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멈 여서 머하는감. 더버 디지겠구만 와 다들 여서 땡볕에 똘똘 모여가꼬.
―아구 할배 몰랐디야? 저 아래 칠석이 아범 둘 째 머스마가 요 저수지에 둥둥 떠 있었댜. 뭐가 들러도 한참 들렀제.
―거가 머선 소리여? 칠석이 아범 둘 째면 두식이 아녀? 그 머스마가 디지길 왜 디져.
―써글 놈의 마녀 짓이여. 이게 다 고 년 짓이여. 디지기 전까지 고 눈깔을 아주 시퍼렇게 떠가 요래 꼴아볼 땨 알아밧어.
―안카도 그 마녀 짓이라고 그라대. 안 그랄리 없다. 멀쩡하던 머스마가 단디 돌아가 저래 코박고 콱 디져뿌렸으니 자살이라 캤나. 우짤라꼬. 쯧쯧.
―아구 칠석이 애비 어쨔.
―하루죙일 저라꼬 영 동태새끼 눈알로 함 디지버지삣다. 근디 저 아가도 쫌 정신이 나가뿐 줄 알앗지. 머라캔 줄 아나. 기신 들린 미친 마을이라카대. 빨리 나가야 함담서. 여기 다 도라뿌렷다고. 참내. 돌긴 누가 돌어. 칠석이 애비 돌아도 단디 돌았제.
―냅둬라 함. 칠석이 아범 자식새끼들 다 잃고 노망나 제정신이겄나. 지야말로 빨리 정신 차려야제. 여기 사는 사람들 마을 밖으로 나가면 다 디지삔다. 여주 아가 그랬다안카나.
―쯧쯧. 칠석이네는 이제 단단히 미쳐부랐다. 불쌍하제 우째. 빨리 아가 아비한테 가야한다.
―어째 마을에 길흉만 이리 드나. 마녀 디진지 을매나 지났다꼬.
―을매 못 지났으니 그 마녀 저주가 내린겨. 썩을놈의 마녀. 진짜 마을 다 잡아뭇게 생깄네.
―그래도 아가 아범이 지켜줄기다.
―그래야지 암.
―아가 아범 두식이 기도 올린다. 칠석이 데꼬 와라. 정신 차리야지.
세상을창조하시어천지를쌓아올리신하늘님이땅에먹을것과입을것과잘곳을내려주시어우리를보살펴주시던조물주님하늘님부디어린양의죄를사하여주시옵고구원하여주시옵고가는길천리만리지옥불걷지않게해주시옵고죽어구원받는어린양죽어양발에가시가돋치지않게해주시옵소서내장을인자하시고관대하시고너그러우시고뜯어존엄하시고전능하신나의하늘님죽여주세요우리의고통을덜어주시고피를쏟아내는고통은부디참아주시매한결같이우리가지은죄를용서하시나니하늘님의구원과축복과기복을이어받은우리를부디지켜주시옵소서죽여아멘아멘아멘아멘죽여아멘죽여아멘아멘죽어죽여죽여아멘아멘아
.... ....
댓다. 칠석이 구원 받았다.
1.
첫눈이 내리던 그해 크리스마스, 김여주는 태어났다. 어미의 뱃속에서 애지중지 다듬어진 김여주는 10개월을 다 못 채우고 조금 이르게 태어났다. 그러니까 김여주가 태어난 크리스마스는 예정일이 아니었던 말이다. 갑작스런 진통에 김여주의 친모는 어쩔 수 없이 노란 장판 위에 두툼한 이불을 깔고 마을 이장의 도움을 받아 김여주를 세상에 뱉어냈다.
마을에서 병원까지 가는 길은 너무나 길고, 첫눈이 내린 도로는 혹독했다. 핏덩이에 둘러싸여 나온 김여주는 울음을 뱉어내지 못했다. 아이가 숨을 쉬지 않았던 것이다. 피범벅이 된 채로 숨을 쉬지 않는 아이를 두꺼운 포대기에 돌돌 감싼 김여주의 친모는 마을 보건소까지 지친 몸을 이끌고 뛰어 내려갔다. 마을에서부터 차가 다닐만한 도로가 나오기까지 걸어서 20분이었다. 정류장에서부터 도시까지 버스를 타고 50분이었다. 도시에서부터 대학병원까지 지하철을 한 번 더 갈아 타야했다. 당장 숨을 쉬지 않는 아이를 데리고 그 대학병원까지 갈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마을 보건소에서 근무하던 의사와 간호사가 뛰어나와 울지 않는 김여주를 받았다. 10개월을 다 못 채우고 태어난 조숙아. 울지 않는 아이. 눈이 내리는 12월의 영하까지 떨어진 기온까지. 살아날 확률이 없었다. 죽을 확률이 백중에 구십구였다. 김여주의 친모는 눈물을 흘리며 하늘에 기도했다. 오늘은 12월 25일. 예수의 생일이 아니던가. 두 주먹을 꼭 겹쳐쥐고 하늘에 기도했다. 제발. 제 아이를 살려주세요.
그 기도가 먹혔던 건지, 우연인 건지 김여주는 보건소에 도착하고 1분만에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믿을 수가 없었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만들어지고 몇 달 동안 친모의 배에 기생하며 살던 신생아가 밖으로 나와 호흡을 못 한 채 얼마나 차갑게 방치되었는데. 김여주는 살아났다.
보건소에 있던 의료인은 꼭 날이 밝는 대로 아이를 데리고 큰 병원에 나가보라고 신신당부했다. 살아났긴 했지만, 호흡을 하지 못한 시간이 짧지가 않아 머리에 뇌손상이 왔을 수도 있다고 했다. 김여주의 친모는 헐떡거리며 아이를 받아들었다. 일단 아이가 살았다. 죽지 않았다. 핏덩이를 품에 안고 입가를 톡톡 두드리자 어미의 손가락을 따라 입술을 삐죽이며 쪽쪽 빨았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발가락을 쭉 피며 뒤척였다.
