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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4일 / 대예배, 오후예배 / 히브리서 11:1-6
믿음의 사람이여 일어나라! 참된 믿음의 신앙인이 되라!
더 큰 믿음을 구하자! 더 큰 믿음을 갖고자 노력하자!
♬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 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
왜 이런 슬픔 찾아 왔는지 원망하지 마세요. 당신이 잃은 것보다 주님께 받은 은혜
더욱 많음에 감사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 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고난도 이길 수 있잖아요.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슬픔도 참을 수 있잖아요. 어떤 고난도 견딜 수 있잖아요.
믿는 이들이 신앙생활을 할 때 여러 가지 요인 때문에 신앙이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어떤 믿음을 가져야 험한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까?
5. 믿음의 사람은 (믿음을 주소서)라고 간구합니다
히브리서를 기록한 목적은 1세기 후반의 유대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과 로마제국으로부터 양면의 박해와 고난을 당할 때 기록한 것입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육체적 고난을 당했고, 집과 재산도 약탈당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신앙 때문에 옥에 갇히기고 했으며 또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 때문에 대중들의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습니다(히 10:32-34).
이런 상황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박해를 받지 않는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려는 배교의 경향을 띠었습니다. 또한 박해와 고난이 계속되자 고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시적인 안일의 덫에 걸려 세상과 타협하고, 신앙이 흔들리며 예배조차 무성의하게 드립니다(히 10:25). 뒤로 한 걸음 더 후퇴하여 쉬지 않았던 기도조차 소홀히 하게 되며(히 12:12), 하나님의 음성보다는 육신으로 나오는 불경건한 소리나 마귀의 소리를 자꾸 경청하게 되어 자신도 모르게 신앙이 침체되는 현상이 심화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다보니 자신을 변명하기에 바빠 자꾸 하나님 말씀을 자기 위주로 변절시키기까지 합니다.
신앙이 변절된 사람의 삶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갈 5:19-21 / 여러분이 본성이 시키는 대로 육체의 욕망에 따라 살면 여러분의 생활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곧 더러운 생각, 육신의 쾌락을 찾는 마음, 20) 우상숭배, 마술, 헐뜯음과 싸움, 질투와 분노, 언제나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일, 불평과 비판적인 태도, 자기의 작은 당파 외에는 모두 나쁜 것으로 인정하는 배타주의와 거기서 나오는 잘못된 교설 21) 시기, 살인, 술주정,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것 따위입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한번 더 당부합니다. 누구든지 이런 생활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물려받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위기에 처한 성도들을 어떻게 위로하고 권면할 것인지에 대하여 히브리서 저자는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믿음이라고 피력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흔들리는 그들에게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하며 믿음으로 때를 기다리라고 했던 것입니다(히 10:38). 신앙인이 믿음으로 살아야지 환경 때문에 믿음에서 퇴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히브리 기자는 이렇게 권면을 합니다.
히 10:39 / 우리는 하나님께 등을 돌리거나 비참한 운명에 처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리라는 확신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이란 의미를 되새겨 봅니다(히 11:1).
그리스도인들이 기본으로 갖추어야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러면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갖는 것으로 구약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라면 신약에서는 이 땅에 오신 메시아가 예수님이심을 믿고, 오직 예수님을 의지하여 그 분이 하셨던 일과 하시는 말씀들을 따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도라면 자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바라는 것’은 우리들이 바라는 대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바라는 것입니다. 즉 내 뜻대로 구하고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하시려는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빌 2:13 /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안에 계시면서 순종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고 하나님께서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여러분을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기다리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한 것입니다.
히 10:35-37 /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을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장차 여러분이 받을 보상을 언제나 기억하십시오. 36)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것을 받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37)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실 날(응답해 주실 날)이 그다지 많이 지체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에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이렇게 정확하게 표현하였습니다.
빌 4:13 / 내게 힘을 주고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나는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을 다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라면 끊임없이 하나님께 ‘주여! 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보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온전히 서도록 그리고 성도로서 해야 할 사명을 깨닫고 그에 대한 준비도 철저히 해야 합니다.
