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선교장(船橋莊) |
| 내 용 |
作庭者 ・ 槪要 | ① 강릉 경포 호수가에 자리잡은 선교장(船橋莊)은 영조代 이내번(李乃蕃)이 충주에서 移居해와 전형적인 배산임수터(족제비 설화)에 자리를 잡고 모두 10여채가 넘는 저택을 건축했다. 그 이름에 장원이라는 ‘莊’이 붙은 것처럼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양반 상류 주택으로 ‘대궐 밖 조선 제일의 큰 집’이라는별칭답게, 조선시대 사대부의 집의 풍모를 느낄 수 있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살림집이다. 국가민속문화재 제5호이다. ② 조선시대 민간 주택은 99칸이 한도였는데, 선교장은 건물 10동에 120여칸이나 되는 규모를 자랑한다. (선교장은 원래 99칸이었는데 이근우가 23칸의 ‘一’자형 사랑채 ‘열화당’을 지으면서 지금의 규모로 되었다) 대지는 3만평에 달한다. ③ 23칸 규모의 행랑채에 들어서면 사랑채와 안채로 가는 두 개의 문이 있다. 사랑채로 가는 솟을대문에는 '선교유거(仙嶠幽居: 신선이 거처하는 그윽한 집)' 현판이 있고 대문에 들어서면 너른 마당에 정심수가 자리한 사랑채인 열화당(悅話堂)이 있다. ④ 안채로 들어가는 평대문에 들어서면 몇 개의 단으로 높아진 안마당과 안채가 있다. ⑤ 안채의 동쪽에는 시야가 트인 높은 기단위에 동별당이 자리한다. ⑥ 대문 밖에 외별당 활래정(活來亭)은 정자를 지탱하는 돌기둥 4개가 연못에 잠겨있어 물위의 배를연상시키다. 방지방도형(方池方島型) 활래정은 정방형 연못(40m×40m)에 중앙에는 폭 7m 섬에는괴석을 놓고 반송 한 그루를 식재해 놓았다. ⑦ 경포호숫가에 자리한 별서(別墅)인 방해정(放海亭)은 솔숲을 배경으로 뜰에는 금잔디를 가꾸었고, 홍장암(紅粧巖) 바위에 이가원(李家園)이라는 글자가 각자되어 있다. |
역사 | ① 선교장의 역사는 ‘권씨부인’에서부터 시작된다. 강릉에 살던 권씨부인은 세종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의 10대손으로 충주에 사는 ‘이주화’에게 시집을 간다. 그 후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부인은 두 아들을 데리고 친정인 강릉 오죽헌으로 돌아왔다. 그 해가 경종1년(1721)이다. ② 오죽헌은 원래 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가 아들이 없자 넷째 사위인 ‘권화(율곡의 이종사촌)’에게 물려주었고 이러한 내력으로 오죽헌은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종가가 되었다. 오죽헌이라는 당호는 권화의 아들 권처균의 호이다. ③ 고향으로 돌아온 권씨부인은 강릉에서 셋째 아들 이내번(李乃蕃, 1703~1781)과 염전을 경영하여큰 돈을 모으게 되었다. ④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이내번은 새로운 집터를 배다리골에 마련하였다. 집 앞이 경포호수였으므로배로 다리를 만들어 호수를 건너다녔으며 이로 인해 선교장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때가 영조32년(1756)이다. ⑤ 이내번은 후사가 없어 둘째형 이중번의 둘째 아들인 ‘이시춘(李時春, 1736~1785)’을 입양했으나그가 선교장을 물려받은지 5년만에 죽고, 선교장의 주인은 당시 13살인 이시춘의 아들 ‘이후(李垕, 1773~1832)’에게 넘어갔다. ⑥ 이내번 손자인 이후는 어렸지만 총명하여 부를 축적하여 많은 농토를 소유하기에 이르렀다. ⑦ 이후는 순조16년에 과거에 응시했지만 시험관의 횡포로 낙방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배다리골 입구에 연못을 파고 정자를 세웠다. 이 정자가 활래정의 시작이다. 이후가 세운 활래정은 소박하다 못해누추했다. 그리고 널빤지로 다리를 만들어 왕래하였다.(→즉, 초기에는 연못안 섬에 亭子가 있었음) ⑧ 이후의 호가 오은인데 이는 ‘숨어 있는 자라’라는 의미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방지방도에 정자를만들어 은일지사로 살고자 한 것이다. ⑨ 활래정이라는 이름은 주자의 詩 <관서유감(觀書有感)>의 ‘위유원두활수래(爲有源頭活水來, 근원에서 살아있는 물이 흘러나오기 때문이다)’에서 따왔다. ⑩ 지금의 활래정의 모습은 이후의 증손자인 이근우(李根宇)가 창덕궁 후원의 부용정(芙蓉亭)을 본떠서 다시 지은 것이다. ☞ 이내번(토지 매입) ⇨ <兄이중번의 2男>이시춘(선교장 기초) ⇨ <이시춘子>이후(99칸 주택) ⇨ (이후曾孫)이근우(열화당, 동진학교, 現할래정, 23칸 증축하여 총 122칸이 됨) |
