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지역은 삼국시대 이래로 지리상 요충지였다. 조선 중기인 1577년(선조 10)에 광주부가 설치되어 지방관인 부윤(府尹, 종2품)이 상주하다가 1623년(인조 1)에 유수부로 승격되면서 경관인 유수(留守, 정2품)가 파견되었다.
현재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에 속해있는 남한산성은 한양의 군사적 요지로 1595년(선조 28)에 현재와 같은 성곽이 축조되었고, 1621년에 대대적인 개축공사가 있은 뒤, 1626년(인조 4)에 광주 유수의 치소와 마을이 성안으로 이전되었다. 이후 광주는 1636년의 병자호란 이후 한때 부윤으로 복구되었다가, 1750년(영조 26)에 다시 유수부로 승격되 었다.
이처럼 광주 유수의 치소가 이전되면서 남한산성은 천주교 박해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고, 박해 때마다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순교함으로써 잊을 수 없는 “순교 터”가 되었다. 이미 최초의 박해인 신해박해(1791년) 때부터 신자들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다는 전승이 내려오고 있으며, 신유박해(1801년) 때에는 이곳에서 최초로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이어 기해박해(1839년)와 병인박해(1866년)에 이르기까지 약 300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하게 되는데, 불행히도 그 행적과 성명을 알 수 있는 순교자들의 수는 극히 적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갖은 형벌을 당한 뒤에 칼로 목을 베는 참수(斬首), 목을 매 죽이는 교수(絞首), 매로 때려 죽이는 장살(杖殺) 등 여러 가지 사형으로 영광의 순교를 얻었다. 특히 병인박해 때에는 너무 많은 신자들이 잡혀오자, 형을 집행하는 포졸이나 군사들마저도 피를 보는 것에 진저리를 내고 새로운 사형 방법을 생각해 냈으니, 이것이 바로 어느 법전에도 나타나지 않는 ‘백지사(白紙死)’였다. 이것은 사지를 묶고 얼굴에 물을 뿌린 뒤에 한지를 덮는 일을 거듭하여 숨이 막혀 죽도록 하는 방법이었는데, 그 고통이 얼마나 컸겠는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남한산성은 이와 같이 고통에서도 진리를 증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 신앙 선조들의 넋과 진토가 스며있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후손들의 무관심 때문에 지금까지 버려져 온 점 죄송하기 이를 데 없다. 이제부터라도 이곳을 순교 성지로 개발하고 순교자들의 자료를 정리함으로써 그분들이 모두 시복·시성될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또 우리 모두 관심과 기도로써 그분들의 순교 신심을 자발적으로 현양하고, 고귀한 순교 정신을 후손들에게 물려 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성지 둘러보기
소성당
성체가 현시되어 있으며 김성우 안토니오, 최경환 프란치스코 두 분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성지순례 미사 전례 시 양형영성체를 하고 있다.
야외미사터
남한산성 성지를 상징하는 대형 십자가와 돌제대가 마련되었다. 정기적으로 성모의 밤(5월)과 순교자 현양대회(9월)를 열고, 순례자가 많은 경우 야외 미사터에서 미사를 봉헌한다. 또한 십자가 길과 성모상이 모셔져 있어 순례자들이 자연 속에서 기도할 수 있는 곳이다.
구 유
전통적 이미지의 성요셉, 성마리아, 아기예수님으로 꾸며져 있다. 구유는 연중 전시하고 있으며 성지를 방문한 순례자들은 동방의 세 박사가 귀한 선물을 봉헌하듯 마음을 모아 초를 봉헌할 수 있다.
곤 장
순교자들의 고통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곤장이 마련되어 있다.
성지 미사
떼제 미사
매월 첫 금요일 저녁 8시에는 묵상 안에서 하느님과 대화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떼제 미사가 봉헌된다.
성시간
매주 목요일 자정(밤12시),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십자가의 고통을 묵상하는 성시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