍내(邑內)교회, 광양군 섬거리(蟾巨里)교회, 광양군 지랑리(旨郞里)교회, 순천군 대치리(大峙里)교회, 순천군 구상리(九上里)교회

 

1910년 임실군 선거리(仙居里)교회, 보성군 문양리(文陽里)교회, 함평군 향교리(鄕校里)교회, 함평군 수호리(水湖里)교회, 무안군 구정리(九井里)교회, 강진군 학장리(鶴掌里)교회, 강진군 백호동(白虎洞)교회, 해남 읍내(邑內)교회, 장성군 황룡면 월평(黃龍月坪)교회, 제주도 성내(城內)교회, 해남군 남창리(南倉里)교회, 순천군 월산리(月山里)교회, 고흥군 주교리(舟橋里)교회, 보성군 대치리(大峙里)교회, 구례군 대유리(大由里)교회

 

1911년 전주군 고산읍(高山邑)교회, 여수군 서정(西町)교회

 

 

                                      (2) 대리회의 임무처리

  1907년 9월 17일 대한예수교장로회(독노회)가 조직되어 각 지방에 대리위원을 두고 노회업무를 위임·처리하도록 하였다. 전라(남북) 지방대리회에서는 독노회가 존속되는 기간(1907∼1911년, 전라노회 조직되기 전까지)에 무려 41차례나 회집하며 5년 동안 북전라지역 각 교회에서 노회적 업무를 처리하였는데 그 중요사항은 아래와 같다.

 

  먼저 대리회의 조직을 보면, 처음 발족한 때부터 제15차 회의(1909년 9월 8일)까지는 회장에 이눌서 목사, 서기에 김필수 목사를 계속 시무하게 하였고 제16차 회의(1910년 1월 5일)부터는 회장에 부위렴 목사, 서기에 최흥서 장로를 개선하여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그후에도 김필수 목사는 임시 서기로 여러 차례 회무를 처리하였으며 대리회 마지막 회의인 제41차 회의(1911년 1월 18일)까지 업무를 처리하였다. 대리회 회집 장소는 주로 전주의 선교사 주택의 사랑(최의덕, 류서백, 강운림 선교사의 사랑)과 서문밖교회에서 모였고, 때로는 전주 서문 밖 중학당(전주신흥학교), 군산 궁말예배당과 궁말소학교에서도 모였다. 대리회 총대들이 1년에 한 차례씩 독노회에 참석하는 기간 중에는 노회 개최지인 평양신학교, 장대현예배당, 또는 평북 선천 신성중학교와 선천 염수동예배당에서도 그때그때 시급한 대로 모였다. 또 이들은 평양과 선천에서의 노회 모임을 마치고 돌아가는 중 경의선(京義線) 기차 안에서도 두 차례나 대리회를 했던 것으로 보아 당시 매우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회의가 운영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1907년 설립해서 1911년에 끝맺는 대리회 시대를 통하여 대리회 운영에 참여했던 목사는 이눌서, 최의덕, 부위렴, 마로덕, 어아력, 류서백, 강운림, 김필수, 최중진, 윤식명 제씨였고, 장로는 김필수, 최중진, 최흥서, 최치국, 서영선, 신경운, 이자익, 황운섭, 김규배, 김응규, 이공숙, 류기택, 이원필, 이성일, 오인묵, 조덕삼, 이승두, 최국현 제씨였다. 대리회의 활동은 다음과 같았다.

 

1) 대리회에서는 각 지교회 당회 권리를 지역 담당목사에게 맡기고 또는 맡은 자를 변경하는 일도 의결하였다. 1910년을 전후하여 전주부중교회(전주서문밖교회)와 전주 서편지방의 교회들의 당회권리는 이눌서(李訥瑞) 목사에게 허락하였고, 진안·장수·무주 세 고을교회의 당회권리는 마로덕(馬路德) 목사와 동사목사(同事牧師)인 김필수(金弼秀) 목사에게 허락하고, 태인·정읍·고부 동편의 각 교회 합 8처 교회와 그 근처교회의 당회 권리는 류서백(柳瑞伯)씨와 동사 목사인 최중진(崔重珍) 목사에게 허락하고, 고부 서북·흥덕·부안 남편·태인 북편·금구 남편·임실·남원·운봉 등 교회의 당회권리는 류서백 목사에게 허락하였다. 금산, 진산, 고산, 여산, 익산, 용담 등지와 전주 남문밖교회와 전주동북편교회의 당회 권리는 마로덕 목사에게 허락하였다. 옥구·충남의 서천·비인·남포·김제 서편·만경·부안 동편과 서북편 모든 교회의 당회권리는 군산의 어아력 목사에게, 충남 한산·임천·홍산·임피·익산 서북편·함열·용안·충남 은진 서편의 모든 교회의 당회권리는 부위렴 목사에게 각기 허락하였다.

  위의 대리회록을 살피면서 느끼는 것은 초기 한국 장로회의에서는 근자에 스스럼없이 선호하는 ‘당회장’이라는 호칭을 당시에는 공식적으로 쓰지 않았고 ‘당회권리’라고 하여 임무본위로 사용하였음을 볼 때 오늘의 한국 장로교회가 개혁주의 신학적 바탕에서 이탈·변질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눌서 목사 보는 지방을 ‘전주지방’이라고 부르고, 김필수 목사 보는 지방을 ‘진안지방’ 또는 ‘무진장지방’이라 부르고, 최중진 목사 보는 지방을 ‘태인지방’이라고 부르고, 류서백 목사 보는 지방을 ‘흥덕지방, 남원지방’이라고 부르고, 마로덕 목사 보는 지방을 ‘금산지방’이라고 부르고, 어아력 목사 보는 지방을 ‘옥구지방’이라고 부르며, 부위렴 목사 보는 지방은 ‘임피지방’이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2) 지교회 원입문답에 관하여는 그 지방 담당 목사의 지시에 따라 교회 시무하는 조사 (助師)가 시행하도록 하였다.

 

3) 원입목사문답을 대리회가 실시하여 신학교 진학여부를 결정하고 신학교에 수학하는 신학도의 계속 수학여부도 대리회가 심의하여 결정하였다.

 

4) 지교회의 장로, 영수,8) 집사 선택에 관한 업무를 처리하였다.

 

5) 대리회 기구 안에 수권위원회를 두어 지교회의 설립을 지도하며 허락하는 일을 처리하였다.

 

6) 각 지교회 상황을 일일이 보고받고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는 조사하여 지도·처리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7) 대리회 산하 목사들이 담당한 각 지교회의 회의록과 각종 문부를 대리회가 검사하며 감독하였다.

 

8) 각 지교회의 교역을 담당하는 조사의 임면을 허락하였다.

 

9) 대리회의 규칙을 제정하며 지교회의 담임목사 청빙하는 서식을 제정하였다. 이러한 사무적이고 규정적인 일은 거의 김필수·최의덕·이자익 씨가 담당하는 몫이었다.

 

10) 각 지교회가 비치할 각종 장부책을 김필수 목사로 초안 작성하게 하였는데 세례문답책, 원입문답책, 교인명부록, 예배록, 회계부 등 5가지였다. 그 중 세례문답책과 원입문답책은 대리회의 검사를 정규적으로 받도록 하였다.

 

11) 대리회 기구안에 전도국을 두고 사무위원을 몇 사람 선출하여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12) 노회의 정사위원(定事委員)을 대리회별로 1인씩 추천하니 마로덕 목사를 선출하다.

 

13) 학교위원을 선출하여 대리회 관할 아래서 학교의 설립, 경영을 지도·감독하였다.

 

14) 노회 지시로 각 지방대리회에서도 ‘백만명구령운동’에 위원을 한 사람씩 선정하여 부위렴 목사가 선임되다.

 

15) 각 지교회 인도자를 위하여 4주 동안 사경회를 실시하며 교육담당위원으로 김필수·마로덕을 선임하였다.

 

16) 1909년 8월 18일 북전라대리회 출신인 신학교졸업자(최중진, 윤식명, 김필수 신학준사) 중, 최중진 조사를 ‘선도사(宣道師)’라는 새로운 호칭으로 교역하게 해달라는 그의 시무지역인 태인지방 천원교회 출신인 서영선(徐永善) 장로의 제안을 대리회가 논의하다가 일단 독노회에 헌의하기로 하였다.

 

  이를 보면 한국인도 신학교를 졸업하였으니 외국 선교사와 같이 응분의 대우를 해야 할 것이라는 최중진 씨의 민족자존적인 주장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1909년 9월 6일 평양에서 열린 제3회 독노회에서 그해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신학사 8인이 목사로 장립받게 될 때 북전라대리회 소속 최중진·윤식명·김필수 3씨도 목사 장립을 받았으므로 선도사 호칭문제는 더 거론되지 않았다.

 

17) 신학교 입학지원자의 학력은 중학교 과정을 이수하여 학교장의 증명을 받은 자라야 함을 규정하였다.

 

18) 대리회에서는 성경학교의 과정과 학과목을 정하였다. 제1소는 창세기 요리문답①, 마태복음, 구약사기①로 정리되었고 제2소는 출애굽기, 요리문답②, 요한복음, 구약사기②로 정리되었다.

 

19) 노회의 지시에 따라 교회 출입 여학생과 청년 부녀들의 의복과 치장에 대하여 일반사회의 지탄을 받지 않도록 조심할 것을 각 지교회에 목회서신을 보내기로 하다.

 

20) 대리회에서 신학위원을 선출하여 신학교에 관련된 일을 맡게 하고 전도국위원을 두어 전도에 관한 일을 맡게 하고 신문위원 한 사람을 선출하여 노회에서 발간하는 주간신문에 관한 일을 맡게 하였는데 위원으로 김필수 목사를 선임하였다.

 

21) 지방 전도목사의 보수는 시무 지역 교회가 부담하도록 작정하고, 교회에서는 각 세례교인과 학습교인 당 얼마씩 의무적으로 담당하기로 하였다.

 

  대리회시대에 선교사들은 청교도적 개혁신앙의 바탕에서 희생적이고 열정적으로 선교하였고 초대교회의 신자들 또한 애국심을 지니고 자기를 위한 사사로운 일은 뒤로 미루고 열심히 전도활동을 전개하였으므로 교세는 날로 확장되어갔다. 독노회 창립 이후 5년 동안 전북대리회의 교정(敎政)은 장차 전라노회의 조직을 바라보며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최중진 목사의 자유교회 사건으로 뜻하지 않게 시련을 겪게 되었다. 대리회에서는 최중진 목사의 사건 처리 관계로 많은 시간과 정력을 기울였다. 1910년 1월 5일 전북대리회 제17차 회의 때부터 제18차, 20∼28차, 37차, 38차(1911년 1월 8일) 회의까지 약 1년간 무려 13차례 회의를 거듭하며 숙의하였다. 특히 최중진 목사 담당지역인 태인·정읍 등 그의 지도 아래 있던 교회는 혼란에 빠졌고 대리회 지도자들은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④ 독노회시대의 서문밖교회

                     (1) 1907년 대부흥운동의 여파

  당시 국정과 사회 정황은 제국주의 침략 속에서 어수선하였으며, 이에 우리 민족은 좌절감에 빠져 의기소침해 있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1904년에 러시아와 전쟁을 일으켰고 1905년에는 러시아가 장악하고 있던 중국땅 여순(旅順)과 봉천(奉天)을 점령하고 러시아의 막강한 발틱함대를 격멸시키는 등 러시아군과의 싸움에서도 승리하였다. 기세가 등등해진 일본은 우리 나라에 점차로 압력을 가하여 1904년에는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맺고 이어서 1905년 11월에는 을사조약(乙巳條約)을 강제 체결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1907년 7월에는 헤이그 밀사(海牙密使) 파견을 구실로 마침내 고종(高宗) 황제를 퇴위시키고 정미(丁未)7조약을 맺어 행정권을 빼앗는 한편 조선 군대를 해산시켰다. 실질적으로 우리 나라를 식민지로 하였던 것이다. 이같은 비운 속에서 교회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1907년 9월 독노회가 조직되기 전 1907년 1월부터 일어난 대부흥운동이 있었다.

 

 1907년 대부흥운동에는 두 원류가 있었다. 그 하나는 원산(元山)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19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스웨덴에서 잠시 한국에 다니러 온 스칸디나비아 선교연맹 소속의 프랜슨(F. Franson) 목사와 중국에서 선교하던 미국 남감리회 선교사인 화이트(M. C. White) 여선교사가 강사로 청빙되어, 한국 주재 감리교선교사들과 함께 한 주간 동안 기도와 성경연구 모임을 가졌다. 이들은 이 모임에서 감명을 받고 모임의 범위를 넓혀 현지 장로회와 침례교 선교사들, 그리고 일반 교인들까지 합쳐서 창전(倉前)교회에서 한 주일간 밤집회를 가졌다.

 

 그러던 중 남감리회 소속의 하디(R.A.Hardie, 河鯉泳) 선교사가 감동을 받고 성령의 뜨거운 임재를 체험했다.

 

 1904년 봄에 원산에서 3파 연합으로 집회를 열고 사경회를 하던 중 장로회의 로브(A. F. Robb) 선교사가 특별한 감화를 받았고 한국인 전계은(全啓恩) 목사도 원산 거리를 누비고 다니며 가슴을 치며 통회하면서 전도하였다. 감리교 정춘수(鄭春洙) 목사도 역시 감동을 받은 바를 선포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그 해(1904년) 겨울에 평양의 선교사들이 하디 목사를 초청해서 집회를 하는 중, 자신들의 선교 태도에 잘못된 점이 있었음을 통회·자복하였다. 이 집회에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일반 교인들도 구름같이 모여들어 회개와 부흥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다른 하나의 흐름은 1904년 이래 국가의 비운에 직면한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반성을 하며 난국 타개의 방법은 하나님의 도움밖에 없다는 신앙에서 눈물의 호소와 회개운동을 시작한 경우이다. 길선주(吉善宙) 장로가 한국 최초로 새벽기도회를 시작했는데, 그 뜨거운 열정이 대부흥운동의 직접 동기가 되었다.

 

 1907년 1월 14일(월요일) 평양의 감리교와 장로회 연합부흥회에서 블레어(W. N. Blair, 邦緯良) 목사가 고린도전서 12장 27절의 “우리는 다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의 한 지체라”는 설교를 한 다음 부흥의 불길이 당겨졌다.9) 선교사들과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계속해서 사랑과 정의의 실현이 고갈된 것에 대해 하나님의 간섭을 간구하였다.

 

 교인들의 감동은 놀라웠다. 교회는 신비스런 경험을 하였다.

