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군마가 역양땅에 이르렀을 무렵 손책은 다시 한 떼의 군사와 마주쳤다.
처음에는 경계하여 마지않았으나
가까워지자 역시 앞선 장수의 모습이 어딘가 낯익었다.
부드럽고 날랜 몸매에 수려한 얼굴-
헤어져 보낸 몇 년 동안 더욱 굳세고 어른스러워지기는 했지만
그는 틀림없이 옛 친구 주유였다.
주유는 여강 서성사람으로 자를 공근이라 했다.
증조부 영은 장제, 화제때 상서령을 지냈고,
종조 종숙이 나란히 태위벼슬을 했으며,
그 아비 이도 낙양령에 오른 세가의 자제였다.
주유와 손책이 만난 것은 나이 열 여섯,
손견이 의병을 일으켜 동탁을 치러 떠나게 되었을 때였다.
그때 손견은 아내와 아들들을 서성에 피난시켰는데,
손책도 함께 그리로 가 주유를 만나게 되었다.
비록 열 여섯의 나이였지만
둘은 만나자마자 한눈에 서로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남다른 친교가 이루어졌다.
주유가 자신의 저택 하나를 비워 손책에게 내주고
그 어머니를 절하여 뵘으로써 둘은 형제의 의를 맺게까지 된 것이었다.
나이는 동갑이었으나 손책의 생일이 두어 달 빨라 형이 되었다.
그 뒤 손견이 죽고 손책이 원술에게 의지해 떠나자 둘은 헤어졌다.
주유 또한 단양태수가 된 종숙 주상을 따라 서성을 떠났던 것이다.
그러다가 이제 손책이 다시 강동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듣고
수하의 군마 약간을 수습해 달려오는 길이었다.
"아니, 이건 공근이 아닌가? 여기는 어떻게 왔는가?"
말에서 내려 군례를 올리는 주유를 보고 손책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주유가 번쩍이는 눈을 들어 손책을 올려 보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형님께서 강동으로 돌아 가신다기에 급히 달려왔습니다.
개나 말의 힘이라도 보태어 큰일을 함께 도모해 보고 싶습니다"
"고맙네, 공근이 함께 가 준다면 반드시 큰일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네"
손책이 감격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주치와 여범 및 세 구장을 불러 주유를 보게 했다.
"이 사람은 주유라 하는데 강동의 준재요,
나와는 오래된 벗으로 내가 몇 달 먼저 난 덕에 형이 되었으나
여러 가지로 내가 오히려 미치지 못하는 점이 많소"
이렇게 되자 손책의 세력은 한층 불어났다.
잠시 군사를 멈추고 술을 내어 의기를 돋우는데 문득 주유가 물었다.
"형님께서 큰일을 이루려 하신다면 역시 강동의 두 장씨를 알고 계시는지요?"
"두 장씨라니? 누구 누구를 말하는가?"
손책이 처음 듣는 말이라 궁금한 듯 되물었다.
주유가 목소리를 가다듬어 대답했다.
"하나는 팽성에 사는 장소란 사람으로 자를 포라 하고,
또 하나는 광릉에 사는 장굉으로 자를 자강으로 쓰는 사람입니다.
둘 다 놀라운 재주를 가진 이나 지금 난리를 피해 그곳에 각기 숨어 지내고 있습니다.
형님께서는 어찌하여 그런 이들을 불러 쓰시지 않습니까?"
"공근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천하의 현사를 모르고 지나칠 뻔했네, 고마우이"
손책은 그렇게 기뻐하며
당장 사람을 시켜 예물을 갖추고 장소와 장굉을 찾아보게 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둘은 모두 나오려 하지 않았다.
"어진 이를 모시는데 정성이 부족했다. 내가 스스로 가리라"
손책은 그렇게 말하고
차례로 광릉과 팽성을 들러 장소와 장굉을 찾아보았다.
손책이 힘써 천하를 위해 함께 일하기를 청하자
그들 둘도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
손책은 장소를 장사겸 무군중랑장으로 삼고
장굉은 참모 정의 교위로 삼아 함께 유요를 칠 의논을 했다.
유요는 동래 모평땅 사람으로 역시 한실의 종친이었다.
태위 유총의 조카요 연주자사 유대의 아우인 그는
원래 양주자사로 수춘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원술에게 그곳을 빼앗기는 바람에
강동으로 말려 부득이 곡아를 엿보게 되었다.
☆☆☆
그런데 이제 다시 손책이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자
급히 사람들을 불러 의논했다.
