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91 병원 약조제실 앞
간호사가 주는 약을 받아 들고 병원에서 바삐 나오는 옥영.
옥영(혼잣말) “지금 병 치료보다 장사가 나에겐 중요하다. 돈 벌어서 좀이라도 좋은 일 하고 죽어야지.”
S♯92 해변둑(석양)
옥영, 해변둑에 쓸쓸히 앉아 곱게 물든 저녁놀을 바라본다.
가슴을 움켜쥐고 콜록거린다.
옥영의 소리(E) “내 나이 마흔을 넘었으니 많이도 살았다. 이런 몸을 가지고 어떻게 살았느냐고 의사도 놀랬어. 어찌 폐만 망가졌겠는가? 조금만 음식을 많이 먹으면 위가 뒤틀리고, 힘든 일 하면 성기에서 출혈이 계속된다. 일본 군수공장에서 근로정신대로 일본군들에게 짓밟힐 때, 임신을 했다고 한 장교가 대검으로 배를 가르고 자궁과 아기를 한꺼번에 들어내서 그후 무리하면 피가 흐른다. 출혈할 땐 고통이 심하고 전신에 마비증세가 일어난다. 그 일은 나 혼자만 당한 게 아니고 춘화도 다른 장소에서 똑같이 당했다. 이 고통은 무지막지한 쪽바리 왜놈들이 내게 준 선물이다. 일본은 망하지 않고 점점 더 부강해지고 있다. 대통령은 일본과 한일협정이란 것을 맺고 군 위안부 피해보상을 거론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그래서 더 아프다. 피해보상보다도 일본의 만행을 세계가 모른 채 감쪽같이 덮어지는 것 같아서 억울하고 슬프다.”
S♯93 백사장(석양)
옥영 콜록거리며 걷는다. 파도에 몸이 젖는 줄도 모른 채.
옥영의 소리(E) “무작정 상경하여 식당 종업원을 하려고 했으나 사내들이 괴롭히고 건강도 좋지 않아서 이 해변에 정착한 게 이십 년이 됐다. 갈가리 찢긴 몸으로 내가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 참 명이 질기기도 하지. 조개나 굴을 잡아 돈을 벌면 고향 어머니에게 보내 드리고 일부는 고아원에 기탁했다. 전쟁 고아들이 비참하게 사는 걸 보고 좀이라도 도와 주고 싶어서였다. 지난 아버지 제사 때 고향집에 갔더니 미례 언니의 편지가 와 있었다. 필리핀에서 귀국하여 옛날 스승의 주선으로 빌딩 청소부를 하고 있다며 살았으면 얼굴 좀 보자고……그 편지 보고 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덕자와 점희가 일본놈 총을 맞고 죽었단 것을 미례의 편지 보고 알았다. 조국이 식민 지배에서 해방된 줄도 모르고 자살한 명자. 그들은 모두 천국에 갔을 것이다. 천국에서 일본이 멸망하기를 기도할 거야……”
S♯94 도만고물상 마당
트럭이 와서 야적된 고철을 모두 싣고 간다.
고물상 마당이 훌렁해진다. 트럭이 나간 뒤-
도만, 자신의 삼륜차에 종이박스와 폐휴지를 채곡채곡 싣는다.
춘화가 도와 준다. 짐이 너무 많아서 삼륜차가 뒤뚱거린다.
춘화 “아저씨, 그만 실어요. 차가 넘어질 것 같아요.”
도만 “두 번 왔다갔다 하느니, 남은 것 마저 실읍시다.”
도만, 종이를 삼륜차에 다 싣고 나서 안으로 들어가서 탁주를 한 사발 들이킨다.
춘화 달려가서 사발을 빼앗는다. 술이 엎질러진다.
춘화 “아저씨 죽으려고 그래요?”
도만 “탁배기는 음료수야. 일하고 나서 한잔 크- 하면 피로가 샥 풀린단 걸 몰라요? 여자는 모르겠지.”
사발을 빼앗으려고 하자 춘화는 뒤로 감춘다.
도만 단념하고 냉수를 꿀꺽꿀꺽 들이킨다.
춘화 “몸을 아끼세요. 다리 하나로 사시면서.”
도만 “당신이 내 기분을 몰라서 그래. 당신 얼굴만 보면 천국에 온 것 같단 말이야. 그 나이 사십이 넘도록 날 아저씨라고 부르는 게 속상하지만 호칭이야 아무러면 어때? 모두 다 우릴 부부라고 생각하는데. 호적에 없는 부부.”
춘화 “주민등록표에 없는 부부.”
도만 “그리고 부부도 아닌 부부지. 그래도 당신 얼굴만 보면 신이 나고 힘이 벌떡벌떡 솟는 걸 어쩌노?”
춘화 “어쩌노? 뭘?”
도만 “허허허 심심해서 해 본 소리요. 오랜만에 고물을 제값 받고 팔아서 기분 좋다. 마당도 훤하니 춘화 얼굴처럼 확 트이고 말이지. 잘 다녀오겠소, 이쁜이.”
춘화의 어깨를 툭 치고 삼륜차에 오른다.
춘화 “살살 조심해서 몰아요. 오토바이처럼 몰지 말고.”
