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과 함께한 반 평생
나는 1941년 인천부평동초등학교에입학을 하고 4학년에 8.15 해방을 맞이하였다.
나는 서울교육대학 전신인 서울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54년에 서울에서 교편생활을 했다.
그러는 중 419. 516.을 겪으면서 지냈다.
어느날 행림학교 개교 교장으로 한참 바쁜시간에 건장한 40대 초반에 장년들이 나를 찾아왔다.
운동장 화단에 식수를 하는중인데 나를 뵙자고 한다는 전갈이 왔고 흙묻은 손을 씻고 들어갔더니,
낯은 익은데 언듯 생각이 나지 않는다 . 나는 가는 학교마다 5~6학년을 가르치고 졸업시켰기에 어느
학교에서 가르첬는지 혼돈이 되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들은 나를 금방 알아보고 선생님 저의 왔서요. 선생님 한다. 5명이 왔다.
어~ 그래 잘 왔서요. 이리로 앉어요. 했다 눈치를 채고는 길세가 선생님 저 이길세예요.경동국민학교50회.
그제서야 생각이 난다.학교주면에는 오이.농사를 주로하고 걸음은 시내에서 수거한 인분이 걸음이라
학교 주변은 인분냄새로 머리가 아플정도 였다.
오늘 무슨일이 있었나? 졸업한지 30년이 지나 찾은것은 뜻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물었다.
현제 나이 42세이고 학창시절 지낸 우정을 이어가며 친목을 돈독하게 하기위해 모임을 갖고 있는데,
담임선생님을 모시면 더 좋을것이란 의견들이 있어서 ,나를 함께하자고 찾아왔다는 이야기다.
나는 저의를 가르친 스승이고 뒤에서 지켜보며 격려와 기도를 해야 하는처지인데. 함께 모임을 한다고?
나는 년 1회 참석하겠다고 간곡하게 거절하였다. 자주보면 스승은 스승이 아니고 이웃집 아저씨로 보일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고 몇 달이 흘렀다 또 찾아왔다. 25명이 결의를 하여 나를 모시기로 했다고 고집이 대단하다.
나는 업무를 보는 중이라 머리를 끄떡여서 반 슬락을 하였다.
그 후 27년이 흘렀다 매월 22일이면 모교근처에 모여 지내온 일 가정사. 사업.등 한 가족이 되고
애경사를 함께 해 오고 있다.
그들은 올해가 1950년생으로 70세가되었다. 그 들은 남 다른데가 한가지가 있다.
15년 년배인 나를 스승으로서의 예우는 철저하다는것이다.
내가 있는자리에서는 술도 마주보고 마시지 않고. 담배는 피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몇 번을 보던
만나든 벌떡일어나서 나를 대한다.
나를 대하는 두번째 모습은 거의 자녀들 혼사에 나를 앞에 내 세웠다
내가 싫다고 하든 말든 나를 앞에 세우는것을 만족해 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올해부터 걸음이 흔들리고 자세가 흐트러 짐을 감지하곤 한다.
좀더 건강해서 제자들과 웃고 좋은 이야기를 나누며 좋은 관계로 오래 오래 지내고 싶어 간곡히 기도를 한다.
62 서울경동 초등학교에서 근무를 했고 그 해 그들을 졸업을 시켰다. 그 들은 1950년생으로 나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사회는 매일 시위로 장면 정부는 무능하다는 확성기 소리에 사회 절서는 어지러웠다.
이어 5. 16. 군사혁명을 경동학교 근무시절 맞았다 나는 경동학교 자원해서 간것도 5.16혁명과 관련이 있다 그 당시 인천에서
살았다 혁명정부는 대학재학생은 정부가 실시하는 학사고시를 합격해야 학사 자격을 주고 불합격일 때는 수료증만 대학에서
발부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양대학이 가까운 경동학교에 지원해서 근무하며 일년만에 학사고시 1 회 합격자로 정부 발행합격
학사가 되었다.
그로 인한 경동 50회 졸업 제자들과 인연은 계속되었고 그들 자녀들이 성장하며 혼사에는 나를 앞에 새우려하는 것이였다
그 당시에는 결혼을 하면 주례라고 꼭 년만하고 스승이고 덕망이 있고 하는 것을 찾는 때 였나보다.
한 가정 한 가정 혼사를 할 때 마다 등장시키는 것이다. 물론 봉사하는 마음으로 잘 살기를 기도 하며 짧고 평생남을 순수한
말로 주례는 이어젔다. 그러다 보니 한 가정에 2회 3회를 요구하기에 딱 거절 했다.
형제 자매등 한 사람이 하면 나쁘니 다른 좋은 분을 모시라고 했다.
소문과 함께 혼사가 있으면 평소에 소식없던 제자도 이웃반학생도 힘지어는 학년이 차이나는 선 후배도 안내해서.
그러는 가운데 첫 아들 얻기위해서는 우리 담임선생님이 주례를 해야 한다고 소문을 냈다고 웃으며 말 하는 제자도 있었다.
지내고 보니 다 좋은 일 잘 했다 싶고 그들 또한 할아버지 되고 72세로 머리가 허였게 변했고 나 또한 구십을 바라보는 처지가 되었다. 코로나로 2년이 훨씬 넘는 세월이 지나 그들이 보고 싶다.
그 들 가정이 웃음 꽃이 만발 하기를 소리없는 기도를 보낸다.
2022. 6. 1. 아침
스승 재원 이종명.