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를 키우는 일은 사랑을 나누는것 만큼 장열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랑을 해 본적이 없다 그런 신앙을 가진적도 없다. 사랑을 갈구하지 않는만큼 구원을 바라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제야 비로소 징후가 느껴진다. 붉은 장미빛 갈증이 일고 전신으로 가시가 돋아난다.
나는 또 누구를 찌를것인가.
내 고독한 가시를 보듬어 줄 깊은 절간이 그립다.
글을 쓰다보니 자꾸 스님이 되어가는 느낌이 듭니다. 스님.
불교라는것이 어찌보면 가장 실다운 나를 찾아가는 일. 참나로 가는 행로가 아닐까요. 그러면 나를 찾을 일이지 왜 자꾸 스님들을 찾게될까요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조사님들이 전 생애를 걸고 만들어 준 오묘한 언어의 성찬을 물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언어는 철학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란 적어도 나.에.게. 어쩌면 종교라기보다는 인문학에 더 가깝지 않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부처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고 一物도 아닌것이 무엇인가"
여래장 묘진여성(如來藏妙眞如性)
형광펜으로 밑줄을 좍좍치는것도 모자라 견출지를 도배하듯 붙이면서 경을 읽는 나에게 어느날 친구가 말했습니다.
"너는 절에는 부지런히 가는것 같지 않은데 불경은 참 열심히 읽는다"
나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경을 열심히 읽는것은 내 머리가 나쁜탓이요 절에 잘 가지 않는것은 세상을 곧 법당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사실 그렇습니다 나는 타래처럼 엉켜있는 왜곡된 내 삶을 통해 부처의 세상을 찾아가는것이 즐겁습니다. 길 저편에 우리가 찾아갈 곳을 비춰주는 꺼지지 않는 등불이 있다는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일까요.
삶이 곧 부처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란 내 삶을 관장하는 부처에대한 믿음으로 삶과 믿음을 이분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이 곧 삶이요 삶이 곧 믿음입니다. 不二입니다.
천왕봉이 아스라히 걸려있다
경사에 매달린듯한 아슬한 집들 춤추듯 오르내리는 계곡 수년간 지리산을 오르내리면서 참 익숙해진 풍경입니다.
키 큰 나무들은 줄을 서 하늘에 이마를 적시고 물기를 머금은 바람과 싫지 않은 소음이 공기의 알갱이들을 모아 폐장을 들쑤십니다. 또 다른 내가 조립되는 기분이 듭니다.
풍경의 정류장에 일물이 들어섭니다 지리산입니다 산들의 어머니 관세음보살.
템플스테이 장소인 실상선사는 지리산 거림 계곡을 끼고 있는 소박한 사찰입니다. 성철 스님의 제자이신 원담 스님이 주석하고 계신 곳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라는 성철스님께서 평소 잘 쓰시던 글귀가 세겨져있고 '백련불교문화재단'이라는 글도 보입니다
백련불교문화재단
-펌-
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
心 地
비로전 옆 관음전에서는 아비라 기도가 한창입니다 기도에 관심없는 나도 옴아비라훔캄쓰바하 정도는 외울 수 있습니다. 특히 산행 중 된비알을 오를 때 자주 애용하는 주문입니다. 고통이란 망상을 주문을 통해 물리치는 격이죠. 다 아시겠지만 옴아비라훔캄쓰바하는 비로자나불의 몸을 뜻한다고 합니다.
기도의 가르침은 진언의 해석에 있지않고 열심으로 염송하여 무상삼매에 이르는것이라고 합니다. 초인적인 의지를 발휘하며 기도드리는 신도들의 모습에서 경외감이 느껴집니다. 나에게는 왜 저들과 같은 지극함이 없을까 문득 무상삼매 뒤에 찾아들 법열의 빛이 궁금해졌습니다.