도만 “조심할 테니 염려 말아요.”
춘화 “저녁에 아저씨 좋아하는 조개국 끓여 놀게요.”
도만, 종이고물을 뒤뚱거리며 거리로 달려나간다.
고물장수 할머니가 리어카에 잡동사니를 반쯤 싣고 낑낑대며 도만고물상으로 온다.
춘화 달려가서 도와 준다.
고물을 하나씩 저울에 달아 계산하는 춘화.
고물값을 넉넉히 주자 좋아서 입을 헤벌리는 할머니.
할머니를 보내고 마당의 쓰레기들을 비로 깔끔히 청소하는 춘화.
S♯95 동 실내(밤)
각기 다른 이불을 덮고 자는 두 사람.
도만 살그머니 손을 뻗혀 춘화의 젖가슴을 더듬는다.
춘화 그 손을 뿌리치고 반대편으로 돌아눕는다.
도만 일어나서 담배를 뻑뻑 피운다. 춘화 기침을 켁켁 한다.
춘화 “밖에 나가서 좀 피워요.”
도만 담배를 재떨이에 끄고 다시 춘화 옆으로 간다.
춘화 “아유, 술냄새!”
도만 “술 안 마실 테니 그 옷 좀 벗어 봐요. 난 그 옷이 철갑처럼 보이오. 당신은 철갑상어야 철갑상어.”
춘화 눈을 깜박거린다.
도만 더욱 치근거리며 숨결이 가빠진다.
춘화 눈을 꼭 감고 그의 애무를 허락한다.
도만의 손이 국부를 더듬으려 한다.
소스라쳐 벌떡 일어나는 춘화.
도만 무안하고 화가 나서 벽에다 머리를 쿵쿵 짓찧는다.
도만 “언제까지나 처녀처럼 이럴 거요? 나도 남자요. 내 나이 오십 줄에 앉아서 자식 하나 갖는 게 소원이오. 그 몸뚱이가 그리도 아깝소?”
춘화 울상이 된다.
도만 방문을 열어 놓고 앉아서 담배를 또 피운다.
도만 “일본군 위안부였던 그 육체가 그리도 아깝냔 말이오. 마치 금덩이나 되는 것처럼 철통같이 보호하기는!”
춘화 소리없이 운다.
설움이 복받쳐 흐느낌이 통곡으로 변한다.
도만 “우리도 아들 딸 낳고 부부답게 살잔 말이야.”
춘화 “그만하세요!”
도만 “뭘 그만해? 걸핏하면 눈물이나 질질 짜고. 나도 지겹다고. 여기가 눈물의 집이야? 고물상이지. 고물 같은 육체들만 모인 곳. 정말 비싼 고물들의 집합소지. 하나는 다리병신, 하나는 일본군 위안부. 경력들이 화려해서 좋다.”
춘화 엉엉 울며 밖으로 나간다.
마당으로 가서 땅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운다.
도만 후회스러워서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한숨을 쉰다.
도만 “내가 나쁜 놈이지. 내가 병신 같은 새끼야. 예쁜 꽃은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는데 못된 욕망이 되살아났어. 에이 나쁜 놈!”
자신의 머리를 주먹으로 마구 때린다.
S♯96 일본 ××군수공장(추상)
콧수염 기른 소좌가 위안부(정신대)들을 마당에 집합시켜 놓고, 부하들을 시켜 임신한 처녀 두 명을 앞으로 끌어낸다.
소좌(일본어) “너희들은 내 명령을 거역하고 임신을 하여 작업에 지장을 초래하고 일본군 체면을 떨어뜨렸다. 내가 직접 낙태수술을 하여 본때를 보여 주겠다. 임신한 죄가 얼마나 큰지 잘 봐 둬라!”
일본군들은 반항하는 처녀를 발가벗겨 나무판 위에 눕히고 결박한다.
소좌, 허리에 찬 대검을 쑥 뽑아 처녀의 불룩한 배를 찢는다.
선혈이 분수처럼 판때기 위로 흘러내린다.
처절한 비명이 군수공장 안에 메아리친다.
구경하는 위안부 처녀들 입에서도 비명이.
소좌(일본어) “자 똑똑히 봐라!”
소좌, 피 흐르는 자궁과, 다 자라서 꿈틀대는 태아를 꺼내 들고 처녀들 앞에 흔들어 보인다.
의무병들이 비위생적인 방법으로 기절한 처녀의 배를 대충 봉합하여 의무실로 싣고 간다.
소좌는 태아를 대검으로 찔러 죽이고 자궁과 함께 쓰레기통에 던진다.
소좌(일본어) “다음 너!”
울며 떨고 있는 춘화를 가리킨다.
춘화 공포에 질려 기절한다.
그녀의 옷을 벗기고 똑같은 방법으로 엉터리 수술이 자행된다.
처녀들의 울음소리로 초상집이 된 군수공장 마당.
입 다물라고 소리치는 소좌.