부장 장영이 일어나 말했다.
"제게 군사 약간을 주시어 우저에 둔치게 한다면
설령 손책이 백만의 대군을 이끌고 온다 해도 감히 접근하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그때 장영의 말을 이어 한 장수가 일어나 소리쳤다.
"그 선봉은 제가 맡겠습니다"
모두 놀라 그를 보니 다름 아닌 동래 사람 태사자 였다.
전날 북해 태수 공융의 위험을 구해 준 뒤
유요를 보러 왔다가 아직껏 그 장하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 태사자의 용맹을 모르는 유요는
오히려 그 당돌함이 은근히 비위에 거슬렸다.
"너는 아직 나이가 어리니 장수로는 삼을 수 없다.
내 곁에 머물러 달리 명을 기다리도록 하라"
그 말에 모처럼 유요를 위해 싸워 보려던 태사자가 머쓱하여 물러났다.
마음이 기껍지 못할 것은 정한 이치였다.
이에 홀로 떠나게 된 장영은
군사를 우저에 머물게 하고 군량 10만 석은 저각이란 곳에 쌓아 두었다.
☆☆☆
이때 손책이 군사를 이끌고 우저에 이르니
장영이 맞으러 나가 양군은 우저의 한 개울가에서 만났다.
"어린것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넘보느냐?"
장영이 진 앞에 나와 큰 소리로 손책을 꾸짖었다.
손책이 대답할 틈도 없이
황개가 쇠 채찍을 휘두르며 달려나가 장영을 덮쳤다.
그런데 몇 합 어우르기도 전에
갑자기 장영의 군사들이 어지럽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진채 뒤에 불을 놓은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들은 장영은 급히 군사를 돌렸다.
손책이 그 좋은 기회를 그냥 보아 넘길 리 없었다.
곧 군사를 휘몰아 뒤쫓으며 죽이니
장영은 마침내 우저를 버리고
깊은 산중으로 달아났다가 간신히 제 주인 유요에게로 돌아갔다.
☆☆☆
첫 싸움에 이긴 손책이 승세를 타고 유요의 근거지로 군사를 휘몰아 가려는데
문득 범 같은 두 장수가 졸개 3백여 명을 이끌고 투항해 왔다.
한 사람은 구강 수춘 사람으로 장흠이란 장사였고,
다른 한 사람은 구강 하채 사람으로 주태란 장사였다.
원래 장흠과 주태는 양자강을 오르내리며
양민들의 재물을 털어 살아가는 수적이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항시 큰 뜻을 품고 때를 기다리는데,
손책이 강동으로 온다는 말을 들었다.
"손책이 강동의 호걸로서 어진 이를 예로 대우하고 힘센 장사를 중히 여긴다니
우리 그에게로 가는 게 어떤가?
장부로 태어나 수적질이나 하며 평생을 보낼 수는 없는 일이네"
둘은 그렇게 의논하고 졸개 3백여 명과 함께 손책을 찾아 나섰다.
그들 둘이 손책에게 이른 때가
마침 장영과 황개가 어우러져 싸울 때였다.
둘은 장영의 군사들이 함빡 그 싸움에 정신이 쏠린 틈을 타
장영의 진채를 급습하고 불을 놓았다.
그게 조금 전 장영을 놀라 달아나게 한 불로
손책에게 바칠 예물로는 더할 나위 없는 예물인 셈이었다.
그 같은 장흠과 주태를 얻은 손책은 크게 기뻤다.
좋은 말로 둘을 치하한 뒤 나란히 군전교위로 삼았다.
비록 거느리고 온 졸개는 많지 않았으나
손책의 군사들이 또 한번 사기를 드높였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거기다가 장영이 저각에 쌓아 두었던 곡식 10만 석과 군기를 얻고
또 항복한 군사 4천까지 새로이 보태니 손책의 세력은 배로 늘었다.
☆☆☆
손책은 그 세력을 몰아 신정으로 군사를 몰아갔다.
한편 쫓겨온 장영으로부터 손책에게 대패했다는 말을 듣자
유요는 몹시 노했다.
그 자리에서 장영을 끌어내 목을 베려 하였으나
모사 작융과 설례가 간곡히 말려 죽이는 대신 영릉서을 지키게 했다.
그리고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신정으로 가 작은 고개 남쪽에 진을 쳤다.
얼마 뒤에 손책도 신정에 이르러 유요가 진을 친 고개 북쪽에다 채를 내렸다.
그런데 손책이 채를 세우기 무섭게 군사들에게 시킨 일은
그 부근에 사는 주민을 한 사람 불러오라는 것이었다.
