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후베르투스 크나베 독일연방정부 슈타지 文書 연구소 연구원
번역 金 周 一 前 조선일보 논설위원, 駐헝가리 특파원
平和운동의 代父 마틴 니묄러
독일 反戰운동의 代父 마틴 니뮐러 牧師. 나치 치하에서는 히틀러에게 저항했고, 역대 西獨 정권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였던 그는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유난히 유화적이었다.
마틴 니묄러는 평화운동의 거인이자 원로였다. 서독에서 「평화」와 「화해」, 두 단어가 화두로 오르는 모임이 있으면 그 귀빈석엔 늘 니묄러가 함께 있었다.
1950년대의 反核운동에서부터 시작해 1960년대의 부활절 행진, 1980년대 初 군비확장 결정에 대한 반대시위에 이르기까지 모든 저항운동의 현장에선 오랜 세월 헤센-나사우 지방의 교회長으로 있던 마틴 니묄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니묄러는 정치인들과 軍部에 맞서 소리 높여 군축을 외쳤다. 그런 이유로 그는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로부터 「마음 불편한 경고자」로 존경받고 있다.
마틴 니묄러의 목소리는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히틀러가 몸소 관리하는 수감자」로서 7년간 나치 수용소 생활을 한 바 있고, 그래서 고백교회(나치스에 반대하는 독일 개신교 운동)의 가장 유명한 대표자로 인정받고 있는 니묄러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콘라트 아데나워 정부의 再무장 정책과 서독의 西方세계 편입 정책을 단호히 거부했다.
니묄러는 核위협 또는 核공갈 정책에 결연히 맞서 싸웠다. 1959년 1월 카셀市에서 있은 연설에서 그는 이런 말을 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우리의 어머니와 아버지들은 아들이 군인이 되도록 내버려둘 때, 자신들이 무슨 행동을 하는 것인지 알아야 한다. 그들은 자기 아들을 범죄자가 되도록 방치하는 것이다』
『가장 나쁜 惡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돈』
마틴 니묄러의 삶은 그 例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한 독재정권의 프로파간다(Propaganda·선전운동)에 철저히 이용당한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결국 그 독재정권과 점점 하나가 되어 갔다.
니묄러는 독일 개신교(EKD) 對外 책임자로서 1949년에 있었던 한 인터뷰에서 『독일인들은 만약에 분단상태에서 그대로 살 것이냐, 아니면 소련式 독재下의 再통일이냐 하는 두 가지 代案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아마도 「공산주의의 위험을 감수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 2년 후 그는 모스크바를 공식 방문했다. 그곳에서 그는 소련 평화위원회 의장을 만나 주목을 받았다. 소련 정보기관이 동독에서 기독교 민주당과 사회민주당 인사들을 줄줄이 체포, 감금하던 때였다.
동독에서 스탈린式의 획일적 통제가 최고조에 달하던 1952년, 마틴 니묄러는 동독기민당(OST-CDU)의 초청을 받고 동독을 방문, 이 당의 제6차 전당대회에서 개막연설을 했다. 나중에 그 자신이 밝힌 얘기지만, 니묄러는 이때부터 「가장 나쁜 惡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돈」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왜냐하면 돈은 인간을 완전히 소유하려 하지만 공산주의는 인간에게 그래도 얼마만큼의 자유는 남겨두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마틴 니묄러는 소련이 주도하는 단체나 조직들, 이를테면 모스크바 세계평화협의회, 기독교 평화회의, 프라하의 全기독교 평화모임 등에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낸 우두머리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런 마틴 니묄러는 서독정부에 대해서는 매서울 정도로 날카롭게 질타했다. 이를테면 비상사태법 반대투쟁에서 그는 서독 국민들에게 투표용지 무효화 운동을 선동하고 나섰다. 이유는 지금 서서히 현실화되고 있는 기민·기사당과 사민당 간의 大聯政은 「히틀러가 무색할 정도」의 독재체제로 변질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니묄러는 베트남 전쟁이 최고조에 달하던 1967년 시점에 월맹 공산당 지도자 胡志明(호지명)을 만나 차를 나눴다. 이것은 그가 사회주의에 거의 노골적으로 편들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 것이기도 하다. 마틴 니묄러는 혹 동독 정보기관 슈타지의 첩자가 아니었을까?
平和운동을 위해서는 누구와도 손을 잡는다
서독을 비롯한 서방세계의 평화 및 군축운동에 대한 슈타지의 침투활동은 동독 공산정권이 붕괴되고 10년이 더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거의 연구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영역으로 남아 있다. 독일연방 공화국 헌법수호청의 관계서류를 제외하고, 오늘날까지 우리들 앞에 놓여 있는 것은 동독정권이 붕괴하던 1989년 이전에 나온 몇 안 되는 연구 분석 자료뿐이다.
이제까지 발굴된 자료들만을 보아도 동독 공산당(SED)이 서독 사회의 바로 이 평화운동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힘을 쏟았나 알 수 있다.
「서독 군국주의」 타파를 위한 선동·선전활동을 어떻게 벌여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동독 공산당수 발터 울브리히트는 黨 정치국 회의가 있을 때마다 자신이 직접 나서서 협의를 이끌어 나갔다. 동독은 1948년부터 인민경찰(KVP)로 위장, 간단없이 軍 병력을 증강했다. 이 인민경찰은 그 2년 후, 벌써 5만 명으로 늘어나 모두 무기를 갖췄다. 동독 공산당은 자신들의 경우, 그렇게 무장병력을 증강시키면서 서독정부에 대해서는 모든 형태의 再무장에 총력 반대하고 나섰다.
서독의 再무장 반대투쟁 동맹세력을 찾아나선 동독 공산정권의 입장은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는 그런 선택적인 것이 아니었다. 기독교인이든, 평화주의자든, 사회민주당원이든, 중립주의자든, 민족주의자든, 아데나워 右派든, 평화라는 이름의 깃발 아래 하나로 뭉치기만 하면 모두가 환영이었다.
1950年代 末, 사실 서독의 평화운동은 처음으로 국내정치의 한 중요한 요소로 등장했다. 1958년 부활절부터 시작해 초여름까지 최소한 32만5000명의 서독인들이 거리로 뛰쳐나가 평화와 군축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이같은 평화운동에 공산주의자들이 침투해 들어오자 사민당(SPD)은 서서히 발을 빼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核전쟁 저지」 운동도 얼마 안 가 다시 침체에 빠졌다.
베를린 장벽 구축 후, 그동안 추구해 오던 「하나의 독일」 전략은 동독 공산당(SED)의 프로파간다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現狀(현상)을 인정하고, 동독 공산정권과의 평화공존을 인정하라는 요구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196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는 학생운동과 연관이 되어 평화운동 동원 능력도 다시 힘을 얻어 갔다. 1968년 부활절 「평화행진」에는 약 30만 명이 참가해 거의 지난날 수준을 회복했다.
1968년 9월에 창립된 독일 공산당(DKP)과 그 주변조직들은 점점 이 부활절 행진운동을 자신들의 목적실현을 위한 수단과 도구로 이용하려 들었다. 그로 인해 1960년대 말, 사회민주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빠져나갔고, 그러면서 평화운동은 또다시 와해되었다.
