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꼬자’와 ‘맥고모자’에 얽힌 사연들
(작성 중 ; 쓰개 시리즈 2회)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는 ‘매꼬자’라는 모자가 있다. ‘매꼬자’는 ‘맥고모자(麥藁帽子)’라는 일본말이 변이된 것인데, ‘밀짚모자’를 가리키는 경상도 사투리로 알려져 있다.
위에서 말한 일본어 ‘맥고(麥藁)’는 보리 ‘맥(麥)’자와 짚 ‘고(藁)’자를 쓰는데, ‘보릿짚’이나 ‘밀짚’을 말한다. 따라서 ‘맥고모자(麥藁帽子)’란 ‘보릿짚’이나 ‘밀짚’으로 만든 모자라는 뜻이다.
밀짚모자
그리고 이 ‘맥고모자(麥藁帽子)’라는 말이 세월이 흐르면서 ‘맥고모’ 또는 ‘맥고자(麥藁子)’라는 준말로 변했고, 여기에서 다시 ‘매꼬자’라는 말이 탄생하여 경상도 사투리로 명명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들의 할아버지 세대에서 주로 사용되던 ‘매꼬자’ 또는 ‘맥고모자’라는 말은 우리민족이 만든 말이 아니고, 일본에서 만들어진 일본어였다.
‘밀짚모자’를 ‘麥藁帽子’라고 쓰고, ‘むぎわらぼうし(무기와라보우시)’라고 읽는다.
맥고모자(밀짚모자)
‘매꼬자’는 경상북도(慶尙北道) 의성지방에서 주로 사용된 말인데, 경기도 용인(龍仁)지방 사투리로도 전해지고 있다.
옛적 외동읍(外東邑) 지방에서는 ‘맥고모자’를 주로 ‘보릿짚 모자’라고 불렀다. ‘보릿짚’으로도 만들었기 때문이다.
‘맥고모자(麥藁帽子 ; むぎわらぼうし)’를 ‘중절모(中折帽)’로 잘못 아는 사람도 있으나, ‘맥고모자’는 ‘밀짚’이나 ‘보릿짚’으로 만들어 여름에 쓰는 모자로 위가 높고 둥글며 갓양태가 크다. 그냥 ‘밀짚모자’를 말한다.
밀짚모자
‘맥고모자’가 일본어(日本語)라서 ‘중절모’로 혼돈한 때문이다. ‘맥고모자’ 얘기가 나왔으니, 여기에서 잠시 호미숙이 쓴 ‘아버지의 맥고모자’를 감상하고 넘어간다.
‘맥고모자’가 우리 말 인줄 알고 시(詩)에도 대중가요(大衆歌謠) 가사에도 이 일본말이 쓰이고 있다.
아버지의 맥고모자
호미숙
하루해를 무릎까지 걷어 올려도
아직 반나절이 남아
주름 밭 이마 위에 내려앉아
땀을 올올 캐내는 초여름
빛을 걸러 내는 구멍 난 맥고모자
눌러쓰고 보리 베던 아버지,
누런 보리밭 사잇길 우뚝 서 있는 장승
허수아비에게 모자마저 내어주고
허허
풋보리바람, 누렇게 물들면 바람도 익어
황금 빗살무늬로 들녘을 휘갈기고
층층시하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가시방석
어머니 긴 한숨, 금 바늘쌈처럼 꽂힌 들녘
무딘 낫질에도 보릿대가 옆으로 잘도 눕는다.
아내사랑은 홀 엄니께 예가 아니어서
애틋한 소리 한 번 못했던 아버지
-그만햐, 날도 더운디 천천히 하지 뭐
쉬믄서 언덕배기 쑥이나 캐지 그랴
오늘 저녁에 쑥 개떡이 먹고 싶구먼-
못이기는 척 몸빼바지 꺼시랭이 툭툭 털고
그늘에 앉아 막걸리 한 잔 따르며
-어여, 싸게 나오시래니께유,
이거 드시고 하지 그래유-
허수아비에게 맥고모자부터 갖으러 가시는 길
키 작은 어머니 보리밭에 들어가도 봬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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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서는 ‘보릿짚 모자’와 ‘밀짚모자’를 동시에 사용하기도 했었다.
