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색신호
독일에서 설치미술을 공부하는 딸이 학교 철공소에서 철이나 나무를 깎아 작품을 창작하는 과정에서 남은 나무로 도톰한 나무 도마를 만들어 보내왔다.
제법 짤록한 허리와 펑퍼짐한 엉덩이를 가진 육감적인 모습이다. 연약한 손에 깎인 매끄러운 나무도마에 옹이가 박혀있어 흡사 딸애의 겹겹이 쟁여둔 가슴의 옹이인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내가 독일에 갔을 때 딸이 길에서 죽은 비둘기를 보고 부들부들 떨며 두려워하는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이는 독립심이 강한 선이 굵은 남자 같은 성격에다 말이 없어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녀가 쥐와 비둘기, 생선의 눈을 두려워하는 것이 심각하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게 되었으니.
김형경은 <<사람 풍경 김형경의 심리/여행 에세이>>에서, “아기 때부터 억압되고 내면화된 분노는 다른 감정이나 신체적 이상으로 표출되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공포심이다. 쥐나 거미를 싫어하는 것은 부모에 대한 분노를 억압하고 있다는 것이다”고 했다. 책을 읽으며 나는 한없는 비애의 나락 끝으로 밀려나는 듯했다.
5kg의 덩치로 태어난 딸은 주위를 눈도장 찍으려는 듯 두리번거리는 가히 장군감이었다. 돌 지나자말자 혼자 옷을 입기도 했고 네 살쯤 되니 거울 보며 머리 가르마도 반듯하게 갈라땋았다. 몸이 약해 병원출입이 잦았던 첫째인 아들은 잘 먹지 않아 애를 먹었으나 딸아이는 잘 먹고 잘 자고 좀체 울지도 않아 병원 한 번 간적도 없었다. 유치원도 안 보낸 아이는초등학교 입학했을 때 맨 뒷자리에 앉아서 글씨를 또박 또박 잘 써 학부형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칼로 연필도 반듯하게 깎고 준비물도 미리 챙겨 손 갈 일이 없었고 성적 또한 뛰어났다. 그래서 딸이이에게 별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 같았다.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였을 때는 병약한 큰아들은 업고 세 살짜리 딸아이는 걸려 데리고 다녔다. 그러다가 막내아들이 태어났다. 첫째의 병원 출입에 둘째인 딸아이는 뒤로 밀려났고 우리가 막내의 재롱에 빠져있는 사이에 또 뒤로 밀려나 구석에서 잘 자라주었다. 뒤로 밀려난 아이는 과연 씩씩하게 잘 자랐을까. 내 무심함에 아이가 분노를 차곡차곡 쌓고 있었던 것 같았다.
가족사진에서 막내를 안고 예뻐할 때 딸아이의 심술 띤 시선이 발견되곤 했다. 그 때 알아챘어야 했다. 힘든 생활이 나를 둔하게 만들었다고 변명을 하면 아이가 나를 용서해 줄지 모르겠다.
그 애가 4 살 때 집 앞 상가아파트에 아이를 데리고 놀러갔었다. 옥상에서 아래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니 마침 남자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있었다. 나른한 오후에 들리는 아이들의 까르륵 대는 웃음소리는 맑고 투명한 물방울이 되어 흩어진다. 무심코 내려다 보니 사내아이가 뭐라고 하자 주인 없는 과일 가게로 모두 우루루 몰려가 뭔가를 한 움큼씩 들고 나온다. 조금 있으니 둔탁하게 토닥토닥 올라오는 그녀의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아이의 손바닥에는 매실 4개가 땀에 젖어 떨고 있는 것 같았다.
무서운 얼굴을 하고 과일 가게로 데리고 내려가 또박또박한 말이 될 때까지 여러 번 사과를 시켰다. 그러자 아이는 하얗게 겁에 질려 있었다.