날이 밝는 대로 큰 병원에 가보라는 보건소장 말을 따라 도시로 나왔다. 온갖 검사를 다 했다. 머리에 이상한 장치를 붙이기도 했고, 모니터도 달아봤고, 피도 뽑고 별 거 다 했다. 의사의 말로는 열 달을 다 못 채우고 태어난 조숙아 치고 아주 건강하다고 했다. 뇌에도 별 이상이 없다고 했다. 김여주의 친모는 제 품에서 움직이는 아이를 내려 봤다. 크리스마스의 기도가 먹혔다. 하늘이 기회를 주신 새 생명이었다. 모여 사는 마을에서 나타난 새 생명은 활기를 더하며 빠른 소문으로 퍼져 나갔다. 마을의 모두가 김여주의 탄생을 축하했고 축복했다. 크리스마스에 태어나 극적으로 살아난 아이를 예수의 딸이라고 저들끼리 지칭했다.
김여주는 친모의 밑에서 사랑받으며 건강하게 자라났다. 대체 뭘 하느라 밤늦게 들어오는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는 남부럽지 않은 애정을 쏟아부었다. 아빠보다 엄마랑 단 둘이 있는 게 더 익숙했다. 12월에 태어났던 아찔한 역사와 다르게 잘 기었고, 잘 뛰었고, 잘 놀았고, 잘 먹었다. 잘 옹알이했고, 엄마를 불렀으며 방긋방긋 귀엽게 잘 웃었다. 김여주가 5살이 되면서 말솜씨가 획기적으로 번창하던 때. 김여주의 친모를 불러 말했다.
―엄마, 나나랑 미미가 놀러왔어. 나나랑 미미는 내 친구야.
―그래? 나나랑 미미 오면 엄마가 맛있는 거 해줄까?
―아니. 안 해줘도 돼.
―응? 왜?
―이미 먹고 있어. 엄마 옆에서.
여자의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유아용 숟가락으로 계란찜을 떠먹던 김여주가 맞은편에 앉은 엄마의 옆을 가리켰다. 여자의 얼굴이 여주가 가리킨 곳을 향해 천천히 돌아갔다. ....여주야 아무도 없는데? 당황했지만 여자는 애써 웃어넘겼다.
우리 아이가 상상력도 풍부하네. 여자는 김여주의 옆으로 자리를 옮기며 아이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었다. 유치원도 못가고. 하루 종일 집에서 있어야만 하는 아이가 많이 불쌍했다. 이 마을엔 제대로 된 어린이집이나 학교가 없어서. 상상친구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김여주가 5살 때. 그게 처음이었다.
2.
―딸 뭐해?
―엄마 쉿.
―왜? 오늘도 나나랑 미미 왔어?
―나나랑 미미는 이제 안와.
―그럼 이번엔 어떤 친구야?
―덕이 아저씨가 왔어.
―....덕이 아저씨?
―응. 아저씨가 막 울어. 죽여버리고 싶대. 누구를 죽이고 싶냐고 물었는데 울면서 마을 사람들 다 죽이고 싶대. 아저씨 산에서 구른 거 아니래. 돌로 머리를 때렸대. 머리에서 피가 막 흘러서 도망쳤는데 발을 찼대. 넘어졌는데 엄청 큰 바위로... 네? 아저씨 뭐라구요?
여자는 덜덜 떨리는 눈동자로 김여주를 바라봤다. 김여주가 허공에 대고 손짓하는 곳과 제 아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이를 바라보는 두 눈에는 두려움과 공포가 점점 물들었다. 덕이 아저씨는 김여주가 태어나기도 2년 전 마을 뒤에 위치한 고룡산에서 실족사한 청년이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안타까워했던 일이었다. 청년을 위해 마을 자체에서 제사를 지냈다. 가는 길 억울하지 않게 편히 가라고 제사상도 한가득 준비했다.
김여주가 내뱉는 말은 여자가 7년 동안 알고 있던 사실과 퍼즐이 맞지 않았다. 거짓말이라고 하기엔 태어나기도 전 벌어졌던 사건의 주인공인 덕이 아저씨를 아이가 알 수 있을 리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을 주민들 중 누군가가 말해줬나? 그 얘기를 5살 아이한테 왜 해. 한다고 하더라도 덕이 본인이 말해주는 것처럼 저렇게 하나하나 세세하게 알고 있다는 게 도무지 말이 되지 않았다.
김여주의 친모는 당장 아이를 데리고 큰 병원을 여섯 군데나 돌았다. 모두들 김여주가 태어나던 겨울 그때처럼 머리에 아무 이상이 없다는 말 뿐이었다. 이럴 수가 없어. 이럴 리가 없는데. 여자는 결국 끝까지 부정했던 곳을 향했다. 발을 들이자 어두운 붉은 조명, 금빛으로 빛나는 커다란 불상들이 여자와 김여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향냄새가 가득한 곳이다. 아이라인을 사납게 그린 무당은 김여주를 보자마자 혀를 찼다.
―심술이 났네. 지들은 거기서 안 좋은 꼴 당하면서 흉측해졌는데 곱고 예쁜 아이가 태어난다니까 시샘이 난 거지. 쟤 좀 봐라. 뭐? 이런 곳에서 살아갈 바엔 그냥 죽는 게 아이한테 나을 거라니까? 이러고 있어.
무당이 부채를 접고 아이를 가리켰다. 그래서 제 아이가 지금 이상한 것들을 보는 건 맞다는 건가요? 침을 꿀꺽 삼키고 긴장감에 역력한 목소리로 물은 여자에게 무당은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내밀었다. 어느정도 알고 온 것 아니었어?
아이는 의학적으로 머리에 이상은 없었지만 비의학적으로 모든 것이 비정상이었다. 과학적으로 아무 이상 없었지만 비과학적으론 문제 덩어리였다. 결국 여자는 인정했다. 크리스마스날 밤 기도를 들어준 신은 아이의 목숨을 살려놓았지만 대가를 받았다. 무당집에서 나온 여자는 김여주를 집에 두고 마을 이장에게 눈물을 흘리며 털어놓았다. 여자를 달래던 이장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그때는 몰랐다. 분명 이장에게만 비밀스레 털어놓았던 사실이, 다음날이 되고 나니까 온 마을에 퍼져 있었다.
3.
드디어 우리 마을에 하늘님이 내려왔어. 하늘님이 태어났어. 우리 마을은 축복받았어. 축복받았어. 그 서양쪽 신이 누구야. 예수인가. 예수의 탄생일이 크리스마스라고 했었대. 신이 태어난 날짜에 갑자기 진통 왔을 때도 난 이상하게 생각했다니까? 심상치 않았어. 원래 죽었어야 할 애라며. 갑자기 살아난 것도 신의 계시를 받은 거야. 집을 나서는 여자를 붙잡고 마을 사람들이 둘러쌌다.