서민들의 경우 조금 가격이 저렴한 ‘보릿짚 모자’를 구입(購入)하여 주로 농사일을 할 때 사용했고, 조금 가격(價格)이 비싼 ‘밀짚모자’는 나들이용으로 사용했다.
밀 밭
‘보릿짚 모자’는 다소 어두운 색깔이어서 흙이나 먼지가 묻어도 더러움을 잘 타지 않았고, 대신 밝은 색인 ‘밀짚모자’는 정갈하게 보여 ‘가람모자’로 사용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가람모자’란 ‘외출용 모자’라는 뜻이다. 외출(外出)할 때 입는 옷은 ‘가람옷’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잠시 ‘보릿짚’과 ‘밀짚’의 차이점(差異点)과 그에 따른 사연(事緣)들을 살펴본다. ‘보릿짚’과 ‘밀짚’은 비슷하나 ‘보릿짚’이 ‘밀짚’보다 훨씬 부드럽고 탄력이 있다.
밀짚 윗대
때문에 ‘거적’이나 ‘삼태기’ 등 꼬거나 틀 필요가 없는 것을 만들 때는 모자와 부채, 조각 공예품(工藝品)은 밀짚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보릿짚’과 ‘밀짚’으로 공예품을 만들 때는 ‘짚’의 ‘윗대’와 ‘중간대’를 쓰는데, ‘윗대’는 가늘고 긴 대신 부드럽고, ‘중간대’는 굵고 짧으며 단단하다.
모자재료로는 ‘윗대’를 쓰고 조각 공예(工藝) 재료로는 ‘중간대’를 많이 쓴다.
추수기의 밀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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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잠시 우리나라에서의 보리 재배(栽培) 역사를 알아본다. 우리나라에서 ‘보리’ 재배의 시원(始原)은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 주몽(朱蒙)의 어머니 ‘유화(柳花)’에서 비롯되고 있다. 고구려(高句麗)에서는 ‘유화’를 맥류경작의 신(神)으로 받들었다.
보리밭과 아가씨
(절대 요따위 '지꺼리'를 해서는 안된다. ‘거시기’하는 건 자유지만,
정성들여 가꾸어 놓은 아까운 보리가 꺾어져 폐농을 하기 때문이다)
이규보의 서사시 동명왕편에 “주몽이 부여국의 박해를 피해 남으로 내려올 때 어머니 ‘유화(柳花)’가 오곡의 씨앗을 아들에게 싸준다.
그러나 헤어지는 슬픔에 그만 보리 씨앗을 깜빡 잊어버린다. 아들이 떠나고 난 다음 그것을 안 ‘유화’는 사자(使者)인 비둘기를 시켜 아들에게 전해준다”는 기록이 있다.
위에서 말한 ‘유화(柳花)’는 ‘삼국사기’에서 ‘하백(河伯)’의 딸로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를 만나 주몽을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보릿짚 윗대
‘보릿짚’에 관한 전설(傳說)이 전해지고도 있다. 우리들의 고향 경주시 안강(安康)지방에 전해오는 전설로 옛날부터 조상의 수의(壽衣)를 금(金)으로 해 입히면 그 자손이 왕이 된다는 속신이 있다.
조선조(朝鮮朝) 초대 왕이었던 이성계(李成桂)의 윗대 조상이 죽자 집안이 어려워 금(金) 옷을 해 입힐 수는 없었으나, 대신 금(金)처럼 누렇고 광택이 나는 ‘보릿짚’으로 수의(壽衣)를 해 입혔는데, 그 덕분으로 이성계가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탯돌'과 도리깨 타작
안강(安康) 지방에서는 또 최근까지 ‘보릿짚’으로 꼰 새끼를 ‘금줄’ 대신 사용하는 풍습이 있었다.