 집회는 1월 6일부터 9일 동안 계속되어




길선주 장로

밤마다 신비의 세력이 온 회중에게 임재했다. 교인들은 감격과 눈물로 밤새워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통회의 울음과 성령의 임재로 압도되어 넘치는 물결과 같았다. 이 부흥의 불길은 경기도 도사경회를 비롯하여 가는 곳마다 참여한 교인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부흥의 횃불은 남한지역에서도 일어났고, 그 불길이 한국 남단의 목포(木浦)에도 번져왔다. 미국 남감리회 저다인(J. L. Gerdine, 全堯瑟) 선교사가 인도하는 사경회 도중에 성령 강림 체험이 일어났다. 이를 목격한 프레스턴(J. F. Preston, 변요한, 邊要翰) 선교사는 다음과 같은 요지로 표현했다.

 

  '가장 강력한 부흥회가 목포에서 열렸다. 성령께서 저다인 목사를 통해 말씀따라 의와 절제와 심판 그리고 무서움과 죄 씻음의 필요성을 증거하자 죽음과 같은 고요가 뭇사람들 위에 임하였다. 성경말씀은 마치 외과의사의 메스처럼 사람들의 심령을 쪼개어 은밀한 죄악과 감춰있는 영혼의 ‘암’들을 들추어내놓는 것과 같았다. 무거운 짐을 진 많은 영혼들이 앞을 다투어 나와서 자기 죄를 자복하였고 어른들이 마치 어린 아이들처럼 목놓아 슬피 우는 역사가 일어났다. 참석자들의 얼굴에는 새로운 삶의 기쁨이 빛났고, 회중은 승리의 찬송을 올렸다. 성령 세례의 체험을 간증하기 위한 사람들이 줄지어 섰다. 이 집회의 감동은 전라도 지방에 널리 그리고 깊숙이 파고드는 영향으로 작용할 것이다.'

 

  한국의 교회와 각 지방의 미션학교 등에 부흥의 열기가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대부흥의 불길이 거세었던 평양 안팎에는 그 감동이 계속되고 있었다. 평양장로회 신학교는 겨울학기 방학 석 달 동안 매일 저녁 한 시간씩 특별기도회를 열었고 4월에 개학해 교내 부흥회에서도 강렬한 성령 체험이 있었다. 신학생들은 눈물로 간증을 계속하였는데 이 광경을 매큔(G. S. McCune, 尹山溫) 선교사는 “장차 한국 교회의 목회자가 될 사람들은 성신의 불로 그들의 죄가 모두 태워져 버림을 체험하였다.”라고 말했다.

 

 숭실대학과 숭실중학교에서도 감화의 역사는 예외가 아니었다. 학생들의 90%가 중생의 은혜를 체험하였고 이는 평양여자고등학교 학생들에게도 파급되었다. 그해 3월 16일 평양에서 개최된 부인사경회가 12일간 계속되는데,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550여 명의 교회 여성지도자들도 성령 감화를 체험하였다.

 

  이 부흥운동의 불길은 서울에도 번져서 승동교회에 큰 변화를 일으킨 것을 비롯하여 연동교회, 수구문교회 등에도 부흥운동이 일어났고 평북의 의주에서도 그 열기가 치솟았으며 이어서 국경을 넘어 중국(만주지방) 교회에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이와같이 한국 각 지방의 교회들과 각지의 미션 학교, 그리고 이 소식을 듣는 곳마다 부흥의 불길이 번져나갔다.

 

  한편 호남지방에서는 선교사들과 교인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부흥운동에 협력하여 많은 결실을 얻었다. 군산의 교회에서는 매주 금요일 밤마다 특별기도회를 열고 전도지원자들을 훈련시켰고, 매주 토요일에는 둘씩 짝지어 거리로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주일마다 전도받은 이들을 다시 찾아 예배당으로 인도하는 등 짜임새 있는 전도운동을 전개하였다.

 

  군산 성경공부반에서는 교인들이 구령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850일 ‘날연보’가 서약되었다. 그중 한 달을 서약한 사람 중에 목수가 있었는데, 그는 마음 속에 자신의 손으로 예배당을 건축하겠다고 결심하고 열성으로 임하였고 건축에 필요한 자재는 대부분 그 자신과 그의 어머니가 마련하였다.

 

 전주에서는 서문밖교회를 중심으로 평신도 500명이 자진해서 나와 전도대원이 되었고 5,000권이 넘는 단편복음서(쪽복음)를 마련하여 각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며 복음을 전파했다. 그리고 겨울 남자사경회 공부반에 참석하여 전도하기 위하여 ‘날연보’를 바치기로 서약한 총날 수가 3,349일이나 되었다.

 

 광주의 교회에서도 1년 동안 30만 장이나 되는 엄청난 분량의 전도지를 각 호에 배포하며 전도하였고 목포에서는 복음을 듣지 못한 가정이 거의 없을 정도로 전가정을 대상으로 열심히 축호(逐戶, 호호방문) 전도를 실시하였다. 이때 영국 해외성서공회의 서기 밀러(Hugh Miller) 씨가 전도운동을 돕기 위해 권당 1전하는 단편복음서를 발행하였는데,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를 구입하여 배포한 것이 6개월 사이에 무려 50만 권이 넘었다. 백낙준 박사는 『한국개신교사』에서 당시 대부흥운동의 결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1907년의 대부흥운동은 순진하였다. 한국 교회를 영적으로 거듭나게 하였으며 이때 한국의 교회로 하여금 독특한 성격을 형성하게 하여 부흥운동 이후의 민족과 국가가 심각한 시련을 겪게 되었을 때도 한국 교회는 끝까지 인내하며 정신적으로 위대한 힘을 가지고 지도적 입장을 유지했었다. 종래의 봉건주의적 사상을 타파하고 교인들에게 성경공부와 기도하는 습관을 길러주었다.'

 

  당시는 교인의 양적인 변화보다 질적인 변화가 두드러졌음을 볼 수 있다. 부흥운동의 결과, 교세면에서는 장로회가 다른 교파보다 우세하게 된 것은 부흥운동 진행과정이 장로교회적 특성에 걸맞았음을 볼 수 있다. 1908년 감리교 해리스(Harris) 감독은 볼티모어 총회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이 부흥운동의 효과는 전적으로 훌륭하였다. 흥분된 군중에게서 정신이상 증세 같은 증상이 하나도 없었고 수천 명의 신도가 올바른 마음의 자세를 지녔으며 다수인들은 성직의 소명을 받기도 하였다. 그보다도 많은 교회에서는 성경말씀을 공부하려고 무려 2천 명의 대집회가 한 장소에서 거행되었으며 수천 명이 글읽기를 배우며 성경의 도리를 알아보려고 문의하였고, 모인 사람들 중에 술주정꾼, 도박꾼, 도적놈, 오입장이, 강도들, 독선적 유학자(儒學者)들, 구태의연한 불교도들, 아주 많은 잡신(迷神)을 섬기는 사람들이 다 예수 안에 들어와 새사람으로 변화되었으니 옛것은 다 지나가고 새것이 되었다.'

 

  1907년 대부흥운동 결과로 첫째 한국인 특유의 종교성으로 교세가 증가하였고 둘째, 한국인 목회자가 배출되기 시작하였으며, 셋째, 거듭되는 사경회에서 성경공부의 열기가 고조되어 한국 교인 전체의 60%가 사경회에 참가할 정도가 되었다.

 

 당시 사경회에서 다룬 과목은 복음서, 예수 생애, 바울 서신, 주기도문, 십계명, 사도신경, 교리문답 등이 주된 과목이었고 주일학교운영, 신앙상담, 회의법, 천문지리, 농사법, 건강위생, 생활개선 등 계몽프로그램도 포함되어 있었다. 낮에는 성경공부와 강의 중심이었고 밤에는 전도집회를 하였다. 계절은 농한기를 이용하고, 합숙하며 교인간의 친목과 단합을 도모하였다.

 

 

    (2) 전킨 목사 기념 종각 건립과 교세 확산

 서문밖교회는 터전을 서문 옆에 새로 마련하고 예배당을 새로 짓는 등 교세가 날로 증가되었다. 1907년부터 전국적으로는 활발하게 전도운동이 일어나고 있었고, 그동안 극도로 쇠약해진 병구(病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교에 열정을 쏟던 전킨(全偉廉) 목사는 1908년 1월 2일 별세하였다. 이로써 서문밖교회는 담임목사를 잃고 말았다.

 

당시 『예수교신보』 교회통신란 머릿기사에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다.

 

  '전라도 전주 전 목사가 세상을 떠남 본월 2일에 전주 전 목사가 세상을 떠났으니 그 목사를 아시는 형제자매는 육신의 섭섭한 정회를 금하기 어렵겠도다. 이 목사는 교중 사무 보는 중 제일이더니 불행히 세상을 떠났으니 장차 그 자리에 대신 사무 보실 이가 그와 같이 잘 보리라고 하기가 어렵겠도다. 이 목사가 우리 나라에 오신 지 16년에 전라도에서만 교중사무를 주관하셨으나




전킨 목사 별세 기사,예수교신보
1908. 1. 15


 사경(査經)할 때에는 항상 다른 곳으로 다니며 많이 인도하셨고 어디 가든지 하나님의 은총을 많이 받았으며 그 집안 식구는 부인과 아들 3형제와 딸 하나이더라. 슬프다. 이 목사가 육신의 고락을 다 버리고 세상을 떠나서 낙원으로 간 것을 생각하면 혹 기쁘다고도 할 수 있지마는 그 외로운 부인과 어린 자매들의 정경을 생각하면 눈이 어둡고 기운이 막혀서 기도할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항상 돌아보사 잘 보호하실 줄로 믿삽나이다.'

 

  급보를 받은 레이널즈 목사는 서울에서 달려와 전 목사의 장례를 마치고, 다시금 서문밖교회의 당회권리를 이어받아 담임목사로 교회행정을 돌보았다. 1907년에 독노회가 조직되고 전라지방 대리회가 설립됨에 따라 교회활동이 서문밖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지려 했으나 그동안 전킨 목사의 병고로 잠시 멈추었다. 레이널즈 목사는 서문밖교회와 전주 서부지역의 여러 교회의 당회권리를 가지고, 다시금 전북의 선교사역을 통괄하면서 성경번역사업을 계속하였다.

 

  이때 7인의 개척선발대로서 왔던 믿음의 동지였던 사랑하는 남편 전킨 목사를 수만리 타국인 전주의 선교 현지에서 천국으로 보내고, 철부지 어린 세 아들과 딸 하나를 품에 안고 매리 레이번 여사는 귀국하였다. 전킨 목사의 부인이 돌아오자, 미국 교회의 교우들은 전킨 목사의 한국 선교를 기념하는 뜻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인도하고 목회하였던 서문밖교회에 오래토록 기념될 만한 것을 남겨 주고자 하여, 전 목사 부인은 남편이 생전에 생각하고 있던 예배당 큰 종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 미국 교우들은 서로 연보하여 큰 종을 마련하고 이를 한국에 수송하는 경비까지 담당해 주었다.

 

 종의 구입을 위한 연보와 수송을 담당하였던 미국의 해외선교신문의 편집장 윌리엄(H.F.William) 목사는 큰 기선에 종을 싣고 태평양을 건너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전주로 가져올 때 육로로 오지 않고 범선(帆船)편으로 서해 만경강(萬頃江) 포구를 거슬러 올라와 김제의 회포면(回浦面) 쌍강포(전주에서 40리거리)에서 육지로 올렸다. 쌍강포 가까운 난산과 쇠평리 교회의 믿음의 형제들이 이 종을 쇠달구지로 서문밖교회까지 싣고 왔다.




전킨 기념종을 황소가 끌고오는 모습,1908


종각 상량식


  당시 서양 큰 종의 도착은 서문밖교회는 물론 인근 모든 교회들의 경사였다. 교회에서는 1908년 10월 26일(월요일) 제직회를 열고 종각(鐘閣)을 건립하기로 하며 본교회와 지교회의 교우들에게 알려서 연보를 하도록 널리 광고하였다. 이 종소리가 울려퍼지는 인근 교회마다 기쁨의 종소리가 되기 때문에 모든 교회의 것이라는 공동체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만큼 이 지방의 초대 교회들은 서문밖교회를 중심으로 ‘우리’라는 일체감을 갖고 단합하였다. 당시 제직회의 보고를 보면 김제 번드리교회가 이 일을 위해 5원을 연보했다는 기록과 함께 다른 교회들도 또한 협력하였던 사실을 볼 수 있다.

  종각을 건립하기로 결의한 제직회에서는 종각건축위원으로 장로 김필수, 전도인 전영칠(田永七) 집사, 교인 목수 김학수(金學洙)씨 세 사람에게 일을 맡겼다. 그로부터 1개월 반을 경과하여 1908년 12월초에 건축공사를 끝내고 회계감사도 마쳤다.

 

 12월 10일(목요일) 오후 4시에 헌종(獻鐘)예식을 하였다. 먼저 종각건축위원 전영칠 집사가 쌍강포에서 이곳 예배당까지 종을 싣고 온 쇠평리·난산 두 교회의 믿음의 교우들의 도움과 모든 협조에 대해 설명하였고, 다음으로 이눌서 목사가 종이 오게 된 것과 사용에 대한 취지를 설명하였으며, 또 미국에서부터 종을 구입하고 수송의 책임을 담당한 윌리엄 목사가 구입 사연에서 ‘전킨 목사 기념종’임을 설명하였다. 김필수 장로는 헌종의 감사 기도를 드렸다. 이어서 윌리엄·이눌서·류서백 목사와 전영칠 집사 그리고 예배당 수호관리인으로서 앞으로 때를 따라 종을 치며 관리할 안경오 씨 등이 종각에 달린 종을 한 번씩 쳤다.

 

 이때의 감격에 대해 김필수 장로는 그 당시 서울에서 발행되는 『예수교신보』에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하였다.

 

 '…한 번씩 종을 쳐보는데 “뗑!뗑!뗑!” 사랑하는 전 목사의 기념 종소리로다. 예수께서는 천당에 오르신 후 보혜사를 보내사 우리를 외로운 자식같이 버리시지 아니하시고 보호하심같이 전 목사는 종을 보내게 하여 이곳 교우와 다른 친구들을 경성하게 하셨도다.'

 

  드높은 종각에 매달린 큰 종은 직경이 90cm였다. 그후로 계속하여 교회의 집회 시간에 따라 예배 한 시간 전에 울리는 초종(初鐘), 30분 전에 울리는 재종(再鐘), 예배시각 5분 전에 울리는 삼종(三鐘) 소리의 맑고 웅장함에 원근각처(遠近各處)의 교인들은 가슴 두근거리며 소망에 부풀어 예배당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3) 서문밖교회에서 완료된 구약성경 번역

  전라지방의 교회들이 조직적으로 점차 성장한 것은 선교회가 선교지부를 설치하고 선교사들이 어려움을 극복하며 노력한 결과이기도 하나, 뜻있는 한국인들이 초기에 복음을 받아들이고 선각자답게 열심으로 협력하였기 때문이다. 선교사공의회에서 예양협정에 따라 호남지방을 분할받은 남장로회 선교사들은 이 지방에 와서 직접 선교활동을 시작하며 어학공부와 주택건설과 장터 전도, 농촌지방 순회전도활동과 사경회(査經會)를 열어 성경교육을 하는 등 힘겨운 활동을 계속하였다. 선교사 중 몇 분은 문서운동의 일환으로 책을 저술하고 번역과 출판을 하였으나 지방에서는 이러한 문서 선교에만 주력할 수 없었다.