▶ 믿음이 실상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분명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데 그리고 의지하지 않는데 하나님께서 약속하지는 않습니다. 먼저 분명한 믿음을 갖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때로는 예수님께 믿음을 더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습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반드시 있어야 할 기도제목이 있는데,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 주소서’입니다. 이런 기도제목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 드리는 기도가 아닙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 드리는 기도입니다. 믿음이 강해질수록 더 큰 믿음을 사모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내안에 있는 불신과 불순종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큰 믿음으로 채워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신자로서 드리는 예배나 봉사를 드리는 믿음 뿐 아니라 큰 시련을 능히 이기는 믿음을 더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고난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이 없음으로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치거나,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것 같은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더 깊은 믿음을 갈망하고 기도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믿음을 더해 달라’는 제자들(사도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눅 17:5-6 / [믿음의 힘] 사도들이 주께 말하였다. `저희에게 믿음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하면 더 큰 믿음을 가질 수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6)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겨자씨만한 크기의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 바다로 옮겨지라 하여도 그대로 될 것이다.
예수님은 왜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이라고 표현하셨을까요? 겨자씨는 씨앗 중에서도 가장 작은 씨앗입니다. 외형적으로 작은 씨앗일지라도 그 안에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놀라운 생명력이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믿음의 크기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작아 보이는 씨앗이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생명력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별 볼일이 없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력이 있다면 그것이 자라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 아무리 과학이 발전했다 해도 씨앗은 만들 수 없습니다. 씨앗의 성분을 조사해서 씨앗의 성분을 만들 수는 있겠지만 씨앗 안에 있는 생명은 만들 수 없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나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뿐입니다. 나로부터 만들어지는 믿음에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생명력이 없기 때문에 기적도 없고 성장도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겨자씨만큼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성령이 역사하여 큰 나무로 자라 공중의 새들이 깃들게 됩니다.
6.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참 믿음을 가졌습니다.
1. 믿음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게 합니다.
히 11:1 /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갖는 게 아니겠습니까? 또한 아직 눈앞에 보이지 않는 미래의 일일지라도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반드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게 아닙니까?
여기서 바라는 것은 미래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믿음은 현재에 속하지 않고 미래에 속하며, 이미 가진 것이 아니라 아직 소유하지 못하였어도 반드시 소유할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상상하는 것, 내가 소원하는 것, 내가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자신의 신념이나 철학이나 최면도 아닙니다. 참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마 4:4)을 소원하고 바라보는 것이 진실한 믿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에서 하나님(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약속해 주신 것들을 기초로 해서 믿음의 조상들에게 말씀해 주셨던 것(창세기 28장에서 야곱에게 하신 약속)처럼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오늘도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한걸음 나아가 욥기 38-41장에서 욥에게 하셨던 말씀들처럼 우리도 믿음으로 이 세상의 삼라만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음(히 11:3)을 받아들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또한 사도 요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받아들어야 합니다.
요 1:10-14 / 그분이 세상을 만드셨는데도 그분이 오셨을 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이 자기 땅에 오셨으나 백성들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다. 12) 그러나 그분을 영접한 사람들, 곧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13)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것은 혈통이나 육체적 욕망이나 인간의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말씀에 의한 것이다.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 사셨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 …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어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 죄와 고난으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약속하셨고, 영원한 생명과 천국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그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2. 참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합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합니다. 즉,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참된 믿음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미래와 영적인 세계를 보게 해 줍니다.
내 눈에 보이는 것, 내 귀에 들리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우리 눈은 어느 범위의 파장을 가진 빛 즉 ‘빨/주/노/초/파/남/보’ 계통의 색깔들(소위 가시광선)만 볼 수 있습니다. 그 범위를 넘어서는 빛 즉 자외선, 적외선, 엑스레이선 등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우리는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칫 없다고 생각하다가 그 광선들에 의해 몸을 상하게 됩니다.
