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0주(가)Korean bug 한국 빈대 2011,08,14
김형수 비오 신부님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인을 지나치게 차별대우하셨습니다. 그런대도 가나안 여인은 당당했습니다. 그 당당한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성서기자는 말했습니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인의 딸이 나았다.”
사랑합니다. 30여 나라에서 신부 수녀 평신도가 모여서 6개월간의 연수를 받을 때의 일입니다. 필립핀 신부가 강의 중에 공적으로 필립핀 신부들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필립핀 사람들이 부부 싸움을 시작하면 각시가 신랑을 몰아붙이는 말이 ‘한국 빈대 - Korean bug’라고 욕을 합니다.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왜 하필이면 한국빈대 라고 욕하는지! 혹시 필립핀 신부들은 그 이유를 아십니까?” 이 이야기와는 별도로 필립핀 사람들, 특히 수녀님들이 한국 사람들을 만나면 따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나뿐 사람들이다.” 어느 날 제가 한 필립핀 할머니 수녀님 한 분을 붙잡고 물었습니다. 한국 사람에 대한 편견의 뿌리를 찾고 싶었습니다.
“왜 한국 사람들이 그렇게 나쁩니까? 우리는 스페인이나 미국이나 일본처럼
당신네 나라를 침범한 일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수녀님의 대답은 의외였습니다.
“내가 어려서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사실이다.
한국 사람들이 우리 동네에서 밥을 훔쳐갔다. 내 밤도 훔쳐갔다.”
이야기는 태평양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일본 사람들에게 징병된 한국 남자들이 밤에 몰래 와서 자기들 밥을 훔쳐갔다는 말이었습니다. 일본군 속에 있는 한국 사람을 어떻게 구분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 수녀님 말씀하셨습니다.
“확실히 일본군과 한국군은 구별이 되었다. 일본군은 복장도 멋있고 남의 것도
안 훔쳐갔다. 한국 군인들은 거지들 같았고 자기들 물건을 자꾸 훔쳐갔다.”
그래서 제가 설명했습니다.
“그 때 한국 사람들은 강제로 일본군에게 끌려간 것이다. 일본군과 별도로
한국군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잘못은 당신네 나라를 침공하고
한국 젊은이들을 끌어간 일본 사람들이지 않느냐?“
그러나 필립핀 수녀님은 말했습니다.
“일본군은 자기들 물건을 훔쳐가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잘못은 한국 사람들이 저질렀다.”
더 이상 그 수녀님에게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미안한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리곤 혼자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끌고 간 한국 젊은이들을 따로 격리해 놓고 먹을 것 입을 것을 제대로 주지 않았구나! 춥고 배고픈 한국 젊은이들이 더 비참한 필립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도둑질을 해서 먹고 살았구나! 일본인들이 영특하게도 민족들끼리 싸움을 잘 붙였구나. 일본 사람들도 중국 사람들처럼 우리 민족을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도구로 사용했구나. 죄의 근원은 일본 사람들인데, 그 죄의 결과는 한국 사람들이 짊어져야하는구나! 일본 사람들의 전쟁에 얼마나 많은 조선의 젊은이들이 개처럼 끌려가서 돼지처럼 살다가 죽었는가를 느끼게 했습니다. 춥고 배고프니까 살기 위해서 자기보다 더 약한 사람들의 것을 뜯어먹었구나!
그런저런 생각에 잠겨있었는데, 그 필립핀 수녀님은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어느새 흥분을 가라안치고 차분한 마음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일본 군인들이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우리 삼촌도 그렇게 죽였다. 내가 보았다. 그 때는 전쟁 때였기 때문이다.”
생각해봅니다. 한국 빈대란 말을 언제까지 들어야 하는가? 밥 도둑놈이란 아름다운 추억을 그들 가슴에서 지울 수는 없을까? 왜 나라를 통째로 삼켰는데도 반감을 갖지 않게 처신한 일본 사람들의 대인관계에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LA 대지진 때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한국계 미국인을 공격한 기억도 눈에 선합니다.