心地 심지란 법망경 보살계에 나오는 말로 ‘능히 낸다’,‘머문다’는 뜻이며, 모든 것의 바탕이 되는 땅이라는 뜻입니다. 이 땅으로부터 萬善이, 즉 온갖 착하고 좋은 일이 다 나온다고 합니다.
마음의 땅이라는 말은 법성을 일컫는 수많은 異名중에서도 참 절묘한 말입니다. 내가 불경을 좋아하는것도 언어가 주는 이 절묘한 글맛때문입니다. 마음이 아니라 마음을 싹틔우는 텃밭! 아비라를 외치는 저 처절한 기도 뒤에도 이 글맛같은 묘한 깨닫음이 있지 않을까요.
기린초
깨닫음이 꼭 기도를 통해 오리라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작은 꽃,한 줄의 선택된 언어를 통해서도 얼마던지 법열에 가까운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알기에 세상의 더 낮은 곳을 기웃거리게되고 더 구석진 곳을 바라보게됩니다. 아름다운것은 物性에서 나오는것이 아니라 시각에서 나온다는 생각이 듭니다.
까치수영
交徹融攝(교철융섭)
맥주에 소주를 탄 소맥이 교철융섭입니다. 막걸리에 사이다를 탄것이 다 교철융섭입니다.
너와 내가 같이 사는것이, 동물과 식물,남과 여, 부모를 죽인 원수와도 같이 살수있는것이 다 교철융섭입니다. 무릇 다 참 마음으로부터 나온것입니다.
꽃을 밟고 달리는 말발굽의 향기를 그려보는 일보다 주말 오후 나른한 산사를 스케치하는 작업이 더 힘듭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이곳 저곳을 들쑤시며 다녀봅니다만 별무소득입니다 대상이 없어서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것이 아니라 세상을 들여다 볼 마음의 에너지가 고갈되어 영감이 사라진것입니다. 이럴 땐 소요자재가 제일이지만 빡빡한 스케쥴로 그것마저 여의치 않습니다.
머위
眞 如
양꼬치엔 칭따오가 제격이듯 머위는 된장쌈이 제격입니다 머위를 우리는 멀구라고 부르는데 언젠가 산행 뒤에 일행들이 머위를 따다가 살짝 데쳐 된장 쌈밥을 해먹어 본적이 있는데 지금도 그 맛을 못잊어 머위철이면 강된장 만들어 쌈싸먹곤합니다.
돌이켜보면 대간 산행을 할 때에는 완주가 견성이요 성불이었습니다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사람에게는 에베레스트가 곧 견성이요 성불이듯 자기가 이룩하고자 하는 가장 높은 이상과 목표가 다 견성 성불입니다.
견성을 이루게되면 세상만사를 다 견성의 자리에서 바라보게된다고 합니다. 세상을 통찰하는 안목이 일거에 확 바뀌어 버리는 경지. 하지만 성철 스님의 오도송을 보면 견성의 순간이 피식 웃음이 나올만큼 별것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문득 웃으시고 고개를 돌려보니 다만 청산이 구름 속에 여여할 뿐이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 보면 여여한 상태 이 진여의 여여함 즉 불생불명이야말로 불성이란 생각이 듭니다.
아름다운 꽃을 만나면 그 꽃을 세상에 올린 뿌리며 줄기의 힘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꽃이 아니라 꽃을 이룬 전체를 볼 수 있어야 견성입니다 세상이 다 그렇게 보여 의심이 없다면 견성입니다.
佛 性
우스갯말로 나는 죄가 없다고 말해버렸습니다 부처님의 제자가 된 이상 나는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우리는 스스로가 정직하다고 말하는 범위 내에서 죄를 저지릅니다.
