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도동 보문사 보문선원 법문> -2023. 10. 22
세계는 아주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전쟁, 폭력, 테러, 환경파괴, 오염, 기후위기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이 고통은 우리가, 내가, 누군지 모르는데 그 원인이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이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본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인간 본성 회복을 선불교에서는 견성이라고 합니다. 이 견성은 아주 쉬우면서도 아주 어렵습니다. 물고기가 물속에서 물을 찾는 것이 이게 쉽겠습니까, 어렵겠습니까? 이것은 물고기가 물속에서 물을 찾으러 나서면 태평양, 인도양, 대서양 천년만년 돌아다녀도 물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찾겠다는 그 추구심, 이 한 생각만 쉬면, 이미 물고기 아가미에 물이 꽉 들어앉아 있죠.
오래전에 제가 동영상을 하나 봤는데, 은행강도가 돈을 털어가지고 재빠르게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문이 안 열려요. 5초, 10초, 안 열리는 거예요. 어쩌겠습니까? 포기를 하는 겁니다. 포기. 그런데 좀 있으니까 고객이 문을 열고 쑥 들어오더라고. (그러니까 도둑이) 이 문을 밀은 거야, 땡겨야 하는데. 그때 그 마음이 이 포기하는 마음, 이게 쉬는 마음입니다. 쉬어라 하면, 한 생각 쉬어라 하면, 쉬려고 엄청나게 애를 쓰지요. 이 쉰다는 말 잘 이해를 못하고, 감이 잘 안 올 텐데 계속 한 번 가봅시다.
이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 인간의 본성을 회복해야 된다고 하는데, 먼저 이 본성을 이해를 좀 해야 되죠. 이해가 아주 중요합니다. 본성하고 같이 쓰는 단어들이 많습니다. 진리, 도, 불성, 자성, 본래면목, 주인공, 근원, 바탕, 본래심 여러가지 말들을 많이 씁니다. 같이 쓰죠. 그런데 이 본성을 이해하는데 가장 좋은 단어는 요즘 많이 쓰는 ‘의식’입니다. 의식은 무엇을 아는 거예요. 보고 알고, 듣고 알고, 아는 그것을 의식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컵을 본다, 컵을 보면, 그 보는 주체, 인식의 주체 그게 바로 본성입니다. 앎의 주체는 알려지지가 않습니다. 알려지는 모든 것은 앎의 대상이지, 앎의 주체는 눈이 눈을 볼 수 없듯이 알려지지 않습니다. 생각도 마찬가집니다. 무슨 생각인지 알잖아요. 그 앎, 그게 의식입니다. 우리는 의식이 없이는 단 0.1초도 살 수가 없습니다. 이 의식이 상당히 미스테리 한 겁니다.
의식은 아무 내용이 없어요, 앎만 있지. 그래서 이것을 ‘순수의식’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또 이것은 투명합니다. 그래서 ‘투명의식’이라고도 이야기하죠. 이 의식은 너의 의식, 나의 의식, 개별적인 의식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전체의식’이다 또는 ‘우주의식’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제가 오늘 이것을 ‘청정의식’이라고 이름 붙이겠습니다. 불교에서는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에서처럼, 이 ‘청정’이라는 것이 순수, 투명, 전체를 다 포함하고 있는 개념이기에 이것을 ‘청정의식’이라고 이렇게 이름을 붙이겠습니다. 본성을.
그런데 이 의식을 유물론적 물리주의자들은 뇌에서 만들어진다 이렇게 이야기하죠. 뇌에서 전기화학 작용을 하고 있는 뉴런, 그 뉴런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 의식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과학자들도 그렇게 많이 이야기하죠. 여러분들도 생각하기에, 그렇지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뇌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겠나, 이렇게 판단하지만, 우리가 스마트폰을 볼 때 영상이 나옵니다. 이 영상은 어떻게 나옵니까? 배터리 빵빵하게 채워 놓아도 전파가 없으면 나오질 않습니다. 스마트폰 안에 전파가 있습니까? 스마트폰은 전파를 수신하는 장치죠. 그래서 이 의식은 뇌 안에 있다,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지금 과학자들도 찾지 못했어요. 앞으로 천년만년 찾아도 못 찾는다고 나는 생각하죠.