‘금줄’이란 애기를 낳거나 치성(致誠)을 드릴 때 대문이나 사립문에 치는 것으로 보통 ‘볏짚’을 가지고 왼 새끼를 꼬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안강(安康) 지방에서는 ‘보릿짚’으로 새끼를 꼬아 ‘금줄’ 대신 사용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옛적에는 경상도, 특히 경상북도(慶尙北道) 사람들을 ‘문디(문둥이)’라고 불렀다. 여기에 ‘보리’라는 말을 앞세워 어느 땐가 부터는 ‘보리문디(보리문둥이)’라고도 했다.
경북(慶北) 지방에서는 그만큼 밭이 많았고, ‘보리’를 많이 재배했기 때문이다.
보리밭
그래서 우리들 외동읍(外東邑) 출신들은 그렇게 먹기 싫은 ‘꽁보리밥’을 사시사철 먹기도 했었다. 그리고 ‘보리’를 많이 심다보니 집집마다 ‘보릿짚’이 차고 넘치기도 했었다.
그런데 ‘보릿짚’으로 모자를 만들려면, 비교적(比較的) 곧고 굵게 자란 논보리를 수확(收穫)하여 탈곡기로 정성스레 탈곡(脫穀)을 한 후 짚단 속에 섞인 보리이삭은 손으로 골라내야 보릿대의 ‘윗대’와 ‘아랫대’를 원형(原型)으로 보존할 수 있다.
그러나 보리알 한 알이라도 아끼시던 우리들의 선대(先代) 어른들은 보릿단 속에 숨겨진 보리이삭 하나라도 빠짐없이 골라내어 떨기 위해 탈곡기(脫穀機)나 ‘개상’에 떤 ‘보리짚단’을 끌러 이리저리 뒤집어가며 ‘도리깨’로 낱낱이 다시 떨어내었다.
탯돌 타작
위에서 말한 ‘개상’은 통나무 2~4개를 나란히 잇대고 허리춤 높이로 다리를 해 세운 틀로 타작(打作)할 때 쓴다.
볏단이나 보릿단을 ‘자리개(밧줄)’로 한 바퀴 휘감은 다음 어깨 뒤로 돌려 틀에 내리쳐서 알곡을 떨어내는 다소 원시적인 농구(農具)였다.
개 상
('개상' 위에 얹힌 밧줄이 '자리개'이다)
혼자 쓰는 ‘개상’은 길이가 1m 정도지만, 여럿이 쓰는 것은 3m가 넘는 것도 있다. 한 사람이 하루에 2~3 가마니의 벼나 보리를 떨 수 있다.
흔히 ‘개상’ 대신 ‘나무절구’를 뉘어 놓거나 넓적한 돌(‘탯돌’이라 함)을 올려놓고 거기에 곡식을 때려 떠는 경우도 있다.
‘탯돌’ 보리타작
어쨌든 ‘도리깨타작’을 하면 ‘보릿대’는 모조리 바스러져 아무 곳에도 쓸 곳이 없어진다. 불땀이 너무 약해 땔나무로도 쓰지 못해 주로 외양간에 깔아주는 ‘뿍띠기(북데기)’로 사용했었다.
겨울철에 ‘보릿짚’을 한 아름 외양간에 깔아주면 소에게는 그야말로 “왔다”였다.
매끈한 볏짚과 달리 자잘하게 바스러진 ‘북데기’를 깔아주면, 푹신푹신한 ‘요(이불)’가 되어 따뜻하게 잠을 자거나 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동 도리깨 타작
그리고 이 ‘보릿짚’에 소들이 분뇨(糞尿)를 배설해 놓으면 이튿날 마당으로 긁어내어 두엄더미에 쌓게 되는데, 잘 숙성(熟成)되면 훌륭한 퇴비가 된다.
