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들뢰23질문23시간종합
* 어느 질문자. 질문
-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DR)의 셋째 종합에서 말하는 ‘시간의 텅빈 형식’과 ‘칸트의 서수적 시간’이 무엇인지 여쭤봐도 될까요?(231117)
차이와 반복(1969)
제1장의 소제목은 ‘차이 그 자체에서(la difference en elle-meme)’이다. 이를 독일식으로 즉자적으로 읽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렇게 읽는 이들이 현상학에 젖어있다. - 한 가지만 현상학은 재현(표상)을 다루고 벩송과 들뢰즈는 내재성의 발생과 생성을 다룬다. 현상학은 만들어진 것(fait, 영어로 펙트)을 다루고 벩송은 만들어지고 있는 것(se faire)를 다루고 들뢰즈가 생성하고 있는 것(devenir)를 다루면서 페(팩트)가 아니라 사건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 차이는 논리적 차이를 다루면서 시뮬라크르의 두 종류의 차이를 다룬다. 즉 원인 있는 모방과 원본이 없으면서도 원본 아닌 주변을 모방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 수학과 물리학에서는 원본을 모방한 쪽을 다룰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생물학에서 원본이 아직 없는 무엇을 모방할 것인가? 인간 사회에서 도덕적으로 과거의 현자와 영웅, 투사와 전사를 모방할 수 있는데, 그들은 원본이라기보다, 공자의 3인행처럼 참조사항이다. 참조들 중에서 중첩적으로 마루를 형성하고자 점을 상정할 것이고, 이 만나는 상승점(변곡점)을 찾아나가는 길이 개인의 실천방향일 것인데, 벩송은 이것을 다음측정(recoupement)을 제시했다.
들뢰즈는 이미 「베르그송에서 차이의 개념작업(1956)」에서 <간단히 말하면, 실재적인 것의 분절작용들은 짤(un découpage)에 대응하지만, 사실들의 선들은 다음 측정(recoupement, 교차)에 상응한다. .. 사실들의 선들은 우리에게 사물들의 차이에 동일한 사물 자체를, 즉 어떤 사물에 동일한 내적 차이를, 제시한다. (82)>에서 사실의 선들로 진행하는 생명 또는 의식의 진화를 설명하고 있다. (56VMI)
제2장의 소제목은 ‘반복 그 자체를 위하여(la difference en elle-meme)’이다. 제1장의 제목처럼 달리 읽을 필요가 있다. 달리 말하기는 푸꼬이지만, 달리 살기 즉 혁명의 실행은 들뢰즈이다.
들뢰즈는 이 반복을 다루면서 이미 리토르넬로를 생각했을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반복으로 흥얼거림은 대자적이 아니라, 그 흥얼거림을 하는 이는 내재적 반복이 매번 동일할 것인가? 그 노래를 반복하는 것은 대상적으로 대자적이 아니라, 내재성의 자기 강도를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리라. 삶에서 생각해 보시라, 사람들은 종발달을 개체발달에서 다시 반복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일반화되어 맞는 말인지를 생물학에서 다루어야 할 것이지만, 얘기가 태어나서 사는 18세까지 과정(또는 길게 일생의 과정)은 그 터전의 습관과 삶의 양식으로 살아간다. 그럼에도 그 삶의 양식은 조금씩 변해 가면서, 왕권시대 산업시대 자본시대 제국시대를 맞이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며, 그 변화에 맞추어서 반복으로 리토르넬로를 흥얼거림이 어린 시절의 과정이다. 그런데 요즘 꼬마애들은 손으로 만들기 놀이를 하기보다 그림판(전자기기)을 좌우로 밀고 올리고 내리는 반복을 하는 경우인데, 인류 역사상 이런 시대가 처음이고 또한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세대가 현실적 활동을 하는 20년 이후를 보아야 할 것이다.
우선 우리나라에서 벩송의 저술에 관한 번역과 해설에 문제가 많다는 것이 지적 될 수 있는 것은(예전과 달리), 벩송의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록(“마실에서 천사흘밤‘ 참조) 이 2017년부터 네 권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강의록을 읽으면 벩송이 고대철학을 얼마나 열심히 읽었고 또한 플로티노스를 보는 관점도 특이하다(생명적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벩송의 저술에 관한 강독 중에서 시론 2장, 물질과 기억(1896) 3장이 어려운데, 벩송은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강의록 네권을 거의 번역하다시피 올려 놓았으니 참조하시라
물질과 기억(1896)의 3장을 유심론으로 해석한 국내의 번역이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들뢰즈에 비추어서 두 가지만 지적한다. 국내 번역은 찰나와 순간을 구별하지 않았고 추억들과 기억을 구별하지 않았다. 마실에서 천사흘밤에서 제3장에 대한 재번역을 참조하시라, 부탁하건데 다운 받아서, 각주를 미주로 만들고, 우선 본문을 일독하고 나서 미주들을 읽어 보기 바란다. 그래야 국내의 번역과 차이를 넘어서 차히를 발견할 것이다. 처음에 시작의 그림 2에서 지각작용(perception, 지각percept이 아니다).