신을 낳았어. 자기는 신을 낳은 어미가 된 거야. 당장 우리 마을의 신으로 받들어야 해. 아이 어딨어, 아기엄마. 당장 그 아이를 위한 제사를 지내야 해. 아이고 지금까지 우리가 모르고 있었다니. 우리가 진작에 기도를 드렸어야 했는데. 아이 어딨어? 어딨냐니까? 선덕엄마 이제 아이라고 부르면 안 되지! 우리 하늘님이신데! 아이고 우리 하늘님. 하늘님. 하늘님 당장 내놔 아기엄마! 뭘 그렇게 멍하니 서있어 답답하게! 지금까지 자기만 덕 받으려고 하늘님 꽁꽁 숨겨둔 거지?! 어떻게 우리한테 이럴 수가 있어!
순식간에 다정했던 마을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추악해져 있었다. 좀비떼처럼 몰려든 마을 사람들이 제 집마냥 대문을 열고, 마당을 넘고, 마루를 밟아 어린 5살 소녀 앞에 절을 올리고 기도를 했다. 흙바닥에 이마를 쾅쾅 박았다. 제정신이 아니다. 여자는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그 모든 상황이 슬로우모션처럼 눈앞에 스쳐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여기 정상은 없다. 사탕을 쪽쪽 빨던 아이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4.
김여주가 10살이 되던 해, 김여주의 친모가 죽었다.
5.
―아빠.
친모가 발을 헛디뎌 저수지에서 익사해 죽고 김여주는 그 뒤 친부의 손에 자랐다. 어릴 때 친모와 함께 했던 기억이 전부 잊혀질 것만 같았다. 김여주는 아직도 봐선 안 될 것들이 가끔 보인다. 그런 이유 때문에 어린 아이 몸뚱이에 긴 다홍치마와 하얀 저고리를 입히고 허리를 꽉 졸라매게 했다. 머리에는 공작깃으로 만든 삭모를 매달고 홍색의 소매로 이루어진 쾌자를 위에 덮은 채 졸려진 허리춤엔 칼을 찼다. 너무 무거웠다. 어린 몸이 감당하기 버거웠다. 김여주를 그 꼴로 만든 건 김여주의 친부였다. 마치 정말 마을의 신이라도 되는 듯 굴었다.
―아버지라고 해야지. 버릇없게.
―아버지.
사랑만 퍼다 주던 여자와 달리 남자는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새벽기도는 다 하고 들어오는 거니? 왜 이렇게 일찍 들어와.
―물통을 두고 가서....
―기도 다 하기 전까진 들어오지 말라고 했니 안했니.
―해, 했어요....
―너 왜 이렇게.
아버지 말을 안 들어 처먹어. 10살이 되던 해 김여주는 신이 되었고, 11살이 되던 해 아버지한테 처음 맞았다. 말랑한 뺨이 붉게 물들었다. 폭력을 행사하는 남자는 제 발치에 엎어져 엉엉 우는 어린 소녀를 봐주지 않았다. 오히려 한심하다는 듯 발길질을 했다. 물렁한 살과 뼈를 밟았다. 그렇게 약해빠져서 너 따위가 신이 될 수 있어? 제대로 노릇해야 할 거 아냐. 제대로!
절규하는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가 마을에 퍼졌지만 마을 사람들은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마을신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하는 소리다. 우리를 대신해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다. 버티는 것이다. 부정을 타지 않기 위해 아범이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그렇게 미친 소리를 지껄였다.
아내를 떠나보낸 남자의 욕망은 어린 딸에게 향했다. 15살이 되던 해. 곤히 잠들어 있던 김여주는 불쾌한 감각에 눈을 떴다. 옆으로 누워있던 김여주는 제 앞에 놓인 거울 속에서, 캄캄한 어둠 속에서, 슬그머니 뜬 눈 안으로 짐승을 보았다. 제 뒤에 딱 붙어 입꼬리를 찢어지게 올리며 웃고 있는 짐승을. 나이가 든 거친 손이 허벅지와 허리를 더듬었다. 그대로 눈을 뜨면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눈을 꾹 감고 이불을 쥐었다. 뒷목에 처박은 얼굴이 헉헉대며 훔척거린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김여주는 몰래 눈물을 훔치며 그 지옥같은 밤을 버텼다.
나를 이렇게 만든 아빠도, 그걸 알면서도 무시하는 마을 사람들도. 다 없애버리고 싶어. 죽이고 싶어. 죽여버리고 싶어. 죽일 거야. 복수할 거야. 김여주는 15살 처음 복수라는 것을 꿈꿨다. 내가 신이라며. 하늘이라며. 내가 있는 곳은 지옥이었나.
6.
새벽마다 몰래 들어와 몸을 더듬고 훔치던 짐승은 낮만 되면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그 낯짝을 부숴버리고 싶었다. 김여주는 그럼에도 입을 꾹 닫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을 사람들이 진실을 안다고 해서 도와줄 거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피가 섞인 친부에게 희롱을 당한 김여주는 그날부터 돈을 차곡차곡 모았다. 기도할 때마다 들어오는 헌금 중 만원, 이만원씩 몰래 빼고 짐승에게 가져다주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훔치는 금액이 더 커졌다. 어떤 날은 5만원. 어떤 날은 10만원. 그렇게 끔찍한 5년을 보냈다. 김여주의 손에는 몰래 훔친 천만원이 들어왔다.
마을에서 나갈 거야. 도망칠 거야. 도시로 갈 거야. 마을 밖으로 나가서 살인 청부업자를 구하든, 저를 도와줄 사람에게 돈을 주고 고용하든. 복수할 거야. 가만두지 않을 거야. 성인식을 앞두고 2주 전이었다.
7.
마을이 분주했다. 마을의 신인 김여주의 성인식 때문이었다. 김여주 나이 20살이었다. 만으로 딱 19세가 되는 김여주가 태어난 12월 25일로 확정되었다. 한 상 가득 차려진 넓은 붉은 식탁이 마을회관에 길게 이어 붙어져 있었다. 타의로 하얗게 분칠을 마친 김여주는 평소보다 더 치렁치렁한 복장을 위에 뒤집어썼다. 무거운 어깨를 지고 치마를 질질 끌며 식이 시작되기 전 잠깐 집을 들렀다. 친부라는 남자는 식의 주인공인 김여주보다 한껏 단정하게 머리를 넘기고 옷을 갖췄다. 전신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만지는 남자를 지나친 김여주에게로 짐승의 언어가 꽂혀든다.