정신 잃고 나무판에 결박되어, 잔악한 수술과 살육을 감당하는 춘화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S♯97 도만고물상 마당(현실)
춘화 “치료도 제대로 못하고 상처난 몸으로 짐승 같은 일본군들을 받아들었어요. 상처가 아물 새 없이 더 덧나고 커지기만 했어요. 성기뿐 아니라 문신의 상처도요. 병원에 갈 때와 여러 사람 있는 곳에 갈 때 가장 겁이 나요. 병원에 가면 내 추한 구석을 다 보여 줘야 하고, 사람들 앞에 서면 내 치부를 보는 것 같아 괴로우니까요. 그때 그 강제 낙태의 상처가 낫지 않아서 지금도 몸을 움직이면 찢어질 듯 아파요. 하루에 무지막지한 일본 병사 일개 소대를 받아들일 때 성기가 온전했겠어요? 그래서 당신에게 줄 수 없었던 거예요. 그 더러운 놈들의 병균이 당신에게 옮길까 봐서요. 아까워서가 아니예요.”
춘화, 도만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운다. 도만도 운다.
도만 “왜 그 얘기를 진작 안했소?”
춘화 “부끄러워서 못했어요. 나에겐 귀한 분이예요. 내 목숨을 구해 주셨죠. 그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하며 무엇이 아깝겠어요? 제가 아저씨라고 부른 건 제가 아내의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이예요. 저는 아내의 자격도 없어요. 당신이 싫다면 언제라도 떠나겠어요. 그리고 오늘도 내일도 생각하겠죠. 당신만을.”
도만, 춘화를 끌어안고 통곡한다.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비는 도만.
춘화 깜짝 놀라 도만의 목을 껴안으며
춘화 “천한 여자에게 그러지 마세요.”
도만 “당신은 위대한 한국의 처녀요. 영원한 처녀지. 한국의 모든 여성을 대신하여 받은 그 고통이 당신을 위대한 여신으로 만들 거요. 당신의 겨레, 당신의 후손들이 가장 높은 곳에 당신의 신전을 지어 줄 것이오. 일본군 위안부의 한맺힌 눈물은 한국 모든 여성들의 눈물이기 때문에……”
춘화 “여신은 너무 과해요, 도만 씨.”
춘화 웃는다. 울분이 풀린 듯.
춘화 “밤이 늦었으니까 들어가서 자요. 내일 일해야잖아요?”
두 사람 다정히 손잡고 방으로 들어간다.
S♯98 쇠똥구리(인서트)
두 마리의 쇠똥구리가 쇠똥을 동그랗게 굴려 보금자리로 가지고 간다.
갖다 놓고 또 나와서 같은 방법으로 먹이를 만들어 운반한다.
예쁘게 예쁘게 만든 쇠똥구리 먹이를.
S♯99 젖소 목장 축사(낮)
목장 주인이 젖소의 우유를 짜서 한곳으로 운반한다.
우유를 싣고 갈 트럭이 대기하고 있다.
트럭이 우유를 싣고 떠난다.
다른쪽에선 여자 인부가 삽으로 우릿간의 쇠똥을 쳐낸다.
힘들어서 쇠똥밭으로 주저앉고 만다.
목장 주인이 고약한 눈으로 여자를 흘겨본다.
목장 주인 “저, 저, 저래 가지고 어떻게 밥을 먹고 사나? 겨우 우릿간 하나 치우고 저러는구만.” (여자 앞으로 간다)
여자, 하선 몸뻬에 묻은 젖은 쇠똥을 털어내고 일을 계속한다.
목장 주인 못마땅한 얼굴로 노려보며,
목장 주인 “그래 가지고 밥 먹고 살겠소? 그러다 병나겠수다. 병나면 병원비 드니까 내가 손해 보지. 내일부터 나오지 말아요. 아주머니 밥 먹을 데는 여기 아니어도 많이 있을 테니, 좀 쉬운 일거리를 찾아 보슈.”
하선 “아, 아녜요 주인님. 제가 아침밥을 부실하게 먹어서 힘이 빠졌나 봐요. 빨리 치울 테니 그만두란 말씀은 말아 주세요. 열심히 잘 하겠습니다. 저 쇠똥구리처럼.”
목장 주인 “쇠똥구리처럼?”
하선, 열심히 밥을 만들어 나르고 있는 쇠똥구리를 가리킨다. 우릿간 옆 조그만 공간을.
목장 주인(의아해서) “쇠똥구리가 어쨌단 거요?”
하선 “더러운 쇠똥을 보석처럼 귀하게 굴려서 저의들 양식으로 보관하잖아요? 제가 하는 일도 쇠똥구리와 같다고 생각해요.”
목장 주인(시큰둥히) “거 생각 하나 기특하구먼.”
하선 “이 목장은 공기도 맑고, 지금까지 제가 일한 곳보다 환경이 트여서 좋아요. 도시는 답답하고 먼지 많고 인심도 각박하거든요. 좋은 직장 만나서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일할 수 있게 되어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저 하늘과 숲, 향기로운 꽃들. 그 속에서 일하는 저는 한 마리의 나비 부럽지 않아요. 호호호.”
목장 주인 “아주머니가 나비면 나는 뭐요?”
하선 “부지런하고 성실한 목장 주인이죠. 마음씨도 좋고요.”
목장 주인 “나, 그렇게 좋은 놈 아니오. 독하고 매정하지.”
목장 주인 차츰 하선에게 끌린다.
