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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내 여행 정보 스크랩 2010년 6월 27일 북한산 둘레길(순례길)-대동문-소귀천계곡 걷기
한용석(서울성북) 추천 0 조회 110 10.10.04 12:22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일자 : 2010년 6월 27일

 

코스 : 우이동 솔밭공원 - 보광사 - 국립4.19 민주묘지 - 신숙선생묘역 - 김도연선생묘역 - 서상일선생묘역 - 김창숙선생묘역 -

        양일동선생묘역 - 백련사 - 진달래능선 - 대동문 - 소귀천계곡길 - 우이동

 

 

이동거리 및 시간 : 약 6.2km / 3시간20분 소요

 

이동기록

10:50 솔밭공원(덕성여대 맞은편)

        이정표 북한산둘레길 400m

11:05 이동(우이동 성원그린아파트길 보광사 방향으로 진행)

11:07 순례길 입구

11:14 이정표←신숙선생묘역 670m, →순례길입구(우이솔밭공원방향)330m

11:17 국립 4.19민주묘지

11:22 보광사갈림길

        ←신숙선생묘역 230m, →순례길입구(우이솔밭공원방향)770m

11:27 신숙선생묘역

        ←백련공원지킴터 610m, →순례길입구(우이솔밭공원방향)1km, 보광사 230m

11:30 이정표

        ←김도연선생묘역 290m, →신숙선생묘역 150m

11:38 김도연선생묘역

        ←서상일선생묘역 230m, 김창숙선생묘역 450m, →신숙선생묘역 150m

11:42 동암서상일선생묘역

        ←김창숙선생묘역 220m, →김도연선생묘역 230m, 신숙선생묘역 380m

11:48 백련사계곡길

        김창숙선생묘역 50m, 양일동선생묘역 130m, ↓유림선생묘역 390m, →김도연선생묘역 400m, 서상일선생묘역 170m

11:53 김창숙선생묘역

11:57 양일동선생묘역

12:00 백련사앞 약수터

12:03 이정표 ←대동문 2.1km, →백련공원지킴터 0.6km

12:17 진달래능선

        ←대동문 1.6km, →우이동, ↓백련공원지킴터 1.1km

12:31 이정표 ←대동문 0.8km, →백련공원지킴터 1.9km

12:40 이정표 ↑대동문 0.5km, ↓백련공원지킴터 2.2km, 진달래능선 ↙운가공원지킴터 1.6km, 수유분소 1.6km

12:47 대동약수

        대동문 0.2km, ↓소귀천공원지킴터 2.0km, 우이동, ↘진달래능선, 백련공원지킴터 2.5km

12:54 대동문

13:00 이동

13:02 갈림길(소귀천계곡, 진달래능선)

13:24 ←대동문 1.3km, →소귀천공원지킴터 1.0km

13:25 계곡휴식

13:30 이동

13:33 용담수 약수터

13:48 소귀천공원지킴터

13:50 옥류교

        ←우이동버스종점 1.1km, →대동문2.3km

14:10 우이동버스종점

 

산행사진 

우이동 솔밭공원(덕성여대 맞은편)

 

 

성원그린아파트  우측 보광사방향으로 진행

 

 

 

국립 4.19민주묘지

4.19민주혁명

-1960년  자유당 이승만정권이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이승만에게 엄청난 권력이 주어지는 대통령중심제를 실시하는 한편 3.15 부정선거로

  국민들의 분노를 일으키게 된다.

?2월 28일 대구에서 고등학생들이 "학원의 자유보장", "독재정치, 부정부패 척결" 이라는 구호를 앞세우고 대구 도심에서 시위를 벌였다.

?3월 15일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대한 규탄시위가 벌어지고, 정부의 강경진압으로 마산 시민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게되고 결국 3월18일

  내무부장관 최인규와 치안국장 이가학이 마산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임한다.

?4월11일 마산시위때 행방불명되었던 마산상고 김주열 학생의 시체가 바다에서 발견되었고 눈에서 뒷머리까지 최루탄이 박혀 있는 것을

  확인한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달하게 되어 부정선거 시정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도화선이 되었다.

?4월18일 서울 고대생들이 총궐기 선언문을 발표한 후 세종로, 태평로 일대로 진출해 시위를 벌이고 귀교하는 도중 유지광이 이끄는

  정치폭력배들로부터 기습 폭행을 받아 수십며의 사상자 및 부상자가 발생하게된다. (당시 폭력배들의 불법행동을 경관들이 보고만 있었던

  이유는 대통령수행책 곽영주의 지시로 임화수의 부하 깡패가 동원됐기 때문이었음이 1960년 4월 26일 판명되었다. '고대생 습격사건'은

  훗날 5.16 군사정변 후 재판과정에서 곽영주와 임화수의 지시였음이 확인되고 이들은 사형을 당하게 된다.)

?4월19일 전날 고대생들이 발표한 총궐기 선언문과 같은 선언을 발표한 후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대학생들과 이에 고무되어 자극을 받은

  중,고등학생들이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와 서대문 경무대로 불리던 이기붕의 자택으로 몰려가 이승만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하였고,

  김주열 학생의 죽음에 대한 관련자 처벌요구, 부정선거 전면무효 및 재선거를 요구하였다. 이 와중에 곳곳에서 경찰의 사격발포가 자행돼

  수십명의 학생들이 죽고, 수백명이 부상을 당했다.  경무대 정문을 뚫고 진입하는 시위학생들을 군인들의 사격으로 많은 학생들이 희생된다.

