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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14 16: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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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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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하드라도, 오늘을 살아가는 삶에게 가장 기본적인 문제중의 하나는 生老病死와 관련된 문제일 것이다. 특히 죽음이라는 문제는 누구에게나 가장 심각한 문제의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나처럼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자식들에게는 죽음이라는 세계는 바로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죽음이라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일상의 일이면서도 늘 가슴을 저리게 하는 그 무엇이 있는 이유중의 하나는 삶이라는 인연을 통하여 만난 사람들 특히 부모님들의 죽음이라는 현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같은 경우에는 부모님이 연로해가신다는 것 자체가 나라는 생명 역시 죽음의 세계에 한발짝 더 다가감을 의미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나아가서는 내가 죽음의 세계에 한발짝 더 가까와졌다는 것은 내가 살아가면서 인연을 맺었던 이런 저런 삶들과, 또 이들 삶들과 맺은 사연들과의 영면이 한발짝 더 가까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음에도, 부모님들께서 연로하여 가신다는, 그래서 죽음의 그림자가 이분들과 멀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일상의 적지 않는 부분 가슴이 메여오고 아파오는 것이다.
특히 나같은 사람은 인간이라는 존재자의 개념을 "죽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입장이므로 죽음이라는 문제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물론 인간 이외의동물도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說도 없지 않으나, 그리고 죽음을 앞에 둔 동물들이 죽음에 따른 공포를 나타낸다는 보고도 여러번 접한 적이 있지만-특히 코끼리와 소의 행동등에서- 나역시 인간 중심적인 사고방식의 틀을 벗어나고 있지 못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으나, 의식과 인식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의 죽음만큼 내게 극적이지 않다는 점은 부인할 수가 없다.)
삶의 출발인 남(出生)은 적어도 나같은 사람에게는 의식과 인식의 영역이 아니다, 늙어가고 병들어 가는 것은 의식의 세계이고, 인식의 영역이기는 하나 죽음처럼 소멸이라는 두려움과 절망의 영역은 아니다.
늙어가고, 병들어가는 것 역시 죽음처럼 삶의 과정이고, 삶의 순리라는 한 측면이기는 하나, 그것이 바로 소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에, 늙어가고 병들어가는 것이 죽음에 이르는 길이기는 하나 그것이 바로 죽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늙고 병들어감은 살아있는 자에게나 죽어가는 자에게 죽음만큼 극적이지를 않다. 그리고 그만큼 충격적이지도 않고, 아픔이지도 않다.
상상을 해보아라. 자신이 이승에서는 마지막이라는 의식을 안고 죽어간다는다는 것이 갖는 두려움을. 그리고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마저 안고 죽어가야 한다는 것을. 나같은 사람에게는 죽음앞에 초연한 삶보다도 감동적인 삶도 없었고, 그런 죽음 보다도 나의 기를 꺽은 죽음이 없었다.
특히, 자신의 신념에 따라 생명을 초개처럼 던질 수 있었던 분들의 삶에 대하여서나,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던졌던 분들의 삶에 대하여서는 외경을 넘어서는 무엇이 있고, 또 있었다.
내가 인간은 기본적으로 종교적인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중심에도 바로 죽음 저편의 세계에 대한 무지와 두려움에 있다. 종교적이라는 형식은 달라도, 내용은 달라도 자신의 내세에 대하서는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두려움과 두려움에 따른 호기심이 있기에 현실의 삶에서는 종교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상 인류의 역사에서 내세와 동떨어진 종교도 없었고, 종교행위도 없었다. 어떤 면에서는 종교이든 종교행위이든 죽음을 연결고리로 해서 교리가 지음되었고, 교단이 형성되었다고도 할 수가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그렇게 숱한 종교, 종교행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소이도 바로 누구나 죽음을 경험하기는 하지만, 누구도 죽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고, 죽음의 저편에 있는 세계에 대하여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이 세상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수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음에도 우리는 아직까지 죽음 저편의 세계에 대하여 아는 바가 전혀 없으며, 아는 것이 없는 만큼, 죽음의 세계는 두려움의 세계이기도 하면서, 기본적으로는 두려움에 바탕을 둔 호기심의 세계이기도 하다.
죽음의 세계를 알기 위하여, 죽음 저편의 세계에 대하여 알기 위하여 코마단계에서의 실험도 없지 않았으나, 아직까지 그것이 보편적인 앎으로서 인정이 되지는 않고 있다. 코마단계가 죽음을 바로 목전에 둔 단계일 수는 있으나, 그것이 바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에 설득력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삶의 현장에서 가장 보수적인 부분 역시 죽음과 관련된 부분인 데, 죽음과 관련된 부분 특히 제의가 인간이 만들어둔 여러가지 제도중 가장 보수적인 이유중의 하나도 죽음 저편의 세계에 대하여 우리는 전혀 아는 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아는 것이 없다는 것, 그것은 한편으로는 상상의 세계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체념의 세계이기도 할 것이다. 죽음앞에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이 얼마나될 것이며, 죽음이라는 저편의 세계에 대하여 호기심이 없는 삶이 얼마나 되겠느냐.