다른 삽을 들고 함께 쇠똥을 치워 주면서,
목장 주인 “전에 어디 있었소?”
하선 “돼지 축사에 식당 구정물 나르는 일을 했어요. 음식 쓰레기 담당이었죠. 그걸로 한 십 년 했어요. 그전에도 비슷한 일을 했고요. 그런 일에 잔뼈가 굵었지요.”
목장 주인 “내가 보기엔 하나도 안 굵었소. 마치 가냘픈 물잠자리 같아.”
하선 “호호호호.”
입을 가리고 웃는 하선.
장갑에 묻은 쇠똥이 입으로 들어간다.
목장 주인도 웃으며,
목장 주인 “그만두란 말은 힘내라고 괜히 한 소리요. 섭섭히 생각 말아요. 아주머니가 연약한 몸으로 고생하는 걸 보면 웬지 울적해지고 화가 나는군. 가족은 몇이나 돼요?”
하선 얼른 대답하길 꺼린다.
S♯100 분뇨트럭 있는 곳
하선, 쇠똥을 리어카에 싣고 트럭으로 간다.
목장 주인이 리어카를 밀며 따라온다.
수거한 분뇨통을 한 개씩 트럭 위로 들어올린다.
트럭 위에서 남자 인부가 그 분뇨통을 받아 적재함에 쏟아붓는다.
빈 분뇨통들을 리어카에 싣고 축사로 걸어가면서,
하선 “가족이 몇이냐고 물으셨죠? 저 혼자예요. 독신이죠.”
목장 주인(텡하니) “독신이라고 하면 누가 아주머닐 좋아할까 봐서? 난 그런 놈 아니오. 난 여자들 보면 밥맛없어. 아내 죽고 여섯 명을 후취로 갈아치기했지. 돈에만 눈이 어두워 진실은 아예 쇠똥밭에 버리고 살았더랬소. 나도 똑같이 말이지. 내가 정을 주지 않으니까 결국 저절로 보따리를 싸들고 나가더구만.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아주머니가 쇠똥구리를 들먹거렸기 때문이오. 더러운 쇠똥을 가지고 보석 같은 식량을 생산한다고 했지? 그게 바로 진실이라는 거요.”
하선 “제겐 다른 뜻이 또 있어요.”
목장 주인 “무슨 뜻?”
하선 “그런 과거가 있지요. 이렇게 일하며 살 수 있다는 것도 저에겐 큰 기적이니까요.”
목장 주인 “마치 인생에 만고풍상을 다 겪은 것처럼 말하는구먼. 나만큼 고생을 많이 했을까? 당신처럼 쇠똥을 치우던 목장의 머슴놈이 이렇게 목장 주인이 됐으니 개천에서 용 났지. 나야말로 쇠똥구리야. 이제 나이도 먹고 힘도 점점 빠져서 목장을 매각하고 다른 편한 사업을 할까 해요. 아주머니의 앞으로의 계획은?”
하선 “돈 벌어서 주인님처럼 큰 젖소 목장의 주인이 되는 건데 쉽지 않겠죠?”
목장 주인 “여자에겐 좀 힘든 일이라 권하고 싶지 않소.”
하선 “전 쇠똥구리 인생이예요. 저에겐 일의 귀천이 따로 없답니다.”
목장 주인 “도대체 무슨 과거가 있었길래 쇠똥구리 예찬을 하시는지?”
하선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이 추하고 영양가 없는 스토리예요. 주인님과도 무관하진 않겠네요. 우리 민족과 관련된 과거사니까요. 저에겐 사는 일만 남았어요. 살아서 역사에 복수하는 일. 그러니까 쇠똥은 저의 추한 과거이고 쇠똥구리는 현실인 셈이죠.”
목장 주인, 하선의 의미심장한 말에 고개를 갸웃한다.
하선 “부지런히 저 똥들을 치워야죠. 저녁엔 또 할 일이 있어요.”
S♯101 시내 큰 식당(저녁)
여주인이 여러 개의 비닐봉지에 싼 음식 찌꺼기를 두 개의 박스에 담아 하선에게 준다.
하선 “감사합니다.”
여주인 “찌꺼기를 치워 주니 내가 감사해야지. 내일 또 와요. (남자 종업원에게) 김군, 저 박스 좀 운반해 드려요!”
하선 “괜찮아요. 제가 들고 가겠어요.”
여주인 “우리 애한테 해 달라고 해요. 오늘은 남은 음식이 많아서 무거워요.”
김군 “제가 할게요, 예쁜 아주머니.”
하선에게 윙크하고 박스들을 밖으로 들고 나간다.
S♯102 식당 앞(저녁)
김군이 박스들을 자전거 짐대에 싣고 묶어 준다.
김군 “좀 무거우시겠는데. 중심 잘 잡아요.”
하선 “네, 고마워요.”
김군 “아주머니, 거기가 열렸어요.”
하선 웃으며 젖가슴 단추를 잠근다. 브래지어가 없다.
김군 “다음에 제가 식당 차리면 남은 것 예쁜 아주머니에게 다 드릴게요.”
하선 “식당을 언제 차리는데?”
김군 “십 년 후에.”
두 사람 웃는다.