 

  남장로회 선교회에서 제일 먼저 출간한 사람은 테이트(최의덕) 선교사의 부인이었다. 예수병원 초대원장이기도 한 잉골드 여선교사는 어린이 성경교육을 위하여 『예수교초학문답』(어린이신앙문답서)을 저술했고, 테이트 목사의 누이동생 매티 테이트 여선교사는 『인모귀도(引母歸道, Leading the mother in the right way)』를 썼는데, 이 책은 여자 매서인 과부 이씨가 예수를 믿게 된 일과, 믿은 후 친정어머니를 주께로 인도한 과정을 서술한 내용의 책자이다.

 

 그후 레이널즈 목사는 마훗(Mahooe)이 쓴 『Art of Soul Winning』을 번역하여 『개인전도』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는데, 이 책의 평판이 아주 좋아서 초판 2,000부가 1년도 못 되어 매진되었다. 이외에도 선교사들이 각 사경회에서 가르쳤던 교안, 성경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나누어 준 프린트 교본, 주일학교 공과 등이 있었고 또 의료를 담당한 선교사(Wilson, Patterson)들이 펴낸 의학에 관한 소책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모든 신자들에게 크게 기여할 수 있었던 출판물은 레이널즈 목사가 참여하여 번역한 ‘우리말 성경’이었다.

 

  1890년대 초기에 한국에 들어온 『예수셩교젼서(만주에서 로스 선교사에 의해 간행된 성경)』는 대체로 중국어 성경을 참조하여 번역되어 있어 원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또 번역에 종사한 분들이 북한 의주 주변에 거주한 분들이었기 때문에 북한 사투리 발음이 짙게 표현되었으므로 새로운 번역이 요청되었다.



구약성경 번역을 맡은 본 교회 이눌서목사,
이승두 장로와 김정삼 제씨


  드디어 1893년 언더우드, 게일, 아펜젤러, 스크랜턴, 트롤로프 등으로 전임번역자회의가 개최되었다. 남장로회 선교사 레이널즈는 이 위원회에 1895년부터 참여하였는데 그의 비범한 어학 재능은 모든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 번역위원들이 수고한 결과, 1900년에 신약성경을 일단 임시번역본(Provinsional version)으로 완료하였다.

 

 1902년 6월 번역위원회의 모임에 목포에서 임시로 목회하고 있던 레이널즈 목사가 상경할 수 없게 되자 성경번역자회의는 목포에서 열렸다. 그후 성서번역위원회에서는 위원들이 전적으로 번역업무에 종사할 수 있도록 업무를 재편성하여, 북장로회의 언더우드 목사와 게일 목사, 남장로회의 레이널즈 목사에게 성경번역에 전력을 다하도록 위임하였다. 각 선교부에서도 선정위원들을 특별 배려하여 번역업무에 몰두하게 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번역작업은 급속도로 진전되었고, 1904년에는 신약전서를 정식으로 완역·출판하게 되었다.

 

  번역사업 중 초기 번역위원이었던 아펜젤러(Appenzeller) 목사는 1902년 6월 목포에서의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그의 조사 조한규(趙漢奎)와 함께 인천에서 배를 타고 가던 중 그 짙은 안개로 군산 앞바다 어청도 근해에서 그가 탄 배가 충돌하여 일행과 함께 사망하고 말았다. 한국에 선발대원으로 온 미국 북감리회 선교부 아펜젤러 목사를 잃게 된 것은 아주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그후 위원들은 다시 회의를 거듭한 후 구약전서 번역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언더우드 목사는 신병 때문에 번역업무를 중지할 수밖에 없었고 게일 목사는 안식년 휴가로 본국에 돌아갔으며 레이널즈 목사도 선교지부에서 주택을 건축하는 일로 바빴다. 언더우드와 게일은 구약성경 번역작업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으므로 레이널즈 목사가 모든 책임을 혼자 떠맡아야 했다.

 

 중대한 구약성경 번역사업을 혼자서 감당하게 되니 작업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레이널즈 목사는 전킨 목사 별세 후, 전주로 가족을 이끌고 내려와서 서문밖교회의 목회와 전주지방 서부에 있는 10여 처 교회의 교역까지 맡으면서, 한편으로 다른 번역위원들의 몫까지 짊어지고 번역작업을 해야 할 형편이었다. 어떤 이들은 구약 번역 완료가 앞으로 십수 년은 걸려야 될 것 같다고 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우려 속에서도 레이널즈 목사는 악전고투하며 부지런히 일한 결과 착수한 지 5년 4개월 16일만인 1910년 4월 2일 구약전서의 번역을 완성하였다. 일을 마치고 레이널즈 목사는 너무나 기뻐서 서울 번역위원회 본부로 ‘구약성경 번역완료’라고 전보를 쳤다. 언더우드 목사가 번역한 예레미야서를 제외한 구약성서는 거의 레이널즈 목사의 노고에 의한 것이다.


   이때 전주에서 레이널즈 목사의 번역작업을 전적으로 돕기 위해 그의 번역사무실에서 같이 일했던 한국인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서문밖교회에서 주요제직으로, 인도인 역할로 교역에 충성하고 있는 이승두14) 씨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서울에서 번역업무에 종사하다가 내려온 김정삼(金鼎三) 씨이다. 이들은 번역업무에서 우리 말 교정작업을 담당하고 있었다. 한국어구약번역사(韓國語舊約飜譯史)에서 레이널즈 목사는 참으로 빛나는 존재였다.

 

  서문밖교회는 담임목사인 레이널즈 선교사의 주도로 제반조직이 차츰 다져지고 있었고 




이승두장로

김필수 장로를 비롯한 교회의 성도들도 레이널즈 목사와 이승두 씨가 구약번역작업에 정력을 기울여 노력하는 것을 알고 그들을 정신적으로 격려해 주었다.
  

  이에 힘들고 긴 번역업무가 완료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온 교회가 함께 기뻐하였다. 이미 1909년 7월 11일 투표에서 이승두·최국현 씨를 장로로 선택하였지만 번역업무를 위해 그 동안 장립을 미루어 오고 있었던 터였다. 이들의 장로 장립은 1910년 국가의 주권을 잃는 슬픔을 맞아 또다시 미루어졌고, 결국 다음해인 1911년 1월 1일 주일에 이승두 장로의 장립식이 거행되었다.15) 같이 선출된 최국현(崔國鉉) 장로는 서문밖교회에서 분립된 남문밖교회로 옮겨서 1910년 12월에 임직하였다.

 

                           (4) 최중진의 자유교회 사건

  최중진은 1894년초부터 고향 정읍지방의 고부에서 일어났던 동학농민전쟁에서 활약하던 중 경군(官軍)과 일본군의 추격을 받고 피신의 곤욕을 당하다가 순창지방에서 의병운동에 가담했다. 거기서 완전실패하고 허탈감에 빠져 고향으로 피신·은거하였다. 그러던 중 때마침 최의덕 선교사로부터 새로운 복음을 듣고 3형제(崔重珍·洸珍·大珍)가 함께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적극적인 성격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는 최의덕 선교사에게 발탁되어 선교사업을 돕다가 조사가 되었으며, 매계(梅溪)교회를 세우고 전라지방에서 초기 장로로 장립되어 태인·정읍·천원·고부 등지 교회를 돌보았다. 그는 전북지방 교계를 지도해 나갈 역량 있고 촉망받는 인물로 최의덕 선교사의 추천과 도움을 받아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졸업 후 1909년 9월 6일에는 평양 장대현예배당에서 열린 제3회 독노회에서 동료 김필수·윤식명과 함께 목사로 장립을 받았다. 그는 목사로서 태인·매계·고부·천원 등 여덟 곳 교회의 당회 권리를 맡아 열심히 교역을 하였다. 그런데 그는 목사가 된 지 4개월만에 성급한 심정에서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목회 과정의 문제들을 표출하였다. 결국 그는 1910년 1월 5일 전주에서 열리는 북전라대리회에 자신의 회의 불참사유를 통보하며 5개항을 서면으로 제의하였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소위 ‘최중진의 자유교회 사건’이 전북교계에 번져나가게 되었다.

  그가 제출한 5개항의 서면청원서는 다소 격앙된 감정으로 작성되었는지 문장이 다듬어지지는 못하였으나 주장의 골자에는 당당한 기백이 역력하였다. 거칠게 기록된 글을 오늘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원입교인에게 지키라는 현교회의 규율이 너무 엄격하니 이를 버리고 학주인(學主人-오늘의 학습교인 격)제도를 세워서 믿음이 연약한 자들로 자유롭게 가벼운 멍에를 메고 예수를 믿고 배우도록 하라.
② 군산지방에 편입시킨 부안지방을 그곳과 인접한 내가 맡고 있는 지방에 합병하여 줄 것이며 이뿐 아니라 묵은 밭과 같은 고창·무장지방을 나에게 맡겨 기경(起耕)토록 하라. 1∼2년 내에 일으킬 것이다. 나의 실력을 과소평가하지 말고 전도구역을 넓혀 달라.
③ 내가 맡은 지방에 고등학교 하나를 세워서 주님 은혜를 먼저 받은 자가 나라를 위하여 교육사업에 책임을 갖게 하라.
④ 교회마다 상구(常救)위원 두 사람씩 두어서 교회 이름으로 가난하고 어리석은 백성을 구제하게 하라. 육신이 먼저 있으니 물질적으로 주고 받는 것이 없이 말씀으로 함보다 사랑이 주님에게서 나오는 것을 사회로 하여금 알게 하여야 한다. 사회는 교회의 밑천이다.
⑤ 기왕에 나는 은혜받은 바 있으나 금번 은혜를 한번 더 받고자 하니 나에게 집 한 채를 사서 줌으로 내 생활에 도움이 되게 하라.

  이상의 다섯 가지 제안에 이어 최중진 목사는 “금번 대리회에 내가 불참함은 나의 문제를 가지고 내가 없는 데서 익숙하게 공론하게 함이며 만약 나의 제안 다섯 가지 중 하나라도 채택되지 아니하는 날에는 내가 돌아설 수밖에 없는 부끄러움을 면하려 함이다.”라고 하여 한 가지라도 거부되면 독자적으로 교회를 운영할 뜻을 표하였다. 이같은 내용을 볼 때 배수진을 친 그의 굳은 의지는 확고부동하였다. 그의 신앙관에는 강한 자아의식과 민족 사랑이 강렬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또한 구제 등의 문제에서도 내면적이기보다는 대외 표방을 고려한 정책적인 사고를 가졌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후일에 그가 일본 조합교회로 들어간 일을 생각해 볼 때 그의 신학은 재검토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의 5가지 제의에 대해서 대리회에서는 신중하게 다루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어 즉결하지 않고 특별위원으로 김필수·이눌서·최흥서 세 사람을 정하고 심의한 결과 그의 5가지 생각 중에는 긍정적인 것도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강한 항의를 내포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이 문제를 지혜롭게 처리하기로 합의하고 김필수 목사로 하여금 답변서를 작성하게 하였다. 김필수 목사가 작성한 답변서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최중진·최광진·최대진 삼형제

  귀함을 접수한 바 청구하신 5가지 중 ①항 학주인과 ④항 상구위원 일은 우리 장로회회 규칙에 관한 일이므로 본 대리회에서는 허락할 권한이 없는 일이고, ③항의 학교 세우는 일은 교회의 재정으로는 하지 말고 특별적립금이 분명하게 세워진 후에 할 일이오며, ②항의 지방 합하는 문제로는 고창·무장은 남전라대리회 소관이며 부안지방은 당초부터 옥구지방 관할이었으므로 지금의 형편으로는 더 넓게 전도구역을 배정할 수 없는 일이며, ⑤항의 가사(家事)일은 노회에서 아직은 교역자의 집을 사 줄 수 있는 재정과 규칙이 없는 일이니 부득이함이라. 그런즉 이같은 일은 첫째는 교회를 위함이고 둘째는 형님(연상의 최중진 목사를 높이는 뜻)을 유익하게 하는 일이올시다. 이같이 뜻밖의 일을 일으켜 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온 대리회원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오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기에 오는 1월 25일 하오3시에 본대리회를 전주 강운림 목사댁에서 모이겠으니 왕림하심을 바랍니다. 제의하신 바에 따라서 다음 5가지, ① 배은(背恩) ② 배약(背約) ③ 분쟁(紛爭) ④ 무지각(無知覺)함 ⑤ 불복(不伏)을 논의할 것이니 깊이 생각하시고 화합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대리회에서 어떠한 작정이 있기까지는 그간 맡았던 당회권리를 보류하시고 행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상의 답변서를 대리회가 결의함과 동시에 앞으로 모이는 대리회에서 최중진 목사와 논의하게 될 때 다섯 가지 사항에 대한 질문위원으로 ① 배은(背恩)에 대해서는 마로덕 목사·최치국 장로, ② 배약(背約)에 대하여는 이자익 장로·류서백 목사, ③ 분쟁(紛爭)문제에 대해서는 서영선·황운섭 장로, ④ 무지각(無知覺)함에 대해서는 김필수·이눌서 목사, ⑤ 불복(不伏)의 일로는 신경운 장로로 정하였다. 본사건이 재판사건으로 될 때는 최중진 목사를 위하여 변호인을 세우기로 하여 이눌서 목사가 투표로 선정이 되었다. 또다시 대리회에서는 지방교회를 수습하기 위하여 위로위원으로 황운섭·서영선 두 장로를 선정하여 최 목사가 당회권리를 담당했던 지방 교회에 파송하여 최중진 목사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고 교인들을 권면하는 일을 담당하게 하였다.

  위로위원들이 지교회에 권면하기 위하여 작성 배부한 설명 문서 내용을 보면 최중진 목사 주장의 다섯 가지 내용이 그릇된 것임을 일일이 변론·해명하고 교회들이 현혹되지 말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최 목사는 대리회에서 자기가 요구한 조건을 모두 거부하고 도리어 자기의 행위를 배은·배약·분쟁·무지각함·불복이라고 말한 문서를 들고 위로위원들이 각 교회를 순방한 일에 대하여 크게 노하고 감정이 악화되어 대리회와 갈라서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1910년 1월 25일 모이는 대리회에 일단 참석은 하였으나 대리회장 앞으로 항의의 답변서를 작성하여 제출하고 토의할 때는 “나는 자유하니 회의에서 어떻게 하든 상관이 없노라.” 하고 회의 도중 회의장에서 퇴장하였다.