가을철에 보리 파종(播種)을 할 때 지게로 져서 보리이랑에 깔고 흙을 덮어주는데, 퇴비(堆肥) 뿌리기도 여간 수월하지가 않았다.
잘게 잘라진 ‘북데기’에 소의 분뇨가 섞여 썩으면, 더 잘게 분쇄(粉碎)되고 썩어 떡같이 덩어리가 되는데, 이 상태로는 밭고랑에 고르게 뿌려지지가 않는다.
이때는 퇴비(堆肥)를 소쿠리에 담아 옆구리에 끼고 손으로 집어 뜯어 뿌리는데, 면장갑조차 없던 그 시절에는 손과 팔뚝이 온통 쇠똥투성이가 되기도 했다.
퇴비 뿌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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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추수(秋收)가 끝나면 집안은 온통 ‘볏짚’과 ‘보릿짚’에 둘러싸인다. 이 때문에 보리타작을 할 때는 ‘보릿짚’을 마른 논이나 공터에 ‘빼까리(볏가리)’를 쌓아 놓기도 하는데, 이 경우는 겨울철 아이들의 ‘웃불’감이 되곤 했었다.
얼음이 언 논에서 썰매나 ‘수겟또(스케이트)’를 지치다가 얼음이 꺼져 물에 빠지면, 빈 논에 쌓아놓은 ‘보릿짚’ ‘빼까리’에서 보릿짚을 훔쳐 불을 피워 몸을 녹이곤 했었다.
‘문디’ ‘웃불’
혹여 지나가는 어른이나 심술 많은 또래 아이들이 보고 주인에게 일러바칠까봐 허리를 낮춰 살살 기다시피 다가가서는 한 아름씩 ‘도디케(훔쳐)’ 와서 불을 지핀다.
물에 빠져 손발이 얼어들어가는 이이들은 ‘웃불’ 주위에 모여들어 덜덜 떠는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면서 불을 쬐었다. 당시에 부르던 노래가사를 소개한다.
문디이 웁뿌레 살찐다(문둥이 ‘웃불’에 살찐다)
문디이 혹뿌레 살찐다(문둥이 ‘혹불’에 살찐다)
걸배이 움부레 살찐다(거지 ‘움불’에 살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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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에서 말하는 ‘웃불’은 ‘윗불’이라는 뜻으로 ‘꽃불(이글이
글 타오르는 불)’을 말하는 것이나, ‘혹불’과 ‘움불’은 무슨 불을 말하는지 아직까지 그 뜻을 잘 모르고 있다.
필자의 짐작으로는 모두 ‘웃불’이라는 뜻으로 알고 있다. 그 추운 겨울날씨에 두 발이 모두 얼음물에 빠져 덜덜 떨고 있는 상황(狀況)이라 입술이 얼고 혀가 굳어 발음(發音)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첫 번째 소절(小節)에서는 겨우 ‘웃불이라고 발음은 했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웃불’은 한기(寒氣)를 토하면서 ‘혹불’과 ‘움불’이라는 발음(發音)이 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한다.
그건 그렇고, 문제는 물에 빠져 껑껑 언 손발을 서로 먼저 녹이느라 자리싸움을 하다가 ‘나이롱다비(양말)’를 몽땅 태워먹으면, 집에 돌아가서는 어머니로부터 ‘부지깨이(부지깽이)’로 매타작을 당하곤 했었다.
여자용 나이롱 ‘다비’
여기에서 잠시 박재란의 ‘밀짚모자 목장아가씨’ 가사를 음미하고 넘어간다. 이 노래는 여가수(女歌手)가 부른 노래지만, 남자들도 많이 불렀던 노래다.