하선 무거운 박스가 실린 자전거를 타고 위태위태하게 인도로 달려간다.
S♯103 무의탁 노인의 집(저녁)
하선, 식당에서 얻어온 음식으로 진수성찬을 만들어 불쌍한 노인들을 대접한다. (M)
하선도 노인들과 함께 식사한다. 김치도 찢어 얹어 드리고 생선도 발라 먹여 드리고.
노인들이 고맙다고 칭찬한다.
하선 갑자기 낯을 찡그리고 배를 움켜쥔다. 무리한 것이다.
관리인 여자에게 설거지를 부탁하고 비척이며 노인의 집 나오는 하선. (M 계속)
S♯104 인도(밤)
고물 자전거를 타고 귀가하는 하선.
체인이 벗겨져 애를 먹다가 겨우 고친다.
두 손이 검은 기름으로 범벅.
휴지를 주워 손을 쓱쓱 닦고 휘파람 불며 털털털 달려간다.
S♯105 남대문시장(밤)
일을 마치고 남대문 야시장을 구경하는 미례.
불빛들이 휘황하다. 손뼉 치고 노래하며 호객하는 상인들.
미례는 값만 물어 보고 눈요기만 한다.
신발가게 앞, 구두 하나를 살까 말까 망설인다. 다 낡아진 그녀의 구두.
결국 사지 않고 나오는 미례.
미례 “선생님 선물 하나 사 드려야겠는데 뭐가 좋을까? 시계는 너무 비싸고 반지도 비싸고, 브로치는 가치 없어 보이고. 지갑은 너무 흔하고, 핸드백을 사 드리면 좋겠는데 취향을 모르겠군. 교수님이니까 커피잔 세트로 할까? 그래, 그게 좋겠어. 그리 비싸지 않으면서 예쁜 게 있더라. 그릇점이 어디더라?”
S♯106 동 시장 입구(밤)
커피잔 세트를 사 들고 시장에서 나오는 미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하선이 미례를 유심히 본다. 미례도 본다.
자전거를 멈추고 돌아보는 하선.
하선 “혹시 미례 언니 아니세요?”
미례(돌아서서 보고) “하선아! 하선이 맞지?”
하선 “언니!”
미례 “하선아!”
두 사람 반가워서 부둥켜안고 청승맞게 운다. 행인들이 흘끔거린다.
미례 “살아 있었구나. 그런데 왜 이렇게 야위었어?” (얼굴 쓰다듬으며)
하선 “언니는 더 예뻐졌네.”
미례 “예뻐지긴? 다 늙었지. 넌 야위긴 했지만 그때와 하나도 안 변했다.”
하선 “언니, 우리 집으로 가요. 여기서 가까워. 하고픈 얘기가 너무 많아.”
미례 “그래도 괜찮아? 가족들이 싫어하지 않을까? 불청객이 왔다고.”
하선 “나 혼자 사는 월셋방이야. 가족도 없어.”
미례 “나하고 똑같구나.”
하선 “어서 내 뒤에 타.”
미례 “무거울 텐데 괜찮겠니?”
하선 “괜찮아.”
미례, 하선의 자전거 뒷자리에 탄다.
하선 중심을 잡고 그런 대로 자전거를 잘 운전한다.
미례 “꿈만 같다.”
하선 “나도 ”
소리내어 웃는 두 여자.
(F. O)
S♯107 광화문 일본 대사관 앞(낮)
생존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백여 명)이 피켓과 플래카드를 들고 위안부 피해 보상과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항의 시위를 한다.
시민단체, 여성단체 수백 명도 가세하여 할머니들의 시위에 동참.
그러나 오만하게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 일본 대사관.
S♯108 화면(자막과 함께), ‘비엔나 세계 인권대회, 북경 세계 여성문제 회의에서 일본군 위 안부 문제 결의문 채택’
S♯109 화면(자막과 함께), ‘유엔 인권위원회, 군대 성노예 문제에 관한 조사 보고서에서 한 국, 일본에서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배상 문제 해결하라’
S♯110 화면(자막과 함께), ‘ILO 국제노동기구, 일본군 위안부 동원 및 착취는 국제 강제노 동 금지규약 위반이다. 일본은 이에 대한 적절한 배상을 해야 한다’
S♯111 화면(자막과 함께), ‘도쿄, 일본군 성노예 전범 국제 여성법정에서 일본의 전범자 처벌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배상 촉구’
S♯112 화면(자막과 함께), ‘일본 총리,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과 한일협정으로 피해 보상 문제 끝났다고 발언’
S♯113 일본대사관 앞(낮)
일본총리의 발언에 울분을 참지 못해 더욱 격렬히 시위하는 할머니와 시민 여성단체들.
시위대 속에서 피켓 들고 수동적으로 구호를 외치는 하선. 표정이 시무룩하다.
쭈그렁 할머니가 된 하선. 하선 옆에 옥영 할머니도 있다.
그녀들은 손을 꼭 붙잡고 서로 의지한 채 모기소리로 구호를 따라 외친다.
한 할머니(미례)가 자리를 이탈하여 할머니들을 한 명씩 훑어보고 지나간다.
뒤늦게 도착한 할머니(춘화)가 맨 뒤에 자릴 잡고 시위 물끄러미 바라본다.