―여주야.
―.....
―우리 딸이 스무 살이지?
―...네.
―성인식까지 마치면 넌 정말 어엿한 어른이 되는 거다. 마을 모두가 축하해주겠지. 생일까지 겹치니, 마을을 지켜주는 선녀님의 탄생과 성인식을 진심으로 기뻐할 거다. 넌 지난 10년 동안 그저 준비기간인 수련을 거치고 정말 마을의 선녀가 되는 거란다.
―.....
―아직도 그것들이 보이니?
김여주는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지나가려 했다.
―기도할 때 그러지 않니. 전지전능하신 신이시여, 만물을 창조하시는 조물주여. 신이 할 수 있는 최대 업적은 새로운 전지전능한 생명을 잉태하고 창조하는 거란다. 알겠니 딸?
남자는 아직도 거울을 들여다보느라 김여주를 등지고 있었다. 그러나 김여주는 똑똑히 보았다. 거울 속에서 마주치는 짐승의 두 눈을. 불쾌한 기운이 들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 비정상적인 미친 마을에서 벗어나 도망쳐야 했다.
8.
북소리가 둥둥 울렸다. 현악기 소리가 어지럽게 흘러들었다. 오색의 휘황찬란한 음식을 먹으며 약주를 적신 사람들은 벌써 두 볼이 벌게져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싸우던 상철 아저씨와 장국 아저씨는 어깨동무를 하며 빈 술병에 숟가락을 꽂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주위에 있는 아줌마, 아저씨,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손뼉을 치며 그것을 즐겼다.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김여주는 지루하게 두 시간동안 앉아있었다. 자신을 위한 성인식이라는 이름 아래 그저 이런 잔치를 즐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 긴 시간동안 자신을 위한 시간은 단 10분도 되지 않았다. 무거운 치마를 이끌고 몰래 자리를 벗어난 김여주는 갑갑한 구두도 던져 벗었다. 회관의 웃음소리가 아득해진다.
지금이야. 지금이 타이밍이야. 지금이 기회야. 지금이 아니면 두 번 다신 없어. 모두가 마을회관에 모여 있어 거리는 한적했다. 김여주는 옷장 속에 꽁꽁 숨겨두었던 작은 금고를 열었다. 가방에 모아두었던 현금을 전부 담았다. 혹시 몰라 짐승의 지갑까지 뒤져 있는 현금도 모조리 가져갔다. 거실장을 열어 제 이름으로 된 통장을 전부 쓸었다. 가방을 어깨메 메고 일어난 김여주는 뒤를 돌았다. 제 뒤에서 저를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남자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김여주는 숨을 훅 들이켰다.
―우리 딸 어디 가니?
이 인간이 왜 지금 여기 있는 거지. 여주의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갔다. 주위를 언뜻언뜻 살폈다. 남자의 등 너머로 위치한 시계와 배경이 어지럽게 흐트러진다.
―어딜 가나 몰래 따라와 봤는데 안 왔으면 어쩔 뻔 했니.
어둠 속에서 악마가 웃었다. 김여주는 제 앞을 가로막은 악마의 어깨를 밀치고 달려갔다. 뒤에서 머리채를 콱 붙드는 손길에 주저앉고 말았다. 가방을 놓치고 마루장판에 엎어졌다. 방으로 질질 끌려갔다. 머리가죽이 다 벗겨질 것만 같았다. 주먹을 들어 남자의 등을 퍽퍽 때려보지만 남자의 악력이 더 강했다. 바닥으로 김여주를 내팽개친 악마가 어둠 속에서 눈을 번뜩이며 내려다본다.
―성인식을 성공적으로 마친 것에 대해선 축하하마.
―.....
―아빠가 말하지 않았니. 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업적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품는 것이라고.
밤마다 겪었던 소름끼치는 감각이 되살아난다. 짐승은 감추고 있던 본능을 표출한다. 눈깔이 돌아 있었다.
―너는 지금부터 착한 일을 할 거란다.
―하, 하지마.
짐승을 피해 뒷걸음질 했다. 뒤로 몸을 물리고 물려도 다시 다가온다. 더 이상 물릴 공간이 없다. 등이 막힌 벽에 맞닿는다. 짐승의 두 눈이 하회탈처럼 쭉 휘어진다. 광대가 솟아난다. 헤벌쭉 벌어진 입 안에서 잔뜩 침이 고인다.
―착한 내 딸.
―.....
―네가 뱉어낼 자식도 신이 되고,
―.....
―너는 나 덕분에 마리아가 되는 거야.
짐승이 달려들었다.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치자 뺨 위로 큰 손바닥이 날아든다. 가만히 있어. 왜 이렇게 발버둥 쳐. 얌전히 깔려서 허리나 흔들 것이지. 김여주는 두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저런 저질스러운 말을 하는 짐승의 혀를 자르고, 자신을 허락도 없이 만지는 손을 비틀고, 욕망에 담긴 눈을 찔러버리고 싶었다.
김여주는 뒤로 손을 뻗어 잡히는 것을 쥐었다. 동시에 발로 짐승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뒤로 쿠당탕 넘어간 짐승이 좋다고 헉헉댄다. 김여주의 발이 닿았던 가슴팍을 쓰다듬으며 느낀다.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다. 저건 사람이 아니야. 다급하게 문으로 향하는 김여주의 발목을 쥔 짐승이 웃는다. 악마가 웃는다.
―어디가, 딸, 착한 내 딸, 아빠를 받아줘야지, 이 몸을 받아줘야지, 넌 내 딸이야, 받아내야지, 받아야지!!
짐승의 턱을 발로 걷어찬 김여주는 거실로 뛰어나와 흘린 가방을 다시 어깨에 멨다. 우당탕 방에서 헐레벌떡 뛰어나온 짐승이 뒤에서 김여주의 몸을 끌어안았다. 뭉그적거리며 하체를 비볐다. 징그러웠다. 내가 왜. 이 짐승한테. 더럽다. 죽이고 싶다. 원래도 김여주는 자신이 버려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욕망에 자식새끼를 두 번이나 평생 지옥에 처박으려는 아비 따위 이젠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제 뒤에서 몸을 비비며 헥헥대는 남자를 어둠 속에서 김여주가 초연하게 불렀다.