  그는 답변서 말미에 제출인 이름을 ‘대한 예수교 자유회 목사 최중진’이라고 서명하였으며19) 내용에는 독립의 뜻을 나타내었고 대리회가 말한 배은 등 다섯 가지 조목을 일일이 반박하며 대리회의 처사를 바리새적이라고 비난하며 반성을 촉구하였다. 최 목사 자신에게 과거 오랫동안 복음을 위해 고락을 같이한 정리로 볼 때 대리회를 떠나는 것은 몹시 섭섭한 일이었다. 그러나 몇몇 사람에게는 불복이 될지언정 많은 사람을 구원한 선배들의 본을 받아 자유할 수밖에 없노라고 하였다. 비록 자신이 자유교회로 독립을 하나 장로교회를 어미교회로 섬길 것이며 앞으로 장로교회가 엄격한 규칙을 바꾸는 날에는 다시 화합될 수 있으리라고 했다.

 

  이 문서를 접한 대리회가 대책을 숙의할 때 이눌서 목사는 “우리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자복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용서하고 또 용서하여 좋은 해결책이 나오도록 권면하며 화목을 이루자.”라고 제의하고 다시 한번 더 김필수·마로덕·서영선을 특별위원으로 뽑아 최중진 목사에게 보내 위로와 화목을 권면하였다. 그러나 최 목사가 마음을 이미 굳혔으므로 위원들의 방문은 별다른 효과를 얻지 못하였다. 기성(旣成) 장로교회와 결별을 선언한 최중진 목사는 인근 각 교회를 방문하여 교인들을 충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태인·정읍 지방의 각 교회를 돌보며 당회권리를 행사하였던 만큼 그의 활동 영향은 실로 컸었다. 3천여 명을 헤아리는 많은 교인들이 자유교회 주장에 동조했고 여러 교회가 동요되었다. 교회와 교인들이 분쟁에 휘말렸는데 오랫동안 최중진 목사의 직접 지도를 받아온 담당지역 교회들은 대체로 자유교회 편으로 기울어졌다. 교회들은 찬반쟁론으로 예배당 쟁탈전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이에 당황한 대리회는 최 목사 처리문제로 특별 임시노회를 소집할 것을 전보로 긴급 청원하고 산하 모든 교회들에게 “자유교회 운동에 미혹되지 말고 교회를 수호하라”는 목회 서신을 띄웠다. 더 이상 자유교회운동을 그냥 둘 수는 없으므로 대리회는 노회의 업무처리를 대행할 수 있다는 서울의 노회지도자들(당시 노회장은 언더우드와 게일 목사 등)의 유권해석을 재확인하고 1910년 2월 22일 전주에서 전북대리회를 열고 토의 끝에 “최중진 씨가 목사직분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므로 그 직분을 거두고 이 사건을 노회로 올려보내자.”라는 안을 기립투표로 가결하였다. 이로써 다음 정기노회 때까지 최 목사는 휴직되었다.

 

  1910년 9월 18일부터 평북 선천 염수동예배당에서 열린 제4회 독노회에서는 22일 정사위원회(定事委員會)의 보고에 따라 “전북대리회에서 최중진 씨를 휴직시킨 사건에 대하여 조사하여 본 바 최중진 씨가 청원한 일이 법 밖의 일이오며 또 자기가 스스로 퇴각(退却)하여 교회를 해롭게 하며 노회 앞에서 한 약조를 배반하였으므로 대리회가 노회 때까지 임시 휴직시킨 것이 가합(可合)한 일이온 바 지금까지 불복하니 회개하기를 바람으로 혁직(革職, 免職)함이 가한 일”이라 함을 채택하여 최중진 목사의 신분 처리는 일단락되었다.


  최중진 목사는 목사 된 지 6개월 만에 휴직되고 1년 만에 노회에서 면직되었다. 전북 교회사에서 목사면직 사건이 있었던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어떤 이들은 그가 선교사 최의덕 씨와 오랫동안 동역자로서 사소한 일로 인격적 차별대우와 감정대립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발단된 것으로 전하고 있으나 목사가 된 이후 최중진 목사의 자세와 주장을 통해 볼 때 자존심과 왕성한 사업욕구에서 경제적 요망이 뚜렷했고 선교사에 대한 대우와의 격차에 불만을 느끼고 시정해 보려고 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대리회가 자유교회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서문밖교회와 깊은 관련이 있는 두 분의 한국인 지도자를 비교해 볼 수 있다. 그들은 최중진 씨와 김필수 씨이다. 최중진 씨는 초기 조사와 장로로 선교정책상 전주와 정읍·고창지방을 왕래하면서 전북 교회의 중심이었던 서문밖교회에 자주 출입하였다.



김필수 장로,본교회 초대
장로이며 한국인 최초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그의 친동생 광진(洸珍)은 서문밖교회 제직원으로 1911년 예배당 증축시에는 적극적으로 봉사하였고 1912년에 장로로 피택되었다가 1915년에 장립을 받았던 관계로 인연이 더욱 깊어졌다.

 

  한편 김필수 씨는 전주에 오면서부터 서문밖교회에 교적을 두고 뿌리를 내리고 집사·조사·장로로서 그의 교역생활을 펼쳤다. 물론 초기 예수교장로회공의회에도 최중진과 마찬가지로 서문밖교회의 평신도 교사 대표로 참여하였으며 교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계속하였다. 김필수 씨는 경기도 안성 출신으로 1900년을 전후해 서울에서 남장로회 선교사와 연결되어 선교사들의 어학선생으로 전주에 와서 자리를 잡고 최의덕 선교사 남매의 어학선생으로 또는 신흥학교 교사로, 나중에는 해리슨 선교사의 조사로 활동하면서 일찍부터 서문밖교회의 교인으로서 열심히 참여하였고, 예수교장로회공의회에도 총대로 매년 참석하며 활발하게 일을 해왔다. 그는 뛰어난 한학지식과 개화사상을 가졌고 또 일찍이 일본에까지 수학차 다녀온 바 있는 유능한 청년이었다. 그는 조리 있는 언변과 유려한 문필력으로 늘 서기직무를 담당했다. 그는 서문밖교회의 초대 장로로서 대리회의 서기·회장, 노회의 서기·회장 및 총회 부서기와 서기를 몇 차례 거치면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하는 등의 능력 있는 인재였다. 회무처리에서는 사건의 해석과 깔끔한 문서작성 등을 그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 지혜 있는 교회 지도자였다.

 

  한편 최중진 씨는 초년에 동학농민운동에서나 그 다음 의병운동에서 민족정신을 밑바탕으로 하여 열정적이며 과단성 있는 출중한 인물이었다. 특히 언변과 통솔능력이 뛰어나 남을 위압하는 지도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대신 고집과 뚝심도 대단하였다. 특히 권위의식이 강한 교역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일단 자기도 목사가 되었으니 선교사와 같은 품격으로 또 생활 수준과 주택도 신분에 맞게 구비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특히 전도를 위한 선교비 활용 능력에 있어서 선교사들과 너무도 격차가 크자 마음속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는 신학사상 문제와는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교회 운영을 하고자 하는 자유사상으로 이어졌고 결국 민족자존 의식으로 선교사에 대항하게 되었던 것 같다.

  대리회의 자유교회 사건처리에서 문서 논쟁은 위 두 분이 쌍벽을 이루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두 분 성격의 강유(强柔)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최중진과 김필수는 초기 신흥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함께 했고, 교역생활에서도 같은 대리회에서나 노회에서도 뚜렷하게 같은 비중으로 일을 하였으며, 평양신학교도 동기동창생으로 수학하였고, 목사 장립도 같은 날 동시에 함께 받았던 신앙의 동료였다.

 

  면직 후 시간이 경과하면서 최중진은 1914년 8월 15일 광주 양림동중학교에서 열린 제4회 전라노회 앞에서 그간 동생 최대진 목사의 간절한 설득과 권유를 받고 과거의 잘못을 사과하였다. 그의 자복하는 말을 들은 노회원들은 그를 관용하며 반가이 맞아주었다. 그리하여 그의 교적을 본인의 청원대로 김제 팟정리교회에 등록하기로 하였다. 2개월이 지나서 1914년 10월 12일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계속 노회에서는 노회 정사위원회(定事委員會)에 맡겨 그를 강도사로 복구시켜서 최의덕 목사와 동사(同事) 교역을 하게 하였다. 그러나 목사직으로는 복구하지 못하고 하필이면 최의덕 선교사와 동사하게 하였으므로 그는 1년이 채 못 되어 그 당시 한국에 침투해 들어온 일본 조합교회(組合敎會)에 가입하고 말았다. 최중진은 하등의 청원이나 변명도 없이 장로회의 강도사 직분을 버리고 다른 교단으로 나갔다 하여 다음 노회에서 그를 제명처리하였다.




당회록,1909~1953(본 교회 당회가 조직된 것은 1908년이며,본 교회 당회록은 1909년 부터 현재까지 비교적 충실하게 보존되어 있다.)




당회록 내용


  그 당시 일본 조합교회는 조선총독 데라우치(朝鮮總督 寺內正毅)의 재정지원을 받으며 조선에 침략해 일본화운동의 앞잡이 노릇을 했으므로 최중진을 따라서 자유교회로 나갔던 교인들은 이를 깨닫고 그를 더이상 따르지 않았다. 지도자를 잃은 자유교회는 점차로 위축되어가고 조합교회 역시 친일운동의 일환작업이었으므로 제대로 발전하지 못하고 자연히 소멸되고 말았다. 성격이 강직한 최중진이었으나 그간 자기가 지녔던 민족의식이 일본 조합교회운동으로 상실된 것을 깨닫고 전도운동을 중단하였다. 그는 당시 사회적 천민계급의 신분해방을 주장하는 형평사(衡平社)를 중심으로 한 형평운동(衡平運動)에 뛰어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복음전파에서 떠난 그는 결국 사회운동에서도 별로 빛을 발하지 못하고 남은 생애를 보냈다. 그의 민족의식은 당당하였지만 그는 극한 감정에 사로잡혀 금력의 유혹이 도사리고 있는 일본 조합교회의 한국 교회 일본화 계획에 동참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한편 김필수 씨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을 지낸 후 일선 교정에서 물러나 기독교 문필 생활을 통해 많은 업적을 남겼다. 예수교회보를 비롯하여 기독신보 주필, 때로는 조선예수교장감(長監)협의회 연합운동의 선두자, 기독청년대전도운동 단장을 역임하고 중앙기독청년회(YMCA) 조직운동에 참여하여 가는 곳마다 문필로 보석과 같은 논설을 많이 피력하였고, 기독교서회의 편집위원으로도 꾸준히 활동하였다. 그는 서문밖교회 출신으로서 호남 교회가 낳은 장로교단의 거목이었다.

 

 

 

 

                       제3절 교회의 정비와 사업


                ① 조직교회를 향한 제직회 구성

  1908년 1월 2일 전킨 목사가 별세한 후 그 후임으로 레이널즈 목사가 다시 서문밖교회의 담임목회자가 되었다. 1908년 4월 13일(월요일) 오후 7시 테이트(최의덕) 목사의 사택에서 교회의 주요한 일꾼들이 회집하여 제직회를 구성하였다.22) 제직회장에는 레이널즈 목사가, 서기에는 김권준이 선임되었고, 회계 보고는 니스벳(柳瑞伯) 목사가 담당하였다. 류 목사는 이미 미국으로 떠난 전킨 목사 부인(메리 레이번 여사)으로부터 서문밖교회의 회계 문부와 잔금을 인수하여 보관하고 있었다. 다음 4월 27일 통상제직회의에서는 교회 회계로 최국현 집사를 선임하였다. 그날 밤 제직회에 참석한 인원은 이눌서 회장과 김권준 서기, 류서백 목사와 조사 김필수, 전도인 전병직 씨 그리고 김영헌·최국현·전영칠·김영식·김우열·오공여·박장준·박은섭·이성옥·정덕명·강태화 제씨 등 16명이었다.

 

  첫 제직회에서 회장·서기·회계 선출과 교회의 회계 출납 상황을 보고받고 집사 두 사람 선택하는 일을 다음 주일(4월 19일) 세례교인들이 모여서 투표로 선출할 것을 결의하고(결과는 교인 52명이 투표해 최국현·전영칠이 선출되었음) 구역권찰 선정은 전영칠·전병직에게 맡기기로 하였으며 교회의 부인 전도인(전도부인, Bible Woman) 선정은 제직회에서 하기로 하여 신리 아씨(성명 미상)가 선임되었다. 그후 서문밖교회 제직회에서는 지교회 신평리예배당을 짓는 데 건축비로 일백 냥을 대출하기로 했으며 쇠평리·두현리·새원교회 건축에는 보조금을 지불하였고 교회 전도인들에게는 수고에 대하여 일비로 1냥 3전씩을 지불하기로 하였다. 당시의 재정규모는 4월의 회계보고를 보면 연보수입금이 450냥 가량이었다.

 

 당시 교회의 재정운영 방식에서는 먼저 회계집사의 경리에 정확을 기하기 위하여 ‘연보검사위원’ 두 사람(김영헌·김권준)을 선정하고 검사위원의 회계에 대한 매월 검사 결과 보고를 받는 제도를 실시하였고 교인 전체의 참여를 위하여 매월 첫 주일에는 교회 회계가 교인들에게 연보수입지출 결과를 공개 보고하였다. 이것은 교회를 담임한 레이널즈가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정확을 표방하며 교인들의 신뢰를 받게 하려는 행정조치였다. 제직회의 회집은 매월 마지막 주일이 지난 월요일 저녁에 모이기로 하였다. 또한 통상제직회에서는 정규적으로 보고하는 사항 중 특히 매주일 예배시간 이외에 교회에서 실시하는 통칭 ‘월보(月報)공부’의 수강상황 보고가 있었다. 예배시간 전에 성경공부를 교인들에게 실시하고 성경기초강론을 하였다. 1년 동안의 월보공부 참석인원은 1908년 5월에 263명이 모이기 시작했는데 매월 300명, 400명, 500명선으로 증가되어 일년 후인 1909년 4월에는 545명이 되었다. 이를 보면 1900년대 초기에 성경공부에 관하여 교인들이 얼마나 열성적이었던가를 짐작하게 한다. 따라서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인원의 증가율도 점점 높아졌으리라 추측된다.