미례와 춘화의 시선이 마주친다.
미례(조심스럽게) “춘화 씨 아니신가요?”
춘화 “예, 맞아요. 나 춘화요. 댁은 뉘신고?”
미례 “미례를 기억하시나요?”
춘화 “기억하다 마다요. 꿈에도 못 잊고 죽기 전엔 한번 만나기가 소원이었수.”
두 사람 웃는다. 꼬옥 끌안고 등 다둑이는 그들.
미례 “더러운 목숨 안 죽고 사니까 이런 날도 오는구나.”
춘화 “다른 친구들은?”
미례 “응, 저기 옥영이와 하선이도 와 있다. 우리 넷만 산 것 같아.”
춘화 “차라리 그때 죽을 걸. 난 진통제 약 없으면 못 살아요. 약기운으로 여기까지 왔소.”
미례 “옷차림 보니 귀부인 같다. 부자 영감 물었나 보지?”
춘화 “두 해 전까지 고물상을 하다 치우고 집 안에 들어앉았어. 영감하고 조그만 아파트 하나 마련해서 살아. 말만 부부지 몸 한번 섞은 적이 없는 걸.”
미례 “그래도 영감님이 잘해 주신가 보다. 난 달동네 셋방살이야. 옥영이와 하선이는 각기 다른 데서 무의탁 양로원에 살고 있고. 가만 있자, 우리 넷이 어디로 가자. 널 보면 옥영이도 깜짝 놀랄 거다. 너의 둘은 단짝 아니었니?”
시민단체 시위 주동자들이 노래를 선창한다.
일제여 일제여 너희들은 아는가 서리서리 피맺힌 한국 여성의 원한을?
망해라 망해라 여자 원한은 오뉴월에도 서릿발 끼친다 구천의 위안부 원귀들이 너희 자식들 다 잡아가기 전에 하루 빨리 속죄하라!
우렁찬 노래소리가 대사관 앞을 누비며 분위기가 무르익는다.
S♯114 영세민아파트 현관(저녁)
춘화가 들어오자, 도만 달려나와 왕비처럼 맞는다.
구두를 벗겨 주고 핸드백과 양산을 받아 고이 한쪽에 둔다.
도만 “저녁이 돼도 돌아오지 않아서 걱정했소. 무슨 일 있었소?”
춘화 “옛날 위안부 친구들을 만났어요. 내가 저녁 식사를 대접했지.”
도만 “거 잘했군. 그럴 줄 알았으면 돈을 좀 넉넉히 담고 갈 걸 그랬지? 너무 싼 걸 사 준 건 아니오?”
춘화 “아주 비싼 걸로 한턱 썼어요. 다들 나더러 부자 영감 물었다고 부러워하잖아요?”
도만 “부자 영감 물긴커녕 아주 망쪼 들었지. 날 따라 사느라고 당신 병만 쳐졌어.”
춘화 “나 시원한 물 좀 줘요. 많이 걸었더니 목이 타요.”
S♯115 동 실내(저녁)
도만,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어 컵에 따라 가지고 온다.
춘화 바닥에 누워 헐떡거린다.
도만 놀라서 안아 일으키며,
도만 “여보, 많이 아파요?”
춘화 “좀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물을 두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토해내는 춘화.
춘화 “이렇게 좋은 날 내가 왜 이럴까? 행복에 겨워서 그러나 봐요.”
춘화 스르르 눈을 감는다.
도만이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는다.
도만, 황급히 전화로 구급차를 부른다.
S♯116 병원 응급실(밤)
춘화 눈을 뜬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지켜본다. 도만의 얼굴도.
도만 걱정스런 얼굴로 춘화의 손을 잡는다.
그녀 뺨에 얼굴을 비빈다.
춘화 “속썩혀서 미안해요. 당신같이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했어요. 나처럼 호강한 여자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죽어서도 그 은혜 잊을까?”
끅끅 우는 도만의 머리칼을 쓰다듬는 춘화.
춘화의 숨이 가빠진다.
춘화 눈을 뜬 채 숨져 있다.
도만의 통곡소리만 응급실에 번져간다.
S♯117 ××은행(낮)
여직원 “이자가 많이 길었네요. 원금은 안 찾으실 거죠?”
옥영 “이자만 줘요. 원금은 나 죽거든 자선단체 기금으로 써 달라고 위임장을 써 놨어요.”
여직원 “착하기도 하셔라. 나 같으면 그 돈으로 여행도 하고 맛있는 것 사 먹을 텐데. 할머니는 세상에 없는 자선사업가예요. 이자 찾으시면 옷 한 벌 맞춰 입으세요. 옷이 다 낡았어요.”
옥영 “곧 죽을 목숨 예쁘게 꾸미면 뭘하겠소? 이자 많이 줘서 고마워요.”
여직원 “안녕히 가세요. 건강하시구요.”
정기예금 이자를 받아 가방에 꼭꼭 담고 은행에서 나오는 옥영.
S♯118 은행 앞
옥영, 시내버스 타는 곳으로 걸어간다.