이제 동독에서는 공산당(SED)의 결의에 따라 「민족전선」이 『연합정당(공산당을 제외한 들러리 정당들을 일컬음-편집자 注)들과 협력해 평화운동과 反核운동을 이끌어 가기로』 했다.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어떻게 하면 「서독에서 평화운동을 계속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까」라는 구상과 계획을 정기적으로 작성했다. 이를 위해 서독의 소규모 단체, 조직들에게까지도 회의록이 제출되었다.
서독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一黨 독재국가인 동독의 모든 조직기구가 총동원되었다. 36개의 대중조직들과 정당 및 기관들이 1950년대 말, 서독에서 「全獨 작업」을 이행하라는 과제를 받았다.
서독도 스스로 군축과 긴장완화에의 기여라는 큰 명제를 위해서는 사민당은 물론, 기민·기사당, 자민당, 그리고 다른 여타 조직 및 국민계층 내에서 이제까지의 아데나워 정부정책에 맞서 진정한 代案을 찾고자 노력하는 세력이면 모두 하나로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노조·대학생·교회에 침투
동독 공산정권은 특히 노조와 사민당 인사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이들을 동독이 주도하는 평화운동의 대변인으로 만들고자 애썼다.
이를테면 1956년 이후 불법화된 독일 공산당(KPD) 「동지들」과 힘을 합쳐 서독노조를 동원해 보자고 한 것도 그들이 계획한 목표의 하나였다. 즉, 독일연방노조 대의원 대회를 개최해 각 노조들로 하여금 모스크바 核무기실험 금지조약의 철저한 준수를 비롯해서 서독의 核무기개발 포기, 군사예산 감축, 긴장완화 조처, 그리고 나토(北대서양조약기구)와 바르샤바 조약국들 간의 불가침 조약 체결을 위해 진력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1963년 11월에 열린 독일연방노조(DGB) 임시 대의원 총회에서는 「좌파」와 「우파」 간에 열띤 논쟁이 벌어진 끝에 새로운 기본강령 개정案이 채택되었다. 이 개정안에서 노조는 『일체의 核무기 및 그밖의 대량파괴 수단의 추방 및 금지, 그리고 전반적이고 통제된 군축』을 요구하고 나섰다.
동독 공산당이 서독 사회의 평화운동에 파고 들어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았던 그룹들은 노조와 사민당 좌파, 대학생, 그리고 교회단체들이었다. 공산당중앙위원회 산하의 관계기관들은 이들 침투대상 그룹들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조종하기 위해 슈타지와 긴밀히 협력했다.
이같은 양자간 협력의 한 例가 1960년 동독 공산당이 「서독의 군국주의」 타파를 외치며 내놓은 「독일 플랜」의 대중화 캠페인이다. 黨 중앙위원회가 독일 플랜을 대중 속으로 확산시키는 案을 만들어 내면, 슈타지는 또 자기들式으로 똑같은 목표를 향해 작업을 해 나갔다.
그들은 『그리스도 교단과 여타의 교회단체들에 대한 발판구축을 위해』 그 누구보다도 뷔르템베르크 교단 제1 위원장 헤르베르트 베르너 신부에게 접근, 「영향력」을 확보하고자 했다.
1979년 1월, 살을 에는 듯한 추운 어느 겨울 저녁, 동독 국가안전부(MFS·슈타지) 소속 베르너 슈틸러 중위는 슈타지 본부의 극비 서류를 가방에 담아 들고 동독에서 도망쳤다.
서독 정보당국은 슈틸러 중위의 귀순을 계기로 처음으로 서독 경제 및 과학, 연구 분야에 대한 동독 정보기관들의 첩보활동 규모를 상세히 전해들을 수 있었다. 1972년부터 슈타지 정식직원으로 근무해 온 슈틸러 중위는 서독의 각종 과학, 연구기관, 대학, 경제연구소를 「관리」하는 슈타지 본부 제13국에서 일해 왔다. 제13국은 서독 자연과학 부문의 기초연구, 그 가운데서도 특히 核물리학, 생물학, 화학, 그리고 생화학 분야에서의 최신 연구결과를 빼내어 분류, 평가하는 과제를 지니고 있었다.
1978년 2월, 이 슈타지 장교는 아무도 모르게 서독 정보부(BND)에 접근, 협력을 제의해 왔다. 그해 7월이 되면서 슈틸러와 서독 정보부 사이는 확실한 관계로 발전했다.
그 몇 주 후, 슈타지는 동독 내 우편물에 대한 일상적인 검열 과정에서 정체불명의 발신자가 보내는 편지 한 장을 손에 넣게 된다. 슈틸러가 투명잉크를 사용, 숫자암호로 서독 정보부에 중요한 정보를 넘겨주려 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슈타지는 엄청난 예산과 노력을 기울여 「보어스테」라는 이름의 작전下에 이 편지의 주인공을 찾기 시작했다. 1978년 12월, 슈타지는 이 암호편지의 필적이 오버호프의 한 식당에서 일하는 웨이트리스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슈틸러 중위의 여자친구였다.
반 나절 차이로 탈출에 성공한 스파이
이순간부터 슈틸러는 삶과 죽음의 위험을 오가는 상황에 처했지만, 이를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해 겨울, 갑자기 들이닥친 추위와 쏟아진 폭설로 인해 암호편지 주인공에 대한 수사는 다음 해 1월로 미루어졌다. 날씨가 풀리면서 슈타지 본부 제2국 副책임자인 클리펠 대령이 직접 오버호프로 떠났다. 1월20일, 오버호프로 떠난 클리펠 대령 앞으로 슈틸러 중위가 서독으로 넘어갔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슈타지가 하루 반 나절 늦게 도착한 것이다.
1986년 출판된 그의 회고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슈틸러는 2000쪽에 달하는 각종 비밀정보 관련 문서들을 갖고 서독으로 넘어왔다.
베를린 테겔공항에서 슈틸러를 처음으로 심문한 바 있는 서독 헌법수호청 西베를린市 지부 한 직원의 보고에 따르면 슈틸러 중위가 숨겨 갖고 온 마이크로 피시(정보정리용의 마이크로 카드와 필름 종류)는 약 10㎝ 높이에 달했다고 했다. 거기엔 서독 칼스루에市 소재 核연구센터에 관한 소련 정보기관 KGB의 정보도 들어 있었다.
슈틸러 중위가 제공한 자료와 동독 국가안전부(슈타지)의 활동내용에 관한 그의 정보지식 덕분으로 서독 정보당국은 주로 서독 核연구 분야에서 암약해 온 17명의 프락치들을 체포하게 되었다.
독일연방 검찰청이 동독 정보기관을 위한 간첩행위 혐의로 수사절차에 들어간 사건은 총 100件이 넘었다.
슈타지가 관리한 비밀 간첩망의 정체가 드러나게 된 것은 슈틸러가 동독으로부터 들고 나온 「자료목록」 덕분인데, 이 목록에는 서독에서 전달된 보고서와 문서들이 모두 들어 있었다.
완벽하기 이를 데 없는 슈타지 조직에게 있어서 슈틸러의 도주는 엄청난 패배요, 충격이었다. 서독 정보당국은 슈틸러 중위를 통해 슈타지의 조직, 구성과 활동방법 등을 구석구석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슈타지로서 더욱 뼈아프고 문제가 되었던 것은 서독에서 정보 제공자를 포섭할 때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해 온 요소, 즉 절대적 비밀보장이라는 슈타지의 명성이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는 점이다.