 

  또 매월 통상제직회에서는 본교회 파송의 지방 전도인들과 본교회 교인들의 한 달 동안의 개인 전도상황과 제직원 중 교회 일로 활동한 경과를 개인별로 낱낱이 보고하였다. 그 동안 교회의 전도인은 전병직이었는데 1908년 10월 통상제직회에서는 투표로 전영칠을 선임하였다. 서문밖교회에서 파송하는 지방전도인으로는 안백선·유경선·정사규 등이 주로 지방활동을 했고 전병직·전영칠·김영식·윤창호·박은섭·김성배·강태화 제씨가 전주와 지방에서 전도운동을 하였으며 김필수·최국현·이성옥·김권준·이승두·양경현 제씨는 서문밖교회를 중심으로 전도활동을 하였다. 이들의 한 달간의 실적을 예로 들면 안백선 350명, 유경선 461명, 최국현 39명, 강태화 54명, 이성옥 63명, 전영칠 123명, 정사규 159명, 전도회 서기 김성배 699명 등이었다. 특히 교회 직분 중에 교회 인도인 제도가 있어서 교회 집회 때 인도하는 일을 담당하였는데 서문밖교회와 전주 주변의 교회 및 기도처에 인도자가 없으면 그곳에 파송하여 주일예배회나 삼일 또는 사일(수요일 또는 목요일) 기도회를 인도하게 하였다.

 

  서문밖교회 제직회에서는 본예배당에서 야학교를 경영하여 주로 한글교육과 성경기초교육을 실시하였는데 당시의 세례문답에서 문맹자를 낙제시키고 성경 읽기를 적극 권장하여 문맹퇴치운동을 겸하여 실시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 소박한 충성심으로 열의있게 실시하였던 교회 전체적인 성경공부(사경회와 월보공부 등)와 개인전도운동(지방전도인제도 및 교인개인전도 자진 참여) 등은 오늘날 교회들의 현상과 비교하여 볼 때, 현대 교회들의 일과성 외식적 행사 본위를 반성하고 새로운 각오를 갖도록 한다. 그외에도 교회에서는 김필수·전병직으로 하여금 부중(府中) 전도 방책을 세우고 교인 중 개인전도운동에 헌신·사역하는 이들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일비로 1냥3푼을 지급하기로 하였다. 전주 주변의 유상리·맹화동 등지에 삼일 기도처를 설치하고 인도인을 파송하기도 하였다.

 

  한편 교회 매장지로 전주 동편의 야산 일부를 일찍이 마련하고 관리해 오던 중 다시 전주 서편 서원 너머의 야산 일부를 서(西)매장지로 구입하고 관리자를 지정하였으며 제직회에서 투총(偸塚) 처리문제로 몇 차례 논의한 바도 있었다. 그 산의 임목(林木)을 겨울철 교회 난방용 화목으로 작벌하여 쓰기도 하고 전주남문밖예배당을 지을 때 건축자재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당시 전주에서는 서문밖교회를 필두로 하여 제직회가 이루어졌는데 교회마다의 제직회를 소제직회라 불렀고 여러 지교회들이 연합하여 1년에 몇 차례 모이는 것을 대제직회라고 불렀다. 대제직회는 같은 지역 안의 여러 교회가 함께 모여 하나의 공동체로서의 의식을 같이하고 연합유대를 강화하며 주로 전도운동을 목표로 하여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각 지교회들은 정기적으로 연보하여 개인전도운동과 지교회 설립에 협력하였는데 서문밖교회는 매월 10냥을 담당하였다. 대제직회는 각 교회에서 2인씩 총대를 파송하여 구성되었고 서문밖교회에서는 김필수·최국현 두 분이 주로 총대로 참석하였다.

 

  당시 교회들에서는 성경공부 운동의 확산책으로 사경회(査經會)를 실시하였는데 하나의 교회(지교회) 단위로 모이는 소사경회(小査經會)가 있고, 동일지역 내의 교회들이 함께 모여서 실시하는 중(中)사경회와, 같은 대리회 안의 모든 교회가 연합하여 실시하는 대(大)사경회가 있었다. 지교회의 소사경회가 자체적으로 강사를 충원할 수 없을 때는 서문밖교회 제직회에서 지원하였는데 다음의 [표 13]은 이를 정리한 것이다. 전라대리회 안에서의 대사경회와 전주를 중심으로 몇 교회가 연합하여 모이는 중사경회는 으레 서문밖교회에서 모였다. 각 교회에서 참석하는 모든 교인들이 숙식(宿食)을 함께하며 몇 날 동안 또는 상당기간 공동체를 이루고 친교와 우의를 돈독하게 하였던 것은 이 지방 초대교회 발전에 중요한 활력소가 되었으며 그후로도 1930년대 후반까지 이 방식이 지속되었다. 이로써 사경회는 각 지교회들을 결속시키고 신앙운동과 친교연합의 주도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사경회를 통해 조직적으로 성경교육을 실시하여 복음전파운동을 착실하게 확장시켜 나갔다.

[표13]전주서문밖교회가 각 교회 사경회에 지원한 강사 명단(1908~1910)

교회명
강사명
과 정
기 간
새원교회
안백선
박영순
마가복음
출애굽기
성경서론
3일간
신평리교회
안백선
박영순
출애굽기
고린도전서
천국비유
성경서론
3일간
학내교회
안백선
박영순
요한복음
고린도전서
성신공부
3일간
유상리교회
정사규
전영칠
예수행적
창세기
산상보훈
3일간
대문안교회
정사규
전영칠
예수행적
창세기
산상보훈
3일간

『全州西門敎會諸職會會錄』 참조.

  서문밖교회에서는 성경교육 이외에도 일반 교육사업에도 뜻을 두고 처음에는 예배당에서 야학교를 시작하였고 다음에는 예배당 가까운 서문 안 당성동(堂成洞) 집을 빌려서 주간여자소학교를 경영하였다. 이 일에 젊은 교우들 김필수·김권준·김성배·김영헌·전병직·이승두 씨 등이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여자 선교사들도 가르치는 일에 참여하였다. 그러한 학교들은 가까운 곳에 주간 학교인 신흥·기전학교가 경영되고 있기에 몇 년 계속되지 못하였으나 이미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져 가던 당시 이 민족에게는 계몽교육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1908년 8월에 서문밖교회는 처음으로 장로 한 분을 세워 하나의 조직교회를 이루고 또 여러 지교회의 중심 교회로서 포용력과 지도력을 유지하고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교회 안의 신실한 여러 일꾼들이 제직회를 중심으로 충성스럽게 봉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민족적으로 우리 나라가 일본에 병탄(倂呑)당하기 직전인 1908∼1909년이었지만 교회의 젊은 일꾼들은 정신적으로 동요하지 않고 제직회를 중심으로 신앙을 견지하며 충성스럽게 봉사와 전도에 힘쓰고 있었다. 1908년에서 1909년까지의 제직회록은 당시 주된 교회사업을 어떠한 인물들이 담당하였는가를 소상히 보여주고 있다. 당시의 제직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1908년>

4. 13.
회장-이눌서 서기-김권준 예배당수보위원-전병직·전영칠

4. 26.
회장-이눌서

4. 27.
회장-이눌서 서기-김권준 회계-최국현 권찰택정위원-전영칠·전병직 교중 상여 예비할 위원-김영헌·강태화 각 지교회 인도인 정할 위원 -전병직·김영헌

6. 1.
회장-이눌서 회계-최국현 월보강론회
서기-김영헌(가결)

6. 29.
회장-이눌서 회계-최국현 월보강론회
서기-김영헌

8. 3.
회장-이눌서 회계-최국현 월보강론회
서기-김영헌 전도인-전병직

9. 2.
회장-이눌서 회계-최국현 월보강론회
서기-김영헌

9. 29.
회장-이눌서 회계-최국현 매장지 투총사건 담당위원-김영헌·최국현·전병직

10. 4.
전도인-전영칠
10. 26.
회장-이눌서 서기-김권준 전도인-전영칠 월보강론회 서기-김영헌 대제직회 파송위원-전병직 종각건축위원-김필수·전영칠·김학수

11. 30.
회장-이눌서 서기-김권준 회계-최국현 전도인-전영칠 월보강론회 서기-김영헌 탄일예배위원-김필수·김권준·전영칠 대제직회 총대-김필수·최국현




제직회록 제1호,1908.4 ~ 1909.12


제직회록,1908.4.13

12. 28.
회장-이눌서 회계-최국현 전도인-전영칠 월보강론회 서기-김영헌 지방전도인-유경선, 안백선 종각건축조사위원-류 목사·김권준 예배당사찰-안서방(안병오)

<1909년>

2. 1.
회장-이눌서 회계-최국현 월보강론회 서기-김영헌
연보검사위원-김영헌·김권준 지방전도인-안백선·유경선

3. 2.
회계-최국현 전도인-전영칠 약방전도인-박은섭 지방전도인-안백선 월보강론회 서기-김영헌 연보검사위원-김영헌·김권준 대제직회 총대-김필수·최국현 야학교 설시 (준비)위원-김필수·김권준

3. 29.
회계-최국현 연보검사위원-김영헌·김권준 지방전도인-안백선·유경선

4. 27.
회계-최국현 연보검사위원-김영헌·김권준 월보강론회 서기-김영헌
전도인-전영칠 지방전도인-유경선·안백선

6. 7.
회계-최국현 연보검사위원-김영헌·김권준 월보강론회 서기-김영헌
전도인-전영칠 지방전도인-유경선

6. 28.
회계-최국현 연보검사위원-김영헌·김권준 월보강론회 서기-김영헌 전도인-전영칠 지방전도인-유경선 매장지 측량 지심위원-최국현 대제직회 총대-김필수·최국현 남녀소학교 부형회 발기 청첩위원-김성배·김권준 제직회 회원 명부록 교정위원-김필수·김권준

8. 9.
서기-김진상 회계-최국현( 강태화) 연보검사위원-김영헌 회계문부검사위원-이승두·박은섭 전도인-전영칠 월보강론회 서기-김영헌 상여예산위원-김영헌 매장지, 예배당 측량 지심위원-최국현

8. 27.
서기-김진상 회계-강태화 회계문부검사위원-이승두·박은섭 전도인-전영칠 검사위원-김영헌·김진상 월보강론회 서기-김영헌 인도인-이승두 종각현판각자위원-김영헌

9. 27.
회계-강태화 서기-김진상 인도인-이승두 전도인-전영칠
지방전도인-안백선·유경선 월보강론회 서기-김영헌

11. 1.
회계-강태화 인도인-이승두 전도인-전영칠 지방전도인-유경선·안백선 전도회서기-김성배

12.12.
인도인-이승두 회계-강태화 전도인-전영칠 전도회 서기-김성배 지방전도인-유경선 매장지 수호-강태화 중사경회 접빈위원-강태화·전영칠·김영식

12. 28.
인도인-이승두 회계-강태화 서기-김진상 전도인-전영칠
지방전도인-안백선 매장지위원-강태화

 

                  (2) 서문밖교회의 첫 장로 장립

  1907년 우리 나라에 독노회가 창립될 때 지방 교회의 교인 대표로 장로 총대가 참여하게 되었는데 제1회 독노회(1907.9.17∼) 때는 호남지방에서는 이미 장로가 선출되어 있는 태인·매계교회의 최중진 장로, 임피·만자산교회의 최흥서 장로, 무안·목포교회의 임성옥(任成玉) 장로를 파송했다. 제2회 독노회 때는 서문밖교회의 김필수 장로가 파송되었다. 1회 독노회 이후 교정(敎政) 지도자인 레이널즈 목사는 호남지방 대리회 운영에 좀더 유능한 장로가 기용되어야 하겠고 또 호남지방 교회의 중심격인 서문밖교회에서도 장로가 있는 당회가 조직되어야 할 당위성을 깨닫고 그 해 8월초에 김필수 조사를 장로로 선택했다. 그해 9월에 황성(皇城, 서울) 연동예배당에서 모이는 제2회 노회(1908. 9. 6)에 참석하기 전 8월 23일 주일예배 직후에 서문밖교회에서는 장로 장립식을 거행했다. 이로써 서문밖교회는 비로소 조직교회가 되었고 떳떳하게 노회에 교인 대표를 파송하게 되었다.

  호남지방 교회들의 중심역할을 담당하는 교회로서 당회 조직이 늦은감이 있었으나 교회를 자율성있게 지도하던 레이널즈 목사가 전킨 목사의 별세로 인해 1908년초부터 서문밖교회에 다시 부임하면서 드디어 당회가 조직되었다. 이 일은 서문밖교회 뿐만 아니라 호남지방 교회의 발전에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더욱이 초대 장로로 교회와 노회와 장차 총회에서 유능하게 쓰일 김필수 씨가 선출된 일은 아주 잘된 일이었다. 그는 1904년 전라공의회의 추천을 받아 최중진, 윤식명, 김창국과 더불어 평양신학교에서 원입목사 후보자로 수학하고 있었는데 서문밖교회에서 첫 세움을 받은 장로답게 교회를 대표하고 대리회, 노회 등에서 박학한 실력과 충성심으로 활약함으로써 모든 이에게 촉망을 받음과 동시에 감명을 주었다.

  1908년 9월 6일부터 있었던 제2회 독노회인 예수교장로회 대한노회에 전라대리회에서 파송된 장로 총대는 전주 김필수(金弼秀), 태인·매계 최중진(崔重珍), 임피·만자산 최흥서(崔興瑞), 만경·송지동 최치국(崔致局), 무안·목포 임성옥(任成玉), 장성·영신 변창연(邊昌淵) 등 6명이었다. 다음해 1909년 9월 3일부터 개최된 제3회 예수교장로회 대한노회가 평양신학교와 장대현예배당에서 열렸을 때 전라대리회의 파송 장로 총대는 전주 김필수, 임피·만자산 최흥서, 만경·송지동 최치국, 정읍·천원 서영선(徐永善), 금구·팟정리(豆亭里) 이자익(李自益), 태인·매계 황운섭(黃云燮), 무안·목포 임성옥, 장성·영신 변창연 등 8명이었다.

  전라대리회 안에서는 서문밖교회를 위시해 각 지교회들이 제직회와 당회와 전도회 및 또 부인 조력회 등을 구성하여 복음전파를 위해 활약했다. 특히 서문밖교회 담임 레이널즈 목사의 직접적인 지도로 시범 교회가 되었으며 지교회들을 지도하며 돕는 일까지도 담당했다.

 

 

      ②교회의 성장과 발전


   (1) 남문밖예배당의 건립과 구성


  1908년부터 담임한 레이널즈 목사의 지도와 영향을 받아 개교회의 제직원들은 절도 있게 조직적으로 전도를 했고 월보강론을 통해 성경교육을 열성으로 받고 있었다. 이때 서문밖교회는 본교회만이 아니라 주변의 모든 작은 교회들까지 돌보아 주고 있었다. 교회 설립에 대한 협조와 소사경회 실시에 대한 지도를 위해 서문밖교회 제직회는 강사를 편성해 그들로 교과 과정을 연수하게 한 후에 약체교회를 찾아다니며 성경공부를 인도하도록 하기도 했다.