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병원에서 초음파 검사들을 많이 하는데 박쥐나 모기 등은 그 초음파를 듣지만 인간은 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칫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십여 년 전에 동남아시아에서 거대한 쓰나미가 발생했을 때 수십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어 시체가 되었지만 이상하게도 야생동물의 시체는 거의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이렇게 제한적인 인간의 감각 범위를 뛰어넘는 야생동물들의 감각 능력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만져지는 것만 믿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제한적인 용량의 뇌를 사용하여 살겠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요, 짧은 인간의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이 안계시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알아야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반대로 믿으면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 초대 교회의 신학자인 어거스틴도 ‘나는 알기 위해서 믿노라’로 말했습니다. 즉, 믿음이 아는 것보다 먼저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참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으면 영적인 세계를 결코 이해하거나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믿음이 영적인 세계를 보게 해 주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망망대해를 항해하던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말을 합니다. 한 명은 ‘우리 앞에 아무 것도 없어.’라고 했고, 다른 사람은 ‘섬이 있다.’고 말합니다. 똑같은 바다를 바라보고서도 왜 이렇게 다른 말을 했을까요? 그것은 한 사람은 망원경으로 바다를 바라보았고 다른 사람은 그냥 맨 눈으로 바다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망원경으로 바다를 본 사람과 같습니다. 맨 눈으로는 하나님의 깊은 세계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믿음으로 바라보면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나라가 보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뉴턴은 '나는 망원경으로 천 리 밖을 바라보지만, 내가 기도할 때는 더 먼 하늘나라를 바라본다.'는 말을 했습니다. 기도 속에 하나님을 가까이하게 되고, 기도 속에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하시며, 기도 속에 하나님의 인자한 얼굴을 우리에게 향하여 주십니다. 기도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보장이 있습니다.
시편 116:2에 보면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평상시에도 늘 기도에 힘쓰고, 숨질 때 나아가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항상 기도해야 됩니다. 또 신명기 4:7에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처럼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가까이 오셔서 도와주시는 신이 다른 어느 민족에게 또 있겠습니까?"라고 말씀했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하여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해야 됩니다. 능력있는 분이 곁에 계시면 얼마나 든든합니까? 그 험한 길에 안내자가 있고, 경호원이 있다면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오늘도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에게 가까이 해주십니다. 병들 때는 치료의 주님, 가난할 때는 부요하신 주님, 위험할 때는 방패의 주님, 캄캄할 때는 광명의 빛으로 우리에게 역사하여 주십니다.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의 기념관에 가보면 그가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8시간 기도했다는 기록과 함께 6.25전쟁의 승리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8시간을 기도했다는 그 대목에 얼마나 감동이 되는지 모릅니다. 기도로서 모든 것에 승리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3. 참 믿음을 가지고 무엇을 볼 수 있을까요?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을 믿음의 눈을 가짐으로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가짐으로 성경에서 나에게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게 되고 나의 삶의 구석구석에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되면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창세기 1:1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의 신화가 아니라 우리에게 이해가 되고 현실이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모든 세계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깨달아 알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상을 단순히 창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창조하신 모든 것을 지금도 관리하시고 지배하시고 성실하게 보호하신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주 창조의 비밀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이성이나 지식이나 경험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 알게 되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참 믿음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연습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이 없으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보다 내 눈에 보이는 세상에 주목하며 살아간다면 믿음의 삶은 추락하게 됩니다. 성경은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는 세계를 결정하고 다스린다고 합니다. 즉, 보이는 세상은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그 분의 능력은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 분의 능력과 말씀으로 세상을 지금도 다스리시고 지휘해 가십니다. 만물이 하나님의 손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류 역사의 모든 수레바퀴를 돌리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보이는 세계로부터 눈을 돌리는 연습,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욥처럼 “주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는 줄을 나는 잘 압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모든 일을 다 이루신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말씀하셨지요. 알지도 못하면서 내 계획을 가리는 자 그 누구냐고 말입니다. 어찌 함부로 말할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깨닫지도 못하고 함부로 입을 놀려 댔습니다. 주께서 나를 위하여 하시는 놀라운 일을 미처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해댔습니다. … 전에는 내가 소문으로만 주님에 대해서 들어 왔습니다만, 이제 이 두 눈으로 주님을 똑똑히 뵙고 있군요. 이렇게 내가 꿇어 엎드립니다. 먼지바닥 위에 앉아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합니다.”라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7. 믿음에는 증거가 따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삶이 어렵다고요? 힘들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그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았고 바라지 못할 것을 바랐던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11장 전체를 보면 믿음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길을 걸어갔던 선진들의 발자국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힘과 용기를 줍니다. 왜냐하면 이미 승리한 믿음의 선조들을 따라간다는 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큰 혜택이 됩니다.