죽음 저편의 세계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는 만큼, 비합리적인 관행으로 여겨지는 관습마저도 오히려 합리적이라고 여겨지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죽음과 관련된 관습이 가장 전통적인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 소이 역시 모르는 데서 오는 두려움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제의와 관련이 된 현상은 문화라는 이름으로 설명이 되기도 하고, 학문적인 연구의 대상이 되기도할 것이다. 문화인류학의 적지 않는 부분이, 민속학의 적지 않는 부분이 이들과 연관이 되어있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음력으로 시월은 墓祀라고 하여서 돌아가신 분들이 살아가는 세계-이것을 우리는 陰宅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幽宅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중요한 것은 돌아가신 분들이 거하고 계시는 곳을 집(宅)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를 찾아가서 그 분들의 집을 살펴보고, 그 분들의 내세에서의 복락을 기원하기도 한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시월이 되면 몸도 마음도 바빠지는 것이다. 일상의 삶도 바쁠 터이지만, 시월이 되면, 만사를 제쳐두고, 성심성의껏 묘사를 준비하고 거행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모셔야할 묘사 역시 한두분이 아니다. 집안의 내력이 깊은 만큼 찾아뵙고, 살펴드려야할 묘사의 규모도 커지는 것이다.
寒食 淸明節부터 伐草에 이어서 墓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名節祭祀-茶禮-와 忌祭祀까지 숨가쁘게 이어지는 祭儀를 준비하고, 모시다보면 인간이 의식적으로 정하여 놓은 일년이라는 세월도 저만치 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그래도 현대과학이라는 것을 업삼아 공부하여온 내가 이렇게 제의에 메인듯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고, 아내뿐만이 아니고, 형제들도 마땅찮아 함에도 내가 제의에 이렇게 성의를 다하는 것은(?) 내가 태어나길 한부모님의 장남으로 태어났기 때문이고, 이런 문제로 아버님 어머님께 마음의 부담을 드려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말하여, 나의 경우에는 아내나 동생들이 생각하고, 또 불평하고 있는 것처럼 내 자신이 迷信이라는 세계에 내 자신의 삶을 맡겨버리기 때문도 아니고, 조상의 음덕에 기대어 나의 영화를 얻기위함도 아니다. 다만, 어버님 어머님의 맏이로서 태어남에 따른 내 도리를 해야한다는 생각 때문이지,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다.
제의와 관련하여 이런 저런 이야기가 들려올 때이면, 스스로 억울하다는 생각도 없지가 않다. 왜냐하면, 내가 아버님 어머님의 아들 그것도 맏아들로 태어나겠다고 작심을 하고 태어난 것도 아닐 것이고, 아버님 어머님 역시 나같이 불민한 아들을 맏이로 두어야겠다고 작심을 하시고 나를 낳으신 것도 아니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선택이 평생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고, 우연이 필연처럼 인식이 되어 평생을 좌우하는 것이니, 기실 억울하다면 억울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버님 어머님께서도 그 힘드신 삶을 살아오시면서도 지금으로부터 거의 사십년도 전에 미국이라는 곳에 나를 유학을 보내실 때에는 세속적인 기대도 없지 않았을 것인 데, 시대와 불화하는 자식이 되어 한계인으로 살아가는 나의 삶에 대하여 얼마나 상심도크셨을 것이며, 실망 역시 크셨을 것인가를 생각하면 그분들 역시 억울한 생각이 없지 않으실 것이다. 아니 나보다 더 억울하실 일이다.
제의와 관련하여 이런 저런 불평불만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내가 고집(?)을 부리는 것은 죽음이라는 세계 저편에 대하여 나 역시 무지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오는 두려움 때문에 제의라는 삶의 형식에 나를 맡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점에 대하여서는 아내를 비롯한 형제들이 나의 생각과 입장이라는 것을 이해를 해주었으면 하는 기대 역시 없지 않다.
