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1: 내가 지금까지 살아본 곳들]
나는 지금까지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살아보았다.
열 살까지는 대개 고향인 경북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나라골)에서 차라고는 한 번도 타본 일 없이 살았다. 다만 약간 예외가 있다면, 촌집 말고도, 어릴 때 10 리 떨어진 영해 읍내에 어른께서 집을 하나 마련하고, 형님들을 영해 소학교에 넣으면서 포목점을 하나 운영하고 계셨기 때문에, 나도 어릴 때 주로 나라골 촌집에서 살았지만 가끔은 읍에 있는 그 상점에 가서 지낸 기억이 조금 있다. 그러나 그 때도 차를 구경만 하였지 타본 일은 전혀 없다.
시골 샌님 같은 어른이 장사를 하셨다는 게 믿어지지 않지만, 온 고을의 양반집들이 모두 물건을 많이 사주어 운영은 잘 되었고, 당시에는 경제적으로도 자못 윤택하였던 것 같이 들었다. 그러나 일제 말이 되면서 면장이 너무 헌금 같은 것을 많이 내라고 자주 강요하여 그만 두시고 금강산 북쪽에 있는 통천이라는 곳에 가셔서 목재업을 하시다가 해방된 다음에 38선이 생기자 간신히 몸만 숨겨 빈손으로 돌아오셨다.
그 점포를 팔아버린 뒤부터는 우리들은 촌집에서만 지냈는데 경제적으로 내내 궁하게 살았다. 형님들도 고향 마을에서 더 가깝고 또 더 촌 학교인 창수국민학교로 전학을 하였기 때문에 나는 처음부터 창수국민학교에 들어가서 다니게 되었다. 이 학교에 몇 년 다니는 동안 “원족” 또는 “소풍”이라고 좀 먼 곳에 놀러가는 행사가 1년에 한두 번 씩은 꼭 있었지만 집에서 한 번도 거기에 보내어주지도 않았다. 보내어줄만한 돈도 없었고, 또 한문을 배우지 않고 학교에 가는 일에 대하여 조부께서는 늘 불만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무슨 일만 있으면 가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 당시 좌우익 대립이 시골에서도 점점 격화되자 조부와 어머니만 시골에 남고, 서울로 미리 피신하여 가신 아버지와 형님들을 따라서 소학교 4학년 2학기에 서울로 올라가서, 돈암동 성신여중 앞의 앞뒷집이 서로 붙은 조그마한 기와집에 서울에 올라온 식구들이 전세 들어 살게 되었다. 나는 지역으로 보아서는 돈암국민학교에 가야 맞지만, 당시에도 이미 서울 인구가 급증하여 받아줄 수 없다고 하여, 하는 수 없이 거리도 먼 미아리에 있는 숭인국민학교에 편입하여 걸어 다녔다.
돈암동 집에는 수도가 설치되어 있기는 하였으나 물이 한 번도 나오지는 않아서 늘 어디서라도 물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있으면 받으러 다녔다. 또 당시 미아리는 산에는 공동묘지요, 평지에는 인분으로 거름을 하는 채소 밭 뿐이었는데, 팔도의 가난뱅이들은 다 모인 곳인 것 같은 빈민촌이었다. 그 곳도 학령 아동은 많아서 5학년까지도 3부제로 수업을 진행할 정도였다.
이 때부터 나는 영락없이 도시빈민의 아들이 되어 정말 늘 “춥고 배고프게”만 살았다. 어른은 서울에 오셔서 별로 하시는 일이 없는 실업자가 되셨고, 어머님이 시골에서 지어 보내시는 양식으로 몇몇 식구가 겨우 연명을 하고 학교에도 다니자니,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소학교 6학년 때 6.25 난리가 나자 두어 달을 정말 매일 본격적으로 굶주리다가, 충청도의 계룡산 밑에 와서 살고 계시던 형수님의 친정댁까지 걸어가서 몇 달을 지낸 뒤에 세상이 다시 뒤집혀진 뒤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10리 밖에 있는 영해중학교를 3년 동안 걸어 다녔다.