―아버지.
―내 딸... 흐, 착한 내 딸, 허억...
―저랑 그렇게 뒹굴고 싶으세요?
―뒹굴, 다니, 우리는, 할 일을 하는 것, 뿐이야, 너도 좋, 잖아?
―아뇨, 저는 그렇게는 못해요.
김여주는 가라앉은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발정난 짐승을 제 몸에서 떼어냈다. 당장이라도 옷을 벗기려 하는 남자를 떨어트렸다. 무언가를 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아마 제가 열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죠? 저수지에서 실족해서 익사한 채로.
―한심한 여자였어, 망할 여편네 따위 잊고 아빠랑 둘이 살자 여주야. 이리 와.
―왜 경찰을 부르지 않으셨어요?
―지금 그 얘기를 왜 꺼내!!!
―그거 알아요?
―얼른 이리와라 우리 착한 딸... 어? 아빠 애타서 죽는 꼴 보고 싶어?! 너도 얼른 네 새끼를 낳아야지!!!
―아빠를 처음 제대로 봤던 10살 때,
―.....
―그때부터 덕이 아저씨가 아빠 옆에 꼭 붙어서 노려보고 있어요. 지금도.
―.....
―피눈물 흘리면서요.
―.....
―피하지 마세요. 회개하셔야지.
무슨 소리야. 김여주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찌푸려진다. 옷을 반쯤 풀어헤친 몸뚱이와 다르게 얼굴이 순식간에 험악하게 굳는다. 김여주의 말을 상기시키며 이해해보려는 듯 눈동자가 멍하니 사선 어딘가에 박힌다. 김여주는 손을 추켜 들었다. 발정난 채 짐승의 꼴을 하고 있는 악마에게로.
그대로 남자를 향해 손에 들려 있던 무언가가 휘둘러진다. 퍽. 동시에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새하얗던 성모마리아상이 붉게 물들어간다. 내리꽂혔던 팔을 다시 위로 들어 아래로 내리찍는다. 한 번 더 반복했다. 똑같이 한 번 더 반복했다. 한 번 더. 고통에 찬 신음과 무언가 푹푹 꽂히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마리아상의 하체에서 붉은 액체가 뚝뚝 흘렀다. 핏방울이 목과 얼굴에 산발적으로 튄다. 회관에선 아직 끝나지 않은 잔치 속 마을 사람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가 계속 이어진다. 짐승의 울음소리가 웃음소리에 묻힌다.
탕-. 주먹을 풀자 흉기처럼 둘러지던 것이 바닥으로 떨어져 데구르르 구른다. 김여주는 피로 물든 성모마리아상을 바라보다가 제 얼굴을 쥐고 땅바닥을 구르는 짐승을 내려다본다.
김여주는 신이 아니다. 신이 되길 거부했다. 그저 악마를 잡기 위해 더 지독한 악마가 되길 자처했다. 살생을 시도했다. 같은 피가 섞인 사람의 살생을 시도했다. 그것은 천륜이다. 신이 감히 천륜을 저질렀다. 죽을죄를 지었다. 손이 벌벌 떨렸다. 용서받지 못할 죄는 추후에 차차 갚기로 했다. 뻔뻔해졌다. 김여주는 신음을 내며 억억대는 남자를 싸늘하게 내려보았다.
―아버지 아프세요?
―으윽, 흑....
―하늘에서 지켜보는 어머니 억장 무너지겠어요.
―아악...! 누, 눈이... 내, 내, 터, 턱, 이, 이....
―이 씨발 새끼야.
―.....
김여주는 깨달았다. 악마를 잡기 위해 신이 될 것이 아니라 더한 악마새끼가 되어야 한다. 악마를 벌하기 위해 더 끔찍한 악마가 되어야 한다고. 신은 죽었다. 20살 성인식. 악마로 다시 태어난다.
9.
작은 시골 마을에서 도망친 김여주는 무작정 상경했다. 그동안 훔쳐온 돈으로 서울에서는 단칸방 겨우 하나 얻을 수 있었다. 더 악착같이 살았다. 사회라는 실전은 스무 살에세 너무나 가혹했다. 크리스마스. 생일에 서울로 올라온 김여주는 길거리에 울려퍼지는 음악들과 번쩍거리는 상가, 높은 빌딩을 보면서 침을 삼켰다. 나도 저렇게 살고 싶어.
집을 구하느라 모든 돈을 다 써 막막해하던 찰나 김여주에게 선물같은 사망보험금이 떨어졌다. 아버지 이름의 서류였다. 죽었다. 사망원인이 사고사였다. 분명 머리 몇 번 부신 걸로 죽진 못할 텐데. 김여주는 집을 나오기 전까지 죽지 않고 오히려 분노에 휩싸여 펄쩍거리는 몸뚱이를 봤다. 도망치는 제 뒤를 절규하며 좀비처럼 쫓아오는 짐승을 봤는데, 도로로 나오고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길래 포기했나 싶었다.
사망보험금 10억으로 김여주는 작은 사업을 시작했다. 보이면 안 되는 것들이 보이는 유일한 것을 살려 점집을 차렸다. 귀신 본다고 해서 미래나 과거를 완벽하게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김여주는 서울에서 혹한기를 맞으며 살아남는 법을 가혹하게 배웠다. 익숙하게 입을 털었다. 용한 점집이라고 입소문 타는 건 금방이었다.
생각보다 점집에는 자신의 죄를 씻으려는 사람이 많이 왔다. 씻는다기보단 두려워서. 김여주는 그런 것들을 보면서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어떤 여자의 옆에는 머리가 깨진 또래의 여자가 어깨에 딱 붙어 들어왔다. 또 어떤 남자의 목에는 어린 아이가 매달려 있었다. 그들의 눈은 어두웠고 자주 몸이 아프다고 했다. 그들이 달고 오는 것들은 하나같이 그들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아버지 옆에 꼭 붙어있던 덕이 아저씨처럼. 저러니 몸이 아프지.
그럼 김여주는 딱 한마디만 했다. 고인한테 원한을 샀네 너. 들어오던 사람은 김여주 앞에 무릎을 꿇고 엉엉 울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김여주는 그들에게 야메로 쓴 부적을 한 장에 천만원씩 받았다. 양아치 같은 장사에도 매일 예약손님이 끊이질 않았다. 그렇게 한 달 수입이 2억이 넘어갔다.