서독 내무부는 『슈틸러가 들고 넘어온 자료들을 분석해 본 결과, 1975년, 1977년, 1978년 3년 동안 50명이 넘는 동독 간첩들이 약 530건에 달하는 서독의 과학기술 연구물을, 이 가운데서 어떤 것들은 상당한 분량의 연구업적을 슈타지 본부에 넘겨준 것으로 밝혀졌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슈타지 장교 슈틸러의 귀순을 통해 동독 정보기관들의 활동 가운데서 경제와 과학기술 부문에 대한 첩보활동은 아주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은 동독 경제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탈출과 再탈출
슈틸러의 1978년 활동계획에 따르면, 그해 1년간의 그의 주된 과제는 칼스루에市에 있는 核연구협회(GFK)에 대해 공작을 벌이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한 슈타지 본부의 최대 관심사는 철저한 「목표물 분석」 이외에 그곳 核연구센터 내에 『人的 지원 基地(기지)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공작과정에서 슈틸러가 전적으로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사람은 核연료 再처리소 관리부본부장 라이너 퓰레였다. 라이너 퓰레는 「클라우스」라는 간첩명을 지닌 슈타지 첩자로서 슈틸러에게 核연구센터를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는 열쇠까지 넘겨 주었다.
슈타지는 당시 나돌고 있던 서독의 소위 독자적 核무기 생산說에 관한 정보도 빼내길 바랐다. 슈타지가 당시 서독의 核무기센터에 얼마나 큰 관심을 보였는가 하는 것은, 그곳에서 빼낸 정보 하나 하나를 그 즉시 공산당수 발터 울브리히트에게 직접 넘겨 주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슈틸러 중위의 도주사건과 마찬가지로 퓰레의 운명도 긴장감에 넘치는 스파이物 그대로라고 할 수 있다. 퓰레는 슈타지 첩자로 암약하면서 슈타지 요원을 100여 차례나 만났는데, 이들 요원들은 대개 세미나 참석차라든가 무역업자로 위장해 들어오곤 했다. 이들과 접선하는 날짜, 시간, 장소는 무선으로 정하고, 신중을 기하기 위해 「본 만남」 이전에 또 다른 사람과의 「예비 만남」이 있었다. 이같은 임무수행 대가로 퓰레는 슈타지로부터 9만 마르크의 사례금을 받았다.
그런 퓰레도 자신을 관리하던 슈틸러 중위가 서독 정보기관으로 넘어온 지 몇 시간이 안 된 1979년 1월18일 저녁 체포되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심문에 들어갔다. 그러나 다른 곳으로 이송 중 감시인이 얼음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틈을 타 퓰레는 바덴바덴市의 소련 군사고문단 건물로 뛰어 들어가 피신했다.
그렇게 소련 군사고문단 건물로 도망친 퓰레는 나무 상자 속에 숨어 동독으로 몰래 빼돌려졌다.
퓰레는 그렇게 해서 동독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지만, 얼마 안 가서 그같은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서독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러자 서독 헌법수호청 西베를린市 지부(LFV)는 퓰레를 서독으로 다시 데려오는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퓰레의 부인은 이같은 계획을 성사시키기 위해 헌법수호청 西베를린市 지부에서 마련한 서독 여권을 남편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맡고 나섰다. 퓰레는 이 여권을 이용, 1981년 9월 헝가리를 거쳐 서독으로 도망쳐 왔다.
퓰레는 보석금을 지불하고 독일연방(서독) 검찰로부터 풀려났으나 1984년 슈투트가르트市 소재의 州고등법원으로부터 6년형을 선고받았다.
슈타지는 거대한 산업 스파이 조직
슈틸러 중위 귀순관련 자료를 보면 서독의 각종 연구소, 개발 실험실 기업체들에 대한 슈타지의 침투공작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 실제로 서독 경제계에 대한 첩보활동은 별 의미가 없는 슈타지의 副業(부업)이 아니라 엄청난 人的·物的 예산을 동원해 추진한 아주 중요한 기본 사업이었다.
서독의 교수들, 개발 엔지니어들, 기업인들, 과학자들은 정말 다양한 형식과 방법으로 슈타지와 협력해 왔다. 그런데도 이같은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독일 일반국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설사 이들 경제나 기술 부문에서 간첩활동을 하다가 발각되는 경우가 있다 해도, 관련회사와 연구소는 대부분 「조용한」 해결을 선호하는 경향이었다.
슈타지는 동독의 국가 및 黨 지도부로부터 직접 위임을 받아 서독 경제와 과학계에 대한 첩보활동을 벌였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결과물은 경제계획 속에 집어 넣어 잘 갈고 다듬은 관료조직에 의해 실천으로 옮겨졌다.
서독 기업 및 과학기술계에 대한 슈타지의 첩보활동 목표는 세계시장을 좌지우지하는 고급기술의 비밀을 알아내고 서독의 경쟁기업을 시장에서 밀어내고 그리고 엄청난 돈을 투자한 기초과학 연구 부문에서 정보를 빼내는 것뿐만은 아니었다. 동독 공산당과 슈타지가 목표로 한 것은 그런 것보다는 오히려 경제적 세력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꿔 사회주의 진영 쪽에 유리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서독 경제계를 목표로 한 첩보활동은 처음부터 동독 정보기관의 가장 중심되는 과제에 속했다. 소련은 1951년 동독이 대외 정보기관(APN)을 설립할 때 이미 「경제학 연구소」로 위장한 정보기관 관련 지침을 내렸는데, 이 정보기관은 서독의 「과학기술센터와 실험실들」을 정탐하는 임무를 맡았다.
슈타지의 공작대상이 된 서독 기업 명단을 보면 거대 조선소들을 시작으로 해서 AEG, 다임러 벤츠, 지멘스를 거쳐 크룹, 텔레풍켄, 쉐링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기 이를 데 없었다.
토마스 교회는 슈타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서독 교회들 가운데 하나였다. 서독 수도 본, 그 중에서도 유명인사들이 많이 사는 뢰트겐 지역의 토마스 교회 목사 고트프리트 부쉬가 초대하면 많은 정치인, 교수, 그리고 고급 공무원들이 몰려들었다.
토마스 교회는 특히 기민당(CDU)과 돈독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 교회 목사 고트프리트 부쉬가 본 지구 기민당 개신교 모임 회장직도 함께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부쉬 목사가 놀랍게도 동독 정보기관 슈타지의 오랜 첩자였다. 그는 계속된 간첩활동으로 1994년 징역 18개월에 집행유예, 3만 마르크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프락치가된 목사와 신부
슈타지의 과거를 정리하는 작업을 해 나가면서 알게 된 것 가운데 가장 서글펐던 것은 신부나 목사 등 교회 종사자들까지도 슈타지 첩자로 포섭되어 정보를 제공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의 스파이 활동이 결코 예외적 경우가 아니라는 사실이 점차 분명하게 드러났다. 오늘날까지도 교회는 자신들의 과거를 조사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힘들어한다. 이같은 과거를 의식 밖으로 자꾸 밀어내거나 아니면 화해로 끝내고 싶은 마음이 지배적이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자신들의 그동안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극복하는 것에 대한 저항은 동독에서보다 사회주의를 오직 먼 곳에서만 알고 살아온 서독 지역 교회들에서 훨씬 더 컸다. 대부분의 서독 교회들의 경우, 슈타지 관련 논쟁은 과거사가 된 지 이미 오래다. 그런 논쟁이 있었던 교회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슈타지는 창설 초기부터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고 서독의 각종 종교 공동체 안으로 파고 들어가 활동했다. 슈타지에게 있어서 서독 교회들은 사실 정당이나 정부 부처, 또는 정보기관들 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곳은 아니었다. 그러나 동독 공산당의 시각으로는 여러 가지 관점에서 중요하고도 필요한 곳이었다. 즉 세계관 측면에서 경쟁자라는 점, 내부의 「敵」들의 동맹자라는 점, 그리고 서독 사회의 권력요소라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국가로서의 독일은 늦게 잡아 1961년 베를린 장벽 구축과 함께 완전히 분단되었지만 수백 년 전통의 교회 간 교류와 결속은 그렇게 간단히 끊을 수 없었다. 동독 권력층에게 있어서 그런 교회는 지속적인 위험요소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서독 교회들은 동독 공산당의 활동무대로서 특별한 지위를 누렸다. 동독 공산당은 위장된 동원전략으로 서독의 군비확장정책 부문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시도했는데, 그같은 위장된 동원전략이 효과를 본 곳이 서독교회들이었다.