옥영의 소리(E)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목숨, 미리 준비를 해 둬야 한다. 조개 팔아서 번 돈이 얼마나 많겠는가? 나는 그 적은 돈을 쓰지 않고 모아서 갈 곳 없는 고아들을 도와 주었지. 춘화가 나보다 먼저 가서 가슴이 에이는구먼. 만나자 이별이라더니 쪽바리놈들 굴레에서 기적적으로 생환하여 소식도 모르고 살다가, 하필이면 그립게 상봉한 날 눈을 감았지 뭐야. 춘화가 수첩에 적어 둔 우리들의 주소를 보고 영감님이 알려줘서 알았지. 그 다음에는 누구 차례일까? 아무래도 내 차례일 것 같아. 나야말로 먼저 가야 될 쓸모없는 목숨이 살아서 국가 세금만 축내고 있어. 콜록콜록 콜록콜록.”
시내버스를 오래 기다리는 옥영.
버스가 좀처럼 오지 않자 뒤뚱거리고 걷는다. 간장이 에일 듯 콜록거리며.
S♯119 장애아 복지관 실내(오후)
옥영이 들어오자 팔 다리가 뒤틀린 아이들이 “할머니 온다!”고 반기며 그녀 주위로 모여든다.
아이들을 하나씩 안고 입을 맞추며 선물을 품에 안겨 주는 옥영.
와아 장난감이다! 아이들 좋아한다.
한 아이를 안고 그녀 치마로 코를 닦아 주며,
옥영 “우리 새싹이 밥 잘 먹었어?”
아이1(언어장애) “저도, 안아, 주세요, 할머니!”
아이2(뇌성마비) “얘가 날 때렸어요. 혼 좀 내 주세요.”
아이3(시력장애) “할머니, 다음엔 언제 와요? 할머니 보고 싶어 죽겠어요.”
아이들 “얘는 보이지도 않으면서 할머니 보고 싶대 하하하하.”
일부 아이들은 장난감을 가지고 싸운다.
관리인 여자가 나와서 아이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소리친다.
가지고 온 물건을 관리인 여자에게 주며,
옥영 “아이들에게 필요할지 몰라 사 왔어요. 오늘 은행에서 이자를 받았수.”
가방에서 돈봉투를 꺼내어 여자에게 준다. 여자 고마워하며 좋아한다. (M)
찰거머리처럼 달라붙는 아이들과 헤어져, 옥영 복지관에서 나온다.
S♯120 젖소 목장 축사(오후)
하선 옛날의 그 목장을 찾아온다.
분뇨를 치우던 젊은 주인 내외가 하선을 반긴다.
하선도 삽을 들고 청소를 돕는다.
젊은 주인 “옷 버리는데 만지지 마세요 할머니.”
하선 “괜찮아. 사람은 일을 해야지. 아버지는 편히 계신가?”
젊은 주인 “요즘 건강이 안 좋으셔요. 허구헌날 방안에 누워 계시죠. 일을 하시고 싶어 좀이 쑤시는가 봐요. 마음뿐이죠.”
하선 “건강하셔야 할 텐데. 갈 때 집에 들러 봐야겠구먼. 나도 껍데기만 살아 있지. 모진 목숨이라 얼른 죽지도 않아. 목장 주인이 한번 돼 보는 게 소원이어서 생각나면 여기 오지. 여기 오면 맑은 공기도 좋고 내가 사장이 된 기분이야.” (웃음)
젊은 주인 “목장이란 겉보기는 멋있어도 중노동입니다. 고운 우유를 짜내기 위해서 사람과 똑같이 젖소들을 돌봐야 하죠. 젖소가 가족인 셈이죠. 저도 힘든 일인 줄 알면서 아버지 사업을 계승하려고 이 일을 하게 됐습니다. 목장 그만두고 다른 사업을 하시겠다 하면서도 아버진 목장에 애착이 많으세요. 항상 할머니 얘길 하죠. 쇠똥구리를 좋아한다고 하셨죠? 저기 쇠똥구리가 있네요.”
S♯121 축사 옆, 쇠똥구리 집
하선, 두 마리의 쇠똥구리가 열심히 쇠똥을 굴려 나르는 것을 지켜본다.
사람이 보건 말건 쇠똥구리들은 양식 저장하기에 여념없다.
하선은 쇠똥구리들이 운반하기 좋게 쇠똥을 많이 모아 준다.
하선의 소리(E) “나는 저 벌레들처럼 성실히 진실되게 살았을까? 그 답은 노오다. 내겐 성실도 진실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저 무감각하게 살기 위해서 살았을 뿐. 일본에 복수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이 망하는 꼴을 보는 게 소원이다. 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위하는 것도 돈 몇 푼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돈을 거금으로 받은들 어디에 쓰겠는가? 나는 일본이 진정으로 참회하고 세계 문명국 대열에 오르는 걸 원했다. 일본은 그러길 거부하고 사서 죄악을 키운다. 그런 나라가 어떻게 세계 문명국의 대열에 서겠는가? 꼭 망하지. 망할 거야. 쇠똥구리처럼 더럽게 똥을 굴리고 살면서 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일본이 멸망하기를 빌련다. 난 그래도 이렇게 살아 있지 않은가? 내 한 목숨이 일본의 더러운 국민 전체와 비교하겠는가? 후세에게 이 말을 꼭 남기겠노라.”