밀짚모자 목장아가씨
박재란
시원한 밀짚모자 포푸라 그늘에
양떼를 몰고 가는 목장의 아가씨
연분홍빛 입술에는 살며시 웃음띄우고
넓다란 푸른 목장 하늘엔 구름가네
시원한 밀짚모자 포푸라 그늘에
양떼를 몰고 가는 목장의 아가씨
연분홍빛 입술에는 살며시 웃음띄우고
넓다란 푸른 목장 하늘엔 구름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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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경제속담(經濟俗談)에도 ‘밀짚모자’가 등장한다. ‘밀짚모자는 겨울에 준비하라’라는 말이다. 이유(理由)는 간단하다.
‘밀짚모자’는 날씨가 더운 여름날, 뜨거운 햇볕을 가리기 위해 필요한 물건이다.
따라서 여름철에는 많은 사람들이 ‘밀짚모자’를 찾기 때문에 값이 비싸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추운 겨울에 ‘밀짚모자’를 살 경우 상인(商人)은 창고에 쌓여 있는 골칫거리 재고품(在庫品)을 처리하게 되므로 성수기 때보다 훨씬 싸게 팔게 된다.
밀짚모자 논매기
때문에 꼭 필요한 때 사는 경우보다 값은 매우 싸게, 품질(品質)은 좋은 것으로 고를 수 있다. 비수기(非需期)에 하나라도 더 팔려는 상인은 더욱 친절하게 서비스까지 하게 된다.
따라서 에어컨이나 선풍기(扇風機)는 겨울에, 난로나 코트는 여름에 사는 지혜는 알뜰 소비전략(消費戰略)이라고 할 수 있다.
겨울에 ‘밀짚모자’를 사서 여름철에 대비하는 미래 지향적 계획소비(計劃消費)는 우리의 경제생활을 더욱 풍요롭게 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밀짚모자 모내기
‘밀짚’을 생각하면 ‘말사리’가 생각난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옛적 시골에서 성장한 이들은 그 시절 추억의 ‘밀사리’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밀사리’는 수확기에 즈음하여 덜 익은 밀을 구워 먹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수입 농산물에 밀려 밀을 심는 농가가 현저히 줄고 있어 농촌에서조차 ‘밀밭’을 구경하기가 힘들고 ‘밀사리’를 체험하기도 어려워졌다.
밀사리
경북 성주군(星州郡)에서는 이런 점을 감안하여 어릴 적 배고픔에 손바닥이 까맣도록 ‘밀밭’에서 ‘밀사리’를 하던 추억(追憶)을 되살리기 위해 해마다 ‘밀사리 낙동강축제(洛東江祝祭)’를 열고 있다.
‘우리 밀 대구·경북사업단’과 ‘우리 밀 성주군 생산자위원회’는 우리 밀의 중요성(重要性)을 널리 알리기 위해 선남면 낙동강변 밀밭에서 해마다 ‘밀사리 낙동강축제’를 열어 그 시절 ‘밀사리’의 추억(追憶)을 가진 이들에게 아련한 추억을 반추(反芻)할 수 있는 장을 펼치고 있다.
‘밀사리’ 손
‘밀사리’는 우리의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世代)가 배고픈 보릿고개 시절(時節)에 설익은 밀을 불에 익혀 먹던 삶의 애환과 낭만(浪漫)이 서린 봄날 농촌문화(農村文化)의 하나이기도 하다.
‘밀사리’는 밀이 누릇누릇 익어 가는 오후 나절에 마을의 초동(樵童)들이 떼를 지어 소꼴을 베러 갈 때 주로 이루어진다.
소꼴을 다 베어 놓고는 들판의 ‘밀밭’으로 가서 한 아름의 ‘밀대’를 베어와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지피고, 그 위에 이를 얹으면 밀 이삭이 구어지면서 툭툭 떨어지게 된다.
‘밀사리’용으로 적당한 밀
이렇게 구워진 밀을 손바닥에 놓고 후후 입김을 불어 가며 비비면 탄 껍데기는 날아가고 익은 밀알만 남는다. 노릇노릇하고 쫀득쫀득한 맛이 일품이었다.