어둠이 거리를 삼킬 듯이 입을 벌리고 있었으나 매몰찬 얼굴로 버스표 하나와 옷 몇 가지 싸서 정류장으로 내보냈다. 골목길에 숨어 보고 있노라니, 너무 서럽게 울어 달려가서 꼭 안고 데려오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제했다. 그 기억이 제일 큰 서러움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던 딸아이가 독일 유학 간 지 10년 만에 독일 사람과 결혼하여 겨우 일 년을 살고 이승에 신을 벗어두고 하늘로 날아갔다. 딸아이의 오빠와 남동생, 아이들 셋 모두 독일로 유학을 갔다. 평생을 아끼고 닦던 소중한 보석 세 개중 한 개를 도둑맞았다. 보석상자가 열린 채 딸을 누가 어디로 훔쳐갔는지, 돌려달라고 할 수도 없다. 빈 하늘이 원망스럽고 그렁그렁 가슴을 헤집는 그리움이 눈물처럼 흔들린다. 누가 시간이 약이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딸아이를 잃고 지금까지 점점 더 선명해 지는 이 슬픔은 천년이 흘러가도 변하지 않을 것이 뻔하다. 아이의 흔적들은 나를 점점 더 헤어날 수 없는 깊은 곳으로 끌고 들어가 점점 망가져 갔다. 때로는 광기로, 물밑 깊이 가라앉은 슬픔으로, 하루에도 열두 번씩 이상기류에 휩싸였다. 딸을 잃고 정신의 쑥대밭에서 수많은 밤을 비틀거리며 캄캄한 미로를 헤맸다.
나는 지금 앓고 있다. 머리칼에 신나를 바르고 가슴에 대고 성냥을 그어댄다, 지글지글 타는 두개골과 가슴에서 불이 활활 타고 있다. 알갱이 다 빼가고 헐렁한 헌옷으로 남은 육신. 다 타버린들 대수인가. 보이는 것은 베고 자르고 깨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게 날카로운 이마의 뿔로 드려 받고 싶다. 나는 광란에 휘둘리며 시간이 갈수록 점점 아픔의 알갱이들이 익어 견고한 열매 같이 탱글탱글 해지기 시작했다.
끈질기게 쏟아지는 빗속을 우산도 없이 미친 듯이 걸었다. 몇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집 앞에 오니 비가 그치고 어둠은 숨죽인 담 아래에서 성큼 깊어지고 있었다. 창마다 불이 꺼져 있었다. 우렁이 껍질 속 같이 캄캄한 집으로 잠기듯 들어섰다. 서서히 어둠이 벗겨지고 사방이 희미하게 보였다. 희미한 거울 속에서 삭풍에 시달리는 애벌레의 허물처럼 초라한 내 몰골이 환영인 듯 서 있었다. 초를 켜니 어둠이 촛불에 씻겼다. 초침 소리들이 시간을 채 써는 것처럼 들린다. 오늘도 시간은 기억을 끌고 딸아이의 사진 속으로 사라진다.
장마 탓인가, 내안에 연일 황색신호가 켜져 있다. 멈춰야 하는데 멈춰지지 않는 생각과 생각들, 툭하면 관행처럼 무시한 내 마음안의 황색신호들. 이런 것이 어느 심리학자가 말한 나 자신도 느끼지 못한 ‘가면 우울증’이란 것인가. 아이를 잃고 막다른 벽에 사정없이 곤두박질쳐져 생의 바깥으로 어이없이 떠밀려 나갔다.
오늘도 딸아이가 찢고 나간 가슴이 바람이 불지 않았는데도 유난히 펄럭대었다.
뒤돌아보면 내 삶에서 이렇게 넘어지기를 여러 번, 그러나 딸이 떠나리라는 일은 꿈에도 예기치 않았던 일이다. 원체 유학 떠나서 떨어져 산지 십여 년 되어서인지, 현실감이 없어서 아직도 아이가 독일에서 살고 있는 듯 전화기를 들었다 놓기를 수없이 반복 했다.
즐거움은 쌓아둘 곳간이 없어 사라지고 슬픔은 슬픔끼리 만나 더 큰 슬픔이 되어 구름처럼 흘러 다니며 끈임 없이 나를 건드렸다. 그렇게 삶의 발길질에 기습처럼 걸려 넘어져 풀썩 주저앉아 서성서성 매일 눈물만 주었다.