죄라는 말은 상당히 주관적이어서 자기 자신이 판단하기에 이정도의 부정은 저질러도 양심의 가책을 받을 정도가 아니라면 스스럼없이 부정을 저질러 버리는것이 인간입니다 심지어는 죄를 짓고도 들키지만 않으면 영원히 무죄가 되기도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부정을 저지르면서도 한편으로는 정직한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유혹 앞에 죄를 짓지 않기가 오히려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한편 정의가 살아있다는것은 도덕으로 무장된 다수의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선량한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내 안의 에너지가 지치지 않는 상태를 유지해야합니다 그래서 단지 죄를 짓지 않는데도 어쩌면 용맹정진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불자로 살아가면서 무슨 큰 죄를 짓겠느냐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내 죄를 알리는 수만가지 예시들이 튀어나오겠지만 따지고 보면 죄의 실체라는것이 없으니 죄를 죄라고 단죄하기가 더 어렵지 않을까요.
단정하고 소박하고 엄숙하고 강인한 이 시대의 표상 사표!
볼 수록 멋진 사진입니다! 예술이란 모름지기 대상을 단순히 담아내는것이 아니라 대상에 담긴 에스프리를 추출해내는것입니다. 녹차나 커피를 우려내는것과 마찬가지입니다.
摠 持
부처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요 물건도 아닌것은 그 뭐꼬? 원담 스님이 던지신 화두입니다.
모두摠 가질持 총지 모두 가졌다 신묘장구대다라니의 다라니가 바로 총지입니다.
화를내던 웃던 죄를 짓던 사랑을 하던 그 모든것이 진심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총지라고 부릅니다. 그 총지로부터 끝없이 공덕이 흘러내립니다.
그러므로 세상 모든 의문에 지금 당장 답을 내려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내가 불행하다고하여 당장 불행의 답을 얻으려는것은 무의미합니다. 차라리 그 문제와 더불어 지내다 보면 자연스레 그 문제로부터 벗어나 있는경우가 많습니다.
불행하다는것은 오직 자신의 판단에 불과합니다 행복과 불행의 이원적 시각으로보면 행복도 불행도 다 망상에 불과한것입니다.
망상을 망상인 채 잊어버리면 총지로부터 샘물이 솟듯 새로운 기운이 솟아나 홀연히 허망을 물리치게됩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시간이 상처를 치유한다' 얼마나 흔히 듣는 말입니까.
執之失道 必入邪路
放之自然 體無去住
신심명의 글이 다 좋지만 특히 제가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하지만 제 수준에 體無去住의 이해는 쉽지 않습니다. 어디 없는것이 비단 去住뿐이겠습니까 생멸도,증감도 다 없을테니까요.
참선을 하는 동안 비가 내리고 천둥 벼락이 쳤습니다. 고마운 비입니다.
사위가 어지러운 중에 나는 불현듯 빗방울처럼 외로와 집니다. 무수히 떨어지는 빗줄기 속에 나는 오로지 한줄기 빗물일 따름이었습니다. 무수한 상념들 중에도 금강경 사구게 하나가 홀연 떠오릅니다. 절집에서 떠오르는 말들은 온통 경이라 꿈 속에서도 화두를 참구하라는 말처럼 망상 중에 경이 다 떠오르나 봅니다.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일체 유위법은 꿈이요 환영이요 물거품이요 그림자며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다
빗소리처럼 이미 몸과 마음은 차분할대로 차분한데 몽환공화를 어찌 수고로이 없에려하겠습니까 悟無好惡라! 비와 번개는 문밖에 놓아두고 나는 계곡물 불어나는 소리나 즐길렵니다.
누군가 지나가는 행인에게 카네기홀로 가는법을 물었습니다. 그 행인이 대답하기를 "노력 또 노력'
부처님께 가는 길은 정진 또 정진!
隱覆含攝(은부함섭)
은부함섭이란 말 참 은근합니다. 숨겨두고 덮어두고 모든것을 다 포함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어디에 여래장 속에.
계급장 떼고 한판 붙자는 말을 흔히 듣습니다 일상복을 벗고 승복으로 갈아 입고 나면 마치 계급장을 떼듯 다 부처님의 한결같은 제자가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계급장은 차별의 다른 이름입니다.