독일 검찰의 조사결과도 그렇지만 여타 정보기관들의 작업계획과 그들이 포섭한 첩자들 서류를 보면, 서독 교회들에 대한 슈타지의 관심은 위험스럽다 할 정도로 대단했다. 슈타지의 목표는 무엇이었으며, 그들은 무슨 전략을 썼을까?
교회는 동독 건립 초기부터 이미 슈타지의 요주의 대상으로 떠올랐는데, 그것은 이무렵 교회에 대한 공산당의 적대정책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동·서독으로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조직 운영되었던 독일 교회로 침투하고, 또 견제하는 것이 1950년 창설된 동독 국가안전부(MFS), 즉 슈타지의 핵심과제였다.
1953년 對外 정보기관(APN)이 국가안전부(MFS)에 통합된 뒤에도 서독 교회에 대한 「공작」은 여러 갈래로 이루어졌다. 동독에 부정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그런 서독 교회 조직들에 대한 침투공작은 「방첩부서」가 맡고, 「정치교육」 부서, 다시 말해 스파이 활동 부서는 자체의 첩자들을 동원, 서독 교회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했다. 소관업무에 따른 이같은 분업체제는 동독정권이 붕괴될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교회內 「反動」 세력을 「進步」 세력으로 교체
슈타지는 정치적 수단과 마찬가지로 정보기관이라는 수단으로 독일 개신교內에서 「서독 교회 반동세력」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진보」세력을 강화하고자 시도했다. 슈타지는 1961년 독일 개신교(EKD)협의회 회장 오토 디벨리우스의 회장직 사퇴도 자신들이 함께 영향력을 행사해 이룩해 낸 업적이라고 생각했다.
슈타지內 교회담당 부서에서 오랫동안 책임자로 있었던 프란츠 스그라야의 기록을 보면, 『디벨리우스와 그 추종자들에 대한 두 가지 중요한 조처, 즉 이들을 고립시키고 폭로하는 조처는 모두 슈타지가 조직한 것』으로 되어 있다.
베를린 장벽 구축 후 동독 공산당은 그동안 동·서독을 하나로 묶어 온 교회조직을 분쇄하는 데 온 힘을 다 기울였다. 자기들 권력영역 안에 있는 종교 공동체를 좀더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이와 관련한 슈타지의 좀더 구체적인 생각은 이러했다.
『동독內에 국가에 충성하고, 서독 교회 본부 및 정치관련 단체, 조직들로부터 독립된 개신교와 가톨릭교회 지도부를 구성할 수 있도록 정치적 작업과 정보공작을 조직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동독內 공산당 비판세력에 대한 견제뿐만 아니라, 『작전지역內에서의 적의 계획과 의도를 탐문하는 데 필요한 전제조건을 조성해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요구되는 것이 서독 교회 중심부에 침투해 그들의 계획과 의도를 정탐할 수 있는 非공식 네트, 즉 프락치망을 만들어 운영하는 것이라고 슈타지는 생각했다. 1966년 11월 슈타지 실무자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의 주요 의제는 동독 개신교를 전체 독일 개신교(EKD)로부터 분리해 내자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슈타지 총책 밀케는 반동적인 교회 지도자들이 동독교회의 對서독 및 西베를린 접촉을 『자기들 뜻대로 악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들의 접촉내용을 좀더 철저히 밝혀 우리들의 통제下에 두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동·서독 양쪽의 교회관련 주요 조직 및 단체들은 모두 東베를린 정권의 「공작」을 받았다. 모든 기관을 대상으로 소위 對相(대상) 문서라는 것이 작성되었고, 정보를 캐내고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첩자를 포섭했다. 이같은 과제는 슈타지 본부 제2국이 맡아 수행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기민당(CDU)과 기민당 산하의 각종 재단들을 정탐하는 제2국 제1과의 소관이었다. 요아킴 빌란트가 마지막 국장이었던 본부 제20국에서는 제4과가 특별히 서독 교회관련 공작을 맡았다.
附逆 사실 조사에 소극적인 독일 교회
서독 교회에 심어 놓은 슈타지 첩자의 수가 얼마나 되었는지,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작전지역」內에서의 공작에, 그리고 「작전지역」으로의 침투활동에 참여한 동독 국가안전부 소속 정보부서는 자그마치 200개 정도나 되었던지라, 이를 완벽히 파악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게다가 동독정권이 붕괴되면서 수많은 문서·기록들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그 반대의 방법으로, 다시 말해 逆으로, 서독 교회-기관 종사자들과 간부들을 상대로 혹시 슈타지에 附逆한 사실이 없나 조사해 볼 수도 있지만 이것은 교회에 의해 거부당했다. 누이스부르크 출신의 한 목사가, 서독에서 암약한 슈타지 첩자가 2만 명에 이른다는 보도에 흥분해 1998년 부역여부 조사 신청서를 냈지만, 라인란트 교구의 개신교 본부는 『구체적인 혐의점이 없는 그같은 조사의 필요성은 전혀 없다』고 통보했다. 『교회 지도부가 알고 있는 바로는 그같은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단지 1991년 다시 통합된 독일 개신교(EKD) 지역총회 회원과 협의회 회원 및 교직자들만이 1992년 이후 조사를 받았다. 서독 개신교 지역총회 회원들 가운데에선 2명의 正회원과 9명의 準회원들이 이같은 조사를 거부했다. 사민당 정치인이면서 지역총회 의장인 위르겐 슈무데스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조사받은 사람들 모두가 슈타지와 접촉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입증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비판적인 사람들은 이를 달리 보았다. 동·서독으로 분단되어 있던 시절, 약 1500명에 달했던 총회 위원들을 조사한 것이 아니라 동독정권 붕괴 후 들어간 총회 및 협의회 위원들만을 상대로 조사한 것은 문제가 있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서독 교회에 침투한 슈타지 간첩망을 再구성해 본다는 것은 퍼즐게임이나 다를 바 없다. 이것은 지극히 고통스럽고 무미건조한 작업이지만 그러나 전체적인 슈타지 침투 규모와 그 범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훔볼트大 총장이 슈타지 정보원
슈타지 안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서인 제2국 제1과와 제20국 제4과가 서독 교회들 내부에 얼마나 많은 정보원을 심어 놓았는지는 지금까지도 확실히 알 길이 없다. 슈타지 본부 제1국 제2과에 슈타지 활동 마지막 무렵인 1988년 등재된 7명의 정보원 이름들만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앞서 언급한 수도 본의 저명한 목사 고트프리트 부쉬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슈타지 본부 제20국 제4과에 관해서는 이무렵 156명이라는 전체 첩자의 수만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이 가운데 38명은 「작전지역 내부와 그 지역으로의 침투활동」에 종사했던 사람들이고, 그 가운데 11명은 동독 국민이 아니었다.