딸아이의 부재는 시간이 지나면 오래된 경첩처럼 헐거워지려니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더 견고해져 그것은 결코 넘을 수 없이 단단했다. 그동안 날카로운 슬픔을 용케 다스리고 어둠 속에 갇혀 짐승스런 시간을 살았다. 삶에서 반드시 빛이 필요한 것처럼 어둠도 필요해서인가. 그래서 신이 어둠을 준 것이란 말이지,
“왜 하필 나야.”
숱하게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다. 손을 뻗어 그에게 달려들어 손자국으로 피멍을 들도록 계속 뺨을 후려쳤다. 통쾌했다. 이 얼마나 하고 싶었던 일이었나. 그러나 잠에서 깨니 온몸이 땀으로 흥건했다. 박제 당하는 짐승의 분노처럼 이글거리는 울분이 목까지 올라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시리디 시린 통증이 목까지 차오른다. 그래, 간절하게 보고 싶은 마음은 늘 밀물처럼 무식하게 밀려오니 그것이 문제다.
장마로 인해 연일 비가오니 내 안의 황색신호등이 켜졌음인가.
이 오랜, 슬픈 가라앉음이 갑작스레 진저리가 났다. 내 몸 속의 전원 플러그 확 빼버리고 일상을 가로질러 무단횡단하고 싶었다. 잠 못 드는 밤이면 먹물 같은 어둠속에서 홀로 깨어 시리게 외로웠다. 그러자 그 정신적인 아수라장 속에서도 불면증은 평생 헤어 나올 수 없는 늪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우울증까지 찾아왔다.
핸드백 속에 있던 수면제를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누으니 몸이 땅속 깊은 곳으로 잦아들어 갇혀 있던 몸이 빠져나오는 듯 편안했다.
그 때 문갑 위에 담가 놓은지 10년 넘은 인삼주 병이 보였다. 일어나 병을 열어 컵에 따라 마셨다. 가물가물해지는 정신 속에서 나른한 몽환의 본능을 풀어놓듯이 헤실 헤실 기분이 좋아졌다. 피아노 위의 사진속의 딸아이가 활짝 웃고 있었다. 기어가서 사진을 가슴에 꼭 안았다. 그리고 그만 자박자박 아이의 가슴 속으로 들어가서 얼굴을 묻었다.
가물 가물한 정신 속에서도 학회에 참석차 독일에 가있는 큰 아이에게는 꼭 해야 할 말이 있을 것 같았다. 독일의 20자리가 넘는 그 긴 전화번호를 어찌 다 외웠는지, 아마도 무의식 속에서도 아이의 전화번호를 기억하려고 끈임 없이 밀봉했었나 보다.
신호가 가자 큰 아들의 목소리가 들리기는 하는데 내 목에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엄마, 엄마”
큰 아들은 계속 불러댔다. 바로 옆에서 부르는 것처럼 들으며 나는 정신을 잃었다. 계속 대답이 없자 큰아들은 독일에서 우리 전화번호와 국번이 같은 곳을 무작위로 계속 눌러댔다고 한다. 오밤중에 전화를 받은 사람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하며 우리 집 전화번호를 알려주며 제발 좀 신고해 달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그 때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고 아마도 너무 황당했던지, 아니면 장난전화인 줄 알았는지 아무도 연락해 주지 않았다. 죽고 싶음의 절정에서 난 죽지 못했다, 혹은 죽지 않았다.
내 아픔은 오랜 시간 수신지 없는 편지처럼 떠돌았다. 허허로운 바람이 칼날같이 몸에 스미던 오늘같은 날, 차고 단단한 바람 앞에 서서 커다란 슬픔의 뒷모습만을 본다. 내 삶은 낡은 나무계단 같은 삐걱거림으로 드라마가 되지 않고 비극이 되지 않고 클라이막스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시시하고 미미하고 데데한 비극으로 끊났지만, 그것은 내가 견뎌내야 할 비극이다.