다만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은 누구나 경험을 하게 되지만, 아무도 알 수가 없고, 아무도 모르고 있는 죽음 저편의 세계라는 것이지, 제의를 통하여 죽음 저편의 세계와 타협을 하거나, 화목을 도모하자는 그런 거창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명분있는 삶을 살아가고자 하였으면, 시대와 불화하여 시대의 庶子가 되는 삶도 살아가지 않았을 것이고, 한계인의 삶을 즐겨하는 듯한 삶의 자세를 취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죽음의 세계와 관련된 이야기중 인간이 만들어 놓은 제도로서 제의 그것도 장례를 이야기 하고자 하면서 서론이 너무 길었다. 이야기가 길었다는 것은 이런 문제와 관련하여 생각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니, 가족 여러분들이 관용하여 주기 바란다. (이어서 쓰게 됨을 양해하여 주십시요. 모처럼 서울에 오고 보니 세사도 적지 않습니다.)
삶이라는 것이 곧 죽어가는 과정임에도, 죽음의 두려움을 실제로 느끼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죽음을 관념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젊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하여 서슴없이(?) 이야기 할 수 있는 용기-실은 대부분 만용에 불과하지만-도 죽음이라는 것이 아직은 자신의 몫이 아니라는 믿음이 저변에 작용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삶의 황혼에 계시는 분들은 죽음이라는 것이 현실적인 문제이기에, 삶도 그만큼 절실하고, 죽음에 임하는 자세 역시 그만큼 절실할 것이다. 내가 연로하신 내 양친께 느끼는 아픔의 실체는 바로 여기에 있다.
삶이 그러하고, 죽음 역시 그러함에도 죽음이 바로 현실적인 문제일 수가 있는 이 분들 세대가 어려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아니 어려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볼 때마다 정말 마음이 쓰라린 것이다. 내가 나의 세대구성원들에게나 젊은 세대구성원들에게 몽골같은 곳으로 여행을 가보라고 권하면서 잊지 않고 조언하는 것중의 하나가 우리 세대구성원들은 우리 부모세대구성원들에게, 우리 아래세대구성들에게는 조부모 세대구성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여야 된다고 이야기 하는 것인 데, 그런 쓰잘 데 없는 조언을 충고삼아 하는 저변에는 이런 생각의 흐름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제의는 유골숭배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그러다 보니 제의도 매우 복잡하다. 우리나라 제의는 기본적으로 오복제도-참최복, 재최복,대공복, 소공복, 시마복-에 있으며, 매장이 일반적이다. 물론 이즈음에는 적지 않는 분들을 화장하기도 하지만.
몽골의 경우에는 우리와는 제의가 크게 다르다. 몽골의 제의가 우리하고 크게 다른 기본적인 이유는 유골숭배에 대한 입장 때문일 것이다. 몽골에는 유골숭배사상이라는 것은 없다. 유골숭배사상이 없기에 몽골에서는 인골로 악기나 놀이기구를 만들기도 하고, 심지어는 사료로 만들어 수출하는 경우도 있다.
몽골의 제의중 우리하고 유사한 부분이 있다면 묘자리에 대한 입장일 것이다. 우리의 경우 의식의 저편 한 곳에는 여전히 좋은 산소자리-소위 명당이라는-에 대한 사고가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산소자리를 정하기 이전에 지관이라는 사람을 불러서 유택으로서 길흉을 알아본 다음 산신에게 고하고 그 자리를 묘자리로 쓰게 되는 데, 몽골에서도 이런 의식은 있었다.
몽골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좋은 묘자리란 사방이 산이나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움푹한 곳이다. 다시말하여, 사방이 막혀서 바람을 타고 악령이 들어올 수 없는 곳을 좋은 묘자리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묘자리를 쓸 때, 북쪽으로 머리를 두고, 남쪽으로 자리를 잡게 하였다.(이점은 우리하고 대차가 없었다.)
몽골에서 묘자리의 좋고 나쁘고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의아한 생각이 들었던 것은 유골숭배사상이 없음에도 묘자리의 길흉을 이야기 한다는 점이었다. 몽골의 풍수지리는 기본적으로 중국풍수지리에 가까왔다.
몽골의 장례는 다음 세가지 점에서 특색이 있었다.
하나는 지역에 따라 다양한 장례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처럼 매장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天葬을 하기도 하고 수장을 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같은 부족이어도 장례는 현격하게 다른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이즈음이야 부족의 관념이 거의 없어지기도 하였지만, 고비알타이나 흡도 쪽에서는 우랑카이족들이 집단적으로 살아가는 경우를 보았는 데, 우랑카이족의 경우에는 부족의식이 상당하였으며 이들은 장례에도 공통점이 보였는 데, 이들은 일반적으로 천장을 하였다고 한다.
나머지 하나는 몽골에서는 기본적으로 화장이라는 것은 없었다는 것이다. 화장을 하는 경우에는 특별한 경우 다시말하여 전염병자나 총각의 경우에만 화장을 하는 것 같았다.
몽골의 전통적인 장례방법에는 크게 세가지 방법이 있었다고 하였다.