그럼 의식의 기원을 어떻게 볼 것이냐? 도대체 이게 어디 있는 거야? 어디서 나온 거야? 이거 한 번 궁금증을 가져봐야 합니다. <대승기신론>에 보면 ‘일심이문(一心二門)’이란 말이 있습니다. 일심이문. 줄기 하나에 가지 두 개가 나온 것과 같죠. 일심이문, 일심에서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이 나온 거죠. 이 심(心), 일심(一心)을 의식으로 바꾸면 됩니다. 이 의식은 기능이 두 가지가 있어요. 모양, 모습을 만드는 기능이 하나 있고, 이 만들은 데 뒤집어써가지고 아는 기능이 있어요. 이 두가지 기능이 있다 말입니다. 일심이문의 생멸문, 생멸이라는 것은 태어나고 멸하는 거죠. 태어났다가 멸하는 것이 바로 창조입니다. 창조.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생멸을 하겠습니까? 이 모양을 만드는 기능이 있다 이 말이야. 그 모양이 만들어지면 진여로서 청정한 의식이, 그 앎의 작용이 감싼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만약 일심을 의식이라고 바꾸고, 일심이나 의식이나 같아요. 식이나 심이나 같아요. 의식을 밀가루라 비유할 것 같으면 밀가루는 라면, 국수, 우동 이렇게 모양이 변합니다. 그렇지만 밀가루는 변하지 않죠. 모양이 바뀐 게 생멸문입니다. 그 바뀌지 않는 앎의 작용이 밀가루입니다. 라면은 생멸하죠. 라면이었다가 다른 밀가루 제품으로 바뀝니다. 그렇지만 밀가루는 안 바뀌죠. 라면, 국수, 우동, 이렇게 다 모양이 바뀌죠. 이것을 생멸문, 생멸한다 이겁니다. 그렇지만 그 밀가루는 불생불멸이죠. 이게 한 덩어리입니다. 한 덩어리. 그 기능 두 개가 한 덩어리가 되어있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이 모양 있는 것은 형태를 가지죠. 그래서 이것은 안과 밖이 있어요. 이것은 경계가 있죠. 그런데 밀가루는 경계가 없습니다. 무경계입니다.
자 우리 몸을 한번 봅시다. 우리 몸을 보면 몸의 형태가 이렇게 만들어졌죠. 만들어졌으면 그 청정한 의식이 내 몸을 감쌉니다. 지금 우리가 의식이 있잖아요. 뭘 보고 느끼고 다 알지 않습니까. 견문각지, 보고 듣고 다 압니다. 이게 지금 의식이 내 몸을 감싸고 있는 거죠. 이 생명체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양한 외부 감각, 내적인 감각을 컨트롤하는 컨트롤타워가 있습니다. 이 컨트롤타워에서 여러가지 감각을 통제, 제어하면서 이 생명체가 유지가 됩니다. 그런데 인간은 생각이 들어오죠. 그러면 그 컨트롤타워가 ‘나’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이 ‘나’라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자아의식’이죠. 자아의식인 ‘나’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생각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거죠. ‘나’라는 것은.
제자가 스승한테 묻습니다.
“스님,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그러니까 스승은 성냥불을 탁 켭니다.
“이 불이 어디에서 왔느냐?”
대답이 없습니다.
후~ 꺼버립니다.
“이 불이 어디로 갔느냐?”
딱 절을 합니다. 알았다 이거지.
이 ‘나’라는 것은 자연발생적으로 이 몸에서 발생을 해서 이 몸이 다하고 나면 사라지는 거죠. 성냥개비 다 타면 불은 없어지는 겁니다. ‘나’라는 것은 컨트롤타워가 있기 때문에 생각에 의해서 그게 ‘나라고 인식이 되는 거예요. ‘나’라고 관념적으로 딱 만들어지는 거예요. 이것을 ‘자아의식’이라고 합니다. 마니주 보석이 있어요. 투명합니다. 투명해요. 보면 안 보여요. 그런데 빨간 종이를 탁 갖다대면 이게 빨갛게 변해버리죠. 마니주가 투명한 것 이것이 청정의식입니다. 마니주 자체가 청정의식입니다. 빨갛게 물드는 것이 자아의식입니다. ‘나’라는 자아의식이죠. 이 자아의식과 청정의식은 같은 거죠. 같잖아요. 그런데 자아의식이라는 ‘나’ 이것이 청정의식을 찾겠다고 나서는 거예요. 이게 수행입니다. 이게 찾아집니까?
이 견성이라는 것은 한자대로 ‘성품을 본다’ 이렇게 해석하면 안 돼요. 성품을 누가 봅니까? 내가? 내가 어떻게 성품을 봐요? 조견성(照見性), 비추어보는 성품이 가려져 있다가 드러나는 게 바로 견성이죠. 청정의식이 빨갛게 뒤덮였다가 빨간 종이를 치워버리면 원래대로 투명하게 바뀌어 버리죠. 이게 깨달음이죠. 지금 현재 우리는 푸른 하늘이 구름에 가려져서 드러나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 구름이 뭡니까? 생각, 감정, 느낌 아닙니까? 그래서 이것은 수행으로 알 수 있는 게 아니라 말이에요. 가려져 있기 때문에 돈오가 가능합니다. 선불교에서는 돈오돈수든지 돈오점수든지 돈오가 먼저 나와야 되는 거라. 조계 혜능의 법문은 돈교불이법문입니다. 이게 이렇게 되어있기 때문에 돈오가 가능한 거예요. 만약에 자아의식, 나가 여기 있고 청정의식이 저쪽에 있다고 하면, 찾기 위해서 나아가야 하죠. 열심히 수행을 해야 합니다. 이 투명하고 순수한 청정의식을 생각으로 만들어진 자아의식이 가리고 있기 때문에, 이 이치만 알면 이 한 생각 쉼으로써 이게 드러나는 거죠. 그래서 돈오가 가능하다는 거예요.
