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2:12-25
찬송가 449장 ‘예수 따라가며’
열왕기하 2장 11절에서는 엘리야와 엘리사가 함께 있을 때 불수레와 불말들이 나타나 엘리야가 하늘로 승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오늘 말씀은 엘리야가 갖고 있었던 선지자로서의 리더쉽이 어떻게 엘리사에게 계승되고 나타나는지를 보여줍니다.
엘리야의 후계자가 된 엘리사(12-18절)
(12) 엘리사가 보고 소리 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로 찢고
엘리야의 승천을 직접 목격한 엘리사는 “내 아버지여”라고 외치며 옷을 찢고 애통해합니다. 당시에 자신의 옷을 찢는 것은 극심한 슬픔을 표현하는 행동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떠나보내는 것이 인간적인 마음에 참 안타까웠기 때문입니다. 엘리사가 그동안 엘리야를 진심으로 따르며 영적 아버지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엘리사는 엘리야를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표현을 통해 엘리야가 엘리사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게도 얼마나 귀하고 중요한 인물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엘리사의 그러한 외침이었습니다.
(13-14)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 가지고 돌아와 요단 언덕에 서서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의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이르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그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
엘리사가 엘리야의 겉옷을 가지고 요단 강물을 칠 때 엘리야가 했던 것과 동일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엘리사가 엘리야의 후계자가 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승천하는 자리에서 엘리사가 스승이 마지막으로 행한 기적을 똑같이 행한 것입니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졌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시각적으로도 아주 특별하게 보이는 기적입니다. 그 때 엘리사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모두 보는 가운데서 요단강을 육지같이 건너갔습니다.
엘리사는 자신이 신뢰하며 그동안 따랐던 영적 아버지였던 엘리야가 떠나자 침통함에 빠졌지만, 하나님은 그런 엘리사를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에게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으며 그 징표를 기적을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역장이나 봉사팀장이나 여러 가지 새로운 직책을 맡아 첫걸음을 뗄 때 느끼는 불안감과 두려움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을 늘 격려하시며, 우리가 새로운 사명을 잘 감당 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는 분입니다.
(15-18) 맞은편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그를 보며 말하기를 엘리야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엘리사 위에 머물렀다 하고 가서 그에게로 나아가 땅에 엎드려 그에게 경배하고 그에게 이르되 당신의 종들에게 용감한 사람 오십 명이 있으니 청하건대 그들이 가서 당신의 주인을 찾게 하소서 염려하건대 여호와의 성령이 그를 들고 가다가 어느 산에나 어느 골짜기에 던지셨을까 하나이다 하니라 엘리사가 이르되 보내지 말라 하나 무리가 그로 부끄러워하도록 강청하매 보내라 한지라 그들이 오십 명을 보냈더니 사흘 동안을 찾되 발견하지 못하고 엘리사가 여리고에 머무는 중에 무리가 그에게 돌아오니 엘리사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가지 말라고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였느냐 하였더라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은 엘리야와 똑같은 엘리사의 능력을 보고 엎드려 경배합니다. 이제 공개적으로 엘리사를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엘리야가 하늘로 온전히 승천한 것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 마치 성령이 엘리야를 데리고 가다가 하늘에서 어느 산이나 골짜기에 던졌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십 명이 엘리야의 시신을 찾으러 가겠다고 엘리사에게 강청합니다. 처음에는 엘리사가 엘리야는 분명히 하늘로 그대로 승천했기에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렸지만, 그들이 강력하게 청하자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허락을 합니다. 결국 그들은 사흘 동안이나 열심히 엘리야를 찾아 헤매는 헛고생만 하게 됩니다. 그 선지자의 제자들은 나름 열심은 있었지만, 열심의 방향이 전혀 잘못된 것입니다.
반면, 엘리사는 하나님에 의해 승천한 엘리야의 몸이 이 땅에 있지 않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지금은 이미 떠난 스승에 연연할 때가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현재의 사역을 감당해야 할 때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와 선지자의 제자들은 확실히 눈높이가 다르고 그들이 믿는 것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더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우리들도 우리들의 인간적인 눈높이와 생각에만 빠져서 선지자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과 생각이 열려서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더 잘 깨닫고 순종하여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겠습니다.
엘리사의 사역(19-25절)
(19) 그 성읍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우리 주인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위치는 좋으나 물이 나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19절 말씀만을 갖고는 ‘그 성읍’이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수 없지만, 이 이야기가 배열된 위치로 보아 여리고인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이 나쁘다는 것은 물이 오염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여리고의 물은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지하수인데, 아마도 지층의 변동으로 무언가에 의해 오염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는 원어를 직역하면, ‘그 땅은 생산하지 못한다’가 됩니다. 이것은 오염된 물로 농산물이 결실하지 못하는 것뿐 아니라 사람이 죽게 되거나 아이를 낙태하게 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리고 사람들은 엘리사에게 성읍의 물이 좋지 않아 이러한 어려움들이 있다고 토로합니다.