슈타지 본부 제20국 제4과 소속 첩자들에 관한 좀더 자세한 정보는 1969년도 슈타지 요원모집 및 자격시험 일정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여기에는 향후 2년간의 계획이 담겨져 있었다. 이 계획을 보면 슈타지가 얼마나 조직적으로 서독에서도 첩자를 구하고 나섰는지를 알 수 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제1과(개신교 담당)는 西베를린 소재의 개신교 아카데미 직원 2명을 포섭했다. 한 사람은 총무과 소속으로 「뮐레」라는 가명을 지니고 있었으며, 西베를린 지역 교회인사들과 아주 가깝게 지내고 있었고, 동독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또 한 사람은 이 아카데미의 여성 간부로서 「에바 크라머」라는 위장 이름을 갖고 있었다.
서독內 많은 사람들과 친분이 있는 동독 출신 정보원 「하이너」는 슈타지의 위임을 받아 주요 국제기구에서 활동했다. 그와 관련한 슈타지 문서가 모두 파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동독정권 붕괴 후 「하이너」는 신학자이자 훔볼트 대학 총장인 하인리히 핑크로 그 정체가 밝혀지고 말았다. 핑크는 정체가 폭로되자 총장직에서 해임되었고, 지금은 동독 공산당(SED)의 후신인 독일 사회당(PDS) 소속 독일연방의회(분데스타크)의 의원으로 일하고 있다.
제2과(가톨릭교회 담당)는 위에 언급한 계획에 단지 서독에서 정보원을 포섭할 때 이용하는 「자격기준」만 열거해 놓았다. 동독 붕괴 후 카셀 종합대학의 보수적인 경제학 교수 루트비히 브레스로 밝혀진 슈타지 정보원 「베르거」는 1969년 「학문분야에서의 자격검증」을 마치고 바로 이어서 「서독의 한 중요한 근무처」에 투입하기로 했다. 그는 그해가 가기 前 이데올로기 측면에서의 對동독 사보타주 문제를 다루는 한 국영 연구소에 침투한다는 것이었다. 브레스는 실제로 그해 마부르크 대학에 조교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조교 자격으로 슈타지의 타도대상인 독일통일문제연구소의 전문 연구위원이 되었다.
그 자신의 진술에 의하면, 브레스는 원래 교회 행정처에 잠입하기로 했었는데, 1961년 11월 프라이부르크 소재의 유명한 가톨릭 출판사인 헤르더 출판사에 자리를 하나 얻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여러해 동안 이 출판사를 근거지로 해서 슈타지에 많은 정보를 제공했다.
슈타지의 목사들
동독 국가안전부가 해체되면서 그동안 동독 정보기관에 부역한 서독 종교인들이 하나하나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고트프리트 부쉬인데, 그는 「바움」이라는 가명으로 거의 3년 동안 슈타지를 위해 간첩활동을 했다.
부쉬는 라이프치히에서 신학공부를 하던 대학생 시절, 슈타지에 포섭되어 1961년 서독으로 밀파되었다고 법정에서 진술한 바 있다. 그는 뒤셀도르프 소재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州 개신교 宗務局(종무국)으로부터 은퇴명령을 받았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1945년 소련 정보기관에 포섭되어 스파이로 암약해 오다가 1984년 사망한 헤센-나사우 교구 목사 빌헬름 브링크의 경우다.
브링크 목사가 신학공부를 마치고 처음 일을 시작한 곳은 작센-안할트 州교회였다. 그는 특히 데사우에 있는 국내 선교소에서 州총무 일을 맡아 보았다. 슈타지의 교회담당 부서에 등록되어 있는 그의 간첩명은 「닥터 브뤼케」였다.
브링크 목사는 1960년부터 서독內에 「비밀정보 제공자」를 두고 조종해 왔다. 1963년 브링크가 슈타지가 부여한 임무를 띠고 마침내 서독으로 넘어가게 된 것은 그의 도움에 힘입은 바 크다. 서독으로 건너간 그는 1963년부터 1974년까지 병원교회 목사로 봉직했다. 슈타지가 관리해 온 스파이 관련 문서에 따르면 브링크 목사는 특히 나중에 개신교 산하의 구제사업단 부회장에 오른 루트비히 가이셀에게서 정보를 캐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올덴부르크 소재의 루터교회에서 청소년 교육 전문가로 일한 바 있는 아른트 젠젠슈미트의 경우, 1966년 동·서독 국경 철책을 부수고 서독으로 탈출해 왔는데, 그 탈출은 사실 슈타지의 조작극이었다. 당시 24세 청년이었던 젠젠슈미트는 튀링겐州의 한 목사館에서 일하던 사람으로 그 2년 前 슈타지와의 협력을 문서로 약속한 바 있다.
튀빙겐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는 동안 그는 무엇보다도 대학의 분위기와 대학內 개신교 학생회 관련 정보보고를 많이 올렸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특히 예나 출신의 망명자들과 反체제 인사들을 정탐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검찰 기소장에 따르면 1989년까지 그가 작성해 올린 정보보고서는 1800쪽에 달했다. 슈타지는 그에 대한 대가로 젠젠슈미트에게 약 3만1000마르크를 지불했다. 그는 1993년 10월 첼레 소재의 니더작센 州고등법원에서 1년 징역형에 집행유예, 그리고 1만 마르크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뤼브케 대통령의 下野
동독 공산당은 승리감에 도취된 분위기였다. 하인리히 뤼브케 서독 연방대통령이 1968년 10월14일, 임기도 끝나기 전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하자 동독 공산당 기관지 「노이에스 도이치란트」는 이런 글을 내보냈다.
『뤼브케의 早期(조기)퇴진은 동독이 그의 나치 범죄를 폭로한 결과물이다. 뤼브케의 더러운 죄를 씻어 내려고 서독 정부가 大부대의 세탁 전문가들을 동원해 보았지만 모두 허사로 끝나고 말았다. 全세계가 이 나치 유태인 수용소 건축 기술자에게 손가락질하며 혐오감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최고 통수권자가 그런 범죄자였다니 그 나라는 도대체 어떤 나라란 말인가』
하인리히 뤼브케 대통령의 사임은 서독 戰後史(전후사)에서 동독 국가안전부(슈타지)가 영향력을 행사해 일어난 사건들 가운데서 가장 떠들썩한 사건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뤼브케는 조기에 대통령직을 내놓는 이유로 연방의회 선거와 연방대통령 선거를 시기적으로 분리하기 위한 것이라고 구차한 해명을 내놓았지만 실은 오랜 세월에 걸친 동독 공산당의 정치 공세, 즉 서독 및 서독 대통령에 대한 공격과 매도 끝에 나타난 자포자기적 下野(하야)라고 하겠다.
뤼브케의 퇴진은 한 정치인의 단순한 퇴진,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그의 퇴진과 함께 『동독 공산주의자들은 절대로 민주주의자들의 대화상대가 될 수 없다』는 광범위한 서독 사회의 보수적 기본합의와 정치 엘리트들의 신념이 지배하던 시대도 막을 내렸다.