고개를 돌려서 나라 안을 보았습니다. 지금 한국에도 같은 일들이 벌어집니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수많은 외국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혼인해서 한국인 가족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중국에 살던 교포들이 노동자로 들어온 경우도 있고, 한국경제의 밑바닥을 책임지기 위해서 노동자로 근무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들은 알게 모르게 그분들의 가슴에 한(恨)을 심어줄 수도 있습니다. 한국에서 노동자로 일하러 왔다가 돌아간 사람들이 자기 나라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면 공격한 적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들의 힘든 삶에 대해서 뒤돌아볼 때입니다. 가톨릭에서 하는 이주민 사목정도로는 그들 가슴에 맺혀가는 한이 풀리지 않을듯합니다. 정부차원의 큰 정책과 대책과 배려가 시급한 실정입니다.
어느 고급 호텔 식당에 한복으로 정장한 사람이 거절당했습니다. 말을 바꾸면 한복은 정장이 아니란 얘기일까요? 그 한복으로 정장한 사람은 인터넷(SNS)을 통해 그 사실을 소설화했고, 그 호텔 지배인이 사과하는 선에서 정리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대한민국에 살지만, 평범한 대한민국 사람들과는 다른 명품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선포와 봉사 65쪽,2011).
사랑합니다. 벤허영화에 대한 기억이 조금은 남아계시리라 믿습니다. 요즈음에 새로 나온 벤허영화가 있습니다(New Benhur). 전쟁을 위해 만든 전함(戰艦)의 노를 젓는 노예생활로 온갖 고난을 다 당하던 벤허가 로마군 대장을 구해주어, 그의 아들이 되어 이스라엘로 돌아온 내용은 같습니다. 그러나 고향방문 내용이 약간 바꾸었습니다. 벤허가 돌아오는 깊은 밤중에 미모의 Ester(에스에르)가 "Who are You?" 하고 낭만적으로 묻고, 기둥 뒤에서 벤허가 나타나던 로맨틱한 장면은 빠졌습니다. 벤허의 약혼자 에스테르의 아버지는 잡혀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살아남아서 절름발이가 되었습니다. 예전에 벤허가 끝까지 고발하지 안한 반란군 한 명이 에스테르 부녀를 구출해서 자기 집에 살게 하면서 결혼을 강요했습니다. 그때 나타난 벤허는 로마인의 신분을 이용해 빼앗긴 자기 집을 다시 샀습니다. 그 반란군은 벤허가 에스테르의 소식을 물어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럴 즈음에 벤허와 에스테르가 우연히 만납니다. 에스테르는 로마의 귀족이 되었다고 벤허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벤허가 말했습니다. “에스테르! 당신은 어린 시절에 사람은 눈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했어요. 자 내 눈을 본세요.” 눈을 보아도 에스테르는 벤허의 속마음(本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집에 돌아와 벤허가 변했다고 아버지에게 짜증을 냈습니다. 아버지가 딸을 달래며 말합니다. “내가 봐야겠다. 아마 내 눈이 너의 눈보다 나을지도 모른다.”
이야기를 다시 복음으로 돌립니다. 왜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인에게 그렇게 황당한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 여인이 잘못 들었을 수도 있고, 그 사건을 전하는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각색해서 전달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뚜렷한 것도 있습니다. 빵의 기적을 보고도, 늘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이 예수님이 나타나자, 유령이라고 몰아붙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신 다음에도 “유령”이라고 놀랬습니다. 그러나 소문만 듣고 찾아온 이방인인 가나안 여인은 모욕적인 예수님의 언행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믿음을 들어냈습니다. 편견으로 예수님을 보는 제자들과 그 여인의 믿음이 큰 대조를 이룹니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지성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이어령 박사가 신앙을 받아들인 이야기 흥미롭습니다. 박사의 딸이 자기 아들 때문에 마음의 고통을 겪다가 실명(失明)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종교(宗敎)는 문화(文化)의 일부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신념(信念)을 내세우던 현대의 지성인(知性人)이, 딸의 고통을 보고 딸을 위해 종교를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을 두고 어느 언론에서는 이성(理性)에서 영성(靈性)으로 넘어간 사건이라고 떠들었습니다.
이 세상에 고통이 없어도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있을까요? 놀랍게도 깊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는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고통과 한계를 체험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알량한 지식과 가진 것으로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 하고 교만을 떨며 살지만, 인간의 한계 앞에서 결국 믿음만이 위대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자기 딸을 살려 달라고 절박하게 애원하는 여인을 통해, 예수님이 요구하는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믿는다.”는 말은 주님께 온전히 항복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믿음은 입술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낮추는 행위에서만 드러날 수 있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며 미사를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