▶ 성경은 먼저 아벨을 소개합니다 / 아벨은 아담의 두 아들 중 한명으로 인류가 타락한 이후 최초로 하나님께 올바른 예배, 올바른 제사를 드린 사람이었습니다. 아벨은 자신의 형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자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에 대해서 설명하실 때 진정한 예배를 드린 아벨을 소개하신 이유는 바로 믿음의 증거가 예배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믿음을 가졌다는 것을 가장 손쉽게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주일에 주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모습, 아니 예배 시간에 나오긴 하지만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세리처럼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볼 생각도 못하고 슬픔에 잠겨 가슴을 치며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하고 눈물로 기도를 드리며 과부처럼 열납되는 두 렙돈을 드리게 됩니다.
진짜 자신의 가장 귀한 시간과 정신과 마음과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는 모습을 통해 믿음의 증거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믿음을 가진 자들은 이 예배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 성경은 에녹을 소개합니다 / 에녹은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성경에는 죽지 않고 하나님 나라로 옮겨진 인물들이 몇몇 등장하는데 그 중 한명이 바로 에녹이라는 믿음의 선진입니다. 그가 왜 그런 축복을 받았냐면 그가 가진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즉, 우리는 믿음을 가짐으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욱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합니다. 바로 이 믿음으로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기쁨으로 넘치도록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 성경은 노아를 소개합니다 / 노아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방주를 예비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당시 노아가 살던 곳은 티그리스나 유프라테스 강에서 500마일이나 떨어진 곳이었기에 방주를 지을 만한 곳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노아는 이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하나님의 명령에 경외함으로 순종합니다. 믿음은 이와 같이 바랄 수 없는 것들을 바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게 해 줍니다. 노아는 자신의 경험과 이성적으로는 이해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가지고 아직 임하지 않았지만 곧 이루어질 대홍수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순종합니다. 이 때 세상 사람들은 노아를 욕하고 비웃습니다. 믿음은 그런 것입니다. 세상이 보기에는 어리석고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지만 이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 이외에 아브라함과 사라 그리고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등장합니다 / 믿음의 선진들은 자신의 삶에서 믿음에 합당한 증거를 나타내며 살았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고향을 떠나 약속해 준 먼 땅으로 가라고 지시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채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서 훗날 하나님께 같은 약속을 받은 이삭과 야곱처럼 천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특히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튼튼한 기초 위에 세워진 하늘의 도성으로 그를 데려다 주시리라는 확신 속에서 기다리고 산 것입니다. 그 하늘의 도성은 바로 하나님께서 설계하고 건설하신 곳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믿음이 깊은 여자였습니다. 사라는 이미 나이가 많이 들어 아기를 낳을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반드시 약속을 이루어 주시리라는 믿음을 굳게 갖고 있었으므로 어머니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모세는 애굽의 모든 보화를 소유하는 것보다는 장차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는 편이 훨씬 더 낫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실 큰 상을 더 바란 것입니다. 창녀 라합이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자기 집에 숨겨준 것도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불순종한 여리고성 사람들이 멸망할 때 구원을 받았습니다.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그 밖에 다른 예언자들의 신앙에 대해서 다 이야기하자면 아무리 해도 시간이 모자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이웃 나라들을 정복하였으며 자기 백성들을 정의로 다스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받았습니다. 또한 사자굴에 던져졌으나 해를 받지 않았고, 맹렬히 타는 불구덩이에 던져졌으나 조금도 상처를 입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죽음의 칼날을 피해서 위험을 면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병들고 연약하였으나 믿음으로 다시 건강하게 되었고, 또 어떤 사람은 전쟁터에서 믿음으로 큰 힘을 얻어 적군을 전부 격퇴시키고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돌에 맞아 죽고, 어떤 사람은 톱에 두 동강으로 잘려 죽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믿음을 버리고 풀려나기 보다는 칼에 맞아 죽는 편을 택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양이나 염소의 가죽으로 변장을 하고 광야와 산을 방황하였고 동굴이나 토굴에서 숨어 살며 굶주림과 병과 학대에 시달려야 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끝까지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약속하신 것을 전부 다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보다 더 좋은 것을 준비해 두신 것을 그들에게도 주시려고 기다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 그렇다면 우리의 삶을 돌아볼까요 / 우리의 삶은 지금 어떤 믿음의 증거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고 있습니까? 아벨처럼 진정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에녹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합니까?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고자 노력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런 삶들이 우리의 삶에서 열매를 맺어져야 합니다.