우리 마음에 생기는 모든 갈등 번민, 증애의 마음은 다 차별심과 분별심에서 생겨납니다. 이 차별심 속의 나는 참으로 피곤하고 공고로운 나인것입니다.
번뇌하는 나는 망상의 주체입니다. 참선을 통해 과연 마음이 가라앉을까요 언어도단입니다. 진심에는 티끌이라는것이 없습니다. 번뇌망상을 억누른다는 말조차 내겐 벅찹니다 움직이는것을 멈추게한다면 止更彌動이라 멈추었던것이 더 움직이려하는것이 마음의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육조단경 수행편에는 "오직 원하건대 자기 스스로 청정함을 닦아라. 이것이 바로 서방극락이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 청정은 깨끗하다던지 더럽다던지 하는 상대적 깨끗함이 아니라 양변을 초월한 상태를 말합니다.
나는 참선을 할 때 마음이 노는것을 그냥 두고 봅니다 본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오래 보고있노라면 이것도 힘듭니다. 내 근기가 이 정도인데 누구에게 탓하겠습니까.
하지만 나같은 건달바가 있기에 여래가 빛난다는 사실도 알아야 할것입니다 여래건 건달바건 야차건 다 화엄장구가 아니겠습니까
如 如
나에게도 한 때 방년이라는 나이가 있었다 법당문에 새겨진 꽃살문처럼
무엇이 칼과 끌로 오늘의 나를 만들었을까 비바람 산천을 꾸며가듯
오늘 이 아침 마음은 여여한데 방년의 나는 나를 보고있을까
眞 如
이른 아침 일어나 새벽 예불을 마치고 한가히 절집 뒤란을 거닙니다 연보랏빛 물안개가 걷히고 치자꽃 향기같은 차분함이 배어듭니다 에둘러 나를 감은 찬 기운 때문인지 온갖 영글지 못한 풋기억들이 싱싱한 풀잎처럼 되살아 납니다 그 기억 중에서도 오직 그대를 향한 기억 한 줄이 너무도 귀하고 귀해 연필로 쓰는 편지처럼 자꾸만 꾹꾹 눌러쓰게됩니다.
如 來
비가 그치고 여래가 왔다.
달은 늘 둥근것임을 사람들은 왜 보름을 찾아 경배하는가?
달이 늘 둥근것이듯 여래는 如如하다.
여래가 왔는가 여래는 오지 않아도 여래다.
無底鉢
妙心은
바닥이 없는 바루요
줄이없는 거문고요
꺼지지 않는 등불이요
뿌리없는 나무다
圓 覺
번뇌 망상을 끊기 위해 참선을 한다는것은 구름을 없에기 위해 하늘에 비질을 하는것과 같다
佛 性
행복을 위한 착각의 길이 있다는것은 만 인류의 축복일지 모른다 착각하였기에 지금이 행복하다
뼈다귀 해장국에 섞인 한점 살을 행운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생존의 방법은 다 있다.
피를 팔듯 몸을 팔듯 나 또한 팔아야할 그 무엇이 있기에 생존의 좌판에 앉은 그들과 나는 무엇이 다르랴
自 己
스스로의 몸이다
외부가 아니라 자신과 치열하게 싸우는것이야말로 혁명적 삶입니다
세상을 닮으려할것이 아니라 세상을 앞서가는 희망의 무진등이 되어야합니다
큰 일에 매달릴것이 아니라 큰 사랑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소박하지만 잡초처럼 강인한 삶 그것이야말로 위대한 삶입니다
一法千名
연기란 어지러운 세상을 갈무리하는 정리이며 체계입니다.
서로의 관계 속에 내가 존재하는 방향성이며 구조이며 사물의 현상을 이해하는 원칙이고 삶을 해명하는 방식입니다.
내가,내 존재가 마침내 짜임새를 드러내는 실존의 알고리즘입니다
바위취
어성초
꿀풀
대원사 계곡
應緣立號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는 말은 산과 물에대한 분별심, 다시말해 일반인들이 산과 물을 바라보는 안목,下心을 두고 하신 말씀이겠지만 나는 산도 물도 다 어렵습니다.