"가까운 산 어디에 혹시 광무제의 사당이 없는가?"
의아롭게 여긴 군사들이 주민 한 사람을 찾아오자 손책이 불쑥 그렇게 물었다.
"고개 위에 하나가 있습니다"
그 말을 듣자 비로소 손책은
둘러선 장수들에게 자신이 광무제의 사당을 찾는 까닭을 밝혔다.
"어젯밤에 광무제께서 나를 불러 가서 뵈온 꿈을 꾸었소.
마땅히 찾아가 기도를 드려야겠소"
그러자 장소가 반대했다.
"아니 됩니다. 고개 남쪽에 유요의 진채가 있는데
만약 복병이라도 숨겨 두었으면 어쩌시렵니까?"
"신인이 나를 돕고 있는데 두려워할 게 무엇이오"
손책은 그렇게 장소를 안심시킨 뒤 갑옷을 걸치고 창을 든 말에 올랐다.
그리고 정보, 한당, 황개, 장흠, 주태 등 12만 이끌고 진채를 나섰다.
고개 위에 오르니 과연 광무제의 사당이 하나 있었다.
말에서 내려 사당으로 들어간 손책은
향을 사르고 절을 올린 뒤 무릎을 꿇은 채 가만히 기원했다.
"만약 이 책이 강동에서 대업을 이루고 선친의 원수를 갚게 된다면
반드시 이 사당을 수리하고 사철 제사를 올리겠습니다"
그런 다음 사당을 나와 말 위에 오른 손책은 따라온 장수들을 보고 불쑥 말했다.
"나는 고개를 넘어 유요의 진채를 가까이서 보아 두고 싶소"
여러 장수들이 한결같이 위태롭다고 말렸으나 손책은 듣지 않았다.
앞장서서 고개 꼭대기까지 올라간 뒤 남쪽에 있는 유요의 진채를 살피는 것이었다.
이때 그쪽 숲 속에는 유요의 군사 약간이 매복해 있었다.
손책이 겨우 여남은 기만 이끌고 바로 앞까지 와서 자기네 진채를 살피는 걸 보자
나는 듯 달려가 유요에게 알렸다.
"그것은 틀림없이 손책이 우리를 유인하려는 수작이다."
이때 태사자가 달려나오며 소리쳤다.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손책을 사로잡지 않고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려 하십니까?"
그리고 유요의 허락도 기다리지 않고 갑옷 끈을 죄며 말 위에 올랐다.
"용기 있는 자는 모두 나를 따르라!"
태사자가 창을 꼬나 잡고 말을 달려나가며 그렇게 소리쳤으나
장수들은 아무도 따르지 않고 다만 소장 하나만이
"태사자는 참으로 맹장이다. 내가 따라가 도우리라!" 하며
말을 박차 함께 달려나갔다.
그래도 유요의 장수들은 한결같이 그 둘을 비웃을 뿐이었다.
태사자가 고개 꼭대기에 이른 것은
이미 유요의 진채를 살필 대로 살핀 손책이 말머리를 돌려
자신의 진채로 돌아가려는 때였다.
"손책은 달아나지 마라!"
갑작스런 외침에 손책이 고개를 돌려보니 두 필의 말이 나는 듯
고갯길을 달려 내려오고 있었다.
손책의 열두 장수가 모두 싸울 태세를 갖추고 벌여 선 가운데
손책도 창을 비껴 들고 달려오는 적장을 기다렸다.
"누가 손책이냐?"
달려온 태사자가 다시 소리쳐 물었다.
손책이 나서서 그 말을 받았다.
"도대체 너는 누구냐?"
"나는 동래의 태사자다. 특히 손책을 잡으러 왔다"
손책의 열두 장수는 안중에도 없는 듯 태사자가 씩씩하게 말했다.
손책도 지지 않았다.
"내가 바로 손책이다. 나를 잡으러 왔다니 너희 둘이 한꺼번에 덤벼 보아라.
하나도 두렵지 않다. 만약 내가 네놈들을 겁낸다면 천하의 손백부가 아니다!"
"너희야말로 한꺼번에 덤벼라. 나 또한 조금도 두렵지 않다."
태사자는 그렇게 응수하며 바로 창을 내밀어 손책을 찔러 갔다.
손책도 창을 들어 그런 태사자를 맞았다.
누가 끼여들고 자시고 할 틈도 없는 접전이었다.
수만 황건적의 포위를 혼자서 뚫고
유비에게 구원을 청하러 간 적이 있는 태사자였으나
손책 또한 만만치 않았다.