“백화점에 가자.“
남편이 말했으나 쇼핑하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어두운 골방에서 짐승스런 시간을 살았다. 이제 사람이 있는 곳이 그리웠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무심하게 걷고 그리고 한번 크게 웃고도 싶었다. 그렇게 무심하게 흘러가고 싶었다. 그동안 캄캄한 어둠을 고통 속에서 헤맨 날 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냥.....아무 생각 없이 사람들이나 실컷 보고 왔으면 좋겠다. 정말......“
그러나 그곳에는 딸이 좋아하던 색깔인, 세상의 모든 파랑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전자 코너의 TV에선 피겨 여왕 김연아가 딸이 좋아하는 행운의 파란 의상을 입고 빙상을 돌고 있었다. 미술 전공인 아이는 파랑색을 유독 좋아했다. 아이가 대학생일 때 집을 지었다. 넓은 거실도 안방도 아주 조금씩 다른 여러 가지 파랑색으로 멋있게 장식했다.
그래서 아이의 이메일 아이디도 “파랑” 이었다. 그러나 이미 사위가 아이를 파란 상자에 넣어서 하늘로 보낸 것도 모르고 ‘파랑‘을 이메일에 실어 대답 없는 아이를 향해 3년이나 애끓는 그리움을 끈임 없이 날려 보냈다. 순간 울컥해서 아무도 없는 주차장으로 뛰어나와 큰소리로 캄캄한 하늘을 향해 목이 쉬도록 울부짖으며 악을 썼다.
“왜 하필 나였어, 내가 뭘 잘못했냐고.“
아이는 이렇게 마트에서, 등산로에서, 호수의 물 비름에서 갈참나무 아래에서 숨어 있다가 날아와 내 젖가슴에 손을 곤 한다. 때로는 광기로, 때로는 물밑 깊이 가라앉은 슬픔으로, 하루에도 열두 번씩 변하는 이상기류는 또 언제 어디에서, 어느 점 같은 작은 이미지에 붙들려 들어가 캄캄한 미로를 헤맬지 몰라 두렵다.
“내 사랑하는 딸아. 정말 나 어떻게 하면 좋으니.“
독일 간지, 10 년 만에 독일 남자를 만나 결혼하겠다고 알려왔다. 독일에서 결혼식을 치루고 겨우 일 년을 살고 이승에 신을 벗어두고 하늘로 날아갔다. 아이가 떠난 지 벌써 6년이 되었다. 딸이 사진을 볼수록 아이에 대한 갈증은 더 심해졌다. 결혼 시키고 떠나온 1년 후의 그 애의 이승에서 살았던 모습들이 너무 보고 싶었다.
막내가 독일에서 한 동네에 살았기에 근황을 찍은 사진이나 비디오가 더 있을 것 같았다.
“누나의 근래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쉽게 진정 돨 것 같아.”
막내는 순진하게도 사진과 비디오를 주었다. 사진과 비디오 속에서 늘씬한 키와 총명한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하얗게 밤을 새우기 시작했다. 딸아이의 별명은 ‘독일 전사’였다.
아이는 전사답게 바지만 입었다. 여성다운 치마나 레이스 달린 옷을 싫어했다. 늘 청바지와 흰 샤쓰만 입었다. 그러나 176쎈티의 타고난 늘씬한 키에 너무 잘 어울렸다. 그러나 감수성이 여려 상처를 잘 받았으나 누구 앞에서도 여린 티를 내는 것을 싫어해서 나는 아이가 강한 줄만 알았다. 그래서 배려해주지 못한 것이 한으로 남았다.
어제도 어김없이 슬픔이 하나. 앙상한 감나무를 흔들고 왔다가 흩어져 사라져갔다. 오늘의 슬픔은 마음을 스윽 베고 들어와서 자리 펴고 앉아 내 살점들을 파고들었다.
어느 날 딸이 깔깔 웃으며 전화를 했다. 처음 독일 유학 가서 오빠와 함께 장보러 갈 때면 늘 이렇게 응석을 부렸다고 했다.