남문밖예배당(현 남문교회)

서문밖교회에서 연합사경회가 모이게 될 때는 숙식까지 자진해서 지원했다.

  1905년 교회 자체 운영 일환으로는 주일에 새로 나오는 새신자를 위해 영접위원 3인(엄경찬, 유경옥, 한우성)과 신입반을 두었고 인도인 이승두가 믿음의 도리를 가르쳤다. 전도회원들은 친절하게 안내하고 신입교인의 주소와 성명을 기입한 명함통을 출입구에 달아놓고 위원으로 하여금 등록하게 하고 당일에 심방을 하는 등 구역 권찰들로 그 임무를 담당하게 했다. 이같이 열성적으로 복음 전파에 나섰기에 자연히 교세는 날로 증가되었다.

  1909년 8월 제직회에서는 남문 밖에 또 하나의 예배당을 짓기로 하고 건축자재를 벌목해 준비하기로 하였다. 서문밖교회는 전주의 복음 확장을 위해 기쁨으로 교회 분립을 추진했다.

  1910년 1월에 전주 남문 밖 지대에 예배처소를 마련하고 서문밖교회 교인들 일부로 하여금 남문밖교회에 출석하게 하였다. 전주 남문밖예배처는 최국현 장로가 담당하게 하고 회계는 이성옥 씨가 맡았다. 개인전도에 능력이 있는 강태화 씨도 서문밖교회의 회계일을 사면하고 새 교회를 도왔다. 1년 동안 남문밖 제직원들이 서문밖교회 제직회에 참석하였고 2월 제직회 이후 매월 제직회에서는 최국현 장로와 회계 이성옥 씨의 경과 보고가 있었다. 두 교회의 관할구역을 정할 위원으로 정경환, 강태화 2인을 선정하고, 레이널즈 목사와 마로덕 목사가 협조해 구역을 획정하기로 하고 앞으로 두 교회 교인들의 원입 문답과 세례 문답은 각기 따로 실시하기로 했다.

 

  전주남문밖교회 설립 초기의 상황을 보면 매주일 회집인원은 120명이고 재정 형편은 1, 2월 두 달 동안의 수입이 12원이고 지출은 7원 55전으로 잔금은 4원 55전이었다. 남문밖교회는 점차로 교인수가 증가되자 예배당을 신축하게 되었다. 그때 서문밖교회에서는 교회 매장지 임야에서 재목을 벌목했다. 1905년의 예배당 신축 때 남겨둔 주춧돌과 장보로 쓰일 재목 등을 남문밖예배당 건축에 쓰도록 하고 인도인 최국현·강태화와 서문밖교회의 전도인 전영칠이 건축공사 간역(看役)을 맡는 등 주요제직원들이 협력해 예배당이 완성되었다. 물론 남문밖교회를 담당한 마로덕 선교사의 협조도 있었다.

  이렇게 예배당을 건립한 남문밖교회는 1910년 1월부터 최국현의 인도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1910년 12월까지도 소제직회를 서문밖교회와 함께 했으며 1910년 12월 11일 주일에는 최국현(崔國鉉)을 남문밖교회 장로로 장립 시무케 하고 1911년부터는 교정(敎政)까지 완전히 독립적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2) 민족의 비운과 백만명구령운동

  청일(淸日)전쟁(1894)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을 도발하였고 우리 정부에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인 ‘제1차 한일협약’을 강제하여 우리 나라의 재정, 외교, 교육 등에서 고문정치(顧問政治)를 시행하였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제2차 한일협약’인 소위 ‘을사조약(乙巳條約)’을 체결해 한국을 통감(統監)정치로 묶어버렸다. 1907년 ‘정미조약(丁未條約)’, 소위 ‘한일신협약’ 이후에는 한국 군대를 해산시켰고 1909년에는 사법권마저 빼앗아버렸다.

  친일파 집단인 ‘일진회(一進會)’의 송병준(宋秉畯), 이용구(李容九) 등은 일본과 미리 내통하여 우리 정부에 한일합방의견서(韓日合邦意見書)를 건의하는 등 망국을 재촉하는 반역 행위를 자행했다. 더욱이 1910년 새 통감 데라우치(寺內政毅)가 부임하면서 경찰권마저도 통감부에 위양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한편 대한일보 발행을 정지시키고 또 대한매일신보도 발매를 금지시켜 언론까지 봉쇄하였다. 일제는 8월 22일 어전회의(御前會議)를 열고 친일내각의 우두머리인 이완용(李完用) 총리대신을 통해 각부 대신을 협박해 대한제국의 일본 예속을 뜻하는 합방안에 조인(調印)하게 했고 이를 8월 29일 공포했다. 민족 최대의 치욕(恥辱)적인 일이라 하겠다. 이로써 민족은 망국(亡國)의 한을 품고 통곡했으며 목숨을 끊고 자진하는 이도 있었다. 나아가 각처에서 의병들이 궐기하였다.




언론까지 봉쇄되었던 당시의 대한일보/대한매일신보

  
   당시 도처에서 일어난 의병들은 군사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신식 무기를 갖추지 못해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패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뜻있는 사람이라면 그 원인을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나라가 재기할 수 없도록 기울어진 것은 오래 전부터 정권을 장악한 수구(守舊)세력들이 사적 당략과 권력에 탐닉(耽溺)하여 반개화(反開化)의 깊은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탈함 가운데서 새로운 소망에 접한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에 선뜻 동의하며 점차로 깊은 신앙심을 갖는 한편 애국 충정을 무력으로는 나타내지 않았지만 중심에 구국의 뜨거운 정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뜻을 지닌 젊은 지사(志士)들이 모인 교회에서는 일본의 계속적인 압력에 그저 무기력하게 침묵을 유지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 당시 민족의 일원이라면 일본의 강제적 침략 위기 속에서 자주 독립을 수호하려는 마음이 간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족 독립을 목표로 하는 애국청년들 중에는 국가의 전망이 흐리고 답답하므로 당시 새로운 사상과 신흥세력으로 보여지는 교회에 민족독립운동의 기대를 걸고 운집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러자 일제는 교회를 주목하게 되었고 한국 침략의 일차적인 걸림돌로 교회를 지목했다. 일제는 여러가지 형태로 교회를 감시하며 탄압과 박해를 가해왔다. 이같은 방침은 일제 36년간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대다수의 선교사들은 한국 교회가 일본에 대결하는, 민족주의적 성향이 노출되는 것을 심각하게 우려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본국(미국) 정부의 은근한 종용과 일본 당국의 눈치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고 교인들의 무고한 희생을 원치 않아서 교회와 정치의 분리를 강조하게 되었다. 민족독립운동에만 집착했던 유지들은 이 상황을 보고 하나둘씩 교회를 떠나기도 했다.

  이때 교회는 선각자들의 모임답게 구국운동은 먼저 신앙과 국민적 자각에 있음을 깨닫고 먼저 배워야 하며 또 의식이 개혁되어야 한다고 주창했다. 전국 각 교회에서는 학당과 학교를 설치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한편 우리 글과 애국 사상을 가르쳤다. 이들은 신앙이 깊어질수록 진정한 구국이념은 하나님께 철저하게 귀의(歸依)하는 데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같은 신앙은 선교사들의 사상적 지도와 영향에 힘입은 바가 참으로 컸다.

  초대 선교사 중 장로회 선교사들은 대부분 철저한 칼빈주의자들로서 원래 영국 청교도 신앙의 전통을 이어받은 개혁주의 신앙가들이었다. 청교도주의 신앙의 공통된 특징은 엄격한 신앙 의식과 성수 주일, 신앙과 삶의 표준으로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 절제생활의 강조 등이었는데 칼빈주의 신학을 추종하는 선교사들은 신앙 규범 뿐만 아니라 교육, 문화, 경제, 정치, 예술 등 생활 각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왕권을 나타낸다는 사상을 지녔고 현실 정치문제에서는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을 견지(堅持)했던 것이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한국 교회가 애국운동을 하더라도 순수 복음과 경건주의의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았으며 무력(武力) 대결로 신자들이 희생되지 않기를 바랐기에 교회의 비정치화(非政治化)를 도모하는 방침을 세우려 했다. 그들은 민족운동을 세상 밖으로 끌고 나가기보다 교회 안에서 신앙운동으로 승화(昇華)시키려고 했다.

  대부흥의 불길은 남도 뿐만 아니라 북쪽에 위치한 전라북도 지방에까지 점점 퍼져갔다. 전북지방에서는 남도에서 전해오는 소식과 북쪽지방인 서울, 평양 등지에서 이루어진 성령의 역사에 의한 부흥운동의 감동적 소식이 점차로 파급되어 왔다. 전주의 서문밖교회를 필두로 북대리회 산하의 여러 지교회에서는 1907년 9월 독노회를 다녀 온 총대들이 전하는 소식에 깊은 감명을 받고 개인적 신앙생활과 교회적 신앙운동에 변화를 가져왔다.

  서문밖교회의 유능한 청년 제직원들은 남장로회 선교회의 리더이며 조직신학 교수인 레이널즈 담임목사로부터 신학적인 교육과 지도를 받으면서 조직적으로 교회 내부 업무 처리와 개인 전도운동을 계획적으로 벌였다. 또한 성경 공과교육인 월보공부에 매우 열성적으로 임했으므로 서문밖교회를 중심으로 주변 각 교회와 개척 교회들에도 나가서 인도를 담당했으며, 특별히 초대 교회의 특징이었던 성경교육을 위한 지교회의 소사경회와 지역 교회들이 연합해 실시하는 중사경회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당시 서문밖교회에서 활동한 일꾼은 김필수 씨를 필두로 전영칠, 전병직, 최국현, 김권준, 김영헌, 강태화, 김영식, 이승두, 이성옥, 박은섭, 양경현, 김성배, 안백선, 유경선, 정사규, 박영순, 엄경찬, 김진상, 함덕조, 정경환, 송치백, 김우열, 정덕명, 정귀서, 유경옥, 한우성, 정 근 등이었다.27)

 

  당시의 교회 부흥운동은 성경교육을 위한 사경회가 발화점이 되었고 기도에 대한 열심이 동인(動因)이 되었다. 성경공부로 기초를 든든히 세운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연히 기도를 게을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는 나라 형편을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시국이었기에 한국 교인들은 두세 사람만 모이면 간절히 합심기도를 드렸다. 때로는 새벽부터 밤까지 진행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열성이 대부흥운동을 계기로 더욱 고양(高揚)되었다. 선교사 데이비스(G. T. Davis)는 한국 교인들의 기도 모습이 너무 진지하고 열심이어서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말한 바 있었다. 결국 이같은 열성은 교세의 확장으로 이어졌다.

 

  1907년 대부흥운동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그 열기가 식어가자 일부 선교사들은 부흥의 열풍을 되살리는 모임을 갖기에 이르렀다. 1909년 남감리회 소속 선교사 3인이 개성에서 일주일간의 산상기도회를 마치고 내려왔다. 그 중 스톡스(M. B. Stokes, 都瑪蓮) 목사는 다시 지방 전도 여행에 나서면서 전 교인에게 앞으로 1년 안에 5만 명의 새신자를 얻을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 줄 것을 당부했다. 이 일이 백만명구령운동의 발단이 되었다. 이후 날짜와 집회수가 늘어나면서 ‘5만 명’을 ‘20만 명’으로 불려서 목표를 잡았다. 1909년 9월 남감리회 제13차 선교연회에서는 대회 표어를 “20만 명의 심령을 그리스도에게!”로 정했던 것을 서울의 선교연회에서 열린 복음주의 선교부 통합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the Evanglical Missions)에서는 “백만 심령을 그리스도에게!”라는 표어로 부흥 전도 목표를 재책정했다. 참으로 대담한 표어가 아닐 수 없다. 이때 한국의 장·감(長老敎·監理敎)을 통합한 교인 총수는 공식집계로 불과 ‘8천 명’선이었다. 선교사들이 어림잡아 집계한 것에 따르면 교인 총수는 약 20만 명 선이었다. 선교사들은 왜 이러한 비현실적인 목표책정으로 대규모 전도운동을 꾀했을까? 당시 급변하는 한국의 역사적 정황과 함수(函數)관계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게일(J. S. Gale, 奇一) 목사는 다음과 같이 격한 어조로 선언했다.

 

  '이 큰 전도운동은 한국에서의 특별한 노력을 요청하는 것이다. 백만명구령이라는 표어는 민족의 실망이 절정에 다다른 이 때에 모든 사람에게 널리 울려퍼지고 있다. 자기의 잘못으로 파멸과 굴욕의 구덩이에 빠져 자위(自衛)와 자치가 불가능하게 된 이 나라는 만국민의 조롱거리가 되었으며 이 나라는 구세주를 찾아야 했다. 오늘은 절정의 날이다. 우리는 내일을 기다릴 수도 없고 예언도 할 수 없다. 오늘이 전도해야 할 그 날이요, 이 곳이 전도할 곳이다! 활짝 열린 전도의 문 앞에 겸손하게 서 있는 수많은 백성과 초조한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선교사들은 이때가 한국의 중대한 고비인 것을 확신하고 있다.'

 

  여기서 선교사들이 백만명구령운동을 제창하고 추진하려는 의도를 알 수 있다. 국운이 기울어져가는 당시 한국의 정치, 사회적 상황을 전도운동 전개에 절호의 기회로 파악했던 것이다. 이 기간 중 사경회에 참석했던 지방의 한 감사(監司)는 소감을 묻자 “지금 우리는 예수교(耶魚禾敎)의 하나님을 믿는 길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기독교에 대한 귀의(歸依)는 영적 욕구였다기보다는 절망적인 정치 상황에서 갖는 기독교에의 기대감에서 비롯된 것 같다. 때를 맞추어 1910년 9월 18일 평북 선천(宣川)에서 개최된 제4회 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서는 회무의 모든 안건을 다루기에 앞서 백만명구령운동에 관한 결의안을 길선주 목사가 제의하고 부위렴 목사가 찬성해 만장일치로 통과시켜 각 대리회 별로 특별위원을 선출해 이 전도운동을 적극적으로 실시하기로 했다. 이 일은 우리 나라가 일본에 합방당한 지 꼭 20일만의 일이었다.

 

  이때 독노회에 참석했던 총대 중 북전라대리회의 목사는 부위렴, 어아력, 마로덕, 김필수였고 장로는 김규배, 오인묵, 신경운, 최치국이었다. 남전라대리회의 목사는 배유지, 변요한, 고라복, 로라복, 맹현리, 윤식명, 이기풍이었고 장로는 임성옥이었다. 전라대리회 여러 총대들은 독노회의 결의에 따라 자기 지방으로 돌아와 백만명 구령 전도활동을 전개했다. 당시 유감스럽게도 전라대리회는 최중진 목사의 자유교회사건으로 진통을 겪고 있던 때라, 대리회 자체가 구령운동 계획안을 세워 지교회에 제시하지는 못했다.

