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에 이어 계속....
당시 우리 집은 동네에서 꾀나 부자집으로 알려졌다.
흑백TV (당시는 칼라TV가 보급되지 않았음/일제 쏘니)12인치 가 있는 집은 우리 집 밖에 없었으니, 아이들은 김일 레슬링이나, 만화영화를, 어른들은 연속극을 보기 위해 동네 사람들이 늘 모여 있었다.
그러던 우리 집이 한순간 무너졌다.
당시 아버지는 토목공사 건설가로 관급공사를 주로 하여, 건설이 완공 되면 관에서 즉시 대금을 지불받았기에 걱정이 없었다.
그러나 친구와 동업을 하셨던 아버지는 역대 최대 공사(경남 밀양 인근 제2 수산 다리 건설 공사)완공직전 친구분이 대금을 수령 하여 말레이시아로 도주를 하는 바람에 우리집은 순식간에 알거지가 되었다.
당시 관급공사는 공사 전에 건설사가 자기자본을 투입하여 진행하였기에, 인건비는 물론, 원•부 자재비, 관리비 등이 모두 선 차용 후 변재 조건으로 은행 등에서 대출을 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준공후 결제해야 할 자금이 없는 우리집은 급기야 차압 딱지가 붙고, 우리는 돈 한푼 없이 길거리로 내몰렸다.
당연히 중학교 진학도 포기해야 할 운명 앞에 당시 6학년 2학기에 중학교 진학 입학금 납부금액은 필자 기억으론 9,800원 정도이며, 중학교 진학을 포기한 상태에서 이 돈은 돌려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하여, 6학년생이던 필자는 버스비(당시 입석 10원 좌석 20원)도 절약하고자 걸어서 부산 교육청과 동부교육구청, 서부교육구청 등을 오가며 일주일 동안 수없이 쫓아다녔다.
그 정성에 감동(?)받았는지, 아니면 귀찮아서 그랬는지 아무튼 9,800원을 돌려받아 손에 꼭 쥔 체로 아버지께 드렸더니 아버지는 그동안의 내용을 듣고는 눈시울을 붉히셨다.
결과로는 중학교 진학을 못 하고 13살 나이에 가네 공업회사에 다니게 되었고, 3개월 정도 다니던 때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골목 전봇대에 붙여진 벽보 한 장을 발견했다.
중학생 모집(학비 전액 무료...)이라는 벽보를 찢어서 아버지께 보여드리고 다니게 해 달라고 졸랐다.
아버지는 돈이 안들어 간다는 사실보다, 당신께서 중학교 진학를 포기시키고 정규학교(고 강석진 회장/ 동명목재, 동명그룹 회장 설립)가 아닌 학교에 보내게 됨을 가슴 아파했다.
그래도 중학교를 갈 수 있다는 사실에 하늘을 나를 듯이 기뻤다.
중학교 입학 후 1학기말 무렵에, 전자기술을 배우고 싶은 사람은 자매학교인 한국고등기술학교(/준 고등학교, 현재 폐교)에서 두 시간씩 배울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말에 친구 두 명과 함께 다녔다.
전자라는 기술이 너무 재미가 있어 정말 열심히 배웠다.
중학교 1학년 2학기 무렵, 당시 고등학교 3학년 형들도 어렵다는 라디오조립(회로도만 보고 부품을 계산하고 기판에 끼워 납땜하는 등)을 완성한 일화는 두고두고 회자 되었다.
그때는 가정마다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있었지만 큰 전자 회사에서 주로 생산하여, 개인이 조립한다는 것은 상상이 안 되었다.
지금은 회로도에 부품용량 값을 표기하여 누구라도 조립하기가 쉽지만 당시에는 ‘저항’값을 구하는 것조차 매우 어려웠다.
드디어 밤 열시 경 7석 라디오(트랜지스터가 7개 들어가는 라디오)가 완성되고 건전지를 끼워서 스위치를 켜는 순간 주파수 조정을 알리는 찌찌직 거리는 소리가 났고, 안테나 주파수채널을 맞추자 처음 들이는 소리(남진의 어머님이란 노래였다)에 눈물이 나고 가슴이 벅차올라 내방(다락방)구석에서 혼자 고함치며 기뻐하는 소리에 가족들이 놀라 달려올 정도였다.
아들이 직접 조립했다는 라디오를 믿기 어려워한 아버지와 어머니는 크진 두 눈을 의심했고 남진의 ‘어머님’ 노래마저 애잔하게 들려, 그야말로 우리 집은 마치 올림픽 금메달이라도 딴것 같은 축제 분위기였다.
