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시인의 인연은 청마(1908-1967)가 통영여자중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 정운 이영도(1916-1976) 시인이 가사과목 교사로 부임하게 되면서 시작된다. 정운은 1945년 대구의 문예동인지 『죽순』에 시 <제야>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해 가을부터 58년까지 통영에서 10여 년간 머물렀다. 당시 통영에는 정운의 언니가 살고 있었고 언니 집에서 함께 살았던 것이다. 정운은 청초한 아름다움과 남다른 기품을 지닌 여인이었다. 이 때 청마는 이 단아한 여성 시인에게 연정의 불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경북 청도가 고향인 정운은 21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딸 하나를 둔 과부였다. 밤하늘 구름을 뚫고 나타난 달처럼 수려한 미모와 황진이의 맥을 잇는 시조시인 정운 이영도. 문학적인 재능과 미모를 갖춘 정운은 수예점을 운영하면서 해방되던 해 통영여중 가사교사로 부임하게 된다.
청마는 필화 사건으로 만주를 떠돌다가 해방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와 통영여중 국어교사로 자리 잡게 된다. 청마는 정운보다 아홉 살이 많은 유부남의 신분이었다. 정운은 재색이 출중하고 행실이 반듯했기에 주위의 시선과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이러한 정운에게 청마는 한눈에 반했다고 한다. 퇴근 후에도 수예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정운을 보기 위해 청마는 수예점이 보이는 우체국 창가에서 연서를 쓰기 시작했다. 이미 혼인을 한 청마와 홀로 남은 정운은 현실에서의 만남은 갖지 않았다고 한다. 서로의 마음을 시적 표현으로 승화시켰다.
1967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후에야 이들의 플라토닉 사랑도 끝나고 세상에 알려졌다.1947년 이후 20년 동안 청마가 정운에게 보낸 연서는 모두 5천여 통이었다. 사모의 정을 담은 편지를 거의 매일 보낸 셈이다. 정운은 그 편지를 소중하게 보관해 두었다. 그중 200여 통을 추려 『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 라는 서간집을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부수인 2만 5천부를 찍었다. 정운은 위에 나온 책 판매 수익을 모두 기부했다. 이들의 사랑은 서로의 시를 아름답게 키우는 성장촉진제가 되었다. 내가 평소 좋아하며 외웠던 두 시인의 작품을 올려본다.
그리움 / 유치환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끄덕도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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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연인 / 이영도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우려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창만 바라보다
그대로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탑(塔) 3 / 이영도
너는 저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섰는데
손 한 번 흔들지 못한 채
돌아선 하늘과 땅
애모는 사리로 맺혀 푸른 돌로 굳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