어렵다고요? 힘들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믿음의 선진들은 모두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출발했습니다. 그들이 무모한 도전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었고, 이해되지 않지만 순종할 수 있었던 모든 이유는 그들 자신의 능력에 있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들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믿는 그 믿음의 근본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들이 바라보았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었고 말씀이었습니다. 우리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 있고 하나님의 약속을 바란다면 우리 또한 우리의 삶에서 믿음의 선진들과 같은 증거들을 드러낼 수 있는 줄 믿습니다.
7. 믿음이 있으므로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0장에 걸쳐서 계속하여 이 땅에 있는 율법과 성전과 대제사장은 그림자일 뿐이고 진짜는 하늘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계신 하늘이 있고, 거기에 영생이 있으며, 하늘에 진짜 성전이 있고, 하늘에 대제사장인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모세의 돌비만이 아니라 우리들 마음에도 새겨졌다고 했습니다.
순교한 스데반의 경우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되고 그렇게 살기를 위해 힘쓰게 됩니다.
행 7:54-60 / 유대인 지도자들은 스데반의 말을 듣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부드득 갈았다. 55) 그러나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그때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오른편에 서 계시는 예수의 모습이 보였다. 56) 그가 소리쳐 말하였다. `보시오! 하늘이 열리고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서 계십니다!' 57) 그러자 사람들은 손으로 귀를 틀어막으면서 스데반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58) 그러고는 돌로 쳐 죽이려고 그를 성 밖으로 끌어냈다. 공증인들, 곧 사형 집행인들이 겉옷을 벗어서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놓았다. 59) 그러나 돌들이 우박처럼 날아오는 속에서 스데반은 `주 예수님, 제 영혼을 받아주소서' 하고 기도를 드렸다. 60) 그리고 무릎을 꿇고 `주님,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소서' 하고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그 말을 남긴 뒤 그는 눈을 감았다.
➊ 중보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바라보게 됩니다.
♬ 494장 / 1.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린 것 내게 효험되어서 정결하게 하소서 / 2. 내가 공을 세우나 은혜 갚지 못하네 쉼이 없이 힘쓰고 눈물 근심 많으나 구속 못할 죄인을 예수 홀로 속하네 / 3. 빈손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 생명샘에 나가니 나를 씻어주소서 / 4. 살아생전 숨 쉬고 죽어 세상 떠나서 거룩하신 주 앞에 끝날 심판 당할 때 만세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아멘
➋ 순교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믿음을 지켜나가게 됩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할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세상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롬 8:35, 38-39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려움이나 재난을 당할 때, 또 박해받고 죽임을 당한다고 할 때, 과연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더 이상 우리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겠습니까? 굶주리고 헐벗고 위험을 당하고 죽음에 직면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신 것이겠습니까? 38) 나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확신합니다. 죽음도 그렇게 할 수 없고, 생명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천사들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지옥의 모든 세력을 다 합친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멀리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오늘에 대한 우리의 염려도 내일에 대한 우리의 공포도 39) 또는 하늘 높이 올라가거나 바다 깊은 곳에 들어가거나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간에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실 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➌ 예수님처럼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받아달라고 기도도 합니다.