신을 버리고 스스로 악마가 되길 택했으면서, 신의 끄나풀 행세를 하며 거금을 벌어들인다. 하늘에 진짜 신이 존재한다면 엄청 노할 일이다. 지난 10년 간 쌓아뒀던 분노를 한 번에 터트리며 천륜을 져버린 김여주는 평일에 양아치 짓 하면서 돈을 쌓고 주말엔 성당에 가서 죄를 고했다. 모순적이지만 그 짓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먹고 살아야지. 못 먹고 못 살면 당장 죽는 건 마찬가진데 그럼 죄를 씻어봤자 무슨 소용이냐고. 또한 앞으로 질 죄에 대해 미리 이실직고했다. 아직 복수가 끊나질 않았다.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기도는 항상 그렇게 끝이 났다. 김여주는 태어나서 그 마을에서 한 번도 용서받은 적이 없었다. 한 번도 시험에 들지 않은 날이 없었다. 한 번도 악으로부터 구원받은 적이 없었다. 신이길 강용당한 김여주는 마을 사람들을 억지로 용서하고, 구원했다. 본인은 구렁텅이에 처박아 넣으면서. 매일 미로같은 삶을 살면서 동일한 곳을 빙빙 도는 기분이었다.
신을 사칭하면서 못 할 짓을 하지만 그럼에도 김여주는 용서를 빌었다. 용서받지 못한다면 10년동안 신이었던 자신에게 기도한다. 회개해야지. 아버지의 얼굴을 부시면서 했던 말이 고스란히 본인의 가슴팍으로 날아든다. 자정 12시. 커다란 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정확히 '12'를 동시에 가리킨다. 웅장한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마을 안에서도 밖에서도 거지같은 삶은 아직까지 변함이 없었다.
10.
김여주는 주말마다 새벽기도를 나갔다. 그 시간대가 사람이 없어 편하기도 했고, 어둠이 땅거미까지 가라앉은 새벽이 되어야 자신의 죄를 고백할 수 있었다. 짭신으로 살아오면서 겪는 고충이 꽤 컸었기 때문일까. 신의 흉내를 내면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신이 되는 낮에 김여주는 성당에 올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발가벗겨 지는 느낌이었다.
제네시스G80 신형 세단이 오르막길을 올랐다. 사람들 등처먹고 번 돈으로 부린 사치품을 타고 성당으로 오르는 길이다. 성당은 산 속 외곽진 곳에 있었다. 새벽공기를 타는 성당은 조금 으스스한 분위기를 내기도 했다. 운전석에서 내린 김여주는 손목과 귀에 걸친 사치덩어리를 풀었다. 이렇게라도 가벼워져아 죄를 용서받지. 새벽에도 열린 성당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운데에 위치한 시계탑이 제일 잘 보이는 맨 앞줄에 가 앉아 두 손을 포갰다. 오늘도 김여주는 기도를 했다.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닌, 드디어 자신을 위해서. 용서 받기 위해서. 용서 하기 위해서. 기도한다.
"....."
두 눈을 감고 적막이 드리웠다. 잠시 후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김여주는 슬며시 눈을 떴다. 거리를 두고 같은 의자에 앉은 남자가 다리를 꼰 채 두 손을 포개고 있었다. 김여주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다시 두 눈을 감았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했다. 이 넓은 성당에 많고 많은 자리 중에 왜 하필 옆으로 와 앉는거야. 자의식과잉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김여주는 눈을 감기 전, 무엇보다 어둠 속에서 눈에 들어왔던 손목시계를 보았다.
김여주는 눈을 뜨고 남자의 옆모습을 뜯어지게 관찰했다. 어두운 쥐색의 얇은 세로 실선이 눈에 띄는 기하학적 모형이 박힌 깔끔한 정장을 입은 남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누가 봐도 명품이다 할 것들로 치장하고 있었다. 다리를 꼰 채로 위쪽으로 올라간 다리의 구둣발을 까딱거리는 모습까지. 사치템을 두르고 약간은 불량스러워 보이는 모습과 맞지 앟게 두 눈을 꼭 감고 손을 포개고 있다.
이런 사람이 왜 이 새벽에 성당까지 무슨 일로 행차하셨을까. 김여주는 지금까지 성당을 다니면서 본인 외에 다른 사람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때문에 자연스레 그쪽으로 생각이 갈 수밖에 없었다. 저 사람은 무슨 죄를 지었을까. 돈 많아 보이는 사람이 딱히 소원을 비는 것 같지는 않은데. 김여주의 진득한 시선을 눈치 챈건지 남자는 눈을 감은 채 그 모습 그대로 입을 뗐다.
"신이 과연 있을까요?"
"....."
"없어도 문제지만, 과연 있어도 문제겠네요."
"....."
남자는 슬며시 눈을 뜨며 포갠 두 손을 내렸다. 글라스로 이루어진 천장 밖에서 들어오는 달빛에 의존해 남자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신은 악마를 벌할 의지가 없는 걸까요."
"....."
"아님 벌을 내릴 능력이 없는 걸까요."
"....."
"이래도 저래도 최악이니 차라리 없는 게 나을 수도 있겠네요."
이 세상엔 신의 껍데기를 쓴 인간들이 너무나 많으니까요. 남자가 미소를 지으면서 말한다. 하필이면 마지막엔 김여주 쪽을 바라보면서, 김여주와 두 눈을 마주하면서 말한다. 김여주의 두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무슨 의미죠? 말 그대로예요.
"저는 신을 믿지 않아요."
"....."
"내 세상에 신은 딱 하나밖에 없거든요."
신을 믿지 않는다면서 굳이 이곳 외곽에 처박힌 성당까지 와서 기도를 올리던 남자. 신을 믿지 않는다면서, 본인의 세상엔 신이 딱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던 남자. 김여주가 남자를 이해할 수 없다는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남자는 그저 김여주의 시선에 살풋 웃으며 일어났다. 성당 밖으로 길게 늘어진 복도를 걸으면서 남자의 구두소리가 울린다. 성당 안에서 사치의 증거품이 울린다. 남자가 나가고 텅 빈 공간엔 김여주 혼자만이 남는다.
11.
이상한 남자.
12.