아까 생멸문에서 이 생멸이라는 것이 창조인데 빅뱅우주론을 가지고 잠시 한 번 설명을 해봅시다. 138억년 전에 빅뱅이 일어납니다. 빅뱅 이전을 하나의 특이점이라고 하죠. 이 점이라는 것은 위치만 있지 면적이 없습니다. 물리학에서는 빅뱅 이전의 특이점을 부피는 제로고 밀도가 무한대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자, 빅뱅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초특급 팽창을 하죠. 엄청난 고온의 팽창을 하게 되면, 1초가 지나면 1조도 식어버립니다. 왜? 공간이 벌어졌으니까. 온도가 식어버리죠. 그 1초동안에 엄청난 것들이 일어납니다. 빅뱅이 일어나고 빛의 속도로 우주는 팽창하고, 지금도 팽창하고 있죠. 빅뱅이 딱 일어난 순간, 시간과 공간과 물질이 나뉘어지는 겁니다. 이것이 처음에는 다 분리되어 있지도 않은 거죠. 빅뱅이 일어나니까 이게 나오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서 자연계의 네가지 힘이 나옵니다. 중력, 전자기력, 약한 핵력, 강한 핵력. 중력은 별을 만드는 데 필요한 힘이고, 강력, 약력은 원자를 만드는데 필요한 힘입니다. 전자기력은 분자를 만드는데 필요한 힘이고. 이 네가지 자연의 힘이 그때 나옵니다. 그리고 그 1초 안에 쌍생쌍멸, 입자와 반입자가 같이 나와서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 이렇게 쌍생, 쌍멸 하는데 한 10억번 하면 한 번 정도가 반입자가 안 나타나네? 그래서 입자가 소멸 안 하는 거죠. 요게 원자의 재료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주는 계속 팽창하고 온도는 자꾸 떨어지고 그러면서 한참 지나면 수소가 만들어집니다. 수소는 중력에 의해서 엄청난 수소별이 만들어지죠. 태양보다 열 배 스무 배 큰 별이 만들어지면 그 안에 중력에 의해서 핵융합 반응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그 안에 더 무거운 원자들이 만들어지죠. 그래서 이것이 수명을 다할 때 초신성폭발을 합니다. 엄청 밝죠. 그러면서 이게 원자들을 우주에 흩뿌려버립니다. 그러면 이것들이 또다시 뭉치고,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반복을 하죠. 그러면서 우주 전체에 원자들을 퍼뜨리는 거죠. 그래서 90억년이 지나면 태양이 만들어지고, 태양 주변에 있는 먼지구름들이 뭉쳐 가지고, 수금지화 암석별이고, 목토천해명 가스별로 이렇게 만들어지죠. 그 중에 지구, 지금부터 46억년 전이라 그러죠. 거기서 또 생명체가 나오고 진화가 되면서 지금의 우리가, 인간이 이렇게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전부 다 원자로 이루어진 거죠. 이 눈에 보이는 거 이거 다 원자입니다. 전부 원자죠. 우주의 모든 물질은 원자입니다.
생멸문에서 탄생을 했잖아요. 창조가 됐단 말이야. 그러면 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생주이멸(生住異滅) 합니다. 태어났다가 주하다가 변하다가 멸하는 거예요. 그게 생멸계죠. 나라는 것 이것은 반드시 생멸이 있죠. 이 몸뚱이 만들어졌으니까,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는 거예요. 태어났기 때문에 없어지는 거예요. 이 우주안에 있는 모든 물질은 생멸을 반복하는데, 우리가 윤회를 한다,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이 개체가 계속 살아남아가지고 환생, 윤회한다, 또는 천국에 간다, 이것은 자연계에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생멸계 안에서는 모든 것은 태어났다가 멸합니다. 우주도 성주괴공(成住壞空), 시작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끝이 있는 거죠. 우주는 성주괴공으로, 그 안에 있는 모든 물질들은 생주이멸로, 끊임없이 변하는 거죠. 그런데 나의 개체가 안 죽는다 이거야. 안 죽고 다음에 환생한다, 윤회한다, 천국에 간다, 이런 것은 자연법칙에 맞지가 않습니다.