하나는 두살짜리 낙타나 말이 끄는 수레에 시체를 실어서 아침 해가 떠오르기 전에 길을 떠나다가 낙타나 말이 처음 오줌을 누는 곳에 시체를 매장하는 것이었다. 낙타나 말이 처음으로 오줌을 누는 곳에 시신을 매장한 이유는 낙타나 말이 처음으로 오줌을 누는 곳이 바로 좋은 자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하나의 방법은 이른바 천장이라는 것이었다. 천장이란 티벳트식의 조장하고 유사한 점도 있었으나(장례의 의미), 다르기도(장례의 방법)하였다. 티벳의 조장은 시신을 살과 뼈로 분리하여, 살부분을 뽁은 보리가루나 밀가루에 섞어서 높은 산에다 뿌려두면 새 특히 독수리가 이것을 먹음으로서 영혼이 새따라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인 데, 몽골의 경우에는 시신을 살과 뼈로 분리하는 절차나 과정은 없고 시신을 일정한 장소에 삼일에서 오일 정도 두어서 육식동물에 의하여 시신이 완전히 없어지기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이것이 죽은 영혼이 시신을 떠나 천신이 되게 하는 천장이다.
나머지 하나는 관을 사용하지 않고 보통 때 입던 옷에 흰무명천을 감아서 시신을 나무위에 두는 이른바 樹葬이 그것이다. 수장의 상징은 천장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런 방법으로 매장을 하였기에, 산소가 언덕이나 산이 아니어도 문제가 없었다. 이들은 시체를 매장하고 난 다음 시신이든 유골이든 빨리 썩어없어지는 곳을 제일 좋은 곳이라고 하였는 데, 이점에서는 우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장례식을 치루고 난 다음 망자가 죽은 날로부터 일주일,삼주일, 칠주일째가 되는 날, 시신을 매장하였거나 버렸던 곳에 가서 술, 우유, 고기등 제물을 차려놓고 향불을 피우고 산정의 어워와 하늘을 향하여 술을 손가락으로 튀기면서 죽은 영혼을 위하여 빌어준다고 하였다.
몽골에서는 유골숭배가 전혀 없다. 영혼은 죽은 자의 시신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영육분리의 사상이 철저하였다.
몽골에서는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나고 난 다음에 장례식이 많이 변하였다고 한다.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고 난 다음에는 서양식의 매장이 일반화 되었는 데, 서양식 매장이란 관을 사용하는 장법이다.
울란바토르에서 테렐지 쪽으로 가다가 보면 공동묘지가 있는 데(만치르에서 테렐지로 가는 길에도 큰 공동묘지가 있다.), 거기에 가서 보면 시체를 매장하고 돌무더기나 콘크리트로 평평하게 만든 묘지도 있고, 서구식의 석관묘 형태도 없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우리와 유사한 토분도 가끔씩 보였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합장도 없지 않는 데, 몽골에서는 합장의 흔적은 없었다. 기본적으로 개인묘지로 되어 있었다. 묘앞에는 묘비가 있었는 데, 이름이나 원적 그리고 나이등이 적혀 있었다. 묘비에 死者의 사진이 걸려있는 곳도 없지 않았다.
보통 장례식은 집에서 라마승의 주관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데, 시신을 집에서 내는 날은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로 제한이 된다고 하였다. 그 이유를 물었으나, 적절한 답을 얻지 못하였다. 묘지도 라마승이 정하여 준다고 하였다.
아르항가이 차강섬 캠프장의 경우 오고데이칸의 여름별장지 뒷편에 있는 어워 오른쪽 산이 공동묘지이다. 여기에서는 몽골의 전통적인 심장이 이루어진 흔적을 볼 수가 있는 데, 이 심장법이 몽골의 전통적인 묘제이기도 하였다. 우리가 칭키스칸의 묘지를 찾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이 심장법 때문이다. 몽골의 전통적인 심장법은 봉분이 없다는 것이다.
몽골고원의 고대장법은 이른 바 石葬이라는 것인 데, 석장법은 흉노족에 의하여 행하여졌다. 이런 장법은 기원전 7세기에서 2세기까지의 장법이었다. 그리고 9세기까지는 위에서 이야기 한 수장이 기본적인 장법이었다고 하는 데, 수장을 風葬이라고도 하였는 데, 이런 장례방식은 그 이후로도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많이 행하여졌다고 한다. 칭키스칸의 묘지로 상징이 되는 심장법의 경우에는 13세기 이후에 행하여졌다고 하며, 천장은 원나라 시대 이후에 시행된 장례법이라고 하였다.
서산대사같은 이는 깨달은 사람답게, 삶은 한조각의 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은 한조각의 구름이 흩어짐과 같다고 하였다던가! (生也 一片 浮雲起, 死也 一片 浮雲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