공간구성 | ① 선교장 들어가는 어귀에 있는 활래정은 그 자태가 화려하다. 왕실의 품격이 느껴진다. 부용정을 닮은 활래정은 연못 속에 네 개의 기둥을 담그고 물위에 떠 있는 형상이다. ② 활래정은 ‘ㄱ’자형으로 온돌방과 마루, 다실로 구성되어 있다. 언덕쪽에는 온돌방을, 연못쪽에는누마루를, 그 사이에는 다실을 두었다. 특이한 것은 방과 다실, 마루 사이에 벽이 없다는 것이다. ③ 활래정은 문으로만 둘러져 있어 모두 열어 놓으면 방 안 가득히 주변의 경치가 들어온다. 폐쇄적인선교장에 비해 활래정은 개방적인 공간이다. ④ 개방적인 공간을 보여주는 또 다른 공간은 활래정의 출입문인 달빛이 내린다는 의미의 ‘월하문(月下門)’이다. 월하문은 좌우에 그 흔한 담장도 행랑채도 없이 홀로 서있다. 그리고 늘 열려있다. ⑤ 여름이 오면 활래정은 방지의 연꽃과 방도의 소나무, 그리고 주변의 배롱나무 꽃이 덩달아 흐드러지게 피어 장관을 연출한다. |
① 선교장은 큰 사랑채인 열화당, 작은 사랑채, 행랑채, 연지당, 동별당, 안채, 안사랑채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② 안채는 최초로 지어진 건물로서 종부(안방마님)의 거처이며, 직계 여인들이 함께 지내는 곳이다. 정면5칸 측면2칸의 규모이며 겹집형태에 방마다 골방이 딸려있는 구조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③ 안채는 선교장의 他건물보다 소박하게 지어진 건물로 대청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에는 안방과 부엌이, 왼쪽 방쪽으로 익랑채가 ‘ㄴ’자형으로 연결되어 있다. ③ 선교장의 사랑채인 열화당은 주인 남자의 거처로 큰 사랑채이다. 3단의 장대석 기단위에 정면5칸측면2칸의 건물로 방과 대청, 그리고 약간 앞으로 돌출된 누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④ 난간이 설치되어 있는 툇마루 앞에는 러시아인들이 감사의 뜻으로 설치해주었다는 동판으로된 러시아식 테라스(측면에서 보면 박공형태 지붕으로 동판으로 제작되어 돌출된 처마) 가 설치되어 있다. 열화당의 열화는 도연명의 [귀거래사] 문장 중 친인척들이 정담을 즐겨 나눈다는 ‘열친척지정화(悅親戚之情話)’에서 따온 것이다. ⑤ 열화당 왼쪽에 있는 ‘ㄱ’자형 동별당은 집안의 잔치나 손님맞이에 주로 사용된 곳이다. ⑥ 열화당과 안채사이의 ‘ㅂ’자형 서별당은 서재로 쓰이던 곳이다. ⑦ 서별당 앞 연지당은 집안일을 도와주던 여성들이 머물던 곳이다. 또한 곳간채는 역사적인 의미가있는 곳으로 한국사학의 효시인 ‘동진학교(東震學校)’가 개교했던 곳이다. |
조경요소 | ① 안채와 열화당 후정에는 여느 사대부가와 마찬가지로 화계를 조성해놓았다. 화계에는 배롱나무, 단풍나무, 감나무, 대추나무 등 전통적으로 화계에 도입해왔던 나무들을 식재했다. ② 열화당 후정의 화계는 3단으로 축조되어 있다. 제일 윗단에는 팔각정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자취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와 같이 건물 후면부에 팔각정을 지어놓은 것 역시 창덕궁의 연경당의농수정(濃繡亭)경우와 유사하다. (선교장의 배롱나무: 열화당 뒤, 활래정지 연못가) ③ 아랫단 가운데에는 300여살 정도 되는 배롱나무가 자라고 있다. 선교장 집 뒤편 언덕에 집을 외호하듯이 둘러싸고 있는 금강송 숲은 선교장의 또 하나의 볼거리이다. |
결어 | 선교장은 처음부터 계획 하에 전체가 건축된 것이 아니라 생활하면서 점차 증축되어 오늘에 이르게되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통일감과 짜임새는 조금 결여되어 있으나, 낮은 산기슭을 배경으로 독립된건물들을 적당히 배치하고 각 건물의 구조도 소박하게 처리함으로써, 자유스럽고 너그러운 분위기를풍기고 있다. 또한 소장하고 있는 여러 살림살이들은 옛날 강릉지방 사람들의 생활관습을 알아낼 수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이근우는 선교장에서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유람하는 당대의 조선의 풍류와 시인, 묵객들과 교유했다. 선교장은 명실상부한 멋과 풍류의 대표공간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