그럼 왜 그런 게 생겼느냐? 이 생명체는 죽기를 싫어합니다. 한번 보세요. 주위에 나무나 곤충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모든 것이 죽고 싶어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살아남아야 되고, 죽으려고 하면 종족을 번식합니다. 그런데 인간한테는 생각이 들어와 있으니까, 죽기가 싫단 말이야, 안 죽을라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윤회를 만들어야 됩니다. 윤회는 죽는 게 아니잖아. 이 자아의식의 죽기 싫어하는 욕망 때문에 천국을 만드는 거예요. 천국 만들면 안 죽잖아요. 이기적인 욕망이 만들어 놓은 것이지, 이것은 자연법칙에 맞지 않습니다.
그럼 윤회는 어떤 것이 윤회냐? 우리 우주의 모든 물질은 원자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우리 몸의 세포가 한 60조 된다고 합니다. 60조 안에, 그러니까 세포 하나 안에 원자가 100조개나 들어갑니다. 100조개. 그럼 우리 몸의 세포가 60조니까 우리 몸의 원자 수는 100조 곱하기 60조개죠. 야 이 숫자, 대단한 거죠. 숫자는 뭐 정확한 건 아니니까, 많다는 얘기지. 그러니까 우리 몸에는요, 석가모니 부처님의 몸을 이루었던 원자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이루었던 원자도 우리 몸에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다비를 해서 화장이 됐죠. 그러면 거의 분자 수준으로, 세월이 지나면 원자 수준으로 분해가 됩니다. 그러면 땅에 들어가서 밀을 키우는데, 밀을 키우면 그 원자가 밀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태국 사람이 여행 갔다가 인도에서 빵을 사먹고 돌아다니다가, 태국에 와서 대소변을 보고, 그것이 망고 나무 밑에 거름이 되어가지고 망고가 열립니다. 우리나라 스님들이 망고를 수입합니다. 이래가지고 먹습니다. 모든 게 원자로 이뤄져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전체가, 원자가 움직이면서 이 모양을 만들고 흩어지고, 생멸하면서 또 만들고 또 만들고 그러는 거죠. 전체가 돌고 있는 이것이 바로 윤회죠.
요새는 그런 신앙이 별로 없는데, 오래전만 해도 사리 신앙이 많았어요. 사리. 지금도 그런 관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이 우주에는 모든 게 원자로 이루어져 있잖아요. 이 우주 넓이가, 반지름 460억광년, 빛의 속도로, 460억 광년, 지름 같으면 920억 광년입니다. 이 넓은 데에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원자는 92개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 몸을 이루는 원자는 몇 개 되지도 않습니다. 산소, 질소, 탄소, 수소, 황, 인, 마그네슘, 칼슘, 칼륨, 몇 개 되지 않아요. 그런데 사리가 나왔어요. 사리가 이 우주에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러면 이게 자연계 원소 말고 다른 게 있겠어요? 이 우주의 모든 게 92개의 원소인데, 이 사리가 이 원소 말고 다른 게 되겠어요. 이거 분석해보면 뼉다구를 이루고 있는 원소입니다. 이게 뭐가 그리 신기하단 말이에요, 이게? 그래서 사리가 안 나올까 싶어서 죽음을 미루고 있는 스님들이 있을 수 있는데 걱정 마십시오. 이거 아무것도 아닙니다. 산스크리트어로 사리는 그냥 유골이란 뜻입니다. 타고 남은 뼉다구란 겁니다. 이건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우리가 이 공부에 대해서 아까 이해가 됐습니다. 청정한 의식, 거기에 인간 몸에서 자아의식이 만들어져 버렸죠. 그래서 그것을 가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면 이 공부를 어떻게 하느냐? 이 컵을 이렇게 봅니다. 컵을 보면 컵을 보고 알잖아요. 보는 그것이 청정한 의식입니다. 이게 인식의 주체입니다. 앎의 주체입니다. 그런데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앎의 대상밖에 안 보이지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초점을 대상에다 맞추지 말고 앎 자신에다가 맞추는 겁니다. 그러니까 의식을 의식하는 거죠. 이것이 회광반조입니다. 조사선은 반조입니다.
마조가 무업을 부릅니다. “무업!” 하니까 고개를 돌립니다. “이것이 뭐냐?” “이 뭣고?” 그래서 절을 합니다. 부를 때 알아차리는 그게 뭐냐, 이겁니다. 부를 때 듣고 아는 그놈이 뭐냐 이거야. 그러니까 딱 알아차리는 거죠. 보통 사람들은 그냥 대상에만 끌려가죠. 눈에 보이는 거. 안이비설신의로 오는 경계들, 대상에만 다 끌려가 있지만 수행자는 그 대상을 향하지 않고 유턴, 바로 의식의 빛을 되돌려서, 그 앎 그것을 보는 겁니다. 이것을 자각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것을. 이 자각이 일어나야 되는 거죠.