“다리 아퍼, 오빠, 업어 줘, 업어 줘!.........“
이미 큰아이는 유학 가서 자리 잡고 있었고 4년 뒤에 딸이 갔을 때였다. 네 살 더 먹은 오빠는 키 176cm의 자기 보다 큰 기다란 딸을 들쳐 업고 낑낑 대고 걸었다고 했다. 지나가는 독일 사람들이 유심히 쳐다보곤 했다. 그렇게 독일에서 십 년 가까이 같이 한 삼남매의 형제애는 돼지껍데기처럼 쫀득쫀득했다.
나링 갈수록 딸을 데려간 누구에겐가 앙갚음 하듯이 병적인 쇼핑 중독이 되어갔다. 그래서 미친 듯이 카드를 북북 그어 댔다. 백화점에도 아이가 즐겨 입었던 흰 샤쓰, 그리고 딸이 좋아했던 먹거리들이 아프게 찔러댔다. 문구점 코너를 지나다가 색색의 화려한 크레파스로 시선이 끌려갔다. 초등 학교 1학년 때 그리기를 좋아하는 아이에게 처음 나온 여러 색깔의 크레파스를 사줬다.
“엄마 고마워.“
아이는 함박웃음을 터트리며 나를 껴안고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다음날 남 주는 것을 유난히 좋아하던 딸아이가 그 크레파스를 부러워하는 형편이 어려운 짝에게 줘버렸다.
사람들 속에서 아프지 않으려고 찾아온 곳에는 내 가슴을 저미는 작은 점들이 그리운 이미지로 무수히 날아다니고 있었다. 언제 또 아이의 이미지에 붙잡혀 슬픔의 늪에 빠져 속수무책이 되어 캄캄한 미로를 헤맬지 몰라 두렵다. 신경이 바늘 끝처럼 날카롭고 몸은 급속히 하향 선을 긋고 있다. 나는 이 절벽 같은 아득한 슬픔에게 좌지우지 끌려 다니지 않고 내 슬픔을 있는 그대로 무심하게 바라볼 수 있었음 좋겠다.
가슴에 굵은 못을 박고 사는 사람들이 생애가 저물어가도록 그 못을 차마 뽑아버리지 못하는 것은 자기 생의 가장 절실한 부분을 거기 걸어놓았기 때문이다.
TV에서 불시에 생떼 같은 자식을 잃어버리고 목 놓아 우는 어미들을 만났다. 깊은 밤 세상에는 밥이 공평하지 않은 것처럼 아픔도 공평하지 않다고 하지만, 내 살을 갈라 낳은 분신을 잃었을 때의 그 아픔을 어찌 공평하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아이 잃은 어미들이여 그대들은 오늘도 안녕하신가.”
언제 울지 않고 딸을 생각할 수 있을지,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될지, 언제 마음이 모서리 없는 깊은 우주를 닮을 수 있는 내공이 생길지,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에르바르드 뭉크의 작품인 <병든 아이>에서 뭉크는 싫고 두려운 것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맞닥뜨려 표현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고 했다. 나도 적극적으로 글을 쓰면 극복하지 않을까.
나는 슬픔을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게 입속에 깊이 넣고 혓바닥 밑으로 밀어 넣어 숨겼다. 내 주변의 정인들이여. 그대들도 이 세상 둘러보면 투정 부리고 싶을 때가 있지 않던가. 내 비명을 그냥 작은 투정으로 봐주면 좋겠다. 나는 이미 삶이 준 시련을 이겨내는 방법을 알고 있다. 아픔들에게 대처하는 방법은 강해 보이려 하면 할수록 더 힘들다는 것을.
그동안 그대들 때문에 꺼내지 못한 이 통증들을 위장하는 게 제일 힘들다.
지인들의 문자와 전화가 끈임 없이 날아들었다. 지인들의 끈임 없는 체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만나는 게 제일 힘들다. 거듭되는 슬픔을 태우노라면 영혼이 정화되어 깊은 슬픔에서 힘을 얻어올 것이니 그냥 울고 싶을 때 목 놓아 울게 놔두라.
숨길수록 더 깊게 가라앉는 깊은 슬픔들을 밝은 세상으로 끌고 나왔어야 했다. 그런데 이제 더 큰 아픔이 나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다. 그러나 이제 네 손아귀에 무작위로 휘둘리던 머리채를 눕히고 편안히 쉬고 싶다.급하게 집을 팔고 일산으로 이사를 했다.