시골 농업고등학교를 2학년까지, 고향 마을에서 60리 떨어진 영덕읍에 나가서 다니기도 하였으나, 고생만 되었지 공부에 별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아서 자퇴를 한 뒤 집에서 독학을 하였는데,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능률적이었다. 당시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알바로 학원 강사를 하고 계시던 형님이 불러주어 또다시 서울로 가서 그 당시 서울에서 가장 지명도가 낮았던 장충고등학교를 찾아가서 겨우 3달 다니고서 졸업장을 얻었다.
운수좋게 학비가 저렴하다는 국립대학에 턱걸이는 하여, 4년동안을 B학점이상을 유지하며 수업료를 면제 받는 요행을 누리기는 하였지만,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서울서도 제일 싼 곳을 구하여 살다보니 서울서도 우범자가 많이 산다는 아현동의 산7 번지에서도 살았고, 심지어 창녀촌으로 알려진 종로 3가(속칭 종3)에 형님이 가르치는 학원이 있었기 때문에, 그 근처에 형님내외분이 전세를 얻어 살림을 차리셔서, 그 같은 험악한 곳에서 몇 년을 함께 살기도 하였다. 그러한 궁색한 형편이니 명색이 대학생활이라는 것을, 어떤 낭만은커녕, 늘 매우 우울하고 불만족스럽게만 하였다. 그 때는 설사 졸업을 하여도 전공을 살려 취직할 곳도 거의 없었고, 온 세상은 부정부패만 만연하였다.
대학 4학년 때 4,19가 터지는 것을 보았는데, 종로거리를 메운 그 도도한 군중 속에 뛰어들어 정말 “결사항쟁”을 하고 싶었지만, 어쩌다가 울분을 한번 제대로 펴보지도 못하였다. 지금 생각하여보니 평생 처음으로 한번 호기를 마음껏 부려볼만한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이 한심하고 부끄럽기만 하다.
대학을 마치고, 사병으로 입대하여 논산에서 기본 훈련, 영천에서 경리經理 교육을 받았고, 서울, 부산, 대구, 다시 서울로 옮겨 다니면서 3년 동안 복무하였다. 내 인생에서 그래도 처음으로 홀로선 매우 떳떳하고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 뒤에 대만에 유학 가서 만 3년을 지냈는데, 당시에 대만에 와서 계시던 서울의 은사님의 추천으로 대만대학의 전임강사의 월급과 똑 같은 파격적인 좋은 장학금을 받고 지냈지만, 책을 많이 산 것을 제하고는, 기후가 음습하고, 또 상시 계엄령 치하이고 보니 심신이 늘 편하지는 못하였다.
다시 서울에 돌아와서 1968년 가을부터 1978년 봄까지 10년 가까이 지냈다. 그 때 쯤 형님은 학원의 수학 선생으로 이름이 크게 나서 큰 집은 형편이 좀 좋아졌다. 마포의 서강대학 남쪽언덕에 형님이 미국 유학을 가신 사이에, 형수가 혼자서 주관하여 돌로 지은 제법 조촐한 집에서 우리는 결혼을 하였으나, 나는 그 당시에 대학의 시간강사 신세였기 때문에, 그 근처에서 처음에는 단칸 방, 그 다음에는 두 칸 방 전세를 얻어 살았다.
그 다음에 수유리로 가서 처음으로 무작정 조그마한 집을 하나 샀으나, 집을 산 빚을 갚을 길도 없고 아이들은 연년생으로 생겨, 초산 전까지 종합병원에서 약사로 근무하였던 내자가 다시 약국이라도 차려야 살 길이 나올 것 같다고 딱하게 하소연 하였다. 하는 수 없이 고려대학 서쪽의 안암동 언덕 위에 있는 대광아파트로 가서 그 입구에 있는 약국을 하나 인수 받아서 2년 동안 약국을 하면서 사는 집도 그 아파트로 옮겼다.