선에서는 이 자각을 일으키지 않고, 대상에 끌려가는 사람들을 진흙 속에 도장을 찍는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진흙에다 도장을 딱 찍으면 경계가 나오잖아요. 경계가. 그것이 자아의식이란 말이에요. 지금 청정의식은 항상 있는데 이건 보이지 않죠. 자아의식, 나라는 것, 이게 딱 찍혀있습니다. 그러면 경계가 분명하잖아요. 이런 사람들이 전쟁을 일으키고 환경을 파괴하는 겁니다. 왜? 자아의식이 이기적인 욕심, 욕망을 실현하려고 하죠. 이런 사람들이 절에 와서 기도해도 마찬가집니다. 부처님한테 기도 열심히 합니다. 기도하고 이제 축원하잖아요. 사대강건, 육근청정, 사대가 건강하기를 원합니다. 60이 넘었는데도 시력이 막 2.0이 되길 원합니다. 몸도 건강하고, 육근이 청정해져야 해, 귀에 이명도 없고, 코에 비염도 없고, 이빨도 튼튼하고, 이게 청정입니다. 이게 끝이 아니에요. 삼재팔난, 삼재가 뭔지 난 모르는데, 팔난도 뭔지 모르겠어, 아무튼 안 좋은 아닙니까? 삼재팔난, 영소멸, 영원히 없어지길 원하고 있어. 돈 만원 내놓고. 이것도 끝이 아니에요. 심중소구소원 속성취, 마음에 구하는 거 원하는 거 속성취, 뭐 한 일년 안에 이루어 주십시오, 이게 아니라 법당 나가자마자 딱 다 성취해주이소, 이게 사기꾼 심보지. 이런 게 진흙에다가 도장을 찍었을 때에 그 경계, 자아의식이 강화되어 있는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공부를 좀 하게 되면 물에다 도장을 찍습니다. 물에다가 도장을 찍으면 경계가 보이지, 그런데 자꾸 이 경계가 넓어집니다. 자아의식이 자꾸 넓어지는 거죠. 지금 우리 이 경계라는 것이 이 피부 이게 ‘나’ 아닙니까? 자아의식으로 봤을 때 이게 ‘나’입니다. 그런데 이 공부를 하게 되면 청정한 의식으로 자꾸 간단 말이에요. 초점이 청정한 의식으로 자꾸 간단 말이야. 그러니까 대상에 끌려가지 않고 의식을 의식하는 자각에다가 자꾸 초점을 맞추니까, 이게 청정의식으로 가는 게 바로 물에다 도장을 찍는 것과 같다 이 말이야. 나의 경계가 자꾸 넓어지는 거죠. 이것이 바로 자비고 사랑이고 평화고 용서고 이해고 공감입니다. 이 정도는 되야 하는 거지 이 정도. 이런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전쟁 안 일으킵니다. 왜? 에고, 자아의식이 있는 게 아니고 이게 자꾸 넓어지거든. 그런데 이보다 완전한 것은 허공에다 도장을 찍습니다. 그러니까 자아의식이 없어. 그게 이제 진정한 자타불이죠. 그냥 청정의식만 있는 거죠. 부처님같이 이런 분들. 그냥 청정의식만 있는 거야.
<육조단경>에도 보면, 아심자유불 자불시진불, 내 마음에 스스로 부처가 하나 있다 이거야. 이것이 진짜 부처다. 그 부처가 바로 청정한 의식 바로 이겁니다. 아까 내가 말한 청정이란 말은,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에서 따온 겁니다. 물론 뭐 비로자나 부처님이 사람은 아니지만 형상이 있게 상징되어 있으니까,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 바로 청정의식을 의인화한 겁니다. 우리가 보통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원만보신 노사나불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 이렇게 하잖아요. 이것을 태양에 비유하면, 태양을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라고 하면, 태양의 빛을 노사나라고 합니다. 원만보신 노사나불. ‘비로자나’에서 ‘비’자 빼버리면 -‘비’는 강조의 의미거든- ‘로사나’잖아요. ‘로사나’가 ‘로자나’입니다. 태양과 빛이 둘이 될 수 있나요? 똑같지. 그 다음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 이렇게 합니다. 천백억 화신이라고 하는 것은 이 우주의 삼라만상이 전부 화신이죠. 아까 일심이문에서 나왔잖아요. 생멸문, 생멸문은 창조입니다. 일심에서 이 우주가 나왔잖습니까. 일심을 특이점이라고 하면 생멸문이 빅뱅이란 말이야. 그 일심에서 다 나왔기 때문에, 아니 개가 새끼를 놓으면 개를 놓지 고양이를 놓겠습니까? 일심이 낳은 것이 전부 일심이지. 삼라만상이 전부 다 천백억 화신입니다. 태양이 있고, 태양빛이 있고, 거기서 산천초목이 다 자라는 거죠. 풀이 자라잖아요. 이 풀은 모양이 풀이지, 빛이잖아요. 봄에 수많은 꽃들이 피지만 전부 봄이잖아요 그게. 