VIP 예약 연락이 왔다. 돈은 하루치 벌 수 있는 일당 못지않게 두둑히 챙겨줄 테니 그 날 하루를 아예 비워달라는 연락이었다. 이미 금전에 찌든 김여주는 오케이 콜, 기다렸다는 듯이 수락했다. 사람 많이 안 받아도 되고 돈은 그 이상 들어오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며 벽에 붙은 50인치 티비의 전원을 켰다. 시골 마을에서 학대당하며 짐승의 탈을 쓴 아버지와 좁은 집에서 단 둘이 벌벌 떨며 살았던 김여주는 온데간데없다. 천연가죽으로 만든 맨들한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김여주는 잔에 든 물을 들이키며 티비에서 흘러나오는 뉴스에 시선을 고정했다. 제21대 대선에서 당선된 새로운 대통령이 기자들의 플래시를 받으며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당선 소식을 앞다투어 정보를 전하는 기자들이 엎치락뒤치락했다.
변용열. 그가 정계에 진출하기 전 몸담고 있던 곳이 화현 기업의 회장이었다. 오랫동안 지키던 회장직에서 물러나고 친아들에게 양보했다고 들었다. 화현전자. 화현엔터. 화현호텔. 화현법인. 화현의료원. 화현반도체. 그 이름을 딴 모든 것이 명품이었다. 이름이 곧 브랜드라고 하지 않나. 화현의 이름값은 대한민국에서 굳건히 1위를 지키고 있었다. 그 재단의 회장이라니. 그냥 한 마디로 엄청난 떼부자라는 거다. 그가 선뜻 회장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정계에 든다는 찌라시가 퍼졌을 때 한번 달칵 뒤집어 졌었다. 결국은 재벌 회장이었던 그가 대한민국 우두머리 수장까지 꿰찬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변용열을 롤모델로 꼽기도 했다.
어마어마한 돈방석에 앉았겠지. 3대가 펑펑 놀고 먹어도 남아돌만한 현금다발과 금괴가 지하에 가득하겠지. 나와는 영 다른 세상이다. 당선된 변용열의 기사가 어떤 채널을 틀어도 보도되고 있었다. 모두가 짠 것처럼 같은 내용을 전하길래 굳이 채널을 틀지 않았다.
그의 얼굴이 지워지고 이번엔 화현재단의 소식이 전해진다. 연장선이다. 현 화현재단 회장인 변진욱이 단상 위에 올라가 임명장을 전하고 있었다. 화현전자의 새로운 우두머리. 젊은 수장. 대표이사 취임식을 축하하며 악수를 내미는 모습이 이번엔 송출된다. 재벌들의 세계를 국민들에게 보도하고 있다. 지루한 눈길로 뉴스를 보다가 눈이 가늘게 떠졌다.
대표이사 변백현. 화현 재단의 법무법인 화온의 엘리트 검사 출신이었던 그가 화현전자의 대표이사로 정식 임명되면서 본격적으로 사업활동을 개시했다는 것이다. 그딴 정보는 아무렴 들어오지도 않았고 중요하지도 않았다. 김여주의 눈길을 끈 건 변진욱 회장과 나란히 서서 카메라를 보고 미소를 짓는 변백현의 얼굴이었다.
분명 일주일 전 성당에서 마주친 그 남자였다. 새벽기도를 드리면서 처음 만났던 그 남자는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마주하지 못했다. 이상한 남자. 혹시라도 또 껄끄럽게 마주칠까 성당에 가는 걸 머뭇댔는데 그런 행동이 무색하게도 남자는 단 한번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런 이유가 저기에 있었다니. 연예인보다 바쁘시겠네. 그런 스케줄 속에서 새벽기도를 드리러 야산에 짱박힌 성당까지 와? 예상만 하던 것이 증명되었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자리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위치에서 무언가를 소원하기 위해 기도를 드리진 않았을 거라고.
13.
VIP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던 김여주는 미리 우려 두었던 차를 홀짝 마시며 창가에 기댔다. 블라인드 밖으로 지하주차장을 향하는 블랙세단을 흘깃 확인한 김여주는 외부와 완전히 차단했다. VIP의 요구사항이었다. 밖으로 노출되는 것은 최대한 피해달라고 하길래 그저 알았다고 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거절하기만 하면 굴러 들어온 복만 걷어차는 거지. 하루 동안 다른 직원들이 출근하지 않아 넓은 공간에는 우두커니 김여주만 앉아 기다릴 뿐이었다. 오묘한 분위기 속에서 정적만 유지하다가 천천히 문이 열리는 인기척이 들면서 구두소리가 들렸다. 김여주는 군기가 바짝 든 신병마냥 허리를 꼿꼿히 펴고 가볍게 목례를 하며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
그러나 인사는 끝맺어지지 못했다. 구둣발의 주인은 티비에서 흘러나왔던 화현전자의 대표이사였다. 나아가 지난 주 성당의 새벽에서 마주했던 남자, 변백현이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김여주가 가만히 바라보자 먼저 다가온 백현은 말없이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그제야 굳어있던 몸을 깨운 김여주가 차를 따른 티컵을 내밀었다. 백현은 장사집의 내부를 둘러보다 티를 한입 머금었다.
"쟈스민이네요."
"네, 향을 좋아해서요."
"운명이네요."
티팟을 기울이던 김여주의 손이 멈칫했다. 이내 아무렇지 않게 내려놓으며 미소를 지었다. 잔이 움직이며 달그락 거리는 소리만이 정적을 메웠다. 김여주가 먼저 예의상 안부를 물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겠어요."
"별로 멀지 않았어요. 접근성도 괜찮아서."
"화현전자 대표이사 취임식 잘 봤어요. 축하드려요 대표님."
"알아볼 줄 몰랐는데. 괜히 불편해졌겠네요."
"아뇨."
조용한 분위기에서 한동안 미소를 장착한 대화가 오고갔다. 김여주는 습관적으로 남자의 주위를 훑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여주에 변백현은 쓸모 없는 겉치레는 전부 패스하고 본론부터 들이밀었다. 김여주의 낯빛에 당황한 기색이 물든다. 이 낮 시간에 사람 다 비우고 은밀하게 와서 가벼운 얘기가 나올 것 같진 않았는데.
"별 건 아니고. 앞으로 사업이 어떻게 될지 알고 싶어서 왔습니다."
"....."