들뢰즈가 물질과 기억(MM, 1896)의 3장을 정말 잘 읽었다. 마치 박홍규선생님이 주목했던 것도 마찬가지이다. 차이와 반복(DR)에서 세가지 종합을 이야기 했다. 나로서는 이것을 가로지르기에 대비로서 세로지르기라고 했다는 점을 주목하시라.
첫째 종합은 3장의 셋째 그림에서 가로축과 세로축이 나온다. 우리는 들뢰즈 생각대로 제3장의 그림을 뒤집어 읽어야 할 것이다. 그 두 축이 만나는 점이 현재이다. 그 현재는 벩송은 움직이는 진동하는 변하는 현재이다. 그럼에도 착각한 사람들은 고정되고 고착된 현재가 있다고 여긴다. 여기에서 벩송은 그 점의 이중성을 찰나(moment)와 순간(instant)으로 구별해서 설명했다. 재번역을 읽어보면 보일 것이다. 들뢰즈가 이 첫째 종합이 두 축의 종합이라고 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둘째 종합은 이 움직이는 현재를 만드는 것은 가로축(가로지르기)가 아니라, 세로축(세로지르기)이다. 이 세로축을 벩송의 오해자들(유심론으로 읽은자들)은 상층에서 표면으로 내려오는 그림으로 읽는다. 신이 지상에 내려오듯이. 그러나 뒤집어서 읽으면 심층에서 표면으로 올라오는(용출로 표현하든, 탈주로 표현하든) 과정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과거의 지층에서 올라오는 이 흐름이 시간의 둘째 종합이다. 이런 종합, 현재의 종합이 아니라 과거의 종합을 설명하기 위해 추억들과 기억을 구별한다. 기억들은 과거의 지층처럼 단면들로 이루어졌다. 이에 비해 기억은 지층이 아닌 전체적 덩어리이다. 잘 읽어보면 벩송은 추억들은 원자론처럼 단위들로 다루었고, 기억은 복수로 쓰지 않고 생명 또는 자연과 같은 의미로 쓴다. 자연은 생명체를 만들면서 자기반복을 했지만, 계속적인 이질 반복으로 여기에 까지 이른 것이다. 둘째 종합은 표면 또는 고른 평면 밑의 종합이다. 그러면 남는 것은 현재의 앞에 표면의 위의 종합이 남았다.
셋째 종합을 앞에 텅 비었다고 여기는 것은 원자론자들이 원자가 놀 수 있는 공간처럼 텅 빈 형식이 있다고 여기는 것인데, 들뢰즈가 벩송의 첫째종합(현재)와 둘째 종합(내재성)에서보아 비판하고자 한 것이다. 바깥에서 (마치 허공에 원자들이 배열되는 것처럼) 서수적으로 나열 또는 계열화될 수 있는 미래를 설정하는 것이 관념연합론자들이다. 그런 수적 미래는 과거의 추억들을 단면들처럼 각각으로 있을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착각이다. 벩송에서 미래에 관한 가능성이 칸트의 가능성과 다르듯이, 벩송은 이런 미래를 설명하기 위해 다음측정이라는 표현을 도덕과 종교의 두원천(MR, 1932)에서 사용한다. 이런 용어의 설정에 앞서서 MM에서도 있다. MM 2장에 8자그림이 불리는 그림이 하나 있다. 미래는 과거의 의식의 잠재적 투영이다. 그 투영의 그림이 층위처럼 그려진 것은 습관을 밀고 나가는 설명과 같다. 그 투영의 한계와 다른 이들의 한계들과 맞추치는 점 즉 변곡점이 행동을 모방(시뮬라크르)하는 점이다. 벩송의 셋째 종합은 내재의식의 미래에 잠재적 투사인데, 미래의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들뢰즈는 영화에서 그릴 수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영화와 영화 사이에 다음측정으로 변곡점을 찾을 수 있다면 다음행위의 길이 열릴 것이다. 원자론자와 관념연합에서 미래의 텅빈 공간에 던져진 가능성은, 들뢰즈가 말할 수 있다면, 평면위에 던져진 주사위 놀이와 같은 것일 것이다. 의미가 있는 파라독사들의 세상일 것이니, 그게 책이라는 의미에서 들뢰즈는 니체만큼이나 말라르메를 주목했는데 사람들은 니체만을 읽고 잇는 셈이다. 수많은 파라독사 중에서 어느 파라독사를 읽으며 즐길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행동하면서 살아가면서 즐겁고 상쾌하게 밀고 나라가는 것이다. (56V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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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
「철학에 관하여(Sur la philosophie, 1988)」(avec Raymond Bellour et François Ewald.) <- 천사흘밤 이야기 참조;