석가모니부처님이 천백억을 나툰다는 뜻이 아니고. 천백억화신 이게 아바타거든 아바타. 태양이나 빛이나 풀이나 다 하나죠 하나. 그런데 천백억 중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은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에 해당되는 그 청정한 의식이 확연히 드러난 거죠. 그래서 고타마 싯다르타가 석가모니불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이 이 의식에 대해서 좀 이해가 됐을 줄로 믿습니다. 이해가 되고 이것을 자세히 곰곰이 들여다보면 감이 와요. 이것을 해오(解悟)라고 합니다. 이해로 깨달았다. 해오. 그런데 조금이라도 그 느낌이 오면 돈오랑 같은 거죠. 근데 이 자리가 명확하지가 않아요. 계속 생각에 끌려가던 사고이기 때문에 이 자리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럼 이 자리를 익숙하게 만들어야 되는 거예요. <서장>에도 보면, 낯선 것을 익숙하게 하라, 생처방교숙,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 자리를 계속 익숙하게 만들어야 돼요. 우리가 수행하는 것은, 이걸 수행이라고 합니다. 깨달으려고 수행하는 것이 아니고, 돈오는 수행해서 깨닫는 것이 아니고, 이 자리를 돈오하고 난 뒤에 그 다음의 수행이 진정한 수행이란 말입니다. 이 자리는 너무나 간단하니까. 이해가 되잖아요. 의식이 의식한다 이거야. 알아차림이 알아차린다, 이런 식입니다, 회광반조를 해보면. 그럼 이 자리를 익숙하게 하는 거죠. 익숙하게 하려면 여기 관심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기타를 치는데 머리 좋은 사람이 잘 치겠습니까, 기타를 가지고 오래 논 사람이 잘 치겠습니까? 기타를 가지고 시간을 많이 보낸 사람이 잘 치는 겁니다. 이건 아이큐하고 상관없는 거예요. 그럼 이걸 이해하는 거 그렇게 어렵지 않잖아요. 이걸 가지고 의식의 초점을 거기다 두고 계속 익숙하게 만드는 게 필요해요. 이게 바로 수행입니다. 돈오점수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공부를 하는데 진전이 별로 없어요. 왜 없느냐? 여러분들이 청소를 안 해서 그렇습니다. 청소, 내가 이 청소를 엄청나게 강조를 하는데, 집 꼬라지 보고 방 꼬라지 보면 그 사람 마음 상태가 어떤지 알아요.
이 마음이라는 것은, 보세요, 우리가 이 우주, 세계 안에 내가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우주 안에 내가 있다고 생각하지. 만약에 여기서 목탁을 쳤다. 목탁소리가 났는데 내가 듣는다고 생각합니다. 이 우주에는 소리라는 게 없어요. 이해 안 되죠? 이 진동만 있습니다. 목탁을 치면 이 방안에 공기가 있잖아요. 이 공기 진동만 있는 거죠. 진동만. 진동이 달팽이관을 거쳐가지고 그 뒤는 복잡합니다. 여러가지 기관을 건드리면 이 청각 신경에 의해서 소리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머리 안에서. 소리라는 게 있을 수가 없다니까. 귀만 그런 게 아니에요. 눈도 마찬가집니다. 이걸 보면 이 물체에 빛이 닿으면 그 빛이 망막을 통해서 머리 안에서 만들어냅니다. 후각도 마찬가지예요 후각도. 커피를 타면 커피 냄새를 내가 맡는 줄 알지만, 그게 아니라 커피 분자들이 올라오는 거죠. 그게 후각세포를 건들면 신경을 거쳐서 그 냄새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자 피리가 있어요 피리. 공기가 들어갑니다. 공기가 들어가면 소리가 나와요. 그렇죠? 이 공기가 청정한 의식입니다. 이게 피리로 들어가면 이게 소리가 나는 거야. 이 공기는 청정한 의식이고 이 소리는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그래서 이 청정한 의식은 불생불멸로 늘 있고, 이 소리는 일어났다 사라지고 일어났다 사라지고 이럽니다. 우리가 안이비설신의로 보고 듣고 하는 것은 우리 의식 안에 펼쳐진 그런 영상입니다. 그게 지금 이렇게 나타난 겁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계속 환이다, 이런 말 많이 하잖아요. 환상이다. 마이크, 이런 게 없다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보이는 것은 내 머리 안에서 이렇게 만들어 놓은 거예요.