독일에서 딸아이의 결혼식을 끝내고 큰아들과 막내와 딸아이와 사위, 여섯명의 가족이 캠핑카를 타고 노르웨이로 백야여행을 한 것이 아이와 함께 한 마지막이 되었다. 아이를 보낸지 여섯 해가 되었다. 그 때, 독신주의자이던 딸이 결혼한 것만 고마워했다.
“그래, 신랑이 독일 사람이라 자주 만날 수 없는 슬픔도 생각했어야 했어.“
“국제결혼도 못하게 말려야 했는데....”
남편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맞아, 그랬으면 공부 끝내고 돌아와 내 곁에서 이런저런 참견으로 아이를 죽음 앞으로 끌려가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내 곁의 세 남자는 몸이 아픈 나에게 아이의 죽음을 3년 동안이나 숨겼다. 그래서 독일에서 치룬 장례식에도 곁에서 살던 막내 외엔 한 사람도 참석 못했다. 심장병으로 응급실을 오가는 내가 걱정되어서 그랬으니 할말은 없었으나 그러나 딸의 마지막을 보지 못한 것이 한으로 남았다.
딸이 폴란드로 체코로 전시회 다니고 있어서 시골이라 소식을 전할 수 없다는 말만 믿고 기다렸다. 시간이 흘러가자 기다리다 지쳐 나는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속이 까맣게 타버렸다. 딸이 아프리카에 봉사하러 갔다고 하기에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여행사를 통해 무작정 달려가려고 했더니 남편은 더 숨길 수 없었는지, 그제서야 딸아이의 죽음을 알려줬다.
“ 아이가 사라진 것도 모르고 시시덕거리며 살았단 말이야.“
지금 생각하니 3 년 전 아이가 떠난 2004년 10월 즈음에 남편이 밤이면 옥상에 올라가 오래 동안 있다가 내려오곤 했다. 그가 그렇게 아끼던 딸을 보낸 슬픔을 삭이느라 그렇게 힘들어 했던 것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독일에서 딸과 한동네에서 살았던 막내는 아이가 떠난 후 한 달 동안 아무것도 못 먹고 침대에 누워 술만 마셔댔다고 했다. 그러다가 몸이 추술 릴 수도 없이 망가져서 남편이 하던 공부 그냥 엎어버리고 귀국하라고 했다고 했다.
새벽에 작은 참새 한 마리가 목련 나무에 가느다란 발을 걸치고 앉아서 내 방을 들여다보고 있다. 밭에서 내 발자국 소리에도 도망가지 않고 옆에서 폴짝대고 있던 그 참새가 아닌가 하고 유심히 바라보니 그는 깊은 눈빛으로 내 눈을 맞춘다. 혹시 내 아이가 참새로 환생해서 나를 보러 온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뜰의 의자 위에 와서 잠을 자는 눈같이 흰 고양이. 잠 깨어 입이 찢어지게 하품을 한 후 긴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도망도 가지 않고 빤히 쳐다본다. 고양이 눈속에...............고양이를 좋아하는 아이가 환생한 것이 아닌가 하고 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평소에 환생이라는 것에 관심이 없던 나는 딸아이가 떠난 후 웬일인지 내 곁에 얼씬대는 작은 동물들이 무심하게 보이지 않으니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독일 딸네 집 뜰에 서있던 아이 닮은 키 큰 해바라기를 우리 밭에도 많이 심었다. 그러자 앙상한 겨울에 눈밭에 말라 시들어 장대같이 서있는 해바라기 머리위에 참새들이 식당을 차렸다. 아침마다 우르르 날아와서 해바라기 머리에 앉아 밥을 먹는 참새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또 딸 생각에 하염없이 젖어든다.