‘밀사리’를 하고 나면 손바닥과 입술언저리에 ‘그을음’이 묻어 새카맣게 된다. 이 때문에 어린이들의 경우 ‘밀사리’한 것이 들통이나 혼이 나기도 했었다.
그러나 ‘밀사리’는 큰 피해(被害)가 아니었기 때문에 노소(老少)를 막론하고 즐겨했다.
‘밀사리’ 밀과 손바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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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짚모자'얘기로 잠시 돌아간다. ‘밀짚모자’는 추운 겨울에도 쓴다. 그 추운 겨울에 왜 ‘밀짚모자’를 쓸 필요가 있는지 이해(理解)가 잘 안되는 회원님들이 계시겠지만, 여기에서는 사람이 아닌 눈사람이 쓰는 경우를 말한다.
잘 아시다시피 옛적 필자들이 초등학교(初等學校)에 다니던 시절에는 겨울철마다 이곳저곳에 눈사람을 만들어 세워놓고, 못쓰게 된 아버지의 ‘밀짚모자’를 씌워두곤 했었다.
밀짚모자 눈사람
그리고 이런 정겨운 풍경(風景)을 배경으로 강소천(姜小泉)은 추운 겨울에 벌거벗은 몸에 ‘밀짚모자’만 쓰고 찬바람 부는 거리에 서 있는 꼬마 눈사람을 동요로 그렸었다. 1955년 KBS 동요(童謠)로 발표된 가사를 소개한다.
꼬마 눈사람
강소천 작사
한용희 작곡
1. 한겨울에 밀짚모자 꼬마 눈사람
눈썹이 우습구나 코도 비뚤고
거울을 보여줄까 꼬마 눈사람
2. 하루 종일 우두커니 꼬마 눈사람
무엇을 생각하고 혼자 섰느냐
집으로 들어갈까 꼬마 눈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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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는 1955년 국정 음악교과서(音樂敎科書) 1학년용에 수록되었고, 지금도 유치원(幼稚園) 교재로도 널리 활용되고 있다. 4분의 2박자의 단순한 노랫가락이지만, 우리 고유의 5음계에 의한 노랫가락이다.
동요(童謠)가 너무 서양가락을 닮아가는 것이 안타까워 우리의 정서(情緖)에 맞는 우리 고유의 5음계 가락을 사용해야 된다고 주창한 작곡자(作曲者)의 25세 때의 작품이다.
밀짚모자 벼베기
주제(主題)와 일치하지는 않지만,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서 봄부터 가을까지 매일 같이 쓰고 다니던, ‘밀짚모자’란 단어가 실린 장세정의 ‘즐거운 목장’을 음미하면서 파일을 접는다.
즐거운 목장
노래 : 장세정
작사 : 손로원
작곡 : 박시춘
넓다란 밀짚모자 옆으로 쓰고
휘파람 불며불며 양떼를 몰고
포플러 그늘에 앉아 쉬면 종달새는 지지배배
노래를 불러라 불러라 젊은이의 노래를
저 멀리 산마루에 타오르는 흰구름도
춤을 추누나.
우유를 통속에다 가득 짜 넣고
양 떼를 몰아넣던 저 언덕길에
능금을 먹으며 손짓하는 마차위의 아가씨야
노래를 불러라 불러라 첫사랑의 노래를
오늘도 방울소리 울리면서 지나간다
목장 앞으로.
송아지 엄마 찾는 저녁노을에
양 떼도 엄마 그려 달음질 치네
입에다 물었던 파란 풀잎 먹지 않고 모여간다
노래를 불러라 불러라 내일날의 노래를
양 떼도 고향 그려 오월 하늘 바라보며
꿈을 꾸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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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외동향우회 카페 회원여러분,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의 비극을 영원히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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