방이 어지럽다 하는 것은, 이 세계가 내 마음의, 내 의식에 일어난 영상들이 투영된 것이기 때문에, 내 방이 어지럽다 하는 것은 내 마음이 어지러운 거예요. 내 마음이 복잡한 거예요. 한밤중에 까마귀를 찾겠습니까? 이것을 좀 단순화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제일 먼저 해야 될 것이 청소입니다. 청소하고 정리정돈 잘 하고, 그러고 나서 조용히 앉아서 맑은 마음으로 자기 내면을 들여다봐야 하는 거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야 되는 거죠. 전화번호부에 전화번호가 이백개 삼백개 되는 데 혼자 있을 시간이 어디 있노. 이 사람 저 사람 만나 수다 떨고 혼자 있을 시간이 어디 있어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야 됩니다. 혼자 있을 때 조용히 내면을 들여다봐야 되는 거죠. 그러니까 일단 청소를 잘해야 합니다.
선하고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는 ‘심플(simple)’ 입니다. ‘단순’입니다. ‘선(禪)’도 한자로 쓰면 ‘볼시(示)’ 자에다가 ‘홑단(單)’ 자예요. ‘단순(單純)’ 할 때 그 ‘단’자예요. 해석 중에 하나는 본성을 보는 데 필요합니다. ‘오직 봄’. 본다, 안다, 비춘다는 다 같은 말이죠. 오직 봄. 보면 대상이 나타나는데 대상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고 봄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라는 거죠. 그렇게 해석하는 게 하나 있고. 이 생활 자체를 단순함을 보여라. 단순함을 보여라,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어요. 생활 자체가 단순해야 됩니다. 여러분들 집의 물건들 칠팔십 퍼센트는 다 버려야 됩니다. 장롱 한 번 열어보세요. 이십 년 삼십 년 된 옷이 들어앉아 있어요. 오 년 된 것도 안 입습니다. 그걸 처넣어 놔요. 복잡하게 만들어놔. 만날 외식하면서 싱크대 안에 냄비는 왜 그리 많은지, 그릇은 왜 그리 많은지, 밥도 안 해먹으면서, 문 열면 와르르 쏟아집니다. 이거 정리 안 되는 거죠. 그것이 내 마음이 투영된 거라니까. 그런 걸 가지고 한밤중에 오골계를 어떻게 찾겠습니까? 그래서 생활태도, 습관을 바꿔야 되는 거죠. 그리고 난 다음에 이게 이해가 됐으니까 조용히 혼자 있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해요. 뭘 해야 할 지 알겠죠. 집에 가서 청소부터 하세요. 청소.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데 물건이 그리 많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옛날 선사들, 좌복 하나 하고 찻잔 밖에 없어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선사들이 최초의 미니멀리스트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뭐가 그리 물건이 많이 필요해. 팔십 퍼센트는 다 버려야 합니다. 초점 이동을 해야 되는 거죠. 그럼 이것을 계속 꾸준히 하다 보면, 부처님 손바닥처럼 자아의식이 보이는 거죠. 아 요놈이 또 성을 내고 있구나. 요놈이 또 욕심을 내고 있구나. 이렇게 제3의 관찰자 시점으로, 작가 관찰자 시점으로 이게 보인단 말이야. 그럼 이걸 고칠 수 있는 거죠. 우린 거의 다 자아의식, 나로 살잖아요. ‘나’라고 하는 것은 뭔고 하면, 생각하고 동일시된 겁니다. 생각이 곧 ‘나’입니다. 생각이 난데, 이것을 청정의식에다가 초점을 맞추어 놓으면, 이게 지금 우리 생각이 보이잖아요, 무슨 생각하는 지 보이잖아요. 알잖아요. 이 아는 데 힘을 길러 놓으면 이게 보여요. 이게 보인단 말이야. 생각하고 나하고 동일시가 안 되고 생각이 떨어져 있는 게 이게 보인단 말이에요. 그러면 보이기 때문에 화가 올라와도 그걸로 끝나는 겁니다. 이게 안 보이면 화하고 나하고 동일시가 되어버리면 화에서 화가 계속 나는 거죠. 그런데 이것이 보여버리면 떨어져 있다고. 동일시가 안 되어있다 이 말이야. 경찰들이 쏘는 첫번째 총알은 공포탄입니다. 이 공부는 생각 감정 느낌을 없애려고 하는 공부가 아닙니다. 생각 감정이 안 일어나면 그건 사람이 아니죠. 이것이 일어날 때 그걸로 끝나버립니다. 그래서 분노에 휩싸이지 않고 기쁨에 빠지지도 않는 거예요. 항상 보고 있으니까. 그러면 일단 그걸로 끝나버립니다. 부처님 말씀에도 두번째 화살은 맞지 마라, 이런 말이 있잖아요. 첫번째 화살은, 생각 감정은 다 일어나지. 누구나 일어납니다.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주차가지고 시비하는데 화나지.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이 공부가 안되어 있으면 한 발짝 더 나갑니다. 두번째는 총알 들었어요. 그래서 싸움을 해가지고 나중에 보면 교도소 가 있지. 총을 쏴서 죽었으니까. 교도소 가면 그 화는 어디 갔어요? 화는 없어요. 화가 총을 쐈는데, 화가 죽였는데. 그러니까 교도소 안에는 전부 착한 사람만 있어요. 죽였을 때는 화가 죽였지, 내가 죽인 게 아니라. 화가 죽였어. 그런데 그 화는 어디로 가고 없어요. 화하고 동일시되는 것이 자아의식이란 말이야. 그 화는 교도소 안에 들어가서는 없으니까 교도소 안에는 다 착한 놈들만 있는 거지.