  이에 앞서 서문밖교회는 개별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적극적으로 전도운동을 실시했는데 특별 강사를 초청해서 대집회를 갖기로 했다. 강사의 형편에 따라 좀 늦추어서 1910년 6월부터 시작하기로 하고 전도집회를 효과있게 실시하기 위해 제직회는 이승두, 전병직 두 사람을 기획위원으로 선정하고 계획을 세웠다. 1910년 6월 12일 주일부터 한 주간을 백만명구령운동을 위한 특별기도주간으로 정하고 “전주 부중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자!”라는 표어를 제정하고 전교인으로 하여금 먼저 간절히 기도하게 하고 6월 20일(월요일)부터 30일까지 11일간 평양 장대현교회 길선주(吉善宙) 목사를 강사로 청빙하여 매일 밤 특별집회를 열었다.

  6월 19일(주일)부터 특별전도집회 기간에 전주지역을 십자로 갈라놓고 동서남북 4구역으로 나누어서 전교인들이 마가복음서 단편복음과 전도지를 손에 들고 각 구역별로 분대를 편성해 축호(逐戶) 전도하는 한편 집회기간 동안 매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모두 나와서 전도하였다. 밤집회에는 예배당 밖에까지 가득 모여 길 목사의 설교에 많은 감동을 받고 그 자리에서 새로 믿기로 서약한 사람이 남녀 350명에 달했다. 교회는 부흥회에서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각 구역 권찰들에게 일일이 맡기고 그들을 심방해 일주일에 한 차례씩 구역단위로 모여서 기도의 방법을 가르치게 했다. 권찰들이 기능적으로 임무를 감당하도록 직무수행 요령을 속쇄판(速刷板)에 적어 각 권찰에게 나누어 주고 교육했다. 또, 각 동네별로 담당자를 택정하고 최국현, 이승두, 전영칠, 김성배 제씨에게 위임하여 전도운동을 실시했다. 이 운동은 국운이 기울어져 가던 시기에 암울했던 마음속에 한 줄기의 광명의 빛을 전한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기대를 가지고 교회로 찾아오게 되었다.

 

                 (3) 교회의 급성장과 예배당 증축

  서문밖교회에서 1909년 8월에 발의해 1910년에 남문밖교회를 세울 때 교회 하나를 새로이 설립한다는 흐뭇함과 여유를 가지고 유능한 제직과 교인까지도 분할했다. 이미 1909년 7월 11일에 교회가 피택했던 장로 두 사람(이승두, 최국현) 중 최국현을 분립된 남문밖교회의 장로로 임직하도록 했다. 원래 서문밖교회의 초대 장로로 시무하던 김필수 씨는 1909년 9월 6일 독노회 석상에서 목사로 장립되어 전라대리회에서 마로덕 목사가 담당하던 선교 지역인 진안, 장수, 무주 등지에서 마 목사와 동사목사(同事牧師)로 시무하게 되었다. 서문밖교회의 장로로서의 시무는 완료되었지만 교회의 초대 장로였던 만큼 때때로 서문밖교회에 출석해 제직회에도 참여하고 회원으로 또는 임시회장 등으로 격의 없이 교회일에 적극 협력했다. 그러나 법적으로 서문밖교회는 시무장로가 없어 허위(虛位)당회가 되므로 1911년 1월 1일 첫 주일 예배 후에 인도인으로 계속 수고하던 이승두(李承斗) 씨를 시무장로로 임직했다. 그때 담임목사였던 이눌서 선교사는 안식년 관계로 1910년 5월부터 1년 5개월간 미국에 귀국해 있던 중이었으므로 이승두 장로의 장립식은 최의덕 목사가 집행자(회장)로서 이승두 씨와 교회 교인들에게 서약문답을 실시했고, 세 명의 목사(최의덕, 류서백, 마로덕)가 안수하고 마로덕 목사가 기도함으로써 예식을 마쳤다. 이로써 서문밖교회는 조직교회로 복구되었다. 당시 이눌서 목사는 1910년 4월 26일 제직회에서 신중한 태도로 자기가 일시 떠나 있을지라도 교회는 특별히 ‘합심(合心)’ ‘용력(用力)’ ‘기도(祈禱)’ 하며 일할 것을 부탁했었다.

  서문밖교회에 담임목사가 없는 동안 마로덕 목사가 1910년 5월부터 8월까지, 류서백 목사가 1910년 9월부터 1911년 10월까지 각각 임시로 맡아서 시무했다. 그 동안에 서문밖교회 제직원들은 남문밖교회의 건축·분립하는 일과 이승두 장로 장립식을 거행했을 뿐 아니라 때를 따라 소사경회와 대사경회, 대대적인 부흥전도운동 등 굵직굵직한 일들을 차질없이 실시했고 특히 교인들의 증가로 예배당을 증축하는 큰 역사(役事)도 실책(失策)없이 거행했다.

  서문밖교회는 남문밖교회를 분립시키고도 교인들이 계속해 증가되고 있으므로 현재 57평(32칸)의 예배당에 32평(18칸)을 증축하기로 1911년 3월 6일 제직회에서 결의했다. 다음 3월 12일 주일에는 교인들 앞에 예배당 증축의 필연성을 설명하고 건축할 연보에 관해 이승두 장로로 광고하게 하고 약속헌금 등 정리를 위해 서기로 집사 네 명(전영칠, 전병직, 김권준, 박은섭)을 선출해 이를 담당하게 했다. 이어서 3월 18일(토요일)에 임시제직회를 열고 증축위원회 담당 부서를 정했는데 조사위원으로 이승두 장로, 자재위원 중 회(灰), 개와(蓋瓦) 등은 전병직 집사, 재목위원은 전영칠, 최광진 집사로 분담시켜 3월부터 각 부서별로 일을 착수했다. 4월 제직회에서는 증축공사 감독위원으로 이승두, 윤창호를 지정했다. 제직회 때마다 김권준 회계는 교회 일반회계와 분리해 증축연보 출납상황을 일일이 보고했으며 각 위원들도 업무진행 상황을 보고하며 차질없이 업무처리를 했다. 특히 재목위원 최광진29) 집사는 그 직업이 도편수(대목 중 우두머리)인 관계로 목수일을 담당하게 되었고 그 업무과정을 일일이 보고했다.

 

ㄱ자집 예배당

 

중인교회

  
   이 증축공사는 교인들의 연보와 부역 봉사로 이루어졌다. 증축 건평은 32평(18칸)으로 기존의 건평을 합한 총평수 89평(50칸)의 ㄱ자형 지붕의 고패집으로 예배당이 완공되었다.30) 종전의 직사각형 예배당에서는 앞뒤로 길게 휘장을 쳐서 남녀 좌석을 구분해 내외법을 지키게 했다. 그러나 이제는 강단을 중심으로 해 좌우로 남녀반을 구분하고 강단 앞에서 고패로 꺾인 곳까지 앞부분만 아주 짧게 휘장을 쳐서 옆이 막힌감이 없었다. 증축된 예배당은 그 당시 예배당 건축의 모델이 되어 다른 곳에서 예배당을 지을 때도 이같이 고패형으로 흔히 건축했다. 증축된 교회는 5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교인들은 이 지역의 중심 교회로서의 보람을 느끼며 흐뭇해했다. 증축을 위한 총액이 1,761원 96전이었는데 교인들의 연보가 1,098원 72전이고 류서백 목사의 연보가 663원 92전이었다.

  한편 1908년 12월 28일 서문밖교회에서는 지방전도인으로, 류경선(柳景仙), 안백선(安伯善) 씨를 정하고 완주군 우전면 중인리 새잡이 마을에 류경선 씨를 파송하여 예배를 인도케 하였다. 당시 신흥학교 교장이었던 류서백(柳瑞伯) 목사가 심방하여 교인을 가르치고, 다음에 예배 처소도 구입하여 교회를 시작한 것이 오늘의 중인교회가 설립되었다.

 

                     (4) 교육사업 실시와 교회 발전

  1910년대의 교회 부흥은 외형적으로 예배당을 넓히고 교인이 많이 모인 현상으로만 나타난 것은 아니다. 민족적인 일대 시련기를 맞아 외부적인 자극과 내부적인 각성에서 기인된 점도 있었다. 그러나 부흥 발전의 가능성은 성경교육을 중심으로 열심히 모여 월보강론과 소사경회, 중사경회 등을 자주 열고 수백 명이 넘는 인원이 꾸준히 나와서 열성적으로 공부한 데에 있었다. 또 한 가지는 교회에서 야학교와 여자 소학교를 운영하여 교육열을 고취시킨 점이다. 그 당시 지각있는 국민이라면 “배워야 산다.”는 생각을 누구나 갖고 있었다. 교인들은 예배당 건축에만 집중한 것이 아니라 교육하는 일에도 꾸준하게 뜻을 모았다. 당시 전국 각 지방 교회들과 선교 기관들은 한국에 근대 교육을 실시할 뿐 아니라 한국인을 자주인과 자유인으로 양육하였으며 안으로는 봉건질서를 개혁하고 밖으로는 침략 세력에 저항하는 근대 시민을 양성하였다. 즉 기독교계 기관의 교육은 한말에는 개화, 반봉건 운동의 주역을 양성하고 일제하에서는 항일, 자주독립운동의 주역을 양성한 것이다. 한국의 역사를 교육하고 성경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게 하는 등 기독교계의 교육은 민족 의지를 지탱하게 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1909년 3월 2일, 서문밖교회에서는 야학교 실시를 결의했다. 이를 구체적으로 진행하기 위하여 제직회는 김필수, 김권준을 위원으로 선출해 교사 문제와 교과 과정 등을 계획, 준비하게 하였다. 한편 본교회에서 직영하는 남·여 소학교 설립도 추진하고자 1909년 6월 28일 학부형들에게 교육사업 실시에 협력을 구하는 초청장을 김권준, 김성배 명의로 보내고 7월 3일 학부형회에서 남·여 소학교 운영계획을 설명했다. 남학생 교육은 가까운 곳에 신흥학교가 위치하고 있어 중단하고 여학생만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교육장은 교회에서 가까운 서문 안 당성동에 있는 선교회 건물을 빌려서 ‘서문안여학교’라는 이름으로 경영했다. 한편 야학교는 1909년 9월 16일 개교하였는데 운영비는 이눌서 목사와 교회가 각기 절반씩 부담하기로 했다. 야학교 교사는 유급으로 채용해 이근홍, 서정현 씨가 일했고 서무의 일은 교회 제직인 이승두, 전병직, 김진상 씨 등이 도왔으나 1년 후에는 서문안여학교 운영에 중점을 두기로 하고 야학교 경영은 일단 중지했다. 여소학교의 경영은 처음에는 전영칠이 교감일을 맡았고 전병직은 서무일을 담당했다. 그러나 1912년부터는 정식으로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그때 교장인 이승두 장로와 김건표 교감을 위원으로 하고 연구하게 했으나 교육장소 등에 거리끼는 문제가 있어 근처의 기전여학교가 더 확실하게 운영되고 있었으므로 1913년 봄에 경영을 마감하고 기전여학교에 학생들을 인계함으로써 교회에서의 소학교 교육사업은 중지되었다. 일반 교육은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 등에 맡기고, 서문밖교회는 복음 전파라는 교회 본연의 사명 수행에만 역점을 두었다.

 

 

 

                                ③ 전라노회조직과 한국인 목사 청빙


                           (1) 전라노회의 조직

  한국 교회가 전개한 백만명구령운동의 결과는 목표를 세웠던 백만 명의 10분의 1도 미치지 못했다. 이 운동은 민족의 비운 앞에 두려움과 분노에 떨고 있던 한국 민족의 상황을 기독교 전파의 좋은 기회로 삼으려 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서는 인위적 명분에 치중되어 종교열에 이끌려 하나님 앞에 순수하지 못했던 점도 있었음을 자성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기독교계에서 대대적으로 일으킨 백만 명 구령운동은 곧 일제 당국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일제는 한국 침략에 가장 큰 걸림돌로 ‘기독교’를 지목하게 되었다. 그들의 눈에는 “백만 명을 그리스도에게”라는 전도운동이 마치 ‘백만 명 기독교십자군병’의 양성운동으로 비쳐졌던 것이다. 결국 일제는 기독교 탄압 계획을 서둘러 세웠고 1911년 1월에 소위 ‘105인 사건’을 조작하고 ‘일본총독 데라우치 암살 미수 사건’이라는 명목을 붙여 같은 해 9월에는 서북지방인 안악, 선천, 정주, 철산, 의주 지방에서 일대 검거 선풍을 일으켰다.




날조된 '105인 사건'피의자들이 공판정으로 끌려가는 모습


  이 사건은 비록 서북지방에서 일어났지만 체포는 전국의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전덕기, 김근형, 정희순, 최광옥, 윤치호, 안태국, 이승훈, 유동열, 길진형, 양전백 등의 저명인사들이 속속 잡혀 들어갔으며 또 선교사 윤산온(尹山溫, G. S. McCune), 라부열(羅富悅, S. L. Roberts), 사락수(謝樂秀, A. M. Sharrocks), 언더우드(元杜尤, H. G. Underwood), 마펫(馬布三悅, S. A. Moffett) 등도 이 일에 연루시켰다. 당시 체포 인원은 157명, 기소 인원은 123명이었고 그 중 기독교인이 105명이나 되어 전국 교회들은 불안에 빠졌다.

  이와 같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시련 속에서 장로교회는 그 동안 하나의 독노회로서 전국 일원을 관리하던 것을 지역별로 노회를 설립하고 1912년 9월에는 총회를 조직하였다. 이에 앞서 1911년 9월 18∼22일 전국 각 대리회의 목사 총대 92명과(내국인 46, 외국인 46) 장로 총대 105명(외국인 1명 포함), 도합 197명이 경상북도 대구 남문안예배당에 모였다. 제5회 독노회에서는 회장 이눌서, 부회장 양전백, 서기 한석진, 부서기 김필수, 회계 사락수, 부회계 김석창 제씨를 선출했고 마지막 독노회로서 통상적인 회무를 처리하는 중 그 동안의 9개 대리회(경기, 북평안, 남평안, 북경상, 남경상, 북전라, 남전라, 황해, 함경)였던 것을 7개 노회(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남평안, 북평안, 황해)로 편성, 설립도록 하였다. 따라서 1912년부터는 독노회가 아닌 ‘총회’로 모이기로 했다.