  한편 시내에서는 시위대가 경찰차, 소방차를 전복시키고 경찰서에 불을 질렀다.  재선거와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대에 당황한

  제1공화국정부는 오후3시 계엄령을 선포한다.

?4월25일 서울의 대학 교수단 300여명이 '학생의 피를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데모를 시작하여 학생과 시민들이 이에 호응하여

 서울시내는 10만여명의 데모군중으로 계속 불어나서 밤샘데모로 이어진다. 경무대를 지키던 계엄군은 실탄을 장전한 상태였지만, 처음부터

 엄정중립의 입장을 ?며 군은 더이상 국민의 희생을 원하지 않았다.

?4월26일 사태수습이 불가함을 알아차린 이승만 대통령은 오전 10시30분에 하야성명을 발표한다. 이승만은 이화장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부통령 이기붕 일가의 자살 소식을 듣고 미국으로 망명한다.

?8월 의원내각제인 장면 내각이 새롭게 출범한다.

 

강재(剛齋)  신숙(申肅)선생 묘역 / 1885.12.29~1967.11.22 / 건국훈장 독립장(1963)

 

호는 강재(剛齋), 경기도 가평출신으로 독립운동가, 3.1 독립운동에 참여한 뒤 중국으로 망명하여 1930년 만주에서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한국 독립군 참모장으로 무장투쟁을 전개

?1911년  매국원흉 이용구(일진회장) 암살기도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 교정, 인쇄, 배포 책임

?1921년 북경 군사통일회의 의장                                   

?1923년 상해 국민대표회의 부의장

?1930년 한국독립당 결성, 한국독립군 참모장

?1945년 재만한인총연합회 회장

?1963년 건축훈장 독립장 서훈

 

 

상산(常山)  김도연(金度演)선생 묘역 / 1894.6.16~1967.7.19

 

경기도 김포 출신 독립운동가, 정치가였으며 일본에서 1919년 1월1일 비밀리에 조선독립청년당을 조직하고,  2월8일 선생을 포함한 11면의

대표는 독립선으로 주도하여 옥살이를 한다.

1942년에는 일본이 조선어학회를 해체시키려는 사건으로 인해 또 다시 2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광복 후에는 입법의원과 제헌 국회의원을 거쳐 초대 재무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동암(東菴) 서상일(徐相日)선생 묘역 / 1887~1962 / 건국훈장 애족장(1990)

 

호는 동암(東菴), 경북 대구 출신으로 독립운동가, 정치인, 대동청년당, 조선국권회복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광복후에는

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으로 헌정의 초석을 놓았음

?1909년 국권회복 비밀결사 단체 대동청년당 조직, 독립운동

?1910년 한일병합의 부당함 호소, 9인결사대 조직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에서 활동

?1921년 미국 태평양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에 서명 등 활동

?1945년 한국민주당 창립

?1948년 제헌 국회의원

?1960년 사회대중당 창당

?1990년 건국 애족장 추서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 묘역 / 1879.7.10~1962.5.10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호는 심산(心山), 경북 성주 출신으로 독립운동가, 교육자, 을사5적 처형요구, 광복후 이승만정권에 항거, 부정선거 규탄,

성균관대학교 창립, 초대학장 역임

- 故 김창숙 선생은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된 후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되신 분이다.

그 분이 아무에게도 보살핌도 받지 못한채(가족들 모두 독립운동, 반독재운동으로 경찰에게 잡혀 죽었다.) 병원 골방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는 자리인데, 그 병실에 일본 관동군 출신에, 사이비 민족주의자였으며, 공사주의 동조자였고, 쿠데타 주동자였던

박정희가 방문했다. 그러자 당시 김창숙 선생은 박정희를 쳐다보지도 않고 돌아누웠다고 한다.

(오른쪽사진 / 1962년 5월5일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선생의 병상을 찾은 박정희)                 [참조 : 바른역사알리기 운동본부]

 

?1905년 을사조약 체결반대 매국 5적 성토 상소, 옥고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을 호소하는 파리장서 활동을 주도

?1925년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

?1946년 전국 유림결속, 유림재단 정리 후 유도회 조직

?1946년 성균관 및 성균관대학 설립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서훈

 

현곡(玄谷) 양일동(梁一東)선생 묘역 / 1912.12.30~1980.4.1 / 건국훈장 애족장(1990)

 

호는 현곡(玄谷), 전북 옥구 출신으로 정치가, 제3,4,5대 민의원, 제8,10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1977년에 통일당 총재를 지냈음.

?1930년 중동학교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 동조시위 주도로 퇴학

?1932년 중국에서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 활동

?1932년 일본 동경에서 조선동흥노동동맹에 가입, 신문발행으로 항의의식 고취

?1945년 이후 제3~5대 민의원

?1973년 민주통일당 창당, 대표최고위원 역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진달래능선

 

대동문

 

산딸나무

 

소귀천계곡, 진달래능선 방향 내림길

 

 

소귀천계곡

 

용담수

 

옥류교

 

할렐루야기도원 길

 

우이계곡 쉼터

 

우이계곡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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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10.04 16:01

    첫댓글 너무 자세하게 설명해주셔 감사해요~ ^^

  • 10.10.05 08:00

    좋은 정보네요 꼭 한번 가구 싶던곳이었는데 갈때 이거 프린트 해서 가면 될꺼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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