산을 산이라고 한다면 어떤 산을 말하는걸까요? 물을 물이라고 하면 어떤 물일까요?
산을 다니다보면 수많은 오르막을 만나고 또한 내리막을 만납니다 오르는 산이 산일까요 내려가는 산이 산일까요 물 또한 마찬가집니다 눈에 빤히 보이는 산이라 산이라고 부르지만 산이라는 말에는 산의 실체가 없습니다 다만 산으로 인식될 뿐입니다.
갈곶산 지나 마구령 고개로 가는 길에 하도 오르내림이 심해 산마루에 앉자 한숨을 푹푹 내쉬며 '무슨 산이 이래!' 하고 탄식을 쏟아내자 옆에 계신 분이 "산이 그렇지" 하며 한말씀 툭 내던졌습니다. 이 한마디에 나는 비로소 산의 본성에 다달은것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어떤 법문보다 값진 법문이었습니다. 산을 넘어 물, 세상의 온갖 삼라만상을 이렇게 통 크게 받아들이는 일. 이것이 세상을 보는 안목이 아닐가요?
방장산 대원사
방장산은 지리산의 다른 이름이다
道
산행을 마치고 그날의 산행이 참 좋았다던지 혹은 그러지 못했다고 하는 말은 식상합니다.
호불호의 평가는 산길을 좋아하는 불자에게 어울리는 답이 아닙니다.
나는 길을 걷되 좋고 나쁨이라는 이원적 관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길을 걷습니다.
중도의 길 양단이 막힌 길이란 없습니다. 길은 늘 열려있습니다. 증애가 사라진 그 곳이야말로 비로소 길입니다 그래서 길은 늘 스스로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매미꽃
중용 23장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야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된다 정성스럽게되면 겉에 배어나오고 겉에 배어나면 겉으로 드러나게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것이다.
중학생 딸을 둔 숲 해설자는 말미에 대원사를 파괴한 군인들이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차가 뒤짚어져 그 차에 탄 군인들이 몰사했다고 조용히 전해 주었습니다.
왜 이말을 전해 주었을까요? 설마 대원사를 폭격한 업보로 죽음을 당했을거라고 그 죽음의 정당성을 역설한것은 아닐테지요.
대원사도,죽음을 당한 군인도 다 역사의 희생자입니다 내 손톱 밑의 아픔이요 이마 위의 상처입니다.
마음의 땅에는 죄가 없는 법입니다. 들어서는 안될 말. 만나서는 안될 인연을 만난 기분이 들었습니다.
가람의 배치가 이상하다
대원사를 말할 때 풍수지리를 빼놓을 수 없다.
대원사의 사찰 입지로서의 최고의 약점은 우백호에 비해 좌청룡에 해당되는 좌측 산세가 형편없다는것이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크다란 산이 턱 버티고 있는데도 산세가 빈약하다고 하는것은 산세의 이어짐이 대원사 계곡에의해 딱 잘렸기 때문이다.
백두대간 길도 절대 산이 물을 건너갈 수 없다는 대원칙에 의해 정해진다. 이렇게 위축된 산세 외에 대웅전 좌측으로 뾰족한 봉우리의 산이 세개 솟아있는데 예로부터 산봉우리가 뾰족한 산을 불꽃을 닮았다고하여 화성산이라 부루고 이런 산 근처에는 화재가 자주 발생한다고 풍수에서는 말한다. 그래서 그런지 대원사는 창건 이래 세번의 화재를 당하여 폐사의 위기에 처해졌다.
이 부족한 좌청룡을 보강하기 위해 석탑을 세우게 되었다. 그런데 원래 석탑은 대웅전 앞에 세우는 것이지만(부석사는 무량수전 좌측에 있다) 대원사에서는 본당 좌측으로 탑을 세워 부족한 기세를 보충하였고 그 아래 연못을 파 청룡이 놀게했다고 전한다. 지금은 그 자리를 메워 사리전으로 만들었다.