「하인리히 뤼브케 사건」의 시작 총성이 처음 울린 것은 기민당 출신의 정치인인 그가 서독 연방대통령으로 재선되기 하루전인 1964년 6월29일이었다. 그 5년 전인 1959년, 근소한 차이의 과반수 표를 얻어 대통령으로 처음 선출되었던 뤼브케는 이번에는 사민당 지도부의 지지까지 얻어 再選(재선)되었다. 사민당 지도부는 당내 좌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뤼브케의 再選에 지지를 보냄으로써 기민당과의 大연정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에 나선 것이다.
사민당의 지지를 업은 뤼브케의 대통령 재선, 그리고 이를 위한 상·하원 합동회의 장소를 서독땅이 아닌, 西베를린으로 택한 것을 계기로 동독 공산당은 뤼브케 대통령을 매도하는 대대적인 정치공세를 펴고 나왔다.
민족전선민족협의회가 주최한 기자회견에서 동독 공산당 선전·선동 담당 서기 알베르트 노르덴은 뤼브케의 대통령 再선출을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있은 프러시아 왕 빌헬름 1세의 황제 대관식과 비교하면서 이것이야말로 『국제 정의를 명백히 모독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그는 뤼브케를 두고 나치 비밀경찰인 「게슈타포의 대변자」로서 수많은 나치 강제수용소(KZ) 수감자들을 강제노동에 투입하고, 학대하고 살해한 책임을 함께 지고 있다고 비난했다. 노르덴은 그 증거로 게슈타포 요원들이 서로 주고받은 서한을 제시했는데, 그 내용인즉, 페네뮌데 해군기지 건설공사에서 「상당한 횟수의 작업거부 사건들」이 발생했으며, 그로 인해 이들 거부자들을 수감하기 위한 특별수용소를 건설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 당시 뤼브케는 이 건설공사를 맡은 건축회사 발터 슐렘프社 직원이었던지라 어떤 식으로든지 수용소 건설안에 관여했을 수 있다는 것이 노르덴의 주장이었다.
동독 공산당이 서독과 그 서독을 대표하는 지도자들을 「파시스트」 또는 「나치스트」로 몰아붙인 것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이같은 선동적인 反파쇼 캠페인은 동독 공산당 지도부가 동독 주민들에 대한 자신들의 정당성 결여를 호도하고, 나아가서는 서독 민주주의 체제가 지니고 있는 우월성과 영향력에 대처하기 위해 사용해 온 가장 중요한 도구 가운데 하나였다. 이와 동시에 그것은 나치 만행이라는 독일 과거사로부터 도피하고, 나치에서 공산주의로 이어지는 두 독재체제의 연속성을 호도하기 위한 아주 편리한 방법이기도 했다.
도구로서의 反파쇼주의가 동독 내부에서 지니고 있는 체제안정적 기능에 대해서는 그 사이 여러 측면에서 성찰되었던 데 반해, 그것이 서독에 미치는 작용에 대해서는 이제까지 별로 주의나 관심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 反파쇼주의는 동독 공산당이 서독에서 이념적으로 자리잡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을 제공해 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나치독재와의 비판적 대결 및 논쟁은 동독 공산당 정권이 처음부터 그리고 믿기 어려울 만큼 체계적으로 자신들의 목적달성을 위한 도구로 이용했으며, 여기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것이 국가안전부(슈타지)였다.
과거사 극복이라는 문제가 서독에서 큰 테마로 논의될 때마다 그것이 동독 공산당 독재체제를 정당화하는 데 얼마나 심각하게 남용되었는지, 우리는 공산주의 붕괴 이후 동독이 보유하고 있던 각종 문서들이 공개되고 나서야 비로서 그 전모를 알게 되었다. 폭력과 탄압에 대한 책임문제를 연구, 분석하는 역사가들에게는 나치독재와 동독 공산당 독재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연관성이야말로 슈타지 과거사를 분석해서 얻어낼 수 있는 가장 어려운 과제라고 하겠다.
「反파시즘」 내세워 反共 정서 극복
베를린 장벽을 쌓고서야 겨우 공산주의 붕괴를 모면할 수 있었던 1960년대, 동독은 全국가적인 차원에서 서독과 서독의 정치·사회체제를 두고 나치 전과자와 군국주의자들이 지배하는 국가라고 매도하곤 했다.
이같은 공세를 위해 공산당 지도부는 정기적인 회합을 가졌으며, 이 자리에서 바로 서독 수도 「본의 울트라(극단주의자)들」을 겨냥한 캠페인이 결정되었다.
당시 동독 공산당 당수 발터 울브리히트가 참석한 한 회합에서 나온 말을 인용해 보자.
『이런 의미에서 아데나워 시대를 끝장내기 위한 캠페인을 매일 벌이고 발전시켜야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들은 아데나워를 비롯해서 슈트라우스(基社黨 당수), 겔렌(西獨 연방정보부장), 글롭케(西獨 총리실 차관) 등에 대한 공격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이같은 캠페인을 위해 우리는 약 1년의 시간밖에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때까지 아데나워를 몰아내야 한다』
공산당 간부들은 문을 꽁꽁 걸어 잠근 非공개 회의에서 黨이 목표로 하는 것은 서독 사회의 개혁이 아니라, 빠른 시간 안에 서독 정부를 상대로 프로파간다나 정치적 측면에서 성공을 거두는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속내를 드러냈다.
이 점은 예를 들어 뉘른베르크 나치 전범 재판을 소재로 다룬 영화 품평회와 관련해 1965년 동독 TV 다큐멘터리 담당 책임자 게르하르트 마카트가 모스크바에서 보낸 보고서에서 명백히 드러나 있다.
마카트는 여기서 「베르겐-벨젠 유대인 수용소에서 찍은 아주 충격적인 사진들」과 러시아 코카서스 지방에서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는, 몇몇 히틀러 친위대원들과 관련한 영화재료에 대해 보고하고 있다.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내는 보고서에서 마카트는 『그러나 이들 나치 친위대원들은 오늘날 서독에서 이렇다 할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어서 별로 매력을 끌지 못한다』고 적고 있다. 마카트에게 중요했던 것은 「뉘른베르크 전범자들과 서독 수도 본의 현재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그리고 효과적으로 증거해 주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가 계획했던 영화의 제목은 「교수형에 처해진 자들의 부활」이었다.
동독정권은 특정 정치인들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모든 職業群(직업군), 이를테면 외교관, 법관, 서독연방군 장교, 혹은 경찰들을 목표로 캠페인을 벌이고 나왔는데 이것이 서독에서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물론 정치적 기득권층은 처음엔 대부분 그같은 캠페인에 무감각했고 동독공산당이 국민들의 시선을 자신들의 독재체제로부터 돌리기 위해 고안해 낸 對서독 비난에 거부적인 반응을 보였다.
동독 공산당은 이런 식으로 해서 특히 젊은 세대와 정치적 좌파들 속에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고, 그 교두보를 통해 서독 사회 깊숙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1950년대만 해도 서독 사회 거의 어느 곳에서나 거부반응에 직면해 있던 공산주의가 이제는 특히 동독정권이 벌인 「反파시즘」 캠페인의 효과로 기성사회에서도 점차 적응력을 얻어 가고 있었다.