○○○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 미국에 있을 때입니다. 어느 한국 사람이 비자를 안 받고 여행을 하다가 저희 동네에 주저앉았습니다. 불법체류자니까 가족을 데리고 올 수도 없고 무엇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한국에 일단 나가면 못 들어오기 때문에 10년 동안 숨어서 작은 가게를 했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니까 휴일도 없이 10년간 쉬지 않고 일만 했습니다. 드디어 10년 만에 영주권을 받았습니다. 너무 좋았지요. 드디어 가족들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가족들을 전부 다 초청을 했습니다. 그리고 조만간 만날 가족들을 기다리던 어느 날 흑인 두 명이 들어와서 권총으로 그 사람을 쏘아 죽였습니다. 이제 곧 가족을 만나는데 흑인들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 분은 교회를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장례를 치러 줄 교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인회에서 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이러 이러한 사람이 있는데, 목사님께서 장례식을 좀 해 주세요.” 그래서 제가 장례식을 맡았습니다. 장례식 날, 아내와 다른 자녀들은 오지 않고 대학을 졸업했음직한 나이의 큰아들만 왔더군요. 너무 기가 막히지요. 온 가족이 비자를 받아서 미국에 들어오려고 하는데 아버지가 총에 맞아 죽었으니! 그 아들을 보니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너무너무 불쌍해서 제가 그 아들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며 위로해 주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아들은 주님을 영접하고 예수를 믿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이가 TV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를 용서해 주셨는데 나는 살인자들의 죄를 용서합니다.” 이 인터뷰가 나가자 온 도시가 술렁였습니다. “어떻게 저럴 수 있나? 예수 믿는 한국 사람이 자기 아버지 죽인 살인자를 용서했다!” 대단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인터뷰 때문에 예수 믿는 한국 사람들이 온 동네에서 얼마나 칭찬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예수 믿은 지 얼마 되지도 않고, 막 제자가 된 사람이 자기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를 용서해줄 수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4년 전쯤, 제가 한국의 한 신학교 졸업식에 설교를 하러 갔는데 졸업식을 마치고 나니까 누가 와서 “목사님, 저를 기억하십니까?” 하는 겁니다. “글쎄요.” “20년 전에 미국에서 이러저러한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랬지요.” “그 아들이 바로 접니다.” 그 아들은 지금 목사가 되어 있습니다. 자기 원수를 용서해줬던 그 사람이 결국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신학교를 갔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긴 믿음의 사람은 이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➍ 예수님처럼 자기를 죽이는 자를 위해서도 중보기도를 잊지 않습니다.
스데반처럼 자기를 죽이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덮어주고, 끝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스데반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예수님의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6:1에 ‘제자’라고 한 것은 누구의 제자를 말합니까? 제자에게는 스승이 있습니다. 그 스승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요 예수님의 제자들로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하신 일을 알고 그대로 본받아 살려고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하여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기도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안 보이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면 이런 복수의 사슬을 도저히 끊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가슴은 멍들고 한이 맺혀 있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예수님을 본받기 때문에 복수의 사슬을 끊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또 하나의 조건이 있는데 성령에 충만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자기 적을 용서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나를 충만케 하시고 도와주시지 않고는 복수의 사이클을 끊을 수 있는 능력이 도무지 없습니다. 인간으로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나를 해쳤는데, 나에게 악을 행했는데, 어떻게 그것을 선으로 갚을 수가 있겠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습니다.
➎ 믿음의 사람은 에녹과 같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완전한 신앙인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갑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답게 악한 사람에게는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애원하고 선한 사람에게는 더욱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도록 권면합니다. 그리고 그 어느 누구와도 가까이 지내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결 론
이 땅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지만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줄어가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보이는 세상에 초점을 맞춥니다. 긍정적인 생각과 지식적 믿음을 가지고 진짜 믿음이라 주장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늘어납니다. 이런 시대 가운데서 우리들이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믿음, 바라지 못할 것을 바라는 믿음 즉 하나님의 약속과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믿음의 선진들처럼 믿음의 증거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진정한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거짓 믿음이 아닌 진짜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세상에 현혹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위한 삶을 사십시다.
한 획의 기적
고질병'에 점하나 찍으면 '고칠병'이니 점 하나는 그렇게 중요합니다.
마음 '심(心)'자에 신념의 막대기를 꽂으면 반드시 '필'(必)'자가 됩니다.
불가능이라는 뜻의 Impossible이라는 단어에 점 하나를 찍으면 I'm possible이 됩니다.
부정적인 것에 긍정의 점을 찍었더니 불가능한 것도 가능해 졌습니다.
'빚'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찍어보면 '빛'이 됩니다.
Dream is nowhere. (꿈은 어느 곳에도 없다)가 띄어쓰기 하나로 Dream is now here. (꿈은 바로 여기에 있다) 로 바뀝니다.
부정적인 것에 긍정의 점을 찍으면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불가능한 것도 한순간 마음을 바꾸면 모든 것은 가능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