<< Q. - 당신들은 끊임없이 내재성을 내세운다. 그것은 당신들의 사유에 가장 고유한 것 같다. 그것은 결함없는, 부정없는 사유이다. 이 사유는 초월(transcendance)이라는 모든 조준을,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체계적으로 배출한다. 사람들은 당신에게 묻기를 갈망한다. 진실로 그것이 진리인가? 그리고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일반화된 이런 내재성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개념들은 그만큼이나 더 부분적이고 지역적으로 남는다. 의미의 논리(1969)이래로, 당신은 새로운 책에 의해 개념들의 계략(une batterie)을 생산하는데 고민이 있었던 것 같다. 사람들은 이주들(des migrations, 이동들)과 다음측정(des recoupements, 교차점)에 관해 물론 관찰한다. 전반적으로 영화에 관한 책의 어휘는 프란시스 베이컨: 감각의 논리(1981)의 어휘와 동일하지 않고, 이 후자는 자본주의와 스키조프레니(1972, 1980)의 어휘와 동일한 어휘가 아니다. 이것들과 연관해서 정확히 하기 위하여, 세련되게 하기 위하여, 복잡하게 되기 위하여, 누적하기 위하여 다시다루는 대신에, 만일 말할 수 있다면, 당신의 개념들은 매번 고유한 체(un corps)를, 즉 특수한 발명의 수준을 형성해야만 한다. 그러한 것은 개념들이 집합적인 정식화 작업에서 다시 다루는데 전적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가정하는가? 또는 아무 편견없이 단지 최대한 개방을 생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그러한 것이 내재성과 화해될 것인가? (199)
G.D. - 내재성의 평면을 세우는 것, 내재성의 장을 그리는 것, 내가 전념했던 모든 작가들 각각도 [그것을] 행한다(심지어 그가 종합들의 초월적 용도를 고발했을 때, 칸트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는 가능적 경험에 만족하여 그치고 실재적 실험 작업에는 아니었다). 온추상(l’Abstrait)은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자체로 설명되어야 한다. 보편자들도, 초월도, 온일자도, 주체도(대상도), 온이유도 없고, 과정들만이 있다. 과정들은 통일화일 수도 주체화일 수도, 합리화일 수도 있지만 더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199)>>
=(ms) 초월적 사용이란 관념론자들이 하는 방식이며(들뢰즈는 플라톤주의자들이 하는 방식이라고 완화된 표현을 썼다.) 칸트의 가능성 이란, 벩송이 말하는 내재성의 권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이런 저런 우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것을 포함하는 가능성이라 한다. 「가능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Le possible et le reel, 1920 수정 1930)」참조하시라. 다시 말하면, 가능성의 용어를 벩송은 내재성에서, 칸트는 외부 상층에 있다. 둘다 직접언급하지는 않지만 형이상학적 차히로서 벩송에서 가능성은 자연에 있고, 칸트의 가능성은 경건한 성부(신)에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56VMI)
= 이 글은 다음의 전개 또는 이와 연관들은,
마실가
https://cafe.daum.net/masilga 에서 있을 것이다.
첫댓글 들뢰즈의 이말
1988년 대담에서 한 이말,
「철학에 관하여(Sur la philosophie, 1988)」(avec Raymond Bellour et François Ewald.)
<보편자들도, 초월도, 온일자도, 주체도(대상도), 온이유도 없고, 과정들만이 있다. 과정들은 통일화일 수도 주체화일 수도, 합리화일 수도 있지만 더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199)>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차이와 반복(1969)"에서 시간의 세가지 종합으로 설명이 다 된 것이 아니라고 들뢰즈는 생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순간과 찰나, 기억과 추억, 미래의 다음측정과 가능성이라는 것이 마땅치 않을 것이다.
어제-이제-아제는 벩송에게서 하나의 삶(une vie)이며 자연(la nature)이다.
인간의 자연(본성)은 어제-이제-아제(예상참여)를 분리할 수 없는 단위(정체성)이 있다.
이런 어제-이제-아제의 흐름이 의식이며, 또한 자연이다. 인간의 자연(la nature humiane)는
자연의 실재성에서 다루어야 한다. 자연의 실재성 즉 휠레이며, 흐름(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