대원사 다층석탑
대원사를 찾은 목적 중의 하나는 저 유명한 다층석탑을 보기 위함이다.
그런데 스님들의 정진 시기라 사리탑을 보여 줄 수가 없다고 그랬다. 아쉬움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담너머로 보이는 모습으로 미루어 대략 조선 초기에 조성된 불탑이란 생각이 들었다.
조선시대의 불탑은 키만 멀건히 큰 사춘기 청소년을 연상케한다. 신라석탑이 보여주는 안정감과 상승감의 절묘한 비례가 고려시대를 겪으며 서서히 허물어지고 수직성만 강조한 비쩍 마른 탑신의 형태로 남게된다.
석탑의 원 건립연대는 신라 진흥왕 때로 알려져있으나 신라탑은 아니다.
아마 조선초에 새로 만들어진 탑이 임진 왜란으로 파괴되어 정조 연간에 새로 쌓아 올린것 같다. 상층 기단에는 두손을 합장한 공양인상이 세워져 있다는데 아쉽게도 확인하지 못했다.
돌아오는 길에 사리전 앞을 지키는 스님께 넌저시 여쭈어 보았다 "스님 저 탑은 언제 조성된것입니까?" 한참 생각을 하던 스님께서 "음... 연기조사때 지은 절이니 그 때..." . . 제 자식의 생일을 모르는.... . . 돼지 목에 걸린 진주를 보는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름다운 대원사 단층
대원사 단청은 이슬람 사원의 모스크처럼 은은한 코발트 빛이 일품이다 작은 사찰이지만 마치 길가에 고즈넉히 앉은 야생화와 같은 기품이 느껴진다 꼭 비구니 사찰이어서 드는 느낌은 아니지만 붉은 색을 칠하지 않은것도 아닌데 묘하게도 푸른 빛이 처마자락을 압도한다.
어성초
짧은 시
두분의 모습 뒤로 짧은 시가 떠오른다. 짧은 시는 침묵 이상이다. 지혜요 견성이다. 글과 글을 묶어주는 강렬한 침묵의 힘. 나는 그 에너지를 사랑한다.
짧은 시는 원동태허를 향해 발돋움하는 봄날의 새싹이요 고요한 호수에 드리워진 한줄 낚싯대다.
홀로 빛나는 밤하늘의 별빛이며 멀어지는 이의 조용한 뒷모습이다
남사 한옥 마을
怯外寺 혹은 級外寺
내 꿈은 건축가였으므로 건축을 바라보는 내 시선은 좀 남다릅니다 평가가 좀 짠 편이지요. 그 건물이 상징성을 지녔을 때 더욱 그렇습니다.
겁외사의 외관과 성철 스님 기념관을 둘러 본 내 첫 소감은 덜 성숙된 인간들이 보여 준 급조의 전시물 딱 그 수준이었습니다. 명품으로 장식된 졸부의 모습이라고나 할까요.
이 시대 최고의 정신을 담은 그릇치고는 치졸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건물 어디에도 빈궁하면서도 당당한 그 분의 정신 세계가 엿보이지 않습니다. 곤고한 백성을 두루 품을것 같은 어질디 어진 평화도 없고 깊은 묵향과도 같은 그 분의 소박함도 없습니다.
우리는 왜 이리 조급할까요? 한강의 기적이 산업화를 일구는 동안 우리의 정신문화는 폐사지가 되어버렸습니다.
한치 미련없이 뒤돌아서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스님이 세상을 속인 업이라고.
다리가 아파서가 아니라 마음이 아파 얼른 절집을 떠나고 싶었습니다
- 성철스님-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원래 구원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입니다. 자기는 항상 행복과 영광에 넘쳐 있습니다. 극락과 천당은 꿈속의 잠꼬대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오.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주려고 오셨습니다. 크나큰 진리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백송
혹자는 한국의 7대 백송 중 하나라 하기도 하고 혹자는 서울 조계사 백송과 함께 한국의 양대 백송이라고 하는데 겁외사 절마당에서 백송을 보고 스님은 보지 못했다는 말이 나올까 걱정되었다.