그 때 어린 아이들 둘을 키우랴, 약국을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하느라 내자도 고생이 많았고, 나도 명색의 어느 대학의 전임이 되기는 하였으나, 도저히 집에만 오면 아무 것도 내 일을 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제법 잘 되는 그 약국을 2년 만에 치우게 하고, 영동의 7단지의 청담동 영동고등학교 부근에 부지 60평, 아담한 잔디밭이 있는 나지막한 시영 주택 집을 하나 다시 사서 이사를 하였다. 그 때 와서야 겨우 좀 마음이 놓였다. 아이들이 다시 서울로 진학한 뒤에 그 집이 어찌되었는지 한번 가서 둘러보았더니 그 일대가 모두 2층짜리 고급 주택가로 변하고 말았다. 아마 지금은 시가 2,30억은 할 것이다.
내 근무지가 한남동의 단국대학에서 다시 정릉에 있는 국민대학으로 바뀌게 되자 다시 서대문 구청 맞은편에 있는 홍은동의 아담한 단독 주택으로 이사를 하였으나, 1년 반 만에 영대로 내려오는 바람에 또 팔고서 대구로 이사를 하였다.
대구로 내려온 뒤에 지금 까지 34년이 지났는데, 그 사이에 미국의 스탠포드대학에 1년, 다시 대만의 국립중앙연구원에 8개월, 일본의 경도대학에 2개월, 프랑스의 빠리 제7대학에 1년, 하버드대학에 1년 동안 가서 있었고, 겨울이나 여름 방학 때를 이용하여 2,3개월 단기간으로 가본 곳은 카나다의 UBC대학에 2차례 합하여 5개월, 중국 남경대학에 1개월 반, 딸이 근무하는 쎄인트 루이스의 워싱턴대학에 3차례 합하여 8개월 정도 머물렀다.
이밖에도 보스턴에는 딸아이가 하버드에 유학하고 있는 동안 몇 차례나 더 갔고, 그 시에서 정책적으로 여러 빛깔의 인종들을 섞어 살게 하기 위하여 새로 짓는다는 타운 하우스 형 아파트 집 하나를 신청하였더니, 당시 나의 소득을 감안하여 시가의 반값으로 배정하여주어서, 내 명의로 몇 년 동안은 그 집을 가지고 있으면서 방학 때 더러 가서 지내기도 하였고, 딸아이가 혼자서 살기도 하였다. 정말 뜻하지 않은 행운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중에 가장 오래 산 곳은 단연코 대구, 경산, 청도 일대이다. 대구시내에서 연년생인 아이들이 소학교에 다니는 동안은 만촌동 교수주택,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법어동의 청구아파트, 둘 다 서울로 진학한 뒤에는 경산으로 나와서 정평동 우방아파트에 2년, 사동의 효동아파트에 6년, 삼풍동의 태왕아파트에 12년을 살았고, 청도의 수무동 촌집으로 주말에 내왕한 것도 15년이나 된다.
몇 년 전에 주민등록 등본을 떼어보니 내가 결혼한 뒤에 주소지를 옮긴 것이 13차례나 되었다. 이게 과연 잘한 짓인가? 잘못한 짓인가? 초년에는 살림이 궁해서 불가피하게 옮겨 다닌 일이 많았으나, 그 뒤로는 사람이 살기에 좀 더 쾌적하고 조용한 곳을 찾는다고 마구 옮겨 다니게 되었다. 지금 다시 이 북한산 서북쪽 끝자락으로 옮겨오게 되었으나 이 마을도 역시 서울치고는 그래도 한적한 편이다.
앞으로 여기서 몇 년이나 계속하여 살 수 있을 것인가? 가령 100살까지 산다고 하여도 25년밖에는 남지 않았으니, 지금까지 산 것의 4분의 1 밖에는 되지 않을 기간이다. 지난 세월을 생각하니 덧없고, 또 앞으로 정말 오래 산다는 게 얼마나 보람이 있을지? 되돌아보나, 예측하고자 하나 두루 아득할 뿐이다.
(2012년 12월 31일 제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