(시간 때문에 법문 중단. 이후 질의응답)
윤회에 대한 답변.
일단 불교에서는 무아라고 얘기해요. 나가 없는 게 아니라 환상으로 존재하는 거죠. 그래서 없다 하는 거예요. 나라는 것은 이 몸에서 만들어진 거란 말이야. 이것은 이 몸이 사라지면서 같이 사라지는 거예요. 그런데 윤회하려고 하면 이 개체의식, 자아의식이 있어야 하는 거야. 이게 윤회를 하는 거지. 윤회주체가 있어야 되잖아. 그러면 또 영혼을 상정해야 합니다. 이 몸이 윤회할 수 없는 거 아니에요. 이거 다 무너지는 거는 다 알죠. 그러면 영혼을 상정합니다. 그러면 자아라는 것이 행위를 해서 그 업이, 까르마가 영혼에 기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영혼 이게 돌아다닌다는 거죠. 자연계에서는 태어나면 반드시 멸하게 되어있어요.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죠. 우주도 시작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끝이 있죠. 그런데 영혼이 죽었다는 소리 들어봤습니까? 영혼이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어요? 이것은 영생하는 것같이 느껴지게 되어있다고. 자연계에 불합리한 거죠 이것이. 그리고 자, 있다 치자, 있다 치고, 그러면 좋은 일도 했고 나쁜 일도 했기 때문에 좋은 업도 있고 악업도 있는데 이걸 계산을 해야 하죠. 계산을 하고 관음증 환자처럼 자궁을 들여다보고 있어야 돼요. 수정을 하는데, 아버지, 엄마, 돈, 성격 다 계산해가지고 나하고 업이 맞는가, 복잡해서 못 한다니까. 양자컴퓨터가 나와야 가능하지. 영혼이 있으면 정자 난자 수정하는데 들어가야 할 거 아니에요? 자기 업에 맞는 거. 안 맞는데 들어가면 안 되잖아요.
어쨌든 이 영혼이라는 것이 죽었다는 소리는 없죠. 이 우주안에는 반드시 생멸이 있는 거죠. 생멸이. 그렇지만 이 청정한 이 의식, 이 본성은 불생불멸입니다. 이것은. 이것을 다른 말로 공(空)이라고 해요. 공. (계속해도 됩니까?) 공이라는 개념은 무(無)의 개념이 아닙니다. 이 공을 다른 말로 빙유비무(非有非無)라 합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만약에 태초에 특이점이 있다고 하면, “야 니 스스로 어떻게 존재했냐? 니 아버지가 누구야?” 이렇게 됩니다. 아버지는 또 그 아버지로 계속 올라가야 합니다. 자기가 스스로 존재를 해야 그것이 처음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있다고 하면 근거를 댈 수가 없습니다. ‘없다’고 하면, 무라고 하면 스스로 자존은 하지만 창조를 못 해요. 그래서 비유비무 중에 ‘비유’, 없다는 말이죠, 무. 비유가 되기 때문에, 스스로, 원인 없이 스스로 존재할 수가 있고. ‘비무’이기 때문에, 유이니까 창조를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공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공은 비유비무죠. 그래서 이 순수한 의식은 바로 공입니다. 이 청정한 의식은, 우리 본성은 다른 말로 공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그러기 때문에 이게 창조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창조된 그 안에는 반드시 생멸이 있죠. 이게 자연계 법칙입니다. 그런데 안 죽고 빙빙 돈다. 웃긴 일이지. 아까도 말했듯이 원자가 모양을 바꾸면서 끊임없이 돌죠. 생각 윤회, 생각이 끊임없이 도는 거죠. 생각이 일어났다 사라지고 일어났다 사라지고, 이런 게 윤회입니다. 개체 윤회는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불교에 무아라는 말이 왜 나왔겠습니까? 왜 부처님 말을 그렇게 안 듣는지 모르겠어. (박수)
첫댓글 감사합니다 법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