동탁까지 떨게 한 아버지 손견에게서 어려서부터 익혀 온 무예에다,
손견이 죽은 뒤에는 더욱 힘들여 연마한 터라 가히 신기라 할만했다.
그런 두 사람이 어울린 싸움은 50합에 이르러도 끝이 날 줄 몰랐다.
하나가 찌르면 하나가 피하고 이쪽이 후리면 저쪽이 막았다.
정보나 황개, 한당 같은 장수들이 모두 무예가 서툰 사람들이 아니었지만
속으로 한결같이 그들 둘의 기막힌 솜씨에 혀를 내둘렀다.
태사자가 온 길로 달아나
고개 위로 오르지 않고 고개 뒤로 말을 몰았다.
손책이 뒤따르며 소리쳤다.
"어디를 가느냐? 꼴사납게 달아나지 마라"
그러나 태사자는 여전히 달아나며 속으로 헤아렸다.
(저쪽에는 열둘이나 따르는 자들이 있고 나는 하나이니,
설령 내가 저를 사로잡는다 해도 저 떼거리에게 되 빼앗기고 말 것이다.
한 마장쯤 더 유인해 떼거리를 모두 따돌린 후 으슥한 곳에서 손을 써야겠다)
그리고는 한편 싸우며 한편 달아나기를 거듭했다.
태사자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손책이 그를 놓아주지 않고 따라와
둘은 어느새 평지의 냇가에 이르렀다.
손책을 뒤따르는 사람들이 없는 걸 본 태사자는
그제야 말머리를 돌려 다시 싸움다운 싸움을 시작했다.
하지만 50합은 더 싸워도 역시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를 더 싸웠을까, 손책의 창이 힘차게 태사자를 찔러 갔을 때였다.
날쌔게 피한 태사자가 손책의 창을 거머쥐며 자신의 창으로 손책을 찔렀다.
그러나 손책 또한 몸을 피하면서 태사자의 창대를 낚아채려 했다.
양쪽이 서로 상대의 창대를 잡고 끌어당기니 그대로 말 등에 남아날 수 없었다.
서로 용을 쓰는 순간 한 덩이가 되어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둘은 할 수 없이 창을 버리고 맨주먹으로 싸우기 시작했다.
다시 성난 용과 호랑이가 어울려 싸우듯 처절한 싸움이 벌어졌다.
갑자기 옷이 조각조각 뜯겨져 나가고 투구 끈이며 띠가 끊어졌다.
그러다가 손책이 재빨리 태사자의 등에 매여져 있던 단극을 빼 드는 순간
태사자 또한 손책의 투구를 벗겨 냈다.
둘은 이제 그것을 무기 삼아 싸우기 시작했다.
손책이 빼앗은 단극으로 찌르면 태사자는 빼앗은 투구를 들어 막았다.
한참을 그라는 데 갑자기 함성이 일어났다.
그제야 겨우 태사자의 판단이 옳았음을 알게 된 유요가
천여 군사를 먼저 보내 응원을 하게 한 것이었다.
손책은 다급했다.
자칫하면 정말로 유요에게 사로잡힐 판이었다.
그러나 그때 마침 황개와 정보를 앞세운 열두 장수가 나타나 유요의 군사들과 부딪쳤다.
일이 그렇게 번지자 손책과 태사자도 가망 없는 싸움을 그만두고 각기 떨어졌다.
말도 창도 없는 주먹싸움 대신
다시 말과 창을 갖추어 결판을 내려는 뜻이었다.
태사자는 유요의 군사들에게로 가서 새 말을 얻어 타고 나오고
손책은 정보가 잡아 준 자기의 말을 타고 나왔다.
창도 둘 다 새로 얻었다.
그렇게 되자 유요의 천여 군사와 손책의 열두 장수간의 혼전이 벌어졌다.
손책을 비롯한 12기가 아무리 용맹스럽다 해도 역시 중과부적이었다.
겨우 손책을 보호하며 밀려 밀려 고개 아래까지 이르렀다.
그때 다시 함성이 크게 일며 북쪽에서 주유가 군사를 이끌고 구원을 오고,
남쪽에서는 유요가 몸소 대군을 이끌고 태사자를 후원하러 왔다.
싸움을 크게 벌어졌다.
그러나 이미 때가 해질녘인데다 비바람까지 심하게 몰아쳐 제대로 싸울 수가 없었다.
이에 양군은 싸움을 다음 날로 미루고 각기 자기 진채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