이를 부드득 가는 하선.
탁 트인 창공을 쳐다본다. 가을 하늘이 너무 곱다.
하선 “살고 싶어서 사는 목숨이 아니다. 일본이, 허울을 쓴 그 야만족들이 지구상에서 멸망하는 꼴을 보고 싶어 억지로 하루하루를 산다. 세계가 아직도 일본의 만행을 모르고 그 나라를 문명국가 취급하는 게 분하다.”
하선, 쇠똥구리 옆에 털썩 주저앉아 통탄한다.
쇠똥구리들은 일을 마치고 두 놈이 장난을 한다.
S♯122 정신대문제협의회 건물(낮)
도만 절뚝거리며 사무실로 들어간다. (M)
S♯123 동 사무실
직원이 도만에게 무슨 일로 왔냐고 묻는다.
도만 “정춘화 씨가 사망했다는 걸 알려 드리러 왔소.”
직원 “정말 안 됐습니다. 도움이 못 돼 드려 죄송합니다.”
도만 “이렇게 거룩한 사업 하는 게 도와 주시는 거죠. 그리고 이건 제가 그 사람과 사십 년 간 고물상 해서 조금씩 저축한 거요. 일본군 위안부 투쟁하는 데 보태십시오. 그럼 수고하시오.”
수표 봉투를 직원에게 주고 나온다.
직원 고액 수표를 보고 놀란다.
직원 “영감님, 이 돈은 도로 가져가십시오. 어렵게 사는 분의 돈을 받을 수 없습니다.”
직원이 돌려줘도 받지 않고 사무실에서 총총 나가는 도만.
S♯124 공원묘지
춘화의 묘 앞에 간단한 제물을 차려 놓고 절을 하는 도만. (M)
묘 옆에 앉아 묘의 풀을 쓰다듬으며 운다.
준비한 약을 품속에서 꺼내어 술에 타서 마신다. 다량의 수면제다.
도만, 춘화의 묘를 쓸어안고 통곡하다 잠이 든다.
개미들이 도만의 코와 입으로 기어간다. 그는 다시 깨어나지 않는다.
S♯125 일본 대사관 앞
위안부 할머니들이 시위하는 날.
반복되는 구호와 풍물패의 노래소리. (M)
손잡고 열심히 구호 따라 외치는 미례, 옥영 할머니.
하선이 보이지 않는다. 걱정하는 두 할머니.
옥영 “왜 하선이가 안 왔을까요? 어디 아플까?”
미례 “여간 아파선 안 올 사람 아니야. 많이 아픈가 보다. 하선이가 사는 양로원으로 가 보자.”
두 사람, 시위대 속에서 빠져나와 큰길로 나온다.
S♯126 무의탁 양로원 실내
슬픔에 잠긴 할머니들. (M)
할머니 한 분이 하얀 천에 덮여 누워 있다.
미례와 옥영 들어와서 천을 걷고 얼굴을 들여다본다.
편안한 얼굴로 영면한 하선.
(슬픈 주제가 흐른다)
하선의 소리(E) “미례 옥영 언니, 내가 먼저 떠났다고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내 수명도 다 했나 봐요. 참 오래 살았지요. 나 죽으면 목장이 보이는 따스한 언덕바지에 묻어 줘요. 목장 주인에게 이미 약속 받았어요. 죽어서도 평화롭게 젖소와 양떼들이 뛰어노는 걸 보며 맑은 물과 숲과 하늘 벗삼아 살겠어요. 언니, 일본놈들에게 큰 기대는 하지 말아요. 일본이란 나라는 고대로부터 우리 한국의 적국이었어요. 한국 여자들을 많이 짓밟고 죽였지요. 그놈들은 가면 쓴 인간 백정이예요. 영원한 우리 조상의 적을 어떻게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겠어요? 나는 죽어서도 일본이 멸망하기를 빌겠어요. 그놈들은 간교하고 잔악무도해요. 그 악마들에게 인간이 되길 기도하는 건 과욕이지요. 세계는 강자와 악인의 편이예요. 지금 현실이 그렇잖아요? 일본을 민주국가라고 믿고 문명국가라고 생각하는 건, 그들의 죄악을 눈감고 용서하는 거예요. 그건 사랑도 화해도 아니고, 동일 범죄를 무수히 양산하는 강대국들의 비열한 말잔치, 해프닝이예요. 우리가 일본에 이기는 길은 그들보다 더 똑똑하고 잘난 자식들을 만들어서 한국을 부강국가로 만드는 길밖에 없어요. 제 유언을 정부와 국민들에게 전해 주세요. 진실한 참회와 피해 보상 없이는 일본과 선린외교를 할 수 없다는 말도 이젠 할 필요 없고, 그들이 사과하고 반성하는 것도 요구할 필요 없다고, 일본은 그럴 건더기도 없는, 세계에서 가장 잔악하고 더러운 국민이라고 우리의 후손들에게 꼭 전해 주세요.”
유서를 읽는 두 여자의 손등과 글씨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그 눈물이 핏빛으로 변한다.
주제가 더욱 고조되며 화면이 정지된다.
(F. O)
-엔드 마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