나는 평생을 건너도 내 슬픔을 다 건널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정기 검진 받으러 병원에 갔다. 작고 깡마른 여인이 휠체어에 아들인 듯한 청년을 태우고 지나간다. 심한 소아마비 증세인지, 온몸을 꼬고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그에게 엄마가 소곤소곤 살갑게 얘기한다. 다정한 그들의 모습에서 순간 나는 질투심으로 온몸이 활활 타는 듯,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폭풍처럼 밀려오는 슬픔을 어쩔 수 없어 화장실로 뛰어가 몸을 찢고 나온 뻣뻣한 슬픔들을 들쑤셔 대며 울고 또 울었다.
전에 경주에서 딸과 같이 교환전시를 하던 독일친구들이 또 전시회를 하러왔다. 그때도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고 딸이 아끼던 후배가 대학에서 활발한 활동을 해도 이런 생각이 안 들었다. 그런데 이 활활 타오르는 뜻 모를 질투심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보고 싶다. 정말 나 어떻게 하면 좋으니. ”
10여 년 전 딸이 독일에 있을 때 우리부부는 서울 갤러리에서 하는 박항률의 전시회에 갔었다. 그날, 우리는 한 작품 앞에서 갑자기 발이 묶였다. 우리는 동시에 바짝 다가서서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새벽>이란 작품으로 연분홍 저고리를 입은 우수가 깃든 소녀와 그녀의 머리위에 한 마리의 새가 앉아 먼 곳을 보고 있는 그림이었다.
“딸 닮았다.”
우리는 마주보고 동시에 큰 소리로 외쳤다. 이상하게도 우린 같은 느낌을 받았다. 신비한 침묵 속에서 고요한 눈빛으로 고뇌하고 있는 듯한 소녀의 옆얼굴은 어쩌면 그리도 딸을 빼닮았는지, 아이는 어릴 때에도 항상 구도적인 고요한 표정으로 말없이 한곳을 응시하곤 했다. 초등학교 때 아이의 어릴 적 옆얼굴은 수정처럼 맑았으나 사색적으로 보여 슬프기까지 했다.
“저 이의 옆 모습은 왜 어린아이 같지 않은 사색의 냄새가 풍길까.”
우리는 자주 그렇게 말했다. 지금 생각하니 아이는 초등학교 때부터 이미 날아갈 준비를 했었던 게 아니었을까. 가족 여행에서도 아빠와 오빠, 그리고 남동생, 그들 세 남자들이 장난치며 웃고 있을 때 유독 아이는 먼 곳에서 생각 속에 하염없이 갇혀 있었다.
황량한 겨울을 예감하는 가을의 끝자락, 40여 편의 시와 그림이 있는 박항률의 그림시집이 택배로 날아왔다. 그러나 뚜껑을 열지 않았다. 이런 날, 산속에 있는 고즈넉하고 적막한 그곳에서 날것으로 그림을 대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고 그의 작품집인 <<오후의 명상>>을 열었다.
나는 사색적인 화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새벽>이란 작품을 찾아 빠르게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드디어 <새벽>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것은 소란한 세상에서 정신없이 뛰다가 어느 순간 옷깃을 여미고 삶이 정지되는 느낌이었다. 그 작품은 생생한 질감으로 느껴져 음지의 별자리처럼 밝고 환했다. 연분홍 저고리를 입은 소녀는 서서히 나에게 회화적 이미지로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이와 나의 가슴 뜨듯한 만남이었다. 아마 나는 그동안 먼 곳으로 날아 간 딸을 찾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것은 구도적인 고요함이 신비스러워 흡사 슬픔에 익숙해진 시인의 은유적인 시어들과 같았다. 하필 그 많은 시인 중에 내면세계가 깊고 어둡고 치열했던 기형도가 떠올랐다. 그로테스크하나 아름다웠던 기형도의 시가.
그 작품들은 신화적인 냄새가 짙어서인지, 그의 그림에 빠져 들다보면 웬지 감성이 서서히 불교적이 되어갔다. 그는 도시인의 삶에서 깊은 관념의 적막감속에서 탈피하기 위하여 그런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딸아이가 하늘로 날아가고 난 후 다시 보는 그 작품 속에는 빡빡 민머리와 단발머리와 꽁지머리의 수많은 딸이 들어와 살고 있었다. 어느새 나는 그 속에 등장하는 소년과 소녀들에게서 수많은 딸을 건져 올리고 있었다.