성철 스님 생가
기념은 평화롭지만...
- 에필로그-
세상에 존재하는 삼라만상의 이름들 혹은 온갖 감정의 이름들이 다 眞心의 異名입니다
김씨, 박씨, 혹은 이아무개, 세상의 모든 존재는 다 眞心의 現用입니다. 참마음의 표현들입니다.
코스모스를 코스모스라 부르는것도 내 어머니가 나를 '아범아'하고 부르는것도 사랑하는 상대를 향해 '여보'하고 부르는것도 다 참마음의 표현들인 것입니다.
- 終-
Like Wind / S.E.N.E. |
첫댓글 음 좋아요~~^^
음 이라는 글이 이렇게 빛날 줄 몰랐네요
진언에 나오는 옴~~~ 같은 느낌이 듭니다 ㅋㅋ ^^*
원장님 글과 사진을 보면 왜 눈물이 나려고 하지요?....
글쓴 사람 마음이 우중충해서 그런가 봅니다
다음엔 좀 욱끼게 쓰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똑 같은 시기에 똑 같은 곳을 다녀와도 내가 보지 못했고 느끼지 못했던 것을 다시금 보고 느끼게 됩니다.
올려주신 풍경이나 글 자체가 바로 법문이고 우리에게 주신 깨달음입니다. 고맙습니다
저처럼 가시많은 인간 조차 따뜻하게 받아주시는 분들이 계시니 이렇게 주절거리게 됩니다.
부족한 허물은 아량으로 덮어 주십시요. 감사합니다^^*
구석구석 잘 읽고 보았읍니다.백련불교문화재단의 탄생이라든가 현상황들도 잘 알려주셨네요.대원사탑의 생성기원도 그렇고요. 많은 모르고 지나쳤던 사실도 알게 되었고.겁외사의 느낌도 그렇고요.
감사합니다. 같은 동반자가 된다는 것이 기쁠따름입니다.^^*
여러모로 부족한 저를 동반으로 받아주신다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만들어 주신 일박이일의 드라마가 저에게는 더없이 많은 영감을 줍니다
편히 글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드뎌...어제 잠깐 모습보이기에 곧 출현하시겠다싶더니....만사 보고(안)듣는(이) 것이 즐겁기도 하고 괴롭기도한데 작가를 만나면 막힌것이 확 뚫리는 기분입니다. 많은 독자들이 기다려지는 이유겠죠... 자유자재, 무처불통 ...도반에게서 도를 배웁니다. 합장 딱딱따....
마음에 드는 사진이 별로 없어 글을 빨리 올리게 되었습니다
두서 없고 멍청한 글이지만 불교적 관용 (ㅎㅎ)으로 이해해 주십시요.
도반이란 말은 가당찮고 그냥 프로듀사 ^^*
좋은 사진 찍고 정리하여 올려주어 고맙습니다.
몇 장 퍼갑니다.
아름답습니다~. ^^ _()_
법문, 눈뜨게하는 가르침 잘 듣고 많이 배웁니다.
역시나 초청을 삼고초려한 보람이 큽니다. 아니 어떻게 이런 많은 지식을 쌓아올리셨을까요??
회원들 모두의 기쁨이자 실력 향상이라고 봅니다.
감사드립니다.
길어서 그제에 이어 오늘 2부로 마쳤습니다
그릇에 구슬이 한 두개 있을 때가 꽉 차 있을 때보다 더 시끄러운 법입니다.
제가 이런 글 쓰서 올릴 수 있는 곳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편한 마음으로 한자리 차지 할 수 있게해주시고 좋은 경험 이끌어 주신 총무님께 백번 감사드립니다
건강이 허락하는한 따라 다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