  총회 설립을 위해 7노회를 조직할 책임자(회장)를 임명하게 되었는데 북평안노회에 로세영, 남평안노회에 주공삼, 황해노회에 이원민, 경기·충청을 합한 노회에 원두우, 전라노회에 김필수, 경상노회에 왕길지, 함경노회에 부두일 제씨로 정했다. 위의 결정에 따라서 종전의 북전라대리회와 남전라대리회 회원들이 모여서 전라노회를 창립하게 되었는데 그때 상황을 전라노회의 회의록 서문에 이렇게 써 놓았다.

  조선로회는 내년부터 총회로 모이기로 작정했으니 실로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요 다만 하나님의 만고 전부터 예정하신 경영 속에 된 것인 줄로 알고 감사하나이다. 대구에 모였던 조선로회에서 전라로회 조직하라는 승인권을 가지고 전라남북 대리회 회원들이 잠시 대구에 모여서 어느날 어느 곳으로 모여서 로회 조직할 것을 작정했으니 그곳은 전주요, 그날은 10월 15일이라. 이날 하오 2시에 전라남북대리회원들이 전주서문밖예배당에서 성찬례를 거행하므로 전라로회를 조직하고 2일동안 계속해 사무를 정리했으니 우리 전라로회가 반석으로 터를 삼고 참 이치로 기둥을 삼아 영원무궁토록 견고해 천국 복음 사업이 확장하게 도와주시기를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께 비옵나이다. 아멘. 서문위원 김필수, 리승두.

  당시 전라노회 창립회원 명단을 보면, 목사는 배유지, 이눌서, 류서백, 부위렴, 강운림, 최의덕, 마로덕, 고라복, 타마자, 하위렴, 이기풍, 김필수, 윤식명 등 13명이고 장로는 양성률, 최흥서, 서영선, 신경운, 이승두, 최국현, 조덕삼, 이원필, 유기택, 최학삼, 이자익, 위위렴, 오인묵, 김응규(유고로 불참) 등 14명으로서 총대는 모두 27명이었다. 임시회장인 김필수 목사의 사회로 전라노회 창립 회무를 처리하는데 우선 노회를 이끌어갈 임원과 각부 위원을 선출하니 제1회 전라노회 회장에 김필수, 부회장은 배유지, 서기에 이승두, 회계는 최국현과 최의덕 제씨였다. 또 공천부를 구성해 각부 위원을 선출했다.

① 정사(定事)위원-배유지, 이기풍, 최흥서
② 헌의(獻議)위원-서영선, 부위렴, 이승두
③ 재정(財政)위원-이자익, 고라복, 강운림
④ 규칙(規則)위원-하위렴, 이눌서, 유기택
⑤ 학무(學務)위원-김필수, 류서백, 위위렴
⑥ 정치(政治)위원-윤식명, 최의덕, 최학삼
⑦ 검사(檢査)위원-未擇

  전라노회의 지역은 북으로는 서천(舒川), 비인(庇仁), 한산(韓山) 등의 충남 남부로부터 남으로는 제주도까지인데, 이 회의에서 전라노회 산하의 모든 교회의 교정을 위한 당회권리 담당자와 선교사들의 담당지역 등을 확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눌서 목사는 서문밖교회와 김제군 동편과 금구, 고부, 흥덕교회의 당회권리를 맡게 되었다.

  전라노회 제1회 노회장이 된 서문밖교회 출신 김필수 목사는 군산과 궁말 두 교회의 당회권리를 맡게 되었다. 본 노회기간 중 광주북문안교회에서는 전라노회 창립을 축하하고 격려하는 뜻으로 ‘성신 충만’이라는 내용의 축전을 보내오기도 하고, 특히 군산교회의 믿음의 형제 염자환 씨는 회의에서 의장이 사용할 고퇴(叩槌-의장의 사회봉)를 만들어 기증하기도 했다.

당시에 결정된 선교사들의 담당지역은 아래와 같다.

전주지방
서편-이눌서 목사
남편-최의덕 목사
동편-강운림 목사
북편-마로덕 목사

목포지방
해남과 모든 섬-맹현리 목사
강진, 장흥, 무안, 함평, 영암-류서백 목사
제주 세 고을-이기풍 목사

광주지방
나주-배유지 목사(임시 타마자)
순창-타마자 목사
광주부내-배유지 목사(임시 변요한)
남편지방-로라복 목사
장성지방-고라복 목사

[표14]조선예수교장로회 1912년 총계

목 사
장로
조 사
남전
도인
여전
도인
매서인
금년
세례인
세례
인합계
전라
노회
20
25
29
11
6
18
1,533
9,514
전국
합계
128
225
230
46
70
128
8,863
53,008
아이
세례
금년
학습인
학습
인계
교인
합계
장립
집사
신학도
중학
교수
소학교수
전라
노회
247
272
1,548
15,439
5
21
남6,여6
남39,여1
전국
합계
5,431
10,049
26,400
127,228
16
180
25
539
대학생
중학생
소학생
예배
처소
예배
당집
전도
용비
학교
용비
용비
도합
전라
노회
0
남286
여228
남821
여 84
338
211
581원495전
1,959원
248전
10,674원
045전
전국
합계
83
1,778
12,943
2,054
1,438
15,110원
45,700원
158,764원

『全羅老會會議錄』 참조.

      (2)한국인 담임목사 청빙

  그동안 일제의 침략으로 울분과 긴장을 지속하고 있던 중에 서문밖교회는 1911년 10월 15일부터 전라남북도의 지도자들이 모여 전라노회를 창립하고 새로운 책임감과 각오로 교회 정치를 펴나가고자 했다. 당시 서문밖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이눌서 선교사는 서문밖교회의 젊은 일꾼들의 활동상을 보고 교회의 자율적인 성장을 위해 한국인 목사로 하여금 직접 교회를 담당하게 한다는 방침을 굳히고 1912년 7월 8일 교회의 통상제직회에서 앞으로 서문밖교회는 한국인 목사가 담임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뜻을 제직원들에게 설명하고, 즉시 한국인 목사를 청빙할 것을 제의하니 김진상 집사가 동의했고 일동이 가결했다. 그리하여 일주일 후 제직회에서 앞으로 청빙할 담임목사의 매월 사례에 관한 예산을 세우기로 하여 오는 주일(7월 14일)에 교회 앞에 이를 광고하고 그 다음 주일(7월 21일)에는 교인들에게 이를 위한 연보를 각기 적어 내도록 했다.



서문밖교회 최초의 한국인
담임목사 김병롱

그 결과 매월 15원 가량의 예산이 세워졌다. 이로써 재정 충당을 위한 일을 준비하고 교회는 전체 회의를 열고 한국인 목사를 청빙할 것과 청빙위원으로 이눌서, 이승두, 전병직을 선정해 목사 청빙하는 일을 맡겼다.

  1912년 8월 19일, 제직회에서는 청빙할 목사가 거주할 주택을 예배당 구내에 건축하기로 하고 그 위원으로 전영칠, 최광진, 이승두를 선정했다.

  8월 25일 궁말예배당에서 모인 제2회 전라노회에서 서문밖교회의 한국인 목사 청빙에 대해 승낙을 얻고 물색한 결과 평북 의주지방에서 목회하고 있는 김병롱(金炳禾農) 목사를 청빙하기로 하고 다음달 9월 2일 평양에서 개최된 예수교장로회 제1회 총회에 참석한 교회의 청빙위원들은 다른 노회에 속한 목사를 서문밖교회가 청빙하는 것에 대한 허락을 받았다. 9월 15일 주일예배 후 목사청빙위원과 다른 제직원이 모여 정황을 교회에 보고하니 제직회에서는 목사를 청빙하기로 가결했다. 이에 청빙서를 작성하기로 하고 그 대표로 이승두, 김진상(金鎭相)을 선정해 청빙에 관련된 일을 추진하게 했다.

  한편 교회는 목사의 사택 건축 위원으로 전영칠, 최광진, 이승두 제씨를 선정하고 예배당 대지 안 동편 터에 건축을 착수했다. 11월 4일 제직회에서 주택건축의 완공을 보고하니 경비는 800냥 1푼이었다. 이어서 사택의 울타리와 담장 쌓는 일과 주택 내부 도벽 등의 일로 계속 소요되는 경비를 보고하니 동제직회에서 제직원들이 23원을 선뜻 연보해 일을 처리하게 되었다. 그 당시의 상황을 보면 교회 전체가 한국인 목사를 모신다는 자부심과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김병롱 목사는 평북노회로부터 서문밖교회가 보낸 청빙에 관해 수락한다는 회답을 받았다. 부임 절차는 서문밖교회와 협의해 1912년 11월 24일(주일) 위임 예식을 하기로 정하였다. 교회에서는 김 목사 부임을 앞두고 환영위원으로 최광진, 김진상을 선정하고 이리(裡里)역까지 출영하기로 했다. 그 당시의 철도교통망은 서울-이리-목포로 철로가 부설되어 있어 철도역이 없는 전주에서는 이리로 나가서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서문밖교회는 처음으로 담임목사를 청빙하므로 기쁨이 충만했고 서문밖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여러 지교회들과 신흥·기전학교의 교직원과 학생들, 선교기관의 직원들까지 온통 축하 분위기에 휩싸였다. 당시 서문밖교회의 첫 한국인 목회자는 단순히 한 교회만의 목회자가 아니고 모든 교회와 일반 사회의 지도자로서 환영과 기대를 한몸에 받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때의 상황은 직접 청빙을 받은 김병롱 목사의 글과 환영하는 서문밖교회의 이석원(李錫源) 집사의 글에 잘 드러나 있다.

 

                    전주교회가 사랑으로 환영함-김병롱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의 은덕과 형제자매의 사랑하심이라 제가 평북로회에 장립함을 받아 교회일 본 지 수삭이 못되어 전라북도 전주부 서문밖교회가 본로회 허락하심을 받아 평북로회에 청함으로 허가하시는 명령을 받은 날로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속히 나와 사랑하는 교회 형제자매를 반겨 만나기를 사모하다가 한 일이 되매 신의주 직행차에 실인(室人-부인)과 세 아해(3자녀)라 당일에 경성까지 와서 쉬고 익일에 전주 소음리 정거장에 도착한즉 주야로 기다리던 제직 형제들이 반갑게 부르니 이는 김 집사 진상 씨와 이 집사 석원 씨와 피택장로 최광진 씨라 면목은 비록 생소하나 신령한 마음으로 사랑은 친형제 같이 반기며 서양목사 형님들도 육십여 리 되는 먼길에 자기 마차와 안장마 두 필을 보내어 사랑하시는 뜻을 표하며 원로에 조금도 곤비함이 없이 접대하고 드러올 때에 이때는 밤이라 수십 리나 행하여는 사랑하시는 각 학교 선생 여러분이 자행거로 수십여 리를 나와 영접하고 또 수십 리를 행한즉 각반 학도들이 어둡고 추운 거슬 생각지 않고 나와 인사하는 중 어린학도들이 기쁜 소리로 부르고 오리 상거에는 여중학교 선생 누님들이 수다한 학생들 인도하고 여러 직분과 여러 사랑하는 형제는 반가히 부르는 말씀과 사랑에 손으로 붓잡고 영접함을 다 말할 수 없사와 주은을 감사할 뿐이옵고 집에 들어와 보온즉 수백 여환 가격으로 수리해 거처에 편케 하며 가용물품은 서양 부인들과 여러 직분들이 부족한 것 없이 다 마련하여 둔고로 풍족한 은혜를 받은 중 첫날부터 오날까지 시량(柴糧)과 식찬으로 은밀이 도와주는 형제자매며 이밖에도 너무 많으므로 다 드러 기록키 어렵도다 이 병롱은 무어시관대 이러한 사랑을 받으리요 과도한 사랑을 감당치 못하옵고 다만 주은을 받아 영광을 돌리고 기도할 것 뿐이올세다.

 

                      목사 환영-전주교회(이석원)
 기쁘도다 하나님의 은혜가 죄악이 많은 곳에 풍성하시고 여호와의 능력이 약한 자에게서 나타나심이여 전주란 곳은 본시 지광토옥하고 천산물이 풍족한 삼남에 곡간이라 할 만한 곳이오 일반인민이 금의 옥식하며 안일연락으로 자신행복을 삼고 외화만 숭상하는 죄악이 많은 곳이라 교회가 시작된 지 우금수십 년에 교우가 천 명에 지나지 못하고 대단히 미약한 중 삼사 년 전부터 조선목사를 연빙하려고 경영했으나 재력이 밋지 못해 유의미슈가 되었더니 지어작년하여서는 각종 물가가 고등해 경제상 활동이 곤난할지라도 일반교우의 신덕과 열심이 진보하여 목사의 월봉 지급할 예산까지 다 판비하고 때를 좇아 꼴을 나눠 먹이며 갈할 때 잔잔한 물가흐로 인도하는 목자와 같은 목사를 연빙하기로 확정하고 지방로회에 청원서를 제정하여 승락을 받은 후에 길 잃은 양떼가 목자를 두루 찾듯이 전국교회에 탐문하다가 다행히 작년도 신학교 제5회 졸업생이오 평북 의주교회서 다년 시무에 풍성한 은혜를 받으시고 교회관리상 경력이 많으신 김병롱 목사의 승락을 받고 평북로회에 열심 교섭하여 로회 허락까지 얻어 본교회 목사로 연빙하온 바 그 허락을 받은 동시에 본교우제씨는 경부선 열차편에 오실 김 목사만 일야 고대하다가 과연 명일 출발이란 전보를 받은 후 온 교회가 기쁨이 충만하여 제직회에서는 특별환영위원 최광진 김진상 양씨 집사를 60리밖 정거장까지 택송하여 환영하게 하고 일반교우와 다수 생도들은 자행거와 말을 타고 사오십 리 밖에까지 나가 환영하는 중 탄탄대로 상에서 목사의 타신 마차 전후에 일반교우가 옹위하여 신지에 도착하기까지 일장설화에 자미가 많았사오며 다음 주일에 본회 위임목사로 예식을 행할 때에 내외국 목사와 일동교우가 참석했고 순서인도 이눌서 목사 교우 권면 최의덕 목사 본목사 권면 김필수 목사인대 당일에도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과 기쁜 찬송과 기도로 하나님께 영화를 돌렸으며 날로 점점 성경의 진리를 배워 하나님의 은혜를 일층 더 받으며 교회가 점점 신령한 지경으로 나아가게 되었사오니 감사무지하옵니다.

위의 글에서 보는 바와 같이 모든 사람이 열성적으로 환영하는 가운데 감격스럽게 부임했고 순조롭게 목회를 펼치기 시작했다.




전주서문외교회 교적부(교회 설립 초창기부터 1925년까지 교우들의
가족관계는 물론 학습 세례일자까지 소상하게 기록하였다.)


교적부 내용(이돈수 장로 교적부 1918년 장로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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