다음날 아버지는 삼촌을 비롯해서 친구분들과 이웃에게 자랑하기 바빴고, 학교 선생님들조차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순식간에 스타(?)가 되어버린, 필자는 그렇게까지 대단하다고 생각이 안 들어 부끄럽고 창피스러웠다.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갔을 때, 한국고등기술학교의 이사장이 바뀌면서 자매결연을 백지화 되어 더 이상 고등학교에 다닐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전자기술을 더 배우고 싶었으나, 아쉽지만 독학을 시작했다.
또한 막 사춘기에 접어든 나는, 근로청소년을 대상으로 설립한 중학교라서 동급생들은 전부 2~3살 많은 형님, 누나들이었고(그러나 말은 반말로 통했다)자연적으로 철이 빨리 들었다.
17~8세 동급생 누나들은 동생이지만 동급생으로 대우해 주었고,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자연적으로 성에 대한 눈이 빨리 틔었으며, 건전한 성교육(?)도 형성된 것 같았다.
일요일에는 탁구, 베드민턴 모임도 참여했고, 연애편지 쓰는 법, 남녀 간의 에티켓, 현재 흔히 말하는 인성교육 등 많은 것을 배운 까닭에 초등학교 친구들보다는 어른스러웠다.
그러던 중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사건이 발생했다.
경남 김해에 살고 계시던 조 부모님을 장자인 아버지가 도심(아버지 사업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에서 모시겠다고, 우리 집과 버스로 30분 거리(남부민동)에 방을 얻어 모셨다.
할머니는 늘 농사일만 하셨던 분이라 도심 생활이 익숙지 않았고 급기야 병이 나셨다.
고신대 병원(당시 복음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해 봤지만 차도는 없었고, 점점 상황이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이를 보다 못한 큰며느리인 어머님이 나서서, 우리집에서 가까운 큰 대로 사거리 근처에 유명한 약국(당시는 의약 분업을 시행하기 전이라 약국에서 진찰도 하고 약도 조제 하였음)에서 진찰을 받아보자고 낮 열두 시에 할머님과 만나기로 약속하고 조금 일찍 집을 나섰다.
등 뒤에는 이제 갓 돌을 지난 막내(문희/ 너무 예뻐서 인형 같다고)를 업고 무더운 1976년 7월 31일 전봇대를 기댄 체 할머니를 기다리다가 커버를 돌아 들어오는 버스에 치어 어머님과 막내 동생은 의식을 잃었고 병원에 도착해서 결국 운명을 달리했다.
사랑하는 어머님과 예쁜 동생을 잃은 나에게는 가족 누구보다 충격이 컸다.
사춘기에 접어든 나는 정신이 나간 체 며칠 동안 밥도 못 먹고, 울어도 눈물이 안 나왔으며, 눈만 쾡한 체 실어증세까지 보이며, 이러다 아들마저 잡겠다고 주위에서 걱정도 많이 했다.
버스회사와 합의가 늦어져 약 보름 후에야 장례를 치룬 우리가족은 절망이라는 단어밖에 없었고, 불혹이던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내를 떠나보내고, 어린 자식들만 있는 집에 돌아오면 상심을 달랠 길 없어 술로 지새다가 결국 두 번의 병원신세도 한계에 도달했는지 그해 초겨울 첫눈(부산에서 눈 구경은 수십 년 만에 처음) 내리던 날 어머님 곁으로 떠나가셨다.
졸지에 부모님을 잃은 우리 4남매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며칠 동안 혼자 고민하던 필자는, 장남답게 용기를 내어 우리 집안을 다시 살려놓겠다는 다부진 결심을 했다.
무엇보다 돈을 많이 벌어야 되겠다는 생각에 상고(상고 졸업 후 은행 취직이 쉬웠음)에 진학하고자 결심하고 당시 다니던 중학교는 졸업해도 인가를 못 받은 학교라 검정고시를 거쳐야만 했다.
1년의 재수 끝에 당당히 상업고등학교(전국에서 제일 세다는 부산상고/중3 반에서 1~2등 아니면 원서를 안 써준다는... 그러나, 필자는 당시에 주경야독을 하던 몸이라 고등학교에 대한 정보도 없어 부산상고(상고는 부산상고 밖에 없는 줄 ../접수 후에야 주위 사람들이 99%로 불합격이라며 걱정을 많이 했다)에 응시했고, 당당히 상위권 성적으로 합격했다.
첫댓글 아!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여.
아픔과 슬픔이 오늘의 님을 만들었네요.
고귀합니다.
감히 무슨 말을. . .
글 완성하시면 '자전소설'이 될 듯 합니다.
힘내소서! 용기내소서!
칭찬해 주시니 너무 힘이 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