동독 인민의회 의원의 40%가 前 나치당원
나치즘이라는 「과거사를 극복하지 못한 것」에 대한 격분, 아직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도 못한 서독 민주주의를 뒤흔들어 놓는 한 그 격분과 분노를 동독공산당과 슈타지는 시종일관 뚜렷한 목표下에 부채질하고 또 충동질했다. 오버렌더와 글롭게에 대한 항의에서부터 전직 나치 법관들에 대한 정치공세, 하인리히 뤼브케 대통령에 대한 언론의 사냥에 이르기까지 나치부역과 관련해 폭로된 스캔들 가운데 동독의 권력자들이 관여하지 않은 것은 거의 없었다.
사실 동독에서도 전직 나치 간부들이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공산당 정치국은 이미 1952년, 동독에 남아 있는 대부분의 前 나치당원들에게 『당신들은 평화를 사랑하고 민주적인 독일 건설에 적극적으로 협력, 黨이 당신들에게 기대한 신뢰에 부응했다』고 말함으로써 이들을 일률적으로 사면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동독 공산당은 나치 독일의 과거사 문제를 오직 서독에만 떠넘기려 들었다. 베를린 출신의 심리치료사 베른트 헬러처럼 이에 이의를 제기하고 동독 인민회의(국회에 해당) 의원의 40% 이상이 前 나치당원이었다는 사실을 폭로한 사람은 감옥을 간 것이 동독의 현실이었다.
역사를 도구화하는 동독 공산당의 작태는 끝이 없었다. 그들은 동독만이 시종일관 「反나치주의」 운동을 펼치고 있는 데 反해, 서독에서는 「나치즘의 부활」이 진행되고 있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필요하다 싶으면 공산당 정치국의 사주를 받아 시위하듯 나치 전과 혐의자를 처형하면서까지 말이다. 그들은 그처럼 서독과의 정치적, 도덕적 비교라는 우회적 방법을 통해 국내외적으로 크게 고립된 동독정권에 어떤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이같은 목적을 위해 동독에서는 1950년대 말부터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예산을 들여 서독 정치인, 고위관료, 기업인, 법률가 그리고 여타 사회 고유인사들의 나치 前歷(전력)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물을 찾기 시작했다.
이런 식의 역사정책은 모두 黨 정치국에 의해 조종되었는데, 정치국 내에서는 선전·선동 담당 중앙위 서기인 알베르트 노르덴이 공산당수 울브리히트와 黨중앙위 서독 담당부서와의 합의下에 모든 캠페인의 공격방향을 지시했다. 슈타지는 무엇보다도 이에 필요한 관계문서를 확보하고 이를 선전하는 업무도 부여받았다.
이와는 달리 역사가나 법률가 또는 언론인들에 의한 독자적인 연구는 거의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부분적으로 위조까지 된 이들 문서를 선별하고 그 문서에의 접근여부를 결정하고, 그 문서를 검증하는 일은 공산당만이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조건 속에서 서독內 「옛 나치스트들」과 투쟁을 벌여 온 서독 작가들, 이를테면 귄터 발라프나 헨리 난넨, 베른트 엥엘만 등은 자신들이 접하고 있는 문서나 자료들이 누구로부터 나온 것인지 아는지 모르는지, 슈타지가 제공해 주는 자료에 모든 것을 의존하고 있었다. 1968년 키징거 서독 총리의 뺨을 때려 크게 화제가 되었던 베아테 클라스펠트도 슈타지로부터 건네받은 자료를 근거로 키징거 총리를 나치 부역자로 몰아붙였던 것이다.
동독 공산당은 실제로 이런 식으로 해서 일련의 서독 정치인들을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거세」할 수 있었다. 동독 공산당 선전·선동 담당 서기 알베르트 노르덴이 국가안전부 장관 에리히 밀케에게 보낸 편지는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 주는 하나의 전형이라고 하겠다.
『오버렌더에 관한 서류와 문서를 찾는 것이 큰 성과를 거두고 이제는 서독정부내의 다른 인사들에게 눈을 돌려야 하는 상황에서 내가 당신에게 청하는 것은 제봄 장관과 렘머 장관, 그리고 렘머 장관 밑의 테디에크 차관에 관한 자료가 있는지 체계적으로 조사해 보라는 것이다』
얼마 후 국가안전부(슈타지) 간부들은 『아데나워와 그 공범자들의 전쟁정책을 폭로하기 위해 계속적인 조처를 취하기로』 결정했다. 슈타지 본부는 계속해서 손볼 인사들의 명단을 국가안전부 장관 밀케에게 제출하라는 과제를 부여받았다.
이런 종류로서 최초의, 그리고 가장 성공적인 캠페인은 연방총리실의 고참 차관 한스 글롭케를 상대로 하는 것이었다. 아데나워 총리의 측근이자 나치 정부 내무부에서 고위 행정관직을 지낸 바 있는 글롭케는 「뉘른베르크 인종법」에 대한 공식적인 註解書(주해서) 작성자의 한 사람이긴 하지만, 사실은 단호한 나치 반대자였다. 그는 나치 인종주의로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을 도와 주었는데, 이 점은 직접 도움을 받은 당사자들과 저항운동 참가자들이 전쟁이 끝난 후 진술한 증언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1960년 5월 아돌프 아이히만이 체포되어 이스라엘로 잡혀가자 동독 공산당은 글롭케와 함께 서독을 피고석에 세우고자 시도했다. 동독 공산당 선전·선동 담당 서기 알베르트 노르덴은 울브리히트와 직접 협의한 후, 아이히만 사건을 이용해 서독 정부를 공격」하고 나왔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슈타지 총책 에리히 밀케와 협력해 「특정의 자료를 찾아내거나 만들어 내야 한다고 했다.
수년에 걸친 이같은 캠페인의 클라이막스는 글롭케를 상대로 박수부대까지 동원, 동독에서 궐석 「형사재판」 놀음을 벌였다는 점이다. 즉, 1963년 7월 동독 공산당은 소위 제2의 아이히만 재판이라는 이름으로 나치시대의 「범죄행위」를 기론하며 글롭케를 무기형에 처했다. 한 東베를린 법정은 그에게 「체포명령」을 내렸으며, 그러면서 글롭케는 동독에서 지명수배 되었다.
글롭케는 1963년 가을, 정년이 되어 현직을 떠났는데 슈타지는 그가 직장을 떠난 것이 마치 「동독이 벌여 온 정치공세의 결과물인양 선전」했던 것이다.
교수들, 슈타지 청산 거부
그것은 마치 벌집을 쑤셔 놓은 것과도 같았다. 1998년 여름, 카셀 종합대학교 학생들이 교수 등 대학內 학자들과 고위 행정담당 직원들을 상대로 지난날 동독 국가안전부(슈타지)를 위한 간첩활동 여부를 조사해야 한다고 공식 제의하고 나오자 교수사회는 분노의 물결이 넘쳤다. 도시계획 전문가인 프롬은 학생들의 이같은 제안을 「제정신이 아닌, 미친」 행동이라 표현하면서 『이젠 서독에서까지 그럴 만한 필요도 없이 마녀사냥에 나설 모양』이라고 비난했다.
이 대학의 한스 브링크만 총장은 「슈타지 문서를 뒤져 은밀히 범인을 수배하는 행동」에 반대를 표시하고는 그같은 범인수배야말로 1970년대에 있었던 「급진주의자 취업금지法」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했다.
보수와 자유주의적 입장의 교수들을 대신해 브링크만 총장이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나중으로 미루자고 제안하자 모든 정파를 망라해 구성한 大연합 협의체는 결국 브링크만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슈타지에 협력한 혐의를 받고 있는 교수들을 조사하자는 학생들의 제안은 1998년 10월 완전히 거부되고 말았다.