김여주는 눈을 가늘게 떴다.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용한 점집에 신 흉내를 낸다고 하지만. 이성적으로 사고할 기업의 수장이 이런 미신을 믿다니. 당황스레 미소를 지은 김여주는 여유롭게 묻는 백현을 다시 훑었다. 본인이 진짜 신도 아니고 한치 앞을 예측할 순 없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 사람의 기와 과거는 대충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남자는 달랐다. 정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저는 미래는 봐드리지 않습니다."
"아 그래요?"
단호하게 떨어지는 김여주의 말에 백현은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티를 한 모금 마셨다. 그를 따라 컵을 홀짝인 김여주는 괜히 목이 타들어가는 듯 했다.
"여기까지 온 게 아까우니 그럼 부적이라도 하나 써주세요."
"어떤 걸 원하시는데요?"
"과거를 청산할 수 있는 걸로요."
붉은 액체가 뚝뚝 떨어지는 붓을 든 김여주의 손이 멈칫했다. 과거를 청산하다니. 문득 김여주는 성당에서 기도를 드렸던 남자를 복기시켰다.
"제가 죄를 좀 지었는데요."
"....."
"덕담도 한마디 해주시고요."
죄를 지었다는 말이 천연덕스레 나왔다. 오히려 남자는 이게 본론이었다는 듯 재미있어 보였다. 김여주는 마지막으로 성당에 가 기도를 드렸던 것을 기억해낸다.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김여주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단 한 번도 시험에 들지 않은 적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함정에 빠졌다. 덫에 걸렸다. 김여주는 지금 일생일대의 가장 최악의 시험에 들었다. 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대표님께선 어두운 과거가 보이네요."
"어두운 과거?"
"죄를 지었다고 하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
"자신이 죄를 짓고, 그것이 죄라고 스스로 고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게 된다는 것은 곧 추악해졌다는 뜻이고, 사람이 추악해지면 죄가 죄인 줄 모르고 행하니까요. 대표님께선 이미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계십니다. 충분히 인지하고 계시고 속죄하고 계십니다."
"...속죄?"
속죄, 속죄... 속죄라. 변백현은 물었다.
"내가 죗값에 대해 이미 대가를 치렀다는 말을 하고 싶으신가요?"
"네."
"정말로요?"
"네, 그렇습니다."
김여주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미소를 짓는 김여주를 빤히 바라보던 변백현은 따라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근데 어쩌죠."
"....."
"저는 대가라는 걸 애초에 받은 적이 없는데."
미소를 지으며 흘러나오는 변백현의 말에 김여주의 안면에서 미소가 찬찬히 지워졌다. 안 그래도 억지로 올라간 입꼬리가 쥐가 날 지경이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싹 사라졌다. 그것을 확인한 백현은 반대로 한쪽 입꼬리를 더 이죽였다. 김여주를 비웃고 있었다.
"내가 지은 죄가 그리 가벼운 건 아닐 텐데."
"....."
"저는 대가를 바라고 죄를 지었어요. 추악한가요?"
"...아ㄴ,"
"사람을 죽였거든 내가."
대가를 바라고 지은 죄. 사람을 죽인 죄. 김여주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느끼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펼쳐진 암흑 속에서 얼굴이 함몰된 채 피를 철철 흘리는 아버지가 나타났다. 아버지에게 성모마리아상을 휘두른다. 피가 뚝뚝 흐른다. 뼈가 뭉개지고 살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다시 피가 흐른다. 다시 휘두른다. 피가 더 흐른다. 그럼에도 또 한 번 휘두른다. 김여주는 두 눈을 떴다. 아버지가 쫓아온다. 아버지가 죽었다. 자신을 보면서 아직도 미소를 짓고 있는 변백현과 두 눈을 마주쳤다.
"무슨 대가를 바라고 사람을 죽였게."
"....."
신을 버리고 악마를 택했다. 악마를 죽이기 위해 더 끔찍한 악마의 탈을 뒤집어썼다. 그런 자신보다 더 추악하고 무섭고 끔찍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분명 생각했다.
"내가 뭘 원하고 그랬는지 알면 김여주 씨 엄청 놀랄 텐데."
"....."
"놀라지 않는 걸 보니 내 과거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네요."
"....."
"재미없다."
변백현은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악마의 탈을 뒤집어쓴 자. 악마보다 더 끔찍한 악마. 그게 김여주다. 김여주는 마을을 도망쳐 상경하는 내내 본인이 악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역겨웠다. 살고 싶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리 합리화하며 성당을 다녔다. 기도했다.
악마야. 악마. 속에서 본인을 헐뜯고 힐난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목소리는 점점 킥킥댔다. 아무리 살고 싶어도 그렇지, 하나 남은 피붙이를 짓밟아? 천륜을 어겼어. 그럼에도. 그런 짓을 해서라도 김여주는 살고 싶었기 때문에. 살고 싶다는 목적과 대가가 있었기 때문에. 죄를 짓고 타락해서 신이 아닌 악마가 되었다. 김여주는 다급히 일어나 나가려는 남자를 붙잡았다.
"저도 죄를 지었거든요?"
"....."
"대가를 바라고 엄청난 죄요. 죄를 지었지만 후회하지 않아요. 난 그 대가를 이뤘거든요."
"다행이네."
"변백현 씨가 아직 못 받았다는, 그 바라는 대가는 뭔가요?"
뒤에서 붙잡고 확 당기는 손길에 백현은 급하게 뛰어나온 김여주를 내려다보았다. 가만히 내려다보다 입꼬리를 올렸다. 손바닥 하나만 간신히 들어갈 정도로 서로의 얼굴이 가까웠다.
"저번에 성당에서 내가 했던 말 기억해요?"
"네?"
"내 세상에 신은 딱 하나밖에 없다는 거."
"....."
"나는 그 신에게 내가 원하는 대가를 바래요. 그래서 사람을 죽였어요."
"....."
변백현은 장난스레 웃으며 김여주의 볼을 검지로 톡 쳤다. 바보처럼 얼빠진 얼굴이 멍하니 변백현을 담았다.
"그 뒤는 스스로 알아봐요. 숙제예요."
"....."
변백현이 휩쓸고 간 자리는 전쟁이 끝난 황무지마냥 고요했다. 김여주는 멍하니 그저 남자가 나간 자리만 지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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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브금 선정 진짜 대박이에요 작가님… 숨도 못쉬고 글읽었어요ㅜㅜ
백현이는 누굴 죽였길래 그러는 걸까요..? 악 뒷얘기 너무 궁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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