“작가는 내 딸이 새가 되어 먼 곳으로 날아갈 줄 어찌 알았을까.”
새벽’이란 작품 속의 소녀의 머리 위에 있는 새는 마치 비상을 준비하는 듯했다. 머리카락 한 올 없는 소녀의 단순한 머리는 어쩜 어릴 때 빡빡 민 아이의 머리통를 빼닮았는지, 그리고 고요하고 깊은 표정까지도 너무나 딸을 닮아서 송곳에 찔린 듯 나도 모르게 신음을 깨물었다.
“그래, 바로 이거였어. 10여 년 전에 우리가 말했던.”
가슴 가득 숨을 깊게 들이 마시다가 느닷없이 중얼거렸다. 그것은 슬픔에 가까운 느낌이면서, 그러나 모순되게도 반가움이었다. 그리고 오랜 동안 찾고 헤매던 것을 마침내 찾아낸 것 같은 감동이었다. 그동안 잘 넘나들던 슬픔이 명치에 걸려 꺽꺽대고 있었다.
,아,아”
나도 모르게 길고도 슬픈 탄식을 토했다. 아이의 옆모습은 슬픔과 분노를 외면한 고요한 침묵이었다. 아무리 걸어도 닿을 수 없었던 생의 밑바닥, 그곳에서 횡행하던 밀물과 썰물의 시간들, 그리고 끝 간 데 없이 안으로, 안으로만 삼키던 울음들, 그것은 촛불을 들고 걸어가던 막막한 생애 같았던 나의 삶 중 가장 힘들고 참담했던 시절이었다.
영화와 글이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을 내 것으로 만드는 사람이 주인인 것처럼 그의 작품은 이제 내 것이 되었다. 새벽에 먼 길을 떠난 아이가 <새벽>에서 느릿느릿 걸어 나왔다. 그리고 연분홍 저고리 섶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 그 때 지오바니의 피아노 연주가 날아와 40여 편의 작품들에게 옷을 입히자, 풍경 위로 선명하게 떠오르는 많은 이미지의 딸이 내 주위를 돌고 있었다. 나는 힘없이 슬픈 몰입에 빠져 탁자에 엎드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들어 사방을 꼼꼼하게 살폈다. 온통 한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물병에 꽂힌 작약이 소스라치게 붉어서 흠칫 숨을 몰아쉬었다. 까페 분위기 와 어울리지 않는 그것은 사실적인 정물화였다. 들어올 때는 왜 못 봤을까.
그의 그림 속에서 신비한 환상 속을 휘젓다 나오니 어느새 사람들은 저녁을 둘둘 말아 가지고 나가고 없었다. 창밖엔 어둠이 페인트처럼 끝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박항률의 이미지에 얼마나 물어 뜯겼는지 가슴께가 온통 아파왔다.
“그래, 아픔이 안으로 들어오게 내버려두자.“
“그것을 늘 입는 셔츠처럼 입으면, 같이 살아갈 수 있을 꺼야.”
집에 돌아오는 길에 사진틀 20개를 샀다. 딸의 아기 때부터 10대와 20대, 그리고 30대의 사진을 거실 장식장 위에 진열했다. 아침에 일어나 거실에서 맨 처음 딸과 눈을 맞추고 말을 걸기 시작 했다. 이렇게 아이를 가슴 안쪽깊이 묻고 매일 조근 조근하게 내 안에서 딸을 키우려고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면 차차 모서리 없는 깊은 우주를 닮은 내공이 생겨 아이를 편안히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남자들은 애써 사진틀 있는 쪽으로 시선을 피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 나는 다른 가족의 아픔도 생각했어야 했다. 유난히 아이를 사랑했던 남편의 슬픔도, 그리고 딸아이 오빠와 동생, 그들의 유별난 형제애도 배려했어야 했는데, 이기적으로 내 아픔만 만지작거리기에 급급했다. 그래서 사진들을 치울 수 밖에 없었다.
바람도 소음도 없는 깊은 밤에 슬픔의 무게로 잎을 떨구듯이 배란다의 벤쟈민 잎사귀 하나 팔랑대며 똑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