지방도시인 카셀에서도 지난날의 슈타지 첩자들을 찾아내는 운동을 벌이게 된 데에는 그럴 만한 충분한 계기와 이유가 있었다. 이곳 종합대학 당국은 이미 3년전 경제학자이자 독일문제 연구협회 공동 창설자인 루트비히 브레스 교수가 국가반역죄 혐의로 연방검찰의 조사를 받게 되자 징계규정에 따라 그에 대한 예비조사 절차를 밟지 않을 수 없었다.
사건의 발단은 브레스 교수가 1957년부터 1967년까지 슈타지 첩자로 암약했다는 근거자료가 발견되면서부터다. 그러나 대학당국의 그에 대한 예비조사는 보통의 경우, 6개월이면 끝나도록 되어 있었는데, 너무 오래 끌어 브레스 교수는 이미 早期(조기)은퇴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1996년 10월, 「베르거」라는 가명으로 간첩활동을 한 브레스 교수의 또 다른 관련서류가 발견되면서 문제는 더욱 불거졌다. 찢어 버린 문서를 다시 모아 정리해 보니 자그마치 4000쪽에 12권 분량이었다. 이 자료는 브레스 교수가 30년에 걸쳐 슈타지 본부 제20국 4과를 위해 첩보활동을 해 왔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었다. 그는 간첩활동을 하면서 암호를 통한 무선전화와 투명잉크 등을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한때 카셀市에서 여성문제 담당관으로 일한 바 있는 또 한 사람의 카셀 종합대학 직원 하이데마리 레구스(간첩명 베르벨 치글러)도 남편 폴케(간첩명 롤프 퀘스터)와 함께 슈타지를 위해 오랫동안 여러 가지 「조사」를 실시해 왔다.
대학들은 슈타지의 중요한 활동무대
서독의 대학들은 실제로 슈타지의 가장 중요한 활동무대가 되었다. 동독 국가안전부가 창설된 이래, 서독 대학들은 항시 이 정보기관의 조준사격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슈타지가 이곳 대학 사회에서만큼 많은 人的 자원을 투입한 곳은 거의 없다고 하겠다.
슈타지가 서독 대학들을 그처럼 중시하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무슨 정보나 자료를 빼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온갖 곳을 찾아 헤맨 「敵의 계획과 의도와 행동조처」에 관한 정보들은 대학에서는 거의 얻을 수가 없다는 것이 슈타지의 견해였는데, 그것은 현실적으로 맞는 얘기다.
대학과 관련해 슈타지에게 중요하게 비쳐진 것은 이들 경제계, 정계 혹은 군부가 연구비를 지급하면서 위임한 대학의 소위 위임연구 내용이었다. 특히 슈타지는 대학들, 이를테면 베를린 자유대학의 東유럽 연구소라든가 킬 대학의 東유럽 법률연구소 또는 여타의 다른 관련 연구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동독 및 東유럽 문제 연구에 관심을 보였다.
그 외에 슈타지의 눈으로 보기에 군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연구과제들도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1970년대의 것으로 몇 가지만 例로 들자면 괴팅겐 대학 미생물학 연구소에서 행하고 있는 조사, 프라이부르크 대학 화학과 연구과제들, 브라운슈바이크 공과대학의 특별 연구분야인 「비행관리」가 그런 것들이다.
20명의 교수와 학자들이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국방부 산하 과학협의회 경우처럼 「軍 중심부」에 대한 대학교수들의 개인적인 관계도 슈타지의 커다란 관심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칼-디트리히 브라허 교수나 한스-아돌프 야콥슨 교수와 같이 정부와 개인적인 관계나 인연을 갖고 있는 교수들, 호르스트 엠케(사민당), 베르너 마이호퍼(자민당), 쿠르트 비덴코프(기민당)처럼 당내에서 고위 黨職(당직)을 보유하고 있는 교수들은 「귀중한 정보를 지닌 사람들」이라 해서 슈타지의 주목을 받았다.
미래의 간첩들은 대학에서 포섭하라
슈타지가 서독의 대학들을 중요하게 여긴 본래의 의도는 간첩 후계자를 양성하기 위해 대학을 체계적으로 이용하려는 데 있었다. 장차 「적대적인」 목표물을 상대로 첩보공작을 수행함에 있어서 서독 대학들을 간부 비축소 또는 정보활동 교육장으로 보았던 것이다.
1976년에 작성된 슈타지 본부의 조사 보고서는 『人的(인적) 잠재력을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야말로 고도의 공작활동의 중점사항』이라고 규정했다. 권력의 중심부와는 달리, 대학에서는 비교적 쉽게 첩자를 포섭할 수 있다는 사실이 슈타지가 대학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결정적 이유였다.
슈타지는 1950년대에 이미 요원들을 서독으로 보내 그곳 대학사회 구성원을 상대로 간첩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前職(전직) 슈타지 본부장교로 일한 바 있는 한스 엘트겐은 저서 「勝算(승산)도 없이」에서 드레스덴 공과대학 재학시절 자신이 서독의 브라운슈바이크, 하노버, 함부르크, 아헨, 다름슈타트, 괴팅겐 등지에서 공부하는 동료 공과대학생들을 어떻게 정탐하고, 이들을 어떻게 슈타지에 묶어 주려고 했는지 서술하고 있다.
『나는 우선 관심이 있는 인물을 선정해 그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리고는 첫단계로 그가 슈타지와 함께 일하기에 적합한 사람인지 시험해 보았다. 적합한 인물일 경우, 일정한 단계에 이르면 우리 정보조직의 다른 동료직원들과 접촉하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이들 동료직원들은 그와 접촉할 때 각자의 특성에 따라 그럴듯한 인물인 것처럼 행동한다. 이를테면 동독에 있는 무슨 연구소 소속 연구원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대학가의 左傾분위기가 슈타지 침투의 온상
1970년대 初에 이르면서 서독 대학들을 간부 양성소로 이용하는 슈타지의 공작은 質的(질적)으로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 많은 대학생들이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되고, 親사회주의적인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슈타지의 첩자 포섭에는 그때까지만 해도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성과를 올릴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다.
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슈타지는 『현재 대학의 자원을 개발하는 데 정치적으로 아주 유리한 조건이 형성되고 있다』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는 『정치적, 이념적으로 볼 때 잠재적 포섭 대상자로 고려할 만한 대학생들의 수는 매우 많다』고 했다. 슈타지는 또 『많은 서독 학생들이 정치적으로 마음이 열려 있다는 점은 우리들에게는 아주 소중한 것이며, 이념적인 바탕 위에서 그들과 관계를 맺을 가능성을 열어 주는 것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문제는 오히려 포섭대상 후보자가 너무 많았다는 데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현재의 이 정치적으로 유리한 상황을 최대한으로 잘 이용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자기들을 지지하는 그 많은 사람들을 다 감싸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효과적인 방법을 통해 가장 적합한 첩보요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도 문제였다.
이같은 상황에서 서독 대학들에 대한 슈타지 본부의 공작활동은 1970년대 初부터 더욱 강화되고 또 재편되었다. 밀케 다음의 슈타지 실력자인 마쿠스 볼프가 보기에 바람직한 포섭대상 학생으로서는 법학, 정치학, 언론학, 어문학 전공 학생들이라는 것이었다. 사회학과 심리학 전공자들도 수요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