(20-22) 엘리사가 이르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 하매 곧 가져온지라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에 던지며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그 물이 엘리사가 한 말과 같이 고쳐져서 오늘에 이르렀더라
엘리사는 물 근원에 소금을 던지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염된 물을 고쳤습니다.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거나 소제를 드릴 때 소제물에 사용되기도 하고 저주할 때도 사용됩니다. 여기서는 수질 오염을 해결하는 의식의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가 소금을 던지면서 행한 의식에서 정말 중요한 부분은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라는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이 기적에서 엘리사와 소금은 그저 도구일 뿐입니다. 기적을 일으키신 분은 여호와십니다. 소금을 던지는 것은 거룩함과 회복을 위한 상징적 행위이며, 실제로 물을 고친 것은 하나님 말씀의 능력입니다. 과거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 무너지라며 저주받았던 여리고가 이제는 엘리야의 후계자 엘리사를 통해 다시 회복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능력이 엘리사를 통해 공식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23-25)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그가 길에서 올라갈 때에 작은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그를 조롱하여 이르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엘리사가 뒤로 돌이켜 그들을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곰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의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 엘리사가 거기서부터 갈멜 산으로 가고 거기서 사마리아로 돌아왔더라
엘리사가 자신을 조롱하는 작은 아이들을 저주하여 암곰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 42명을 찢어 죽이는 사건은 당혹스러움을 느낄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선지자를 조롱했다 하더라도 어떻게 어린아이들을 잔혹하게 죽게 할 수 있냐는 너무 과하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23절에서 ‘아이’로 번역된 원어(나아르)는 어린아이만을 뜻하는 단어가 아니라 청년이라는 뜻고 갖고있는 단어입니다. 엘리사의 사환인 게하시도 이미 성인이었지만 왕하 5:20에 보면 똑같이 ‘아이’를 나타내는 원어(나아르)로 불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작은 아이들’로 번역된 구문을 ‘젊은 사람들’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24절에서 ‘아이들’이라고 번역된 원어(옐라딤)는 어린아이들을 뜻하는 단어이기도 하지만, 왕상 12:8에서 르호보암 왕의 신하들을 표현할 때도 똑같이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엘리사를 조롱한 사람들은 철없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어느 정도 장성한 청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벧엘의 청년들은 기적을 행하며 점점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선지자 엘리사를 시기하여 그에게 적대감을 표현했습니다. 하늘로 승천한 엘리야에 빗대어 대머리여 하늘로 올라가라고 조롱한 것입니다. 아마 엘리사는 자신의 스승인 엘리야까지 욕을 하는거 같아 상당히 불쾌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청년들이 엘리사를 조롱한 것은 엘리사가 섬기는 하나님까지 함께 조롱한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벧엘은 과거에 여로보암 왕이 벧엘에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하나님을 조롱하고 우상숭배가 만연했던 곳입니다(왕상 12:28-29).
하지만 원래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었으며 족장 야곱이 이곳에서 하늘에 오르는 사닥다리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매년 벧엘을 순회하며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엘리야 시대에는 선지자의 제자들 공동체가 벧엘에 있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벧엘에 베푸신 은혜가 컸지만 그곳에는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고 조롱하는 무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을 강력하게 응징했습니다. 엘리사는 청년들을 향해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했습니다. 그러자 두 마리의 암곰이 나와 42명을 죽였습니다. 레위기적 관점에서 보면 야생 짐승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레 26:22).
엘리사는 나중에 엘리야의 뒤를 이어 바알 숭배자들과 전쟁에도 임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가 해야 할 일은 구원과 심판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께서 참신이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여리고의 물을 고친 일이 구원의 일이라면, 벧엘에서 조롱하는 자를 저주한 것은 심판의 일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도 가볍게 생각합니다. 청년들이 엘리사를 놀린 것은 하나님을 놀린 것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가 점점 비판과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초한 면도 있지만 그 속에는 분명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권위를 우습게 여기는 교만한 마음과 악한 생각도 함께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사람을 존귀하게 여겨야 하며, 하나님의 이름과 권위를 더럽히지 않도록 우리가 더욱 순전하게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겠습니다. 우리가 늘 주님의 식탁에서 늘 함께 먹음으로 영원한 생명과 은총을 누리는 순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루하루 많은 부담감들 속에서 살아가지만, 날마다 우리를 격려하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붙들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우리들 모두가 하나님의 소명과 사명 속에서 살아가려고 하지만, 때로는 우리들의 잘못된 열심이 있음을 생각해봅니다. 늘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이 주님만을 향하게 하시고, 여리고의 오염된 물이 회복된 것처럼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도 날마다 회복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주인되지 않고 사람이 주인이 되어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세상 속에서도 우리가 늘 믿음을 지킬 수 있게 하시고, 주님의 식탁에서 늘 함께 먹음으로 영원한 생명과 은총을 누리는 순전한 삶을 살아가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엘리사가 엘리야를 떠나보내며 애통해했던 것처럼 당신은 누군가를 떠나보내며 비슷한 감정을 경험했던 적이 있습니까?
2. 엘리야의 뒤를 이은 엘리사처럼 지금 중요한 역할을 맡아 큰 부담을 갖고 있는 것들은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봅시다.
3.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의 만류에도 엘리야의 시체를 찾아 3일이나 헤맸던 것처럼, 당신도 현재 열심의 방향이 잘못되어 있는 것은 없는지 생각해봅시다.
4. 여리고의 오염된 물이 회복된 것처럼 지금 당신의 삶 가운데서 회복되어야 할 부분은 무엇이 있습니까?
5. 엘리사를 조롱했던 벧엘의 청년들처럼 지금의 기독교를 비판하고 조롱하는 상황 속에서 당신은 오늘부터 무엇을 결단하고 실천할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봅시다(가정, 직장, 교회, 인간관계 등).
(작성: 오웅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